10 모임
1.일시:2018년 8월 11일 토요일 오후 다섯 시
2.장소:서면 텐스
3.함께 읽을 책:십팔사략(현대지성) 1장:3황5제의 전설시대~6장:전국시대까지
-10회 모임 제목:신화에서 역사로
-동양고전을 읽게 되는 시즌2에서는 동양고전을 읽기 위한 일종의 배경작업으로서 중국의 역사서인 <십팔사략>과 동양 고전을 소개하는 신영복의 <강의>를 나누어 읽을 예정입니다. 동양고전에 관심 있거나 읽고 싶으신 분들, 고전에 관심 있는 분들이라면 한 번 참여해보세요.^^
-나이,성별에 상관없이 누구든 참여할 수 있습니다.
-모임시에 상대방을 배려하는 마음만 있으시면 됩니다.
-함께 고전을 읽자는 마음도 필요합니다.
-참가하시고 싶으시면 쪽지로 연락주시거나 밑에 댓글을 남겨주시면
됩니다.^^

고전 독서 모임의 유효성
고전을 읽고 고전독서모임에 참여하면
-고전이 더 재미있어집니다.
-고전의 다양한 면모를 알게 됩니다.
-고전이 단지 과거의 책이 아니라 생생히 살아 있는 현재의 책이 됩니다.
-고전을 읽고 떠올린 생각들을 나누며 고전은 모임에 참가한 이들의 공유가 됩니다.
그러니 고전을 읽고 함께 모임에 참석해보아요.^^

고전 독서 모임의 목표
1.고전을 함께 읽는다.
2.고전을 통해 이 시대를 조망하는 시야를 갖는다.
3.고전을 통해 이 시대를 살아가는 힘을 얻는다.

이 목표를 가지고 함께 고전을 읽어보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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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고전함께읽기 9회 모임 후기
우리는 그동안 고대 그리스의 대화편 6편을 읽었습니다. 소크라테스의 변론, 파이돈, 크리톤, 향연, 고르기아스, 프로타고라스까지. 여기에 플라톤의 초기작이자 <소크라테스의 변론>이 나오기 바로 전 상황을 바탕으로 쓰여진 경건함에 대해 얘기하는 <에우티프론>을 읽음으로써 우리는 고대 그리스 대화편을 읽는 여정을 막을 내렸습니다. 모임에 참가하신 분들이 어떻게 생각하실지는 모르겠지만, 제 개인적으로는 이 여정이 참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이 모임이 아니라면 읽지 않을 고대 그리스 대화편을 7편이나 읽었다는 것이 정말로 대단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낯설고 힘겨울수도 있는 독서의 여정에서 포기하지 않고 여기까지 온 분들에게 수고했다는 말을 전하며, 이제 부산고전함께읽기 모임은 고대 그리스 대화편을 읽은 시즌1을 떠나 동양고전을 읽기 위한 여정에 나서려 합니다. 동양고전과 함께 하는 시즌2에서도 함께 할 수 있기를. 그리고 그 여정에서 자신만의 무언가를 발견하기를. 밑에 있는 글은 시즌1 마지막의 모임의 흔적들입니다.^^ 
 

000: 종교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종교의 기복신앙적인 부분은 비판할 수 있다. 고차원적인 종교에는 기복신앙적인 부분보다는 개개인의 발전을 위한 요소가 더 크다. 이 책에서 말하는 경건이 무속신앙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00: 쉽게 생각했지만 잘 안 읽혔다. 본질을 강요하는 소크라테스의 행동이 나랑 맞지 않는다. 경건함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다.
00: 교회를 다니는 입장에서 이 책에 나오는 종교관은 내가 생각하는 종교와 다르다고 생각한다. 자식이 부모를 고소하는 경우와 부모가 자식을 고소하는 경우에 대해서 생각해봤다. 경건함에 대해서는 심오하게 와닿지 않았다.
00: 번역된 원어를 넣어주는 부분이 흥미로웠다. 소크라테스가 펼치는 논리를 중심으로 봤다. ‘경건함에 대한 본질을 생각해보라라고 소크라테스가 질문을 던지는 것 같았다. 보는 사람에 따라서 경건함에 대한 생각이 바뀐다. 중요한 건 나의 본질이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해 보는 것이다.
00: 지겨웠다. 똑같은 것이 반복됐다. 플라톤의 기본적인 사상과 다른 부분이 있어 당황했다.
00: 절에 가라는 어머니의 강요가 싫다. 종교에 대한 회의감이 있다. 종교가 필요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종교는 착각이 아닌가.
000: 종교가 필요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00: 종교와 나라별 문화가 붙어 있는 경우가 많다. 종교인들의 모순적인 행동을 보고 그건 경건함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신에 대한 해석에 따라 종교집단의 규범이 너무 달라진다. 내가 바라본 개신교인들의 사고가 경직되어 있다고 느꼈다. 종교는 앎이다 라는 생각이 든다. 행동이 따라오지 않은 앎은 의미가 없다.
00: 경건함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존중이다. 여기에서 우러나온다는 것은 고민에서 나오는 것이다. 마음에서 우러나온다면 그 사람에겐 그것이 경건함이다.
00: 경건함은 온 마음을 다하는 것이다. 다양한 측면을 고려하고 생각해서 나오는 것이 경건함이라고 생각한다. 종교가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냐가 더 중요하다.
000: 내 자신이 믿고 있는 것에 대해서 실천할 수 있는 자세가 포함되어야 경건함이라고 생각한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받아들여 실천할 수 있어야 경건함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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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자본론을 읽어야 할 시간-이케가미 아키라

129.드롭:위기의 남자-마이클 코널리

130.내가 사모하는 일에 무슨 끝이 있나요-문태준

131.나의 문화유산답사기:일본편1-유홍준

132.나의 서양음악 순례-서경식

133.일하기 전엔 몰랐던 것들-류동민

134.이상한 정상가족-김희경

135.거의 완벽에 가까운 사람들-마이클 부스

136.프로타고라스-플라톤

137.하지 무라트-톨스토이

138.흑백의 여로-나쓰키 시즈코

139.잠깐만 회사 좀 관두고 올게-기타가와 에미

140.이제 와서 날개라 해도-요네자와 호노부

141.서스펙트-로버트 크레이스

142.새로운 계급투쟁-슬라보예 지젝

143.맹자를 읽다-양자오

144.빛나-르 클레지오

145.화이트 래빗-이사카 코타로

146.책을 지키려는 고양이-나쓰카와 소스케

147.아무도 아닌-황정은(2)

148.무너지는 제국-존 스칼지

149.은유가 된 독자-알베르토 망구엘

150.매그레와 벤치의 사나이-조르주 심농

151.마제스틱 호텔의 지하-조르주 심농

152.둠즈데이북1-코니 월리스

153.둠즈데이북2-코니 월리스

154.잃어버린 아이의 이야기-엘레나 페란테

155.헤겔의 변증법-줄리 E. 메이비

156.에우티프론-플라톤

157.권력과 교회-김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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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모임에서 제가 했던 이야기를 바탕으로 다른 이야기를 덧붙여서 한 번 적어보겠습니다.

<에우티프론> 번역에 대해서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문학 번역이 아닌 비문학 번역에 있어서 가장 중점적으로 들여다보는 것 중의 하나가 '대명사'나 대명사에 준하는 말들을 우리가 이해할 수 있게 썼냐 하는 점입니다. 대명사나 대명사에 준하는 말들을 보고 문장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면 그나마 괜찮은 번역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하지만 대명사를 보고 그 대명사가 가리키는 게 무엇인지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면 저는 기본적으로 좋은 번역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럴 경우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뭐 어떤 분은 원어에 가깝게 써서 그렇다는 말들을 하시던데, 제 개인적으로는 번역서를 읽는 이유가 '언어학 공부'를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일단 글을 읽고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다면 좋은 번역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제가 책을 읽는 이유는 언어학 공부를 위해서가 아닙니다. 제가 책을 읽는 이유는 그 책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책이 무슨 말을 하는지 제대로 알려주지 않는 번역을 어떻게 좋은 번역이라고 하겠습니까?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제 생각이긴 하지만, 알 수 없는 번역을 해놓고 원어에 가까운 번역을 했다고 하는 건 그 번역의 의미를 떠나서 제 귀에는 변명으로밖에 들리지 않습니다. 독서를 한다는 것이 언어학 공부나 언어학 세미나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누군가는 이런 독자의 태도를 보고 게으르다고 말하기도 하더군요. 뭐 게으른 독자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게으른 독자를 논하기 이전에, 일단 책이 무슨 말을 하는지 독자에게 알려주는 건 번역자의 최소한의 의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번역이라는 행위 자체에 여러 가지 의미가 포함되는 건 알고 있습니다. 번역이라는 행위 자체가 철학적, 사상적, 학문적 행위라는 사실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기본적으로 번역이 우리가 알 수 없는 말을 알 수 있게 알려주는 행위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저는 기본적으로 알 수 없는 말을 알 수 없게 알려줘놓고 여기에 학문적이고 철학적인 의미가 있다고 이야기하는 것에 쉽게 동의할 수 없습니다. 알 수 없는 언어를 알 수 없게 번역해놓고 여기에 무슨무슨 의미가 있다고 이야기하는 건, 저에게 큰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논의 자체에 의미가 없다는 건 아닙니다. 이런 논의에도 의미가 있을 겁니다. 하지만 이런 논의의 사상적 의미는 인정하지만,  저를 포함한 번역서를 읽는 다수의 평범한 사람의 관점에서 본다면 딱히 큰 의미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번역서를 읽는 소수의 독자들에게는 무언가 의미가 있겠죠.^^;;)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죠.

제가 왜 이런 말을 하냐면, <에우티프론> 번역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고전 모임에서 읽어온 책들은 천병희 씨가 번역한 책들이었습니다. 제가 천병희 씨 번역을 읽자고 한 이유는, 고전에 관심없는 이들도 충분히 읽을 수 있게 번역이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제 생각대로 고대 그리스 대화편에 관심이 없던 이들도 충분히 재미있게 잘 읽었다고 하더군요. 만약에 고전 모임을 천병희 씨의 번역이 아니라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는 번역서들을 읽었다면, 그분들이 그런 말을 할 수 있었을까요?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는데 어떻게 재밌게 잘 읽을 수 있을까요? 언어학적인 의미는 제가 하고 있는 고전모임에 큰 의미가 없습니다. 제가 하는 고전모임에서 필요한 책은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는 책이 아니라, 무슨 말인지 알 수 있는 책입니다. <에우티프론>은 천병희 씨의 번역이 없어서 서광사에서 나온 번역본을 읽었습니다. 읽고나서 깨달은 건데, 책을 읽기가 쉽지 않더군요. 예상대로 모임에서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었다거나 어렵다는 말들이 나왔습니다. 그나마 그분들이 <에우티프론>을 읽을 수 있었던 것은 우리가 모임에서 고대 그리스 대화편을 계속 읽어왔기 때문입니다. 처음부터 이런 식의 번역을 읽었다면 지금과 같은 분위기가 유지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몇 년 전에 <향연> 모임을 했다 피를 본 경험이 저의 그런 생각을 보증합니다.) 제가 바라는 것은 너무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저 읽을 수 있게 번역해달라는 것, 그거 하나입니다. 그것 하나가 어렵고 부당한 요구인가요? 그것 하나를 말했다는 이유만으로, 그런 번역을 원하는 이들이 게으른 독자 취급을 당해야 하나요? 사상적이고, 학문적인 의미로서의 번역논쟁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런 논쟁을 하시는 분들은 깨달아야 합니다. 번역서를 읽는 다수의 평범한 독자들이 그 논쟁 너머에 있다는 사실을. 그 독자들에게 그 논쟁은 큰 의미가 없습니다. 제발 부탁드리건대, 이 사실을 자각하시고 논쟁을 하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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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서평에 아주 흥미로운 댓글이 하나 달렸다.
내글을 보고 감정적이라며 거슬린다며 쥐어짠다고 적혀 있었다
그런데...
거슬린다는 말 자체가 감정적인 말 아닌가?
나보고 감정적이라는 본인 말 자체가 감정적인 글이 아닌가?
이건 마치 자신도 감정적이면서 나보고 감정적인 글을 쓴다고

비난하는 격이 아닌가?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적어도 상대방의 글에 대해서 비판을 하려면 상세하게 하는 것이

좋은 것이라고.
어디가 어떤 부분은 감정적이고

어디가 어떤 부분은 쥐어짜는 것처럼 보인다고 하면
그 글을 읽는 입장에서 아 '이 부분은 고치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할 확률이 높다고.
그런데 그런 세부사항에 대한 지적없이 
그냥 뭉뚱그려서 단정해버리는 건,
아주 평범한 인상비평에 불과해진다.
아주 평범한 인상비평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아주 평범한 인상비평은 그 평범함과

그 세밀함 없는 무신경함 때문에,
별다른 큰 의미를 주지 못한다.
그런 평범한 짧은 인상비평이 줄 수 있는 영향이란,

감정적인 영향밖에 없을 것이다.
내 기분을 나쁘게 하는.
결과적으로 글을 쓰는 이의 기분이 나빠졌기 때문에
자신의 감정을 표현한 것에 불과한 짧고 평범한 인상비평은,
댓글을 쓴 이의 비판지점에 본인 자신이 일치함을 보이는 것이 되며
자신의 비판대상과 자신의 글이 일치하는 기묘한 동일시를 이룬다.
이것은 비판하는 자와 비판받는 자의 거리를 줄이면서,
비판하는 댓글의 힘을 감소시킨다.
더 나아가 그건, 댓글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부각시킨다.
따라서, 나는 그 댓글을 무시하기로 결정했다.
어떤 세밀한 논리적 지적이나 인과관계의 오류를 밝히거나
아니면 어떤 식으로든 내 글의 문제점을 공감할 수 있게 쓴 것이 아닌 댓글이기 때문에
굳이 나의 에너지를 소비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기에.

마지막으로 나는 이 글을 씀으로서 그 댓글을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내 감정도 다 날라가버렸기에.
그 댓글의 힘이 그만큼 미약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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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7-14 12: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7-14 12: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stella.K 2018-07-14 15: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런 글이 있긴하더라구요.
논리는 없고 비난만 잔뜩 써놓은 거슬리는 글.
또 거기에 좋아요가 엄청 많이 붙는 거 보면서
그 글을 쓰는 사람도 그렇지만 좋다고 하는 사람은 뭔가
싶기도 해요.
그렇게 거슬리면 안 보면 그만인데 말입니다.
참 쓸데없는 일에 기운 빼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짜라투스트라 2018-07-16 13:20   좋아요 0 | URL
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