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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쁘고 시간도 없어, 개인책 분량을

30페이지 정도로 줄이기로 했습니다.

비겁한 변명이겠지만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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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7-11-20 11: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을 또 내신다면 버려진 30페이지의 내용을 재활용할 수 있습니다. ^^

짜라투스트라 2017-11-20 20:20   좋아요 0 | URL
노력은 해보겠습니다.^^
 

오늘 네이버 블로그를 보다가 제가 아는 블로그 이웃에 대해서 놀라움을 느꼈습니다.^^

소위 감옥에 가 계신 분을(??)을 지지하며 망상의 나래를 펼치는 분에 대해서까지

그렇게 이성적이고 지적인 대화를 이끌어가시다니...

그런 분이랑 그런 대화를 이끌어가고 거기다가 지적인 피드백을 하시다니...

저는 도저히 따라올 수 없는 인내심과 이해심을 가지신 분이더군요.

그런데 거기에 따르는 의문은

제 블로그 이웃이 하는 배려와 이해심을 그 상대방은 전혀 이해못할 것이 분명하고,

그 상대방은 제 블로그 이웃을 온갖 험한 말로 모욕을 주고 욕할 것이

뻔하다는 사실입니다.

굳이 그렇게 해야할지 잘 모르겠습니다.(어디까지나 제 생각이지만...)

어찌되었거나 제 블로그  이웃님 정말 존경스럽습니다. 이 말은 진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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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17-11-13 2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슨말씀인지 잘 이해를 못해서, 그 블로그에 직접 놀러가보고 싶네요^^

짜라투스트라 2017-11-20 20:21   좋아요 0 | URL
책 많이 읽는 제 블로그 이웃의 한 서평을 본 어느 사람이 감옥에 간 여성분 얘기를 하며 마구 제 블로그 이웃을 공격했습니다. 그걸 그분이 잘 견뎌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cyrus 2017-11-14 13: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대화가 안 되는 사람은 일절 상대하지 않습니다. 그 사람에게 좋게 설득해보고, 잘 대해줘도 내가 욕 먹으면 손해니까요.

짜라투스트라 2017-11-18 09:38   좋아요 0 | URL
네, 저도 사실은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블로그 이웃분을 보니 그것도 놀랍구나 싶네요.^^

sprenown 2017-11-14 13: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로그 이웃님은 혹시 성직자가 아니실까요? 불쌍한 영혼을 구원하려는..

짜라투스트라 2017-11-18 09:37   좋아요 0 | URL
그럴지도 모르겠네요.ㅎㅎㅎ
 

어제도 나만의 책을 완성시키기 위해 
<별의 계승자2:가니메데의 친절한 거인> 후기를 한글로 쓰고 있었다.
분명히 글을 쓰고 있었다
정말로 글을 쓰고 있었다
그런데...
정신을 차리니 어느새 1시가 지나 있었고 나는 누워 있었다.
어떻게 누웠는지 왜 누웠는지 알 수 없지만 나는 누워서 자고 있었다.
불과 컴퓨터는 커져 있었지만 쓰고 있던 글은 없어졌고, 방에 이불은 깔려 있지 않았다.
내가 자게 된 과정도 까먹을 정도로 피곤했던 것일까?
아 희미하게 기억은 난다. 한글로 썼던 글은 저장없이 지운 것 같고,
글을 지운 뒤에는 그냥 맨바닥에 누워서 잤던 것 같다.
오늘도 앉아서 글을 쓰려고 한다.
어떻게 될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오늘은 무사히 글을 마칠 수 있기를 바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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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의 인생 강의 - 낙타, 사자, 어린아이로 사는 변신의 삶
이진우 지음 / 휴머니스트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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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픽션의 형식으로 쓰여진 글입니다. 글 속에 나오는 A씨는 저라고 보시면 됩니다.^^

A씨는 여러모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일도 바쁘고, 나름대로 계획한 개인 팟캐스트 방송(잘 올리지는 않지만^^;;)이나 개인 책을 만들기 위한 노력 등으로. 오늘도 A는 컴퓨터 앞에 앉아 있다. 2017년이 끝나기 전에 책을 완성해야 하는데 날짜가 얼마 안남아 A는 어제에 이어 이틀 연속으로 글을 쓰려고. 역시 오늘도 글이 써지지 않는다. 어제에는 20번 이상 읽었던 <데미안>이라는 책을 가지고 니체의 영원회귀라는 개념을 이용해서 글을 썼는데, 평소의 A답지 않게 글이 술술 나와서 당황했다. 어 내가 이렇게 글을 쉽게 쓸 수 있다니 놀라며. 그런데 오늘은 평소와 같다. 마치 어제 내적인 배터리의 에너지를 다 써서 더 이상 글을 쓸 역량이 없는 것처럼.  어쩔 수 없이 A는 여러 가지 방법을 써본다.

첫번째. '김광석이라는 가수는 인생의 어느 시절마다 갑자기 찾아와서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낸다. 군대갈 때는 '이등병의 편지'가 다가온다. '집 떠나와 열차 타고 훈련소로 가던 날/ 부모님께 큰절하고 대문밖을 나설 때/ 가슴속에 무엇인가 아쉬움이 남지만/ 풀 한 포기 친구 얼굴 모든 것이 새롭다/ 이제 다시 시작이다 젊은 날의 생이여~' 군대에 들어갈 날이 얼마 안남은 청년들이 이 가사를 보고 어찌 마음이 흔들리지 않겠는가. '서른 즈음에'는 어떤가. '또 하루 멀어져 간다/ 내 뿜은 담배연기처럼/ 작기만한 내 기억속에/ 무얼 채워 살고 있는지/ 점점 더 멀어져 간다/ 머물러 있는 청춘인줄 알았는데/ 비어가는 내 가슴속에/ 더 아무것도 찾을 수 없네/ 계절은 다시 돌아오지만/ 떠나간 내 사랑은 어디에/ 내가 떠나온 것도 아닌데~' 서른을 앞둔 청춘들이 이 가사를 듣고 어떻게 마음이 뒤흔들리지 않겠는가. 아직 경험한 적은 없지만 '어느 60대 노부부 이야기'도 60대에 들어서면 분명히 큰 감정의 흔들림이 있을 것이다. 니체는 김광석과 반대다. 니체의 사상은 어느 특정 시점에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니체의 말을 받아들일 수 있고 수용할 수 있다면 성별과 나이를 가리지 않고 보편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김광석과 달리 니체를 보편성의 사상가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여기까지 쓰고 A는 더 이상 글을 쓸 수 없음을 깨닫는다. 뒤에 쓸 글들이 떠오르지 않아서. 자신이 쓴 글을 들여다보니 갑자기 화가 치민다. 김광석과 니체라니 이 무슨 개풀 뜯어 먹는 소리란 말인가. A는 자세를 가다듬고 생각을 더듬어 글을 쓰기 시작한다.

두번째. '대학 시절 친하게 지내던 친구와의 관계 때문에 모 기독교 동아리 수련회를 따라갔다. 한때 기독교였지만 기독교를 떠났던 나는, 다시 기독교인이었던 과거로 돌아가는 경험을 했다. 기도, 찬송가와 가스펠, 몸짓과 춤 등등. 여러가지 다양한 경험을 했는데 그 중에서 '철학적'인 것과 연관이 있는 경험이 있다. 기독교 동아리의 대표 목사격인 인물이 연설을 하는데 갑자기 '니체'를 언급하며 그를 비판했던 것이다. 그때 이미 니체의 책들을 읽었던 나는 그의 비판의 맥락을 이해할 수 있었다. '신은 죽었다'는 말을 그는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비판의 맥락을 이해하자 나는 나 자신이 이곳에서 이방인이라는 생각을 하며 나 자신과 이곳의 분위기를 따로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소격효과' 같은 경험을 하며 나는 이 수련회를  객관적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다시 뒤에 글이 떠오르지 않는다. A의 분노는 이전보다 더욱 더 강하게 차오르기 시작한다. 과거의 경험을 늘어놓다가 뜬금없이 니체를 말하다니 뭐하는 짓이지. A는 길길이 날뛰고 싶다. 참을 수 없는 분노 속에서 그는 광기에 사로잡혀 글을 쓰기 시작한다.

세번째. '나는 말이다. 비록 '히히힝'은 하지 않지만, 나는 말과 다름없는 존재다. 니체가 끌어안고 울부짓던 그 말. 자신의 삶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고, 자신의 본능과 마부가 이끄는 대로 존재하는 말과 같은 존재인 나는 나 자신의 삶에 의문 따위를 제기하지 않고 살아왔다. 사는 대로 살다보니 여기까지 왔고, 여기까지 오고 나니 더 이상 삶에 어떤 의미도 느껴지지 않는다. 여기까지 왔다면 이제 죽는 것밖에 남지 않지만 죽고 싶지는 않다. 죽고 싶지 않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고민 끝에 니체를 바라다본다. 말을 끌어 안고 울부짖는 그 니체를. 미친 그를 보니 내가 미쳐야 겠다는 생각이 든다. 미쳐야 세상을 새롭게 살 수 있을 것 같다. '히히힝'하고 외치자. 외치고 나를 말로서 인정하고 말이지만 더 이상 말이 되지 않는 삶을 꿈꾸자. 거기서는 '히히힝'이야말로 마법의 단어일 것이다.'

당연하게도 글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는다. A의 광기가 지속되지 않기 때문에. 정신 차린 A는 자신이 쓴 글을 보고 자신이 '진짜 미쳤었구나'라는 생각을 한다. 미치지 않고서야 이 따위 글을 쓰겠는가. 글을 못 쓸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즈음에, A는 어떤 깨달음을 얻는다. 잠깐 내가 썼던 글 세 가지는 <니체의 인생 강의>에 나오는 낙타, 사자, 어린아이와 대응할수도 있다는. 첫번째 글의 김광석은 사는 대로 살다가 느끼는 삶의 무게와 연결된다. 자신의 삶의 무게를 알아차리지만 묵묵히 살아가는 낙타와 같은 삶의 형태로서 '김광석의 노래들'과 이어진다는 말이다. 두번째 글은 사자의 모습과 연결된다. 기존의 가치를 부정하며 새로운 세계를 만들기 위해 나아가는 사자의 모습은, 수련회에서 하라는 대로 따라하다 니체에 대한 비판을 듣고 수련회를 객관적으로 바라보기 시작하는 나의 모습에서 그 씨앗이 들여다보인다. 세번째 글은 어떤가. 광기에 사로잡힌 A는 광기의 순수한 유희로서 말인 자신의 존재 자체를 긍정하는 새로운 형태의 어린아이로서의 삶을 시작한다. '히히힝'을 외치며. 비록 글을 다 못써서 실패한 어린아이에 그쳤지만.

깨달음은 A를 기쁘게 한다. 무한히 반복되는 삶으로서의 무한회귀에 지쳤던 그가 그 무한회귀하는 삶을 무한한 긍정의 자세로 새롭게 창조함으로써 무한히 반복되는 새로운 삶으로 바라볼 수 있는 가능성을 열었기 때문에. 기쁜 그는 춤을 추기 시작한다. 사유의 춤과 몸의 춤을 함께. 네 운명을 사랑하라는 니체의 가르침을 되뇌며. 춤추다 A는 거울을 들여다본다. 거기에는 니체가 말인 자신을 껴안고 울부짖는 모습이 보인다. 더 자세히 들여다보니 울부짖는 니체의 얼굴 아랫부분이 슬며시 미소를 짓고 있다. 아! 저거다. 저것이 '인간의 위대함에 대한 내 정식은 아모르 파티, 운명애다. 앞으로도, 뒤로도, 영원토록 다른 것은 갖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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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1-02 14: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11-02 22: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번 이상의 반복과 1번의 사랑

'영원한 회귀란 신비로운 사상이고, 니체는 이것으로 많은 철학자를 곤경에 빠드렸다. 우리가 이미 겪었던 일이 어느 날 그대로 반복될 것이고 이 반복 또한 무한히 반복된다고 생각하면! 이 우스꽝스러운 신화가 뜻하는 것이 무엇일까?
뒤집어 생각해 보면 영원한 회귀가 주장하는 바는, 인생이란 한번 사라지면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기 때문에 한낱 그림자 같은 것이고, 그래서 산다는 것에는 아무런 무게도 없고 우리는 처음부터 죽은 것과 다름없어서, 삶이 아무리 잔혹하고 아름답고 혹은 찬란하다 할지라도 그 잔혹함과 아름다움과 찬란함조차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
그래서 영원한 회귀라는 사상은, 세상사를 우리가 아는 그대로 보지 않게 해 주는 시점을 일컫는 것이라고 해 두자. 다시 말해 세상사는, 세상사가 덧없는 것이라는 정상참작을 배제한 상태에서 우리에게 나타난다. 사실 이 정상참작 때문에 우리는 어떤 심판도 내릴 수 없다. 곧 사라지고 말 덧없는 것을 비난할 수 있을까? 석양으로 오렌지 빛을 띤 구름은 모든 것을 향수의 매력으로 빛나게 한다. 단두대조차도.(참을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p.9~10)

'세계의 관점이 아닌 우리들의 관점에서 영원회귀는 하나의 선택[의지]을 요구한다. 세계 속에 존재하는 하나의 사물로서 우리 역시 생성과 소멸의 반복하는 운동 속에 있지만, 그럼에도 우리 자신이 구체적으로 그것을 선택함으로써 건강한 변신을 이루는 것은 중요하다. 니체는 살아 있는 우리 자신이 영원회귀를 능동적으로 택하는 것이 좋은 것(도덕적 의미의 선한 것과는 다르다)임을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영원회귀에 대한 우리의 선택[의지]은 우리 자신 안에, 그리고 세계 안에 예전부터 존재하고는 있었지만 단지 잠재적 형태로만 그러했던 새로운 존재들을 현실화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든 사물들과 더불어 거대한 '우주 교향곡'을 공연하는 연주자이다. 우리를 통해서, 세상에 있었지만 한 번도 연주된 적이 없던 하나의 멜로디가 울려퍼질 수 있다면 그것은 멋진 일이 아닐까.(니체의 위험한 책,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p.280)

20번 이상의 데미안 독서. 하나의 책을 20번 이상이나 읽는다는 건, 니체의 영원회귀와 같은 무한한 반복을 경험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누군가의 입장에서는 지겨움과의 사투와도 같은 20번 이상의 독서를 한다는 건, 어떤 각오를 포함하고 있다. 지겹지만 지겹지 않게 읽겠다는 각오. 그건 니체가 말한 영원회귀를 대하는 태도와 이어진다. 무한한 반복을 지겨움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매순간마다 무한한 긍정의 계기로 받아들이겠다는. 내가 의식적으로 니체와 같은 철학적 자세를 유지했던 것은 아니다. 읽고 읽고 또 읽고를 반복하다 보니 나도 모르게 매순간의 독서를 다르게 받아들이게 됐다. 반복 끝에 도달한 반복 아닌 무한한 새로움의 창조. 똑같은 글들을 매순간 새롭게 받아들인다는 건, 반복을 넘어섰다는 것과 같다. 아니, 반복을 반복스럽게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말이자 반복을 반복같지 않게 받아들인다는 말일 것이다. <데미안>은 내게 ‘반복 아닌 반복’의 대명사처럼 여겨진다. ‘반복 아닌 반복’이기에 나는 겁내지 않고 틈만나면 <데미안>을 펼쳐 읽는다. ‘내 속에서 솟아 나오려는 것. 바로 그것을 나는 살아보려고 했다. 왜 그것이 그토록 어려웠을까.’ 내 속에서 솟아 나오려는 것을 살아보려고 했던 이야기, 자기 자신을 찾아 나선 이야기, 자기 안에 모든 것이 들어있다는 사실을 알아나가는 이야기, 완전한 자기 자신을 바라보려고 노력한 이야기... 똑같지만 다른 무수한 이야기들 속을 헤매다보면 나 자신을 들여다볼 수밖에 없다. 이야기를 따라 나를 들여다보면 깜짝 놀라게 된다. 내 안에 무수히 많은 ‘나’들이 있어서. 무수히 많은 나들을 만나다 다시 책을 보면 알을 깨고 날아가는 새의 형상이 보인다. 책을 읽을 때마다 나 자신이라는 알을 깨는 경험을 한 기분이다. 깨고 깨고 또 깨고. 무수히 많은 나 자신을 감싼 알껍질들을 깨고 보니 예전의 나는 사라진 것 같다. 시간이 지난 만큼 나도 변화해 왔고, 그 시간과 함께 계속해서 <데미안>을 읽다보니 생겨난 변화의 흐름을 반영했다고 할까. 어느새 나와 싱클레어는 하나가 되었다. 하나가 된 ‘우리’를 연결시키는 건 ‘사랑’의 감정이다. 처음 만났을 때 느꼈던 나를 허물어뜨린 사랑의 감정. 그때 나는 싱클레어를, 데미안을, 베아트리체를, 에바부인을, 아프락사스를, 소설 <데미안>을 너무나 사랑하게 되어 이 사랑이 계속되리라는 운명을 느겼다. 무수히 반복되는 독서 속에서도 나를 지탱하는 건 그 사랑의 감정이다. 20번이 넘는 반복은 1번의 사랑이 무한히 지속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 사랑은 나를 데미안 속에서 살게 하고, 싱클레어와 하나 되게 만든다. 벗어날 수 없는 무한의 열병 같은 사랑 앞에서 나는 무력하게 패배를 선언하고 다시 <데미안>속 ‘데미안’을 들여다본다. 나와 완전히 닮아 있는, 내 친구이자 나의 인도자인 데미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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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renown 2017-11-01 11: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20번 이상의 데미안 독서. 하나의 책을 20번 이상이나 읽는다.. 대단합니다! 좋은 책은 이렇게 읽어야 하는데..

짜라투스트라 2017-11-01 11:32   좋아요 1 | URL
아 어떻게 하다보니 그렇게 되네요^^

cyrus 2017-11-01 12: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20번의 독서도 대단하지만 그 반복적인 독서 후에 느낀 생각을 글로 정리하느라 수 차례의 퇴고를 거쳤을 짜라투스트라님의 글쓰기가 더 대단합니다. ^^

짜라투스트라 2017-11-01 22:02   좋아요 1 | URL
아 감사합니다.^^ 그냥 제 생각을 글로 쓴 건데 너무 좋게 봐주셨습니다.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