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의 오늘은 최악이었다. 내일은 오늘보다 더 나쁠지도 모른다. 그것을 알면서도 그대의 청춘은 내일을 준비한다. 그것이 인생이라는 나그네의 길임을  그대는 알고 있기 때문이다. 지상에서는 그대의 곤한 육신을 편히 쉬게 해줄 수 있는 안식의 땅이 없음을 그대는 알고 있기 때문이다.』

 

쇼펜하우어는 인생은 아름답다고 말해주지 않는다. 인생은 태어나지 않는 것이 최선이다. 만약 태어났다면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게 차선이라고 늘 입 버릇처럼 말했다고 전한다. 그런 그가 1831년 베를린에 콜레라가 퍼졌을 때 목숨을 위해 베를린을 떠난다. 그 일로 평생 사람들로부터 웃음거리가 되어서 이후에는 자신의 철학 강의를 사람들 앞에서 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런 모순된 행동을 보였음에도 쇼펜하우어의 책을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찾는 이유는 아마도 그의 비관적인 이야기들 속에 "의지"라는 희망을 동시에 이야기해 주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우리가 상대방을 배려하지 않고 내 고집만 부리는 원인은, 나보다 훌륭한 사람을 만났을 때 그를 시기하고 어떻게든 깎아 내리려고 고집을 피우는 원인은 자의식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상대방의 시선으로 나를 보기 때문이다. 자의식이 결여되었다는 것은 나와 나의 관계가 온전히 성립되지 못했다는 뜻이다. 나와 나의 관계가 온전하지 못하면서 다른 사람과의 관계가 온전해지기를 바란다는 것은 욕심이며, 허영이며, 교만이다. 사람들이 원하는 나로 평생을 살 수는 없다. 사람들의 눈높이에 나를 맞추려는 데서 모든 불행은 시작된다. 나는 어쩔수 없이 나다. 내가 나를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면 사람들도 나를 부끄러워하지 않게 될 걸이다.』

 

우리는 왜 그렇게 상대방의 시선에 비친 '나'가 중요한 것일까? 일상생활에서도 남에게 내 모습이 어떻게 보이는지에 대해서 넘쳐나가 신경 쓴다. 자기만족이 중요한 사람이 있기도 하지만 '남의 만족'을 위해서 더 많이 우리의 모습을 껴 맞춰 가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타인에게 쉽게 이리저리 영향받을 때도 있다. 쇼펜하우어의 말처럼 나는 사람들이 원하는 나로 평생 살 수 없다. 내가 중심이 아닌 남들이 중심되어버린다면 온전한 나의 행복은 결코 만들어내낼 수 없다. 불행의 시작이 되는 것이다. 스스로가 본인의 가치와 신념을 가지고 남을 대할 때 대화와 행동을 통해서 상대방은 그 사람을 주체적인 그 자체의 존재로  분명 느낄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도로시의 마무리>

쇼펜하우어는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가 있음을 믿고 살아가는 사람은 눈에 보이는 세계만을 믿는 사람과 인생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마음' '신념' '의지' 등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자신 말이 느낄 수 있다. 눈에 보이진 않지만 충분히 존재함을 안다. 그러한 믿음이 확고하다면 시간ㅇ 지남에 따라 분명히 '눈에 보이는' 그 무엇이 되어 내 앞에 나타날 수도 있을 것이다. 

쇼펜하우어가 가장 강조하는 것은 "의지"이다.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의지'이며, 우리가 인생이 두려운 까닭은 이것을 믿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그는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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