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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34
밀란 쿤데라 지음, 이재룡 옮김 / 민음사 / 2009년 12월
평점 :
싸이월드 기록을 보니 이 책에 대한 리뷰가 없다. 2004년부터 시작해서 도합 5번은 읽었다. 이유는 잘 모르겠으나 이 책이 너무 좋았다. 멋있어보이기도 했고 이해할 수 없는 문장들을 읽어내니 마치 내가 뭐라도 된 것 같았다. 2004년 신입생 때 교양으로 불문학 관련 뭔가를 들었는데 이 책을 교재로 읽으라 했고, 레포트도 써서 냈던 것 같다. 그 수업에서 `프라하의 봄`도 봤고.. 무슨 정신으로 어떤 내용을 레포트로 썼는지 너무 궁금하다. 이 소설의 묘미는 간간히 필자가 등장한다는 점이다.
# 그리고 나는 다시 한번 이 소설 첫머리에서 내게 드러났다 그의 모습을 본다. 그는 창가에 서서 건너편 건물 벽을 바라보고 있다. 그는 이 이미지에서 탄생했다. 이미 말했듯 소설 인물들은 살아 있는 사람들처럼 어머니의 육체에서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하나의 상황, 하나의 문장, 그리고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았거나, 본질적인 것은 여전히 언급되지 않았지만 근본적이며 인간적 가능성의 씨앗을 품고 있는 은유에서 태어난다. 그러나 작가란 자기 자신 이외의 것은 말할 수 없다고들 하지 않는가? 마당에서 무기력하게 바라보며 아무런 결정도 내리지 못하는 것. 사랑이 고조된 순간 자기 배 속에서 끈질기게 꾸르륵거리는 소리를 듣는 것, 배신하고 또한 이토록 아름다운 배신의 길 중간에서 멈출 수 없는 것. 대장정 행렬 속에서 주먹을 치켜드는 것. 등 나도 직접 이런 상황을 겪어 보았다. 그러나 내 이력서 속 자아로부터 그 어떤 인물도 도출되지 않았다. 내 소설의 인물들은 실현되지 않은 나 자신의 가능성들이다. 그런 까닭에 나는 그들 모두를 사랑하며 동시에 그 모두가 한결같이 나를 두렵게 한다. 그들은 하나같이 내가 우회하기만 했던 경계선을 뛰어넘었다. 나는 바로 이 경계선에 매혹을 느낀다. 그리고 오로지 경계선 저편에서만 소설이 의문을 제기하는 신비가 시작된다. 소설은 작가의 고백이 아니라 함정으로 변한 이 세계에서 인간 삶을 찾아 탐사하는 것이다. 자, 이제 그만하자.
신형철이 좋은 소설은 소설가가 그 캐릭터를 창조해내는 것이 아니라 캐릭터가 글을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했던 기억이 난다. 이 부분이 가장 길게 필자가 등장한 부분인데, 주인공들이 은유에서 태어난다는 말이 너무 멋지게 들렸다. 레포트를 쓸 때 네 명의 주인공들을 `가벼움`과 `무거움`쪽으로 분리를 해서 인생과 사랑에 대해 써내려갔던 것 같다. 근데 그 당시 니체도 모르고, 영원회귀사상이 뭔지도 몰랐으며 프라하의 역사적 상황같은건 무지한 상태였는데 뭘 썼을까. 뭐 이걸 안다고 잘 쓸리는 없지만.
소설의 1부 중 1장.
# 영원한 회귀란 신비로운 사상이고, 니체는 이것으로 많은 철학자를 곤경에 빠뜨렸다. 우리가 이미 겪었던 어느 날 그대로 반복될 것이고 이 반복 또한 무한히 반복된다고 생각하면! 이 우스꽝스러운 신화가 뜻하는 것이 무엇일까? 뒤집어 생각해 보면 영원한 회귀가 주장하는 바는, 인생이란 한번 사라지면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기 때문에 한낱 그림자 같은 것이고, 그래서 산다는 것에는 아무런 무게도 없고 우리는 처음부터 죽은 것과 다름 없어서, 삶이 아무리 잔혹하고 아름다고 혹은 찬란하다 할지라도 그 잔혹함과 아름다움과 찬람함조차도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중략) 그래서 영원한 회귀라는 사상은, 세상사를 윌가 아는 그대로 보지 않게 해주는 시점을 일컫는 것이라고 해 두자. 다시 말해 세상사는, 세상사가 덧없는 것이라는 정상참작을 배제한 상태에서 우리에게 나타난다. 사실 이 정상참작 때문에 우리는 어떤 심판도 내릴 수 없다. 곧 사라지고 말 덧없는 것을 비난할 수 있을까?(중략) 이러한 히틀러와의 화해는 영원한 회귀란 없다는 데에 근거한 세계에 존재하는 고유하고 심각한 도덕적 변태를 보여준다. 왜냐하면 이런 세계에서는 모든 것이 처음부터 용서되며, 따라서 모든 것이 냉소적으로 허용되기 때문이다.
1부 중 2장.
# 우리 인생의 매순간이 무한히 반복되어야만 한다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혔듯 영원성에 못 박힌 꼴이 될 것이다. 이런 발상은 잔혹하다. 영원한 회귀의 세상에서는 몸짓 하나하나가 견딜 수 없는 책임의 짐을 떠맡는다. 바로 그 때문에 니체는 영원 회귀의 사상은 가장 무거운 짐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영원한 회귀가 가장 무거운 짐이라면, 이를 배경으로 거느린 우리 삶은 찬란한 가벼움 속에서 그 자태를 드러낸다. 그러나 묵직함은 진정 끔찍하고, 가벼움은 아름다울까?
영원회귀 사상이 철학자들을 곤경에 빠뜨렸다면, 소설의 1장, 2장의 질문이 나를 곤경에 빠뜨렸다. 가벼움과 무거움은 무엇을 말하는걸까? 부터 질문을 시작한다면 무거움은 테레사, 가벼움은 토마시로 은유된다. 내가 해석한 바로 굳이 답을 찾자면, 가벼움이 긍정이고 무거움이 부정이고를 이분법적으로 나눠 결론을 내리지 않았다. 가벼움을 상징했던 토마시가 무거움으로 변하는 모습을 그려냈기때문. 그리고 영원회귀사상을 대입한 인생에 대한 태도는 카네린에게서 드러낸다.
# 카레닌이 개가 아니라 인간이었다면 틀림없이 테레자에게 오래전에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이봐, 매일같이 입에 크루아상을 몰고 다니는 게 이제 재미없어. 뭔가 다른 것을 찾아줄 수 있겠어?˝ 이 말에는 인간에 대한 모든 심판이 담겨 있다. 인간의 시간은 원형으로 도지 않고 직선으로 나아간다. 행복은 반복의 욕구이기에, 인간이 행복할 수 없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그렇다, 행복은 반복의 욕구라고 테제라는 생각한다.
그래서 한 때는 ˝행복은 시간의 원형 속에 있다.˝ 라는 말을 내 인생 모토로 두기도 했었다. 최근에 니체에 꽂혀 영원회귀를 외쳐대면서 또 한번 우리의 인생은 언젠가 다시 살 것이므로 지금을 열심히, 소중하게 살아야한다! 라고 하지만, 나는 개가 아닌지라 내 시간은 직선으로 내달리고 있는 것 같다. 우리 부장님과 이런 얘기들을 잠깐 나눴었는데 , 이런 소통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 이런 메세지를 끊임없이 일깨워주는 책이 있다는 것을 위로 삼아 오늘을 잘 살아야겠다. 이제 출근 날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어쩌겠냐 살아내야하는 것을!!!
* 이 책은 접힌 페이지가 워낙 많아, 전부 필사할 수 없었는데 아마 시간이 지나서도 다시 또 읽을 책일듯 싶다. 왜 자꾸 이 책을 다시 읽게 되는지는 나도 알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