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엔 이 책에서 다루는 소재가 낯설어서 진도가 잘 나가지 않았는데, 이제 좀 익숙해졌는지 진도가 잘 나간다. 책 표지에서 어느정도 예상해볼 수 있긴 했는데, 석고로 본을 뜨는 작업을 하는 것이 나온다. 내가 미술을 전공한 사람이 아니기에 전문 용어로 이걸 뭐라고 지칭하는지 까지는 정확히 모르겠으나, 그냥 이야기를 쭉 따라 읽어나가다보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어느정도 적응이 된 건지 익숙해진 느낌이다.

이 책에 나오는 화자는 이 석고로 본뜨는 작업을 하는 미술가(?) 혹은 예술가(?) 라고 할 수 있고, 소설 속에 등장하는 L이라는 인물은 이 석고 본뜨기 작업의 대상으로 나온다. 근데 여기서 한 가지 특이하다고 볼 수 있는 것은 이 L이라는 인물이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모델의 외형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엄청나게 뚱뚱한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L은 날때부터 뚱뚱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과거에 있었던 어떤 사건으로 인해 식욕이 갑작스럽게 폭증하여 뚱뚱해진 사람이었다. 반면 L과 함께 다니는 O라는 친구는 외모가 나름대로 괜찮았었던 것 같다. 그래서였는지 L은 O와 함께 다니다가 주변 사람들로부터 비교를 많이 당하기도 하는 등 이래저래 마음의 상처가 많아보였다.

이러한 L에게 화자는 묘한 매력을 느꼈는지 처음에는 L의 손을 석고로 본뜨는 작업을 같이 하기로 했고 나중에는 L의 전신을 석고로 본뜨는 작업까지도 하게 된다. 이 작업을 통해 L과 화자는 둘만이 가질 수 있는 친밀감을 느끼게 된다.

그러던 어느날 갑자기, L은 자신이 좋아하는 남자가 생겼다고 화자에게 말하면서 이제부터 다이어트를 하겠다는 말과 함께 더이상 화자와 석고 본뜨는 작업을 함께 하지 못하겠다고 말한 뒤 홀연히 떠나버린다.

하지만 이것도 그리 오래가진 못했다. L은 몇 년 뒤 기진맥진한 상태로 화자와 마주치게 되는데, 그간 그래도 다이어트를 하긴 했는지 살이 빠지긴 했지만, 예전에 화자가 봤던 L의 행복한 모습은 온데간데 없고 무언가 불행해보였다는게 화자의 설명이었다.

나중에 알고보니 L은 다이어트를 할 때 자신이 먹은 것들을 억지로 토해내어 속을 게워내는 식으로 무리하게 다이어트를 하다가 몸에 무리가 온 것이었다. 아무리 날씬한 몸매를 위해 다이어트를 하는 것이 좋다고 하더라도 건강한 방식으로 진행해야지, L처럼 몸을 무리하게 하는 방식은 장기적으로 봤을 때 요요가 올 가능성이 높아보인다. 실제로 소설 속에서도 L은 자신이 요요가 왔다고 화자에게 말하는 장면도 나온다.

오늘 처음 밑줄친 문장은 L과 화자가 대화하던 중에 나온 말인데, 일상 생활 상식으로라도 알아두면 도움이 될 것 같아 밑줄쳐보았다.




























토한 다음에 바로 이 닦으면 안 된대. 뭐라더라. 위산이 치약하고 합쳐져서 이빨이 상한다나. - P155

"내가 먹는 게 아니구, 음식이 날 먹는 것 같아요. 난 그냥 정신없이, 미친 듯이 삼켜지는 거예요. 머리가 날아가버리고 없는 것 같아. 다 사서 먹기까지 한 시간도 걸리구, 두 시간도 걸려요. 어떨땐 대낮에 야구 모자를 눌러쓰고, 약속 장소로 갈 때까지 길거리에서 먹은 적도 있었어요." - P155

참을성을 다해 굶다가, 무서운 식욕이 덮쳐오면 먹구 토했죠. 위액이 나올 때까지 완전하게 토하니까 살이 빠졌어요. - P159

기대할 필요 없는 걸 기대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어. - P160

"시작이란 말이 난 무서웠어. 차라리 끝이란 말이 더 가깝고 편했어요, 나한텐." - P162

"너한테는 타인이 그렇게 중요하구나."
"그럼요, 당연하죠. 다른 사람들 없이 내가 살 수 있어요? 순전히 나만의 생각이란 게 무슨 소용이 있어요?" - P164

"그래, 네 말이 맞다. 하지만 봐. 네가 태어나면서 이 세상이 있다는 걸 알았잖니. 네가 죽으면, 다 끝나는 거지."
그녀는 볼멘 목소리를 높여 투덜거렸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말아요. 내가 죽어두, 이 세상은 잘만 돌아갈거잖아요."
"그러니까, 너 없이 돌아갈 그 세상이라는 게 너한테 무슨 의미라는 거지?"
"내 참!" - P164

오랜 시간 동안 그녀는 기름지고 단 음식에 대한 갈망과 거부감, 죄의식을 함께 가지고 있었고, 그 때문에 폭식 충동이 몰아닥칠 때면 오히려 그런 음식들만을 찾게 되는 것 같았다. 일주일에 하루는 그런 음식들을 마음껏, 즐겁게, 천천히 먹어준다면 폭식을 예방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겠냐는 것이 그녀 자신의 아이디어였다ㅡ그때쯤 그녀의 증세는 그만큼 이성적이었다ㅡ. - P165

"그게 어디가 됐건 자기 몸에 성스러운 것을 가졌다는 건, 수호신을 가진 것과 같은 거 아닐까." - P168

"아침 식전에 유산소 운동을 해야 지방이 분해된대요." - P169

"배가 고프다는 게 이렇게 기분좋은 건지 몰랐어요." - P169

대략 석 달쯤이, 기형적인 대사 작용이 정상화되는 데 필요한 시간인 모양이었다. - P169

미치는 게 얼마나 간단한 건지 사람들은 몰라. - P177

"내가 진짜 참을 수 없는 건, 그 새끼가 아니야. 지금까지두 그새낄 못 잊고 있는 엄마도 아니야. 내가 정말로 증오하는 건, 내 병신 같은 모습...... 그렇게 병신같이 당하구 있었던, 나중엔 반항도 안 하구, 다 포기하구, 어디 신고할 생각도 못 하구, 비겁하게 가출도 못 하구...... 그래요, 내가 진짜 용서할 수 없는 건, 바로 나야..... 그렇게 몇백 번을 당해도 쌌던...... 나." - P177

넌 단지 어렸을 뿐이다. 비겁해서가 아니라, 너무 어렸을 뿐이다. - P177

다시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 P1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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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작년 초 무렵에 유현준 작가의 책을 집중적으로 읽었던 기억이 있다. 그때 건축이라는 것에 대해 조금이나마 알게 되었고, 세상을 바라보는 또다른 눈이 생긴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던 기억이 있다.

시간이 좀 흐른뒤 오늘 읽기 시작하는 이 책은 저자가 그나마 가장 최근에 새롭게 내놓은 것이다. 물론 출간 날짜 상으로는 시간이 좀 지나긴 했지만 예전부터 저자의 생각이 또 얼마나 진화했는지를 보고 싶다는 개인적인 마음때문에 읽고 싶은 책에 담아두었다가 오늘에서야 드디어 처음 시작해볼 수 있게 되었다.

본격적으로 읽기 전에 대략적인 목차들을 살펴본 바로는 예전에 내가 읽었던 내용들이 다소 중복되는 것도 꽤나 있어 보이지만, 마지막 챕터인 17장에 나오는 스마트 시티 같은 것은 시대의 흐름에 발맞춰 저자가 추가한 내용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설령 중복되는 내용들이 있더라도 예전에 읽었던 기억들을 다시금 회상해본다는 생각으로 시작해본다.

건축은 관계를 디자인한다 - P5

지구상의 무수히 많은 다양한 생명체들은 DNA라는 설계도로 만들어진다. 그 다양한 DNA는 모두 아데닌(A), 티민(T), 구아닌(G), 시토신(C) 이라는 네 가지 종류의 염기로만 구성되어 있다. A, T, G, C 네 가지 염기의 조합 순서와 패턴이 바뀌면서 다양한 생명체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건축도 마찬가지다. 수천 년 동안 엄청나게 다양한 건축물이 있어 왔지만, 이들은 모두 벽, 창, 문, 바닥, 지붕,
계단 같은 몇 개 안 되는 요소로 구성되어 있다. 이 요소들의 크기와 재료와 조합의 패턴이 다를 뿐 기본 구성 요소는 동일하다. 그리고 그렇게 요소들이 조합되어 만들어진 공간은 그 공간 안에 있는 사람들의 관계를 규정한다. - P6

벽은 사람 사이를 단절시키고, 창문은 사람 사이를 시각적으로 연결하며, 문이나 계단은 둘 사이를 오갈 수 있는 관계로 만든다. 또한 기울어진 바닥은 사람의 행동을 한 방향으로 쏠리게 하고, 평평한 바닥은 사람의 행동을 자유롭게 하고, 지붕은 지붕 아래에 있는 사람을 하나의 공동체로 묶는다. 건축은 이렇게 ‘관계의 망‘을 구성한다. 그리고 그 관계성은 더 확장되어 건물 내부 사람과 건물 외부 사람들의 관계도 포함하고, 사람과 자연의 관계도 규정한다. 스케일이 더 커지면 도시 속사람들의 관계, 더 나아가 우리 사회 구성원들의 관계를 결정한다. 건축은 그렇게 사회를 구성해 왔다. 이 책은 건축 공간이 만드는 관계가 어떻게 사회를 진화시켜 왔는지 보여 줄 것이다. - P6

한자로 인간은 ‘人(사람인)‘에 ‘間(사이 간)‘을 사용한다. 공간은 ‘空(빌 공)‘에 ‘間(사이 간)‘을 사용한다. - P6

인간은 공간을 만들고 그 공간은 다시 인간을 만든다. 그렇게 인류는 공간과 함께 ‘공진화共進化‘해 왔다. - P7

‘망치를 든 사람에게는 모든 게 못으로 보인다‘ - P7

언어를 사용하는 인간을 ‘호모 로퀜스‘라고 부른다. ...(중략)... 직립 보행하는 인류를 ‘호모 에렉투스‘라고 부른다. ...(중략)... 손으로 도구를 만들어 사용하는 인간을 ‘호모 파베르‘라고 부른다. ...(중략)... 놀이와 유희를 즐기는 인간을 ‘호모 루덴스‘라고 부른다. ...(중략)... ‘공간‘을 잘 이용해서 발전하고 진화한 인간이라는 뜻의 ‘호모 스파티움Homo spátium‘이다. ‘스파티움‘은 공간을 뜻하는 라틴어다. ‘호모 스파티움‘을 번역한 ‘공간 인간‘이 이 책의 제목이다. - P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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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개인적으로 지난 몇 달간 한강 작가님의 책을 연속해서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알게 된 책이다. 어떤 내용이 나올진 아직 알 수 없지만, 그간 읽어왔던 작가님의 작품들에서 느껴왔던 전반적인 분위기나 감정에서 딱히 크게 벗어날 것 같진 않아 보인다. 그럼 시작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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쭉 읽어나가다가 소제목 중에 ‘진실‘이라는 제목을 가진 글이 하나 나온다. 여기서 화자가 말하는 진실이라는 것에 대한 깨달음이 나오는 부분이 있는데, 뭔가 되게 의미심장하게 느껴졌다. 여기 나오는 에피소드를 잠시 언급하자면 한 집에 같이 사는 고모가 독립하기 위한 자금을 모으기 위해 일해서 번 돈을 이불 틈새에다가 숨겨두는 장면을 우연히 화자가 보게 되는데, 몇 일 후에 그 돈이 감쪽같이 없어지자 고모는 화자가 돈을 훔쳐갔을 것으로 단단히 오해하고 온 가족을 소집한 뒤 화자를 집중적으로 추궁해서 진실이 아닌 자백을 받아낸다. 근데 실제로는 화자가 돈을 훔친 것이 아니었음에도 분위기에 못 이긴 나머지 하지도 않은 도둑질을 자백한 것이었다. 나중에 시간이 조금 지나고 알고보니 진짜 범인은 화자가 아닌 화자의 누이였던 것으로 밝혀졌다. 화자의 누이는 결국 화자에게 사과하면서 이 에피소드는 마무리된다.

화자는 이 사건(?)을 겪으면서 진실이라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에 대한 생각을 진지하게 해보게 되는데, 본문에 나온 화자의 깨달음이 굉장히 철학적이라는 생각이 들어 밑줄쳐보았다. p.62에 밑줄친 것인데, 언제든지 다시금 곱씹어보며 생각해봄직한 깨달음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이 부족할 때 사물들의 형상은 조금 기이해 보인다. 두뇌 회전이 둔해지는 대신, 정신이 멀쩡할 때는 모르고 지냈던 어떤 부위가 자극되며 낯설고 강렬한 감각을 느끼기도 한다. - P9

라이프캐스팅이라면 석고를 부어 떠내는 작업을 말한다. 이를테면 데드마스크를 뜨는 방식이다. - P11

나는 착각한 것이다. 저것은 석고상을 자른 형상이 아니었다. 저것은, 저 안에서 한 육체가 방금 빠져나온 형상이었다. 석고상의 바깥 면이라고 생각했던 거친 윤곽선은 육체를 감싸고 있던 껍질이었다. 윤곽 내부의 선이 부드럽고 섬세한 인체의 굴곡을 고스란히 도치하여 드러내고 있다는 것이 그 증거였다. - P16

저것은 그 껍데기들을 감싸고 있던 또 하나의 껍데기였다.
껍데기를 품었던 껍데기. - P16

그의 눈에 어린 완전한 고요는 내면의 평화가 아닌지도 모른다고, 알 수 없는 무시무시한 것 위로 덮어놓은 얇은 막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고, 나는 그때 막연히 생각했던 것 같다. - P22

왜 내 삶의 가운데는 텅 비어 있는가. - P30

이제부터 내가 쓰려는 것이 무엇인지 나는 모른다. 그러나 이것만은 알고 있다. 이 기록은 결코 그 ‘왜‘에 대한 대답이 아니라는 것을.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까우리라는 것을. - P30

하얀 탈바가지.
웃고 있는, 딱딱한 탈바가지. - P37

사람이 착하다는 것이 무엇인지 나는 아직 잘 모른다. - P43

조용한 말씨가 더 무서울수 있다는 것을 나는 그때 처음 알았다. 더 위력적이고, 더 잔인하다는 것을. - P47

나는 용기 있는 아이가 된 건가, 비겁한 아이가 된 건가? 끝까지 결백을 주장하는 것이 더 용기 있는 행동이었을까? 그러나 그것이 오직 나만 알고 있는 진실이라면, 나 말고는 아무도 만족하지 못하는 진실이라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가? 가령, 내가 오늘 밤 죽기라도 한다면 흔적도 없어져버리는 것이 진실 아닌가? - P59

진실이란, 저렇게 추한 것이로구나. - P60

나는 머리의 피가 아래로 쏠려 내려가는 것을 느꼈다. 고모가 그랬듯이 나는 가족들의 얼굴을 차례로 둘러보았다. 그들 중의 누구라 한들, 나는 그 사람에게 적의를 품을 수 없었다. 단지 그는 나와 똑같이 비겁했을 뿐이다. 나와 똑같이 거짓을 말했을 뿐이다.
그날 저녁 나는 그 누군지 모를 사람의 거짓을 미워하지 않았다. 오로지 고모의 뻔뻔스럽기 짝이 없는 진실만을 환멸했다. 그 쓴 환멸을 나는 안경알 속에 숨겼다. - P61

내가 알게 된 것이란 진실이란 내가 조절할 수 있는 영역이라는거였다. 실제로 무슨 일이 나에게 일어났고 내가 무슨 감정을 느끼는가는 중요하지 않았다. 일어난 상황에 가장 잘 맞는 행동을 하고, 그러고 나서 나에게 남은 감정의 찌꺼기들은 내가 처리해야 한다. 인내한다거나, 잊어준다거나, 용서한다거나. 어쨌든 내가 소화해낼 수 있으며ㅡ소화해내야만 하며ㅡ결국 내 안에서 진실이란, 존재하든 존재하지 않든 아무런 차이가 없었다. - P62

누이의 참혹한 참회는 불필요한 것이었다. 그것만이 내 마음을 아프게 했다. 그후 나는 의식적으로, 무의식적으로 누이와 같은 사람들을 가까이하지 않기 위해 노력해왔다. 진실을 믿기 때문에 깊이 상처 입으며 쉽게 회복되지 않는 종류의 사람들. 그들의 삶은 나에게 소모적으로 느껴진다. 나로 말하자면, 착한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과 똑같이 진실이 무엇인지 아직 모르고 있다. - P63

......진실에는 용기가 필요한 거다. - P67

......남을 속일 수는 있어도 자신을 속일 순 없는 거다. - P67

철저하게 안경 뒤로 나는 나를 가렸다. 가리지 않으면 버림받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추방되고 영원히 손가락질당하리라는 것을 알았다. 맨얼굴의 나를 보였다면, 미숙한 어린아이답게 행동했다면, 내가 정성과 지혜를 다해 빚은 탈 속에서 끊임없이 탐색하고 긴장하지 않았다면, 나는 결코 사랑받거나 칭찬받을 수 없었을 것이다. 나는 끊임없이 노력했다. 좋은 성적을 얻었고 순종적이었고 누구보다 야무졌다. 그 결과 누구에게도 버림받지 않았다. - P68

더 이상 자신을 방어할 수도 은폐할 수도 없는 것. 그것이 그때 내가 알게 된 죽음이라는 것이었다. - P73

사무적인 얼굴의 장의사가 그의 몸을 염습하는 동안 나는 그의 손가락이 잘린 자리를 뚫어지게 내려다보았다. 진실은 불쌍한 것이었다. 저렇게 누추한 것이었다. 대대로 고이 물려받아온 보물이 실은 10원 한 장의 가치도 없는 가짜였다는 것을 알게 된 것처럼 나는 허전했다. - P74

속았다.
나도 속았고 그도 속았다.
대체 저게 뭐였단 말인가? 다만 잘린 손가락일 뿐인 것을 두고, 그는 침묵 속에서 그토록 결사적인 곡예를 펼쳤던가. - P74

손은 제2의 얼굴이다. 손의 생김새와 동작을 관찰하면 그 사람이 얼굴 뒤로 감춘 것들의 일부를 느낄 수 있다. 마치 나름의 인격을 가진 독자적인 생명체처럼 손은 움직이고, 떨고, 감정을 발산한다. - P77

선량한 얼굴을 한 사람이 무엇인가에 집중할 때, 가장 밑바닥에 가라앉아 있는 진실이 드러난다. 근본적인 조심성, 숨죽임, 떨림 같은 것. 그 떨림에서 나는 처음 그녀를 보았을 때 감지했던 슬픔을 읽었다. 깊숙이 가라앉은, 그래서 일상 속에서는 전혀 드러나지 않는, 그저 착한 마음으로만 읽힐 뿐인 고통의 흔적이었다. 짓눌림, 혹은 스스로 짓누르는 어떤 것. - P82

내가 남과 다르게 보고 생각한다는 것은 스스로 잘 알고 있었다. 남들이 모두 진짜라고 생각하는 것을 집요하게 의심했고, 남들이 모두 만족하는 것들에 만족하지 못했으며, 남들이 전혀 아름답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했다. 보이고 들리고 냄새를 풍기고 만져지는 모든 것들의 안쪽을 꿰뚫어보기 위해 나는 안간힘을 썼다. - P83

무엇인가가 내 감정의 전극을 건드릴 때 나는 그것을 아름답다고 느낀다. 정신이 번쩍 들고, 혈관들이 살아나며, 때로 누선이 자극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렇게 내 마음을 건드리는 것들은 보통의 사람들이 말하는 아름다움과 같을 때보다 다를 때가 더 많았다. 이상하다고 일컬어지는 것, 모두가 꺼리는 것일 때도 있었다. - P84

애정이란 그렇게 쓸쓸한 것이다. 한순간 강렬하게 찾아들지만, 의지할 만한 물건은 못 된다. 곧 변형되고 때로는 퇴색되며 영영 휘발되어버리기도 한다. - P85

중학교에 들어가 처음 맞은 조소 시간에 내가 빚고 싶었던 형상은 손이었다. 거머쥔 주먹을 빚어, 죽음보다 더한 것이 찾아온다해도 그 안에 든 것을 드러내지 않을 강한 악력을 불어넣고 싶었다. 내가 만들고 싶었던 것은 결코 탄로나지 않는 비밀, 결코 진실이 새어나오지 않는 껍질이었다. - P86

조각의 어떤 점을 좋아하느냐고 누군가 물어오면 나는 간단히, 손을 믿을 수 있기 때문이라고 대답하곤 했다. 두 손으로 뼈대를 세우고 흙을 주무르는 순간만은, 모든 것의 껍질을 꿰뚫어보기 위한 집요한 긴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다. 열띤 신체적 몰입을 필요로 하는 그 예민한 작업을 나는 사랑하고 있었다. 결국 나는 내가 빚어내는 삼차원의 견고하고 육체적인 형태들을 통해서만 간신히 이 세상과 연결되어 나가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나에게 조각이란, 해독할 수 없는 생의 비밀들을 두 손으로 빚어냄으로써 마치 그것들을 체득한 것처럼 느끼게 하는 일종의 최면요법 같은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 P88

손이 또 다른 얼굴, 또하나의 독립된 몸이라는 것을 그때쯤 나는 알고 있었다. 사람이 살아 있을 때 손은 독자적으로 살아 있으며, 사람이 죽을 때 손은 손으로서 자신들의 죽음을 맞는다는 것을 알았다. - P88

수지침의 교재에서는 손이 인체의 축소판이라고 가르친다. 중지의 끝마디에 얼굴이 그려져 있고 손바닥에는 장기들의 부위가 표시돼 있다. 손등은 등허리, 손목 부위는 항문과 회음이다. - P89

혀와 눈이 달린 얼굴과는 달리 손은 정확한 말을 하지 않는다. 말하려 하지만 말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가리려 하지만 역시 다 가리지 못한다. 얼굴보다 위험하기도 하지만, 어찌 보면 얼굴보다 교묘한 탈이다. 말할 필요가 없으므로 얼버무릴 필요도 없다. 침묵하면 그만이다. 정지해 있으면 그만이다. - P89

나는, 만족한 표정과 제스처 뒤로 불안을 숨기고 있었다. - P89

내 작품들에는 어쩔 수 없이 ‘내‘가 배어 있었다. 최대한 절제하여 숨겼음에도 드러나는 나의 감정, 노력, 나의 개인사를 나는 읽었다. 그것은 마치 내 발치에 누운 내 시체를 똑똑히 내려다보는 악몽과도 같았다. 누군가 그 손들을 일일이 펼쳐 내 손금을 읽을 것 같았다. 내 삶의 텅 빈 중심을 들여다보고 말 것 같았다. - P89

‘솜씨‘만으로 모든 것을 가릴 수는 없었다. 그러나, 가리려 한다면 무엇 때문에 작품을 제작하는 것인가? 침묵하면 그만 아닌가. 손을 멈추고 있으면 그만 아닌가. 보여주면서도 집요하게 숨기고자 한다는 것은 어떤 모순인가. - P90

이 세상에서, 난 외계인과 다를 바 없구나. - P95

아무리 위대하고 아름다워 보이는 이들도 언젠가는 병이나 죽음, 혹은 이익과 체면이 걸린 사소한 문제 앞에서 치명적인 약한 면들을 드러내고 만다는 걸 나는 알고 있었어. 안쓰러워 보일 만큼 속물적이던 이들도 어느 순간에 이르러 자신만의 고귀한 면모를 드러내는 걸 목격하기도 했지. - P96

오로지 직접 사람들을 관찰한 뒤에 갖게 되는 결론만을 나는 믿었어. 멀리서 오래 보는 것도, 가까이서 잠시 보는 것도 쓸모없었지. 다만 끈기 있게, 직접 들여다보는 것만이 유효했어. 가까운 이가 고백하는 험구나 칭찬들도 곧이듣거나 맞장구치지 않았어. 마찬가지로 어떤 인쇄된 경구와 진리도 내가 체득하기 전에는 의심했지. - P96

"......처음부터 이랬던 건 아녜요." - P100

"나두 처음부터 괴물이었던 건 아녜요." - P101

"웃음이란 게 얼마나 웃기는 가짠지, 사람들은 모르니까." - P117

마음의 변화란 누구에게나, 언제건 일어나게 마련이다. 오히려 영원히 나에게 집착하는 편이 더 괴로울 것이다. - P120

그리움은 시간과 함께 차츰 엷어졌다. 특정한 이미지, 강렬했던 기억들만을 남겨놓고 사소한 디테일은 거의 잊혀졌다. 시간이 더 지나자 그 특정한 기억들과 이미지마저 조금씩 흐릿해졌다.
시간이란 그런 것이다. 기억의 살과 내장을 조금씩 조금씩 썩게 만들고, 흔적을 없애며, 마침내 흰 뼈 몇 줌만 남게 만든다. - P126

그래, 속력,
나는 생각했다.
속력이 변했다. - P128

추궁한다는 것도, 변명한다는 것도 피곤하고 쓸쓸하구나. - P144

"농담하는 거 아니다. 가깝게는 내 미대 동기 중에도 죽은 애가 있었어. 요즘 드물지 않은 병이야. 마리아 칼라스, 카렌 카펜터 애긴 너무 케케묵었지." - P144

"그래, 내 돈 버는 거 죄다 먹는 데루 간다. 등록금두 못 모았구 버스비만 겨우 남아. 젠장할. 그래봤자 내 돈이야. 내 돈 내가 쓰는거야. 죽어두 내가 죽구 아퍼두 내가 아퍼. 알아들어? 가만히 내버려두란 말이야! 날 좀 내버려둬!" - P145

그런 거였다. 상처가 채 아물기 전에 또 목구멍으로 손을 밀어넣은 것이다. 다름아닌 그녀의 이빨이 다시 자신의 손을 찢고, 붉은피와 함께 식도 아래의 모든 것이 뒤집혀 나왔다. - P145

내 건조한 기질이 도움이 되는 때도 있는 것이다. - P150

식이 장애의 가장 비참한 종말은 심장 마비다. 일체의 음식을 먹지 못하는 거식증이든, 초인적인 양의 음식을 먹고 토하는 폭식증이든 최종적 위험의 수위는 비슷하다. - P151

달리다가 심장이 멎고 싶다면, 그렇게 하렴. 목숨과 바꾸어도 좋은 것이 너에게 있다면, 그것도 좋은 일이다. 힘으로 막는다면 너는 더 힘차게 튕겨져 나오겠지. 울부짖는 용수철처럼, 너는 꼭 그렇게 하겠지. - P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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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권에서 북산고의 주장인 채치수는 리바운드 경합을 하다가 그만 불의의 부상을 당해 경기에서 잠시 빠지게 되었었는데, 발목이 돌아가서 통증이 심하게 있음에도 불구하고 해남대부속고와의 시합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기에 일단은 급한대로 간단한 응급처치만 하고나서 다시 코트로 돌아온다. 오늘 처음 밑줄친 문장은 다시 돌아온 북산고 주장 채치수가 팀원들에게 파이팅을 불어넣는 장면에서 나온 말이다. 이러한 파이팅이 같은 팀원들의 사기를 북돋아주기에 그 영향력은 단순한 몇마디 말로 표현할 수 없을만큼 크다고 할 수 있겠다.




우리는 강하다!! - P10

마지막에 웃기 위해 죽을 힘을 다해 플레이 해라! 모두들!! - P32

간신히 잡은 찬스를 절대 놓치고 싶지 않아!! - P33

빌어먹을! 언젠가는 쓰러뜨리고 말겠어. 너희를...!! - P42

더 연습해!! 개인연습을 하지 않으면 실력이 향상되지 않아!! - P42

이기고 싶지 않단 말야?! - P43

전력으로 너희를 쓰러뜨리겠다...!! - P48

언제라도 나갈 수 있게 준비해둬요.... - P60

・・・ 정신이 육체를 초월하기 시작한 건가...?! - P65

점점 날 타오르게 하는구나!! - P65

골에 대한 끝없는 집념!! - P74

승리를 향한 굶주림이다. - P74

간신히 여기까지 왔다!! 절대 질 수 없어!! - P77

지지 않아!! - P77

가슴 깊이 숨겨놓은 투지 - P96

진정한 슈터는 연습에 의해서만 만들어진다!! 끝없는 반복 연습만이 슛의 성공률을 높일 수 있다!! - P98

신준섭은 그때부터 하루 500개의 슛연습을 거른 적이 없다!! - P98

해남은 다른 어떤 팀보다도 많은 연습을 하는 팀이다!! 그리고 그 중에서 스타팅 멤버를 따낸 선수들은 그야말로 피나는 노력을 반복해 왔다!! - P101

절대 방심하지 마라!! - P101

조금 이르지만 이젠 어쩔 수 없군요. 승부를 걸겠어요. - P105

10점 차를 지금부터 따라잡기 위해서는 모험을 할 수밖에 없어요. - P110

마지막까지 포기하면 안 돼!! - P115

현내 넘버원을 뛰어넘어 줄 테다!!! - P142

가라! - P143

갈수록 힘이 나는 모양인데!! - P154

괜히 사람들 흉내내 봤자 들어갈 것 같지도 않아! 그보단 이렇게 던지기 쉬운 포즈로 잘 겨냥해서 던지는 편이 들어갈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내 경우엔!! - P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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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책들을 읽다보니 이 책은 거의 열흘만에 다시 읽게 되었다. 오늘 처음 밑줄친 부분에서는 개업에 관한 얘기가 나오는데, 이 부분을 읽으면서 개인적으로는 일단 자신이 개업이든 혹은 다른 뭐가 됐든 간에 무엇인가를 하겠다는 판단이 섰다고 한다면, 가급적 빠른 시일 내에 일단 시작을 하는 것이 맞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자의 말처럼 망설이다가는 그나마 남아있던 기회들마저 날아가버리기 때문이다. 또한 설령 예상치 못한 상황을 만나게 되어 실패를 하더라도 빨리 털고 다른 것을 시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혹여나 지나치게 신중한 나머지 아무것도 하지 않은채 고민만 계속한다면 소위 경제학에서 말하는 기회비용이 눈덩이처럼 점점 커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물론 경우에 따라서는 가만히 있는 것도 한 가지 전략이 될 수 있겠으나, 만약 할까 말까 고민되는 상황이라면 일단은 최선을 다해서 해보는 게 좀 더 나은 선택인 듯하다. 자신이 하려는 것이 합법적인 범위 하의 행동이라는 전제 하에, 아예 안해보고 후회하는 것보다는 해보고 후회하는 게 낫지 않을까 싶다.


결정을 미룰수록 개업 후 잡을 수 있었던 여러 기회를 놓칠 가능성이 큽니다. 개업 전에는 인지조차 하지 못하거나 간과했던 사안들이 실제로는 사업에 여러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개업 후에야 깨닫기 때문입니다. - P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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