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시간 후면 아마는 얼어붙을 거다. 2월이 올 때까지 썩지 않을 거다. 그러다 맹렬히 썩기 시작한다. 깃털 한줌과 구멍 뚫린 뼈들만 남을 때까지. - P156
이 섬의 동굴들은 입구가 작아요. 한 사람이 겨우 드나들 정도니까 돌로 가려놓으면 감쪽같은데, 안으로 들어갈수록 놀랄 만큼 커집니다. 1948년 겨울엔 한마을 사람들이 모두 들어가 몸을 피한 곳도 있어요. - P158
아버지와 내가 가곤 했던 동굴은 그만큼 크지는 않았어요. 많아야 여남은 사람이 몸을 피할 수 있을 정도. - P158
공기가 항상 축축했던 기억이 나요. 동굴에 들어가기 직전엔 늘 비나 눈을 맞았던 것도. 맑은 날씨가 기억나지 않는 걸 보면 아버지는 낮은 기압에 반응했던 것 같습니다. 눈비가 오면 관절이나 근육이 아픈 사람들처럼. - P159
속솜허라. 동굴에서 아버지가 가장 많이 했던 말이에요. - P159
숨을 죽이라는 뜻이에요. 움직이지 말라는 겁니다. 아무 소리도 내지 말라는 거예요. - P159
감기 들리면 안 돼여. 정신 바짝 차리민 아프지 않을 수 이서. 정말로 멩심해야 돼여. - P160
밤낫이 어신 거라이. 군사작전이라는 건. - P160
어멍이 기다릴 건디. 내가 어멍이라는 말을 뱉은 순간 아버지의 몸 전체가 움찔 떨리는 걸, 전류가 옮겨온 것처럼 느낄 수 있었어요. 그러니까 우릴 따라와서야 해신디. - P160
어떵할 수가 이시냐. 억지로 끄성 올 방법이 어디 이시냐. 아이를 살려사주. 이 아이가 무신 죄가 이서. - P160
그 순간 그의 머릿속에 스쳐가고 있었을 상상들의 내용을 몰랐지만, 절망적인 결론에 다다를 때마다 내 손을 잡는다는 걸 알 수 있었어요. 그의 몸에서 배어나온 조용한 전율이, 빨래를 쥐어짜는 순간 쏟아지는 물처럼 손을 적시는 걸 느꼈어요. - P161
동서로 긴 타원의 섬 지도가 화면에 떠올랐다. 1948년 미군 기록물이라는 자막 위로, 해안선에서부터 오 킬로미터를 표시하는 경계선이 두드러진 굵기로 그어져 있었다. 한라산을 포함하는 그 안쪽 지역을 소개疏開하며, 해당지를 통행하는 자를 폭도로 간주해 이유 불문 사살한다는 내용의 포고문이 자막으로 이어졌다. - P161
놀라울 만큼 노이즈 없이 선명한 흑백 무성 영상이 뒤따라 들어왔다. 초가지붕들이 불탔다. 검은 연기가 불꽃과 함께 하늘로 치솟았다. 검이 장착된 장총을 멘 옅은 색 제복의 병사들이 현무암 밭담을 뛰어넘었다. - P161
어둠이요.
어둠이 거의 기억의 전부예요. - P161
어둠 속에서, 다른 손으로 내 입을 틀어막을 준비를 하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잠결에라도 내가 소리 내지 않게 하려고, 언제 그 굴 앞을 지나갈지 모를 존재들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 P162
동굴로 가다가 눈이 내리기 시작하면 아버지가 조릿대를 꺾었어요. - P162
나한테는 앞장서 가라고 하고, 아버지는 바닷게처럼 옆걸음을 걸어서 나를 따라왔어요. 두 사람의 발자국을 조릿대 잎으로 쓸어 지우면서. - P163
더이상 길이 없는 산속으로 접어들면 나에게 등을 내밀어 업히라고 하고, 그때부턴 당신의 발자국만 쓸어내며 비탈을 올랐어요. 업힌 채로 나는 발자국들이 사라지는 걸 똑똑히 지켜봤어요. 마술 같았어요. 매순간 하늘에서 떨어져내리는 사람들처럼, 우린 단 한 점의 발자국도 남기지 않으며 걷고 있었어요. - P163
언젠가 어머니가 말한 적이 있어요. 느네 아방이 소나이다워시민 아마 내가 싫어실 거라. 처음 봐신디 소나이 얼굴이 얼마나 곱닥하던지. 십오 년을 햇빛을 못 봐난 그래나신가. 살갗이 버섯같이 히영했주게. 그런 사름을 다들 피하는 게 잘도 이상해서. 죽었던 사름이 돌아온 것추룩. 눈초리 한 번만 섞어도 귀신을 옮길 사름인 것추룩. - P164
내 손에서 귤을 건네받으며 아버지는 반쯤 웃었어요. 마치 두 세계를 사는 사람 같았어요. 한 눈으로는 나를 보고 다른 한 눈으론 내 몸 너머 다른 빛을 보는 것같이, 어두운 방인데도 부신 듯이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올려다봤어요. - P165
깜박 잠들었다 통증 속에 깰 때마다 뼈들의 희끗한 형상이 파고든다. 인선의 마지막 영화가 끝나기 직전, 유골 수백 구가 묻힌 구덩이가 맥락도 설명도 없이 일 분 가까이 클로즈업되었던 장면이다. 무릎을 구부려 올린 사람의 유골, 삭은 천조각이 허리에 걸쳐진 유골, 작은 발뼈에 고무신이 신겨진 유골 들이 밭고랑 같은 구덩이 속에 포개져 있었다. - P167
차가웠지. 아니, 부드러웠지. 나는 고쳐 중얼거린다. 돌같이 단단했지. 입술을 뗄 때마다 피에 젖은 얼굴이 소리 없이 입을 벌린다. 아니, 솜같이 가벼웠지. - P168
숨을 다시 쉴거지. 아마. 심장이 다시 뛸 거지. 그렇지, 이 물을 마실 거지. - P170
새들이 건강해 보이는 건 믿을 수 없어, 경하야. 끝까지 고개를 들고 횃대에 매달려 있다가, 떨어지면 이미 죽은거야. - P171
부서질 듯 문과 창문들이 덜컹거린다. 바람이 아닌지 모른다. 정말 누가 온 건지도 모른다. 집에 있는 사람을 끌어내려고. 찌르고 불태우려고. 과녁 옷을 입혀 나무에 묶으려고. 톱날 같은 소매를 휘두르는 저 검은 나무에. - P172
죽으러 왔구나, 열에 들떠 나는 생각한다. 죽으려고 이곳에 왔어.
베어지고 구멍 뚫리려고, 목을 졸리고 불에 타려고 왔다. 불꽃을 뿜으며 무너져 앉을 이 집으로. 조각난 거인의 몸처럼 겹겹이 포개져 누운 나무들 곁으로. - P172
왜 가지가 없어, 잎도 없어. 무시무시한 대답이 목구멍 안에서 도사리고 있었다. 죽었잖아. 그 말을 삼키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퍼덕이는 새가 목구멍을 비집고 올라오는 통증을 견뎠다. 다 죽었잖아. 부리를 벌리고 발톱을 세운 그 말이 입안에 가득찼다. 꿈틀대는 솜 같은 그걸 뱉지 않은 채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 P176
온다.
떨어진다.
날린다.
흩뿌린다.
내린다.
퍼붓는다.
몰아친다.
쌓인다.
덮는다.
모두 지운다. - P177
어둑한 마루를 빛의 기둥으로 훑어보다 숨을 멈췄다. 새가 우는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창백한 광선의 기둥이 관통한 새장 속에서, 횃대에 발을 걸고 앉은 새가 한번 더 삐이, 울었다. 아마. 갈라져 나온 내 목소리가 정적 속에 흩어졌다. 너는 죽었잖아. - P179
새가 돌아오는 것은 불가능했다. 내가 감싸고 여민 손수건을 비집고, 친친 감아 매듭지은 실을 풀고, 귀를 맞춰 닫은 알루미늄 통을 열고, 수건으로 감싼 뒤 십자로 묶었던 실을 끊는 것은. 얼어붙은 봉분과 그 위로 쌓인 눈을 뚫고 날아올라, 잠긴 문 안으로 들어와 철망 속이 횃대에 앉는 것은. - P180
새들에게 간식이 아닌 식사를 줄 때는 반드시 새장에서 먹게 해야 한다고 인선은 말했었다. 그러지 않으면 새장으로 들어가려 하지 않게 되고, 제시간에 재울 방법이 없게 되며 결국 모든 규칙이 깨진다는 거였다. - P182
네 생각을 많이 했어. 인선의 목소리에 나는 눈을 들었다. 그녀도 그 바람구멍 속을 보고 있었다. 하도 생각해서 어떤 날엔 꼭 같이 있는 것 같았어. - P190
우리 프로젝트 말이야. 미소 띤 얼굴로 나를 돌아보며 그녀는 주전자에 생수를 부었다. 생각해보니 내가 제목을 묻지 않았어. 나는 대답했다. 작별하지 않는다. 주전자와 머그잔 두 개를 양손에 들고 걸어오며 인선이 되뇌었다. 작별하지 않는다. - P192
작별인사만 하지 않는 거야, 정말 작별하지 않는 거야? - P192
미루는 거야, 작별을? 기한 없이? - P193
잔에서 입술을 뗀 인선과 눈이 마주쳤을 때 나는 생각했다. 그녀의 뱃속에도 이 차가 퍼지고 있을까. 인선이 혼으로 찾아왔다면 나는 살아 있고, 인선이 살아 있다면 내가 혼으로 찾아온 것일 텐데. 이 뜨거움이 동시에 우리 몸속에 번질 수 있나. - P194
나는 더 차를 마셨다. 위가 뜨겁게 채워질수록 수그렸던 어깨가 펴지고 허리가 곧아졌다. - P195
가로등도 이웃도 없는 집에서 말이야. 눈이 내리면 고립되고 전기와 물이 끊기는 집 말이야. 밤새 팔을 휘두르며 전진해오는 나무가 있는 곳, 내 하나만 건너면 몰살되고 불탄 마을이 있는 곳 말이야. - P195
혼자가 아닌데, 나는. 고요한 사랑의 빛이 그녀의 얼굴에 어리는 것을 나는 보았다. - P196
하지만 모든 게 끝난 건 아니야. 인선의 목소리가 그 열기 사이로 번졌다. 정말 헤어진 건 아니야, 아직은. - P197
오늘 우리 몸이 닿지 않았다는 것을 그때에야 나는 알았다. 오랜만에 만나면 언제나 서로 어깨를 안았다. 이게 얼마만이야, 어떻게 지냈어, 인사를 나누는 동안엔 손을 잡고 있었다. 오늘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거리를 두고 있었나. 몸이 닿는 순간 상대의 죽음에 전염될 것처럼. - P198
인선이 성큼성큼 앞장서는 대로 나는 뒷문을 향해 걸었다. 그녀의 발이 디딘 곳으로만 걸으니 신기하게도 어떤 나무에도 부딪히지 않았고 피를 밟지도 않았다. - P199
아마는 잠들었을 거야. 깨우지 말자. - P200
새 그림자가 흰 벽 위로 소리 없이 날고 있었다. 예닐곱 살 아이의 몸피만큼 커진 그림자였다. 꿈틀거리는 날개 근육과 반투명한 깃털들의 세부가 확대경을 통과한 것처럼 선명했다. 이 집에 존재하는 광원은 내 앞의 촛불뿐이었다. 저 그림자가 생기려면 촛불과 벽 사이로 새가 날고 있어야 한다. - P203
몇 초 만에 가버릴 때도 있고, 날이 밝을 때까지 머무르기도 해. - P204
헝겊들이 서로 스치는 것 같은, 젖은 흙덩이가 손가락 사이로 부서지는 것 같은 소리가 어디선가 새어나왔다. 인선의 것과 닮은 소리였다. 지금 내 곁에 있는 그녀가 아니라 서울의 병실에 누운 인선이 손이 아니라 성대를 다친 듯 목을 울리지 않으며 내던 무성음과 어딘가 흡사했다. - P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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