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읽는 부분은 ‘질주‘라는 제목의 단편 소설이다. 이 제목은 소설 속 주인공인 인규라는 인물이 달리기를 할 때 쾌감을 느낀다는 소설 속 설정에 근거하여 지어진 제목인듯 보인다. 왜 그런지는 뒤를 더 읽어봐야겠지만 말이다. 이와는 별개로 여기 나오는 인규라는 인물은 손톱이 으스러질정도로 주먹을 꽉 쥐는 습관이 있었는데, 이는 인규의 아픈 가정사(史) 때문이었다.

인규에게는 다섯살 터울의 진규라는 친동생이 있었는데, 자세한 사정까지는 알 수 없지만 이 동생이 또래 친구들 여러명에게 집단구타를 당해 그만 죽어버린 일이 있었다. 그리고 이에 앞서 인규의 친아버지는 무슨 영문인지 농약을 마시고 죽었다고 한다.

이러한 비극으로 인해 인규의 어머니는 얼마후 새로운 사람을 만나서 결혼을 하게 되는데, 보통 이런 경우 기존에 있던 자식(인규)과 새 아빠(의붓아버지) 간의 관계가 좋기는 여간해서는 쉽지 않다. 실제로 이 소설 속에서도 인규는 사회생활을 할 나이가 되자 집에서 나와 회사에서 제공하는 독신자 숙소로 들어간다.

소설 속 인규의 가정사가 얼추 이렇다보니 인규는 마음 속에 복수심과 원망, 분노 등과 같은 감정이 내재해 있을 수밖에 없는 캐릭터였던 것이다.

이러한 감정을 가지고 있던 인규는 어느날 친동생 진규를 구타했던 아이들에게 복수하기 위해 나름대로 계획을 세운뒤 그 계획을 실행에 옮긴다. 가장 약해보였던 아이부터 시작해 가장 쎄보이는 아이까지 한 명 한 명씩 복수를 해나간다. 인규는 모든 복수가 끝나고 난 뒤 끝났다는 후련함도 느꼈지만 어느순간부턴가 점점 비정해져가고 있었다. 단지 몇마디 말로 표현하기는 힘든 복합적인 고통의 감정을 느낌과 동시에 인규는 살다보면 언젠가는 이런 감정을 느끼게 되는 순간들이 올 수밖에 없을 거라고 자신을 위로한다. 처음 밑줄친 문장이 인규의 마음을 대변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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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주‘에 이어서 나오는 작품은 ‘진달래 능선‘이라는 제목의 단편 소설이었다. 여기서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정환‘이라는 인물은 어딘가 모르게 위에서 언급한 인규라는 캐릭터와 일부 비슷한 구석이 있어보였다. 열악한 가정 환경에 대한 불만으로 어린 시절 집에서 도망쳐 나온 것이다. 수많은 고생 끝에 정환은 다시 자신이 살던 고향의 가족들을 찾아나서기로 하는데, 그 과정 역시 결코 만만치 않다. 하지만 정환은 희망의 끈을 쉽게 놓치고 싶어하지 않는다. 오히려 무모하게 보일지라도 그것을 끝까지 붙들려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런데 여기서 안타까운 건 그 희망의 끈을 절대 놓치지 않으려는 정환의 태도가 점점 더 정환의 육신을 지치게 한다는 것이었다.

한편 이 소설에는 이러한 정환의 태도와는 정반대의 모습을 보이는 한 사람이 나오는데 바로 정환에게 세를 준 집주인 황씨라는 사람이다. 이 황씨라는 사람도 정환과는 약간 다른 종류이긴 하지만 마음아픈 기구한 사연이 있었다. 황씨에게는 아내와 딸 그리고 아들이 있었는데 딸이 심장병을 앓고 있었고 어느날 아내는 성한 아들을 데리고 집을 나가버렸다고 한다. 황씨는 아내와 아들을 찾기 위해 노력도 해보았지만 그 사이 딸의 심장병이 위급해졌고 이로인해 병원 치료비로 재산을 다 까먹었다고 한다. 더 안타까운 것은 병원비는 병원비대로 들었지만 결과적으로 딸을 살려내지는 못했다는 점이었다. 이후 황씨는 지독한 절망에 빠졌다고 한다.

독자인 나는 정환과 황씨의 태도를 자연스럽게 비교하면서 볼 수밖에 없었는데, 이 두 사람의 삶을 대하는 태도가 마치 자석의 N극과 S극처럼 지극히 대비된다는 것을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약간의 결이 다를 수는 있겠으나 둘 다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한 쪽은 어떻게든 희망을 보려 애쓰지만 다른 한 쪽은 체념에 가까운 절망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모습을 보인다.

개인적으로 예전에 읽었던 작가님의 다른 작품들을 보면서 들었던 생각 중 하나는 비록 삶이라는 것이 고통스러울지라도 어떻게든 살아나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물론 고통을 가급적 마주하지 않고 살 수 있다면 좋겠지만, 살다보면 고통의 순간을 피할 수 없는 시간들이 있기 마련이다. 그럴때 그 시간을 견뎌 나가기 위해 가져야할 바람직한 태도는 과연 무엇일까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비록 힘들지만 어떻게든 희망을 보려는 정환같은 태도일까 아니면 그냥 에라 모르겠다하고 모든 것을 체념하는 황씨의 태도일까. 물론 선택은 각자의 몫이다.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품는다는 건 비록 육신의 고통은 있겠지만 정신적으로는 조금이나마 편안해질 수 있을 것이다. 반대로 절망에 빠져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비록 육신은 편할지 모르지만 정신 건강에는 썩 좋지 않을 것이다.

위에서 정환과 황씨의 태도를 나름대로 비교해보았는데, 여기서 누군가가 나에게 둘 중 어떤 태도를 선택할지를 물어본다면 난 정환의 태도를 선택할 것 같다. 사람이 마음이 편하면 몸이 좀 힘들어도 그 육신의 고통을 인내해나갈 수 있지만 그 반대의 경우, 즉 육신은 편하지만 마음이 힘든 것은 정말 견디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소위말하는, 사람이 정신적으로 미쳐버리는 상황이 되면 이거는 어떻게 손을 쓸 수가 없는 것이다. 지금 이 글을 쓰면서 다시금 느낀다. 정신이 건강해야 진짜 건강한 거라는 것을 말이다. 물론 육신의 건강이 어느정도 기본적으로 받쳐준다는 전제하에 하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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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에 나오는 내용을 좀 더 읽다보니 황씨의 행동을 재평가할만한 지점을 발견하게 되었다. 황씨가 정환에게 하는 말 중에 자신이 나뭇가지를 태우는 것은 너무 일찍 세상과 작별한 딸이 있는 곳으로 나뭇가지를 보내기 위한 행동이라는 얘기가 나온다. 그러면서 딸이 있는 곳에 나뭇가지가 자라고 꽃이 피는 봄이 오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자신이 여기서 나뭇가지를 태우고 있다고 말한다.

독자인 나는 처음엔 황씨의 행동이 그냥 심한 좌절감으로 인한 아무 의미없는 행동인줄로만 생각했는데, 황씨의 말을 통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새롭게 깨달은 것이다. 다만 황씨도 일종의 정신승리(?)를 위한 행동을 끊임없이 하고 있다는 것만은 분명해보였다. 재평가 과정이 있기는 했지만 결국 내가 위에서 언급했듯이 정신이 건강하게 살아있는 것이 정말로 중요하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더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정신력이 좋다면 자신이 처한 상황이 어떠하든간에 그것을 견뎌내고 이겨낼 힘을 줄 거라는 어떤 믿음(?)이 생겼다.

새벽을 기다리는 일 외에 그가 할 일은 없었다. 덫에 걸리지 않았다 해도 언젠가는 그 새벽을 만날 것이 아닌가? 인규는 그렇게 스스로를 위로할 수 있을 뿐이었다. - P221

그가 살아 있음을 느낄 수 있는 순간은 달릴 때뿐이었다.
그때만은 별들의 운행이 그의 귀에만 거대한 음향을 들려주는 것 같았다. 마치 자신의 피부를 뚫고 나가 바깥 공기와 섞여 춤추는 기분이었다. 오로지 그때에만 인규의 영혼은 자신의 가련한 몸뚱이를 빠져나갈 수 있었다. 그 몸뚱이는 인규의 어린 시절 동구 밖 공터에 버려져 있었던 진규의 몸뚱이와 같았다. - P222

"걷다 보면 끝난다, 걷다 보면 이 길은 끝난다" - P222

어머니는 이십 년 동안 인규가 쌓아온 성벽을 무너뜨리려 하고 있었다. 그동안 진규는 오로지 인규만의 것이었다. 인규는 일곱 살에 죽은 진규를 기억하는 단 한 사람이었다. 진규를 사랑했으며 진규로 인하여 고통받은 단 한 사람이라고 믿고 있었다. 죽은 사람의 영혼이 그를 기억하는 자들의 마음속에만 서식한다는 말이 맞다면, 진규는 인규의 죽음과 함께 영원히 죽어질 영혼이었다. 그때에야말로 진규의 죽음은 완연해질 것이었다. - P224

그런데 어머니가, 진규를 거적때기에 싸고 봉분도 없이 묻은 어머니가 다시 진규를 부르고 있었다. 이십 년 동안 한 번도 진규의 이름을 입에 올리지 않았던 어머니였다.
"다시 너를 낳고 싶다 진규야!"
빗소리가 인규의 귓속을 할퀴었다. 어머니가 빗속에서 울부짖고 있었다.
"다시 너를 낳고 싶구나, 돌아오겠느냐? 나에게 돌아오겠느냐?" - P224

파고드는, 파고드는 이 손톱 하나 어쩌지 못한다. - P225

인규는 고개를 떨구고 자신의 손바닥을 들여다보았다. 그의 인생은 그의 상처난 손바닥 안에 있었다. 그의 운명도 그의 손바닥 안에 있었다. - P225

인규는 병동 로비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지친 발이 자꾸만 허공을 헛디뎠다. 공기가 춤추었다. 숨이 차오기 시작했다. - P226

더 이상 계속할 수 없다는 마음과 그렇다고 체념할 수도 없다는 마음 사이에서 그의 육신과 영혼은 찢기고 있었다.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찾아서 무엇 할 것인가. 하지만 그들이 아니라면 지금 나는 무엇인가.
아무것도 아니다. 아무것도 아니다. - P244

그것은 꿈이었다고, 그들이 존재했다는 것은 한갓 꿈이었다고 생각하려 정환은 애썼다. 그러나 그에게는 사진이 있었다. 그들이 살아 있었음을, 지금 이 순간에도 이 땅 어딘가에서 숨 쉬고 밥 먹고 잠자고 있음을 증명하고 있는 사진이 있었다. 그것이 있는 한 정환은 완전한 체념을 할 수 없었다. - P245

정환은 그동안 자신의 앙상한 희망을 혹사했다. 곰이나 원숭이 같은 짐승들을 먹이지 않고 채찍으로 다스리는 곡예사처럼 정환은 자신의 희망을 함부로 다루고 소모했다. 한데 이상한 것은 그것이 죽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 P245

정환의 지친 육체를 괴롭히는 것은 절망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은 무작정의 희망이었다. 의지나 가능성과는 무관한 성질의 감정이었다. - P245

바람기 많은 사내가 아무 여인에게나 넋을 잃듯이 정환은 시시각각 그 원시적이고도 지긋지긋한 희망에 사로잡혔다.
바람만 불어도 다시 희망이요, 날이 풀려도 다시 희망이었다. 거리에서 큰 소리로 웃으며 걸어가는 가족들을 볼 때도 희망이었고 정임이 또래의 처녀들이 떼 지어 몰려가는 것을 보아도 희망이었다. 새들이 전신주 사이로 날아올라도 희망이요, 아이들이 공터에서 뛰어놀아도 희망이었다. 찾고 싶다, 난 그들을 찾고 싶다. 정환은 도처에서 자신의 희망을 유혹하는 끈질긴 목소리를 들었다. - P246

그는 쉬고 싶었다. 약봉지를 털어 넣을 때마다 정량의 체념을 함께 복용했던 것은 그것만이 자신의 무모하고 무기력한 회망을 잠재워줄 것임을, 그리하여 병을 쾌차시켜줄 것임을 스스로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 P246

"......왜 태우는 겁니까?" - P247

우거진 진달래나무들을 바라볼 때마다 정환은 막연한 향수와 기쁨을 느끼곤 했던 것이었다. 그것은 곧 봄이 오리라는 생각, 봄이 와서 이 마당에도 붉은 꽃들이 만발하리라는 단순한 충만감이었다. - P247

"......보기 좋잖소."
그랬다. 그것은 아름다웠다. 관목들은 놀랄 만큼 선명한 불길 속에서 서로서로를 간절히 어루만지고 있었다. - P248

"곧 봄이 됩니다. 꽃이 필 텐데요."
"…...그러니까 태우는 거요." - P248

울어라.
정환은 고개를 떨군 황씨의 정수리를 내려다보았다. 목젖까지 치민 욕설을 삼켰다.
흐느껴라, 어젯밤처럼, 그 언제나처럼. - P248

"병신, 이 병신아, 그만 처먹어." - P249

"......그렇게 나무를 좋아했었는데……" - P249

".......재가 되었어." - P249

"다 타서 날아갔어......" - P249

이 문, 이 문의 건너편에서 한 사내가 혼자 밥 먹고 잠을 자고 술을 마시고 흐느껴 울었다.
그렇게 기대어 있자니 정환은 형언할 수 없는 감정에 휩싸였다. 그것은 정환의 고학 시절 연구실에 숨어 자기 위해 안에서 문을 잠갔을 때 그 투명한 금속성의 소리가 적요하고 싸늘한 실내를 울리던 느낌과 흡사했다. - P252

"건드리지 마." - P257

"한없이 넓고 황량한 벌판에, 나무 한 그루 없는 곳에 그 아이가 서 있소. 한마디 말도 없이 말이오... 하긴 살았을 때도말은 많이 하지 못했지, 숨이 차서, 늘 짧고 간단하게 말해야만 했다오." - P259

"난 이렇게 불태워진 것들이 그 애의 마당에 옮겨 심어질거라고 믿고 있는 거요. 이제 이것이 내가 가진 마지막 나무인데, 그 아이 섰는 한없이 넓은 땅에 꽃이 피고, 물이 흐르려면 아직도 멀었소......" - P260

불길이 진달래 가지의 끝에 이르자 무수한 불티들이 어둠을 거슬러 올랐다. 그 어둠 저편에서 진달래 관목들이 붉은 봄빛을 내뿜으며 능선을 이루고 있었다. - P260

동식은 순간순간 박차고 일어나고 싶었다. 누구의 부축 없이도 걷고 싶었으며 월급봉투를 받아 귀가하고 싶었다. 출퇴근 만원 버스에 시달리고 싶었다. 상사들의 호통을 듣고 저녁이면 술자리에 앉아 그들을 헐뜯고 싶었다. 여자와 함께 살고 싶었고 자식을 낳고 싶었다. 제때 예방주사를 맞힌 자식들이 자라 조막손으로 만든 카네이션을 가슴에 달고 싶었다. 그는 자신의 두 발을 땅 깊이 묻기를 원했다. 그곳에 물을 주어 잎을 틔우기를 원했다. 그 울창해진 그늘에 백발의 어머니가 편안히 눕기를 원했다. - P297

"왜 넌 변하지 않았냐." - P299

그는 실존적 죽음에 따른 정서적 여파보다 각각의 청춘에 추상적 관념이 아닌 육체적 사건으로 닥친 ‘상징적 죽음‘의 개별적 과정과 낱낱의 사정을,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둠을 통과하는 자들의 사연을 소설화한다. - P309

죽음에 감염된 삶, 혹은 삶에 이미 죽음이 내재된 형국은「여수의 사랑」이 제각각 죽음의 사연을 내포하고 있다는 데서 확연히 드러난다. 그것은 해결의 기미가 없는 심각한 정신적 외상으로 인물들에게 잠재해 있다. - P309

목숨은 끊기지 않은 채 죽음을 거느리고 살아야 하는 영혼의 황폐함이 어떤 삶의 형태를 낳는가 - P309

죽음은 억압된 트라우마이고, 이 트라우마가 지금 어떻게 귀환하는가가 서사의 중심을 이룬다. 음울한 베일처럼 서사의 배면에 죽음의 파문이 드리워져 있고, 인물이 앓고 있는 다양한 신경증은 서사의 전면을 차지한다. - P310

죽음이 삶에 미치는 영향력, 그 무소불위의 힘을 이야기하려 한다면, 그것은 역사와 사회, 민족과 민중이라는 추상의 이름 아래서가 아니라 개인을 만들어내는 뿌리의 구체를 파고드는데서 시작되어야 한다. - P312

가족이 개인을 사회의 상징적 질서로 진입시키는 출발지이자 사회화를 위한 훈련 장소라 할 때, 죽음의 사유가 가족에게서 촉발된다는 것은 두 가지 중요한 의미를 함축한다.
하나는 죽음의 외상 때문에 정상적으로 상징계 내부로 편입하기 힘들다는 점 ...(중략)...이고, 다른 하나는 이러한 어려움이 새로운 목숨을 얻기 위한 일종의 통과의례initiation로 작용하여 현실 부적응 상태의 자아를 주체화로 이끄는 계기가 된다는 점이다. - P312

가족의 죽음은 정신의 병을 초래하는 씨앗이자 역으로 자아에게 ‘되태어나기‘를 요구하고 활성화하는 촉매제이다. - P312

어머니의 자궁을 뚫고 나오는 생물학적 출생이 사람으로 태어나는 단 한 차례의 사건은 아니며, 몇 번이고 ‘다시 태어나는 일‘ ‘새 목숨으로 살아가는 일‘이 때때로 발생할뿐더러, 이를 위해서는 "그때마다 다시 죽어야" 하고 그 같은 죽음의 되풀이가 "막막하고 두려워져서" "입술 안쪽을 떡니로 악물"어야 하는 고통을 감내해야 한다. 이는 상징적 죽음에 이어 도래하는 ‘상징적 재탄생‘에 대한 작가 편의 서술이자 자기 성찰적인 의미 부여라 할 수 있다. - P313

이 소설집은 ‘되삶‘을 위해 죽음의 회귀라는 힘든 입사식을 치르는 젊은이들의 내면 풍경을 그린 (무)의식의 드라마라 할 수 있다. - P313

죽음의 집요한 귀환은 역설적으로 육체적, 정신적 통증을 수반하는 ‘삶‘의 일환이자 지난한 여정으로 인식된다. - P314

‘새 목숨‘에의 바람은 막연한 관념이기 쉽다. 불투명하고 추상적일수록, 생각만의 희구란 편안하고 수월한 해답이다. 그것이 관념의 위안과 유희가 되지 않으려면, 말로만 강조되는 상식과 거짓된 전망이 되지 않으려면, ‘삶‘은 죽음을 경유해야 한다. 더구나 그 결과가 삶의 긍정이나 행복의 가능성을 열어주지도 않으며, 주체는 난치의 병에 포박되거나 더 심각한 지경에 처할 수도 있다. ‘여수(麗水/旅愁)‘의 인물들은 그래서 아프고, 괴롭다. 그들은 주체의 재탄생을 위해 ‘다시 죽어야‘ 하는, 아니 ‘다시 죽고‘ 있는 스스로를 애도하는 중이다. 이들이 우울한 세번째 이유이다. - P314

‘되삶‘의 방법으로 죽음의 필연적인 경유만 있는 것은 아니다. - P314

대체로 분신 모티프는 자아의 또 다른 인격화로서 의식(자아)의 분열을 전경화하는 소설적 장치로 나타난다. - P315

분신의 출현 혹은 설정은 개인의 실존이 매우 불안정할뿐더러 개성을 확신하고 강조하는 순간에도 자기 분열의 가능성이 잠재되어 있음을 예견하고 암시한다. 그것은 인간이 이 세계에 ‘있음being‘만으로 존재론적 확실성을 얻을 수 없다는 경고이며, 의식과 무의식, 욕망과 실행, 구체적 현실과 관념적 꿈 사이의 간극을 실체화하는 방법이다. - P315

분신의 등장은 주체가 충족되지 않는 욕망의 결핍 가운데 찢겨져 있음을, 그로 인해 주체의 존립이 내적으로 붕괴될 여지가 충분하다는 사실을 무의식이 의식을 향해 알리는 긴급 신호라 할 수 있다. 그래서 분신의 테마는 자주 환상의 형식을 취하고 이중적 담화의 형태를 띤다. - P315

자기 내면을 장악하고 있는 어두운 상처의 인격화, 즉 트라우마의 외면화에 가깝다. - P316

주체의 자기 대면은 단독자로서의 순수한 자기 응시일 수 없으며, 자아 찾기의 여정에는 ‘타자‘라는 불순물의 개입이 필요하다는 것, ‘나 아닌 것‘의 시선에 노출되는 상황에서만 비로소 타자를 매개로 한 자기 응시가 개시된다는 것 - P316

타자의 응시가 억압된 것의 귀환을 촉발하는 상황은 주체에겐 내면의 병을 더욱 심화시키는 사태가 될 수도 있다. - P317

억압된 것이 타자로부터, 타자를 통해 되돌아오는 과정이란
‘나‘에게 큰 고통이기에 타자의 상처를 어루만질 수 있는 심정적 여유를 갖기란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이다. 타자에 대한 윤리를 말하기 이전에 주체는 우선 자신에 내재된 결핍의 흔적을 인정하는 작업이 필요하며, 이를 통해 주체의 정신적 생존이 먼저 이루어져야 한다는 강한 권고와 메시지가 이러한 분신 테마에는 자리하고 있다. - P317

무엇보다 ‘여수‘의 주인공들은 우울한 주체들이다. 우울의주체란 애도를 과하게 수행 중인 주체이다. 사랑하는 대상의 상실은 자연스럽게 슬픔을 유발하지만, 그 슬픔이 지나쳐 애도를 적절한 시점에 종결짓지 못하면, 상실된 대상은 무의식적인 것이 되고 애도는 주체의 자기 비하로 돌아서게 된다. 자아의 빈곤, 즉 계속적인 자기 비난이 주체 내부에서 심화되고, 해소되지 못한 슬픔의 침전물은 어느덧 자아의 일부가 된다. - P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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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램덩크 신장재편판 4 - 첫 시합 능남전 2
이노우에 타케히코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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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권은 지난번 3권의 내용에 연이어서 북산고와 능남고의 연습경기를 하는 내용이 계속 나온다. 등장인물들의 파이팅 넘치는 말과 행동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긴장감을 놓지 못하게 한다. 또한 시합장면이 많다보니 독자들이 잘 모를 수도 있을만한 농구 규칙과 관련된 용어들에 대한 설명이 중간중간 나오는데, 덕분에 농구 상식도 조금이나마 넓힐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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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두 달 전에 초반부만 살짝 읽고 다른 책들을 읽느라 한동안 손놓고 있었는데 드디어 2달만에 다시 집어들게 되었다.

오늘 다시 읽기 시작한 부분은 ‘어둠의 사육제‘라는 제목의 단편 소설 후반부인데, 대략적인 상황을 설명하자면 지방에서 서울로 올라온 영진이라는 인물이 예상치 못한 어려운 상황들로 인해 자신의 이모집에 얹혀 살다가 새로운 월세방을 구하려고 하는 장면부터 시작한다.

이전에 읽었던 우여곡절의 스토리도 언급하면 좋겠지만 이래저래 복잡한 관계로 본의아니게 여기서는 별도로 적진 않겠다. 혹여나 궁금하신 분들이 있다면 약 2달 전에 이 책과 관련하여 올린 포스팅을 참조해주시면 좋겠다.

오늘 처음 밑줄친 문장은 월세방을 구하기위해 발품을 팔던 영진의 머릿속이 이런저런 잡생각들로 인해 뭔가 복잡하다는 느낌을 전해준다.

베란다의 창살 앞에 곧 허물어질 것만 같은 몸뚱이를 기대어 서면, 저 불빛들은 여전히 무엇인가를 생각할 것을, 무엇인가를 꿈꿀 것을, 무엇인가의 밑바닥을 들여다볼 것을 나에게 강요하곤 했다. - P127

내가 불빛들에게서 고개를 돌리려 할 때마다 그것들은 시위하는 듯이, 입을 모아 야유하는 듯이 우울한 어둠 속에서 저마다 고함 지르며 손뼉을 쳐대고 있었다. - P127

"......나는 빈손이 되고 싶소, 어째서......!" - P131

어떻게 살아 있는 동안 빈손이 될 수 있다는 말인가. 이 세상의 공기를 들이마시고 있는 한 어떻게 완전한 빈 몸뚱이가 될 수 있다는 말인가. - P132

"어둠 속에서, 야금야금 음식을 축내며, 방바닥을 손톱으로긁으며 버텨왔어! 이것이 사는 건가? 이대로 살아남으라는 건가? 그게 결국 네 양심이라는 건가? 똑바로 말해봐, 넌 그저 달아나고 싶은 거야. 그렇지? 나한테서, 이런 볼썽사나운 놈한테서 도망치려는 거지!" - P134

".....도망치려는 거야, 영영 잊어버리려는 거야! 넌, 넌 나보다 더 비겁한 인간이야......!" - P134

"불을 켜세요!" - P134

"나를 도울 수 있는 건 없어." - P135

"저기서, 네 베란다에서 내 방을 보고 싶어." - P136

"저기 어떤 사람이 죽어 있어." - P137

"…………더 견딜 수 없어서 죽였어." - P137

다 끝났다.
저 사내는 죽을 것이다. 인숙언니도 죽을 것이다. 나는 뻔뻔스럽게 한낮의 거리를 활보할 것이다. - P138

그 어둠 위로 수천수만의 불빛들이 일제히 점화되었다. 그것들은 마른 톱밥을 사른 불티들처럼 지상의 어둠을 에워싸고 너울대다가 이윽고 먹빛 허공 속으로 손짓하며 스러져갔다. 어디선가 목청껏 고함치는 소리, 합창 소리, 폭죽처럼 터지는 휘파람 소리들이 아득하게 메아리치고 있었다. - P141

일분일초를 맹렬하게 싸워나가고 있었다. - P150

"난 다 잊어버렸어." - P158

몸집이 큰 사람이 침묵을 지키면 그의 몸이 송두리째 벽처럼 느껴진다. 나는 헛되이 목청을 높여 그 벽에 균열을 내고자 했다. "억울해, 억울하단 말이다아." 그러나 벽은 움직이지 않았다. - P159

"집에는 가고 싶지 않다니까. 아무도 날 기다리지 않아." - P164

이상한 일이었다.
한 번도 나의 집에서는 잠들 수 없었던 몸이 간절하게 잠을원하고 있었다. 언제나 나를 향해 날카로운 번민들을 겨누고있던 어둠은 이제는 고요하게 공기 중에 섞여 내 취하고 피로한 몸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 P165

"일단 이 집에 왔으니 넌 손님이야. 손님은 주인마님 말씀을 듣는 법이지." - P166

나에게는 떠나는 일이나 머무르는 일이 다를 것이 없었다. 내가 어디에 있든 세상이야 달라질 것이 없었다. - P178

밤이 깊을수록 정신이 또렷해지고 있었다. - P180

나는 여전히 껍데기였다. 모든 것은 꿈이었다. 이 새벽, 출근하기 위해 머리를 감는 선주, 아침 밥상, 주름살투성이의 어머니, 석유곤로에 데워진 세숫물, 아랫목에서 뒤척이는 동걸의 분신, 그것이 현실이었다. - P182

객실의 환한 차창이 비추지 않는 곳으로 걸어가면 마음은 어두웠고, 객실의 창이 비추는 곳으로 가면 다시 마음이 밝았다. - P182

‘이 바보들아.‘ 그들에게 나는 속으로 말했다. ‘저 녀석은 우리를 오래전부터 배신하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도 마찬가지야.‘ - P183

아버지를 비롯하여 나를 아는 모든 사람들은 나의 미래를 걱정했다. 나는 남들이 하는 취직 공부나 학점 관리에 마음을 써본 적이 없었다. 나는 아무것도 준비하지 않았다. 나는 아무것도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 P184

나는 무엇에 적응할 자신이 있었다. 살아남을 자신이 있었으며 원하기만 한다면 언제가 됐든 스스로를 바꿀 수 있으리라 믿고 있었다. 다만 그날이 다가오는 것을 늦추고 있는 셈이었다. 느릿느릿 게으름을 피우며 나는 인생을 미루고 있었다. - P184

모든 것이 변했다고 나는 생각했다. - P185

사물들은 제자리로 돌아가 있었다. 못 견디게 괴롭던 모든 것들은 세월이 지나자 상처 입은 나의 몸 위로 굴러가 그들이 박힐 자리에 박히고 있었다. - P186

나는 종이컵을 우그러뜨려 쓰레기통에 던졌다. 이제는 더이상 물러설 곳이 없었다. 우연히 만난 선주 때문만은 아니었다. 아버지의 초조한 눈빛, 사교적이면서도 어딘가 경멸이 어린 듯한 형수의 말투, 형들이 이따금씩 던지곤 하는 나의 미래에 관한 질문들, 내가 전화를 걸면 바쁘다는 엄살부터 부리는 친구 녀석들, 그 모든 것에 나는 어느 만큼씩 지쳐 있었다.
그해 가을 나는 결국 취직을 했다. - P186

그들은 우리가 변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제와서 그것을 어쩔 수 없다는 것 역시 알고 있었다. 우리는 어느새 한 걸음씩 물러서는 법을 배우고 있었다. - P187

나로서는 기대하지 않았던 직장 생활은 의외로 견딜 만했다. 최소한 내 몫의 할 일이 있다는 것만으로 나는 위로를 받았다. 처음에는 삼 개월쯤 하고 집어치우게 되리라 했던 일이 반년이 갔다. 반년이 지나자 경력이 되게 일 년은 붙어 있자 싶어 일 년을 채웠다. 그러고 나니 그런대로 모든 것이 내 몸에 맞게 되어 다시 일 년이 흘러갔다. - P187

동료들과는 그럭저럭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관계를 유지했다. 굳이 애쓰지 않아도 모든 것이 맞아 들어갔다. 동걸의 예언대로 나는 타고난 소질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나는 이 세계에 잘 적응해가고 있었다. 모두들 나에게 신통하다고 말했다. - P187

친구 녀석들의 모임이 재개되었다. 나는 왠지 그곳에 나가고 싶지 않았다. 나는 혼자였다. 혼자라는 것은 피가 끓고 눈이 부신 젊음이 있을 때나 고통스러운 것이었지 이제는 내 몸에 잘 맞는 껍질이었다. 그 껍질 속에서 나는 편안했다. - P187

따로따로, 우리들은 참으로 잘 살아가고 있었다. - P187

나는 야간열차를 잊었다. 내 안에 생동하던 젊음의 빛이 바램과 함께 야간열차는 서서히 잊혀졌다. - P188

나와 함께 벽제에 가지 않을래. - P192

빽빽하게 차들이 늘어선 거리를 나는 걷고 있었다. 어디로가야 하는 것일까.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대답하지 못한 채로 나는 계속 발을 내디디고 있었다. 어디로 가고 있었다. 나는 갑자기 길을 잃은 사람처럼 왔던 길을 돌아보았다. 돌아보면서도 발은 계속 앞으로 내디뎌지고 있었다. - P192

벽제, 나는 그곳에 가본 적이 있었다. 내가 어릴 때부터 들어오고 상상했던 벽제는 터미널에 내리자마자 석회 냄새가자욱하게 고여 있는 곳이었다. 그러나 정작 지나가는 길에 본 그곳에는 현대식 건물들이 즐비했고 고급 차들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화장터로만 알려졌던 그곳은 이제 가볼 만한 유원지가 되어 있었다. - P193

"오지마, 오지 마라 제발!" - P194

"난 떠난다." - P194

나는 시계탑 앞에 서서 기다렸다. 내가 놓쳐온 모든 것을 기다리듯이 나는 기다렸다. 내가 사랑하지 않았고 다만 경멸하며 흘려버린 젊음을 기다리듯이 묵묵히 기다렸다. 기다림만이 나를 속죄해주기라도 하는 것처럼 나는 기다리고 기다렸다. - P195

"동해."
...(중략)...
"거기 돌려주어야 할 것이 있어." - P196

"동걸아."
나는 무작정 녀석을 불렀다.
동걸을 뒤돌아서서 나를 보았다. 그는 웃어 보이려는 모양이었으나 윗입술을 일그러뜨렸을 뿐이었다. - P197

나는 아무 말도 건넬 수 없었다. 웃을 수도 없었다. 힘센 손이 등 뒤에서 코와 입을 틀어막은 것 같았다. - P198

난간에 매달렸다. 오른발을 올려놓았다. 빗발이 얼굴에 몰아쳤다. 남은 왼발을 난간에 올려놓았다.
기차 바퀴 소리가 고막을 찢었다. - P198

나는 객실 문에 기대어 주저앉았다. 헐떡이는 숨을 골랐다.
엎어지며 다친 무릎과 더러운 손바닥이 화끈거리고 있었다.
나는 마치 오랜 꿈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눈을 비비며 빗발 속에서 춤추는 인가의 불빛들을 바라보았다. - P198

좋지 않은 예감이란 혼자서 간직하고 있을수록 부풀려지게 마련이었다. - P202

피는 피로써만 씻을 수 있다. - P217

그는 늦은 밤에 숲을 헤매다가 덫에 걸린 짐승과 같았다. 인생이 무엇인지 알기도 전에 그는 덫에 걸렸다. 그는 새벽을 기다렸다. 누구도 그를 도울 수 없었으므로, 울부짖고 신음하는 것에마저 지쳐버렸으므로 이제 그는 날카로운 덫에 찢겨 피가 흐르는 다리를 핥으며 기다렸다. - P221

새벽은 고통을 멎게 해줄 것이었다. 박명 속에서 신(神)의얼굴을 한 사냥꾼이 걸어올 것이었다. 자신의 노획물을 확인하고 기뻐하며, 솜씨 좋은 사냥꾼은 일격에 그를 사살해줄 것이었다. - P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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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여자의 열매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개정판
한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8년 1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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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어찌하다보니 작가님이 쓰신 다른 작품들을 먼저 읽고 이 소설집을 읽게 되었는데, 전에 읽었던 작품들의 모태가 되는 내용들의 일부를 여기서 만나볼 수 있어서 이전에 독서했던 기억들을 다시금 떠올려 볼 수 있었다. 또한 마지막 부분에 나온 문학평론가의 해설을 통해 작가님의 작품 세계를 좀 더 깊이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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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 포스팅에서도 잠시 언급했었지만 이 소설집에 나오는 내용들이 개인적으로 느끼기에 다소 일상적이고 평범한 내용들이다보니 어떤 의미심장한 메시지같은 것들보다는 일상적인 대화들이 주를 이룬다. 덕분에 진도는 빨리 나가지만 살짝 아쉬운 마음도 있던게 사실이다.

그래도 중간중간 오늘 처음 밑줄친 문장처럼 어떤 삶의 지혜나 노하우 같은 것들을 배울 수 있어서 나름대로 의미가 없지는 않았다고 생각한다.

뒷모습이 앞모습보다 많은 것을 보여줄 때가 있지요. 표정과 제스처로 숨길 수 있는 것들을 뒷모습은 고스란히 노출시킵니다. - P328

세상의 가장 밝은 것들이란 그렇듯 다시 볼 수 없는 기억 속에만 있는 것이었을까요. - P338

마음보다 먼저 몸이 기억하는 일도 있는가 봐. 내가 당신을 기억할 때면 온몸의 구석구석이 저리고 손가락 뼈마디, 목덜미의 솜털 끝까지 아파오는 것처럼. - P351

당신이 그랬지. 한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이라는 우스갯소리처럼, 한번 외로운 사람은 영원히 외로운 사람이라고. - P359

......사람을 냉혹하고 비정하게 만드는 것은 아주 간단해.
몇십 년이 걸릴 것 같지? 최소한 오륙 년은 걸릴 것 같지? 그렇지 않아. 이삼 년이면, 빠르면 육 개월이면....... 사람에 따라서는 집중적으로 두세 달이면 끝나.
어떻게 하느냐면, 그를 바쁘게 하는 거야. 당장이라도 수십년 동안의 잠에 곯아떨어지고 싶어 할 만큼 피로하게 하고, 그러나 쉬고 싶을 때 쉬지 못하게 하는 거야. 쉬더라도 고통스러울 만큼 아주 조금만 쉬게 하고, 깨어 있는 시간 동안 끊임없이 굴욕당하게 하고, 자신을 미워하게 하는 거야. - P362

사람은 자신이 가장 고통받은 곳을 사랑하게 마련이라고 하지. - P367

아무것도 들쑤시거나 캐어내서는 안 돼. 들쑤시고 캐어내지 않은 그 뜨거운 불길들이 어느 사이에 열기와 숨막히는 황냄새를 버리고 순연한 빛 덩이로 떠오르도록 하는 거지. 고통이 뷰파인더와 내 몸뚱이를 관통해 맑은 슬픔이 되는 절차를 잠자코 바라보기만 하는 거야. 지금 내가 당신을 생각하는 격렬한 마음이 차츰 슬퍼지고, 애절해지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 성스러워져서, 어느덧 당신으로부터 묵묵히 떠나갈 것처럼. - P371

꿈길밖에 길이 없어 꿈길로 가니 - P374

죽음과 소멸은 영원하고 아름다운 이데아의 세계에 닿을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누군가의 손을 빌리고 그 기척과 온기에 기대서만이 살아갈 수 있는 인간이라는 존재를 붙들도록 했다. - P386

살아간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폭력적인 짐승의 세계 속에 뒤섞이는 일 - P388

풍을 맞았다 일어나 다시 걷게 된 어머니의 불화는 무한한 반복 속에서 붓놀림이 점점 가벼워지고 자유로워진다. 어머니가 도달한 그 무연한 자리는 정신을 단련하고 생각을 거듭함으로써 초월하여 갈 수 있는 곳이 아니라, 몸의 반복되는 움직임 끝에 몸이 시키는대로 저절로 이르는 자리다. - P389

손으로 주무르듯 애써 뭔가를 만들고자 하지 않고, 쏟아져 내리는 눈과 비를 온몸으로 맞듯 모든 절망을 있는 그대로겪어내면서 여자는 비로소 아기 부처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 P390

도처에 소멸이 자리해 있기에 역설적으로 인간은 영원을 떠올리며 살아간다. - P393

‘지금‘과 ‘영원‘이라는 시간이 무언가 사라져버리는 감각 안에서만 마주하게 되는 것이라면, 소멸하는 무엇도 실은 사라지지 않는 것이 아닐까. - P393

무심함이 주는 투명함은 힘이 세다. - P395

동물과 식물의 세계가 각각 산문과 시의 세계로 등치되는 지점이 있다면, 식물이 실어(失語)의 세계 속에 놓여 있기 때문일지 모른다. - P398

인간에서 식물로 변하겠다는 불가능한 꿈. 그것은 분명 현실의 세계가 아니라 감각에 맞닿아 있는 너머의 세계, 신화의 세계 속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현실적이고 이성적인 것이란 한 사회의 질서와 기준들에 부합한다는 의미가 아닌가. 그 규범들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결국에 언어의 이전이나 이후의 세계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 P399

그 새로운 존재 방식은 세속적인 현실을 손쉽게 초월해버리는 것이 아니라 현실 속에서 어떤 면들을 끝까지 거부하며, 치열하고 고요한 내적인 투쟁 안에 자리하는 것이다. - P399

동물성과 식물성을 구분하여 남성과 여성이라는 젠더와 직결시키는 것은 가장 위험한 독해가 될 수도 있다. 자칫 익숙한 가해와 피해의 이분법을 반복함으로써 그 구조로부터 벗어날 수 없게 만들기 때문이다. - P399

식물로의 변신은 생태계의 피라미드 안에서 싸우는 것이 아니라, 그 피라미드에서 빠져나오는 것이다. 그것은 상대에게 받은 상처에 매몰되거나 화해하며 포용하는 대신, 상대의 방식으로는 더 이상 어떤 상처도 입힐 수 없는 존재로 변하는 일이다. 들뢰즈가 읽어내는 스피노자의 윤리학에 따르면, 이는 무능력한 슬픈 정념이 아니라 즐거운 정념의 극한에 도달해서 그로부터 자유롭고 능동적인 감정으로 이행하는 일이기도 하다. - P400

그냥, 이 마음을 잃지 않게만. - P402

순간순간 차고 깨끗한 물처럼 정수리부터 적셔오던 충일,
‘그것‘과 바로 잇닿아 있다는 선명한 확신. 이제는 글을 쓸 때 간혹, 일상 속에서는 아주 가끔 만날 뿐인 그 마음이, 그때에는 눈을 뜨면 늘 그 자리에 있었다. 밥을 먹을 때나 걸을 때나 사람을 만날 때나, 그 마음은 그 자리에 있었다. - P402

한 사람이 살아 있는 동안 그의 세포들은 끊임없이 죽고 새로 만들어지는 일을 되풀이한다. 그렇게 체세포가 모두 바뀌는데 칠 년의 주기가 걸린다고 들었다. 칠 년 동안, 내 세포들이 새것이 되었다. 내 눈과 귀와 코와 입술, 내장과 살갗과 근육들이 소리 없이 몸을 바꾸었다. - P402

다만 머무르지는 않았다는 것으로 부끄러운 위안을 삼아보았다. 나라는 고정된 존재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흐르는 물과 같이 변화하는 과정이 바로 나라는 평범한 진리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 P403

나는 때로 다쳤다. 집착했고 욕망했고 스스로를 미워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부끄러움을 배웠고, 점점 낮아졌고 작아졌고, 그래서 그 가난한 마음으로 삶을 조금씩 더 이해하게 되었던 것 같다. 오래, 깊숙이 들여다보려 애썼던 것 같다. - P404

글쓰기는 나에게 존재하는 방식이었다. 숨 쉴 통로였다. 때로 기적처럼, 때로는 태연한 걸음걸이로 내 귀를 끌고 갔다. 나무들과 햇빛과 공기, 어둠과 불 켜진 창들, 죽어간 것들과 살아 꿈틀거리는 것들 속에서 모든 것이 생생했다.
그보다 더 생생할 수 없었다. - P404

곁에 있어준 따뜻한 이들에게 고맙다. - P404

첫 단편집을 묶고 나면 그것이 매듭이 되어 다음 단편집이 변화한다고들 말한다. - P405

나는 나아가고 있다. 조금씩 몸을 뒤채이며 달팽이처럼 전진하고 있다. 그가 낼 수 있는 최대치 속도와 힘으로. - P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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