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간만에 다시 읽는다. 지난번 포스팅의 후반부에서 진화론으로 유명한 찰스 다윈이 인도양의 코코스 제도에서 산호초를 폭넓게 조사했다는 얘기를 했었는데, 오늘은 이 산호초 중에서 고리 모양을 한 ‘환초‘라는 것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를 살펴보면서 시작한다.

개인적으로는 찰스 다윈을 그저 진화론자 정도로만 알고 있었는데, 이 책을 통해 지질학자로써도 유명한 족적을 남겼다는 사실을 새롭게 알게 되었다. 이외에도 오스트레일리아의 대산호초 군락이자 관광지로도 알러진 ‘그레이트 배리어 리프‘ 라는 곳도 알게 되었는데, 인터넷에 검색해보니 그 경관이 꽤나 아름다워보였다. 기회가 된다면 직접 방문하여 그 경관을 직접 두 눈으로 담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이후에 이어지는 내용에서는 산호 진화의 역사에 대해 간단하게나마 살펴볼 수 있었다. 개인적으로 산호라는 종에 대해 배울 것이 있다고 한다면 바로 다른 생물들과 공생하는 파트너십과 더불어 종의 절멸위기에서도 꿋꿋이 회복하여 다시 번성할 수 있는 회복탄력성이 좋다는 점이었다. 이것은 그저 일개 생물이 지닌 특징으로 치부하고 넘어갈 수도 있겠지만, 이 세상을 살아가는 인간에게도 반드시 필요한 기질이라고 할 수 있겠다.

단순히 어떤 이야기뿐만 아니라 특정 생명체의 속성으로부터 이렇게 교훈을 얻을 수 있다는 게 조금은 새롭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놀랍기도 하다.

산호 진화의 역사 다음에 이어지는 내용에서는 산호가 이 지구 생태계에서 어떤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지 배울 수 있었다. 이런저런 얘기들이 많이 나오지만 독자인 내가 느끼기에 산호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바로 대기 중의 이산화탄소를 제거하는 것이었다. 내가 전공자가 아니라 자세한 원리까지는 아직 알 수 없지만 저자의 말에 따르면 이산화탄소 농도가 높으면 기온이 높아진다고 한다. 이렇게 되면 생명체들이 살기가 힘들어진다고 하는데, 이런 것을 예방하고 생태계를 유지시키는 데 산호의 역할이 아주 핵심적이라는 것이다.

요즘 신문 기사나 언론 매체에 종종 나오는 기후위기와 관련된 내용에서 탄소 중립을 실천해야 한다는 얘기들을 어렵지 않게 만나볼 수 있는데, 결국 탄소 중립을 위해서는 앞서 언급한 산호를 비롯해 자연에 서식하는 생태계가 더이상 파괴되지 않고 잘 유지될 수 있도록 하는 게 급선무라고 할 수 있겠다. 이를 위해 저자는 반복해서 강조한다. 우리 인간이 생태계의 중요성을 지금이라도 절감하고 환경파괴와 관련된 행동을 이제 그만 멈춰야 한다고 말이다. 저자는 과학자다보니 이미 직감적으로 느끼고 있는 것이다. 이대로 계속 가다간 지구의 생명체가 전부 멸종하는 건 시간문제라는 걸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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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이어지는 내용에서는 자연사自然史를 배우는 이유에 대해 나온다. 저자는 이것을 역사를 배우는 이유와 같다는 말로 설명한다. 역사를 보면 어떤 나라든 간에 결국에는 멸망했기 마련인데, 이를 통해 그 나라들이 왜 망했는지, 어떻게 망했는지를 알고 현시대를 사는 우리들이 같은 우(愚)를 범하지 않기 위해 역사를 배운다는 게 저자의 생각이다. 자연사도 마찬가지다. 과거에 멸종했던 생물들이 왜 멸종했는지를 분석함으로써 현생을 살아가는 우리의 지속적인 생존 가능성을 높이기 위함이다.

개인적으로는 오늘 읽은 부분 중에서 저자가 자연사를 배워야하는 이유를 말해준 이 부분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물론 역사나 자연사를 배워야 하는 이유가 이것 말고도 또다른 것들도 있을 수 있겠지만 저자가 말한 이유만큼 피부에 와닿는게 과연 있을까 싶을만큼 훌륭한 이유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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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포스팅의 맨 마지막 부분에서는 이전까지 있었던 다섯번의 대멸종의 역사를 돌아봄과 동시에 대멸종이 발생할 수밖에 없었던 원인에 대해 살펴본다. 저자는 급작스런 기온 변화, 급작스런 대기 산성화, 급작스런 산소 농도 하락이 다섯번의 대멸종의 공통된 원인이라고 분석했다. 여기에 덧붙여 이러한 원인들은 생명체가 도무지 책임질 수 없는 (대륙이 합쳐지거나, 화산이 터지거나, 소행성이 지구와 충돌하는 것 같은) 지구적이고 우주적인 사건들로 인해 발생했다고 말한다.

오늘 읽은 본문에 직접적으로 나오진 않지만 이보다 앞서 읽었던 본문에 따르면, 이제까지의 다섯번의 대멸종과는 달리 앞으로 있을 여섯번째 대멸종은 그 원인이 지구적이거나 우주적인 외부요인이라기보다는 우리 인류의 행동으로 인해 촉발될 수 있다는 게 저자의 생각이다. 그래서 저자는 본문을 통해 반복적으로 말하는 것이다. ‘인간들아 정신좀 차려라. 이러다 다 죽는다고.‘

다음 포스팅에서 추가로 이어지는 내용들을 더 다뤄보도록 하겠다.

섬 주위를 둘러싼 산호를 거초라고 한다. 섬이 서서히 가라앉으면서 산호초와 섬 사이에 석호潟湖, lagoon가 생기면 보초가 되고 섬이 완전히 가라앉으면 환초만 남는다. - P81

산호가 죽으면 산호의 석회질 골격이 쌓여 굳으면서 석회암이 된다. 분필의 주성분이다. 석회성 골격이 얕은 바닷속에 쌓여 만들어진 암초를 산호초라고 한다. - P81

산호초는 모양에 따라 크게 세 가지로 나뉜다. 첫째는 섬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거초fringing reef다. ‘옷자락 거裾‘
와 ‘물에 잠긴 바위 초礁‘로 이루어진 단어다. 그러니까 옷자락 모양으로 섬을 둘러싼 물속 바위라는 뜻이다. 둘째는 섬과 산호초가 바다로 분리된 보초다. 여기서 ‘보堡‘는 둑 또는 제방이라는 뜻이다.셋째는 섬은 없고 고리 모양의 산호초만 남은 환초環礁, atoll reef다. - P83

거초는 열대 바다 섬 주변에 있다. - P83

화산섬에 산호가 성장한 후 섬이 침강하면서 산호초의 모양이 바뀌는 것이다. ‘거초→보초→환초‘ 순서로. - P83

공룡 골격 화석은 뼈 모양을 한 돌일 뿐 뼈가 아니다. 보초를 비롯한 산호초 역시 생명의 흔적일 뿐 생명은 아니다. 한때 생명인 적이 있긴 하다. 바로 산호다. - P84

산호는 캄브리아기에 처음 등장했다. - P84

산호초가 처음 발달하기 시작한 때는 4억 8500만 년 전이다. 오르도비스기라고 한다. - P84

현대 산호의 조상은 현대 생물의 상당 부분을 멸종시킨 페름기-트라이아스기 대멸종, 즉 세 번째 대멸종 사건 이후 2억 4000만 년 전인 중생대 트라이아스기에 출현하기 시작했다. 육지의 공룡보다 조금 일찍 발생한 이 새로운 산호는 돌산호라고도 하는 스클레락티니아scleractinia과 산호에 속한다. 지금도 스쿠버다이빙을 할 때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산호다. - P84

중생대는 크게 트라이아스기-쥐라기-백악기로 나눈다. 쥐라기와 백악기에 산호가 다양해졌고 이때 요즘 볼 수 있는 산호와 비슷한 산호들이 많이 등장했다. - P84

산호는 다양한 해양 환경에 적응하면서 여러 해양 생물과 공생하는 파트너십을 형성했다. 많은 해양 동물이 우리 산호초 안에 들어와 살고 우리는 해조류의 광합성 산물을 활용해 번성할 수 있었다. 특히 영양분이 부족한 열대 바다에서 파트너십은 번성의 가장 중요한 조건이었다. - P85

산호는 대멸종을 비롯하여 수많은 도전에 직면했다. 우리에게 가장 치명적인 사건은 백악기-제3기 멸종으로 알려진 약 6600만 년 전의 다섯 번째 대멸종이었다. 이때 많은 산호초가 황폐화되었다. 하지만 우리 산호는 그 후 다시 회복하고 다양성을 획득하는 회복탄력성을 보여주었다. 마지막 빙하기 이후 홀로세Holocene 시대에도 우리는 계속 확장했다. 마침내 그레이트 배리어 리프와 같은 현대 산호초 생태계로 발달했다. - P85

다윈은 우리 산호초의 역동적인 특성과 환경 조건에 대한 의존성을 파악했다. 그 결과 상호 성장과 산호초 발달의 생태학적 복잡성에 대한 통찰력을 제공했다. - P86

그레이트 배리어 리프는 지구에서 가장 생물성이 풍부한 지역 가운데 하나다. 산호초에는 400여 종의 산호와 1500여 종의 어류뿐만 아니라 다양한 해면, 말미잘, 바다지렁이, 갑각류 같은 수천 종의 무척추동물이 서식하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바다거북이 시간을 보내는 곳이고 듀공 같은 해양 포유동물의 번식지 역할도 한다. - P86

산호초는 다양한 해양 생물들이 이동하고 먹이를 찾고 번식하는데 필수적인 생태 중심지가 된다. 혹등고래, 바다거북과 수많은 어류를 포함한 이동성 동물들이 생애 주기 동안에 산호초를 방문한다. 산호초는 이들이 대양의 다른 곳으로 이동할 때 쉬고 먹이를 구하는 통로 역할을 한다. - P86

맹그로브 숲과 해초밭 같은 해안 서식지는 어류의 산란장이자 새들의 먹이터, 다양한 해양생물의 은신처다. 그런데 때로 파도와 해일이 이 서식지를 파괴하기도 한다. 산호초는 해안 생태계를 파도와 해일로부터 보호하는 거대한 장벽 역할을 한다. - P87

산호초는 생물학적인 역할 외에도 기후 환경에 크게 기여한다. 건강한 산호초는 탄소를 순환시키고 격리하는 역할을 함으로써 지구 기후변화를 완화한다. 예를 들어 산호는 바다에 녹아 있는 칼슘과 이산화탄소를 결합해 탄산칼슘을 만드는데, 탄산칼슘은 조개껍데기와 산호초의 재료다. 즉 우리 산호초는 생물 다양성의 중심일 뿐만 아니라 탄소 순환과 해안 보호에도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말이다. 우리는 이 일을 5억 년 이상 계속하고 있다. - P87

고체인 설탕이나 소금은 따뜻한 물에 잘 녹는다. 그런데 산소와 이산화탄소 같은 기체는 찬물에 더 잘 녹는다. 콜라를 냉장고에 보관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냉장고에 보관한 콜라에는 이산화탄소가 잘 녹아 있다. 그 콜라가 사람 입으로 들어가는 순간 높은 체온 때문에 이산화탄소가 물에 녹지 못하고 공기 중으로 배출된다. 이때 사람들은 톡 쏘는 느낌을 받는다. 그 맛에 콜라를 마신다. - P87

5억 년 전에는 대기 중 이산화탄소가 무려 10기압 이상 존재했다. 바닷속 100미터 깊이의 수압이다. 누군가 육상으로 진출했다면 마치 빈 깡통을 손으로 꽉 쥐었을 때처럼 짜부라졌을 것이다. 이산화탄소 농도가 높으니 기온도 덩달아 높았다. 지금보다 15도 이상 높았다. 아무도 육상으로 진출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 P88

생명체가 육상에 진출하게 된 것은 순전히 우리(산호) 덕분이다. 우리(산호)는 바다에 녹아드는 이산화탄소를 마그마와 함께 올라오는 칼슘과 마그네슘과 결합해 탄산칼슘과 탄산마그네슘으로 만들었다. 탄산칼슘은 조개껍데기의 재료가 되었고 탄산마그네슘은 흙의 재료가 되었다. 우리 (산호) 덕분에 공기 중의 이산화탄소는 점점 줄어들었다. - P88

1억6000만 년 전에는 대기 중 이산화탄소가 불과 0.0002 기압밖에 되지 않았다. 당시 대기압이 1기압으로 줄어들었으니 대기 중 0.02퍼센트(200피피엠)밖에 남지 않았다는 뜻이다. 이 농도는 1억 6000만 년 동안 크게 변하지 않았다. 간혹 0.03퍼센트(300피피엠)으로 오르기도 했지만 거의 비슷한 수준으로 유지되었다. 그렇다. 우리 산호의 가장 큰 사명은 대기 중의 이산화탄소를 제거하는 것이었다. - P88

바다는 대기 중으로 배출되는 이산화탄소의 4분의 1을 흡수한다. 이걸 그냥 두면 해양이 산성화되어서 해양 생물들이 견딜 수 없다. 우리(산호)는 이것을 탄산칼슘으로 제거해 해양 생물들이 살 수 있는 환경을 유지해 왔다. 무려 5억 년 동안이나. 딱히 그러려고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지구 기후에 정말 큰일을 했던 것이다. - P88

놀랍게도 천연기념물 1호는 대구 도동의 측백나무 숲이었다. 대부분의 사람은 모른다. 교과서에 실린 적도 없고 시험에 나온 일도 없기 때문이다. - P89

만주와 시베리아에서 번식하고 10월 하순쯤 한국에 오는 철새인 두루미는 예상대로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그런데 놀랍게도 호랑이는 천연기념물이 아니다. 이유는 간단한다. 한국의 자연에는 단 한 마리도 살지 않기 때문이다. 천연기념물은 존재하는 것을 보호하기 위해 지정하는데 아예 없는 것을 어떻게 지정하겠는가! - P89

한국에 국보,보물 등 국가 유산이 있는 것처럼 세계에도 유네스코가 선정하는 세계 문화 유산과 세계 자연 유산이 있다. - P89

오스트레일리아의 그레이트 배리어 리프는 1981년 유네스코 세계 자연 유산으로 지정되었다. 그 누구도 반대하지 않았다. 일단 규모 자체가 어마어마했다. 길이 2000킬로미터, 넓이 20만 7000제곱킬로미터에 달하는 3000여 개의 거대한 산호초에는 400종 이상의 산호 종이 산다. 지구 전체 산호의 3분의 1을 볼 수 있는 곳이다. 그뿐 아니라 1500여 종의 물고기, 215종의 조류, 3000종 이상의 연체동물, 전 세계에 존재하는 7종의 바다거북 가운데 6종, 30종의 고래와 돌고래, 그리고 듀공이 산호초를 제집 삼아 어우러져 잘 살고 있는 곳이다. - P90

장엄하고 아름다운 그레이트 배리어 리프에 문제가 생겼다. 내가(산호가) 색을 잃고 하얗게 변하고 있는 것이다. 산호는 표면을 감싸고 있는 공생 조류藻類의 광합성 작용으로 형형색색 빛깔을 띠는데, 높은 수온으로 스트레스를 받은 조류가 산호를 떠나고 죽으면서 산호가 하얗게 변하고 있다. 사람들은 이를 ‘백화 현상‘이라고 한다. - P90

우리(산호)와 함께 사는 조류는 동물산호조류라고 하는데 이들은 광합성을 통해 우리가 필요로 하는 에너지의 90퍼센트를 공급한다. 높은 수온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으면 조류들이 알아서 우리를 떠난다. 조류가 없으면 우리는 색을 잃는다. 색을 잃는 건 큰 문제가 아니다. 인간들은 섭섭해할 뿐이지만 조류가 없으면 우리(산호)는 에너지를 잃고 크게 약해져서 병에도 쉽게 노출된다. - P90

지구가 더워지면서 해수면 온도도 올라갔고 그 여파로 산호가 색을 잃고 있다. 산호가 사라지면 다른 동물들도 더 이상 대산호초에서 살 수 없게 된다. 다행히 백화 현상은 영원한 게 아니다. 다시 회복되기도 한다. 시간이 지나 수온이 정상화되면 산호도 회복된다. 하지만 최근에는 회복이 더뎌졌고 완전히 회복되지도 않고 있다. 2016년 이후 백화 현상이 점차 심해지고 있다. - P92

백화 현상이 일어나도 산호는 어느 정도 성장할 수 있지만 성장이 더디고 질병에 약해져서 결국은 죽게 된다. 방법은 하나. 산호들이 대량으로 죽기 전에 수온이 내려가야 한다. 그래야 수생동물들이 돌아오고 산호도 살아날 수 있다. 이전의 백화 현상 때도 그랬다. - P93

우리(산호) 존재는 지구 대기와 바다에 녹아 있는 이산화탄소에 의존했다. 우리의 사명은 이산화탄소 제거였는데 이산화탄소가 너무 많아져 우리가 더는 존재할 수 없게 되었다. 내가 이산화탄소 제거의 종결자인데 이산화탄소 때문에 우리 존재가 종결되려고 한다. 이게 무슨 아이러니인가! - P93

세상에 하등한 생물도, 고등한 생물도 없다. 모든 생물은 생태계의 틈새 하나를 맡아 자기 삶을 산다. - P95

(파울 크뤼천은 지구의 오존 구멍을 연구해 노벨화학상을 받았다. 그의 연구 결과에 따라 전 세계는 더 이상 프레온 가스를 냉장고와 에어컨 냉매로 쓰지 않게 되었다) - P96

1만 1700년 전부터 현재까지의 지질시대를 뜻하는 홀로세는 충적세沖積世 또는 현세라고도 부른다. 플라이스토세 Pleistocene 빙하가 물러나면서부터 시작된 시기로 신생대 제4기의 두 번째 시대다. 학문적 용어일 뿐이긴 하지만 크뤼천은 더 이상 홀로세라고 하지 말자고 했다. 지질과 생태에 끼치는 인류의 역할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 P97

"홀로세라는 단어를 그만 사용합시다. 우리는 더 이상 홀로세에 있지 않아요. 우리는... 그... 그… (올바른 단어를 찾고 있어요)... 이제 인류세에 살고 있는 겁니다." - P96

인류세라는 말은 1980년대에 이미 미국 생태학자 유진  스토머가 도입한 개념이다. 인류세는 영어로 ‘안스로포센Anthropocene‘이라고 한다. 사람을 뜻하는 ‘anthropo-‘와 시기를 뜻하는 ‘-cene‘을 연결한 것이다. - P97

지구 생물 역사에서 대멸종은 생명 다양성과 궤적을 근본적으로 재편성하는 중대 사건으로 작용했다. - P98

자연사는 지병이 없는 사람이 어느 날 잠자다가 이유없이 평온하게 숨을 거두는 게 아니다. 그것은 자연사가 아니라 돌연사다. 야생동물의 자연사는 다른 동물에게 잡아먹혀 죽는 거다. 사자와 호랑이도 평소에는 자기랑 눈도 마주치지 못하던 놈들에게 잡아먹혀 죽는다. - P101

자연사를 왜 배울까? 역사를 배우는 이유와 같다. 조상들의 대단한 과거를 알고 우쭐대려고 역사를 배우는 게 아니다. 역사에 등장하는 모든 나라는 망한 나라들이다. 위대한 로마 제국도 망했고 찬란했던 한나라도 망했다. 한반도에서 500~700년씩 지속한 신라, 고려, 조선도 모두 망했다. 역사를 배운다는 것은 그 나라들이 왜 망했는지, 어떻게 망했는지를 알기 위한 거다. - P103

자연의 역사도 마찬가지다. 3억 년 동안 고생대 바닷속에 바글댔던 삼엽충은 왜 멸종했는지, 1억 6000만 년 동안 육상을 지배했던 공룡은 왜 멸종했는지를 배워서 현생 생물, 특히 인류가 어떻게 하면 조금이라도 더 지속 가능할지 따져보기 위해 자연사를 배우는거다. 결국 자연사自然史란 멸종의 역사다. 인류세라는 극한의 위기에 선인류에게 자연사는 마지막 지혜의 비단 주머니일 수 있다. - P103

대멸종이란 여러 서식지와 분류군에 걸친 생물 종의 급속하고 광범위한 멸종이다. 그 결과 지구 생물 다양성이 심각하게 손실된다. 인간의 시간관념으로 치면 때로는 영겁의 시간이 걸리기도 하지만, 비교적 짧은 지질학적 기간 안에 전 세계 동식물의 상당 부분이 사라진다. - P103

일반적으로 대멸종으로 분류하는 기준은 종의 75퍼센트 이상이 수백만 년에 걸친 기간 동안 멸종하는 경우지만, 46억년에 달하는 지구의 지질학적 역사로 볼 때 짧은 기간이다. - P103

생물 다양성이 급격히 감소하면 생태계의 균형이 흐트러지고 생태계의 기능이 저하된다. 지구 환경이 회복되고 새로운 종이 진화해 빈 생태계의 틈새를 채우는 데 수백만 년이 걸리는 경우가 많았다. - P103

첫 번째 대멸종: 약 4억 4380만 년 전 고생대 오르도비스기 말기

온실가스 감소로 대규모 빙하가 발생했다. 또 우주에서는 감마선 폭풍이 불었다. 해양 생물의 86퍼센트가 멸종했다. 이때 육상에는 무슨 일이 일어났냐고? 그때는 육상에 아무도 안 살았으니 아무 일도 없었다. - P104

두 번째 대멸종: 약 3억 5890만 년 전 고생대 데본기 말기

갑자기 지구가 추워졌다. 소행성이 충돌하고 화산이 터져 화산재가 태양을 가리면서 지구는 얼어붙고 대기는 산성화되었다. 해양과 육상생물의 75퍼센트가 멸종했다. - P104

세 번째 대멸종: 약 2억 5190만 년 전 고생대 페름기 말기

가장 큰 규모의 멸종이다. 초대륙이 형성되면서 생명이 살기 좋은 해안선은 줄어들고 사막이 늘었다. 산소 농도는 급격히 떨어졌으며 시베리아에서 발생한 대규모 화산 폭발로 심각한 기후변화가 일어났다. 지구 생명의 95퍼센트가 멸종했다. 이 사건으로 고생대가 끝나고 중생대가 시작되었다. - P104

네 번째 대멸종 : 약 2억 140만 년 전 중생대 트라이아스기 말기

화산활동으로 이산화탄소와 온갖 종류의 산성 기체가 공기 중으로 방출되었다. 대기 중 산소는 급격히 낮아졌고 대기는 산성화되었으며 기온은 상승했다. 지구 생물 종의 80퍼센트가 멸종했고 이후 본격적인 공룡 시대가 시작되었다. - P105

다섯 번째 대멸종 : 약 6600만 년 전 중생대 백악기 말기

항상 거대한 화산이 문제다. 인도에서 거대한 화산이 폭발하면서 대멸종이 시작되었다. 다섯 번째 대멸종의 대미는 지름 10킬로미터짜리 거대한 운석의 충돌이 장식했다. 운석의 충돌은 열폭풍과 거대한 쓰나미를 불러왔다. 또 지진을 유발했고 지진은 화산 폭발로 이어졌다. 이때 전체 생물 종의 76퍼센트가 멸종했다. 육상에서는 고양이보다 커다란 동물은 모두 멸종했다. 그리고 조류를 제외한 공룡들은 모두 몰살되었다. - P105

자연사에서 배우기 위해서는 다섯 차례의 대멸종에서 공통점을 찾아내야 한다. 직접적인 원인은 무엇일까? 크게 세 가지다. 첫째, 급작스런 기온 변동. 기온이 지질학적으로 짧은 시간 안에 5~6도씩 오르거나 내렸다. 둘째, 대기 산성화. 화산 폭발의 영향이다. 대기가 산성화되면서 산성비가 내려서 해양과 토양이 산성화되어 생명체가 살 수 없게 되었다. 셋째, 산소 농도의 하락. 산소 농도가 갑자기 떨어졌다. 동물에 따라 살 수 있는 산소 농도는 다르다. 낮은 산소 농도에서도 살 수 있는 생명체가 있다. 하지만 높은 산소 농도에 적응한 생명체들은 산소 농도가 떨어지면 버틸 수가 없다. - P106

변화의 규모도 중요하지만 속도가 결정적이었다. 서서히 변화하면 생명도 적응할 틈이 있다. 하지만 변화 속도가 빠르면 생명은 적응하지 못하고 생태계에 빈자리를 내주어야 한다. 그런데 이런 급작스런 변화의 원인은 모두 지구적 또는 우주적 사건이었다. 대륙이 합쳐진다든지, 화산이 터진다든지, 소행성이 지구와 충돌해서 일어난 일이었다. 당시 생명체가 책임질 일이 하나도 없었다. - P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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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 포스팅의 마지막 부분에서 뇌과학자 엔델 털빙(Endel Tulving)이 제시한 일화 기억(episodic memory)과 의미 기억(semantic memory)의 개념에 대해 간략히 살펴봤었다. 해당 개념을 다시 정리해보자면 ‘일화 기억‘은 어떤 대상에 대한 직접적인 이미지를 떠올리는 것이고, ‘의미 기억‘은 어떤 대상과 개념을 다른 대상과 개념에 연결시킴으로써 의미를 상기시키는 것이다.

이렇게 기억을 두 종류로 나누어 생각하는 이유는 유전자에도 기본 단위가 있듯이 문화에도 어떤 기본 단위가 있을 거라는 생각 때문이다. 저자는 문화의 기본 단위를 기억이라는 것에서부터 찾아보려는 듯하다.

오늘은 이 두 종류의 기억이 뇌에서 어떻게 작용하여 의미를 만들어 내고, 이런 것들이 결과적으로 인간 사회에 어떻게 반영되는지를 살펴보면서 시작한다.

초반부만 잠깐 읽어봤지만,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빠르게 생각하고 넘어가는 모든 과정들을 세세하게 쪼개보니 그 사고(思考) 과정이 아주 복잡한 단계들을 거쳐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몸소 느낄 수 있었다. 인간의 뇌라는 게 참 신기하고도 놀라운 것이라는 걸 다시금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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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의 기본 단위를 찾아나가기 위해 제일 먼저 저자는 개념이라는 것을 위에서 언급했던 ‘의미 기억‘의 연결점(node) 또는 참조점으로 간주하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런 개념들은 일반적으로 ‘단어‘를 통해 식별된다고 한다. 이후에 이런 단어들로 구성된 언어를 통해 복잡한 정보가 생성되며 전달된다고 한다. 또한 연결점이라는 것은 언제나 다른 연결점들과 맞닿아 있는 속성이 있기에 이런 연관 관계를 통해 ‘의미‘라는 것을 만들어 낼 수 있다고 한다.


좀 복잡하게 보일 수 있는데, 나름대로 정리를 해보자면 일단 단어로 표상되는 ‘개념‘이라는 것이 하나 있고, 이런 개념들이 다양한 형태로 조직된 것이 ‘정보‘가 된다고 볼 수 있겠다. 그리고 개념과 정보들간의 관계 속에서 의미라는 게 창출된다 정도로 정리해볼 수 있을 듯하다.

여기서 문장의 형태로 조직된 ‘정보‘라는 것은 다른 말로 어떤 ‘명제‘라고도 부를 수 있는데, 복잡성 측면에서 상대적으로 단순한 ‘개념‘보다는 한층 더 높은 것이라고 보면 되겠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명제보다 상위에 있는 것으로 도식(圖式, schema)이라는 단위가 등장하는데, 이는 쉽게 말해 명제들로 이루어진 커다란 이야기 단위라고 생각하면 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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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다보니 머리가 좀 지끈지끈 아파오지만, 한편으로는 중구난방으로 머릿속에 흩어졌던 개념들의 위계질서를 잡아볼 수 있었기에 나름대로 ‘의미‘가 있었다고 평가하고 싶다. 또한 문화의 단위를 찾고자 하는 이들의 생각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기에 그 또한 ‘의미‘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각각의 개념들의 위계질서와는 별개로 개인적으로 잘 몰랐던 그리스-로마 신화의 다프네를 쫓아다니는 아폴론 이야기에 대해서도 배울 수 있어서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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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이어서는 서로 간에 팽팽한 대립이 있는 후천주의와 유전주의에 대한 논쟁이 나온다. 본문에는 원론적인 얘기와 함께 과학에 관련된 사례들이 일부 소개되어 있는데, 독자인 나는 이 논쟁을 요즘 사람들이 종종 말하곤 하는 ‘공부는 재능이냐 노력이냐‘ 같은 논쟁과 그 결이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여기서 재능이라고 하면 이 책에서 말하는 유전주의, 즉 선천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에 반해 노력이라고 한다면 이 책에서 말하는 후천주의 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본문을 읽으면서 물론 선천적으로 타고난 유전자나 재능 같은 것도 당연히 중요하지만(이런 것들을 본문에서는 ‘유전도‘라는 용어로 지칭하고 있었다.) 주변 환경의 중요성 또한 굉장히 크다는 걸 느꼈다. 선천적으로 주어진 유전자가 엇비슷하더라도 후천적으로 접하게 되는 환경들이 어떻게 형성되느냐에 따라 시간이 지난 후에 나타나는 결과물은 천차만별로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본문에 나온 내용과는 별개로 위에서 내가 잠시 언급한 논쟁인 ‘공부는 재능이냐 노력이냐‘ 라는 것은 결국 재능과 노력의 비중을 어느 쪽에 더 많이 두느냐의 차이이지 양자택일의 문제가 결코 아니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이와 관련된 내용을 잠시 눈을 돌려 다른 분야에 적용해볼 수도 있다. 한 예로 재테크 분야에서 볼 수 있는 것 중 하나로 자기 재산의 투자 비중을 결정할 때 위험자산과 무위험자산의 비중을 몇 대 몇으로 나눌 것인지를 결정해야 하는 경우가 있다. 이는 각자의 투자 성향에 따라 그 비중이 천차만별일 것이다. 이렇게 투자 비중을 정하는 것과 유사하게 위에서 언급한 유전자와 환경의 비중을 몇 대 몇으로 볼 것인지도 각 개인마다 생각하는 바가 얼마든지 다를 수 있는 것이다. 결국 각자가 자신에게 가장 바람직한 비율을 설정해서 거기에 맞는 의사결정을 해나가는 것이 맞다고 본다. 그리고 이것의 정확성과 그 확률을 높이기 위해 소위 말하는 자기 객관화, 메타인지 같은 것이 필요한 게 아닐까 싶다.

참 쓰다보니 꼬리에 꼬리를 물고 생각이 이어진다. 다음 포스팅에서 또다른 얘기로 시작해보겠다.

의미 기억은 일화들 내에서 비롯되며 거의 언제나 뇌가 다른 일화들을 상기하도록 만든다. - P245

뇌는 반복적으로 일어나는 한 종류의 일화를 기호를 통해 표상되는 개념으로 집약하는 강한 경향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비행기와 화살표의 윤곽만으로도 "공항은 이쪽 방향이다." 라는 의미가 성립되며 두개골 위에 교차된 대퇴골만으로도 "이 물질에는 독성이 있다."라는 의미를 표현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 P245

두 유형의 기억을 염두에 두고 문화의 단위를 찾아보자. 우선 개념을 의미 기억의 ‘연결점(node)‘ 또는 참조점으로 간주해야 한다. 이때 연결점은 의미 기억에서 뇌의 신경 활동에 궁극적으로 연관될 수 있다. - P245

개념과 그 기호는 일반적으로 단어를 통해 식별된다. 따라서 복잡한 정보는 단어들로 구성된 언어를 통해 조직되고 전달된다. - P245

연결점은 거의 언제나 다른 연결점들과 맞닿아 있어서 한 연결점을 상기하면 다른 점들도 상기할 수 있다. 이런 연관을 통해 우리가 ‘의미‘라고 부르는 것이 생겨난다. - P245

이 연결점들은 더 많은 의미들이 포함된 정보 위계를 이루며 조직되어 있다. 예컨대 사냥개의 일종인 ‘하운드‘, ‘산토끼‘ 그리고 ‘뒤쫓다‘는 모두 연결점들인데 그 각각은 유사한 이미지를 갖고 있는 대상을 집단적으로 기호화한다. - P245

‘하운드가 산토끼를 뒤쫓다.‘는 하나의 명제이며 이 명제는 정보의 복잡성 측면에서 단어 다음으로 복잡하다. - P245

명제보다 상위에 있는 것이 도식(圖式, schema)이다. 오비디우스가 들려준 사랑을 위해 다프네를 쫓아다니는 아폴론 이야기가 이런 도식의 전형적인 사례이다. 잡히지 않는 산토끼를 끊임없이 뒤쫓아 다니는 하운드도 이런 범주에 들어간다. 이런 딜레마는 다프네와 산토끼라는 한 개념이 하나의 명제로 이뤄진 또 다른 개념인 월계수로 변했을 때 해결된다. - P245

새로운 일화들과 개념들이 기억 장치에 첨가되면 그것들은 변연계와 피질계를 통해 확산 · 탐색의 절차를 밟는다. 이런 탐색을 통해 이전에 창조된 연결점들과 맞닿게 된다. 연결점들은 다른 중심점들과 연결되어 있으며 공간적으로 고립된 점들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들은 수많은 신경 세포들의 복잡한 회로로서 뇌의 전 지역에 걸쳐 중첩적으로 분포되어 있다. - P246

몇몇 여성 마니아들로부터 열대 과일 중 최고라는 찬사를 듣는 동남아시아의 두리안을 생각해 보라. 이것은 가시가 있는 포도송이처럼 생겼고 맛이 달지만, 입에 들어가면 점점 달걀 과자 맛이 나고 멀리서 냄새를 맡으면 마치 하수구 냄새가 나는 아주 독특한 과일이다. - P246

문화의 자연적 요소들은 의미 기억에 위계적으로 잘 조직된 구성 요소들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이때 의미 기억은 확인을 기다리는 이산적인 신경 회로에 의해 암호화된다. - P247

가장 기본적인 요소로서의 문화 단위의 개념은 지난 30년 동안 여기저기에서 제시되었다. 학자들에 따라서 그것은 기억소형(記憶素形, memotype), 아이디어 (idea), 개념자 (idene), 모방자(meme), 사회유전자(sociogene), 개념(concept), 문화유전자(culturgen) 그리고 문화형 (culture type) 등으로 다양하게 명명되었다. 이중에서 리처드 도킨스(Richard Dawkins)가 그의 영향력 있는 저서 『이기적 유전자(The Selfish Gene)』 (1976년)에서 처음 도입한 "모방자"가 가장 널리 알려져 있다. - P247

우리는 문화의 단위(지금은 모방자라고 불리는)가 의미 기억의 연결점과 그것의 뇌 활동 상응물이라고 주장했다. 연결점은 개념(인식 가능한 가장 단순한 단위), 명제, 도식의 여러 수준들에서 존재할 수 있으며 아이디어나 행동, 인공물의 복잡성을 결정한다. 그리고 문화 속에서 이런 복잡성들이 유지되는 것을 돕는다. - P247

나는 연결점으로서의 모방자 개념과 일화 기억과 의미 기억 간의 구분조차도 뇌과학과 심리학의 발전으로 인해 더 정교해지고 세분화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 P247

수많은 유전자들이 뇌, 감각 체계 그리고 다른 모든 생리적인 과정들을 규정한다. 이때 생리적 과정들은 마음과 문화의 전일적 속성들을 산출하는 물리·사회적 환경과 상호 작용한다. 자연선택을 통해 환경은 궁극적으로 어떤 유전자들이 그런 규정 작업을 할 것인지를 선택한다. - P248

유전자와 문화의 인과 관계는 유전자와 다른 생명 활동들의 인과 관계와 마찬가지로 유전으로만 설명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환경만으로 설명할 수도 없다. 그것은 그 둘 간의 상호작용이다. - P249

상호 작용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반응 양태(norm of reaction)개념을 알아야 한다. 이 개념은 다음과 같이 쉽게 이해된다. 동물이든 식물이든 아니면 미생물이든 한 종을 선택하라. 그리고 그것의 특정 형질에 영향을 주는 유전자, 혹은 유전자 집단을 고르라. 그런 후에 그종이 생존할 수 있는 모든 환경을 열거해라. 이때 서로 다른 환경에서 선택된 유전자나 유전자 집단에 따라 규정된 그 형질이 변이를 일으킬수도 있다. 생존 가능한 모든 환경에서 그 형질의 전체 변이가 그 종의 그 유전자 혹은 그 유전자 집단의 반응 양태이다. - P249

반응 양태에 관한 교과서를 보면 양서식물의 화살잎 모양이 대표적인 사례로 나와 있다. 예컨대 내륙에서 자란 잎은 화살촉을 닮지만 얕은 물에서 자란 것은 백합 부엽과도 같고 깊은 물에서 가라앉아 자란 것은 주변 물 흐름에 앞뒤로 움직이는 바닷말 오라기와 유사하게 생겼다. 그런데 이런 다양한 변이들의 기저에는 유전적 차이가 전혀없다고 알려져 있다. 이 사례에서 같은 유전자 집단이 상이한 환경에 처함으로써 생긴 표현형은 세 가지 기본 유형을 형성한다. 이 유형들이 합해져서 잎의 형태를 규정하는 유전자의 반응 양태가 결정된다. 달리 표현하면 어떤 유전자(들)의 반응 양태는 알려진 모든 생존 환경 내에서 그 유전자(들)의 모든 표현형이다. - P249

만일 어떤 변이들이 단지 환경만이 아니라 유전자의 차이 때문에 발생할 때에도 반응 양태는 각 유전자나 유전자 집합에 대해 원칙적으로 정의될 수 있다. - P249

형질 변이와 유전자 변이의 관계 그리고 유전자의 반응 양태는 인간의 몸무게를 떠올리면 이해하기 쉽다. 몸의 형태가 유전의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은 수많은 증거를 가지고 있다. 유전적으로 비만 성향을 가진 사람은 통통할 정도까지는 다이어트에 성공할 수 있어도 다이어트를 그만두자마자 예전 체중으로 되돌아가기 쉽다. 반면 유전적으로 날씬한 사람은 체중 변화가 거의 없이 대체로 날씬한 상태를 유지하고 간혹 과식을 하거나 호르몬 불균형이 생길 때에만 비만해진다. 즉 두 사람의 유관 유전자들이 서로 다른 반응 양태들을 보이는 셈이다. 두 사람이 같은 환경 (음식과 운동 요소를 포함한)에 놓여도 서로 다른 결과가 산출된다. - P250

유전적으로 서로 다른 개인들이 같은 결과를 산출하려면 서로 다른 환경, 즉 서로 다른 음식이나 운동 체제 등에 놓여야 한다. - P250

유전자와 환경 사이의 이러한 상호 작용은 인간 생물학의 모든 범주 내에서 일어난다. 즉 인간의 사회적 행동도 이런 상호 작용의 산물이다. - P250

사람의 성격이 출생 순서와 그로 인한 자신의 가족 내 역할 부여에 큰 영향을 받는다 - P250

예를 들어 맏이가 아닌 이들은 대개 가족 내에서 자신의 역할이 크지 않다고 생각하며 부모의 기대도 덜 받는다고 여긴다. 그래서 이들은 맏이보다 더 혁신적이며 정치적·과학적 혁명들을 더 쉽게 받아들인다. 결과적으로 역사를 통해 맏이보다는 나중에 태어난 아이들이 문화적 변화에 더 많은 공헌들을 해 왔다. 그들은 처음에는 가족 내에서 독립적이고 종종 반항아적인 역할을 수행하다가 나중에 사회에서도 그런 역할을 맡게 된다. - P250

자식들의 출생 순서가 유전적인 차이를 만들어 내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발달에 영향을 주는 유전자들은 환경 내의 다양한 니치들 사이에서 자신들의 표현형을 확산하는 것이다. - P251

변이를 최대한 이용하고 건강과 재능을 증진시키며 인간의 잠재력을 실현하기 위해서라도 유전과 환경 둘 다의 역할을 이해하는 일은 필수적이다. - P251

상호 작용을 측정하는 방법 중에 통용되고 있는 것은 유전도(heritability)이다. 유전도는 형질의 변이 중에 유전에 따라 생겨난 것들이 얼마나 되는지를 나타내는 척도로서 일차적으로 개체군에 적용된다. - P252

쌍둥이 연구는 유전자들에 따라 생긴 변이의 부분(유전도)을 측정하는 주요 수단이다. - P252

일란성 쌍둥이들은 이란성 쌍둥이들보다 더 많이 닮았고 이런 차이는 형질의 전체 변이에 유전도가 얼마나 크게 작용했는지를 대략적으로 알려주는 척도가 된다. 이런 방법은 일란성 쌍둥이 형제(혹은 자매)로 태어났지만 서로 다른 가정에 입양되어 다른 환경에서 자라게 된 경우를 연구할 때 더욱 강력해진다. 왜냐하면 같은 유전자를 갖고 있는 이들이 다른 환경에서 성장했을 때 어떤 차이를 보이는지를 알게 되면 유전도의 크기를 좀 더 정확히 측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 방법은 다중 상관 분석을 통해 더욱 향상된다. 다중 상관 분석에서는 주요 환경 영향들이 확인되고 그 영향들이 전체 변이들에 어떤 기여를 했는지가 개별적으로 평가된다. - P253

사람들은 타고난 재능과 성격에 어울리는 역할들만을 선택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유전적 성향을 보상해 주는 환경에 끌리기도 한다. 비슷한 유전 형질들을 가진 그들의 부모 또한 자신의 자식들이 자신들과 동일한 방향으로 자라나도록 분위기를 만들기 쉽다. 즉 유전자는 자신이 더 잘 표현될 수 있는 특정 환경을 창조하는 일을 돕는다. 이렇게 되면 유전자와 환경의 상호작용을 통해 생겨난 사회 내 역할들이 매우 다양해진다. - P253

가령, 음악에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아이와 선천적으로 스릴을 추구하는 아이가 있다고 하자. 첫 번째 아이는 어른들로부터 지원과 격려를 받게 되면 악기를 일찍 접하고 상대적으로 오랜 기간을 연습에 몰두하게 될 수도 있다. 한편 두 번째 아이는 언제나 충동적이고 공격적이어서 결국 자동차 경주에 매료될 수 있다. 첫 번째 아이는 자라서 전문적인 음악가가 되고 두 번째 아이는 (만약 불의의 사고를 당하지 않았다면) 성공적인 카레이서가 된다. 아이들 간의 재능과 성격의 유전적 차이는 매우 작을 수도 있지만 그 결과는 그 차이가 인도하는 경로가 다르기 때문에 증폭되었다. - P254

생물학(유전자) 수준에서 측정된 유전도는 환경과 반응하여 행동 수준에서 측정된 유전도를 증가시킨다. - P254

피아노를 잘치게 하는 유전자, 또는 피아노를 최고로 잘 치게 하는 ‘루빈스타인(Rubinstein) 유전자‘ 같은 것은 없다. 대신에 손재주, 창조성, 감정 표현, 집중력, 주의력, 음조, 리듬, 음색을 통제할 수 있는 능력 등을 강화시키는 데 영향을 주는 커다란 유전자들 집합이 있기는 하다. - P254

유전도의 또 다른 특징은 그것이 가진 유연성이다. 단지 환경이 변화되기만 하면 유전에 의해 생긴 변이의 비율이 증가하거나 감소할 수 있다. - P255

유전도는 주어진 환경의 변이들에 유전자가 얼마나 많은 영향을 주는가를 측정하는 탄탄한 방법이다. 우선 유전자의 존재를 확립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 P256

유전도는 현재 환경과 미래 환경에서 개인의 능력이 어떠할 것인지를 예측하는 도구이기는 하지만 틀릴 가능성이 다분하다. 물론 드물기는 하지만 거의 전적으로 유전적으로 결정되는 행동도 있기는 하다. 하지만 내가 지금까지 언급했던 사례들은 개인이나 사회의 가치를 재는 과정에서 이런 예측 도구가 사용될 때 위험이 따를 수 있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 - P256

유전학자가 지식인과 정책 입안자에게 전하는 메시지는 다음과 같다. 당신이 장려하고 싶은 사회를 선택하라. 그리고 그 사회의 유전도를 받아들여라. 유전도를 변화시키는 사회정책을 장려하는 일일랑 절대로 하지 마라. 최선의 결과를 원하거든 집단이 아니라 개인을 교화하라. - P256

많은 것들이 성취되기 전에는 통섭을 위한 노력이 정치·사회적 견해를 미묘하게 달리하는 사람들 사이의 이데올로기 언쟁으로 얼룩질 위험이 있다. - P257

좀 더 세련된 유전학 개념으로 말하자면 후천주의자는 인간 행동 유전자가 매우 폭넓은 반응 양태를 가지고 있다고 믿는 셈이다. 반면 유전주의자들은 반응 양태의 범위가 좁다고 여긴다. 이런 의미에서 두 견해의 차이는 정도의 차이이지 종류의 차이는 아니다. - P257

후천주의자들은 문화를 묶고 있는 유전적 속박은 실제로는 별 것 아니기 때문에 사회에 따라 무한정 다양한 문화들이 생겨날 수 있다고 믿는다. 반면 유전주의자들은 강력한 유전적 속박으로 인해 문화가 주요한 측면들에서 수렴한다고 생각한다. - P257

후천주의자들과 유전주의자들은 문화 사이의 거의 모든 차이들이 대개 역사와 환경의 산물일 개연성이 높다는 데 의견을 같이 한다. - P258

개인들은 특정한 사회 내에서는 매우 다른 행동 유전자들을 가지고 있지만 사회들 간에는 그런 차이들이 통계적인 수준에서 대부분 사라지고 만다. 예를 들어 남아프리카 남서부 칼라하리 사막의 수렵채집 문화는 프랑스 파리의 토박이 문화와 매우 다르지만 그들 간의 차이는 일차적으로 역사와 환경의 차이 때문이지 유전적 차이 때문은 아니다. - P258

반응 양태와 유전도를 명확히 이해하는 일은 때로는 다소 전문적이고 건조해 보일 수는 있지만, 유전과 환경이 인간의 행동에 얼마나 기여하고 있는지를 밝혀내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첫걸음이다. 따라서 생물학과 사회과학의 통섭을 꿈꾸는 우리에게는 매우 중요한 작업이다. - P258

논리적으로 보면 이제 다음 단계는 행동에 영향을 주는 유전자의 위치를 찾아내는 작업일 것이다. 만일 어떤 유전자가 염색체상의 어느 곳에 있는지 알려지고 발현의 경로가 어떻게 되는지 밝혀지게 되면 유전자와 환경의 수많은 상호 작용도 좀 더 정확히 추적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런 상호 작용들이 제대로 정의된다면 그것들 전체는 정신 발달에 관한 더 완전한 이론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요긴하게 사용될 수 있다. - P258

정신 분열증의 증상은 사람에 따라 매우 다양하지만 진단 기준으로 사용될 만한 공통적 형질을 갖고 있다. 그것은 정신 활동이 일관되게 실재와 분리되어 있다는 점이다. 어떤 경우에 환자들은 자신이 위대한 선각자(대표적으로 메시아)라고 믿거나 감쪽같고 광범위한 음모의 대상이라고 믿는다. 또 다른 경우에는 환상이나 환청을 경험하며 완전히 깨어 있는 데도 마치 꿈을 꾸는 것처럼 엽기적인 일들을 경험한다. - P259

정신 분열증 환자들의 경우 태아 발생기에 전전두엽 피질 속에 있는 몇몇 신경 세포들이 다른 세포들과 의사소통에 실패해서 뇌의 다른 부분들과 비정상적인 교환을 하게 된다...(중략)... 특히 문제의 세포들은 메신저 RNA분자를 만들어 낼 수 없어서 신경 전달 물질 감마 아미노낙산(r-aminobutyric acid, GABA)을 합성하지 못한다. GABA가 생기지 않으면 신경 세포들은 정상처럼 보여도 기능을 하지 못한다. 아직 완전히 밝혀지지는 않았으나 이런 손상은 외부 자극이나 일상적인 합리적 사고와 차단된 내부 정신 세계를 구성하는 데 기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뇌가 자신만의 세계를 창조하는 것이다. 마치 잠들었을 때처럼 말이다. - P259

양전자 방출 단층 촬영기(positron emission tomography, PET) - P259

정신 분열증의 궁극적 원인은 무엇인가? 지금까지의 쌍둥이 연구와 가족사 연구에서 얻은 자료들에 따르면 그 원인은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유전적인 것이다. - P260

(인간은 22쌍의 상염색체와 한 쌍의 성염색체를 가지는데남성은 XY를 여성은 XX를 가진다. 그리고 각 염색체의 쌍에는 임의적으로 번호가 매겨져 있다.) - P260

인간 행동의 복잡한 부분들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가속화되고 있다. 비록 정신 분열증이 정상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그것은 문화의 진화에 영향을 준다. 독재, 종교 의식 그리고 위대한 예술은 미친 사람의 망상과 비전에서 나오기도 하기 때문이다. 사회가 이런 극단적인 기이함을 대하는 전형적인 태도는 많은 사회의 문화 속에 공통적으로 녹아 있다. 즉 정신 분열증에 걸린 이들은 여러 문화에서 공통적으로 신의 축복을 받은 자들이거나 악마가 깃들어 있는 자들로 분류된다. - P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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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7-13 08:3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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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7-13 09: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5-07-14 21: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5-07-15 09: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지난번 포스팅의 마지막 부분에서 경마장에 있는 말들을 관리하는 일을 하는 복희라는 인물이 새롭게 등장했다고 언급했었다. 오늘도 복희와 관련된 얘기가 계속 이어진다.

처음 밑줄 친 부분에서 복희가 말들과 교감하기 위해 정성을 다하는 모습이 느껴졌다. 여기 나온 말 뿐만아니라 어떤 동물이든 간에 그들과 잘 교감하기 위해서는 물론 다양한 것들이 필요하겠지만 그 무엇보다도 진심이 담긴 마음이 가장 중요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과 동물 사이에 서로 직접적인 언어가 통하진 않더라도 그 내면의 마음이라는 것은 얼마든지 통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쩌면 인간 관계에서도 진심이 제일 중요한 게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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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지는 내용 중간에 우서진이라는 인물이 생각지도 못했던 곳에서 갑작스럽게 등장하는데, 개인적으로 이야기의 흐름이 기존과는 좀 다른 방식으로 전개되려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뭐랄까... 이야기의 포커스가 좀 바뀐듯 한 느낌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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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까지는 계속 새로운 인물들이 등장하면서 그들간에 서로 얽히고 설킨 이야기들이 이어졌었는데, 이제는 다시 앞서 한 번 나왔던 보경과 은혜 그리고 연재에 대한 얘기가 각각 이어진다. 앞부분에서는 미처 다 알지 못했던 과거의 스토리들을 마치 양파껍질을 하나씩 벗겨내듯이 하나하나 알게 되는 묘미가 있었다. 또한 각각의 인물들과 연계된 또다른 인물들에 대한 스토리도 알게 되었는데, 이를 통해 중구난방식이 아닌 뭔가 체계적으로 인물들의 관계도를 그려볼 수 있어서 좋았다. 간혹 어떤 소설들을 보면 등장인물들이 들쭉날쭉 나타나서 그들간의 관계도가 잘 파악되지 않는 경우들이 종종 있었는데, 지금 읽고 있는 이 소설은 그렇지 않다는 게 장점이라면 장점이라고 얘기 할 수 있을 듯하다.

복희는 천천히 목덜미를 쓸었다. 손바닥에 전해지는 말의 체온과 숨결을 더 자세하게 느끼기 위해 선배의 목소리를 따라 눈을 감고, 소리가 피부를 통해 전달될 수 있도록 낮고 조용히 말을 걸었다.

경주마는 수명이 짧다. 선수로서의 수명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삶 자체의 수명이 짧았다.

달리지 못하는 말은 말이 아니다.

인간 역시 이따금씩 인간 취급을 받지 못할 때가 있었으나 언제나 회생 가능했다. 하지만 말은 말 취급을 받지 못하면 살아갈 수 없었다. 달릴 수 없는 말은 지구에서 살아갈 이유를 얻지 못했다.

투데이의 병명은 퇴행성관절염이었다. 짧은 시간 내에 관절을 많이 쓴 결과였다. 연골은 소실되었으며 활막은 염증으로 가득 찼다. 지금쯤이면 걸을 때마다 뼈가 부딪치는 통증을 느낄 거였고 조금 더 지나면 골 미란이 진행될 것이다.

베팅금으로 마방세를 내지 못하는 말들은 얼른 방을 비워주어야 했다. 그래야 더 어리고 빠른 말들이 들어와 돈을 벌어다주기 때문이었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요, 달릴 때 저 애한테서 느껴지는 분위기가 달라요. 무작정 빠르게 달리기 위해 다리를 뻗는 것이 아니라 그 발짓이 우아해요. 발레하는 흑조 같아요. 동물 흑조 말고요. 흑조를 연기하는 발레리나요."

우아하게 보이는 이유 중 하나는 보법 때문일 테고 또 다른 하나는 흑진주처럼 빛나는 투데이의 검은 털 덕분이리라. 복희는 투데이가 달릴 때마다 요동쳤을 검은 물결을 상상했다. 그 역동적인 빛의 물결이 은혜의 마음을 사로잡았으리라.

"달릴 수 있을 거야."
부질없는 위로였다. 밧줄이 필요한 사람에게 휴지를 뽑아 내민 기분이었다.

"슬프지만 아무것도 못 해주는 주제에 슬퍼하는 것도 웃긴 것 같아서 그냥 보고 있어요."

"취재정신 좋은데 준법정신은 있어야죠."

극이 끝나면 우연히 만났던 두 사람은 제 갈 길을 갈 것이다.

"앱이 업데이트되는 속도가 동물의 멸종 속도와 같대요. 제가 앱 하나를 업데이트할 때마다 지구상의 어떤 동물이 완전히 멸종한다는 괴상한 말이에요."

아무렇지 않게 꺼낸 지난날을 굳이 수면 위로 올려 하지 않아도 될 말을 얹을 필요가 없어 보였다.

"동물들이 살 수 있는 네트워크가 아예 존재하지 않아요. 이걸 해결하기 위해서는 어떤 부분을 고치는 게 아니라 처음부터, 아예 다시 프로그래밍을 해야 한다는 말이에요. 이 사회가."

보호받지 못하면 살 수 없도록 만들어놓고 이제 와서 자유를 주다니. 복희는 그것 역시도 착해지고자 하는 인간의 이기심이라 여겼다.

서울에 서울숲이 있고 뉴욕에 센트럴파크가 있듯이 지구에는 아마존이 있었고 동물들에게는 마사이마라가 있었다. 케냐에서는 마사이마라로 불렸고 탄자니아에서는 세렝게티라고 불렸다.

진화란 살아남기 위한 선택의 결과물일 뿐이다.

보경은 단지 어떤 일을 하기 전에 느끼는 다급함과 초조함이 싫었다. 그러니 모든 일은 예정보다 조금 더 일찍, 버스를 놓치거나 영화 관람 시간에 늦는 일이 없도록 부지런을 떨었을 뿐이었다.

"너무 빠르니까요. 조금 느려도 되지 않을까요?"

숨통을 조이는 순간 분명 어느 한 곳이 짓무르기 시작할 거라고 믿었다.

정말로 다급하게 손을 뻗을 때에만 아이들의 SOS를 놓치지 않고 들으면 되는 것이 부모의 역할이리라. 섣부른 판단과 간섭은 아이를 답답하게 할 뿐이었다.

보이지 않으면 무엇이든 더 생생해졌다. 상상도, 소리도.

그리움이 밀고 들어오는 순간을 예견할 수 있다면 오래도록 그 순간을 만끽할 수 있게 준비라도 할 텐데, 친절하지 못했던 이별처럼 그리움도 불친절하게 찾아왔다.

운다고 해결되는 것은 없었다. 지금 할 수 있는 최대한을 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게 설령 살이 찢길 정도로 이를 악문 채 버티고 서 있는 것이라고 해도 말이다.

보호자가 힘을 내야 합니다. 모든 병은 결국 병과 환자, 그리고 보호자 셋의 싸움이거든요.

긴 병은 가족 사이의 부채負債를 만들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적잖은 상처를 줬지만 그 상처를 해결할 틈도 없이 또 새로운 상처가 쌓였고, 이전에 쌓였던 상처는 자연스럽게 묻혔다.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충분히 빚을 덜어낼 기회가 있을 거라 스스로를 위로하면서.

끝이 있는 고난이라 다독일 수 있었다.

돈만 있으면 할 수 있는 일을 하지 못해 아주 처절하게 울었다.

그 일은 애초에 보경의 손이 닿을 수 없는 문제였으므로 탓할 수 있는 것이 세상에 많았다. 억울하다고 소리치며 삿대질할 수 있는 대상이 존재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 손가락이 보경의 가슴을 찔렀다. 날카롭게 파고들어 기어코 상처를 덮어둔 가슴을 짓이겼다.

그날 이후로 보경과 은혜 사이에는 갚을 수 없는 부채가 쌓였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어서 결국 서로가 떠안고 있어야 했다.

조금만 게으르면 모든 걸 놓치는 시대가 아니던가.

역시나 사람 발길이 닿지 않는 곳은 먼지가 금방 쌓였다.

또다시 저 박스에 든 것이 무엇인지 잊을 때쯤 찾을 것이다. 그때까지는 잊고 살리라 다짐했다.

속는 척했다. 속는 척하다 보면 언젠가 정말 속아질지도 모른다고 믿었다.

본인 인생은 본인이 알아서 보듬으세요.

유전성 질환인 푹스내피이상증으로 각막내피세포의 감소가 일반인보다 몇 배는 빠르다는 주원은 수술을 받을 수 없었다.

"삼차원의 우리가 일차원의 말에 상처받지 말자."

미안함이나 고마움 따위를 느끼지 않을 정도로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 사람 사이에 당연하게 일어나는 화음 같은 것.

운다고 해서 해결되는 것은 없다. 눈물이 날 정도로 속이 엉망이지만 울면 더 엉망이 될 것이다. 시원하게 울었지만 달라지는 일은 없었다. 평생토록 울 게 아니라면 이쯤에서 우는 건 그만두어야 했다. 이제부터는 앞으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생각해야 한다.

‘안 해서 어쩔 건데?‘

‘징징거려봤자 너만 피곤해‘

속을 갉아먹고 얻은 힘이라고 해도 상관없었다. 다정한 말이 능사는 아니었다.

그때는 도망치는 기간을 정해뒀어야 한다는 걸 몰랐다. 정확한 날짜를 정해두지 않으니 돌아가는 날이 점점 미뤄졌다.

가끔 세상은 은혜가 들어갈 틈 없이 맞물린 톱니바퀴 같았다. 애초에 은혜가 들어갈 수 없게 조립된 로봇 같았다. 그런 세상에 제대로 한 방을 날려줘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세상이 그렇게 만만하지 않다는 것을 몸으로 깨달을 때마다 분에 못 이겨 경마장을 찾았다.

투데이는 은혜만의 대나무 숲이었다. 어떤 이야기를 하든 비밀이 보장되는 유일한 속마음의 창구였다. 그런 투데이가 이제 살아갈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운다고 해결되는 일은 없어."

울어서 해결되는 일은 없다. 눈물이 비집고 나오려는 걸 꾸역꾸역 참아내며 다짐하듯 말했다.
"내가 너를 놓지 않을 거야."

나는 강하다. 나는, 지킬 수 있다.

"보고 싶은데 꼭 이유가 필요해? 되게 이상한 걸 물어본다, 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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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은 다른 일반적인 소설들과는 구성 방식에 있어서 약간의 차이가 느껴졌다. 보통은 하나의 흐름이 쭉 이어지면서 이야기가 전개되는데, 이 책에서는 본문에 등장하는 인물 또는 로봇의 입장을 개별적으로 구분하여 서술한 것이 개인적으로 독특하다고 느껴졌다.

대략적인 기억들을 더듬어보면, 콜리와 연재 그리고 연재의 엄마인 보경, 연재의 누나 은혜 등과 같은 인물들 각각의 스토리들이 소개되는데, 이것들 중에는 각 캐릭터들만의 고유의 스토리도 있지만, 등장인물들간에 겹치는 사건 등에서는 서로가 서로를 보완하는 방식으로 하나의 동일한 사건을 각자의 관점에서 서술한다. 이를 통해 독자들이 이야기의 맥을 중간에 놓치지 않고 쭉 이어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 시작하는 부분에서는 연재의 엄마인 보경에 대한 이야기부터 나오는데, 읽어보면서 캐릭터별로 어떤 기질과 특징이 있는지를 좀 더 파악해보도록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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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다보니 보경이라는 인물은 과거에 배우로 활동했을 정도로 외모가 괜찮은 사람이었는데, 불의의 사고로 인해 얼굴에 상처가 생기고 이로 인해 왕성했던 배우활동에 지장이 생기게 된다. 이는 결과적으로 외면의 상처뿐만 아니라 내면의 상처까지 유발시키고 말았는데, 어떤 일이 발단이 되어 그 상처들을 조금씩 회복해 나가기 시작한다. 하지만 이러한 회복도 잠시였다. 예상치 못했던 또다른 일로 인해 다시 마음에 심각한 내상을 입게 된다. 결국 돌고 돌아 자신이 꿈꿔왔던 삶과는 다소 거리가 먼 삶을 살게 되는데, 참 이런 것들을 보면서 인생이라는 것이 무엇하나 내 마음이나 내 생각대로 이루어지기 정말 힘들다는 걸 여실히 느꼈다.

내가 꿈꾸는대로 인생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이루 다 말하기 힘들정도로 굉장히 많은 요소들이 필요한데, 솔직히 이런 요건들을 완벽하게 갖추기가 매우 힘들기 때문에 사람들이 흔히 하는 말로 인생은 절대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는다고 하는 듯하다.

이와 관련하여 작년에 읽었던 유현준 교수의 책에서 저자가 했던 말이 문득 생각났다. 정확한 문장인지는 잘 기억나지 않으나 핵심은 바로 ‘차선이 모여서 최선이 된다‘는 말이었다. 내가 매번 최선의 선택지를 선택할 수 없기에 내가 생각했던 최선보다는 조금 못미치는 차선책을 선택하는 경우가 많은데, 결국 이런 선택들이 모여서 결과적으로 최선을 만들어간다는 말이다. 실제로 유현준 교수도 자신의 책에 고백한 바에 따르면 ‘자기 인생도 결코 자신이 처음에 생각하고 꿈꿨던 모습은 아니지만, 그래도 차선책을 선택하면서 여기까지 왔다‘는 식으로 얘기했던 기억이 난다.

내가 현재 처한 상황이 비록 못마땅하거나 꿈꿔왔던 것과는 차이가 있더라도 그 처한 상황에서의 최선을 늘 추구하는 것이 힘겨운 인생을 살아가는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마냥 힘겹다고 인생의 끈을 무작정 놓을순 없는 노릇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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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이어 읽다가 지수라는 인물이 새롭게 등장한다. 지수는 연재와 같은 반 친구인데, 가정형편이 평범한 연재와는 달리 부모님의 든든한 지원으로 영어 유치원은 물론이고, 외국 생활까지 하다 온 친구였다. 물론 연재도 특정 분야에 있어 특출난 재능이 있었지만 그외의 것들에 있어서는 지수보다 여러모로 부족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어린 연재는 자신과 나이는 같지만 여러면에서 앞서있는 지수같은 친구들을 보며 자괴감이 들곤 하는데, 이것이 비단 이 소설 속 연재만의 느낌은 아닐 듯하다. 특출난 극소수의 인원 몇 명을 제외하고는 누구나 한 번 쯤은 해보았을 고민이지 않을까?

하지만 연재에게 자괴감을 느끼게 했던 지수는 우연한 계기로 인해 연재와 협력하는 파트너가 되는데, 이런 걸 보면서 사람 일이라는 게 언제 어떻게 바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라는 걸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었다. 물론 여기서는 소설 속 설정 상 어느정도 의도된 것이겠지만 이런 일이 현실에서 일어나지 말라는 법도 딱히 없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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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포스팅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복희라는 인물이 새롭게 등장한다. 이 인물은 기존에 나왔던 인물들과는 별개로 경마장의 말을 관리하는 사람인듯 보이는데, 뒤에 이어질 내용에서 어떤 역할을 할 지 문득 궁금해졌다.

‘이렇게 예쁨 받는데 더 많은 사람에게 왜 예쁨 못받겠어?‘ 라는 생각

모친은 인생의 2막이란 원래 아무도 모르게 찾아오는 것이라고 말했지만 보경이 보기에는 시대의 흐름에 탑승하지 못한 예견된 추락일 뿐이었다.

여기가 왜 지하인줄 알겠어? 식물은 땅에 뿌리를 내리니까, 이곳에 네가 뿌리를 내려야 지상에 꽃으로 필 수 있다는 말이야.

인간은 숨이 끊겼다가 다시 돌아오기도 한다

삶의 이유는 의외로 간단하게 생겼다. 선남선녀가 목숨을 계기로 만났으니 사랑에 빠지기는 쉬웠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만으로도 하루는 꽤 가쁘게 흘러갔다. 시간이 빠르게 흐르자 자연스럽게 회복도 빠르게 진행되는 것 같았다.

인생의 밑바닥에서 만난 사람은 편안했다.

"3%였잖아요."

"사람은 기계와 달라서 꺼진다고 완전히 멈추는 게 아니니까요. 3%라는 뜻은 말 그대로 살 수 있다는 뜻이에요."

소방관과 약지에 반지를 나눠 낀 후부터 보경의 삶은 자신이 그려왔던 것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갔다. 배우의 꿈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지만 다급하지 않았다. 많은 이들의 시선보다 단 한 사람의 시선을 받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한 삶이었다.

삶이 이따금씩 의사도 묻지 않고 제멋대로 방향을 틀어버린다고 할지라도, 그래서 벽에 부딪혀 심한 상처가 난다고 하더라도 다시 일어나 방향을 잡으면 그만인 일이라고. 우리에게 희망이 1%라도 있는 한 그것은 충분히 판을 뒤집을 수 있는 에너지가 될 것이라고.

"3%도 살았는데 80%는 왜 못살아. 당신 왜 이러고 있어."

모친의 요리 솜씨로 시작됐던 인생은 긴 레일을 돌고 돌아 다시 모친의 요리로 돌아왔다.

요리는 연구하지 않아도 혀가 시키는대로 따라가면 금세 모친이 내던 맛이 났다.

죽음이 확률로 계산되지 않고 예견되지 않는 날들을 쭉 누릴 생각이었다. 연재가 쓰레기같은 기수 휴머노이드를 데리고 오기 전까지는.

"쟤가 뭐를 저렇게 갖고 싶어 한 게 처음인 것 같아서."

예전에는 휴머노이드가 갑자기 나타나서 멀쩡히 은행에 다니던 사람을 밖으로 내쫓더니 이제는 제 딸이 다 망가진 휴머노이드를 가지고 왔다. 어쩐지 눈은 뜨고 있으나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기분이었다. 빼앗긴 적 없는데 빼앗긴 기분이었고 버려진 적 없으나 버려진 기분이었다. 휴머노이드를 보면 그랬다.

사람은 이따금씩 강렬하게 무언가에 끌렸다. 그게 사람일 수도, 사랑일 수도, 음악일 수도, 물건일 수도 있었다. 그 강렬한 끌림 앞에서는 무엇도 걸림돌이 될 수 없다. 마지막 월급을 전부 꼬라박을 정도의 강렬한 끌림을, 어제 연재는 다 망가진 콜리를 보고 느꼈으리라.

때때로 어떤 일들은, 만연해질수록 법이 강화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가 그 일에서 손을 놓아버리고는 했다.

몇천만 원을 웃도는 기계 다리 부착 수술보다 더 필요했던 건 인도에 오를 수 있는 완만한 경사로와 가게로 들어갈 수 있는 리프트, 횡단보도의 여유로운 보행자 신호, 버스와 지하철을 누구의 도움 없이도 탈 수 있는 안전함이었다. 휠체어를 끌어주는 휴머노이드나 사이보그 다리가 아니라. 하지만 그렇게 되려면 지구가 너무 많이 바뀌어야 했다. 다수의 입장에서는 한 사람에게 모든 것을 전가하면 그만인 일이었으니까.

언제까지 기다릴 수 없었다. 어떤 것도, 기다릴 수만은 없는 노릇이었다.

다 왔잖아. 조금만 더 힘내.

반드시 그곳에 가리라는 마음을 먹자 몸에 힘이 생겼다.

완벽한 차단이란 존재하지 않으리라. 분명 어느 틈으로는 그 화려한 경기를 볼 수 있을 거라 믿었고, 그 믿음은 오래 걸리지 않아 현실이 됐다.

가족 둘이 모이면 다른 가족의 흉을 보는 게 자연스러운 일인 것처럼 대화가 흘렀다.

가족의 대화란 게 또 그렇듯이 주제도 흐름도 없이 그때그때 튀어나왔다.

"시긴 진짜 빨리도 간다. 1년이 하루처럼 흐르는 것 같아. 징그럽게 빨리도 가."

은혜가 그곳에 오래도록 있고 싶어서 있던 것은 아니다. 단지 그 공간이 은혜가 오래 머물 수 있도록 되어 있었을 뿐이었다.

gyro sensor. 기본적으로 회전하는 물체의 역학운동을 이용한 개념으로 위치 측정과 방향 설정 등에 활용되는 기술이다. 스마트폰, 리모컨, 비행기나 위성의 자세 제어 장치 등에 광범위하게 사용된다.

플라스틱보다 가벼운 카본

들개는 살아 있었다. 숨은 쉬고 있지 않지만 살아 있는 지상의 어떤 생명과도 전혀 다를 게 없었다.

일부러 할 말 없게 대화를 툭툭 끊는 것

"말하는 꼬라지 진짜 별로다."

다르파가 네 발 달린 휴머노이드라는 걸

어쩔 수 없는 차이는 숨겨지지 않았다.

급이 높은 아이들의 진가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잡는다는 것에 있었다.

"좋아. 내가 오늘부터 아주 끝장나게 너랑 친구해준다."

희박한 반전에 기대를 걸 만큼 체력과 감정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연재는 타인의 삶이 자신의 삶과 다르다는 걸 깨달아가는 것이, 그리고 그 상황을 수긍하고 몸을 맞추는 것이 성장이라고 믿었다. 때때로 타인의 삶을 인정하는 과정은 폭력적이었다. 그러니 연재에게 남은 방법은 딱 하나였다. 수업이 마치자마자 온 힘을 다해 뛰어가는 것.

삶의 격차라는 것이 어느 틈을 비집고 생기는 것인지 한때는 이해할 수 없었다. 똑같이 학교에 다니고 똑같은 옷을 입고 같은 공부를 하는데 어느 순간부터 어떤 아이들에게는 다가갈 수조차 없을 만큼 차이가 났다. 우리 부모님도 돈을 벌고, 우리 부모님도 나를 사랑하는데 왜 우리는 같은 나이에 이만큼 차이가 나는 걸까.

세상에는 끊임없이 새로운 물건들이 각기 다른 몸값을 지니고 나왔다. 연재는 그것이 정말로 필요해서 생긴 것인지 생김으로써 필요해진 것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세상은 연재와는 상관없이 빠른 속도로 많은 것을 탄생시켰다. 그제야 삶의 격차가 어느 틈을 비집고 생겼는지 이해되기 시작했다. 그건 연재의 균열이라기보다 부모님, 그리고 그 부모님보다 더 먼 부모님의 삶 어디에선가부터 천천히 시작된 균열일 것이다. 연재가 스스로 절대 여밀 수 없는 크기로 말이다.

인간의 원초적인 힘은 결국 문명 앞에서 무릎을 꿇고 말았다.

"그냥 처음부터 같이 가면 될 걸 미련하게 힘을 왜 빼."

"요즘 세상에 공부만 잘해도 모자랄 판에 공부 빼고 다른 거 다 잘해서 뭐 먹고 살 건데?"

이제 찌를 던져 낚시 바늘을 틈에 걸기만 하면 됐다. 지수가 팔짱을 꼈다. 아빠에게서 들은 거래의 기술 중 하나인데, 본디 상대방의 환심을 사려면 그만큼 매혹적인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거였다.

인생이 언제 한 번쯤 순탄하게 풀리나 생각했는데 그날이 오늘인가 싶었다.

사람들은 돌고래의 지능은 익히 알면서도 말 역시 돌고래와 지능이 비슷하다는 사실은 잘 알지 못했다. 말은 인간으로 치자면 6세 정도의 아이큐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손에는 말들이 좋아하는 당근과 각설탕을 함께 준비했다. 각설탕이 말에게 나쁘다는 걸 알면서도 단걸 좋아하는 말들에게 각설탕은 스트레스를 최단시간 안에 풀어줄 수 있는 좋은 수단이어서 어쩔 수 없었다. 당보다는 스트레스가 최악이었다.

선배는 말의 목덜미를 두드리며 복희에게 이곳을 쓸어보라고, 만져주면 가장 좋아하는 부위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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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 포스팅의 마지막 부분에서 저자는 자연과학과 인문사회과학 분야가 서로 철저하게 나뉘어져 있는 현실에 대한 안타까움을 드러냈었다. 또한 두 분야가 철저히 나뉘어 있다보니 오해와 충돌이 반복되는 현실에 대해서도 지적했었다.

독자인 나는 여기서 서로가 철저히 분리되어 있을 때 오해와 충돌이 반복된다는 얘기가 개인적으로 굉장히 와닿았다. 인간관계에서도 서로간에 어떤 오해가 있을 때 이것을 대화나 기타 방법 등을 활용하여 그때그때 해결하지 않으면 그 오해는 눈덩이처럼 순식간에 불어나서 그 오해가 점점 커지고 그러다가 마치 풍선이 빵하고 터지듯이 서로간에 충돌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위와 같은 원리로 갈등을 겪었다가 결국엔 대화를 통해 관계가 호전되었던 경험을 해본 적이 있었기에 더 그러지 않았나 싶다. 해당 상황에 대한 구체적인 얘기까지는 하기 힘들지만 그때의 기억을 잠시 더듬어보자면 초반에는 대화가 오가기는 커녕 서로간에 살얼음판을 걷는 듯한 긴장감으로 하루하루를 보냈었던 것 같다. 그러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오해가 쌓이고 갈등의 골이 깊어지자 결국 내 쪽과 상대방 쪽 모두 심리적으로 힘들어졌던 것 같다. 그러다가 어느순간 특정한 사건이 계기가 되어 대화의 물고가 터졌고, 오해를 품과 동시에 악화되었던 관계가 좋은 쪽으로 개선되었던 기억이 있다.

개인적으로 겪었던 사건이긴 하지만 결국 오해를 키우지 않기 위해선 가만히 있으면서 시간을 지체하기보다는 한시라도 빨리 상대방을 만나서 서로 대화하고 상대편의 입장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굉장히 중요하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던 시간이었다.

잠시 곁길로 샜는데,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오늘 시작하는 포스팅에서는 자연과학과 인문사회과학 두 분야가 서로 이해하기 힘든 근본 원인에 대한 저자의 지적이 나온다. 가장 먼저 저자는 두 분야 간에 서로를 이해하기 위한 공통된 언어가 없다는 점을 지적한다. 서로를 이해하고 싶은 마음은 있지만 상대방의 언어가 너무 어려워서 이해하기 힘든 상황이라면, 어느 한 쪽이 자신이 표현하고자하는 바를 상대방이 이해하기 쉽도록 도와주는 작업이 1차적으로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오늘 본문에 직접적으로 나오는 사례는 아니지만, 이와 관련하여 그냥 개인적으로 문득 떠오른 사례 중 하나는 세종대왕이 한자를 어려워하는 백성들에게 훈민정음을 만들어 사용하게 한 것이었다. 한자를 이해하는 것이 어려우니 일반인들도 이해하기 쉬운 언어를 만든 것이다.

이 사례를 오늘의 본문 내용에 빗대어 생각해보자면, 과학자들이 자신들은 잘 알지만 일반인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과학분야의 내용들을 이해하기 쉽게 풀어서 설명해주는 것을 생각해볼 수 있다. 개인적으로 작년에 읽었던 유시민 작가의《문과 남자의 과학공부》라는 책을 보면 그저 난해하게만 느껴지는 과학 이야기를 이해하기 쉽게 풀어서 설명해주는 사람들을 가리켜 ‘과학 커뮤니케이터‘ 라는 용어로 지칭한다. 요즘으로 치면 과학 유튜버로 유명한 ‘궤도‘ 같은 사람이 해당될 수 있겠다.

어쨌든 이런 ‘과학 커뮤니케이터‘들을 통해 과학을 낯설고 어렵게만 느끼던 사람들이 과학에 좀 더 관심을 갖고 그 내용들을 이해해보려 도전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될 수 있는 것이다. 어쩌면 조금은 오지랖일수도 있는데 여기서 좀 더 생각을 확장시켜보자면 자기 분야 이외의 것들을 이해함으로써 단지 자기 혹은 자기 분야만 생각하던 이기적이고 편협한 생각에서 벗어나 서로가 상대방의 입장과 생각을 공감하고 이해할 수 있는 사회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럼 이 사회가 좀 더 좋은 방향으로 성장할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어쩌면 이런 노력들이 조금씩 쌓이고 쌓여서 학문의 분야를 막론하고 그 경계가 허물어져서 이 책의 제목과 같은 ‘통섭‘이 현실에서 이루어지는 날이 올 수도 있지 않을까 조심스레 예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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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지는 글에서 저자는 자신이 주로 얘기하는 진화론에 상대되는 이론인 일명 창조론에 대한 의구심을 드러낸다. 창조론은 성경에서 언급된 것처럼 신에 의해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물이 만들어졌다는 것을 포괄적으로 통칭하는 것인데, 저자는 이 창조론이 객관적으로 드러난 증거들에 근거한 진화론에 비하면 객관성이 상당부분 결여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독자인 나는 이 논쟁에 대해서는 본문에 나온 내용과 저자의 생각만을 간단히 언급하고 넘어가겠다. 내가 어떤 전문 과학자나 신학자가 아니기에 관련 지식도 턱없이 부족한 사람인데, 이런 논쟁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것은 크게 의미없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과학자나 진화론이 옳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또는 성경말씀을 믿는 신학자를 비롯한 창조론을 믿는 사람들 그 누구든 간에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스스로 잘 생각하고 판단하시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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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포스팅의 후반부에서는 ‘유전자와 문화의 공진화‘라는 개념이 자주 등장한다. 이것은 간단히 말해 유전자가 진화함과 동시에 문화도 진화해나간다는 것을 지칭한다. 그래서 과학자들이 유전자의 기본 단위를 탐구하는 것과 유사하게 문화의 기본 단위를 찾고자 하는 시도들이 있었다고 한다. 이와 관련해선 각종 다양한 설들이 있는데, 자세한 내용은 본문을 통해 확인하는 게 좋을 듯하다.

오늘 포스팅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바로 위에서 언급했던 문화의 기본 단위를 찾기 위해 캐나다의 뇌과학자 엔델 털빙(Endel Tulving)이 제시한 ‘일화 기억‘과 ‘의미 기억‘ 이라는 것의 기본 개념에 대해 소개되어 있다. 이와 관련한 보다 자세한 얘기는 다음 포스팅에서 추가로 다뤄보도록 하겠다.

모든 학자들, 즉 자연과학자와 사회과학자 그리고 인문학자가 하나의 공통된 창조적 정신에 따라 활기차게 활동한다는 해묵은 만병통치약은 계속 이야기해 보았자 소용이 없다. 그들은 창조적인 자매들일지는 몰라도 공통된 언어를 가지고 있지 않다. - P231

학문의 커다란 가지들을 통합하고 문화 전쟁을 종식시키는 방법은 딱 하나뿐이다. 과학 문화와 인문학 문화 간의 경계를 국경으로 보지 않고 양쪽의 협동 작업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 미개척지로 보는 방법뿐이다. - P231

오해는 미개척지를 무시할 때 발생하는 것이지 정신구조의 차이 때문에 생기는 것은 아니다. - P231

우리 인류가 유전적 진화에 병행하여 문화적 진화를 덧붙였으며 이 두 진화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견해(유전자-문화 공진화, gene-culture coevolution) - P232

문화는 공동의 마음에 의해 창조되지만 이때 개별 마음은 유전적으로 조성된 인간 두뇌의 산물이다. 따라서 유전자와 문화는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하지만 이 연결은 유동적이다. 얼마나 그런지는 불명확하지만 말이다. 또한 이 연결은 편향되어 있다. 즉 유전자는 인지 발달의 신경 회로와 규칙적인 후성 규칙(後成規則, epigenetic rules) 을 만들어 내고 개별 마음은 그 규칙을 통해 자기 자신을 조직한다. - P232

마음은 태어나서 무덤에 들어갈 때까지 성장한다. 물론 자기 주변의 문화를 흡수하면서 성장한다. 하지만 그런 성장은 개체의 두뇌를 통해 유전된 후성 규칙들의 안내를 받아 이뤄진다. - P232

뱀에 대한 공포뿐만 아니라 매혹을 이끌어 내는 선천적 경향은 후성 규칙이다. 문화는 은유와 서사를 창조하는 그 공포와 매혹에 의존한다. - P232

문화는 유전자·문화 공진화의 부분으로서 각 세대 구성원 개인의 마음 속에서 집합적으로 재구성된다. 구전 전통이 글쓰기와 예술을 통해 증보되면 문화는 무한히 성장할 수 있고 세대를 건너 뛸 수도 있다. 그러나 후성 규칙이 주는 영향의 방향을 근본적으로 결정하는 것은 유전적인 것이며 제거될 수 없기 때문에 일정하게 유지된다. - P232

어떤 이들은 주변 문화와 환경에 더 잘 생존하고 번식하도록 해 주는 후성 규칙들을 대물림한다. 그리고 그런 규칙을 전혀 갖지 않은 사람이나 있어도 약한 규칙을 가진 이들은 생존과 번식에서 밀려난다. 바로 이런 방식으로 좀 더 성공적인 후성 규칙들은 많은 세대를 거치면서 그 규칙들을 규정하는 유전자들과 함께 개체군 내에서 널리 퍼지게 된다. 결과적으로 인간 두뇌의 해부 생리적 구조가 진화해 왔듯이 행동도 자연선택에 의해 유전적으로 진화해 왔다. - P233

어떤 문화 규범은 경합하는 다른 규범들보다 더 잘 생존하고 번식한다. 이 때문에 문화는 유전적 진화와 유사한 방식으로 진화하지만 그 속도는 일반적으로 훨씬 더 빠르다. 문화적 진화의 속도가 빠르면 빠를수록 유전자와 문화 사이의 연결은 더 느슨해진다. 하지만 그런 연결이 완전히 끊어지는 법은 없다. 문화는 정확한 유전적 처방 없이 고안되고 전달되는 정교한 적응들을 통해 환경 변화에 빠르게 적응할 수 있도록 한다. 이런 의미에서 인간은 다른 모든 동물들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 P233

뱀과 몽사는 유전자 · 문화 공진화의 분명한 사례이다. 문화 속에 몽사와 그 상징이 얼마나 많이 깃들어 있는지는 그 환경 속에 실제로 얼마나 많은 진짜 독사가 살고 있는지와 상관이 있어 보인다. 그러나 그 독사들은 후성 규칙에 의해 주어지는 공포와 매혹의 힘 덕분에 신화적 의미도 쉽게 얻는다. 즉 그 독사들은 문화에 따라 때로는 치유자, 전령, 악마, 또는 신으로 기능하기도 한다. - P234

유전자 · 문화 공진화는 자연선택에 따른 진화 과정의 특수한 확장이다. - P234

생물학자들은 대개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물들의 진화의 배후에 자연선택이라는 일차적 힘이 있다고 믿는다. 이 힘은 조상 호미니드 종이 침팬지를 닮은 원시 계통에서부터 분리된 이래 500만 년 혹은 600만 년에 걸쳐 호모 사피엔스를 창조해 낸 원동력이었다. 자연선택에 따른 진화는 근거 없는 가설이 아니다. - P234

자연선택이 작용하는 유전 변이는 원리적으로 분자 수준에서 잘 이해된다. - P234

자연선택에 따른 진화란 무엇인가? 언젠가 프랑스 생물학자 자크 모노(Jacques Monod)는 데모크리토스의 말을 빌려 "우연과 필연"이라고 간략히 말한 바 있다. - P234

같은 유전자의 다른 형태들(대립 유전자)은 유전자를 구성하고 있는 긴 DNA 서열의 무작위적 변이(돌연변이)를 통해 생겨난다. DNA 서열의 몇 지점들에서 이렇게 변이가 생기고 대립 유전자가 유성 생식의 재조합 과정에서 섞임으로써 유전자들의 새로운 혼합이 매 세대마다 새롭게 창조된다. 이때 개체의 생존과 번식을 강화해 주는 대립 유전자는 개체군 내에 퍼지고 그렇지 않은 것들은 사라진다. - P235

우연한 돌연변이는 진화의 원료이다. 한편, 환경의 도전은 어떤 돌연변이들이 살아남을 것인지를 결정하며 다양한 유전적 원료들을 사용해서 우리를 한 번 더 빚어 낸다. - P235

세대를 충분히 거치면 변이와 재조합은 개체군 내에서 거의 무한정한 유전적 변이들을 만들어 낼 수 있다. 예컨대, 인간 유전체 내의 1만 5000~10만 개의 유전자 중에서 단지 1,000개의 유전자가 두 가지 형태로 개체군 내에서 존재한다고 해 보자. 그렇게 되면 상상할 수 있는 유전자 재조합의 수는 10^500개인데 이것은 우리가 볼 수 있는 우주 안에 존재하는 모든 원자들의 수보다 많다. 이런 사실 때문에 일란성 쌍둥이인 경우를 제외하면 두 인간이 동일한 유전자들을 공유할 확률, 또는 두 인간이 동일한 유전자들을 호미니드 계통의 진화를 통해 공유할 확률은 무시해도 좋을 만큼 작다. - P235

각 세대마다 부모의 염색체와 유전자는 한데 섞여 새로운 혼합체를 만들어 낸다. 그러나 끊임없이 일어나는 이런 재배열이 그 자체로 진화를 일으키지는 않는다. 진화에도 일관된 원동력이 있어야 하는데 자연선택이 바로 그런 힘이다. - P235

특정한 해부학적 구조, 생리, 행동을 규정하는 유전자들 때문에 그 개체가 생존과 번식을 더 잘하게 된다면 그 유전자들은 다음 세대에서 점점 많아질 것이다. 반면 그렇지 못한 유전자들은 사라질 것이다. 이와 유사한 방식으로 생존과 번식을 더 잘하는 개체군도 경쟁하는 다른 개체군들에 비해 더 번성한다. 심지어 종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 P235

만일 기적을 믿는다면 불가능한 것은 없다. 예컨대 신은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물을 단 한번에 완전한 형태로 불과 몇천 년 전에 창조했을 수 있다. 하지만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신은 지구 구석구석에 절묘한 거짓 증거들을 끝도 없이 펼쳐 놓은 이상한 존재가 된다. 그는 그 증거들을 통해 우리를 생명이 몇십억 년 전부터 진화해 왔다는 결론을 내리게 만드는 기묘한 존재일 것이다. 하지만 성경은 신이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신약과 구약의 신은 변덕을 부리기도 하고 때로는 고압적이고 거절도 하고 불같이 화도 내는 신비로운 존재이기는 하지만 결코 교묘하게 남을 속이는 존재는 아니기 때문이다. - P236

구체적인 사실들을 잘 알고 있는 생물학자들은 인류 진화의 증거를 전혀 의심하지 않으며 그 진화를 지휘한 힘이 자연선택이라는 사실에 모두 동의한다. 하지만 적어도 진화를 설명할 때 꼭 언급해야 할 다른 힘이 있다. 예컨대 DNA의 몇 문자들과 그것에 따라 암호화된 단백질은 긴 기간을 지나면서 우연만으로도 대체될 수 있다. - P236

변화가 너무 점진적으로 일어나서 개체의 진화 계통 나이들을 충분히 측정할 수 있을 때도 있다. 그러나 이런 유전적 부동(genetic drift)은 세포, 개체 그리고 사회 수준에서 일어나는 진화에 관해 새로운 정보를 더해 주지 못한다. 왜냐하면 부동에 개입된 돌연변이는 대체로 중립적이기 때문이다. 즉 그런 돌연변이는 상위 수준의 조직들(예컨대, 세포나 유기체)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 P237

문제를 가능한 한 간결하게 하자. - P237

자연선택에 따른 진화의 방식은 유전적 진화뿐만 아니라 문화적 진화에도 유사하게 적용된다. 그리고 두 종류의 진화는 어떻게든 연결되어 있다. 우리는 유전자가 아니라 문화의 제지를 받기도 하고 사회적 선과 악을 생각하기도 한다. - P237

문화라고 불리는 이 이상하기 짝이 없는 창조물은 도대체 무엇인가? 이 초유기체는 정확히 무엇인가? 우선 수많은 사례들을 분석해 온 인류학자들이 이 질문에 답을 해 줘야 한다. 그들은 문화를 삶의 총체적인 방식으로 본다. 즉 종교, 신화, 예술, 기술, 스포츠를 비롯한 모든 체계적 지식으로서 다음 세대로 전달되는 그 무엇의 총체가 문화이다. - P237

"문화는 하나의 산물이다. 그리고 역사적이며 아이디어, 패턴, 가치 등을 포함하고 있다. 또한 선택적이고 학습되며 기호들에 기초해 있다. 그리고 행동으로부터의 추상이며 행동의 산물들이다." - P237

문화는 또한 전일적이다. 왜냐하면 "분리된 부분들과 대량의 유입물들이 그 속에서 작동 가능한 하나의 체계를 이루기 때문이다." 이 부분들 가운데에는 인공물들이 있다. 그러나 이런 물리적 대상들은 인간 마음속에서 개념들로 표상될 때에만 의미를 지닌다. - P237

사회 이론 분야에서 20세기를 풍미했던 극단적 후천주의자(nurturalist)들은 문화를 어떻게 볼까? 그들에 따르면 문화는 유전자로부터 출발하기는 했으나 자율적인 존재가 되었다. 들불이 작은 성냥에서 시작되듯 문화는 그 자체로 자율성을 갖게 되면서 창발적 속성들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창발적 속성들은 문화를 일으킨 유전적이고 심리적인 과정들과는 더 이상 관련이 없다. 따라서 모든 문화는 문화로부터 온다! - P238

각 사회가 문화를 창조하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 문화에 의해 창조되기도 한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끊임없이 선물을 교환하고 음식과 술을 나누고 장식을 하고 서로 돌보고 음악과 이야기를 주고받는 행위들을 통해 기호를 공유하는 마음이 형성된다. 그리고 이것은 외부 실재를 지배하는 공상의 세계로 집단을 통합한다. 사막, 초원, 빙원, 도시 어디건 상관없이 집단은 공상의 세계에서 구성원들을 운명 공동체로 묶어 주는 도덕적 합의와 의식의 그물을 친다. - P238

문화는 생산적인 언어로 만들어진다. 언어는 정보를 전달하기 위해 만들어진 자의적인 단어와 기호의 집합이다. 이런 측면에서 호모사피엔스는 독특하다. 인간 아닌 동물들도 의사소통 체계를 가지고 있다. 매우 정교한 경우도 있다. 하지만 그 동물들은 그 체계를 만들거나 다른 개체들에게 가르치지는 않는다. - P238

인간이 사투리를 배울 수 있는 것처럼 노래하는 새의 경우에도 방언 비슷한 것이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의 동물 의사소통 체계는 본능적이며 따라서 세대를 거치면서 변하지 않는다. 꿀벌의 꼬리춤(waggle dance)과 개미의 냄새길은 기호적 요소들을 포함하며 그런 능력과 의미는 유전자에 의해서 정교하게 규정될 뿐 학습을 통해서 변화되지는 않는다. - P238

동물들 중에서 대형 유인원 (great apes, 유인원 중에서 덩치가 큰 동물들을 뜻하는 말로서 고릴라, 오랑우탄, 침팬지, 보노보 그리고 인간이 여기에 속한다.)만이 진짜 언어 능력에 접근해 있다. 침팬지와 고릴라가 기호들이 표시된 판을 사용하는 훈련을 받으면 그들은 임의의 기호들의 의미를 배울 수 있다. - P239

보더 콜리(border collies,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경계 지방의 목양견.) - P239

보노보를 비롯한 다른 대형 유인원은 동물의 기준으로는 높은 수준의 지능을 가졌다고 볼 수 있지만 한 가지 점에서 인간과는 뚜렷이 구분된다. 그들은 기호 언어를 사용할 수는 있어도 인간처럼 그것을 발명할 수는 없다. - P240

침팬지들은 인간과 유사하게 교활하고 기만적인 행동을 할 수 있다고 알려져 있다. 그들은 동물 중에서 "마키아벨리적 지능(Machiavellian intelligence)"이 가장 뛰어난 존재이다. ...(중략)... 침팬지들은 이합집산에 능하고 권모술수가 뛰어나다. 침팬지는 자신의 의도를 목소리 신호와 자세, 몸의 움직임, 얼굴 표정, 털 곤두세우기 등으로 전달한다. 그러나 인간의 언어를 닮았거나 육체적 제약이 없는 다른 형태의 기호 언어는 만들어 내지 못한다. - P240

사실 대형 유인원은 대부분의 시간을 조용하게 지낸다.  ...(중략)... "열 마리의 야생 침팬지들이 성별과 나이에 맞게 짝을 지어 곰비 (Gombe) 강 유역의 무화과나무 위에서 평화롭게 먹이를 먹고 있었다. 하지만 거의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침팬지를 관찰한 경험이 없는 이들은 그 나무 밑을 지나간다 해도 그들이 있다는 것조차 눈치 채지 못할 것이다." - P240

호모 사피엔스는 그야말로 수다쟁이 유인원이다. 인간은 언제나 소리를 내어 의사소통을 한다. 인간에게는 말을 하게 하는 일이 입을 다물게 만드는 일보다 훨씬 더 쉽다. - P240

인간은 유아기에 어른들과 말을 주고받는 과정에서 말하기를 시작한다. 그때 어른들은 감정적으로 과장되어 있고 매우 느리며 모음이 많은 단조로운 ‘엄마말(motherese)‘로 아기들을 상대한다. 혼자 있을 때에도 아기들은 앙앙울고 킥킥거리며 일명 ‘아기말(crib speech)‘이라고 불리는 단음절을 계속해서 내뱉는다. 그리고 그런 말을 몇 달간 하고 나면 그들은 복잡한 단어와 어구를 구사하게 된다. 이때쯤에 유아가 구사하는 말의 레퍼토리는 어른의 어휘 수준에 거의 육박한다. 이 레퍼토리는 지겹도록 반복되고 수정되며 실험적으로 혼합된다. 네 살이 되면 평균적으로 어린이들은 문법을 정복한다. 그리고 여섯 살이 되면 미국 어린이들은 적어도 1만 4000단어 정도를 구사할 수 있다. - P241

반면 어린 보노보들은 움직임, 소리, 때로는 기호를 가지고 자유롭게 놀고 실험도 해 보지만 칸지 수준으로 언어 능력이 향상되려면 인간 조련사에 의해 풍부한 언어 환경을 지속적으로 제공받아야 한다. - P241

인간의 아기는 속도와 정확도 면에서 모방의 귀재이다. 그들은 태어난 지 40분 만에 혀를 불쑥 내밀며 어른의 움직임을 따라 머리를 이쪽에서 저쪽으로 움직인다. 12일이 지나면 그들은 복잡한 얼굴 표정과 손동작을 흉내 낸다. 두 살이 되면 말로 하는 설명을 알아들으며 단순한 도구를 사용한다. - P242

언어 본능에 대해서 말하자면 인간은 다른 이들이 하는 말을 정확하게 흉내 낼 수 있으며 엄청난 수다쟁이이다. 문법은 거의 자동적으로 정복하며 엄청난 수의 어휘를 손쉽게 획득한다. 이 본능은 어떤 다른 동물들도 따라올 수 없는 정신 능력에 기반을 둔 인간 고유의 속성임에 틀림없다. - P243

인간 언어의 기원을 밝히는 일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다. 하지만 불행히도 행동은 화석으로 남지않는다. ...(중략)... 대신 고생물학자들은 인류의 발성 구조가 변해 왔음을 말해 주는 화석 뼈들을 가지고 있다. 그 뼈들은 인간의 후두가 침팬지보다 더 밑으로 내려오고 길이도 길어졌음을 보여준다. 또한 그것들은 두개골 안쪽에 들어 있는 뇌의 언어 영역에도 변화가 생겼을 가능성도 제기한다. - P243

고생물학자들은 인류가 사용한 인공물들이 꾸준히 향상되어 왔다는 증거들도 얻었다. 예컨대 호모 에렉투스(Homo erectius)는 45만년 전에 불을 통제하며 사용할 수 있었을 것이고, 초기 호모 사피엔스는 25만 년 전 케냐에서 쓸모 있는 도구를 제작했고 16만 년 전에는 콩고에서 잘 다듬어진 창끝과 단검을 만들어 냈으며 3만~2만 년전에는 유럽 남부에서 종교 의식 때 입는 복장과 장신구를 제작했던 것으로 보인다. - P243

우리는 현생 호모 사피엔스의 뇌가 해부학적으로는 이미 10만 년 전쯤에 완전한 형태를 갖췄다는 사실을 안다. 그때부터 물질문화는 처음에는 서서히 진화하다가 다음에는 팽창했으며 나중에는 폭발했다. - P243

몇 개의 돌과 뼈 도구에서 시작된 인류의 기술은 농경 • 촌락 사회에 도달하고 난 후에는 경이적으로 발전했다. (예를 들어, 미국에만 현재까지 500만 개의 특허가 등록되었다.) 요컨대 문화의 진화는 지수 함수적인 궤적을 따른다. 여기에 신비가 있다. 도대체 기호 언어는 언제 생겼으며 그것이 정확히 어떤 방식으로 문화 진화를 폭발시켰는가? - P243

유전자 · 문화 공진화의 궤적을 찾아내기 위해서는 선사 시대의 기록을 재구성하는 일은 뒤로 미루고 현생 인류의 두뇌가 문화를 어떻게 만드는지를 탐구하는 편이 낫다. 그 다음으로 좋은 시도는 아마도 문화의 기본 단위를 찾는 작업일 것이다. 비록 그러한 요소가 적어도 전문가들이 만족할 만한 수준에서는 아직까지 확인되지는 않았지만 문화의 기본 단위가 존재하며 어떤 특징들을 가질 것인지 등은 합리적으로 추론할 수 있다. - P244

자연과학의 위대한 성공은 각 물리 현상을 그 구성 요소들로 환원함으로써 실제로 이룩되었다. 과학자들은 현상의 전일론적 속성들을 새롭게 조직하기 위해 그것을 구성 요소들로 분해했다. 예컨대 고분자화학의 발전은 유전자가 정확히 어떤 성질을 갖는지를 밝혀냈고 유전자에 근거한 집단유전학 연구는 생물 종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가다듬어 주었다. - P244

일화 기억(episodic memory)은 사람을 비롯한 다른 구체적 대상들에 대한 과거의 직접 지각(perception)을 상기시킨다. 이것은 마치 영화 속의 이미지를 떠올리는 것과 같다. - P244

의미 기억(semantic memory)은 대상과 개념을 다른 대상과 개념에 연결시킴으로써 의미(meaning)를 상기시킨다. 이런 경우에 그 의미가 그 대상과 개념의 이미지를 통해 직접적으로 연결될 수도 있고 이미지를 표시하는 기호를 통해 연결될 수도 있다. - P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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