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 정신>이라는 잡지에 글을 쓰는 강석원이 사망한 서인주에 대해 자신만의 왜곡된 관점으로 쓴 평전을 내려고하자 서인주의 친구인 이정희는 서인주의 자식인 민서에게 악영향이 갈 것을 우려하여 그 평전의 출간을 막기위해 사방팔방 수소문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는 인주에 관해 왜곡되지 않은 올바른 정보를 얻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여기저기 수소문한 끝에 이정희는 친구인 서인주가 예전에 그림을 전시했다던 명 화랑의 관장인 명은숙을 만난다. 명은숙은 그간 자신의 화랑에서 있었던 서인주와 관련된 이런저런 얘기들을 해준다. 인주는 처음엔 그닥 유명세가 없었으나 이후 이어진 몇 번의 전시를 통해 유명세가 생겼고 이후에 상업 화랑들이 인주에게 달려들면서 나중에는 명 화랑보다 규모가 좀 더 큰 대형 화랑인 P화랑으로 옮겨갔다고 한다. 아이를 혼자 키워야 했던 인주의 상황상 경제적으로 훨씬 더 나은 대우를 해주는 P화랑의 유혹을 뿌리치기는 매우 힘들었을 거라고 명은숙은 회고한다.

근데 아무래도 P화랑은 대형 상업 화랑이다보니 조금만 성과가 안보인다 싶으면 가차없이 내치는 경우들이 많았다고 하는데, 이로인해 자신만의 색깔이 강했던 인주가 결과적으로 자기 색깔을 잃어버리면서 괴로워했을거라는 게 명은숙의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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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이어 정희가 수소문끝에 만난 사람은 인주가 과거에 일했던 미술학원의 원장인 주승우였다. 그는 인주를 회고하면서 그렇게 좋은 사람이 없었다며 악착같이 살려고 발버둥쳤던 사람이기에 절대로 자살할 사람이 아니라고 강하게 말한다.

한편 여기 별도로 밑줄치진 않았지만, 서인주와 관련하여 만나달라는 이정희의 부탁을 끝내 거절하는 소설 속 인물들도 적지 않았다. 자기와 직접적으로 상관없거나 딱히 신경쓰고 싶지 않다는 단순한 이유에서였다. 이런 건 어쩌면 소설 뿐만 아니라 요즘 우리 시대 사람들의 각박한 모습과도 일정부분 닮아 보인다.

계속 읽다보니 이러한 이정희의 수소문과는 별개로 강석원이 결국 서인주에 관한 평전을 책으로 출간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아직 그 책에 정확히 어떤 내용이 나와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정희의 입장에서는 위기상황인 것은 분명해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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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서 7장 ‘얼음 화산‘ 이라는 챕터로 넘어가는데 여기선 김영신이라는 인물이 새롭게 나온다. 근데 실은 엄밀히 말하면 새롭게라고 하기도 조금 애매한게, 위에서 언급했던 이정희의 수소문 과정에서 김영신의 이름이 아주 잠깐 나오긴 했었다. 다만 그때는 서인주에 대한 얘기를 부탁했던 이정희와의 만남을 단칼에 거절했었기에 그냥 스쳐지나가는 인물 정도로만 여겼었는데, 그런 스쳐지나가는 인물의 구체적인 이름이 나왔던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새롭게 시작하는 7장에서 김영신이 이야기 속의 핵심 인물로 중심이 되는 것을 보며, 소설에서 구체적인 이름이 나온다는 건 분명 그럴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온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문제는, 서인주 씨가 정말 그리고 싶은 게 그 시리즈는 아니었을거란 거죠. 가슴에 불이 타는 사람인데, 그냥 불이 아니라 시커먼 불이 타는데, 그렇게 고요한 숲 그림은 어쩌다 한 번, 문득 마음이 고요할 때 나오는 거지. 그래서 죽은 것 아닐까 싶어요. 자기 안에서 뭐랄까, 분열이 싹튼 거겠죠. - P203

《미술정신》에 실린 작품은 흥미롭게 봤어요. 도판만 봐서 정확히 말하긴 어렵지만, 이미지 자체는 괜찮더군요. 문제는 빨리 자기 작업을 브랜드로 만들어서 팔아야 살아남는 게 이 바닥인데, 구상하다 비구상하다, 난데없이 한지에 먹으로 재료를 바꾸고…………… P화랑에선 좋게 보지 않았을 거예요. 그쪽 사람들, 작가들 피를 말리는 걸로 유명해요. 시간을 안 주죠. - P204

강석원 교수를 만나봤지요? 서 작가와 조금이라도 인연이 있는 사람이면 전부 인터뷰했다던데. 거절하고 싶었지만, 고인을 생각해서저도 인터뷰에 응했어요. 저희로선 강 교수한테 섭섭한 게 많아요. P화랑 대표를 서 작가한테 소개시켜준 장본인이니까. 지금 유고전을 기획하는 모양인데, 물론 일이 이렇게 됐으니 P화랑이랑 하는 게 당연하지만, 저희를 이렇게까지 철저하게 배제할 순 없는 거예요. - P204

가난, 빌어먹을 가난이 죄지. 홍콩에서 경매로 그림 몇 점 판 돈이면 다 메우고 꿰매고, 팔자 고칠 수 있는 가난. - P208

말도 안 되지. 서 선생이 왜 자살을 해. 당연히 사고지. 서 선생을 눈곱만큼이라도 아는 사람은 그런 말 못 해. 얼마나 아등바등 살았어. 얼마나 몸부림을 쳐댔어. 살려고 그렇게 몸부림을 쳤지, 죽으려고 그랬겠어요? 애는 또 얼마나 어리고. 그 애한테 얼마나 끔찍했어? 그렇게 정 많은 사람은 자살 못 해. 여기 배우는 애들한테도 정성이었어요. 안 해도 될 일들을 다 껴안고 골병이 들었지. 다들 그렇게 생각한다구? 데려와봐요. 평론가? 교수? 미술판 사람들? 웃기고들 있군. 미안해요. 내가 요즘 마음이 이래.. 이 빌어먹을 눈물이. - P208

모르겠어, 이 모든 게 어떤 미친 짓이었는지. 무엇을 위해 나는 떠벌이고, 미소 짓고, 변명하고, 애원하고, 간절하고, 진지하고, 걷고, 뛰고, 인파를 헤치고, 먹고, 굶고, 목마르고, 계단을 오르고, 엘리베이터 단추를 누르고, 명함을 받고, 화장실에서 루주를 바르고, 눈을 맞추고, 미소 짓고, 고개를 끄덕이고, 결의에 차고, 기다리고, 메모를 남기고, 전화번호를 받아 적고, 사과하고, 감사하고, 수없이 네 이름을 말하고, 휴대폰 배터리를 바꿔 끼우고, 계단을 내려가고, 시계를 보고, 걷고, 간판을 읽고, 발뒤꿈치가 벗겨지고, 그리고 - P211

이 책을 펼치고 싶지 않아.
펼치는 순간 책장들이 부스러질 것 같아. 손가락에 엉기며 녹아내릴것 같아. 촛농처럼 끓어오를 것 같아. - P211

강석원이 창조해낸 인주는 책장과 책장 사이를 절름거리며 건너다녔다. 강석원의 문체는 딱딱함과 열의, 반짝임과 둔감함, 진지함과 얄팍함이 뒤섞인 묘한 것이었다. 무엇인가가 불쾌했고, 무엇인가가 가짜였고, 동시에 무엇인가가 진짜였다. - P212

흔히 예술혼이라고 불리는 과장된 열정, 새 발자국 같은 필체로 적힌 편지들ㅡ그중 어떤 것들은 나를 실망시켰다ㅡ, 지인들이 부풀리고 때로 미화한 기억들을 나는 읽었다. - P212

허점이 드러날 만한 곳마다 수사와 감상이 조악하게, 때로는 말끔하게 덧칠된 책을 읽었다. - P213

아름답게 편집된 책, 방금 세상의 것이 된 책, 인주가 무수히 덧그은 검은 선들이 꿈틀거리는 책을 읽었다. 손가락에 닿은 책장들이 뜨겁게 부스러질 것 같은 책. 불같은 책. 아니, 얼음 같은 책. 소리치는책. 아니,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책. 벙어리 책. 더러운 책. 피 한 방울 묻지 않은 책. 방금 이 세상에 폭약처럼 던져진 책. 내 두 눈으로 똑똑히 읽은 책. 한 문장 한 문장, 한 단어 한 단어가 짧고 얕은 무수한 칼자국들처럼, 수만 개의 촘촘한 바늘처럼 이마를 가르고 들어와 박힌 책을 읽었다. - P213

......달이 지구를 중심으로 공전하며 우리에게 보이는 면이 언제나 같은 쪽이라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오랜 세월 운석들과 충돌해 수두를 앓은 흉터 같아진 뒷면은, 오직 우주선에서 찍은 사진으로만 관측할 수 있다. - P218

운이 좋았기 때문에 나는 서인주라는 사람의 가까이에 있었다. 그녀는 타고난 위대함의 씨앗을 가진 예술가였고, 주변을 감화시키는 힘을 가진 특별한 자연인이었다. 바로 그 때문에 그녀의 마지막 선택은 우리에게 더욱 큰 충격이었다. 그녀가 살아 있는 육체를 가지고 우리를 둘러싼 궤도를 돌고 있을 때, 안타깝게도 우리는 그녀의 뒷면을 보지 못했다. 수없이 부서지고 파인 자국들을 어루만져주지 못했다. - P218

그녀는 작업실의 달력 가장자리에 적었다. ‘내가 아픈 곳은 달의 뒷면 같은 데. 피 흘리는 곳도, 아무는 곳도, 짓무르고 덧나는 곳, 썩어가는 곳도 거기 당신에게도, 누구에게도, 나 자신에게도 보이지 않는다.‘ - P219

알고 있다. 로베르 르파주의 일인극 「달의 저편」의 대사처럼, 그녀의 미술관을 지어야 할 진실한 장소는 오직 달의 뒷면뿐이다. 우리들의 시선으로 더럽혀지지 않을 시시각각 충돌해오는 운석들과 맞서 부서지기를 택해야 할 그 고요한 곳...... - P219

강석원은 알지 못했거나, 의도적으로 누락했다.
인주가 달력에 쓴 것은 내가 쓴 대사였다.
십일 년 전 공연되었던, 모두에게서 잊혀진 연극의 무대에서, 이제는 퇴역 배우가 된 여주인공은 객석을 향해 독백했다.
내가 아픈 곳은 달의 뒷면 같은 데예요. 피 흘리는 곳도, 아무는 곳도, 짓무르고 덧나는 곳, 썩어가는 곳도 거기예요. 당신에게도, 누구에게도...... 나 자신에게도 보이지 않아요. - P219

컴퓨터 책상 위에 걸린 4호 크기의 액자에 담긴 것은, 얼음에 덮인 미시령의 흑백사진이었다. - P226

어린 지구는 처음에 마그마가 일렁이는 붉은 얼굴이었다가, 수천만년 동안 펄펄 끓는 비를 맞고서 파란 얼굴이 되었고...... 빙하에 덮이면 하얗게 얼어붙은 얼굴이 되었다가, 그 얼음이 녹아서 바다가 되면 다시 파랗게 되기를 반복했겠지. - P228

궁금해.
지구가 가장 차가웠을 때, 가장 선명한 흰빛의 얼음덩어리였을 때, 그 위로 눈이 내리는 건 어떤 모습이었을까. - P228

버려진 것들을 좋아해요. 지금 앉은 소파, 걸상도 주워온 거예요. - P230

고래는 한번 피를 흘리기 시작하면 멎지 않는다고. 워낙 덩치가 커서 바로 안 죽는 것뿐이지, 결국은 죽고 만다고. - P232

천천히 아랫입술을 씹다가, 뱉듯이 짧게 그녀는 말했다.
......상처받았지. - P233

어리석지 않아요? 저것들을 깎느라 나무 열두 그루를 끝장내다니. 마티카라고, 두 팔로도 다 못 안는 인도네시아 활엽순데...... 열두그루면 숲이라고 불러야겠죠. 그것들을 다 베어 죽이고, 나는 늙고..... 하나뿐인 친구였던 사람은 날 버리고. - P233

무엇인가에 복수하는 것 같은, 복수하며 스스로 비명을 지르는 것 같은 전기톱 소리가 다시 시작되었다. - P234

지워지지 않고 나는 끝까지 걸었다. - P237

나는 인주를 몰랐다.
인주가 나를 몰랐던 것보다 더. - P240

인주는 나에게 한번도 어머니에 대해 말한 적이 없었다. 삼촌에 대해 인주가 말할 수 있는 상대가 있었다는 것도 오늘 처음 알았다. 김영신은 인주의 과거의 많은 부분을 나보다 더 알고 있다. 강석원을 십분 만에 돌려보낸 것은, 그와 인주의 관계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녀가 나에게 이 편지와 가락지를 준 것 역시, 충분히 나를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 P241

적막에도 형상이 있다고 삼촌은 말했다.

적막은 육각형의 작은 눈송이 하나 속에,
빙하기에 내리는 눈과 다르지 않게,
얼음에 싸인 불꽃처럼 거기 있다고 했다. - P241

생각해보겠습니다, 라고 그는 나에게 말했다. 무엇을 생각한다는 걸까. 무엇을 말할 것인가를? 무엇을 숨길 것인가를? - P245

「닥쳐」는 무대에 올라간 내 첫 희곡이었다. 심리치료의 임상 사례에서 모티프를 따온 것으로, 어린 시절 어머니로부터 은밀히 학대받았던 여자가 주인공이었다. 여자는 누군가와 긴밀한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곧 지배당하는 것이며 자신을 잃는 것이라는 공포 때문에 고립된 삶을 살아가는데, 어느 날 수수께끼 같은 남자를 만나 그가 제안한 ‘닥쳐‘ 게임을 한다. 그가 무슨 말을 하든 ‘닥쳐‘라고 응수하는 것이 그 게임의 유일한 규칙이다. - P246

무대 바닥에 엎드려 있던 여자가 어두운 객석을 향해 천천히 돌아앉으며 말한다. 혹시, 이것으로 내가 아픈 데를 다 알았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죠. 여자는 희미하게 웃는다. 내가 아픈 데는 달의 뒷면 같은 데에요. 누구에게도, 당신에게도...... 나 자신에게도 보이지 않아요. - P248

밤도 이상한데...... 새벽은 더 이상해. 삼 년쯤 잠을 안 자면 사람이 이상해지는 걸까? 그러니까, 내가 이상해져서 새벽이 이상하게 느껴지는 걸까? 밤에는 결이 있고 마디가 있고 틈이 있는데.. 새벽은 안 그래. 어떤 물결이야. 어떤 핏줄, 어떤 생명 같은 거...... 두근거림 같은 거. 빠담! 빠담! 빠담! 이 노래 가사가 무슨 뜻인지 알아? 심장 뛰는 소리야. 두근두근 뛰는 소리가 아니라, 쿠쿵! 쿠쿵! 쿠쿵! 새벽은 그래. 심장처럼 뛰어. 아무리 죽이려고 해도 죽일 수 없는게 내 안에 있어. 그게 느껴져......내가 미친 것 같니? 이상한 것 같아? - P251

둘 다일 수는 없다.

한 사람이, 자살한 동시에 자살하지 않은 것일 수는 없다.
모든 것을 버리는 동시에 버리지 않았을 수는 없다.
갓길 없는 미시령의 눈 쌓인 길에서, 벼랑의 안쪽과 바깥쪽 중 하나를 택해야 하는 단 한순간, 둘 다를 택할 수는 없다.
주저할 수도,
얼버무릴 수도 없다. - P256

인주가 재현한 삼촌의 별이 한 면 가득 태어나고 있다. 희고 뜨겁고 타오르는 것, 둥근 불꽃의 적막이 캄캄한 피 같은 먹 속으로 번진다. - P256

생각해보겠습니다, 라고 방금 그는 여자에게 말했다. 한 시간여 전에 나에게 했던 것과 같은 말이었다. 그것은 직업적인 습관일까. 변명일까. 진심일까. - P258

생명이 꺼지면 영혼은 고통 없는 곳으로 간다는 말을 당신은 믿습니까.
그 믿음에 의지해 때로 사람들은 피 흘리는 동료, 신음하는 개를 앞당겨 죽입니다. 하지만 사실일까요. 전장에서, 동물병원에서 그들의 고통을 사라지게 할 때, 정말 사라지는 것은 그들을 지켜보던 우리의 고통 아닐까요. - P259

넉 줄짜리 사회면 기사에 실린 그녀의 이름을 일 년 뒤 조간신문에서 보았을 때, 아무도 내 기도 따위를 듣고 있지 않았다는 당연한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둔하고 느린 동작으로 신문을 접어 책상 한쪽으로 밀어놓고 나는 기다렸습니다. 무엇인가가 내부에서 무너지기를.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몸 어디에서건 피가 철철 흘러나오기를. 피 흐르지 않았습니다. - P260

그날 당신이 꺼내놓은 추측들은 모두 틀렸지만, 이 사진을 내가 직접 찍었으리라는 짐작만은 옳았습니다. 오래전, 내가 그곳에서 이 사진을 찍었습니다. 그렇게 했던 것을 후회해왔습니다. 사진을 없애는 것으로 그곳을 잊을 수 있었다면 수십 번 그렇게 했을 겁니다. 그러나 그럴 수 없었습니다. 시시로 그곳을 기억하지 않았다면, 김에 덮인 거울 속의 사람처럼 내 인생은 지워지고 흘러내렸을 겁니다. 당신에게 이 편지를 쓰고 있는 지금, 거울 속의 그 사람이 이제 힘차게 흘러내려 지워지고 있는 것을 느낍니다. - P261

그녀에게 그곳이 어떤 장소였느냐고 당신은 물었지요. 나는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그곳이 그녀의 죽음의 장소가 된 이유를 알고 있느냐고 당신은 고쳐 물었지요. 당신의 입술이 떨리고, 열기 띤 눈이 세차게 깜박이는 사이 나는 조용히 반문했습니다. 그 사람에 대한 모든 것을 알아내 당신의 머릿속에서 합한다 해도, 결국은 순수한 추측만으로 메워야 하는 빈 곳이 남지 않겠느냐고. 강석원이라는 사람이 쓴, 당신이 동의하지 않는다는 저 책과 다름없이. - P261

처음 태어난 우주는 너무 작고 밀도가 높아 빛조차도 그 안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고 당신은 말했지요. 우주가 팽창하면서 간신히 활동할 수 있게 된 빛은 엄청난 열기와 함께 뿜어져 나왔고, 그 파동이 아직 완전히 식지 않은 채 온 우주에 퍼져 있다고 했습니다. 우주 어느곳에나 균일하게 남아 있는 그것이 바로 빅뱅의 증거, 모든 것이 처음에는 하나였다는 증거라고 했습니다. 텔레비전과 전화의 잡음 중에 그 우주 복사로 인한 것이 있다고, 처음 그것을 발견한 사람은 사막에서 전신주를 수리하던 사람들이었다고도 했습니다. - P262

우주가 무한하지 않다면, 빛의 속력으로 다다를 수 있는 시각의 힘으로 닿을 수 있는 먼 과거의 우주가 언젠가는 보일 거예요. 가깝게는 빙하기의 지구를 볼 수 있고, 지구가 태어나기 전의 어둠도 볼 수 있겠지요. 말하자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의 풍경을, 먼 미래의 다른 별에 살아남은 사람이 고배율의 망원경으로 볼 수 있을거예요. 우주가 유한하고 거대한 입방형의 덩어리라면, 움푹 파이고 휘어진 채 팽창하는 공간 어딘가에 우리의 과거와 미래가………… - P262

두려움 없이 내가 할 일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돼요.
그게 어떤 일입니까?
인주가 왜 죽었는지 알아내는 거예요. 그 죽음을 왜곡하는 사람들을 막는 거예요.
그리고?
거짓으로부터 인주의 아이를 보호하는 거예요. - P263

사십 년 전, 삼십 년 전, 이 년 전에도 그렇게 하지 못했듯이, 나는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 P264

나는 믿지 않습니다. 어떤 것도 찾아지지 않고, 어떤 것도 완성되지 않을 것입니다. 만의 하나 완성된다 한들 누구도 당신을 믿지 않을 것입니다. 당신이 진실이라고 믿는 언어를, 눈물을, 피를 믿지 않을 것입니다. 잔인하게도, 내가 당신에게 이 편지를 쓰는 것은 당신이 입을 틀어막힌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누구에게도 내 이야기를 전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니, 덜 가혹하게 말하겠습니다. 당신이 쓸 그 불가능한 책을 연민하기 때문입니다. 아니, 솔직하게 말하겠습니다. 목마른 사람처럼 이 편지를 남김 없이, 삼킬 듯이 읽어가는 당신의 얼굴을 상상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 상상 속에서 당신의 입술, 혼란 때문에 벌어진 입술에 내 입술을 문지르고 싶기 때문입니다. 단 한순간, 어리석고 병적인 그 상상이 나를 위무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니, 위악적으로 말하지 않겠습니다. 당신이, 수십 년의 시간을 건너와 나를, 어깨가 굽고 머리가 희어진 나를 찾아낸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 P265

그렇습니다. 수십 년 전의 이야기입니다. 당신의 친구가 태어나기 전의 이야기입니다. 당신이 힘겹게 맞춰온 퍼즐의 어디에도 들어맞지 않을 이야기입니다. 수십 년 동안 서서히 나를 죽여왔고, 이제 새벽이 되기 전에 나를 죽인 뒤 가까스로 끝날 이야기입니다. 한 여자의 눈에서 시작되는 이야기입니다. 총명한 눈, 방금 살얼음이 녹은 것처럼 젖어 있던 눈, 누구도 차마 오래 맞받아 바라볼 수 없었던 눈에서시작되는 이야기입니다. - P265

한 번의 삶에서 여러 인생을 살았다고 느낄 때가 있습니다. 시간은 흐르는 것이 아니라 마디마디 끊어지는 것이었다고, 어떤 마디의 기억들은 전생처럼 멀고 어둑하다고 느낄 때가 있습니다. - P265

내 옆으로 두 발짝 떨어져 앉은 그녀는 허밍으로 말러 2번 교향곡의 선율들을 들려주었습니다. 취한 사람 특유의 유순하고 부드러운 도취 속에서 그녀는 설명했습니다. 1악장의 회로가 얼마나 복잡하고 극적인지. 그것을 종결하는 방식이 얼마나 미묘한지. 삶과의 춤을 그린 2악장이 얼마나 대조적으로 세속적인지. 반면에 죽음과의 무도인 3악장에 어려 있는 씁쓸한 유머에 대해서. 그리고 4분55초의 알토 독창으로 처리한 ‘처음의 빛‘이라는 제목의 4악장. 그 견결하고 끔찍한 아름다움에 대해서. - P274

오, 붉은 장미여

인간은 거대한 가난 속에 있네.
인간은 거대한 고통 속에 있네.
차라리 나는 천국에 가서 머물고 싶네.

마침내 나는 널따란 길에 다다랐네.
한 천사가 그 길을 막고 나를 돌려보내려 하네.
아, 안돼.
나를 돌려보내지 말아줘.

나는 신에게서 왔으니 신에게로 돌아가려네.
사랑의 신은 나에게 빛을 비추겠지.
영원한 생명의 축복을 얻을 때까지. - P275

그 노래의 마지막 단어, 리베ㅡ생명ㅡ를 부르던 그녀의 떨리는 가성을 기억합니다. 지금까지 여러 음반을 찾아서 들어보았지만, 사십년 전 그녀의 부엌에서 들었던 만큼의 처절함을 느끼게 하는 가수는 없었습니다. 자신이 발음하는 영원한 생명을 향해 오직 절망과 갈망만으로 다다르려 하는, 다시 살아나고 싶지 않아 천사에게 애원할만큼의 고통을 알고 있는 사람의 목소리.

그렇게 열병의 날들이 시작되었습니다. - P275

오토 클렘페러네요. 브루너 발터가 지휘한 것 나한테 있는데. 말러를 좋아하시는 줄은 몰랐어요. - P2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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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의 3장인 ‘일곱개의 뺨‘ 이라는 파트를 읽고 있는데, 소설인지 연극인지 간혹 헷갈릴 정도로 배경의 전환이 수시로 이루어진다. 저자의 필력 덕분인지 개인적으로는 엄청난 몰입감을 가지고 본문의 내용들을 시간가는 줄 모르고 순식간에 읽어나갈 수 있었다. 소설 속에선 그 날의 참상이 아주 세세하게 묘사되어 있는데, 이 소설 속에 나오는 소재들로 만든 또다른 연극을 통해 그 날의 참상을 다시금 재조명하는 장면이 나온다. 처음 밑줄친 문장은 그 연극의 극중 여주인공의 대사인데, 길지 않은 문장 속에 많은 것들이 내포되어 있음을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이 소설을 이미 읽어보신 분들은 잘 아시겠지만 소설 속 시대 배경 자체가 검열이 일상화되어있는 숨막히는 통제 사회였기에 소설 속에서 연극을 기획한 사람도 노골적으로 그 날의 참상을 표현하는데는 제약이 많았다. 아마 연극을 기획하면서도 검열로 인해 끌려가지는 않을까 조마조마한 마음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여기 별도로 밑줄치진 않았지만 본문을 통해 군인들에 의해 무참히 짓밟히고 죽어나간 이름모를 주검들의 모습들을 보면서 그 날의 아픔을 직접 경험했던 분들의 마음을 어떤 말로도 감히 표현하기가 힘들겠다는 생각도 해볼 수 있었다.

아직도 이 사회에는 자신이 직접 겪어보지 않고 다른 사람의 아픔과 상처에 대해 함부로 말하는 사람들이 수없이 많다. 비록 서로가 서로를 완전히 100% 이해하는 것은 어렵더라도 상대방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이해하려는 자세가 그 어느때보다 필요한 시대가 아닌가 싶다. 각박한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필요한 마음가짐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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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이어지는 내용에서는 등장인물들 개개인이 겪었던 고통에 대한 묘사가 좀 더 자세하게 나오는데, 이 부분을 읽으면서 그 시대를 직접 겪었던 분들의 고통과 트라우마가 단지 그 당시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그 이후의 삶에서도 계속 이어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씻을 수 없는 상처라는 말이 어떤 의미인지를 뼈저리게 느낀 시간이었다.

당신이 죽은 뒤 장례식을 치르지 못해,
내 삶이 장례식이 되었습니다. - P99

어이, 돌아오소.
어어이, 내가 이름을 부르니 지금 돌아오소.
더 늦으면 안되오. 지금 돌아오소. - P100

당신이 죽은 뒤 장례를 치르지 못해,
당신을 보았던 내 눈이 사원이 되었습니다.
당신의 목소리를 들었던 내 귀가 사원이 되었습니다.
당신의 숨을 들이마신 허파가 사원이 되었습니다. - P100

봄에 피는 꽃들, 버드나무들, 빗방울과 눈송이들이 사원이 되었습니다.
날마다 찾아오는 아침, 날마다 찾아오는 저녁들이 사원이 되었습니다. - P101

네가 죽은 뒤 장례식을 치르지 못해, 내 삶이 장례식이 되었다.
네가 방수 모포에 싸여 청소차에 실려간 뒤에.
용서할 수 없는 물줄기가 번쩍이며 분수대에서 뿜어져나온 뒤에.
어디서나 사원의 불빛이 타고 있었다.
봄에 피는 꽃들 속에, 눈송이들 속에. 날마다 찾아오는 저녁들 속에. 다 쓴 음료수 병에 네가 꽂은 양초 불꽃들이. - P103

군인들이 압도적으로 강하다는 걸 모르지 않았습니다. 다만 이상한 건, 그들의 힘만큼이나 강렬한 무엇인가가 나를 압도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양심.
그래요, 양심.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게 그겁니다. - P114

군인들이 쏘아 죽인 사람들의 시신을 리어카에 실어 앞세우고 수십만의 사람들과 함께 총구 앞에 섰던 날, 느닷없이 발견한 내 안의 깨끗한 무엇에 나는 놀랐습니다. 더이상 두렵지 않다는 느낌, 지금 죽어도 좋다는 느낌, 수십만 사람들의 피가 모여 거대한 혈관을 이룬 것 같았던 생생한 느낌을 기억합니다. 그 혈관에 흐르며 고동치는, 세상에서 가장 거대하고 숭고한 심장의 맥박을 나는 느꼈습니다. 감히 내가 그것의 일부가 되었다고 느꼈습니다. - P114

가만있으면 다 죽어요. 우릴 다 쏴 죽일 거란 말이오. - P115

내가 총을 들 수 있는지, 살아 있는 사람을 향해 방아쇠를 당길 수 있는지 생각했습니다. 군인들이 가진 수천정의 총이 수십만의 사람들을 살해할 수 있다는 것, 쇠가 몸을 뚫으면 사람이 쓰러진다는 것, 더웠던 몸들이 차가워진다는 것을 생각했습니다. - P115

선생은 압니까, 자신이 완전하게 깨끗하고 선한 존재가 되었다는 느낌이 얼마나 강렬한 것인지. 양심이라는 눈부시게 깨끗한 보석이 내 이마에 들어와 박힌 것 같은 순간의 광휘를. - P116

그날 도청에 남은 어린 친구들도 아마 비슷한 경험을 했을 겁니다. 그 양심의 보석을 죽음과 맞바꿔도 좋다고 판단했을 겁니다. - P116

계단을 올라온 군인들이 어둠속에서 다가오는 것을 보면서도, 우리 조의 누구도 방아쇠를 당기지 않았습니다. 방아쇠를 당기면 사람이 죽는다는 걸 알면서 그렇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우린 쏠 수 없는 총을 나눠 가진 아이들이었던 겁니다. - P117

그 새벽 캄캄한 도청 계단을 따라 글자 그대로 콸콸 소리를 내며 흐르던 피가 떠오를 때마다 생각합니다. 그건 그들만의 죽음이 아니라, 누군가의 죽음들을 대신한 거였다고, 수천곱절의 죽음, 수천곱절의 피였다고. - P118

이제 그들이 원하는 것은 실제로 일어난 일들의 세목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마련한 각본에 우리들의 이름으로 빈칸을 채울 수 있도록, 우리들이 해야 할 일은 거짓 자백뿐이었습니다. - P118

참을 만큼 참았어. 그렇게 네가 다 처먹으면 난 어쩌란 말이야. - P119

그, 그러지 마요. ...(중략)... 우, 우리는...... 주, 죽을 가, 각오를 했었잖아요. - P119

순간 깨달았습니다. 그들이 원한 게 무엇이었는지. 우리를 굶기고 고문하면서 그들이 하고 싶었던 말이 무엇이었는지. 너희들이 태극기를 흔들고 애국가를 부른 게 얼마나 웃기는 일이었는지, 우리가 깨닫게 해주겠다. 냄새를 풍기는 더러운 몸, 상처가 문드러지는 몸, 굶주린 짐승 같은 몸뚱어리들이 너희들이라는 걸, 우리가 증명해주겠다. - P119

카, 카스테라가 제, 제, 제일 머, 먹고 싶어요. 사, 사이다하고 가, 같이. - P120

생각하고 또 생각했습니다.
이해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든 내가 겪은 일들을 이해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 P120

묽은 진물과 진득한 고름, 냄새나는 침, 피, 눈물과 콧물, 속옷에 지린 오줌과 똥. 그것들이 내가 가진 전부였습니다. 아니, 그것들 자체가 바로 나였습니다. 그것들 속에서 썩어가는 살덩어리가 나였습니다. - P120

지금도 나는 여름을 견디지 못합니다. 벌레 같은 땀이 스멀스멀 가슴팍과 등으로 흘러내리면, 내가 살덩어리였던 순간들의 기억이 고스란히 돌아와 있는 걸 느끼며 깊은 숨을 쉽니다. 이를 악물고 더 깊은 숨을 쉽니다. - P121

몸이 사라져주기를, 지금 제발, 지금 내 몸이 지워지기를, - P121

죽음은 새 수의같이 서늘한 것일지도 모른다고 그때 생각했습니다. 지나간 여름이 삶이었다면, 피고름과 땀으로 얼룩진 몸뚱이가 삶이었다면, 아무리 신음해도 흐르지 않던 일초들이, 치욕적인 허기 속에서 쉰 콩나물을 씹던 순간들이 삶이었다면, 죽음은 그 모든 걸 한번에 지우는 깨끗한 붓질 같은 것이리라고. - P122

우리는 총을 들었지, 그렇지?
나는 고개를 끄덕이지도, 그에게 대꾸하지도 않았습니다.
그게 우릴 지켜줄 줄 알았지.
스스로 묻고 스스로 답하는 일에 익숙한 듯, 그는 술잔을 향해 희미하게 웃었습니다.
하지만 우린 그걸 쏘지도 못했어. - P127

그러니까 형, 영혼이란 건 아무것도 아닌 건가.
아니, 그건 무슨 유리 같은 건가.
유리는 투명하고 깨지기 쉽지. 그게 유리의 본성이지. 그러니까 유리로 만든 물건은 조심해서 다뤄야 하는 거지. 금이 가거나 부서지면 못쓰게 되니까, 버려야 하니까.
예전에 우린 깨지지 않은 유리를 갖고 있었지. 그게 유린지 뭔지 확인도 안해본, 단단하고 투명한 진짜였지. 그러니까 우린, 부서지면서 우리가 영혼을 갖고 있었단 걸 보여준 거지. 진짜 유리로 만들어진 인간이었단 걸 증명한 거야. - P130

우리는 서로에게 의지했지만, 동시에 언제나 서로의 얼굴을 후려치고 싶어했습니다. 지우고 싶어했습니다. 영원히 밀어내고 싶어했습니다. - P132

무슨 권리로 그걸 나에게 요구합니까. - P132

아시겠습니까. 그러니까 이 사진에서 이 아이들이 나란히 누워있는 건, 이렇게 가지런히 옮겨놓은 게 아닙니다. 한줄로 아이들이 걸어오고 있었던 겁니다. 우리가 시킨 대로 두 팔을 들고, 줄을 맞춰 걸어오고 있었던 겁니다. - P133

어떤 기억은 아물지 않습니다. 시간이 흘러 기억이 흐릿해지는게 아니라, 오히려 그 기억만 남기고 다른 모든 것이 서서히 마모됩니다. 색 전구가 하나씩 나가듯 세계가 어두워집니다. - P134

인간은, 근본적으로 잔인한 존재인 것입니까? 우리들은 단지 보편적인 경험을 한 것뿐입니까? 우리는 존엄하다는 착각속에 살고 있을 뿐, 언제든 아무것도 아닌 것, 벌레, 짐승, 고름과 진물의 덩어리로 변할 수 있는 겁니까? 굴욕당하고 훼손되고 살해되는 것, 그것이 역사 속에서 증명된 인간의 본질입니까? - P134

흙탕물처럼 시간이 나를 쓸어가길 기다립니다. 내가 밤낮없이 짊어지고 있는 더러운 죽음의 기억이, 진짜 죽음을 만나 깨끗이 나를 놓아주기를 기다립니다. - P135

나는 싸우고 있습니다. 날마다 혼자서 싸웁니다. 살아남았다는, 아직도 살아 있다는 치욕과 싸웁니다. 내가 인간이라는 사실과 싸웁니다. 오직 죽음만이 그 사실로부터 앞당겨 벗어날 유일한 길이란 생각과 싸웁니다. - P135

달은 밤의 눈동자래. - P136

이상하지.

단지 물이 떨어지는 소리였을 뿐인데, 누군가가 정말 왔던 것처럼 기억돼.

그 겨울 새벽, 명치가 되어드는 통증 속에서 생각했던 그 걸음걸이가 생시였고, 수건에서 흐른 물로 젖어 있던 바닥은 꿈이었던 것 같아. - P142

녹음의 편리한 점은 직접 얼굴을 마주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뿐 아니라, 지우고 싶은 부분을 언제든 지우고 다시 증언할 수 있다는 데 있다고 - P143

어두운 창문으로 축축한 바람이 불어들어오고 있다. 무엇인가가 길게 내쉬는 숨 같다고 문득 당신은 생각한다. 거대한 생물 같은 밤이 입을 열고 습기찬 날숨을 뱉어낸다. 사무실 가득 밀폐돼 있던 뜨거운 공기를 캄캄한 허파 속으로 빨아들인다. - P151

성희 언니는 나와 달라.
언니는 신도 믿고 인간도 믿으니까.

난 한번도 언니에게 설득되지 않았어.
오직 사랑으로 우릴 지켜본다는 존재를 믿을 수 없었어.
주기도문조차 끝까지 소리 내 읽을 수 없었어.

내가 그들의 죄를 사한 것같이 아버지가 내 죄를 사할 거라니.
난 아무것도 사하지 않고 사함 받지 않아. - P151

견디는 것은 당신이 가장 잘하는 일이다. - P154

일은 당신에게 고독을 보장해준다. 일과 짧은 휴식과 잠의 규칙적인 리듬 속에서 혼자 삶을 꾸려갈 수 있는 한, 빛의 동그라미 바깥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 P154

우리는 고귀해. - P155

헌법에 따르면, 우리는 모든 사람들과 똑같이 고귀해. 그리고 노동법에 따르면 우리에겐 정당한 권리가 있어. - P155

우리들은 정의파다 좋다 좋다
같이 죽고 같이 산다 좋다 좋다
무릎 꿇고 살기보다 서서 죽길 원한단다
우리들은 정의파다 - P158

무릎 꿇고 살기보다 서서 죽길 원한단다 먼저 가신 임들을 위해 다 같이 묵념합시다. 먼저 가신 임들을 따라 끝까지 싸웁시다 그러니까………… 우리는 고귀하니까. - P160

악몽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일깨워주는 기억들이 조용히 당신의 머리맡에서 기다리고 있다. - P161

나 자신을 지키는 일로 남은 인생을 흘려보내진 않았을 거란 말이야. - P162

조금만 참아. 곧 의사가 올 거야. - P163

증언. 의미. 기억. 미래를 위해. - P166

썰물처럼 잠이 밀려나가며 고통의 윤곽이 뚜렷해지는 순간, 어떤 악몽보다 차가운 순간이 다시 왔다. 당신이 겪은 모든 게 꿈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는 순간. 기억해달라고 윤은 말했다. 직면하고 증언해달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 P166

그 밤 이후로는 젖은 수건을 문고리에 걸어두지 않았어.

하지만 그 겨울이 갈 때까지, 더이상 물수건이 필요 없는 봄이 된 뒤에도 그 소리가 문 쪽에서 들렸어.
아직도 이따금, 용케 악몽 없이 잠에서 깨어나려는 순간이면 그 소리가 들려.
그때마다 난 어둠을 향해 떨리는 눈꺼풀을 열어.

누구야.
누가 오는 거야.

누가 이렇게 가벼운 걸음으로 걸어오는 거야. - P169

그러니까 그 여름에 넌 죽어 있었어. 내 몸이 끝없이 피를 쏟아낼 때, 네 몸은 땅속에서 맹렬하게 썩어가고 있었어.
그 순간 네가 날 살렸어. 삽시간에 내 피를 끓게 해 펄펄 되살게 했어. 심장이 터질 것 같은 고통의 힘, 분노의 힘으로. - P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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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 개인적으로 한강 작가님의 책들을 집중적으로 읽고 있다. 가장 먼저는 시집인《서랍에 저녁을 넣어두었다》를 통해 전반적인 저자의 감성이 어떤 것인지를 조금이나마 느껴볼 수 있었고, 뒤이어 소설《채식주의자》를 통해 물리적, 정신적 상처로 인한 고통과 아픔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었다. 또한 소설《희랍어 시간》에서는 특정한 핸디캡을 가진 사람들이 비록 완벽하진 않지만 서로를 이해하기 위해 애쓰는 모습들을 보면서 뭔지 모를 잔잔한 감동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비록 아직 절반정도 밖에 읽진 못했지만 개인적으로 흥미를 가지고 읽고 있는 소설인 《바람이 분다, 가라》는 여러 등장인물들 간에 얽히고설킨 관계 속에서 전개되는 이야기의 흐름이 마치 긴장감있는 영화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물론 이 소설도 윗 문단에서 언급했던 작품들에서 느껴졌던 분위기와 감성들이 기본적으로 깔려있긴 하지만 그 규모면에서 독자인 내가 읽었던 이전 작품들보다는 좀 더 확대된듯한 느낌을 받았다.

오늘 읽기 시작한 이 책《소년이 온다》는 개인적으로 이런저런 경로들을 통해 80년 5월의 민주화운동을 소재로 쓰여진 소설이라는 얘기를 많이 들어왔었기에 소설의 도입부에서 느껴지는 뭔가 엄숙한 분위기가 그리 낯설게 느껴지진 않았다. 여기 별도로 밑줄치진 않았지만, 소설의 도입부에는 추도식을 하는 장면과 관련된 내용들이 나오는데, 저자의 디테일한 문장 묘사를 통해 80년 5월의 참혹함을 간접적으로나마 느낄 수 있었다.

밑줄친 문장은 죽은 시신을 보면서 생각에 잠긴 소설 속 화자의 생각을 적은 것인데, 이를 통해 육신과 영혼이라는 것에 대해 잠시나마 진지하게 생각해볼 수 있었다. 여기서 좀 더 깊이 들어가면 종교적인 것 또는 철학적인 것까지도 생각해볼 수 있겠으나 일단은 이 소설을 읽는데 집중해보고자 한다.

몸이 죽으면 혼은 어디로 갈까, 문득 너는 생각한다. 얼마나 오래 자기 몸 곁에 머물러 있을까. - P12

산 사람이 죽은 사람을 들여다볼 때, 혼도 곁에서 함께 제 얼굴을 들여다보진 않을까. - P13

네가 이해할 수 없었던 한가지 일은, 입관을 마친 뒤 약식으로 치르는 짧은 추도식에서 유족들이 애국가를 부른다는 것이었다. 관 위에 태극기를 반듯이 펴고 친친 끈으로 묶어놓는 것도 이상했다. 군인들이 죽인 사람들에게 왜 애국가를 불러주는 걸까. 왜 태극기로 관을 감싸는 걸까. 마치 나라가 그들을 죽인 게 아니라는 듯이. - P17

군인들이 반란을 일으킨 거잖아, 권력을 잡으려고. 너도 봤을 거아냐. 한낮에 사람들을 때리고 찌르고, 그래도 안되니까 총을 쐈잖아. 그렇게 하라고 그들이 명령한 거야. 그 사람들을 어떻게 나라라고 부를 수 있어. - P17

저들이 시키는 대로 무조건 무기를 돌려주고 항복할 순 없습니다. 저들이 먼저 우리 시민들의 시신을 돌려줘야 합니다. 끌고 간 시민 수백명도 풀어줘야 합니다. 무엇보다 여기서 일어난 일들의 진상을 전국에 밝혀서, 우리 명예를 회복시킨다는 약속을 받아내야 합니다. 그런 다음 총기를 반납하는 게 옳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 P22

너무 많은 피를 흘리지 않았습니까. 어떻게 그 피를 그냥 덮으란 말입니까. 먼저 가신 혼들이 눈을 뜨고 우릴 지켜보고 있습니다. - P22

혼한테는 몸이 없는데, 어떻게 눈을 뜨고 우릴 지켜볼까. - P22

온화한 성품만큼이나 외할머니의 임종은 조용한 것이었다. 산소마스크를 쓴 채 눈을 감고 있던 외할머니의 얼굴에서 새 같은 무언가가 문득 빠져 나갔다. 순식간에 주검이 된 주름진 얼굴을 보며, 그 어린 새 같은 것이 어디로 가버렸는지 몰라 너는 멍하게 서 있었다. - P23

지금 상무관에 있는 사람들의 혼도 갑자기 새처럼 몸을 빠져나갔을까. 놀란 그 새들은 어디 있을까. - P23

혼의 눈물은 차갑구나. - P24

나무들은 하루에 딱 한차례 숨 쉰다고 했다. 해가 뜨면 길게 길게 햇빛을 들이마셨다가, 해가 지면 길게 길게 이산화탄소를 내쉰다고 했다. - P24

지난 일주일이 실감되지 않는 것만큼이나, 그 다른 세상의 시간이 더이상 실감되지 않는다. - P24

사람이 죽으면 빠져나가는 어린 새는, 살았을 땐 몸 어디에 있을까. 찌푸린 저 미간에, 후광처럼 정수리 뒤에, 아니면 심장 어디께에 있을까. - P27

죽을 거 같으면, 도청을 비우고 다 같이 피해버리면 되잖아요. 왜 누군가고 누군 남아요. - P28

지금 나가면 개죽음이여. - P32

맨주먹으로 총을 어떻게 당한다냐. - P34

공처럼 허리를 말고 장판 바닥에 누웠다. 정신을 잃듯 잠 속으로 빨려든 뒤 몇분 지나지 않아, 기억할 수 없는 무서운 꿈에 퍼뜩 눈을 떴다. 꿈보다 무서운 생시가 너를 기다리고 있었다. - P34

정적 속에서 너는 정대의 얼굴을 떠올렸다. 연한 하늘색 체육복바지가 꿈틀거리던 모습을 기억한 순간, 불덩어리가 명치를 막은 것같이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숨을 쉬려고 너는 평소의 정대를 생각했다.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대문을 열고 들어올 것 같은 정대를 생각했다. - P35

그러고도 네가 친구냐. 그러고도 네가 사람이야. - P36

총검이 네 얼굴을, 가슴을 베고 찌르는 환각에 몸을 뒤틀었다. - P44

혼은 자기 몸 곁에 얼마나 오래 머물러 있을까.
그게 무슨 날개같이 파닥이기도 할까. 촛불의 가장자릴 흔들리게 할까. - P45

눈이 더 나빠져 가까운 것도 흐릿하게 보이면 좋겠다고 너는 생각한다. 그러나 아무것도 흐릿하게 보이지 않는다. 무명천을 걷기전에 너는 눈을 감지 않는다. 피가 비칠 때까지 입술 안쪽을 악물며 천을 걷는다. 걷은 다음에도, 천천히 다시 덮으면서도 눈을 감지 않는다. 달아났을 거다,라고 이를 악물며 너는 생각한다. 그때 쓰러진 게 정대가 아니라 이 여자였다 해도 너는 달아났을 거다. 형들이었다 해도, 아버지였다 해도, 엄마였다 해도 달아났을 거다. - P45

체머리 떠는 노인의 얼굴을 너는 돌아본다. 손녀따님인가요, 묻지 않고 참을성 있게 그의 말을 기다린다. 용서하지 않을 거다. 이승에서 가장 끔찍한 것을 본 사람처럼 꿈적거리는 노인의 두 눈을 너는 마주 본다. 아무것도 용서하지 않을 거다. 나 자신까지도. - P45

우리들의 몸은 열십자로 겹겹이 포개져 있었어. - P46

난 내 몸을 놓치지 않으려고 뺨에, 목덜미에 어른어른 매달려 트럭에 올라탔어. 이상하게도 나는 혼자였어. 그러니까 혼들은 만날 수 없는 거였어. 지척에 혼들이 아무리 많아도,
우린 서로를 볼 수도 느낄 수도 없었어. 저세상에서 만나자는 말따윈 의미없는 거였어. - P47

혼이란 건 가까이 있는 혼들이 누구인지는 알지 못하면서, 누군가가 죽었는지 죽지 않았는지만은 온 힘으로 생각하면 알 수 있는 거였어. - P50

이상하고 격렬한 힘이 생겨나 있었는데, 그건 죽음 때문이 아니라 오직 멈추지 않는 생각들 때문에 생겨난 거였어. 누가 나를 죽였을까, 누가 누나를 죽였을까. 왜 죽였을까. 생각할수록 그 낯선 힘은 단단해졌어. 눈도 뺨도 없는 곳에서 끊임없이 흐르는 피를 진하고 끈적끈적하게 만들었어. - P51

어디선가 누나의 혼도 어른거리고 있을 텐데, 그곳이 어딜까. 이제 우리한텐 몸이 없으니 만나기 위해서 몸을 움직일 필요는 없을텐데. 하지만 몸 없이 누나를 어떻게 만날까. 몸 없는 누나를 어떻게 알아볼까. - P51

누나가 어디 있는지 생각하는 데 지친 나는 이제 그들을 생각하기 시작했어. 나를 죽인 사람과 누나를 죽인 사람은 지금 어디 있을까. 아직 죽지 않았다해도 그들에게도 혼이 있을 테니, 생각하고 생각하면 닿을 수 있을것 같았어. 내 몸을 버리고 싶었어. 죽은 그 몸뚱이로부터 얇고 팽팽한 거미줄같이 뻗어나와 끌어당기는 힘을 잘라내고 싶었어. 그들을 향해 날아가고 싶었어. 묻고 싶었어. 왜 나를 죽였지. 왜 누나를 죽였지, 어떻게 죽였지. - P52

꿈속으로 숨을 수 있다면.
아니, 기억 속으로라도. - P54

더 많은 기억이 필요했어.
더 빨리, 끊어지지 않게 기억을 이어가야 했어. - P56

썩어가는 내 옆구리를 생각해.
거길 관통한 총알을 생각해.
처음엔 차디찬 몽둥이 같았던 그것.
순식간에 뱃속을 휘젓는 불덩어리가 된 그것,
그게 반대편 옆구리에 만들어놓은, 내 모든 따뜻한 피를 흘러나가게 한 구멍을 생각해.
그걸 쏘아보낸 총구를 생각해.
차디찬 방아쇠를 생각해.
그걸 당긴 따뜻한 손가락을 생각해.
나를 조준한 눈을 생각해.
쏘라고 명령한 사람의 눈을 생각해. - P57

그들의 얼굴을 보고 싶다. 잠든 그들의 눈꺼풀 위로 어른거리고싶다. 꿈속으로 불쑥 들어가고 싶다. 그 이마, 그 눈꺼풀들을 밤새 건너다니며 어른거리고 싶다. 그들이 악몽 속에서 피 흐르는 내 눈을 볼 때까지. 내 목소리를 들을 때까지, 왜 나를 쐈지, 왜 나를 죽였지. - P58

만약 그렇게 좀더 시간이 흘렀다면, 어느 순간 우리는 서로를 알게 될 수 있었을까. 마침내 어떤 말을, 어떤 생각을 주고받을 방법을 찾아낼 수 있었을까. - P60

우리들의 몸은 계속 불꽃을 뿜으며 타들어갔어. 장기들이 끓으며 오그라들었어. 간헐적으로 쉭쉭 뿜어져나오는 검은 연기는 우리들의 썩은 몸이 내쉬는 숨 같았어. 그 거친 숨이 잦아든 자리에 희끗한 뼈들이 드러났어. 뼈가 드러난 몸들의 혼은 어느샌가 멀어져, 더이상 어른거리는 그림자가 느껴지지 않았어. 그러니까 마침내 자유였어, 이제 우린 어디든 갈 수 있었어. - P62

공터의 축축한 모래흙에, 거기 드리워진 검푸른 숲그늘에 어른거리며 나는 생각했어. 어떻게, 어디로 가야 할까. 괴롭지 않았어, 썩어가던 내 거뭇한 얼굴이 이제 깨끗이 사라질 것이 아깝지 않았어, 그 치욕스러운 몸이 남김없이 불타버릴 것이 목숨을 가졌을 때 그랬던 것처럼 난 단순해지고 싶었어. 아무것도 두려워하고 싶지 않았어. - P63

너에게 가자.
그러자 모든 게 분명해졌어. - P63

그녀는 고기를 좋아하지 않는다기보다, 불판 위에서 고기가 익어가는 순간을 견디지 못했다. 살점 위에 피와 육즙이 고이면 고개를 돌렸다. 머리가 있는 생선을 구울 때는 눈을 감았다. 프라이팬이 달궈지며 얼었던 눈동자에 물기가 맺히고, 벌어진 입에서 희끗한 진물이 흘러나오는 순간, 그 죽은 물고기가 뭔가를 말하려 하는 것 같은 순간을 외면했다. - P72

누군가를 공격할 땐 본능적으로 감정에 관계된 왼손이 움직이는건가 - P74

얼굴은 어떻게 내면을 숨기는가, 그녀는 생각한다. 어떻게 무감각을, 잔인성을, 살인을 숨기는가. - P77

앞쪽의 열 페이지에 드문드문 살아남은 문장들을 그녀는 머릿속으로 더듬는다.
당신들을 잃은 뒤, 우리들의 시간은 저녁이 되었습니다.
우리들의 집과 거리가 저녁이 되었습니다.
더이상 어두워지지도, 다시 밝아지지도 않는 저녁 속에서 우리들은 밥을 먹고, 걸음을 걷고 잠을 잡니다. - P79

어떻게 분수대에서 물이 나옵니까. 무슨 축제라고 물이 나옵니까. - P80

서 선생의 손이 날렵하게 가제본을 들어올린다. 그것이 젖지 않도록. 그 지워진 책 속에 아직 무엇이 남아 있기라도 한 것처럼. - P83

묵묵히 쌀알을 씹으며 그녀는 생각했다. 치욕스러운 데가 있다, 먹는다는 것엔. 익숙한 치욕 속에서 그녀는 죽은 사람들을 생각했다. 그 사람들은 언제까지나 배가 고프지 않을 것이다. 삶이 없으니까. 그러나 그녀에게는 삶이 있었고 배가 고팠다. 지난 오년 동안 끈질지게 그녀를 괴롭혀온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허기를 느끼며 음식 앞에서 입맛이 도는 것. - P85

죽어도 좋다고 생각했지만, 동시에 죽음을 피하고 싶었다. 죽은 사람들의 모습을 많이 봤기 때문에 둔감해졌다고 생각했지만, 그래서 더 두려웠다. 입을 벌리고 몸에 구멍이 뚫린 채, 반투명한 창자를 쏟아내며 숨이 끊어지고 싶지 않았다. - P89

우리는 끝까지 싸울 것입니다. 함께 나와서 싸워주십시오. - P91

같이 가자, 동호야. 지금 같이 나가야 돼. 위태하게 이층 난간을 붙들고 서서 너는 떨었다. 마지막으로 눈이 마주쳤을 때, 살고 싶어서, 무서워서 네 눈꺼풀은 떨렸다. - P92

군중의 도덕성을 좌우하는 결정적인 요인이 무엇인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흥미로운 사실은, 군중을 이루는 개개인의 도덕적 수준과 별개로 특정한 윤리적 파동이 현장에서 발생된다는 것이다. 어떤 군중은 상점의 약탈과 살인, 강간을 서슴지 않으며, 어떤 군중은 개인이었다면 다다르기 어려웠을 이타성과 용기를 획득한다. 후자의 개인들이 특별히 숭고했다기보다는 인간이 근본적으로 지닌 숭고함이 군중의 힘을 빌려 발현된 것이며, 전자의 개인들이 특별히 야만적이었던 것이 아니라 인간의 근원적인 야만이 군중의힘을 빌려 극대화된 것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 P95

그렇다면 우리에게 남는 질문은 이것이다. 인간은 무엇인가. 인간이 무엇이지 않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 P95

그녀는 인간을 믿지 않았다. 어떤 표정, 어떤 진실, 어떤 유려한 문장도 완전하게 신뢰하지 않았다. 오로지 끈질긴 의심과 차가운 질문들 속에서 살아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 P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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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속에 나오는 인주라는 인물은 화가로 활동했던 사람인데, 작품을 완성해가는 방식이 일반적인 사람들과는 좀 달랐다. 내가 미술에 대해 전문적으로 아는 게 아니기에 디테일한 부분까지는 잘 모르겠으나, 본문에 나온 내용들에 근거해 간단히 얘기해보자면 일단 먹을 간 뒤 그것을 거대한 크기를 가진 한지의 결에 맞게 서서히 스며들도록 하여 어떤 작품을 완성해가는 방식이다. 근데 이게 그냥 아무렇게나 막 하는 게 아니라 물이 어느정도 스며들었는지를 인내심을 가지고 계속 관찰하면서 작업을 진행해야 하기에 시간과 부수적인 노력들이 굉장히 많이 필요하다고 한다.

오늘 처음 밑줄친 문장은 독자인 내가 위에서 언급한 것들을 문학적인 표현으로 나타낸 것인데, 나같은 독자들은 쉽사리 생각해내기도 힘든 표현들을 심심치 않게 써내려가는 저자의 능력에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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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읽은 본문의 중반부에는 천체물리학에 관한 내용들이 잠시 등장하는데, 개인적으로 예전에 읽었던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에서 접했던 내용을 잠시나마 상기해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한동안 거의 잊고 있었는데 일부나마 다시 보니 반갑기도 하고 관련된 개념들을 인터넷에 검색도 해보면서 조금이나마 복습하는 느낌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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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포스팅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챕터가 바뀜과 동시에 그동안 등장하지 않았던 새로운 인물들과 배경이 소개된다. 소설 속 핵심 인물인 서인주가 자신의 작품을 전시했던 명 화랑이라는 곳이 나오고 그 화랑의 관장인 명은숙이라는 인물이 새롭게 나오면서 소설 속 화자인 이정희와 이런저런 대화를 주고 받는다. 또한 이외에도 서인주의 전 남편인 정선규라는 인물이 근무했던 아텍이라는 건축사무소의 이중석 팀장이라는 사람과도 갑작스럽게 연락을 취한다.

이 인물들이 이 시점에 등장한 것은 강석원이 서인주의 평전을 써서 출간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 서인주의 오랜 친구인 이정희는 강석원이 서인주에 대해 왜곡된 글을 쓰고 있다는 판단 하에 소설 속에서 새로 등장한 인물들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서인주가 남긴 자식인 민서때문인데, 어린 민서가 자기 엄마에 관한 왜곡된 정보를 접했을 때 미칠 악영향을 이정희는 가장 우려하고 있다.

읽다보니 어느덧 소설 전체의 중반부를 지나고 있는데, 아직 뒤에 나오는 내용들을 읽어보진 못했지만 이런저런 정황상 이후에 펼쳐질 내용은 그동안 베일에 감춰져 있었던 서인주와 그 주변인물들의 좀 더 세부적인 뒷이야기들이 될 듯하다. 그리고 그 이후에는 강석원과 이정희간에 불꽃튀는 갈등이 한 번 세게 일어나고 마지막에는 갈등이 해결되면서 전반적인 이야기가 마무리되지 않을까 조심스레 예상해본다. 긴장감을 놓치지 않게 이야기를 구성한 저자의 필력에 다시 한 번 감탄하게 된다.


인주의 별은 아직도 그 방에서 타오르고 있을 것이다. 먹을 밀고 수십 일을 나아간, 물만이 가질 수 있는 느리고 집요한 힘으로 일렁거리고 있을 것이다. 물이 만든 불꽃의 환한 가장자리를 나는 기억으로 더듬었다. 기억만으로 더듬었다. - P149

더 차가운 것이 필요했다. 얼음들, 가장 냉혹한 눈발, 무자비한 비난과 손가락질이 필요했다. 모든 것을 잃은 것 같았다. 모든 것에 굴복한 것 같았다. 모든 것에 버림받은 것 같았다. - P149

성스러움이란 뭘까. 가끔 생각해.
이 세계에 없는 것………… 우묵하게 파이고 구멍 뚫린 윤곽으로만 가까스로 모습을 드러내는 어떤 것 아닐까. 장님처럼 우린 그 가장자릴 더듬으면서 걸어가는 것 아닐까. - P151

나에게는 힘이 없다. 이 모든 걸 부수고 갈 힘이 없어. - P152

치욕은 너덜너덜하다.
그 너덜너덜한 것의 밑바닥을 들여다본다.
부릅뜬 눈이 감기지 않는다. - P153

인주가 진지한 이야기를 할 때 이따금 나는 눈을 감고 음조를 따라가보았다. D음계의 도와 낮은 라 사이를 또렷하고 완만하게 오르내리는 음성. 정확한 단어를 골라내기 위해 삼 초쯤 지속되는 휴지부. 때로 섞여 나오는, 비음이 섞이지 않은 낮은 웃음. - P153

스무 살이 되기 전에ㅡ삼촌을 잃기 전에ㅡ인주의 목소리는 달랐다. 그때도 또렷한 음성이었지만,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음색이 밝았다. 성량이 몹시 커서, 마당은 물론 골목까지 짜랑짜랑한 울림이 퍼졌다. 음조는 순간순간 변하며 가파르게 오르내렸다. 휴지부는 길지 않았다. 일단 흥분하면 이야기에 흠뻑 빠져, 듣는 사람에게까지 열기를 전염시키는 어조로 빠르게 단어들을 쏟아냈다. - P153

인주의 눈은 어둠 속에서도 스스로 빛을 내는 검은 광석 같았다. 어깨와 팔의 움직임은 무용수처럼 곧고 활기찼다. 보통 사람보다 중력을 덜 느끼는 것 같은 걸음걸음이 고무공처럼 튀어올랐다. 극도로 행복할 때면, 유리잔이 가볍게 부딪히는 것 같은 웃음소리가 단어와 단어 사이로 쉴 새 없이 터져나왔다. - P154

삼촌이 죽은 뒤 인주는 변했지만ㅡ걸음걸이도, 목소리도, 웃음마저 달라졌지만ㅡ한순간 눈부시게 끝까지 기쁨을 느끼는 성격만은 변하지 않았다. - P154

연습, 부단한 연습이지. - P155

내가 죽여도 좋은 유일한 사람, 나를 죽였다. - P158

이모가 고래가 아니라서 다행이야.
민서는 수줍게 웃었다. 아이답게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고래는, 상처가 나면 피가 멈추지 않는대. 작살을 맞으면, 워낙 커서 바로 죽진 않는다 해도, 계속 계속 피를 흘리면서 다니다가 나중에 죽는대. 이 세상 고래들은 전부 다, 태어나면서부터 그런 병에 걸렸대. - P159

고래들은 초음파로 말을 한대. 아주아주 낮은 음파를 보내면, 지구 반대쪽 바다에 있는 고래한테까지 말할 수 있대. 음, 그러니까 고래들은 핸드폰이 필요 없어, 엄마 고래랑 아이 고래랑 헤어져도 걱정 없어. 평생 얘길 주고받을 수 있어 - P162

누군가가 스스로를 죽여야 했다면,
그 사람은 나다. - P165

눈을 감는 것만으로 떠올릴 수 있다. - P168

그냥 겉멋이야. 속으론 안 들이마셔. - P169

정신을 흐리게 하는 건 재미없어. - P169

그냥, 머리가 맑아지라고. - P170

밤하늘은 왜 어두운가.
1800년대 독일의 천문학자 올버스는 물었다.
태양이 사라지고 지구의 모든 불빛들이 꺼진다면 검은 하늘에 별들이 나타날 것이다. 우주가 무한하고, 무수히 많은 별들로 가득 차 있다면 어째서 하늘이 어두운가? 울창한 숲을 바라볼 때 우리가 온통 나무로 뒤덮인 모습을 보게 되는 것처럼, 하늘 역시 별들이 내뿜는 빛으로 가득 차야 하지 않는가? - P171

우주에 들어찬 성간먼지들이 별의 빛을 흡수하기 때문이라고 이 역설에 대답한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별빛을 약하게 하는 요인일 뿐, 빛을 사라지게 하지는 못한다. - P171

근본적인 두 개의 대답은 20세기에 이른 뒤에야 나왔다.
첫째는 우주의 나이가 유한하다는 것이다.
빛의 속도는 초속 30만 킬로미터라는 유한한 것이므로, 밤하늘을 눈부시게 밝히려면 무한대의 거리에서 오는 빛이 있어야 한다. 즉, 무한한 과거에 형성된 은하가 있어야 한다. 지금과 같이 밤하늘이 어두운 것은 우리의 시선이 어떤 별의 표면에도 영원히 닿을 수 없는 순간ㅡ별들이 아직 태어나지 않은 시간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우주가 시작된 시점이 존재하는 것이다. - P172

왜 천체물리학을 배웠어요. 라고 내가 물었을 때 삼촌은 대답했다.
처음과 끝을 알고 싶어서.
왜 그걸 알고 싶었어요?
어둠이 왜 어두운지, 빛이 왜 밝은지 알고 싶었어. - P172

처음과 끝을 알았어요?
아니. - P172

두번째이자 더욱 결정적인 대답은 허블에 의해 관측되었다. 바로 은하들이 우주의 팽창 때문에 서로에게서 멀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은하가 우리의 눈으로부터 멀어질수록 은하가 뿜어내는 빛은 약해진다. 눈부신 은하가 아무리 많다 해도, 거리가 먼 은하들은 더 빨리 멀어지므로 밤하늘은 어두울 수밖에 없다. - P173

허블과 동시대 사람이었던 벨기에의 사제 르메이터는 이 두 개의 대답들에 대해 숙고하다 조심스러운 가설을 내놓았다. 우주가 시작된 시점이 존재하고 은하들이 팽창해왔다면, 최초의 폭발이 있었던 것 아닐까? - P173

어둠이 왜 어두운지 알기 위해 어둠을 들여다본 사람들이 있었다. 빛이 왜 밝은지 알기 위해 태양을 올려다본 사람들도 있었다. 실제로 뉴턴은 태양을 관측하다 홍채를 다쳤다. 별들의 움직임을 관측하는데 평생을 바쳤던 케플러는 올버스가 태어나기 전 이미 갈릴레오에게 장문의 논쟁적인 편지를 썼다. 우주의 시작이 없다면, 왜 밤하늘은어두운 것입니까. - P173

케플러의 세번째 법칙을 배웠을 때를 잊을 수 없어.

어두운 창을 등진 삼촌의 눈이 빛났다.

그 수식은 마치 음악 같았어. 간결하고, 고유하고, 아름다웠어. 별들의 궤도가 저마다 그 음악을 변주하고 있다는 걸 믿을 수 없었어. 우주의 모든 것이 그 음악 속에 존재한다는 걸 잊을 수 없었어. - P173

수유리 집의 어두운 방에 누워, 불 꺼진 천장의 벽지 무늬를 곰곰이 올려다보다가 그 수식을 생각할 때가 있었다. T²=ka³. T는 행성의 공전주기, a는 타원궤도의 긴반지름, k는 모든 행성에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상수다. 그 간명한 수식에 별들의 시간과 공간, 힘과 운동, 음악적인 규칙과 조화가 압축되어 있다. - P174

검고 끝없는 밤하늘을 눈앞에 그리고, 무수한 별들의 궤도를 그리고, 그들의 태양을 중심으로 제각기 공전하는 주기를 골똘히 따라가다 보면, 삼촌이 사는 세계가 어떤 것인지 어렴풋이 짐작되는 순간이 찾아왔다. - P174

어둠과 빛의 비밀에 잠시 손이 닿았다고 느껴지는 짧은 순간, 들리지 않는 수(數)의 음악이 우주의 무한까지ㅡ우주의 시작은 있지만, 끝은 없다고 삼촌은 믿었다ㅡ퍼져 있다는 것이 믿어지는 순간. 그대로 잠들고 싶지 않아 나는 눈을 깜박였다. 감겨오는 눈꺼풀을 거푸 두 손으로 비볐다. - P174

・・・・・・ 여덟 살 때였어.
처음으로 장기 입원을 했는데, 창밖으로 하늘을 보는 것 말고는 할 일이 없었어. 아파서가 아니라, 심심해서 죽을 것 같았지. 날마다 하늘이 어두워진다는 것에 대해서 그때 처음 생각했던 것 같아. 그 속에서 빛나는 점들이 대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 P174

・・・・・・ 별들은 보석이 아니고, 천사들의 눈이 아니고, 소금도 설탕도, 큰곰도 국자도 아니라는 것을, 매 순간 핵융합 반응을 일으키는 불덩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이상하게도 설명할 수 없는 안도감을 느꼈어. 보석이 아니라서, 천사들의 눈이 아니라서, 활 쏘는 사람도, 전갈도, 쌍둥이도 아니라서 별들은 아름다웠어. 타오르는 불덩이라서 아름다웠어. - P175

시간이 무한히 느려지는 이런 밤에, 기억들은 스스로 살아나 움직인다.
부서진 조각들이 서로 부딪치며 나아간다.
끝나지 않는 돌림노래처럼.
몸속에 바람이 멎지 않는 것처럼. - P176

너는 아름다움이었지. 숨겨지지 않는 뜨거움이었지. 높은 휘파람은. 좀처럼 젖지 않는 눈시울은. 단단한 팔, 민첩한 손놀림은. 꽉 다문 입술은. - P177

너는 이제 차가움이지. 죽음이지. 불룩한 호주머니는. 아무렇게나 걷어올린 소매는. 땀 맺힌 콧잔등은. 웃음은. 그 모든 안간힘은. - P177

그렇지 않다.
죽음은 너와 어울리지 않았다. - P178

쓸데없는 걱정을 하는구나. - P179

거의 시간이 흐르지 않는다.
일 초의 십분의 일. 아니, 더 작은 조각까지 만져진다.
초조한가.
초조하지 않다.
잃을 게 있는가.
없다. - P180

어떤 것도 무디어지지 않는다. - P184

다시 가고 싶지 않았다.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았다. - P185

그렇게 걷다 보면 갑자기 깨닫게 돼.
정말 두려운 사실을.
…………어디도 더 갈 데가 없다는 걸. - P186

물이 먹을 밀고 번져간 마지막 흰 자리, 가냘픈 손끝 같은 흔적이 불꽃의 가장자리가 된다. - P188

떨지 마라. 그가 했던 말을 생각한다. 숨을 참고, 담담하게 그어. 나는 숨을 참고 항아리의 윤곽을 긋는다. 연한 피가 번지듯 먹이 번진다. 이제 돌이킬 수 없다. 지울 수 없다. 돌이킬 수 없는 이 선이 내 전부를 말한다. - P188

그토록 드문드문 떨어져 있는 별들. 그토록 거대하게 부풀어가는 0. 어디로 눈을 던져도 만나게 되는 암흑. 아주 뜨겁거나 차가운 별들. 간결하고 아름다운 궤도들. - P189

우주는 처음이 없고 팽창하지도 않는 고요한 무한이라고 모두가 믿었다. 끝없이, 어마어마한 속력으로 생성되는 0 따위는 상상할 수 없었다. 모든 물질이 처음에는 하나였고, 그전에는 하나마저 없었다는 생각은 종교와 신화에서만 허락되었다. 하지만 날마다 밤은 왔고, 하늘은 어김없이 검어졌다. 그것을 설명해내기 위해 모든 생각을 바꿔야 했다. 모든 사실이 다시 씌어져야 했다. - P189

끝끝내 힘이 돌아오기를 기다린다. - P191

부모의 자살을 경험한 아이들은 일생 동안 한 번 이상 자살 충동을 경험하고, 잘 알려진 헤밍웨이의 경우처럼 동일한 방법으로 실행에 옮기기도 한다는 사실을 선생님도 알고 계실겁니다. 실제로 인주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해도 그 사실로부터 민서를 보호해야 하는 지금, 증거도 없이 인주의 자살을 전제하는 책이 출판되어서는 안 됩니다. - P200

선생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유족이 나서서 지금 막지 않으면, 책이 출간된 뒤에 상황을 수습한다는 것은 훨씬 어렵거나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원고 전체를 미리 받아 검토해야만 합니다. 단지 죽음의 문제뿐 아니라, 고인과 유족에게 부당한 어떤 내용이 더 실려 있을지 모르는 일입니다. - P200

그 시리즈는, 제목이 「달의 뒷면」이었는데…………2층에 걸었던 것 맞아요. 처음엔 「무제」였는데 서 작가가 제목을 바꿔 붙였죠. ………어쨌든 독특했어요. 적막하고 맑은 느낌이랄까. 서 작가 말로는 큰 그림 그리다가 쉬어가는 느낌으로 한 달도 채 안 돼서 여섯 점을 그렸다는데, 항상 그렇게 어깨에 힘을 뺀 것들이 터지더라구요. 트렌드에도 맞았죠. 명상적인 걸 원하는 콜렉터들이 요즘 꽤 있거든요. 기발한 작품들이 쏟아져 나오니까, 향수도 있고...... 한번 불이 붙으니, 좀 무섭다 싶은 나무 그림들도 덩달아 팔리더군요. 맞아요. 활활 타는 나무들. 그 무렵 서 작가가 작업실을 구한다고 했는데, 꽤 도움이 됐을 거예요. - P203

하지만 그게 저희한텐 안 좋은 일이었죠. P화랑이 서 작가를 데려갔으니까. 한 달에 몇백씩 생활비 재료비 대주면서, 이 년간 제작될 그림들을 독점 계약했다더군요. 사실 난 서 작가 그렇게 안 봤어요. 잘나간다 싶으면 조건 좋은 쪽으로 붙는 거, 못 하는 사람일 줄 알았는데 ・・・・・・ 그 시스템으로 들어가는 게 작가한테 꼭 좋은 것도 아니거든요. 일단 거기서만 전시를 해야 하고, 어느 날부터 안 팔린다 싶으면 냉정하게 내쳐버리니까. 사실 우리가 거기처럼 대형화랑은 아니지만 그래도 괜찮거든요? 기획 전시도 많이 하고, 상업적인 것만으로 승부하진 않으니까. 믿었던 사람한테 배신당했다고 생각하니 처음엔 잠이 안 왔어요. 이제는 이해해요. 서 작가 혼자서 아이 키웠잖아요. 무엇보다 경제적으로 큰 유혹이었겠죠. - P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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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읽기 시작한 부분에서는 과학 분야 중에서도 물리학에 나올법한 내용이 하나 나온다. 내가 과학 분야에 그다지 익숙한 사람이 아니라 어떤 개념인지 정확히 그 명칭을 확언할 수 없으나, 뒤에 나오는 내용들을 통해 추론해보자면 아마도 상대성이론 쪽의 개념이 아닐까 싶다. 관찰자가 보는 관점에 따라 세상이 다르게 보일 수 있다는 점이 이런 추측을 하게 만들었다. 만약 내가 과학 분야에 대한 배경지식의 깊이가 좀 더 깊었더라면 읽자마자 직관적으로 이해했을텐데 그러지 못한 게 살짝 아쉬웠다. 어쩌면 이러한 아쉬움은 과학 분야의 책을 좀 더 읽어보라는 메시지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오늘 소설에 나온 물리학 개념과 관련하여 그나마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책은 바로 내가 개인적으로 읽다말다를 반복하고 있는 《엔드오브타임》이다. 물론 인터넷 검색창이나 챗GPT같은 AI 플랫폼에 물어보는 것도 훌륭한 방법이지만, 물리학과 관련된 전반적인 큰 흐름을 살펴보는데는 책만한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물론 일단은 당장의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 인터넷이나 AI플랫폼을 활용하고, 이후에 물리학 관련 책을 함께 읽으면서 큰 흐름을 잡는 게 바람직해 보인다.

모든 사물의 운동 속도는 예외 없이ㅡ정지한 사물조차도ㅡ빛의 속도와 일치한다고 나는 읽었다. 공간 속에서 운동하는 속도와 시간 속에서 운동하는 속도를 합하면 일정하게 빛의 속도가 된다. 즉, 공간 속에서 빠르게 운동할수록 시간은 천천히 흐른다. 광속에 가깝게 비행하는 우주선을 탄 사람은 늙어가지 않을 것이라는 아인슈타인의 말은 이 방정식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었다. - P80

이따금, 움직이지 않고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을 때, 나와 똑같이 멈춰 있는 보도블록들, 나무와 건물들을 바라보며 생각한다. 저들도 초속 30만 킬로미터로 흐르는 시간 속을 날아가고 있구나. 순수한 시간의 속력을 견디고 있구나. - P80

그렇게 기다린다.
파고드는 발목의 통증, 추위, 달아난 잠 대신 밀려드는 허기, 타들어오는 갈증 속에서 빛의 속도로 흐르는 시간 속에서 기다린다. 기다리고 있다. - P81

한지에 먹을 입히기 시작한 첫 순간 이후, 삼촌의 생활은 잠시도 그 그림과 분리되지 않았다. 그는 날씨에 극도로 민감했는데, 기압과 습도에 따라 물과 먹이 번져가는 양상과 속도가 달라지기 때문이었다. 물기가 마른다는 것은 모세관 현상이 완전히 멈춰버리는 것을. 그림이 종결되는 것을 의미했다. 이만 됐다는 결단을 내리기까지는 수시로 그림의 물기를 확인해야 했고, 적절한 시기에 물을 더 뿌려줘야 했다. 더 힘 있게 번져가도록 할 부분과 얼마 안 있어 멈춰야 할 부분을 택해 물의 양을 조절해야 했다. 콩알만 한 종이죽 뭉치에 물을 흠뻑 적셔 그림에 붙이면, 그 부분의 물의 밀도가 높아져 그쪽으로는 더 이상 물이 흐르지 않았다. 시각적 예민함 이상의 감각이 필요했다. 먹의 감각, 종이의 감각, 물과 공기의 감각, 무엇보다 시간의 감각이 필요했다. 밥을 먹을 때, 잠을 잘 때,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눌 때조차도 그것들을 놓쳐선 안 되었다. - P84

이 방에 들어오는 것만으로 그 의문들을 풀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오히려 더 복잡한 의문들이 가지를 뻗어갈 줄은 몰랐다. - P85

지금 저 그림들을 느슨히 묶어놓은 솜씨는 모두 다른 사람의 것이다. 누군가가 일일이 풀어서 그림들을 펼쳐본 것이다. 알고 있다. 죽은 사람의 물건은 무방비 상태로 저런 일을 당한다. 심지어 육체가 부검당하기도 한다. - P86

입술을 다문 채 나는 서 있다. 어떤 분노는 이렇게 지속된다. 혼란과 무력감, 고통을 연료로 밑불처럼 낮게 탄다. 머리를 뜨겁게 하지 않고, 오히려 얼음처럼 차갑게 한다. - P86

네가 그리는 모든 게 실은 네 자화상이야. - P88

같게 나온다면 그게 더 이상한 거야. 네 얼굴인걸. - P88

존 애덤스가 피아졸라의 음악을 평하며 네루다의 시를 인용한 부분이 있다. 피아졸라의 음악은 ‘흠집 많은 인간의 혼란, 땀과 연기에 찌든, 백합 향기의 오줌 냄새를 맡는, 음식 자국과 피에 물든, 낡은 옷처럼, 주름진 육신처럼, 감시, 꿈, 불면, 예언, 사랑과 증오의 말들, 어리석음, 충격, 목가, 정치적 신념, 부정, 의심, 긍정 따위로 순결을 잃은 영혼‘의 음악이라고.
그 말을 그대로 서인주의 그림에 적용할 수 있다. - P89

짙은 색의 크레용을 격렬하게 겹쳐 칠해 거의 검어져버린 화면 속에서, 욕망 없이 벌거벗은 몸들이 칼자국처럼, 깊은 흉터처럼 꿈틀거린다. 성별도, 나이도 분명치 않은 사람들의 이 고통스러운 육체를 몸이라고 불러야 하는가, 정신이라고 불러야 하는가. 수직 또는 수평으로, 때로 비스듬한 대각선으로 몸을 뻗고 구부려 마침내 그들이 다다르려하는 곳은 어떤 심연의 수심인가. - P90

닥나무 껍질로 만든 한지에는 모세혈관들 같은 무수한 섬유질의 길들이 있다고 그는 설명했다. 그 길들을 따라 퍼져가는 먹의 모양을 이런저런 방법으로 잡아주는 것이 자신의 일이라는 것이었다. 가끔은 그의 몸에서 피가 흘러나와 종이의 핏줄들을 타고 흐르는 것 같이 느껴진다고도 했다. - P94

1밀리미터 두께도 안 되는 한지가 마치 한없는 깊이를 가진 듯 물과 먹이 흐르는 공간이 된다니, 어쩐지 나에게는 아득하게 느껴졌다. - P94

삼촌을 이해하고 싶었지만, 동시에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더 피를 홀리고 싶었지만, 더 이상 피를 흘리고 싶지 않았다. - P102

인주도, 자신의 피가 먹이 되어서 종이 속을 흐른다고 느꼈을까. 멎지 않는 피처럼 시간의 혈관을 더듬어 간다고 느꼈을까. - P103

모르겠다. 네가 왜 갑자기 이 일을 한 건지. 대체 왜. - P103

누구의 것과도 닮지 않은 그림을 인주는 그렸다.
삼촌의 그림과도 닮지 않았던 것은 물론이다. - P103

인주의 그림은 너무 어둡고 탁해, 가까이서 손전등을 켜고 내부를 들여다보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했다. 반면 삼촌의 그림은 멀리 떨어져 서서 전체를 파악해내야 하는 것이었다. 물론 비슷한 점도 있었다. 유혹하지 않는다는 것. 이 세계에 없는 것을 그린다는 것.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제야 그것이 이 세계에 부재한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어떤 것을 그린다는 것. 그러나 그것들을 구체적인 공통점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 P103

인주의 그림은 초월적인 것과 거리가 멀었다. 그림 속의 사람과 나무는 마치 검은 불꽃들처럼 타올랐다. 팔과 다리, 가지와 뿌리가 투쟁하듯 화면의 다른 끝을 향해 뻗어나갔다. 격렬한 그 불길을 타고 하늘과 땅이 맺어졌다. 검은 피로 범벅이 된 그 결혼을 지켜보는 것만으로 숨이 막혔다. 다만 이상한 것은, 그 그림들을 오래ㅡ충분히 오래ㅡ바라보고 나면 예상치 못했던 고요함을 느끼게 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삼촌의 그림에 배어 있는 침묵과는 다른 종류의 고요함이었다. - P104

인주의 그림과 비교한다면, 삼촌의 먹그림은 계단 없이 천장에 그려진 그림 같았다. 육체 없이 태어난 그림, 혹은 육체의 과정이 완전히 제거된 뒤 정신만 남은 그림이라고 할까. 별들은 하얗게 타올랐지만, 그 불꽃에는 어떤 고통도 배어 있지 않았다. 그의 그림들은 고통너머에 있거나, 그것이 무화되는 곳에 있거나, 엄청난 밀도로 응축돼 보이지 않게 되는 곳에 있었다. - P104

정신 차려.
시간이 없어. - P106

누가 먼저였는지 모른다.
누구에게도 배운 적 없는데, 어떻게 서로의 입술을 찾게 되었는지 모른다.
누구의 것인지 구별할 수 없는 따스한 입속에서, 갓 태어난 물고기같은 혀들이 어떻게 더듬어 헤엄쳐 다녔는지 모른다. - P112

빛도 형체도 부피도 없는, 동시에 어마어마한 질량과 자력을 가진 검은 구멍들이 은하 곳곳에 숨겨져 있다. 그 안에서 시간은 어떻게 흐를까. 영원히 멈춰 있거나, 영원히 연장될까. 검은 구멍의 입구에서부터 끝없이 형체를 늘어뜨리며 빨려들어간 죽은 별은, 마침내 구멍의 심장부에 다다랐을 때 무엇을 만나게 될까. 부피 없이 뭉쳐진 전 세계의 그림자를, 무자비한 암흑의 총량을 통과하게 될까. 수억년 전에 폭발한 별의 형상이 어둠의 핏속을 더듬어 우리에게 오는 동안, 죽은 별의 몸이 검은 구멍 속에서 겪는 것은 무엇일까. - P114

삼촌의 흰 별이, 아니, 인주의 흰 별이 검푸른 먹 속에서 타오르고 있다.
오래전, 삼촌의 방을 나오면서 뒤돌아보고는 저건 보석 같아. 하고 중얼거렸었다.
물의 결정이자 불의 한순간.
0과 무한. - P114

너무 많은 기억이 한꺼번에 덮쳐오고, 미처 들여다보기 전에 바스라지며 사라진다. 사라지는 짧은 틈마다 흰 별이 먹 속에서 타오른다. 타는 듯한 뜨거움이 두 눈에 고였다 사라질 때마다, 이지러졌던 모든 사물이 얼음처럼 선명해진다. - P114

두렵다.
두렵지 않다.
아니, 두렵다. - P115

내가 어떻게 말하느냐에 따라 실형을 치러야 할 수도 있습니다. 사건이란 진술되기 나름이니까요. - P119

모든 언어가 단 하나의 단어로 압축된다면, 그런 단어가 존재한다면, 우리가 입술을 열어 그걸 발음할 때 무슨 일이 벌어질까. 마찬가지로, 세계의 모든 형상이 하나의 결정, 단 하나의 점으로 응축된다면, 그때는... - P122

소리 지르고 싶다. 튀어오르고 싶다. 꿈틀거리고, 퍼덕이고 싶다. - P125

치욕은 조용하다.
조용한 우물 밑을 들여다보듯 나는 치욕을 들여다본다. - P126

낮고, 지치고, 차가운 목소리.
누구와도 혼동될 수 없는 목소리.
짓누르는 목소리.
숨을 조이는 목소리. - P127

살려줘. 누구에게인지 모르는 채 나는 입속으로 중얼거렸다. 캄캄한 구멍들이 벌집처럼 뚫린 건물들도, 수십 미터 허공에 멈춰 있는 부계도 한 겹의 껍데기였다. 심장 박동이 멈추는 동시에 꺼져버릴 거품이었다. - P129

거대한 얼음에 실려 떠내려가는 것 같았다.
택시는 끝없이 원을 그리는 것 같았다.
영원히 그 새벽을 빠져나가지 못할 것 같았다. - P129

멈추지 않고 생각한다. - P130

흉통이 처음 심장을 찔러왔을 때.
처음으로 죽음과 생명이, 세계와 내가 대등해졌을 때.
흔들리던, 깜박이던 목숨의 촉이 끝내 끊어지지 않았을 때.
그때 삼촌을 이해할 수 있었을까.
단 한순간.
아주 짧게. - P134

내가 그 일을 할 겁니다.
서인주라는 이름을 불멸하게 할 겁니다. 서인주가 가진 건 단순한 미술적 재능만이 아니었습니다. 신화가 될 수 있는 모든 조건을 그 여자는 가지고 있습니다. 젊은 나이, 아름다움, 압도하는 그림, 불행한 개인사, 자동차 자살이라는 극적인 최후까지………… 그 여자를 신화로 만들 겁니다. 그걸 위해 내 전 재산을 바쳤습니다. 재산 이상의 것을 바쳤습니다. 앞으로도 바칠 겁니다. - P136

물잔을 내려놓으며 그는 말을 끊는다. 뚫을 듯 내 얼굴을 쏘아본다. 감정을 싣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오히려 강한 감정으로 읽히는 표정이다. - P136

하지만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할 수 있는 일들, 해야 할 일들이 남아 있습니다. - P137

모든 일이 막힘없이 굴러가고 있습니다. 내 손으로 그 여자를 불멸하게 할 겁니다. 나를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방해하는 어떤 사람도 용서하지 않을 겁니다. - P137

나는 압도되지 않았다. 그의 광기와 고통, 집착에 압도되지 않았다. - P137

대답 대신 나는 묻는다. - P138

일반상대성의 원리대로, 물질의 질량에 비례해 주변의 공간이 휘어진다면ㅡ그게 행성처럼 거대한 것들에만 적용되는 원리가 아니라면ㅡ타인의 몸 주위로 구부러진 공간의 만곡 안으로 들어갔다 나오며, 자신의 구부러진 공간 속으로 타인을 불러들였다 내보내곤 하며 우리는 살아가는 것이리라고. - P139

한 사람이 가진 고유한 파동이 그 휘어진 공간의 경계까지 퍼져나가는 거라면ㅡ그 경계의 윤곽을 아우라라고 부르는 거라면ㅡ삼촌의 그걸 아마 나는 느껴보았다고. 눈도 귀도, 코도 살갗도 아닌, 설명할 수 없지만 분명하게 존재하는 감각으로. - P139

삼촌의 몸과 내 몸이 아직 닿아본 적 없을 때, 손끝 한번 스쳐보지 않았을 때에도 느낄 수 있었다. 믿을 수 없게 낮고 연한 그 파동을. 한없이 따스한, 부드러운 공기의 기척을. 똑같은 감각으로 강석원의 그것을 느낀다.
좁은 탁자를 건너 내 얼굴까지 번져온 오싹한 기척을. 살기, 억제된 고통, 끈적이는 슬픔으로 얼룩진 덩어리를. - P140

어떤 생각이 떠올라 나는 숨을 멈춘다. 이 남자는 어떤 형태로든 인주를 불행하게 했을 것이다. 인주의 남모르는 근심, 오래 곪은 환부였을 것이다. 연인이었다는 그의 말이 사실이든, 절반의 사실이든, 전혀 사실이 아니든. - P141

그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것을 나는 본다. 모른다면 그는 인주의 남자가 아니다. 인주의 허벅지를 관통한 것이 무엇인지, 이십 년 동안 인주의 다리를 절게 한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면. 그 흉터를 한번도 보지 못했다면. - P142

우우우 바람이 소리친다. 반소매 흰 체육복이 펄럭인다. 허벅지 근육이 꿈틀거린다. 창 같은 장대가 손아귀에서 휘청인다.
세차게 장대를 꽂는다.
튀어오른다.
날아오른다.
허리가 거꾸로 호(弧)를 그린다.
눈을 감는다. 눈을 감지 않는다. 넘는다. 넘지 못한다. 소리친다. 떨어진다. 떨어지지 않는다. - P143

확신할 수 있는 것 따윈 없어.
확신할 수 있는 건 모두 죽었어. 썩어서 사라졌어. - P144

형상도, 소리도, 빛도 아직 태어나지 않은 태초에, 양자역학적으로 진동하는 혼돈이 있었다. 확률적인 한순간이 찾아와, 10^-43초의 침묵을 뚫고 존재가 뛰쳐나왔다. 시공간이 씨앗처럼, 모든 것이 들어 있는 소금 한 알처럼 던져졌다. 그 소금이 충분히 부풀 때까지 빛은 없었다. 어마어마한 밀도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했기 때문이다. 마침내 빛이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뜨거워진 원소들이 서로 몸을 부딪쳐 응결됐다. 불에 싸여 태어난 별들이 전속력으로 회전했다. 은하가 소용돌이쳤다. 태양이 핵융합 반응을 시작했다. - P148

원시 지구는 끓어오르는 별이었다. 붉은 마그마가 바다를 이루며 넘실댔다. 마그마의 열기 때문에 증발해 올라간 원소들이 허공에서 결합했다. 태고의 비가 지상에 뿌려졌다. 펄펄 끓는 비였다. 아무리 비를 맞아도 마그마의 불길은 꺼지지 않았다. 수천만 년을 변함없이. 끓는 비는 내리고 마그마의 바다는 일렁였다. 마침내 임계점에 이르자 서서히 비가 식어갔다. 비를 맞은 지구도 함께 식기 시작했다. 생명체가 생길 수 있을 만큼 지구가 식는 데 수천만 년이 더 걸렸다. 수천만 년의 비와 수천만 년의 불이 만나 끓어오르는 증기를 뿜었다. - P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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