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사슴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장편소설 문학동네 한국문학 전집 24
한강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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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통해 어둠이라고 해서 그것이 모두에게 똑같이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에 따라 각 사람이 느끼는 어둠의 차원과 깊이 그리고 무게가 조금씩 달라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 또한 검은 사슴에 관한 어떤 전설(?)같은 이야기가 책 중간에 나오는데, 이는 소설 속 인물들의 모습과도 일정부분 오버랩되었다. 그리고 장편 소설이다보니 서사가 꽤나 긴 편인데, 이럴 수록 뒤에 이어질 내용들을 조금씩 예측하면서 읽다보니 그 예측이 맞고 틀리고를 떠나 소설에 좀 더 몰입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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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이 소설의 끝이 보인다. 여기 일일이 밑줄치진 않았지만, 등장인물들에게 미처 예상치도 못했던 사건사고가 끊이질 않는다. 명윤과 인영은 의선을 찾지 못한 아쉬움을 뒤로한채 황곡시 일대에서 할 일들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가는 기차를 탔는데, 이 기차가 폐탄광 일대를 지나다가 그만 탈선을 하고 만다. 이 사고로 사망자와 부상자가 속출했는데, 불행중 다행으로 부상을 입기는 했으나 명윤과 인영은 목숨을 건진다. 이 사고는 전국적인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한동안 신문에 매일같이 기사가 실렸다. 이로 인해 오랫동안 연락없이 지내던 사람들과도 연락이 닿게 된다. 황곡시에서 헤어진 뒤 한동안 연락이 두절되었던 장씨 그리고 어린 나이에 집을 나가 오랫동안 안부를 알 수 없었던 명윤의 누이동생인 명아도 기사를 보고 명윤에 연락이 온다. 참 이런 걸 보면 안 좋은 일이 일어났다고 해서 무조건 다 나쁜 것도 아니고, 좋은 일이 일어났다고 해서 무조건 다 좋은 것도 아니라는 말이 실감이 난다.

오늘 처음 밑줄친 문장은 명윤이 인영과 대화를 나누면서 내뱉은 말인데, 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는 말이 생각나는 그런 문장이었다.

세상을 살다보면 힘든 일도 있고 골치아픈 일을 만나기도 하겠지만, 그런 고통과 고난 속에서도 어찌됐든간에 일단은 살아남아 있어야 후일을 도모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렇게 견뎌내다보면 소설 속 인물들처럼 또 좋은 일이 생길 수도 있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인생이 고통스럽게 느껴질 때가 있을지라도 삶을 완전히 내려놓는 식의 어리석은 선택을 하기보다는 자그마한 희망 한 조각이라도 마음 속에 품고 살아가는 게 바람직한 태도가 아닐까 싶다.

어찌됐든 살아 있다는 건 좋군요. - P559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 P562

인간의 삶은 그것이 처해 있는 세계의 불안과 불완전함 속에서 너무나 미약하여 무가치한 것일 수 있다. 또한, 바로 그 세계의 불안과 불완전함을 감지하고 인간의 미약함을 경악스러워함으로써 삶의 무의미에 저항하는 것일 수도 있다. - P577

세계의 어둠 속에서 인간의 삶은 공허하지만 인간은 자기의 공허한 삶을 격렬하게 의식함으로써 어두운 세계보다 덜 어둡다. 어둠 속의 인간은 어둠을 응시함으로써, 어둠을 벗어나려 몸부림치거나 어둠 바깥에서 녹아내리거나 어둠에 완전히 삼키지 않으면서 존재할 수 있다. - P577

어둠 속에서 잠들 수 있다는 말은 빛 속에서 깨어 있는 것이 고통스럽다는 뜻일 터이다. - P579

어둠 속의 삶을 부정하여서는, 어둠의 공포도 삶의 공허도 극복할 수 없다 - P582

어둠 속의 삶을 인내한다고 어둠을 꿰뚫어볼 수 있는 건 아니라는 사실 - P582

의선을 찾아다니며 명윤과 인영은 어둠을 헤쳐온 각자 자신들의 태도를 알게 된다. 인영은 어둠을 익숙하게 여긴 까닭이 실은 자신의 강함이라기보다 비겁함이었음을 깨닫고, 명윤은 스스로 외면했던 그것으로부터 실은 멀어진 것이 아니라 끝내 그 복판에 자신이 처해 있음을 깨닫는다. - P582

어둠을 인내하는 것도 외면하는 것도 그것을 극복하는 길이 아니라는 것은, 이들이 정작 바라봐야 할 어둠의 실체가 다른 데 있다는 뜻이 아닐까? - P582

어둠 속에서 서로를 할퀼 필요는 없다는 것을, 쏘아보아야 할 것은 "폐광촌의 하늘"이라는 것을 - P582

빛은 세계의 표면만을 비출 뿐이니 "세계의 내면"을 뚫고 어둠의 육체를 만지고 싶었다 - P582

어둠에 몸을 맡기는 것이 오히려 생의 의지 혹은 인간 됨의 의무에 합당하다고 - P583

걷어낼 수 없는 세계의 어둠 때문에 인간이 오직 고통과 결핍에만 시달려야 하는가. - P585

희거나 검거나 밝거나 어둡거나, 한강이 응시하는 곳에는 높고 거대하고 화려하고 시끄러운 것들이 있지 않다. 그는 낮고 작고 누추하고 조용한 것을 끈질기게 따라가서 그것들을 깊이 있게 만들고 끝내 그것들을 긍정하고야 만다. 따뜻하게 감싸안고 달콤하게 위로한다는 뜻이 아니다. 세계의 어둠을 환멸과 체념으로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긴장과 고투로 대결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치열하지만 따뜻하지 않고, 화해롭지 않지만 다행스럽다. - P586

《검은 사슴》은 "결코 벗겨지지 않는, 절대로 벗겨질 수 없는 어떤 검은 것"을 끈질기게 따라가는 이야기다. 따라서, 그 (세계의) 혹독함이 (인간의) 존엄함으로, 우울이 정념으로, 좌절이 용기로 변할 때까지 돌아서지 않는 소설이다. 인간의 연약함을, 연약함으로 인한 고통을 운명의 깊이로 전환하는 소설이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인간이 그럴 수 있다는 사실에 안도하고 고마워하게 한다. - P5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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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 포스팅에 일일이 기록을 남기진 않았지만, 소설 속 화자인 인영은 3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11살 때는 자신의 친언니였던 민영이 안타까운 사고로 세상을 떠나버린 아픈 기억이 있다. 또한 친언니인 민영의 죽음으로 인해 인영의 어머니는 마음에 크나큰 상처를 입고 민영의 사고 후 15년 정도를 더 살다가 세상을 뜨고 만다. 만약 내가 인영과 같은 상황이었다면 온전한 정신으로 이 세상을 살아낼 수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힘들었을 것 같은데, 소설 속에서 인영은 외로움 속에서도 멘탈을 잘 잡고 결코 쉽지 않은 세상살이를 나름대로 잘 견디며 살아가고 있는 듯하다.

한편 앞선 포스팅들에서 언급되었던 의선이라는 인물도 있는데, 포스팅에 일일이 적진 못했지만 의선도 바로 위에서 언급한 인영 못지 않은 가족사가 있었던 것을 본문을 통해 알 수 있었다.

오늘 시작하는 부분에서는 과거 인영이 의선을 무슨 이유에서였는지 불쌍히 여겨서 품었다가 더이상 의선을 감당하기가 힘들다고 느낀 나머지 이제는 의선이 자신에게서 떠났으면 하는 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독자인 내 생각에 처음에 인영이 의선을 품었던 것은 뭔가 자신과 비슷한 동질감 같은 것을 본능적으로 느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실제로 이 두 사람의 가족사가 약간은 다른 듯하면서도 큰 틀에서는 비슷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책임감의 무게라는 건 누구에게나 무거운 것이었는지, 인영도 결국 그 무게를 더이상 감당하기가 버거웠던 것 같다. 그래서 의선이 이제 자기 곁에서 떠났으면 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이것은 어떤 경제적인 것보다는 심리적인 혹은 정신적인 스트레스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나는 명윤에게 의선이 스스로 떠났다고 말했다. 나 자신도 그렇게 애써 믿어왔다. 그러나 끊임없이 의선이 떠나는 순간을 꿈꾸고 있었던 사람은 누구였던가. 그녀가 갑작스럽게 내 삶에 뛰어들어 왔듯이 갑자기 떠나주기를, 그래서 나를 더이상 분열시키지 않기를, 불가해한 죄의식과 연민에 사로잡히게 하지 않기를 바랐던 사람은 누구였던가. 그녀의 알 수 없는 간절함을, 마치 그 간절함으로 온 마음을 기울여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 같은 가냘픈 얼굴을 더이상 견딜 수 없다고, 그런 식으로 내 삶을 그늘지게 한 사람은 어머니 한 사람으로 족하다고 생각했던 사람은 누구였던가. - P431

나는 외로움이 좋았다. 외로움은 내 집이었고 옷이었고 밥이었다. 어떤 종류의 영혼은 외로움이 완성시켜준 것이어서, 그것이 빠져나가면 한꺼번에 허물어지고 만다. - P431

나는 몇 명의 남자와 연애를 해보려 한 적이 있지만, 내가 허물어지는 것을 견딜 수 없어 그때마다 뒤로 물러서곤 했다. 나는 그들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다만 외로웠던 것뿐이었다. 그러니 새삼 그들을 더이상 사랑하지 않느니 마느니 하는 자책을 느낄 필요도 없었다. - P431

나는 누구도 사랑할 수 없는 종류의 사람이었다. 내가 사랑할 수 있는 것은 나 자신뿐이었다. 그것을 똑똑히 알고 있는 바에야, 내 배반을 진작부터 명징하게 점치고 있는 바에야, 누구도 희생시키지 않는 편이 낫지 않겠는가. - P431

나는 징그럽게 차가운 인간이었다. - P431

나의 내면은 끊임없는 배반과 이기심으로 서서히 분열되고 있었다. - P432

빛깔 때문에 분별하지 못했던 짐승이 다가오는 것을 나는 마침내 보았다.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검은, 목이 잘룩하고 다리가 가느다란, 자그마한 사람의 몸집만한 짐승이었다. - P438

그 짐승이 거의 구별 없이 어둠에 뒤섞여 있었으므로 나는 그얼굴이나 눈을 자세히 볼 수 없었다. 그것과 나의 시선이 얼핏 허공에서 만났다. 찰나 길쭉한 다리가 유연한 걸음으로 겅중겅중 움직였다. 아궁이의 불빛이 비치지 않는 먹물 같은 어둠 속으로 그것의 몸이 비껴졌다. 나는 어둠에 멀어버린 듯한 눈을 손등으로 문질렀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 P438

강원도에 사향노루가 자생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천연기념물이라고 했다. 약재로 모두 잡아가는 통에 극소수만 남아 있다고도 했었다. 저렇게 검은 짐승이라면 그것뿐일 것이다. - P438

해가 가고 있잖아. 조금 있으면 연들이 날아와. - P444

올겨울에는 그리로 돌아갈 거야. - P445

누군가가 그의 귀에 속삭였다. 거칠고 탁한 숨결이 그의 귓속을 불쾌하게 넘나들었다.
너는 그애를 잃을 거야. 그애는 한갓 노래가 될 거야. - P445

난 거기로 돌아가지 않을 거야.
나는 떠날 거야. 아주 멀리 갈 거라구. 소식 전하지 않을 거야. 세상 끝까지 갈 거야. 그때쯤 나는 눈이 멀어 있겠지. 목구멍도 말라붙어 있을 거야. 어떤 말도 나한텐 남아 있지 않을 거야. 그때에야 내 삶은 완전해질 거야. 완전하게 비어버릴 수 있을 거야. - P446

아무래도 이상했다. 의선의 얼굴을 좀더 가까이에서 보려고 다가가다가 명윤은 소스라쳤다. 그녀는 명아였다. 아홉 살짜리의 조그만 체구에 얼굴에는 진한 화장을 했다. 화장독이 퍼렇게 오른 밤을 일그러뜨리며 명아는 웃었다. 때투성이 쥐색 원피스를 입고 명아는 한 발 한 발 그에게 다가왔다. 명윤은 뒷걸음질을 치다가 가파른 계단을 헛디뎠다. - P446

명아가 까닥까닥 흔드는 오른손에 새끼손가락이 없었다. 바닥을 살피자 명아의 학생용 단화 옆에 부러진 새끼손가락이 뒹굴고 있었다. - P447

의선의 반지하방에 인영이 서 있었다. 인영은 처음 보는 검은색 긴 코트에 검은 바지를 입고 있었다. 키가 큰 편인 인영은 의상 때문에 더 후리후리해 보였다. 인영의 손에는 의선이 빚은 토우들이 들려 있었다. 그와 눈이 마주치자 인영은 그것을 먹기 시작했다. - P447

그애한테 뭘 줄 생각이냐?
인영의 말씨는 사납고 단호했다.
네 남루한 생 말고 뭘 줄 거냐? - P448

"쉬면 땀이 식어서 더 못 가게 돼. 천천히라도 계속 움직여야 해." - P452

거기로 가져가려고 했는데.... - P458

・・・ 거기로, 갈 수만 있다면 가져가려고 했는데. - P459

그래, 결국 넌 이곳에 왔다가 갔다.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갔다. 나처럼. - P460

그래, 돌아오지 마라.
차라리 돌아오지 마라.
이 세상에 돌아오지 말아라. - P460

그렇게 멀리 가지 마.
그렇게 빨리 가지 마.
조심해, 그렇게 가지 마! - P461

침묵은 밝았다. 사람의 살처럼 따뜻했다. - P463

기억은 왜 한순간에 걷잡을 수 없이 몰아닥쳤다가 사라져버리는 것일까. 너무 빨리 돌린 영화 화면처럼 수많은 것들이 스쳐지나갈 때가 있다. 그 순간에는 숨을 쉴 수가 없다. - P465

사라져버린 기억의 그림자를 생각하면서 눈을 감고 있을 때 가장 먼저 눈앞에 나타나는 것은 언제나 그 짐승이다. 흉흉한 밤의 꿈에도, 환한 낮의 풍경 속에서도 짐승은 갑작스럽게 나타난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뿔과 이빨까지 검은 사슴이다. - P465

소스라치거나 도망치지 않고, 떨면서 천천히 그 사슴이 이끄는대로 기억을 따라 내려가다보면 어렴풋한 기억의 단편들이 떠오르기 시작한다.
그것들에 매달려야 한다. 온 정신을 집중하여 오랫동안 들여다보아야 한다. 서서히 한순간이, 한나절이, 그리고 한 밤과 낮이 떠오른다. 그렇게 계속할 수만 있다면 모든 걸 기억해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더 계속하면 다시 모든 것이 한꺼번에 휘몰아쳐오고, 그러면 다시 엉망이 되어버리고 만다. 그 한나절의 기억만이라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서는 계속해서 그것을 곱씹고 생각해야만 한다. - P466

.......저는 제가 누군지도 모르는걸요. - P466

…………… 자기가 누군지를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어요? - P467

왜 사람들은 그녀에게 어디까지 가느냐는 말을 자꾸만 물을까.
그녀에게는 갈 곳이 없었다. 서울을 떠날 때 그녀에게는 어디를 떠나 어디로 간다는 의식조차 없었다. 청량리역에서 매표원이 재차 행선지가 어디냐고 다그쳤을 때에야 흐릿하기 짝이 없는 본능에 가까운 기억이 이끄는 대로 황곡행 열차표를 끊었다. 황곡에서 월산행 버스표를 끊은 것 역시 그렇게 어슴푸레한 기억에 의지해서였다. - P468

열의 하나쯤이나 될까. 운좋게 암반 사이의 가느다란 틈을 비집고 나와 꿈에도 그리던 하늘을 보게 되는 경우도 있기는 한데, 이상하게도 햇빛을 받자마자 이 짐승은 순식간에 끈적끈적한 진홍색 웅덩이로 변해버린다. 눈부터 빨갛게 녹아버리는 거다.
이 웅덩이 물을 살쾡이란 놈이 무척 좋아해서 기다렸다는 듯이 핥아먹어버리고는 한단다. 하지만 어쩌다가 낙엽 속에 숨고 눈 속에 묻혀 살쾡이의 눈에 띄지 않는 경우가 있지. 계절이 바뀌고 한해가 가고 또 십 년이 가고 백 년이 가면서 그 웅덩이가 썩은 자리에 어느덧 연한 풀이 돋고, 자그마한 꽃들이 핀다. - P478

그게 붉은애기풀이란다. 푸른 잎 가장자리에 녹물 같은 붉은 기운이 돌고, 뿌리를 달여먹으면 미친병이나 어질머리병에 직효이고, 산삼 찾는 것보다 더 힘든 풀이야. 그걸 찾는 약초꾼들은 꼭 전날 밤 꿈에, 산신령 대신 그 짐승의 검고 흉흉한 형상을 보곤 한다........ - P479

완전한 형태로 기억을 지속시키기 위해서는 일기는 최대한 간결한 서너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어야 했다. 또한 그 문장 안에 그날 그녀가 느끼고 경험했던 모든 것이 들어가 있어야 했다. - P495

그녀는 말을 하고 싶었다. 자신의 짧은 삶을, 단 몇 마디로라도 압축하여 말하고 싶었다. - P497

그 압축한 말을 바다 사진을 가진 언니에게 들려주고 싶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 언니는 그녀에게 귀를 기울여주고, 사적인 이야기를 묻고 때로 들려주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누군가에게 그 마지막 말을 들려주어야 한다면 그 사람은 반드시 그 언니여야 했다.
그 언니에게 부치는 편지 형식으로 자신의 삶을 여남은 줄로 요약하는 작업에 그녀는 골몰하기 시작했다. - P497

나는 어두운 골짜기에서 태어났어요.
높은 산들로 둘러싸여 밝은 햇빛은 고작 다섯 시간밖에 들지 않고, 늘 저물녘처럼 그늘진 마을이에요.
약초꽃 피는 때 산으로 떠난 아버지가 돌아오기 전에 어머니는 떠났지요. 어머니를 찾아나선 아버지는 겨울 내내 돌아오지 않았어요. - P498

열세 살에 그곳을 떠났어요. 그뒤로 돌아가본 적이 없어요.
나는 학교에 다녀본 적이 없어요. 황곡 시내의 중학교 교무실에서 사환으로 반년을 일한 적은 있어요. 그곳에서 여비를 모아 서울로 왔어요. 서울 와서는 이 년 동안 야구잠바 소매만 박았어요. 주방에서도 일해보고 홀 심부름도 해봤어요. 하지만 학교는 가지 못했어요. 회사 사람들에게는 검정고시를 보았다고 했지요. 하지만 그건 거짓말이에요. 거짓말을 하고 싶었던 건 아니에요. - P499

작업이 실패할 때마다 그녀는 절망했다. 그러나 그만둘 수는 없었다. 밤마다 이불 속에서 몸을 뒤채이며 문장들을 만들었다. 때때로 참을 수 없는 고통이 목젖을 밀고 올라왔다가 사라지곤 했다. 문장들은 점점 헝클어졌다. 같은 말이 반복되었다. 절제는 사라졌다. - P501

스타킹이, 구두가, 블라우스와 속옷까지 살갗을 옥죄어왔다. 숨을 헐떡이며 그녀는 걸음을 재촉했다. 걸으면서 조끼를 벗고, 블라우스를 벗고, 치마를 벗었다. 스타킹과 구두까지 벗어던졌다. - P504

알몸에 쏟아지는 햇살의 감촉은 뜨거웠다. 반면 바람은 부드럽고 서늘하게 그녀의 목줄기와 마른 젖가슴을 휘감았다.
그녀는 달리기 시작했다. 어디로 달리는지 그녀는 몰랐다. 맨발에 닿는 보도블록이 따뜻했다. 그 감촉이 좋아 그녀는 느닷없이 소리내어 웃었다. 그녀는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았다. 오로지 벌거벗은 몸뚱이를 어지럽게 휘감는 바람의 황홀한 감촉을 느꼈다. 마치 남의 몸에서 나온 것 같은 웃음소리가 점점 커졌다. 그녀의 뜀박질이 빨라졌다. - P505

그녀는 더 많은 빛이 있는 쪽으로 달렸다. 오로지 피부에 부딪히는 빛의 감각에 의지하여 그녀는 숨차게 달려나갔다. 허파가 터질것 같았다. 숨이 끊어지는 것 같았다. 심장이 멎어버릴 것 같았다. - P505

그녀의 맨발이 무엇인가 날카로운 것을 밟았다. 그녀의 허리가 고꾸라졌다. 어둠이 그녀의 몸을 덮쳤다. 찢어지는 비명이 목구멍을 뚫고 뛰쳐나왔다. - P506

몸속 깊은 곳에 웅크리고 있던 낯선 음성이, 출렁이는 무수한 어둠의 덩어리들 속으로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흐느낌도 노래도 아닌 그 가느다란 소리가 빈 바다의 번득이는 포말들 위로 산산이 흩어져 박혔다. - P507

그래, 내 인생에는 아무것도 없었어. - P524

정작 가장 중요한 문제는 그 무렵부터 장이 사진 자체를 혐오하기 시작했다는 점이었다. 사물의 껍데기만을 핥을 수 있을 따름인 카메라라는 기계에 장은 환멸을 느끼기 시작하고 있었다. - P528

그는 세계의 내면과 사진기 사이에 놓인 간격을 깨닫고 있었다. 사진기로는 어느 것의 안으로도 들어갈 수 없었다. 빛에서 시작하여 빛으로 끝나는 것이 사진이었다. 사진기가 포착하는 것은 빛이고, 인화지에 드러난 것도 빛일 뿐이었다. 만지고 냄새 맡고 통증을 느끼고 피를 흘릴 수는 없었다. 그때까지 장은 결코 사진기로 찍어낼 수 없는 것을 인화지에 담아내고 싶어하고 있었다.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았으므로 그는 더이상 사진을 찍을 수 없었다. - P529

떠난 사람은 떠난 채로 두어야 한다 - P534

다 끝났다.
그가 기다렸던 것은 돌아오지 않는다. - P536

조금만 더 버텨라.
조금만 조금만 더 나아가라. - P541

나 때문이다. 내가 옆에 있어야 했다. 끝까지 있어야 했다.
명윤의 얼굴은 여전히 내 눈앞에 어른거리고 있었다.
그 밤 의선을 따라나섰어야 했던 것처럼, 따라나서서 그 바보같은 목욕 바구니를 뺏어들고, 떨고 있는 어깨를 안고 돌아왔어야 했던 것처럼, 나는 그의 옆을 떠나지 말았어야 했다.
떠나지 말았어야 했다. - P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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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 소설이다보니 서사가 꽤나 길다. 대략적인 상황만 언급하자면 잡지 취재차 탄광이 있는 황곡시라는 곳을 방문한 인영과 명윤은 그곳에서 사진 찍는 일을 하는 장이라는 사람을 만나서 이런저런 얘기들을 듣는다. 그 와중에 광부로 일했던 임林이라는 사람에 대한 얘기를 듣게 되는데, 지난번 포스팅에서도 잠깐 언급했었지만 독자인 나는 이 임林이라는 사람이 소설의 앞부분에서 황곡시로 기차를 타고 간다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던 임의선이라는 인물과 연관되어 있을 거라는 얘기를 했었다. 처음엔 이 임씨가 임의선인줄로 생각했는데, 뒤이어 계속 읽다보니 이 광부로 일했던 임林씨는 임의선의 아버지인 임영석이라는 인물이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한편 명윤은 임의선을 찾기 위해 인영과 함께 황곡시 주변을 수소문해가며 샅샅이 뒤져보다가 도저히 찾을 수 없겠다는 판단이 들어 서울로 돌아가려고 했는데, 인영이 방문했던 폐교에서 우연히 발견하게 된 신문기사 스크랩북에서 임의선의 아버지인 임영석에 관한 기사를 발견하면서 의선을 찾는 일은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된다. 거의 99% 포기상태였다가 1%의 희박한 가능성이었던 신문기사 스크랩북을 근거로 다시 의선을 찾아나서기로 한 것이다. 세세한 것들까지 놓치지 않으려는 인영의 꼼꼼함과 명윤의 열정이 꺼져가던 불씨를 다시 살린 것이라고도 볼 수 있겠다.

오늘 처음 밑줄친 문장은 의선을 찾기 위해 야간 버스를 타고 월산이라는 작은 마을로 이동하는 과정 중에 인영이 머릿속으로 생각한 것인데, 불빛을 찾기 힘든 시골의 캄캄한 밤과 연결지어 생각해보면 좋을 듯하다. 비유적인 표현인데, 개인적으로 인상적으로 느껴졌기에 밑줄쳐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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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더 읽다가 의선이 고기를 먹지 않는 이유에 대한 얘기가 나오는데, 이는 개인적으로 예전에 읽었던 《채식주의자》 의 영혜라는 인물과 거의 똑같은 것이었다. 단지 작품에 나온 인물의 이름만 다를 뿐이었다. 어쩌면 이것은 저자가 평소에 갖고 있는 신념같은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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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이어서 쭉 읽어나가다가 보니 인영과 명윤은 더이상 의선을 찾는 것이 어렵겠다는 생각에 월산에서 황곡으로 돌아가는 버스를 타러 터미널로 왔는데, 그곳에서 어떤 아낙네들의 대화를 우연히 듣게 된다. 처음에는 큰 의미없는 일상적인 대화인줄로만 알았는데, 이들의 대화 속에서 인영과 명윤이 그토록 찾아헤매던 지명地名인 어둔리라는 단어가 나온다. 인영은 이 지명에 관해 아낙들에게 질문을 던지면서 그동안 자신이 찾았었던 다른 지명들까지도 실재로 존재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전까지만 해도 인영과 명윤은 자신들이 찾았던 지명들이 존재하지 않는 것 같다고 낙심하고 있던 터라, 이 아낙들의 대화는 그야말로 한 줄기 빛과 같은 것처럼 인영과 명윤에게 느껴졌을 것이다.

추가로 아낙들의 대화 마지막 부분에서는 정체가 아직 불명확한 어떤 젊은 여자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 여자가 연골이라는 곳에 간다고 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근데 여기서 이 젊은 여자의 성이 김씨인 것으로 나오는데, 그동안 나왔던 소설 속의 인물들 중 김씨는 명윤과 함께 있는 인영 외에는 없는 것으로 보아 왠지 인영과 관련있는 사람인 것으로 예상된다. 참고로 소설의 앞부분에서 인영의 친언니인 민영이라는 사람이 잠깐 나왔었는데, 그녀는 인영이 11살 때 세상을 떠났다고 하는 것을 독자인 내가 별도로 기록해 둔 것이 있었는데, 어쩌면 이 민영이라는 사람이 실제로는 죽지 않고 그당시 행방불명되어 살아있었던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문득 해보게 되었다. 실제로 이러한 나의 생각이 뒷부분을 통해 맞는 것으로 드러날지 아닐지는 아직 확신할 순 없지만 무언가 보이지 않던 퍼즐을 조금씩 맞춰나가는 듯한 느낌을 받아서 개인적으로는 이 부분을 읽으면서 약간의 전율이 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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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더 읽다보니 김씨라는 사람은 그냥 마을에 사는 주민 인 것으로 밝혀졌다. 다만 이 김씨가 명윤에게 의선으로 추정되는 인물의 행적에 대해 말해주는 장면이 나온다. 독자인 나로써는 긴장감을 놓지 않고 이어갈 수 있는 부분이었다.

사람들이 흑백사진에 친밀감을 갖는 것은 밤 때문인지도 모른다고 나는 생각했다. 또한 누구나 태중의 어둠 속에서 태어났으므로, 그 열 달 동안의 어둠에 대한 기억을 몸 어딘가에 저장해두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거기서 몸부림치며 빛 속으로 뛰쳐나오려 했던 마지막 순간의 기억 역시 그 안에 숨겨져 있을 것이다. - P320

어둠은 평등했다. 죽음과 마찬가지로, 모든 것을 똑같은 암흑 속에 묻어버리고 있었다. - P320

무엇인가를 갈망하는 것을 멈출 때 비로소 평화를 얻게 된다는 것을 나는 어렴풋이 깨닫고 있었다. - P321

눈빛의 변화만으로 사람이 얼마나 달라 보일 수 있는지 - P327

그냥...... 소나 돼지나 닭이나. 어떤 짐승이 죽어야 내가 그 살을 먹는 거잖아요? 결국 그 짐승이 죽는 대가로 내가 조금 더 건강해진다는 건데..... 아무래도 나 자신이 그 짐승보다 낫다고 여겨지지 않아요. 소가 엄마한테서 떨어질 때 얼마나 슬프게 우는 줄알아요? 돼지가 죽기 전에 얼마나 불쌍하게 비명을 질러대는데요. 방정맞은 생각이지만, 나는 회식 같은 데 가서 고기를 굽고 있으면 자꾸만 상상을 하게 돼요. 저것이 살았을 때는 어땠을까, 죽는 순간은 어땠을까………… 그런 상상을 하고 있으면 내가 그 짐승의 살을 먹고, 그 짐승보다 오래 살아야 할 이유도, 자격도 없다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 P328

내 방도 옥탑이라서 좋아했었어요. 가끔씩 와서는 방에 들어오지도 않고, 일광욕하는 사람처럼 옥상에만 앉아 있다가 가곤 했어요. 그애는 마치...
그는 미소를 거두었다.
・・・・・ 마치 식물 같았어요. 이렇게 어두운 방에서도 그애는 늘저 창문을 향해 앉아 있었어요. 어두운 방에 놓인 화분 속의 풀이, 아무리 가냘픈 빛이라도 있으면 그쪽으로 구부러지는 것처럼 말예요. - P342

재작년 겨울에 후포에 간 적이 있었는데, 바닷가 모래밭에 갈매기떼들이 앉아 있는 걸 봤어요. 모두 일제히 한방향을 보면서 수십 마리의 새들이 꼼짝도 않고 있더라구요………… 그것들이 바라보는 방향은 태양 쪽이었어요. - P342

다 햇빛 때문이에요. 안 그래요? - P343

......너무 강한 햇빛은 위험하잖아요. 안 그래요? - P343

세상에는 서서히 미쳐가는 사람들도 있는 거 아닐까요? 서서히 병들어가다가 폭발하는 사람 말예요. 줄기가 뻗어나가다가, 한없이 뻗어나갈 듯하다가, 그 끝에서 거짓말처럼 꽃이 터져나오듯이・・・・・・ 글쎄, 이 비유가 걸맞은 것 같진 않지만..... 그런 식으로 터져버리는 거죠. 그래요. 오래 잘 참은 사람일수록 더 갑자기. - P346

선배는 예전의 그애를 좋아하지요. 하지만 나는 그때의 그애를 몰라요. 다만 지금의 그애가 좋아요. 그때를 모르니까. 하지만 몰라도 괜찮아요...... 지금이 좋으니까. - P347

단지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본능에 의지하여 나는 행동하고 있었다. 미친 짓이건 어리석은 짓이건 내가 선택해서 나선 길이었다. 더구나 다음날까지는 어차피 작정하고 온 것 아닌가. - P349

자신도 모르게 명윤은 서인천의 집을 떠올리고 있었다. 낮에도 창문을 꼭꼭 닫아 빛이 들지 않던 그 방의 오후를, 곰팡이가 흐드러지게 핀 장판과 벽지 썩어가는 냄새를 생각했다. 그의 삶은 그 시절에 이미 결정되었다. 그의 몸뚱이에 들러붙은 그 눅눅한 어둠은 단 한 번도 떨어져나간 적이 없었다. 지긋지긋하게, 종내에는 이 외딴 소읍까지 그림자처럼 그를 따라온 것이다. - P357

황곡이 버림받은 거대한 짐승 같은 느낌을 주었다면, 이곳 월산은 그보다 몸집이 작은 짐승 같았다. 오래전에 숨이 끊어져 이제 남은 뼈들마저 삭아가는 들짐승처럼, 이 소음은 높은 봉우리들의 가운데에 허술하게 엎드려 있었다. - P358

아버지는 땅속에서 살았었대, 라고 의선은 그에게 말했었다.
땅속이라니?
땅속, 아주 깊은 데에서 살았었대………… 거기서 돌을 캤대. 땅속에서 돌을 캔다는 건・・・・・・ 그 돌들하고 목숨을 조금씩 바꾸는 거라고 했어. - P362

명윤은 치밀어오르는 의심과 회의를 떨쳐버리기 위해 고개를 흔들었다. 의선이 말했던 것들은 어느 하나 실제로 존재하지 않았다. 인영의 말대로, 그 말들에 의지하여 길을 나선 것부터 어리석은 일이었을까.
어쩌면 의선이라는 여자애 역시 존재하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
명윤은 자신도 모르게 숨이 가빠오는 것을 느꼈다. 그가 보고 겪었던 의선은 혼령이나 꿈 같은 것이었던 건 아닐까. - P362

"그애가 아무 기록에도 없는 것이...... 우연이 아닌지도 몰라요." - P369

처음부터 의선을 붙잡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는 단 한 번도 그녀의 인생에 개입할 수 없었다. 줄곧 의선은 그녀 자신의 몸속에 있는 가냘픈 힘이 이끄는 대로 움직여왔다. 그 힘이 우연히 명윤에게로 기울어 그와 함께 세 계절을 보낸 것뿐이다. 이제 그것이 그녀를 어디로 데리고 갔는지 그는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서울을 떠나면서 그가 진실로 두려워했던 것은 의선을 찾지 못하는 것이 아니었다. 설령 찾아낸다 해도 그녀를 그 자신의 삶 속으로 용기 있게 끌어당길 수 없으리라는, 뿌리깊은 패배감이었다. - P370

마치 상처 입은 두 짐승들처럼 그들은 상대의 얼굴을, 눈을, 서로의 등뒤로 검게 펼쳐진 폐광촌의 하늘을 쏘아보았다. 침묵이 후회와 외로움과 분노가 거칠게 뒤섞인 침묵이 흘렀다. - P372

"간 사람이사 무슨 걱정이 있겄누, 한겨울이라고 찬 구들장 걱정을 하나, 배 주릴 걱정을 하나. 손이 갈라지겄나, 발가락이 얼어터지겠나. 미어질 가슴도 없으니 얼마나 좋겄누." - P376

".....세월만한 약이 없다지?" - P378

"현리, 저기 칠판에 현리라고 적혔잖우? 우리는 그냥 어둔리라고 그래. 옛날부터."
목이 긴 여자는 배차시간표가 적힌 흑판으로 고개를 돌렸다. 뚫어져라 흑판을 쏘아보더니, 이번에는 긴 의자로 돌아가 자신의 배낭에서 황급히 지도를 꺼냈다. 여자의 상체의 두 배는 될 대축척지도가 배낭 위로 펼쳐졌다. 여자는 검지손가락으로 월산을 짚었고, 이내 현리玄里를 찾아냈다. - P381

‘옛날에, 그애가 어둔리 이야기를 했었어. 난 그게 지어낸 이야기라고 생각했었는데." - P382

"거 참 이상하네."
어둔리에 산다는 파마머리 아낙이 혼잣말처럼 말했다.
"며칠 전에도 어떤 젊은 여자애가 연골에 간다고 하는 걸 누가 봤다던데."
"연골엘가? 젊은 여자애가?"
매점 아낙이 되물었다.
"골말에 김씨 말이야. 왜 얼마 전에 타이탄 트럭 하나 샀잖어? 월산으로 걸어나가는 사람인 줄 알고 태워주려구 했더니, 나가는게 아니라 연골로 들어간다고 하더래. 그래 참 별일도 다 있다고 했더니만." - P384

"더 빨리 걸어야 해. 시간을 끌수록 체온을 잃게 돼. 체온조절이 안 되면 죽는 거야. 알아?" - P389

전날 저녁 어둔리의 아랫마을인 골말에 사는 김씨라는 사람을 만나 의선의 사진을 보였을 때 그는 글쎄요, 라고 말끝을 흐렸었다.
비슷한 것도 같으네요. 하지만 얼굴을 하얀 목도리로 친친 싸매서 잘 볼 수가 없었어요. 그러고는 세상에, 아무도 안 사는 연골로 간다니까 섬뜩했다니까요. 거긴 아무도 안 산다고 해도 들은 척 마는 척하고 허전허전 걸어가는 거예요. 한 손에는 기우뚱하니 큼지막한 가방까지 들고...... 그땐 몰랐는데 지나고 생각해보니 꼭 귀신에 띈 것 같더라구요.
그게 벌써 나흘 전의 얘기라는 것이었다. - P395

"그 조그만 마을에 주민이 몇이나 되겠어요? 모두 집안에 있었다면 못 봤을 수도 있는 거죠. 더구나 그애가 눈 속에 갇혀 있는지도 모르잖아요. 얼어죽어 있든 어쨌든. 거기에 가야 해요. 그애를 찾지 못한다 해도…………"
명윤은 잔기침을 하며 휘청거리는 몸의 균형을 잡았다.
"하다못해 뭔가 단서가 될 만한 걸 남겨놨을 거예요." - P395

얼마나 더 참아야 하는 것일까. - P396

이것이 과연 맞는 길일까. - P397

의선이다. - P400

"......바로 찾아왔군요." - P401

"이제 어디로 가죠?" - P402

"여전히 그애에 대해서 알아낸 게 없군요. 난 이곳으로 오기만하면......
...(중략)...
"모든 걸 알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팔차선 횡단보도에서 그애가 왜 그런 짓을 했을까, 이런 말을 그애는 왜 그때 나에게 했었을까. 조용히 춤추는 것 같은 그애의 눈, 그 침묵 속에 도사리고 있었던 것들은 무엇이었을까. 다 풀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설령 그애를 찾아가지고 돌아오는 데에는 실패한다 해도." - P403

"......아무것도 없군요. 그런데." - P403

갑자기 긴장을 푸는 것은 좋지 않다. - P403

몇 분간 쉬었다 가는 것은 괜찮을 것이다. - P403

"봤죠? 하얗게 쓸어진 방바닥? 그애는 다시 와요. 반드시 온다구요. 서울서 여기까지 왔는데, 일단 한번 돌아왔는데 다시 못 오겠어요? 반드시 온다구요. 반드시 올 거예요." - P406

추위나 두껍게 쌓인 눈, 무거운 명윤의 몸보다 나를 괴롭혔던 것은 그의 넋두리였다.
괜찮아요.
두고 가요.
제발 놔두고 가요.
반복되는 그의 속삭임이 머리끝까지 화를 치밀게 하였다. 제발 닥쳐줘, 라고 터져 나오려는 고함을 간신히 참으며 나는 이를 물었다. - P408

이젠 다 틀린 거죠...... 이젠 다, 다 틀렸어요...... 이젠 더 가볼 곳도 없어요. - P408

교통사고를 당한 사람이 사고 순간의 고통을 기억하지 못하듯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의 충격은 저절로 삭제되는 것일까. - P418

세상 위로 올라오니까, 완전히 다른 세상이네?
나는 눈부시게 희고 뭉클뭉클한 구름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곳은 전혀 다른 세계였다. 구름 아래에 무엇이 있는지 전혀 볼 수 없었다. 구름 아래에 있을 때 구름 위에 무엇이 있는지 전혀 볼 수 없었던 것처럼. - P419

그 날아가는 비행기 아래에 내가 아는 세계가, 그 위로는 내가 가보지 못한 또다른 세계가 있었다.
그럼, 우리가 사는 세상 밑에도 다른 세상이 있어요?
어머니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염주알을 손아귀에서 굴리며 쉴새없이 무엇인가를 중얼거리고 있었다. - P419

돌아올 때는 배를 탔다. 일곱 시간 동안 물살을 헤치며 육지를향해 나아가는 동안, 이상하게도 나는 바다가 무섭지 않았다. 처음 타보는 배인데 멀미도 하지 않았다. 언니가 바다 아래에 있다고 생각하니 겨울의 검퍼런 바다 밑이 따뜻한 곳인 것처럼 느껴졌다. 어디에선가 언니가 파도 속에서 몸을 내밀며 손을 흔들고 있을 것만 같았다. 나는 상처받기에는 아직 어렸던 것이다. - P421

귀신이라도 나타나서, 만나라도 봤으면...... 민영아. - P422

어쩌자고 그랬니..... 어쩌자고, 네가 어쩌자고...... - P422

옷을 벗어야 하는데, 옷이 무거워서 가라앉는 건데. - P423

시간은 결코 멈추지 않는다. - P423

빛 속에서도 나는 어둠 속에서 웅크리고 있는 것 같은 적막감을 느끼곤 했다. 어떤 외부의 빛도 맨살로 직접 느낄 수 없게 하는 어둠의 덩어리가 내 몸을 두꺼운 외투처럼 감싼 채 따라다니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오히려 캄캄한 방보다 밝은 대낮의 거리에서, 나를 결박하고 있는 어둠의 무게를 더욱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혼자 있을 때보다 여러 사람이 떠들썩하게 어울리는 자리에서 그 어둠은 더 가깝게 느껴졌다. 깊은 수심 어디쯤의 먹먹한 침묵 같은 어둠이 내 웃음을 봉하고 몸을 묶었다. - P424

그러나 그 상태로 시간이 갈수록, 나는 외로움에 지치는 것이 아니라 단단하고 강해졌다. 생채기 위로 세월이 덧쌓였다. 묵었던 상처를 뚫고 새로운 상처가 파이고, 그 위로 다시 굳은살이 박였다. 어떤 환부에는 약도 시간도 듣지 않는다는 것을, 오로지 익숙해지는 것으로만 잊을수 있는 통증이 있다는 것을 나는 알게 되었다. 나에게 맞는 직장에 들어가 일을 하고 사진을 찍으면서, 오히려 나를 지켜주는 것이 그동안 나를 결박해온 그 어둠이라는 것을 알았다. - P424

깊은 물속에 가라앉아 먼 수면 저편의 세상을 보듯이 나는 살았다. 나는 아무것도 갈망하지 않았다. 혼자임을 깨뜨릴 수 있는 어떤 가까운 관계도 원치 않았다.
의선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모든 것이 그렇듯 자연스럽게 흘러가고 있었다. 왜 나는 그녀를 내 방에 받아들였던 것일까. 누구에게도, 한 번도 허락해보지 않은 애정을, 살을 부딪힐 만큼의 가까운 관계를 그녀에게 허락하고 싶어했던 것일까. - P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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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권에서 강호인 상양고를 꺾고 결승리그에 올라온 북산은 8권에서 또다른 강호인 해남대 부속고를 상대하게 된다. 오늘 처음 밑줄친 문장은 해남대 부속고의 감독인 남진모가 자기 팀 주장인 이정환에게 건내는 말인데, 최고라고 평가받는 팀의 에이스 선수가 그 어떤 다른 선수들보다도 승부욕이 강한 것을 보면서 분야를 막론하고 탑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왜 탑일 수밖에 없는지를 다시금 느낄 수 있었다. 아마도 그들이 갖고 있는 태도가 탑이 될 수밖에 없게끔 그들 자신을 이끌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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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이어 읽다가 해남대부속고의 한 선수가 독자인 나의 눈길을 끌었다. 훈련의 양과 질이 어마어마해서 중학교 때까지 날고 긴다던 선수들도 상당수가 그만둔다고 소문난 해남대부속고에서 3학년까지 살아남은 선수인데, 이름은 홍익현이고 체격조건이 왜소한 편이라 키가 큰 선수들이 주로 뛰는 시합엔 많이 나오진 못했던 선수였다. 근데, 북산고가 많은 사람들의 예상과는 달리 해남대부속고와 대등한 시합을 하자 해남대부속고의 감독인 남진모는 이 선수를 출전시켜야겠다는 마음을 먹고 운동능력이 좋은 강백호를 마크하라는 지시를 내린다. 얼핏보면 선뜻 납득이 가지 않는데, 감독인 남진모는 어떤 점을 보고 이 선수를 출전시킨 것인지 문득 궁금해졌다.

좀 더 읽다보니 심리전의 목적으로 이 홍익현이라는 선수를 출전시켰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흥분을 잘하고 기본기가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강백호에게 이 선수를 붙여서 강백호가 스스로 넘어지도록 유도하는 작전인 것이었다.

너의 장점은 엘리트 의식에 젖어있지 않고 언제나 승리에 대한 강한 집착을 보이는 것이다. 정상에 있는 네가 가장 승리에 굶주려 있다니! - P19

반드시 이기자!! - P24

너는 말해줘도 몰라. - P49

그건 네 얘기겠지! - P107

재미있는데. - P116

계산 밖의 선수에게 휘둘려 상양은 자기 페이스를 잃고 말았다.... - P127

끈기가 있어요. 5명 모두... - P131

해남대부속고 농구부의 연습은 질과 양, 모두 격이 다를 정도로 심하다고 알려져 있다. 매년 봄이 되면 각 중학교 에이스급으로 알려진 선수들이 이 명문 중의 명문을 동경해서 들어오지만, 반 이상은 일주일 만에 그만둔다. 한 달이 지나면 나머지의 반이 또 그만두고, 1년이 지날 무렵 남아있는 사람은 20%도 채 되지 않는다. - P133

너의 3년간의 노력을 터뜨려봐라!! - P134

해낼 테다!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 P135

내... 내게서 점수를 따낼 수 있을 거 같으면, 얼마든지 따내봐! - P142

가능한 한 강백호를 도발해라. 하지만 수비는 전혀 안해도 돼. - P143

백호는 상대가 강하면 강할수록... 절대 지지 않으려는 마음에 강한 집중력을 발휘해서 대응해 왔어....성현준이나 두목원숭이 같은 녀석들에게 지지 않으려고 집중하는 와중에 운도 따르고 해서 그 만큼이나 활약할 수 있었던 거지.... - P146

상대가 강하지 않으면 실력 이상의 것은 발휘되지 않는 건가... - P146

엄청난 점프력과 리바운드에 현혹되어선 안돼. 운동능력은 있어도 그는 어디까지나 3개월 된 초보자. - P151

강백호의 실체를 완전히 파헤치다니... - P151

어차피 풋내기다. - P152

역시 해남의 유니폼을 입을 자격이 있는 남자다! - P159

꾸준히 노력해 온 걸요. 익현이 형.... - P159

골밑에서는 덩크만 노려라! - P161

아마도 그게 들어갈 확률이 가장 높을 거다...!! - P162

강백호, 어깨의 힘을 빼라. 손만으로 던지는 게 아니라 무릎도 쓰는 거다. - P170

두려워 할 것 없어!! 녀석은 프리스로라면 절대로 들어가지 않아!! - P171

약점은 아직도 많이 있을거다…. 모든 것을 파헤쳐주마, 강백호! - P173

잠자코 지켜보기나 해라. 멍청아. - P184

난 나간다. - P219

뼈가 부러져도 좋다.. 걸을 수 없게 되어도 좋다..!! 간신히 잡은 찬스다...!! - P222

그래... 왕자 해남은 항상 이기기 위한 최선의 방법을 선택한다!! 상대가 약점을 보이면, 놓치지 않고 그곳을 찌르는 것이 해남의 바스켓이다!! - P228

고릴라는 반드시 돌아와. 고릴라가 빠진 구멍은 내가 메운다. - P237

너 혼자만으론 역부족이다. - P242

리바운드를 잡느냐 못 잡느냐는 골밑의 포지션 싸움에 달려있다. - P255

볼을 잡으면 겨드랑이 밑으로 잡아당겨, 절대로 놓치지 않는다는 투지를 상대에게 보여줘라. - P257

멍청하긴!! 너처럼 잡고 나서 방심하는 게 가장 위험해!! 착지와 동시에 밑에서 노리고 있는 녀석도 있다!! - P257

골밑은 전장이다!! 자신의 골밑은 어떡해서든 사수해야만 해!! - P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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