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번 포스팅의 마지막 부분에서 ‘세상의 모든 것은 마음이 지어낸다‘는 의미의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라는 말이 나왔었다. 저자는 이 말에 나오는 마음이라는 것이 바로 우리의 무의식에 해당한다고 하면서 이 무의식의 공간을 채우는 것이 생각의 씨앗인 관념이라는 말도 덧붙인다. 결과적으로는 관념이 바뀌어야 내가 사는 세상이 바뀐다는 게 핵심인데, 오늘은 이와 관련해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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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을 읽다가 긍정적인 사고 방식이 왜 중요한지를 머리만이 아닌 마음으로 느끼게 되었다. 저자가 반복해서 중요하다고 강조하는 것이 바로 무의식이라는 것인데, 이 무의식이라는 것은 결국 우리 머릿속에 스며들어있는 관념이라는 씨앗으로부터 나오기에, 이 씨앗에 부정적인 생각보다는 긍정적인 생각이라는 성분이 많이 포함되어 있을수록 우리의 무의식에도 보다 긍정적인 영향을 많이 끼칠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 독서를 통해 내 삶에 적용을 해보자면, 어떤 상황을 만났을 때 그것이 비록 좋지 못한 경우일지라도 최대한 긍정적으로 사고하는 습관을 들이는 것이 좋겠다. 대부분의 경우 상황이 좋을 때는 긍정적으로 사고하는 게 어렵지 않지만, 상황이 내 예상과 다르게 흘러간다거나 하는 등의 이유로 좋지 않을 때는 부정적인 생각들이 본능적으로 드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이러한 본능적인 사고의 흐름에 약간의 변화를 주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는 말을 기억하며 긍정적인 사고방식으로의 변화를 꾀한다면 우리의 무의식도 거기에 발맞춰 최대한 긍정적인 방향으로 움직일 것이고, 그것은 결국 나의 미래를 긍정적으로 만들어내는 결과물로 돌아올 것이다.

또한 매사에 부정적인 사람들과는 가급적 거리를 두는 것이 다소 냉정해보일수도 있겠지만 궁극적으로는 맞지 않나 생각한다. 그들의 부정적인 무의식과 관념들이 바이러스처럼 내 생각과 무의식에 침투하여 내가 꿈꾸는 미래를 만들어나가는데 크나큰 걸림돌 또는 장애물로 작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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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이어 읽다가 저자가 어릴 때 헌팅을 잘했던 동생을 보면서 느꼈던 것을 얘기하는 부분이 나온다. 그 동생은 헌팅 과정 중에 무수한 실패를 경험하면서도 계속 되는 시도 끝에 결국에는 헌팅에 성공하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본문에서 저자는 그 동생의 끊임없는 도전정신을 굉장히 높게 평가한다. ‘실패가 당연하듯이 성공도 당연하다‘는 저자의 말이 처음에는 도무지 납득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본문을 읽으면서 실패의 경험을 통해 성공할 수 있는 방법을 지속적으로 피드백하다보면 어느새 성공의 확률이 올라가게 되고 결국에는 성공이 당연해진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러므로 실패라는 것을 전혀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우리가 어릴 때부터 흔히 듣는 말로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는 말의 의미를 오늘에야 비로소 머리만이 아닌 마음으로 온전히 느끼게 된 것 같아서 의미있는 독서를 했다는 느낌을 받았다.

씨앗은 자라 현실이 된다. 관념인 씨앗과 현실인 열매는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현실을 바꾸는 가장 강력한 힘은 바로 이 무의식의 씨앗에 있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이 나기 때문이다. 부의 마음이 심어져 있으면 부자 세상으로, 가난한 씨앗이 담겨 있으면 가난하게 사는 것이다. - P41

결국 세상은 MRI다. 당신은 당신의 마음과 마음속 무의식이 펼쳐낸 세상을 경험하고 있다. 그리고 그 씨앗을 현실에 틔우는 힘 역시 자신에게 있다. 그 과정이 물리 시간에 배운 공명작용이다. - P41

무의식의 의도와 당신의 의도가 일치할 때, 무의식은 공명이 되어 현실에 드러난다. 그래서 세상은 MRI(Mind Resonance Image)인 것이다. 마음이 나를 통해 세상 이미지로 드러나고 있다. 그게 우리 세상이다. - P41

내면을 바꿔라. 무의식에 있는 자신의 이미지를 바꿔라. 그러면 그 이미지가 곧 나타날 것이다. 나를 결핍된 존재가 아닌 충만한 사람으로 각인하자. 그 이미지가 머지않아 미래 모습으로 나타나게 된다. - P41

나는 확신이 있었다. 내 삶에 대한 믿음, 10년 뒤 펼쳐질 의사 모습이 나에게 비치고 있었다. 그 모습을 가슴에 품고 공부했다. 매일 상상하며 지내다 보니, 마치 그 모습이 어제 일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미래의 ‘상상‘이 나의 ‘기억‘으로 변하고 있었다. - P46

"미래를 알 수 있는 앎이 있으면,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을 이룰 수 있어요." - P46

미래를 안다는 것이 무슨 의미일까? 그 앎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바로 기억이다. 무엇인가를 안다는 것은 그것에 대한 기억이 있다는 의미다. - P46

앎은 기억을 전제로 한다. 그래서 우리는 과거를 잘 알고 있다. 과거는 기억을 통해 인식되는 내면의 이미지기 때문이다. - P46

미래는 무엇일까? 미래는 상상을 통해 인식하는 마음속 이미지다. 상상이라는 도구를 통해 우리는 미래의 이미지를 펼쳐낸다. - P46

상상이 일상이 될 때, 상상은 기억으로 넘어간다. 그러면 그 상상은 앎이 되고, 나에게 항상 느껴졌던 의사의 느낌은 나의 생각과 말과 행동을 바꾼다. - P47

스스로 의사라 생각하는 일상은 말의 습관과 행동의 습관을 바꾸게 한다. 말과 행동이 바뀌면 그것을 만드는 생각도 바뀌게 된다. 습관화된 생각은 관성을 지니게 되고 늘 비슷한 생각으로 이어진다. 그 결과 ‘나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행동하고 말하게 된다. - P47

내면에 새겨지는 ‘나도 모르게‘ 하는 생각이 무의식에 각인된다. 무의식에 박힌 관념의 씨앗, 그 씨앗이 바뀔 때 미래가 바뀌게 된다. 미래를 알 수 있는 앎은 바로 무의식 공간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 P47

분석심리학의 대가 칼 융(Carl Gustav Jung)은 ‘무의식을 의식화하지 않으면 무의식이 삶의 방향을 결정하고, 우리는 이것을 운명이라 부른다‘라고 했다. - P47

결국 운명은 무의식이 결정한다. 더 구체적으로는 무의식에 각인된 관성화된 생각, 관념이 운명을 결정한다. 내면에 단단히 박혀 있는 그 관념이 미래의 모습인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고정관념이라 부른다. - P47

관념이 고정될 정도로 강력하게 박히면 그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다. - P47

가난이 관념으로 박혀 있으면 늘 가난하게 산다. 가난의 대물림은 관념의 대물림에서 비롯된다. 가난한 일상이 자식들의 말과 행동에 영향을 주고, 그 말과 행동이 생각의 습관을 만들기 때문이다. 습관이 된 생각, 관념은 또다시 가난의 조건과 환경을 펼쳐낸다. 그 가난은 사실 자신이 만들고 있다. 내면에 ‘나는 가난한 사람이다‘라는 관념이 씨앗처럼 뿌려져 있기 때문이다. 미래를 알 수 있는 앎이 가난으로 물들어 있다. - P48

사소한 말투, 일상적 행동 하나가 미래를 이끌고 있다. 그 말과 행위가 습관이 되고 관성을 지닐 때, 그 관념이 이끄는 삶을 살게 된다. 그래서 ‘앎‘이 ‘삶‘인 것이다. 나의 앎이 습관이 되고, 그 습관이 모여 삶이 된다. - P48

수술복을 입고 재수를 했던 그 일상이 의사가 된 미래를 당겨주었다. 미래를 기억하는 힘은 여기에서 시작되었다. 상상이 기억으로 넘어갈 때,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다. 미래에 대한 앎이 생기기 때문이다. - P48

열심히 살아준 스무 살의 나에게 감사하며 웃으며 돌아왔다. - P49

종종 서울숲에 들러 산책도 하고 조깅도 했다. 갤러리아 포레에 사는 친구들과 선배들을 만나 그곳의 생활도 들었다. 아파트 지하에 있는 중식당에 들러 식사를 하며 그곳에 살아가는 삶을 상상하고 기억했다. 그 삶이 일상이 될 것 같았다. 그 삶이 나의 무의식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그러면 알게 된다.
‘나는 이곳 서울숲에서 살게 되겠구나.‘ - P49

일상이 된 생각은 미래를 바꿀 수 있다. 이것은 막연한 망상이 아니다. 기억이 된 상상의 힘이다. 그것이 앎에 대한 깨달음이다. 그리고 세상의 진리다. 반드시 기억하길 바란다. - P49

‘미래를 기억할 때 그 미래가 나에게 펼쳐진다.‘ - P49

인생은 이렇게 만들어 가는 것이다. 수술복을 입으면 수술하게 되는 것이다. - P49

‘까데기‘는 ‘헌팅‘을 의미하는 부산 은어다. ...(중략)... 까데기는 ‘가시나 데리고 오기‘의 준말 ‘가데기‘를 부산 특유의 된소리로 발음한 용어다. - P51

"햄아, 자주 까여야 되는 기다. 당연히 실패할 줄 안다. 그래도 간다. 그러다 보면 된다." - P52

실패의 당연함을 알고 나서는 두려움이 없어졌다. 그러면 또 하게 된다. 여러 번의 실패는 성공 노하우로 쌓였고, 어쩌다 성공으로 이어지면 그전 실패의 기억은 사라졌다. 당연한 실패의 경험, 그 경험이 행동하게 했다. 그리고 실패의 당연함이 쌓여갈 때, 성공의 당연함도 생기기 시작했다. 많이 실패한 만큼 성공도 쌓였기 때문이다. 실패가 당연하면 성공도 당연한 것이다. 그리고 그 반대도 성립했다. 성공이 당연하면 실패도 당연한 것이다. - P52

그냥 한번 해보는 거다. 성공 확률이 희박하지만 실패가 당연하기에 두렵지 않다. 당연한 실패는 우리를 불안하게 만들지 않는다. - P53

당연한 실패지만 실패의 두려움이 없기에 도전할 수 있다. 적어도 그때 변화와 움직임이 일어난다. 그 변화와 움직임이 바로 우리의 운이다. - P53

당연한 실패의 경험은 생을 변화시키는 도전이다. 당연한 실패가 많아질수록, 당연한 성공이 많아지는 것이다. 앞서 말했듯 실패가 당연할 때, 성공도 당연하기 때문이다. - P54

실패가 많아지면 성공도 많아진다. 세상은 늘 짝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손등이 있는 이유는 손바닥 때문이고, 손바닥은 손등에 기대어 존재한다. 둘은 하나만 따로 있을 수 없다. 성공과 실패도 마찬가지다. - P54

당연한 실패는 도전을 어렵게 만들지 않는다. 그리고 그 실패는 내 삶의 자양분이 되고 있다. 성공의 방식으로 전환되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실패는 어느새 삶의 피드백이 된다. 당연한 실패, 그 실패를 많이 경험해보자. 당연한 실패 속에서 성장하다 보면 어느새 삶이 성공 궤도에 안착해 있을 것이다. - P54

‘사는 게 즐거워지면 삶의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 - P57

사는 게 즐거우면 기쁨도 즐겁고, 슬픔도 즐겁다. 성공도 즐겁고, 실패도 즐겁다. 즐거움도 즐겁고, 두려움도 즐겁다. 나의 희로애락과 생로병사는 모두 삶 안에 있다. 그런데 그 삶이 즐거우니, 모든 것이 즐거운 것이다. - P57

즐거워지기 위해 살면 즐겁게 살지 못한다. 즐거움이 하나의 조건이 된다. 조건은 그것을 충족했을 때만 즐겁게 된다. 즐거움은 조건이 아니다. 즐거움은 본질이다. 즐거움이 삶의 기본값으로 세팅될 때, 우리는 삶의 모든 드라마를 즐길 수 있다. 당신의 삶을 즐겨보라. 그러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 - P57

"일체유위법 여몽환포영(一切有爲法如夢幻泡影)."
세상 모든 만물은 환영이라는 의미다. 세상은 하나의 꿈과 같다고 말했다. 세상은 실체를 가진 것이 아닌, 환영과 같은 홀로그램이 펼쳐진 것이다. - P58

"세상이 시뮬레이션이 아닐 확률은 10억분의 1이다."
세상이 진짜 현실일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이야기다. 이 세상은 실체가 없다고 역설하고 있다. - P58

세상은 실체가 없으며 세상은 환영과 같은 것이다. 세상은 홀로그램의 한 장면이며, 인생은 그 홀로그램이 합쳐진 한 편의 영화다. 삶이라는 스크린에 펼쳐지고 있는 100년짜리 영화가 우리 인생이다. - P58

인생이 한 편의 영화임을 알면 영화가 주는 고통과 시련을 즐길 수 있다. 어차피 영화인데, 영화 속 장면에 불과한 공포를 걱정할 필요가 없다. 영화는 그런 위기 장면이 있어야 한다. 오히려 자주 등장해야 재밌는 영화다. 죽을 뻔한 위기를 헤쳐 나와야 더 재미있고 흥미진진해진다. - P59

인생의 고통과 괴로운 장면이 있어야 행복하고 즐거운 결말을 맞이할 수 있다. 영화는 즐거움만 있는 게 아니다. 그런 영화는 성공할 수 없다. 쾌락과 즐거움만 있는 것은 영화가 아니다. 그건 포르노다. 인생은 포르노가 아니다. 인생은 포르노가 아닌 영화라는 사실을 꼭 기억하자. - P59

인생이 영화임을 알면 그것이 주는 불안과 두려움을 즐길 수 있다. 우리가 슬픈 장면에서 눈물을 흘리는 이유는 하나다. 슬픈 감정을 느끼기 위해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다시 좋은 일이 생기고 반전도 생겨 감동하기도 한다. 인생이 지금 슬프고 힘든 장면에 있다면 영화를 보듯 현실을 바라보자. 어차피 인생은 한 편의 영화일뿐이다. 우리는 영화를 보듯 인생을 즐기면 그만이다. - P60

우리는 영화 속에서 힘들게 살아가는 주인공이 아니다. 느긋하게 팝콘을 먹으며 인생 영화를 즐기는 관객이다. 주인공인 영화가 아니라, 관객으로 보는 영화가 나의 인생이다. 이 진리를 깨달은 순간, 사는 게 즐겁고 자유로워질 것이다. - P60

오늘의 당연함을 사랑하고 감사해보자. 그러면 사는 게 즐거워진다. - P61

10년 뒤 지금 꾸는 꿈이 이루어진다면 어떤 기분이 들까? 하루하루가 행복하고, 하늘을 나는 기분이 들까? 절대 그렇지 않다.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미래에도 그것은 당연해질 것이다. 그러니 지금의 당연함을 감사하고 즐겨라. 그 느낌이 미래를 느끼는 방법이다. - P61

지금 여기에 감사하기 - P61

감사함이 일상이 되고 습관이 될 때, 삶은 즐거워지고 미래는 달라진다. 원하는 방향으로 미래가 흘러가고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미래를 생생하게 느끼고, 그 느낌을 기억할 때 미래는 이미 그렇게 존재하게 된다. 나는 지금까지 이렇게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 것이다. - P61

어린 시절 각인된 관념은 잘 바뀌지 않는다. 너무 단단히 박혀 자리에서 물러나지 않는다. 고정관념의 특징이다. - P65

두려움과 결핍감, 그것은 인간이 가진 근원적 감각이다. 우리의 무의식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는 원초적 느낌이 두려움이다. 그 두려움이 결핍감과 동반되어 현실에 나타난다. - P65

‘나는 결핍된 존재다‘라는 관념은 소유욕, 관계욕, 명예욕, 권력욕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한다. 결핍되었기에 무언가를 가지려 하고 외로움이라는 결핍감을 만들어 사회적 관계를 만든다. 그 관계속에서 더 높은 자리에 오르려 하고, 관계를 통제하려고 한다. 그 모든 욕망은 내면에서 비롯한다. 부족한 마음이 욕망의 미래를 부르고 있다. 그 속에서 우리는 목적지를 잃고 열심히만 나아간다. - P65

욕망의 추구는 지금 이곳을 희생하라고 강요한다. 내일을 위해 오늘을 희생하고, 미래를 위해 이곳을 누리지 못한다. 오늘을 살지 못하는 이유다. 미래의 두려움과 오늘의 결핍감이 늘 우리와 함께 하고 있다. 내면이 결핍으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 P66

눈을 감고 마음을 살펴보자. 심연의 깊은 곳에 오돌오돌 떨고 있는 작은 아이가 보일 것이다. 그 아이가 당신의 무의식이고 내면 아이다. 하지만 사실 당신은 그런 작은 존재가 아니다. - P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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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 포스팅의 마지막 부분에서 과학자들이 전파 망원경으로 ‘우주 배경 복사의 세기‘를 관측하고 정밀 분석한 결과 우주 배경 복사에 약간의 비대칭성이 드러났다는 얘기를 했었다. 그런데 여기에 ‘우리 은하수 은하가 자신이 속해 있는 국부 은하군의 다른 은하들과 함께 처녀자리 은하단 방향으로 초속 600km 이상의 속력으로 달려간다‘(p.511)는 가정을 덧붙이면 비대칭성의 문제를 깔끔하게 해결할 수 있다고 했었다. (솔직히 이 부분은 대략적인 글의 맥락만 이해했을 뿐이다. 본문의 내용이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지만 최대한 이해하려 애써볼 뿐이다.)

아무튼, 이러한 가정에 뿌리를 두고 오늘 포스팅에선 우리 은하가 처녀자리 은하단으로 돌진하는 이유에 대한 설명부터 살펴보며 시작한다.

왜 우리 은하는 처녀자리 은하단으로 돌진하고 있을까? 우주 배경 복사를 고공에서 관측한 조지 스무트George Smoot와 그의 동료들은 처녀자리 은하단의 중력 작용으로 우리 은하수 은하가 이 은하단의 중심으로 빨려 들어가는 중이라는 제안을 내놓았다. - P511

스무트는 그 은하단 내부에 여태껏 알려진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수의 은하들이 존재할 것으로 예상했으며, 이 은하단이 차지한 공간 역시 20억 광년을 가로지르는 방대한 규모라고 밝혔다. - P511

우주의 탄생 초기에 물질 분포의 비균질성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자라서 지금의 처녀자리 초은하단 정도의 질량을 끌어 모으기에는 우주의 나이가 충분하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주 배경 복사의 관측 결과는 처녀자리 초은하단에 그렇게 거대한 양의 물질이 몰려 있어야만 하는 것으로 해석됐던 것이다. - P512

따라서 스무트는 대폭발 당시 우주의 물질 분포에는 상당한 수준의 비균질성이 있었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비록 그가 수행한 우주 배경 복사의 고공 관측 결과가 자신의 예상에 걸맞은 수준의 비균질성을 보이지 않았지만 처녀자리 초은하단의 질량으로부터 그는 우주 초기의 물질 분포가 심하게 불균일했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었던 것이다. - P512

완전 대칭인 배경 복사장 안에서 관측자가 움직인다면, 운동 방향에서 오는 빛은 청색 이동을 일으키고 반대 방향에서 오는 빛은 적색 이동을 할 것이다. 즉 우주 배경 복사가 관측자의 후방보다 전방에서 약간 더 밝게 보일 것이다. - P512

또한 밝기의 차이는 속력에 비례할 것이다. 밝기 분포의 이러한 비대칭 성분을 우리는 쌍극자성분이라고 부른다. 스무트의 우주 배경 복사 관측에서 쌍극자 성분이 검출됐으며, 이것을 이용해 우리 은하수 은하의 운동방향과 속력을 결정할 수 있었다. 운동의 방향은 처녀자리 쪽이었고 처녀자리 초은하단의 질량은 속력에서 가늠할 수 있었다. - P512

은하수 은하가 처녀자리 쪽으로 움직인다는 사실만을 놓고 볼 때 처녀자리 초은하단에 막대한 양의 질량이 몰려 있어야 한다. 그런데 우주 배경 복사의 고공 관측 결과에서는 그러한 규모의 비균질성이 드러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패러독스라는 말이다. - P512

거의 동시에 매우 좁은 영역에서 두 개 또는 그 이상의 대폭발이 있었다면, 이 패러독스를 해결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 P513

현대 관측에서는 다양한 척도의 비균질 분포 구조를 우주 배경 복사에서 검출할 수 있었으며 이러한 관측결과가 우주론의 제한 조건으로 쓰인다. - P512

사람들은 보통 특이점에서 벌어진 상황에 대한 설명을 신의 몫으로 떠넘긴다. 이것은 여러 문화권에 공통된 현상이다. - P513

하지만 신이 무無에서 우주를 창조했다는 답은 임시변통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가 근원을 묻는 이 질문에 정면으로 대결하려면 당연히 "그렇다면 그 창조주는 어디에서 왔는가?"라는 질문을 해결해야 한다. 만일 이 질문에는 답이 없다는 식의 결론밖에 내리지 못한다면, 차라리 우주의 기원 문제에는 답이 없다 하고 한 단계 단축하는 것이 어떨까? 또 한편으로, 신은 항시 존재했다는 결론을 내린다면, 역시 한 단계 줄여, 우주가 항시 존재했다고 하면 어떻겠는가? - P513

어느 문화권이든지 창조 이전의 세상과 세계 창조에 관한 신화를 갖고 있다. 세상이 "신들의 짝짓기에서 만들어졌다."라거나, "우주의 알에서 태어났다."라는 식의 소박한 우주관을 우리는 세계 도처에서 만나게 된다. 이러한 신화들은 우주가 사람이나 동물이 하는 바를 따라했다는 순진한 상상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 P513

과학은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고 제안의 사실 여부를 검증하기 위하여 실험하고 관찰한다 - P515

어느 문화권이든 사람들은 자연에 내재하는 주기성을 즐기며 그 주기성을 최대로 활용한다. - P515

사람들은 오랫동안 ‘신이 의도하지 않아도 자연의 주기성이 가능할 수 있을까?‘를 고민했다. 수십 년 세월의 인생에도 주기성이 있다면 영겁의 신의 세계라고 주기성이 없으란 법이 있겠는가? - P515

인류 문화의 위대한 종교들 중에서 힌두교만이 코스모스가무한 반복된다는 것을 믿는다. 우주가 생生과 멸滅의 끝없는 순환을 반복한다는 것이다. - P515

현대 우주론이 밝힌 시간 척도와 비슷한 크기의 척도로 시간의 흐름을 이야기하는 유일한 종교가 바로 힌두교이다. - P515

일상의 하루는 낮과 밤 24시간이다. 그러나 브라흐마의 하루는 지구인의 시간으로 86억 4000만 년에 해당한다. 86억 4000만 년이라니! 이것은 지구나 태양의 나이보다 긴 시간이고 우주가 대폭발 이래 오늘에 이르기까지 경과한 시간의 절반도 넘는 참으로 장구한 시간이다. 힌두교의 가르침은 브라흐마의 1년보다 더 긴 세월도 언급한다. - P516

우주가 신의 꿈에 불과하다는 생각에는 누구나 심오한 매력을 느끼게 된다. - P516

신은 브라흐마의 1년이 100번 지난 다음에 스스로를 분해하여 꿈 없는 잠의 세계와 합일한다. 그러면 우주도 스스로를 해체해서 신과 합일된 상태에서 브라흐마의 1세기를 지낸다. 그 다음에 신은 잠에 빠진 스스로를 꿈틀거리며 깨워 자신을 재구성한다. 그리고 다시 우주적 꿈으로 빠져 들어간다. 이렇게 하여 무한히 많은 세계들이 생긴다. 그리고 이 세계에는 각각 우주적 꿈을 꾸는 무수한 신들이 있다. - P516

그런데 힌두교의 이 위대한 가르침은 다른 가르침, 어찌 보면 더 위대한 가르침을 통해 발전될 수 있다. 그것은 사람이라는 존재가 신의 꿈이 아니라, 신이 사람이 꾸는 꿈의 소산일지도 모른다는 가르침이다. - P516

인도 문화에는 신이 많은데, 같은 신일지라도 그 현현 양식이 다양하다. - P516

11세기에 만들어진 촐라 Chola 왕조의 청동상에서 우리는 시바 Shiva 신의 다양한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시바 신의 여러 현신現身 중에서 우주의 새로운 주기가 시작할 때마다 이루어지는 창조를 춤으로 형상화한 것이 가장 우아하고 장대하다. - P516

시바의 우주적 춤을 모티프로 한 이 청동상에서 시바 신은 네 개의 손을 가진 춤의 제왕 나타라자 Nataraja로 나타난다. 위로 치켜든 오른손은 창조의 소리를 내는 북을 들고, 왼손은 화염을 쥐고 있다. 널름거리는 불꽃의 혀는 이번에 새로 태어나는 우주도 수십억년 후에 다시 멸망함을 상징한다. - P516

심원한 의미를 담고 있는 아름다운 이 신상들에서 나는 현대 천문학에서 태어날 각종 아이디어들의 전조를 즐거운 마음으로 읽어 낼 수 있다. - P517

마야 문명의 유적에서 볼 수 있는 시간 개념도 아득한 과거에서 때로는 먼 미래로 넘나든다. 100만 년 이상의 과거를 언급한 유적이 하나 있다. 마야 문명을 연구하는 학자들이 논의하는 중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또 다른 유적은 4억 년 전의 과거를 이야기하고 있다. 이러한 유적에 언급된 사건 자체는 신화적 설화일지 모르지만, 그들이 생각할 수 있었던 시간의 척도에서 우리는 마야 문명의 비범성을 만나게 된다. - P517

세상의 나이가 겨우 수천 년이라는 성서적 사고의 오류를 유럽 문명이 겨우 인식하기 시작한 게 인류사의 아주 최근의 일이 아닌가. 그런데 그보다 1,000년 전에 마야 문명은 이미 100만 년의 세월을 생각할 줄 알았고, 인도인들은 수십억 년을 상상할 수 있었다. - P517

우주는 대폭발 이래 지금까지 계속해서 팽창해 왔을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고 해서 앞으로 우주가 영원무궁 팽창할지는 아직 확신할 수 없다. 우주 팽창의 속도가 점점 느려지다가 결국 멈춘 다음, 팽창의 방향을 바꿔 수축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 P517

우주에 내재하는 물질의 밀도가 어떤 임곗값보다 작으면 현재 후퇴 운동 중인 은하들 사이의 중력이 팽창을 멈추기에는 역부족이어서 우주의 팽창은 영원히 지속될 수 있다. - P517

그러나 만일, 빛으로 관측 가능한 물질의 질량보다 훨씬 많은 양의 물질이 우주 여기저기에 숨어 있다면 후퇴하던 은하들은 중력으로 서로 묶여서 인도의 창조 신화에서 볼 수 있는 팽창과 수축을 반복하는 우주적 주기 운동에 동참할 수 있다. - P517

한편 빛으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지 않는 소위 ‘잃어버린 물질‘의 후보로서 블랙홀을 쉽게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 P517

밀도가 매우 낮고 온도가 지극히 높은 물질도 천문학자들의 관측에 쉽게 걸리지 않는데, 은하들 사이의 공간이 저밀도고온의 물질로 채워져 있을 수 있다. 그러므로 빛을 이용한 관측으로 검출할 수 있는 천체들의 총질량보다 훨씬 많은 물질이 우주에 내재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렇다면 코스모스는 영원히 팽창과 수축을 반복할 것이다. - P518

수축과 팽창의 새로운 주기가 열릴 때마다 새롭게 태어나는 코스모스, 그것은 바로 인도 신화가 우리에게 가르쳐 준 우주의 실상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코스모스가 바로 그렇게 진동하는 우주라면 대폭발은 우주 창조의 순간으로 볼 수 있지만 동시에 이전 우주가 완전히 파괴되는 최후의 순간으로 볼 수도 있다. - P518

우리는 영원히 팽창하는 우주도 싫고 팽창과 수축을 반복하는 진동 우주도 달갑지 않다. 우선 지금으로부터 100억 년 전인지 200억 년전인지 그 구체적 시간은 크게 문제가 되지 않지만, 어떻든 하나의 우주가 어느 순간에 갑자기 생겨 팽창을 시작한 것은 확실하다. - P518

무한정 계속 팽창하는 우주론에 따르면 은하들은 팽창과 더불어 우주의 지평선cosmic horizon 너머로 하나둘씩 사라질 것이다. 그러다가 은하수 은하의 지평선 안에 끝까지 남아 있던 마지막 은하마저 지평선 너머로 사라지고 나면 홀로 남은 은하수 은하는 우주적 고독을 혼자 참아 내야 한다. 이렇게 되면 지구상에 살던 외계 은하 연구자들의 일거리가 없어진다. - P518

어디 그뿐인가. 별들은 차갑게 식어 모두 죽고, 물질은 모조리 소립자의 상태로 돌아간다. 결국 소립자들만이 흐릿하게 분포하는 아주 재미없고 적막한 세상이 도래한다. 이것이 영원히 팽창하는 우주가 맞이할 최후의 운명인 것이다. - P518

진동 우주의 운명은 어떻게 되는가? 진동 우주에서 코스모스는 시작도 없고 끝도 없으며 끝없이 반복되는 생과 멸의 중간에 자리할 뿐이다. 한 주기가 끝나고 다음 주기로 넘어갈 때, 앞의 코스모스에서 다음 코스모스로 어떠한 정보도 흘러 들어가지 못한다. 전생 우주에 있던 은하, 별, 행성, 생물 그리고 문명이 후생 우주가 태어나는 대폭발의 특이점을 넘지 못하고 모두 사라지고 만다. - P519

영원무궁의 팽창 우주든 팽창과 수축을 반복하는 진동 우주든 우울하기는 마찬가지이다. 한 가지 위안 삼을 만한 점이 있다면 운명의 그 순간까지 아직 긴 시간이 남아 있다는 사실이다. 앞으로 수백억 년, 또는 이보다 더 긴 세월이 남아 있다. 코스모스가 멸망할 때까지 수백억 년의 세월 동안 현생 인류와 그의 후손이 이룩할 위업에 대한 기대와 희망이 우리를 우주적 우울증에서 구원해 줄 것이다. - P519

우주가 실제로 진동한다면 의문의 행렬은 계속된다. 팽창에서 수축으로 바뀔 때, 그래서 은하의 적색 이동이 청색 이동으로 반전될 때 인과因果관계에도 역전이 생겨 결과가 원인에 앞설 수 있다고 생각하는 학자들이 있다. 연못에 파문이 먼저 생기고 그 다음에 내가 돌을 던지는 격이란 이야기이다. 또 횃불이 타기 시작하고, 그 다음에 성냥을 그어 댄다는 식의 현상이 벌어질 수도 있다. 팽창이 수축으로 반전될 시기에는 무덤에서 탄생을 맞고 어머니 뱃속에서 죽음으로 삶을 마감한다니, 도대체 뭐가 뭔지 통 알아들을 수가 없다. 우리는 인과 관계의 역전을 제대로 이해했다고 아는 체하기 어렵다. 시간이 거꾸로 흐를까? - P519

과학자들은 팽창이 수축으로 바뀌는 순간 진동 우주에 어떤 일이 일어날까 궁금해 한다. 자연의 법칙들이 그 순간 무작위적으로 마구 뒤섞인다고 믿는 학자들도 있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우주에서 일어나는 온갖 자연 현상을 지배한다고 알려진 물리학과 화학의 제반 법칙들은 무수히 많은 가능성들 중 하나일 뿐이기 때문이다. 매우 제한된 범위의 법칙들만이 현생 우주에서 볼 수 있는 은하, 별, 행성, 생명 그리고 지능 등의 현상을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 - P520

우주의 팽창과 수축이 역전되는 순간에 법칙들이 멋대로 뒤섞인다면 그때 얻어지는 법칙이 현생 우주를 설명하는 법칙들과 우연히 일치할 확률은 실질적으로 0이다. 그러니까 전생 우주와 현생 우주 사이에 어떤 공통성도 기대할 수 없다. - P520

자연법칙의 뒤섞임이 팽창과 수축의 변환점에서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 P520

우주가 이미 여러 차례 팽창과 수축을 반복했으며 그때마다 다른 중력 법칙들이 선택됐다고 하자. 중력 법칙의 후보들 대부분이 실제로는 매우 미약한 중력을 동반한다. 이렇게 미약한 세기의 중력만으로는 우주를 한데 묶어 둘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주가 선택한 대부분의 중력에서는 우주가 흩어질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더 이상 팽창과 수축의 반복은 기대할 수 없다. 결과적으로 중력 법칙의 새로운 후보가 채택될 가능성이 자동적으로 배제된다. - P520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한다. 우주가 유한한 기간 동안만 존속하든가, 팽창ㆍ수축의 매 주기마다 자연은 제한된 극히 일부의 법칙들만 선택할 것이다. 그렇다면 팽창이 수축으로 반전되는 순간에 일어나는 자연법칙의 뒤섞임이 완전히 제멋대로일 수는 없다. 후보 법칙들에서 선택이 이루어질 때 모종의 규칙이 준수돼야 할 것이다. 어떤 법칙은 선택되고 어떤 것들은 선택해서는 안 되고 하는 식의 제한 조건들이 있을 것이란 말이다. - P520

‘법칙 선택의 법칙‘ 은 기존의 물리학을 뛰어넘는 새로운 물리학으로 우리에게 다가올 것이다. 이 지경에 이르면 인간의 언어는 빛을 잃는다. 새로운 물리학에 붙일 적당한 이름을 찾기 어렵다. ‘파라물리paraphysics‘ 이니 ‘메타물리 meta-physics‘ 니 하는 이름들은 여기서 요구되는 의미와는 전혀 다른 뜻으로 이미 사용되고 있다. 그렇다면 ‘초월물리transphysics‘ 라는 표현은 어떨까? - P520

우리 우주가 영원무궁 팽창하는 우주인지, 아니면 팽창과 수축을 주기적으로 반복하는 우주인지 누구나 확인하고 싶을 것이다. 구별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 우주 물질의 재고를 조사하는 것이 그 한 가지 방법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코스모스의 끝, 영원의 벼랑 끝까지 가보는 것이다. - P520

전파 망원경은 아주 멀리 있는 천체의 미약한 신호도 잡아낸다. 그래서 우리는 수억 광년 이상 떨어져 있는 퀘이사의 신호도 확인할 수 있다. 가장 가까운 퀘이사라고 해도 5억 광년은 떨어져 있고, 100억 광년, 120억 광년, 아니 이보다 더 먼 거리에 있는 퀘이사들도 많다. - P520

공간적으로 멀리 떨어진 곳을 볼수록 시간적으로는 먼 과거에 일어난 상황을 보는 것이라는 이야기를 앞에서도 했다. 따라서 120억 광년 떨어져 있는 퀘이사를 관찰하는 것은 그 퀘이사의 120억 년 전 모습을 보는 것이다. 멀리 볼수록 더 오래된 과거에 손을 대는 것이다. 우주의 지평선 근처를 본다면 우리는 대폭발 시대의 우주와 같이 하게 되는 것이다. - P521

대형 배열VLA, Very Large Array은 27대의 전파 망원경으로 구성된 전과 간섭계로서 뉴멕시코 주의 오지에 설치돼 있다. 개별 망원경이 수신하는 전파 신호의 위상을 모두 고려해서 망원경의 배열을 미리 결정하고 관측을 시작한다. 구성 망원경들을 전선으로 연결하여 각 망원경으로 들어오는 신호의 세기와 위상을 합성함으로써 망원경 27대가 하나의 망원경같이 작동하도록 고안됐다. - P521

가장 먼 두 안테나의 거리가 합성 망원경의 지름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대형 배열은 지름이 수십 킬로미터에 이르는 거대한 전파 망원경이라고 생각해도 좋다. 따라서 대형 배열은 가시광선 대역을 분석하는 광학 망원경처럼 전파 대역의 자잘한 스펙트럼을 상세하게 분석할 수 있는 지상 최대의 전파 망원경이다. - P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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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이 책의 중후반부를 지나고 있는데, 오늘 읽기 시작하는 부분은 뭔가 좀 추상적인 얘기들이라 약간 뜬구름 잡는 듯한 말처럼 느껴진다. 그래도 최대한 이해하기 위해 애써보고자 한다. 예전에 이 책에 대한 서평을 읽었을 때도 내용이 다소 난해했다는 얘기들이 있었는데, 오늘 읽는 부분이 그런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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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밑줄 친 부분에서 ‘무의식‘ 이라는 키워드가 자주 등장하는데, 우연인지는 몰라도 개인적으로 최근 함께 읽고 있는《나는 나의 스무 살을 가장 존중한다》라는 책에서 ‘무의식이 현실을 만든다‘ 라는 문장을 봤던 기억이 문득 떠올랐다. 이를 통해 ‘무의식‘이라는 것에 대한 호기심이 자연스럽게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본문을 읽어나가면서 더 알아봐야겠다.


내가 나 스스로에게 요구하는 것은 서로 대립되는 것들 뒤로 물러나 그로 인한 혼돈을 오롯이 받아들이는 것이다.

즉 우리는 적어도 한 번은 스스로가 가지고 있는 판단 기준을 버리고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무의식의 표현이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그대로, 도덕심이나 의협심, 혹은 근사한 겉모습 따위는 모두 떨쳐 버리고 우리의 충동과 욕구, 불안, 고통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 말이다. 그것이 이뤄졌을 때 우리는 원점으로 돌아가 비로소 우리가 살아 내야 하는 실제의 삶을 위한 가치관을 세우고, 긍정과 부정, 선과 악을 명확하게 구분하며 규율과 금지 사항을 정하고자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무의식적인 것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낯선 힘과 관계를 맺는 것과 같다

atman(아트만): 인도 철학에서 가장 기본적인 개념으로 인간 존재의 영원한 핵을 말하는데이는 죽은 뒤에도 살아남아 새로운 생명으로 다시 태어난다고 한다. 브라흐마가 우주작용의 근거라면 아트만은 인간의 모든 행위를 근거 짓는 핵이다.

내가 알고 있으며 예감하고 있기도 하지만, 바로 나 자신이 내면적으로는 아직 소유하고 있지 못한 그 무언가

스스로를 괴롭히고 아프게 만들었던 것, 나의 생각과 작품들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 내가 《싯다르타》에서 묘사하고자 했던 것

심리 분석은 구제의 수단이자 동양의 가르침(붓다, 베단타, 노자)에 가장 가깝게 다가갈 수 있는 길

심리분석이 단순한 치료 수단으로써가 아니라 ‘새로운 가르침‘, 즉 새로운 단계의 인류 발전에 있어 중요한 요소로 간주되는 것

학문은 돈벌이 혹은 하찮은 장난으로 전락해버렸다(칸트와 헤겔을 비롯하여 모든 독일 철학자들이 사색의 결과를 실제 삶에 적용하는 것을 거부함으로써 그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 셈이다).

문학은 오락이자 장난이며 기만에 불과하고 그 전체가 허영으로 가득 찬 장사판과도 같다.

에른스트 찬과 토마스 만 혹은 강호퍼와 헤르만 헤세 사이에는 이제 이렇다 할 차이가 더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어느 곳에나 도덕과 신성한 가치, 그리고 초개인적인 힘을 얻기 위해 진정한 노력을 기울이려는 시도가 결여되어 있다. 모두가 자기 자신과 자신의 명성, 혹은 어떤 당파를 위해 일하고 노력하며 생각하고 정치 활동을 한다.

노동을 하고 정신적 노력을 기울이며 그것을 더 높이 세우려는 시도는 오직 인류만이 할 수 있는 것이기에 모두 강물처럼 함께 흘러 들어가야 하는 것이 옳다. 그 강물 안에서는 마치 초기 교회의 성직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개개인의 업적이나 실수는 즉시 익명의 것이 되어 버린다. 그러고 나서야 비로소 쓰는 사람이나 읽는 사람 모두 진지하게 그것을 믿을 수 있고, 기쁨이나 신념, 그리고 진실이 담겨 있기 때문에 그것을 위해 죽을 수도 있는 것들이 독일 작가의 손끝에서 써질 수 있는 것이다.

모든 고통에는 한계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한계에 이르면 고통은 끝이 나거나 다른 모습으로 변하여 삶의 색채를 띠게 된다. 그래도 고통스러운 것은 여전하겠지만, 그럴 때의 고통은 생명이자 희망이다.

고통스러웠던 것만큼 나는 또 고독했다. 지금 나는 내게 최악이었던 시기와 조금도 다를바 없이 외롭다. 하지만 고독은 나를 더 이상 달랠 수도 없고 아프게 할 수도 없는 독약과도 같다. 나는 그 독성에 대한 저항력이 충분히 강해질 만큼 그것을 많이 마셨다. 그러나 그것은 독이 아니라 단지 고독이 변한 것일 뿐이었다.

우리가 받아들일 줄 모르고 사랑할 줄 모르며 고맙게 받아 마실 줄 모르는 것은 모두 독이다.

우리가 사랑할 수 있고 우리의 삶이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모두 생명이며 큰 가치를 지니고 있는 것들이다.

오랫동안 나는 사색의 힘을 과대평가해 왔으며 사색을 위해 많은 것을 희생하기도 했다. 사색을 하는 동안 나는 패배자가 되기도 하고 승리자가 되기도 했다.

나는 사색을 통해서 배운 것이 없으며 내가 읽은 글의 수많은 저자들이 지니고 있는 사상으로부터 얻은 것은 더더욱 없다.

나는 단번에 세계를 확실하게 이해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수없이 많은 본보기의 소용돌이 속에서 자신의 내면에 무언가를 새기고 따를 수 있는 근사한 순간들 가운데 일부를 경험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세계를 이해한다는 것은 오로지 그처럼 보기 드문 순간들이 끊이지 않고 이어지는 삶을 영위하는 것을 의미한다. 철학이 그와 같은 순간을 체험할 수 있는 수천 가지의 수단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다는 것을 나는 느끼고 있었지만, 오랫동안 믿으려 하지 않았다.

실제로 내가 칸트나 쇼펜하우어, 셀링을 통해서 체험한 것은 <마태 수난곡>이나 만테냐의 그림,《파우스트 Faust》 등에서 체험한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우월한 가치를 지니는 철학이란 창조적인 철학자를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 제자나 독자 혹은 비평가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철학자는 모든 존재가 성숙과 성취의 순간에 느끼는 것, 이를테면 여인이 출산할 때나 예술가가 창작할 때 혹은 나무가 계절과 해가 바뀔 때 느끼는 것을 자신의 세계 창조에서 체험하는 것이다. 다른 존재들이 그런 것을 ‘단지‘ 무의식적으로 체험하는 반면에 철학자는 ‘의식적으로‘ 체험한다는 것은 오래된 고정관념이다.

그저 의식 하나에 그처럼 우월한 가치를 부여하는 것에 이의를 제기한다.

내가 중요하게 여기는 사물의 범위를 끊임없이 내 의식의 시야 안에 두고 있다는 것은 나의 자아가 지니는 가치와 그것을 높이 평가하는 것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라, 단지 내가 의식과 무의식의 영역 사이에서 복잡하지 않고 막힘없는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일뿐이다.

우리는 생각하는 기계가 아니라 살아 숨쉬는 생물체이며, 로마 웅변가의 유명한 비유로 표현하자면 우리의 몸 안에서 무의식은 위胃와 비슷한 위치를 차지한다.

논쟁을 벌일 의향이 없는 사람에게는 내 생각을 표현하기가 쉽지 않다.

당신의 존재가 좁고 깊은 호수라고 한번 상상해 보라.
그리고 그 수면이 바로 의식이다. 그곳은 밝은 빛을 비추고 있으며 우리가 생각이라고 부르는 일이 그곳에서 일어난다.

수면에 있는 물 분자 자체는 쉴 새 없이 바뀐다. 끊임없이 밑에 있는 물 분자가 위로 올라오고, 또 위에 있는 물 분자가아래로 내려가면서 흐름이 생기고 보충을 하기도 하고 위치이동이 일어난다. 또한 어느 물 분자나 한번쯤은 위에 머물고 싶어한다.

물로 이루어진 호수처럼 우리의 자아 혹은 우리의 정신 역시 수천, 수백만 개의 분자, 즉 끊임없이 성장하고 교체되며, 무언가를 소유하고 기억하며 표현하려는 욕구로 이루어져 있다.

호수에서 우리의 의식이 보는 부분은 좁은 수면뿐이다. 정신은 수면 밑에 펼쳐진 무한하게 넓은 부분을 보지 못한다. 그러나 넓고 어두운 공간을 벗어나 좁은 수면의 밝은 부분을 향해 끊임없이 움직이면서 교체가 진행되는 정신은 풍부하고 건전하며 다행히도 능력이 있는 것 같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끝도 없이 많은 생각들을 마음속에 품는다. 그런 것들은 밝은 표면 위로 올라오는 일이 결코 없으며 밑에서 고통스럽게 썩어 간다. 그런 생각은 부패해 가며 고통을 주는 것이기에 의식에 의해 계속 거부를 당하게 되고 의심과 우려의 대상이 된다. 해롭다고 인식되는 것은 표면 위로 올라올 수 없다는 것이며 그것이 바로 모든 윤리가 가지고 있는 본질이다.

사실상 해롭거나 이로운 것은 아무것도 없다. 모든 것은 선하거나 중립적이다.

개인은 누구나 자신에게 속하며 스스로에게 유익하지만 표면 위로 올라와서는 안 되는 것들을 내면에 지니고 있다. 윤리는 그런 것들이 위로 올라오면 불행이 따른다고 가르친다. 하지만 그로 인해 오히려 행복이 따를 수도 있는 일이다. 그러므로 모든 것은 표면 위로 올라와야 하며 윤리에 복종하는 사람만 불쌍해질 뿐이다.

예술은 길고 인생은 짧다고 하지 않았던가!

단지 관념적인 입장이나 어떤 미학적인 염세주의 때문이 아니라, 육체적으로 그리고 현실적으로 삶이 슬픔과 고통이라고 느끼는 사람들이 있다. 그렇게 느끼는 것은 그들의 운명이다.

그런 사람들은 쾌락을 느끼는 것보다 고통을 느끼는 데 더욱 재능이 있다. 그리고 숨 쉬는 것과 잠자는 것, 먹는 것, 소화시키는 것 등 가장 단순하고 본능적인 행위는 모두 그들에게 기쁨을 주기보다 오히려 그들을 고통스럽고 번거롭게 만든다.

하지만 그들도 자연의 순리에 따라 삶을 긍정하고 고통을 이기며 자포자기하지 않으려는 욕구를 내적으로 느낀다.
그렇기 때문에 그 사람들은 조금이라도 기쁘고 유쾌한 것이나 조금이라도 행복해지고 따뜻해질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반드시 가지려 한다. 게다가 평범하고 건강하며 정상적이고 성실한 사람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으면서 그처럼 그럴싸한 것들에게는 대단한 가치를 둔다.

한편 자연은 그런 사람들의 인생행로에서 최고로 멋지고 복잡한 것을 완성시킨다. 그것은 거의 모든 사람들이 어느 정도 경외심을 갖게 되는 것, 바로 유머다.

고통스러워하는 사람들, 혹은 너무나 감상적이고 별로 잽싸지 못한 데다가 지나치게 즐거움을 좇으며 위안받기에 집착하는 사람들의 내면에도 때때로 흔히 유머라고 하는 것이 생겨난다. 그것은 깊고 지속적인 고통 속에서만 자라는 수정과도 같으며, 어쨌든 그것은 인류의 생산물 가운데 좀 더 나은 것에 속한다.

고통스러워하는 사람들이 힘든 삶을 그대로 견뎌 내고 심지어 찬미하기 위해 만들어 낸 이 유머는 희한하게도 다른 사람들, 즉 건강하고 고통스러워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항상 정반대로 작용하여 마치 억제할 수 없는 삶의 기쁨과 유쾌함이 폭발하는 것처럼 보인다. 유머를 들으면서 건강한 사람들은 허벅지를 마구 내리치며 큰 소리로 웃어 댄다.

항상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쓴다고는 하지만, 유머리스트들이 내세우는 제목과 주제는 모두 구실에 불과하다. 사실상그들의 주제는 예외 없이 단 한 가지뿐이다. 즉 별난 슬픔과더러운 (이렇게 표현해도 좋을지 모르겠지만) 인간사, 그리고 삶이 그토록 비참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아름답고 근사할 수도 있다는 사실에 대한 놀라움이다.

구두 수선공은 구두 수선공으로 남아야 하는 것처럼 은자도 은자로 남아야 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자신이 가진 직업을 버리고 다른 곳에서 기웃대는 행동을 할 때에는 충분히 그럴 만한 이유에서 그렇게 하는 경우도 있겠고, 사람들도 그것을 납득하겠지만, 보통은 단지 어리석음 때문에 그런 일이 일어난다.

그 당시에는 삶을 밝고 긍정적인 것으로 보았던 반면, 지금의 나는 삶을 사랑하지도 부정하지도 않고 그저 받아들일 뿐이다.

그 고립감은, 나의 내면에 인생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려는 까닭 모를 욕구가 자리하고 있는 반면에, 다른 사람들은 모두 내가 알지 못하는 비밀스런 게임 규칙에 따라 인생을 유쾌한 단체 게임으로 여기고 함께 즐기는 데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좋지 못하고 어리석은 짓은 얼마나 빨리 배우게 되는지,
또 게을러빠진 개나 게걸스럽게 먹어 대는 돼지가 되는 것이 얼마나 쉬운 일인지 믿을 수가 없을 정도다. 육체적인 나쁜 습관과 나태함은 정신적으로도 그와 같은 상태를 수반하는 법이다.

나태함이 이성보다 더 강하고, 게을러서 살찐 배가 조심스럽게 호소하는 정신보다 더 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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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의 언어들 (개정증보판 포레스트 에디션) - 나를 숨 쉬게 하는
김이나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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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자신이 가진 특유의 섬세한 언어 감각을 바탕으로 일상생활에서 종종 쓰는 말들의 이면에 숨겨진 뜻을 보다 더 깊이있게 들여다 본다. 이를 통해 독자들은 그 말들의 의미를 곱씹어보는 재미를 느낄 수 있다. 또한 읽으면서 저자가 왜 유명한 프로 작사가인지를 몸소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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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저자가 라디오 DJ를 하면서 청취자들과 나눴던 ‘실연‘ 과 관련된 글로 시작한다.

짧은 글이지만 이 글을 통해 인연의 헤어짐이라는 것에 있어서 그 이유를 반드시 나에게 귀속시킬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상대방에게 이유가 있을 수도 있는 것이고 어떤 잘못이나 문제보다는 단지 양 당사자들 간의 어떤 타이밍같은 것이 어긋나서 그럴 수도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명확하게 귀책사유가 나에게 있는 경우도 아예 없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여기서 저자가 말하고자하는 것은 어떤 관계가 틀어졌을 때 과도하게 자기자신을 탓하며 비관에 빠지는 것을 경계하려는 취지로 말한 것임을 참조해서 생각해보면 좋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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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가지 소재로 글이 더 이어진 뒤 마지막에는 작사를 본업으로 하는 저자가 직접 썼지만 아직 출시된 곡들에는 반영되지 않은 창작 가사들이 소개되어 있다. 읽으면서 중간중간 눈길을 사로잡거나 공감이 되는 가사들을 만나볼 수 있었다.

"헤어짐이라는 건 꼭 누구의 잘못 때문에 일어나는 건 아니죠. 그냥 마음이 끝났을 뿐인데."

선택받지 않았다는 사실, 그리고 선택을 받았다가 되돌아간 마음이니까 그게 참 받아들이기가 힘든 일이긴 한데…. 내가 어떤 문제가 있어서는 아니죠. 이건 그저 상대의 마음 온도가 식어가는 속도같은 게 두 사람이 맞지 않았을 때 벌어지는 일인 거죠.

좀 수줍어하고 어떤 부분에 있어서 수치심이 여전히 살아 있는 것

눈치라는 게 조심성이기도 하니까, 뭔가 남들 시선을 너무 걱정해서도 안 되겠지만, 적당한 조심성은 생명력 있는 어른을 만들어내는 원동력이 될 수 있는 거 같아요.

"소소한 일탈을 해라. 그러면 행복해진다"

늘 먹던 음식이 아닌 새로운 음식에 도전하고, 한 번도 들어보지 않았던 음악 장르를 들어보는 그런 소소한 일탈들이 모여 단조로운 일상에 생기를 불어넣는다

낭만은 내 감정에 충실하고 내 행복에 더 충실한 단어예요. ‘세상이 보기에 어떻고 나의 역할은 이래야 하고‘ 이런 거로부터 조금 더 자유로워져서 나만의 세상을 그려나가라는 의미더라고요.

문득문득 환기하지 않으면 ‘이 단어의 원래 뜻이 뭐였지?‘ 하게 되는 너무나 좋은 단어들이 있어요. 낭만 또한 그런 단어인 거 같습니다.

후회는 많은 선택권이 있을수록 더 커집니다. 내가 선택하지 못한 수많은 가능성과 가지 않은 길에 대한 아쉬움이 뒤섞여 자꾸만 내 머릿속을 어지럽히거든요.

한 작가의 말을 빌리자면 인간은 반드시 한 가지를 결정해야 할 때 본능적으로 최선을 다해 선택한다고 합니다. 돌아보면 후회밖에 없는 그 선택도 ‘그때는 제일 나은 선택이었다‘는 거죠.

수많은 노랫말을 만들어왔지만 실제로 발표된 곡은 일부분에 불과하다.

얼마나 많이 몰랐었는지 좀 알 것 같아 또 넘어질 나란 걸 알 것 같아 이제야 겨우 기댈 법을 좀 안 것 같아 어떡해야 힘을 좀 빼는지도

설렘은 내게 불안이라서 늘 겁이 났어

참 별일 다 있단 생각을 하지 살아가는 일이란 참 모를 일이야 영원할 것만 같았던 아픔이 추억이 되고 미워한 사람이 친구가 되고 궁금할 것도 없었던 널 사랑하기도 하고 흘려듣던 옛 노래가 마음에 들어오고

세상은 참 이렇게 모를 일이야 그게 참 고마운 거야 하루하루 새로운 게 알듯 말듯 하기에 여전히 난 가끔은 설레이니까

어쩌면 말이란 건 각자가 그리는 그림

우린 영원히 서로를 이해할 수 없어 헤아리고 또 헤아리면 그걸 사랑이라 부르죠

세상의 모든 건 결국 지나간다고

우리의 내일을 말하지 마 지금을 부디 흘리지 마

이 안에 이곳에 나라는 세상에 네가 숨을 쉬고 있어 니 안에 그 곳에 너라는 세상에 내가 숨을 쉬고 있기를

좋을 때, 슬플 때, 힘들 때 결국에 마음이 닿는 곳은 결국 너 이럴 땐 어쩔 땐 생각해 널 떠올리려 눈 뜨는 것 같다고

풀지 못한 문제가 있어 너라면 어떤 길로 답을 찾아 갔을까 그러면 답이 좀 보이곤 해

긴 밤엔 별을 셀 수 있어서 깊은 꿈을 꾸어서 더 먼 곳을 볼 수 있는 나를 또 만나게 돼

내게 제일 어울리는 리듬을 가슴속에 품으면 그게 내 숨인 걸 이제 알 것 같아

기억해, 그날의 아픔을
기억해, 그 모든 추억들

슬픔이라는 건 내 맘대로 버릴 수가 없다는 걸 배운 거야 니가 없는 이곳에서

넌 니가 진짜로 원한 게 뭐라고 생각해?
또 그게 옳다고 생각해?
Don‘t let it go, don‘t let it go

올려봤던 하늘에 그 달빛을 기억해 다시 머릿속에 그린다 그리고 난 꿈꾼다 나를 잃지 않도록

오늘도 부딪혀 난 툭 털고 지나쳐 난 좀처럼 안 미쳐 난 끓는점이 달러

이 세상에 난 하나뿐이길래 내가 그린 선을 따라가 네모난 종이엔 어울리지 않아 I draw my way

나를 구겨 넣으려 하지 마

그래 난 틀리진 않아 좀 달라 잘 봐, 우린 전부 남달라

이 세상에 날 보내주었길래 나는 나를 믿고 살아가 기나긴 줄 뒤에 기다리지 않아 I got my way

꽃이 피면 그땐 니가 날 알아보겠지

늘 날 비껴가던 봄이 내게도 온다면 단 한 줌의 흙으로 한 줄기 빛으로 드센 바람결에도 끝내 버틴 뿌리로 흐드러진 꽃을 피워 누가 기억해줄 한 송이로

내 이름 곁에 누군가 의미를 남겨준다면 지친 적 없이 꿈을 꿨다는 말로 날 불러주기를

걸음을 멈춰 누군가 나를 바라본다면 그 순간은 찰나라 해도 슬픔이 없기를 나의 기나긴 기다림의 이유였다고 믿을 수 있게

이제서야 나보다 더 작아진 그대를 보며 이해하려 노력하는 내가 비겁해

그댄 나의 커다란 뿌리였고 항상 나를 품은 그늘이었고 마주보지 못한 태양이었고 나보다 더 나의 이름이었어

매일이 버거운 건 당연했어 내 청춘에게 난 가장 못됐던 사람

좋은 사람, 나쁜 사람 모두 어느 순간의 나였어 울고 웃었던 건 당연했어 나는 나를 제일 몰랐던 사람

멀리서 비로소 보이는 이제야 당연한 것들 소중한 건 늘 가까이에 그리고 조금은 하찮은 것들 그렇게 선명해진 너

예민하게 수집한 단어로 감정에 이름표를 붙여주는 사람, 그 단어들로 연결된 문장으로 감각을 노래하는 사람.

노랫말은 시와 달라서 너무 생경한 단어를 쓰기도 어렵고 지나치게 난해한 표현을 써서도 안 된다. 들을 때 귀에 쉽게 감겨 와야 하니 누구나 쓸 법한 일상어가 주재료다.

보통의 언어들이 지닌 힘

말을 쓰고 다루는 방식은 결국 삶을 사는 방식과도 닿아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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