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지난번 포스팅에서 마무리하려고 했었는데 밑줄쳐놓고 싶은 문장들이 추가로 보여서 몇 문장만 추가로 밑줄을 그어본다.

개인적으로 오늘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은 19세기에 석탄을 대체할 새로운 에너지원으로 두 가지 선택안이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독자인 나는 석유가 아닌 수소가 이 당시에도 한 가지 옵션이었다는 것에 대해 솔직히 좀 놀랐다. 내가 과학분야에 무지한 편이라 이런 놀라움이 우습게 느껴지는 분들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정도 찰나의 수치심 정도는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저자가 말한것처럼 만약 19세기에 석유 대신 수소를 에너지원으로 선택했다면 지금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 세대의 삶과 환경은 지금과는 또 다른 모습이었을 것이다. 물론 수소를 선택했을 때 우리가 알지못하는 어떤 부작용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지금의 기후변화로 인한 환경문제가 조금은 덜하지 않았을까 싶다.

이런 걸 보면서 경제성과 환경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본문 내용에 따르면 저 당시 사람들이 새로운 에너지원으로 석유를 선택한 이유는 생산단가가 상대적으로 저렴했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단순히 경제논리로만 따졌을 때는 당연히 옳은 결정이겠지만 포괄적으로 혹은 전지구적으로 따져봤을 때 환경오염으로 인해 파생되는 경제적 비용들은 감히 추산하기 힘들만큼 크다는 것을 생각해본다면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단순한 경제논리만으로 돌아가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물론 이러한 생각이 결과론적인 얘기처럼 들릴지도 모르겠다. 19세기 당시 사람들이 미래 환경이 얼마나 오염될지 알았다면 당연히 그들도 석유대신 수소를 새로운 에너지원으로 선택했을 것이다. 어쨌든 과거는 과거고 이런 역사를 통해 우리 세대는 뭔가 배우고 느끼는 것이 있어야 할 것이다. 또한 한 걸음 더 나아가 다음 세대에 대한 책임감을 어느정도 갖고 의사결정을 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저자도 이 책의 마지막 문장에서 독자들에게 ‘각자의 자리에서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길 바란다‘(p.359) 는 말을 한다. 다만 이 지점에서 문득 든 생각은 인간의 이기적인 본성으로 인해 미래 세대와는 상관없이 개개인의 이익을 위해 의사결정하는 사람이 많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과거 19세기든 현재 21세기든 인간의 본성은 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만에 하나 설령 이기적인 인간의 본성에 따른 선택이라 할지라도 그것들이 모여서 좀 더 나은 미래를 만들 수만 있다면 참 다행일텐데... 아무튼 미래는 우리가 하기 나름이지 않을까 싶다.

우리 사회의 문제는 비전 없는 부동산 정책들과 세금 정책만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새로운 공간, 새로운 도시 인프라를 만들어야 한다. - P358

코로나로 인해서 전 세계 모든 국가와 사회는 새로운 미래를 만들 출발선상에 섰다. 과거의 공간 모델로는 다가올 미래를 준비할 수 없다. 새로운 모델이 필요하다. - P358

이제는 우리가 처음으로 만든 새로운 도시 공간 시스템, 우리만의 교육 시스템을 만들어서 세계를 리드해 나가야 하지 않을까? 언제까지 선진국 성공 사례를 찾아다닐 것인가. - P359

역사를 모르는 사람에게 미래는 없다. 하지만 역사만 이야기하는 사람에게도 미래는 없다. 미래는 미래에 대해서 구체적인 꿈을 꾸는 사람들이 만드는 것이다. 우리 모두가 시선의 초점을 과거에서 방향을 돌려, 미래를 향하길 바란다. 코로나라는 위기는 그런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 P359

역사를 보면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하는 시대가 있다. 19세기에 석탄을 대체할 새로운 에너지원을 찾을 때 우리에게는 두 가지 선택의 길이 있었다. 석유와 수소. 그 당시의 기술적 완성도는 석유와 수소가 비슷한 수준이었다. 그런데 당시 사람들은 석유가 수소보다 생산 단가가 아주 조금 싸다는 이유로 석유를 선택했다. 그 결과가 바로 지금 우리가 맞이하고 있는 환경 위기의 세상이다. 만약에 그 당시 사람들이 현명하게 수소를 택했다면 지금의 세상은 어떻게 됐을까? 역사 중에 어느 시대의 선택이 이후 수백 년의 인류 역사에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지금이 그런 시대다. - P359

기후 변화와 전염병의 시대를 사는 우리는 백 년 후의 인류 역사를 결정하는 거룩한 책임을 짊어진 세대다. 미래는 그냥 오는 것이 아니라 창조하는 것이다. 미래는 우리가 만드는 오늘의 선택이 모여서 만들어진다. 각자의 자리에서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길 바란다. - P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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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뇌에 있는 뉴런과 뉴런을 연결하는 시냅스 얘기에서부터 출발하여 컴퓨터의 병렬 네트워크 파워, 언어에 의한 시너지 효과 그리고 공간적으로 이러한 효과를 얻기 위해 창출된 도시 이야기에 이르기까지 흐름이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저자는 도시가 창출할 수 있는 다양한 장점들과 더불어 전염병의 위험에 취약할 수 있다는 단점까지 보여주면서 이러한 단점을 극복해낸 도시들이 대도시로 성장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또한 여기 일일이 밑줄치진 않았지만 저자는 자신이 생각하는 미래의 이상적인 도시상에 대해 건축과 꽤 구체적인 그림을 그리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는데 그중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적으로 느껴졌던 것은 바로 ‘자율 주행 전용 지하 물류 터널‘ 이었다. 각종 택배나 물류의 이동을 지하화함으로써 지상에 창출되는 공간을 이용할 수 있다는 것이 주요 컨셉인데 이를 통해 지상에 공원같이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공간을 더욱 더 많이 조성하여 사람들간의 소통과 교류가 더 많아지는 효과는 물론이고 물류 이동에 따른 에너지 소비량을 대폭 감소시킬 수 있다는 게 저자의 기본적인 생각이었다. 아직 이것이 현실화되진 않았지만 저자가 본문에 소개한 과거의 사례들과 비교적 최근의 사례들을 종합해서 미래를 전망해 봤을 때 저자의 생각이 실현불가능한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가 될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앞으로의 미래는 지난 몇 십년간 발전해온 속도보다 훨씬 더 빠른 속도로 진화해나갈 것이라는 예상은 충분히 해볼 수 있을 듯하다. 앞으로의 미래 도시의 형태가 어떻게 바뀌어 나갈지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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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이어 나오는 내용 중에 필지와 관련된 부분이 있다. 필지는 각각의 구획별로 나눠지는 토지의 등록단위를 일컫는 말인데 본문을 통해 우리나라와 외국의 필지가 차이점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저자의 용어로는 ‘농사꾼의 필지‘와 ‘장사꾼의 필지‘라는 말로 둘을 비교하고 있는데 먼저 우리나라의 경우 필지가 기본적으로 정사각형으로 구획되어있는 반면, 서양의 경우 직사각형 형태로 길게 구획되어 있음을 볼 수 있었다. 저자는 서양의 직사각형 형태의 필지는 애초에 장사를 염두에 둔 것이라는 얘기를 하는데, 책에 함께 첨부된 그림을 통해 저자의 말의 뜻을 좀 더 명확히 이해할 수 있었다. 또한 서양은 효율성을 중시하여 필지와 필지 사이에 여분의 땅이 남지 않도록 붙여서 건물을 짓는 반면에, 우리나라는 채광과 통풍 등의 이유로 인해 필지와 필지사이에 일정 거리를 띄워놓도록 법으로 규정되어 있어서 건물과 건물 사이에 남는 공간이 생기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러한 것을 저자는 우리나라가 예로부터 농사를 근본으로 생각하는 마인드가 있었다는 것을 근거로 하여 ‘농사꾼의 필지‘ 라고 명명한 듯하다.

어찌됐든 이러한 필지 형태를 비교해보면서 앞으로 도시가 재건축, 재개발 될 때 어떠한 형태로 하는 것이 바람직할지에 대해서도 살펴봤는데, 여기 일일이 밑줄치진 않았지만 저자가 제시하는 대안들이 독자인 내가 느끼기에도 퍽 괜찮다고 느껴졌다. 예를 들어, 필지의 낭비되는 부분을 없애기 위해 필지를 일정 규모로 통합한 뒤 공통으로 사용하는 공간을 최소화하면서 건축하는 방안 같은 것들은 우리나라의 토지에 일정부분 제약이 있다는 것을 고려해봤을 때 꽤나 합리적인 아이디어라고 여겨졌다. 물론 이를 위해선 기존에 있는 각종 규제나 법규들이 풀리고 개정되어야 한다는 전제조건이 붙는 일이기는 하지만 적어도 이러한 행정적인 규제만 일정부분 완화된다면 시도해봄직한 대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의 뇌에는 1000억 개의 (신경세포인) 뉴런과 뉴런 사이를 연결하는 시냅스가 100조 개 있다. 인간의 지능이 높은 이유는 시냅스의 총량이 크기 때문이다. - P162

이 원리는 컴퓨터에서도 찾을 수 있다. 개인컴퓨터(PC) 한 대의 연산 능력은 그렇게 크지 않다. 이 PC를 직렬로 연결하면 같은 성능을 가진다. 그런데 PC를 병렬로 연결하면 슈퍼컴퓨터의 연산 능력을 갖게 된다. 이것이 병렬 네트워크의 힘이다. - P162

인간의 뇌를 병렬로 연결하는 방식은 케이블이 아닌 언어다. 그리고 문자는 다른 시간대 다른 공간에 있는 사람과도 연결시켜 준다. 21세기의 우리가 플라톤의 책을 읽는다면 우리의 뇌는 2400년 전 그리스의 한 철학자의 뇌와 병렬로 연결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을 통해서 뇌끼리의 시너지 효과가 생겨난다. - P162

공간적으로 인간의 뇌끼리의 연결 시냅스를 늘리는 방법은 도시를 만드는 것이다. - P162

밀도가 높은 도시 공간에서는 주변에 사람이 많기 때문에 다양한 상거래가 이루어지고 대화를 통해서 창의적인 생각들도 만들어지게 된다. 우리는 그것을 도시 생활이라고 한다. 인류의 많은 창의적 생각과 물건들은 모두 도시에서 생활하던 사람들에 의해서 발명되고 만들어졌다. - P163

제프리 웨스트의 저서 「스케일」에 따르면 인구가 2배 늘어나면 특허 출원 건수가 2.15배로 뛴다고 한다. 인구의 규모가 커질수록 도시가 더욱 창의적으로 되어 간다는 것이다. 이 밖에도 평균 임금, 전문 직업인 수도 인구가 2배가 늘어날 때 2.15배가 늘어난다. 반면 에너지 절약적인 면에서는 절감이 된다. 미국, 일본, 독일 도시의 경우 인구가 2배 늘어날 때 주유소는 1.85배만 늘어났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도시의 규모가 늘어나면 도시 인프라 초기 투자 비용은 7.5퍼센트 줄어들고 창의성은 7.5퍼센트 증가한다. 더 큰 도시가 될수록 경쟁력이 생긴다는 연구 결과다. - P163

그런데 문제가 있다. 도시의 규모가 2배 커지면 범죄율과 전염병의 전파도 2.15배 증가된다는 문제가 생긴다. - P164

과거에는 전염병에 걸리면 도시 외곽으로 격리시키는 방법밖에 없었지만, 병의 원인을 파악한 다음에는 병원이라는 건축 시설을 도시 안에 적극 배치하고 도시의 인구를 유지하는 방식을 개발해 냈다. 각종 도시 위생 시스템과 바이오테크놀러지는 도시의 규모를 1000만명으로 키울 수 있게 해 주었다. - P164

뉴욕은 다른 유럽의 도시와는 달리 엘리베이터가 발명된 이후에 성장한 도시다. 뉴욕은 엘리베이터, 철골 구조, 철근 콘크리트라는 신기술을 이용해서 고층 건물을 지었다. 유럽의 다른 도시들이 7층 정도 높이의 건물로 구성되어 있을 때 뉴욕은 30층짜리 건물로 4배 이상 고밀화된 도시 공간을 만들었다. 밀도가 4배가 되면 같은 시간에 한 사람이 만날 수 있는 사람의 숫자도 4배로 늘어난다. 이는 도시 경쟁력으로 이어졌다. 미국이 세계를 리드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세계에서 가장 밀도가 높은 뉴욕이라는 도시가 있었기 때문이다. - P165

뉴욕은 고밀화된 도시 공간뿐 아니라 전화기라는 통신망을 깔아서 사람 간 소통할 수 있는 관계의 시냅스를 획기적으로 늘렸다. - P165

1990년대 들어서 도시의 시냅스를 늘릴 수 있는 획기적 기술이 개발됐다. 바로 인터넷이다. 과거 인류의 기술은 수천 년간 물리적인 좁은 공간 안에 더 많은 사람이 살게 하려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하지만 그 한계에 봉착하자 인류는 인터넷이라는 새로운 방식으로 가상의 공간을 만들고 그렇게 만들어진 인터넷 공간 속에서 사람 간의 관계를 연결하는 방법을 찾았다. 인터넷 빅뱅을 통해 만들어 낸 시냅스의 팽창이다. - P166

현대의 도시는 오프라인 공간에서 만나는 시냅스의 총량과 온라인 공간에서 만나는 시냅스의 총량을 합쳐서 이해해야 한다. - P166

인류는 꾸준하게 도시의 규모를 키우고 기술을 발전시키면서 사람들 간 관계의 시냅스를 늘려 나갔는데, 나는 이를 ‘시냅스 총량 증가의 법칙‘이라고 부른다. - P166

문명이 발달할수록 시냅스 총량이 증가된다. - P167

인간은 온라인 기회와 오프라인 기회가 있다면 둘 중 하나를 택하는 대신 두 가지 기회를 모두 가지려고 할 것이다. - P168

일자리 구성 때문에 대도시로 인구가 집중될 가능성도 있다. - P169

우리나라 일자리의 55퍼센트는 사무직이다. 이들 중 재택근무가 가능한 일자리들은 자신의 업무를 디지털화할 수 있는 일자리다. 이런 업무의 디지털화가 가능한 일자리는 향후 인공지능이 발달할수록 인공지능으로 대체될 가능성이 높다. 향후 재택근무 가능한 일자리는 줄어들고 대신 인간이 인간에게 서비스하는 일자리가 살아남거나 늘어날 것이다. - P169

그렇다면 다른 사람에게 서비스하는 일자리는 어디에 있을까? 사람이 많은 곳에 있다. 도시에 더 많은 일자리의 기회가 있다는 말이다. - P169

사람이 모여 살면 갈등이 생길 수밖에 없다. 그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두 가지다. 하나는 소프트웨어적인 방법, 다른 하나는 하드웨어적인 방법이다. 소프트웨어적인 방법은 각종 세금 정책과 행정 정책들이고, 하드웨어적인 방법은 공간 구조를 바꾸는 것이다. - P175

공통의 추억을 가지면 서로를 이해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도시에는 공통의 추억을 만들어 주는 ‘공짜로 머물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 - P176

공산주의는 인간을 너무 착하게 봐서 실패했다. 인간은 결코 부와 권력을 공평하게 나누고 싶어 하지 않는다. 역사를 보면 공평한 분배를 주장하던 자들이 나중에 오히려 독재자가 되는 경우가 많았다. - P178

인간이 이렇게 이기적이기 때문에 소셜 믹스는 상대방의 배경이 어떤지 모르는 ‘익명성‘ 상태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도시 공간 속에서 익명성의 소셜 믹스를 가능하게 해 주는 장소가 공원, 벤치, 도서관이다. 이런 공짜로 머물 수 있는 공간에서 공통의 추억을 만들면 소셜 믹스가 된다. - P178

투쟁을 위한 모임이 아니라 즐기기 위한 모임의 공간이 필요하다. - P178

도시 재생과 재건축은 바둑과 같다. 바둑은 몇 수 앞을 내다보고 어디에 돌을 두느냐가 승부를 결정한다. 지금의 재건축 정책은 상대편인 개발업자에게 아예 바둑돌을 안 두게 만들고 있다. 누군가를 판단하고 가르치려고만 하면 대화나 게임 자체가 시작이 안 된다. 검은돌을 쥔 개발업자가 돌을 두는 것을 두려워 할 필요는 없다. 내가 쥔 흰 돌을 어디에 먼저 두느냐가 중요하다. 바둑의 고수는 중요한 적재적소에 정확한 순서대로 돌을 둔다. 그게 바둑에서 승리하는 법칙이다. - P180

가장 좋은 시스템은 인간의 이기심을 이용해 좋은 세상을 만드는 시스템이다. 20세기 후반에 문제가 많았던 자본주의가 사회주의와의 경쟁에서 이겼던 이유는 자본주의는 인간의 이기심을 이용하는 시스템이라서 사람들의 능력을 최대치로 끌어냈기 때문이다. - P181

똑똑하게 줄 건 주고 얻을 것은 얻는다 - P181

가로로 긴 공원의 또 다른 장점은 지역 간의 경계를 허물고 하나의 공동체를 형성하는 효과가 있다. - P185

사람들이 걸을 때 경계가 모호해지기 때문이다. 도시 안의 사람들이 하나가 되려면 떨어져 있는 동네들 간에 걸어서 오갈 수 있어야 하는데, 선형의 공원은 이를 촉진시킨다. - P185

기술은 발전할수록 눈에 보이지 않는 곳으로 사라진다. - P188

건축은 발전할수록 서비스 기능들이 보이지 않는 곳으로 숨겨진다. - P188

물고기를 주는 것보다는 물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 주는 것이 낫다. 국민에게 단순하게 현금을 나누어 주는 것보다 인프라에 투자하는 것이 미래를 위해서 더 나은 선택일 것이다. - P190

인간은 천천히 걸을수록 좋고, 물류는 빠르게 이동할수록 좋다. 이 둘은 근본적으로 상충된다. 빠르게 움직여야 하는 것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공간으로 보내는 것이 지상을 ‘인간을 위한 느린 공간‘으로 만들 수 있는 방법이다. - P190

‘개발 제한 구역‘이라는 의미의 그린벨트는 영국에서 최초로 고안한 개념이다. - P199

우리가 아는 도시 확장 억제 개념의 그린벨트는 1898년 에버니저 하워드 Ebenezer Howard의 저서 「미래의 정원 도시(Garden Citiesof Tomorrow)』에서 처음 소개됐다. 그의 개념은 런던의 무질서한 확장을 막기 위해서 런던 시내 주변으로 폭 2킬로미터의 녹지를 보존하고 그 공간을 런던 시민이 쉴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자는 취지였다. - P199

결국 중요한 것은 패턴이다. 도로망의 패턴, 빌딩과 녹지 구성의 패턴, 학교, 주거, 오피스 같은 다양한 프로그램들이 섞인 패턴 등이 도시의 효율성과 사회의 특징을 결정하는 것이다. - P204

우리나라의 경우 21세기에 맞는 고밀도 패턴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이는 마치 좁은 반도체 안에 효율적인 반도체회로를 설계하는 것과도 같다. 어떻게 더 안전하고 창의적이고 자연친화적이며 인간을 위한 공간을 도시 안에 밀도 있게 만들 수 있는가가 국가 경쟁력을 좌우한다. - P205

대한민국의 도시화 비율은 91퍼센트다. 전체 인구중 도시에 사는 사람이 91퍼센트란 이야기다. 보통 경제학자들은 도시화 비율이 80퍼센트 중반이 넘어가면 도시화가 완성되었다고 말한다. 현재 전 세계에서 도시화가 90퍼센트 이상인 나라는 싱가포르, 홍콩, 한국뿐이다. 앞의 두 나라는 도시국가 수준이니 그렇다 치고 한국은 도시화가 완성되고도 남은 것이라는 이야기다. 이 말은 즉 우리는 택지가 부족하지 않다는 이야기다. - P208

LH의 주요 업무는 농지로 된 땅을 택지로 개발하는 일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경우 이제 도시로의 인구 이동은 완성된 상태다. 그렇다면 이제 LH가 해야 하는 일은 새롭게 택지를 개발하는 대신 기존 택지의 효율을 높이는 일이다. - P208

도시화가 91퍼센트인 우리나라는 더 이상 새로운 택지를 만들 필요가 없다. 대신 그린벨트는 진정한 그린(녹지)으로 회복해야 하고 부족한 주택 공급을 위해서 기존의 도시를 재개발 재건축을 통해서 재정비해야 한다. - P209

10만 평의 땅이 있다고 해서 모두 같은 가치를 갖는 것은 아니다. 땅은 주변부에 어떠한 시설을 접하고 있느냐에 따라서 가치가 결정된다. 기찻길 옆 시끄러운 지역의 아파트보다 한강이 보이는 강변 아파트의 가치가 더 높다. 따라서 그린벨트 중에서도 가치가 높은 곳은 도시의 편의시설을 사용할 수 있는, 도시와 접한 경계부의 땅이다. 그 경계부의 땅을 좁고 길게 집중적으로 개발하고 나머지 그린벨트는 공원으로 바꾼다면, 새로 지어진 주거는 도시의 편리함과 공원 경치를 함께 갖는 가치 높은 부동산이 될 것이다. 이렇게 좋은 조건의 주거를 개발해서 분양 단가를 높인다면 적은 연면적을 개발해도 개발업자 입장에서는 같은 사업성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많은 녹지를 훼손하지 않고도 사업성을 찾을 수 있고, 시민은 좋은 공원을 얻게 된다. - P211

경계부를 개발할 때 건물을 연속되게 지어서 만리장성처럼 보이게 만들면 안 된다. 실선처럼 이어진 건물군이 아니라 점선처럼 중간 중간 끊어지게 개발해서 도시 측에서 바라볼 때 건물과 건물 사이로 그린벨트 공원으로의 접근성과 경관을 확보하게 만들어야 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주거 단지를 ‘엣지시티‘라고 부르자. - P211

미래는 꿈꾸는 자들이 만든다. - P214

애초에 도시가 처음 만들어질 때 필지를 좁고 길게 만든 이유는 도심 속에서 장사를 하기 위해서다. 장사를 하려면 길가에 면해서 가게 입구가 나야 한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도시에 모여서 장사하며 사는 도시들은 필지 모양이 도로에 접한 부분은 좁고 뒤쪽으로 길다. 런던, 암스테르담, 로마, 뉴욕 할 것 없이 상업 중심 도시는 다 그렇다. 심지어 일본의 오래된 도시인 교토도 필지가 좁고 길다. - P218

그런데 우리는 강남 개발을 할 때도 필지 모양이 정사각형이다. 농사꾼의 마인드로 필지 구획을 해서 그렇다. 우리는 땅은 반듯한 정사각형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땅을 볼 때 햇빛 드는 농지와 면적만을 생각해서 그렇다. 농사꾼과 장사꾼의 다른 마인드는 필지 모양의 비율을 다르게 했고, 도시의 효율성에 차이를 주었다. - P218

우리가 장사꾼의 마인드를 가지지 못한 이유는 난방 시스템인 온돌 때문에 2층짜리 집을 지어 본 적이 없어서다. 그래서 고밀한 도시가 없었고 따라서 상업도 발달하지 못해서 그렇다. 우리의 도시를 바꾸려면 필지 디자인부터 바꿔야 한다. - P218

필지의 모양이 외부 공간의 효율성을 좌우한다. - P219

우리나라 도시 경관의 첫 번째 문제는 과거의 흔적을 보존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재개발을 할 때 대형으로 진행하다 보니 기존 도시의 골목길들도 다 사라지고 과거의 흔적이 완전히 지워진 재개발밖에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문제가 있다. - P220

두 번째 문제는 필로티 주차장이다. 우리나라 도시의 풍경을 망치는 것 중 하나는 1층에 만들어진 필로티 주차장인데, 이러한 개발이 되는 이유는 주차장법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기본적으로 건물의 주차를 자신의 땅 안에서 해결해야 한다. 그런데 필지는 작게 100평 이하로 구획되어 있다.
100평이 안 되는 땅에는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가는 경사로를 만들수 없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필요한 주차 공간만큼 건물 1층을 필로티로 올려서 해결하게 된다. - P220

주차장법 중에 200미터 이내에 주차장 땅을 확보하면 내 땅에 주차를 안 해도 되지만, 근처의 비싼 땅을 사서 지상 주차장으로만 사용하는 바보가 있을까? 결국에는 필로티 주차장밖에는 답이 없다. 이를 피하는 방법은 대규모 재개발밖에 없는데 여러 가지 절차상의 이유로 이루어지기가 어렵다. 따라서 대안으로 제시할 수 있는 것은 중규모로 재개발하는 것이다. - P220

서울의 지도를 보면 필지가 6개에서 20개 정도씩 묶인 블록들이 모여서 블록과 블록 사이에 골목길을 형성하고 있다. 만약에 우리가 골목길과 골목길 사이의 6개에서 20개 정도의 필지를 묶은 규모의 재개발을 촉진하는 인센티브 법안을 만들면 어떨까? 이때 새롭게 건축되는 건물의 주차장은 지하에 통합으로 넣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지하 주차장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최소화되고 골목길과 접한 1층은 필로티 주차장 없이 보행 친화적인 환경으로 구성할 수 있게 된다. - P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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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일 전 리뷰를 썼던《최재천의 공부》라는 책의 p.158에 잠깐 등장하기도 했었던 단어인 ‘숙론‘ 을 책으로 좀 더 자세히 만나본다.

누가 옳은가를 결정하려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옳은가를 찾으려는 것이다. - P5

배움 learning은 경험에 따라 행동이 변화하는 걸 일컫는데, - P6

유전자 수준에서 이미 각인되어 타고난 행동이다. 우리는 이를 본능instinct이라 부른다. - P6

인간을 제외한 다른 동물 세계에도 배움은 넘쳐난다. 그러나 가르침 teaching은 거의 없거나 매우 드물다. 이제 곧 둥지를 떠나야 할 새끼들에게 나는 법을 가르치는 듯 보이는 어미 새를 자세히 관찰해보면 딱히 가르치는 것 같지 않다. 둥지에서 저만치 먼저 날아가 나뭇가지에 앉아 새끼가 날아 나올 때까지 기다릴 뿐, 꽁지깃을 어떻게 세우고 가슴근육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일일이 설명하고instructing 지도하지coaching 않는다. - P8

침팬지 엄마는 짜증을 내지도, 설명하느라 열을 올리지도, 그리고 시범을 보이며 지도하느라 애쓰지도 않는다. 그저 아이가 무수한 시행착오를 겪으며 스스로 체득할 때까지 무한한 인내심을 품고 묵묵히 기다려줄 뿐이다. - P9

나는 대한민국 교육이 안고 있는 온갖 문제점은 물론,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다양한 형태의 갈등도 상당부분 토론 부재에 기인한다고 생각한다. 학교에 가면 갈수록 창의성이 줄어드는 우리 교육의 모순을 타개할 수있는 가장 효율적인 방안으로 토론 학습을 제안한다. - P11

자연스럽게 의견이 갈리고 쟁점 또한 풍부한 정치는 토론을 학습할 수 있는 더할 수 없이 훌륭한 주제다. - P12

무엇보다 토론 수업을 진행할 교사들을 위한 교육이 시급하다. 교실을 자칫 정치판 싸움터처럼 만들지 않도록 하는 책임은 일단 교사들에게 있기 때문이다. - P12

우리 사회에서 토론 문화가 사라진 가장 결정적인 원인은 역시 일제강점기의 교육이 제공했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 학문의 다양성을 무시하고 오로지 식민화를 위한 획일적인 교육에 집중하는 가운데 토론 학습은 애당초 들어설 자리가 없었다. - P13

일본은 우리말을 말살하고 식민정책을 시행하려고 철저하게 주입식이고 수동적인 교육을 실시했다. 30여 년에 걸친 일제의 교육은 지금까지도 우리 사회에 정부 주도의 교육제도, 도구주의 교육관, 학력 중시 등 여러 악영향을 끼치고 있다. 여기에 덧붙여 나는 일제의 교육이 우리 교실에서 토론 문화를 말살한 폐단을 지적하고 싶다. - P14

서양에서 discussion은 남의 얘기를 들으며 내 생각을 다듬는 행위다. 이걸 요즘 우리는 ‘토론‘이라고 번역해 사용하는데, 지금 우리가 하는 토론은 서양의 discussion 과는 많이 다르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토론에 임하는 자세를 보면 심히 결연하다. - P15

한때 <백지연의 끝장토론>이라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제목부터 자기모순이다. 토론은 끝장을 보려 도모하는 행위가 아니다. - P15

기어코 상대를 제압하겠다는 경기로 충만해 토론에 임하면 남의 혜안이 비집고 들어올 여지가 없다. ‘시인과 촌장‘의 노래를 조성모가 다시 불러 널리 알려진 <가시나무>의 노랫말처럼 마음속에 나 자신이 너무 많아 타인의 생각이 비집고 들어올 틈이 없다. 지금 우리가 주로 하는 행위는 discussion이 아니라 debate에 가깝다. - P16

Debate는 주로 ‘논쟁‘이라고 번역하지만 우리는 지금 논쟁 수준에도 못 미치는 ‘언쟁‘, 즉 치졸한 말싸움을 하고 있을 뿐이다. - P16

차라리 debate를 ‘토론‘으로 규정하고 이제부터는 ‘토의 discussion‘를 하자는 제안도 있다. 토의가 토론보다 어감상 덜 논쟁적이라는 느낌이 들지 모르지만, ‘의‘와 ‘논‘의 자원字源을 들여다보면 좀 뜻밖이다. - P16

의議자는 ‘말씀 언言‘과 ‘옳을 의義‘가 합쳐진 것인데, 義는 양의 머리를 창에 꽂은 제사 장식을 형상화한 글자로 올바름을 신에게 아뢴다는 뜻이다. 반면 논論자의
‘둥글 륜侖‘은 죽간을 둥글게 말아놓은 모습을 그린 것으로 의견을 두루 주고받는 과정을 뜻한다. ‘의‘가 다분히 하향 top-down 식인데 반해 ‘논‘은 상향 bottom-up식이라 훨씬 민주적이다. - P16

사실 문제는 ‘토‘에 있다. ‘칠 토討‘자는 ‘공격하다‘와 ‘두들겨 패다‘에서 ‘비난하다‘와 ‘정별하다‘라는 의미까지 품고 있다. 이렇게 보면 우리는 그동안 제대로 토론해온 셈이다. - P16

김언종 교수에 따르면 토討자에는 ‘견책하다‘ 혹은 ‘정벌하다‘라는 의미도 있지만 원래는 ‘대화로 합의에 이르다‘라는 뜻을 지닌다고 한다. 그러나 세숙은 함께 둘러앉아 토론한 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의견을 나름 세심하게 검토했을 뿐이다. - P17

이런 연유로 나는 기왕에 너무 많이 오염된 용어인 ‘토론‘ 대신 ‘숙의熟議‘ 또는 ‘숙론熟論‘이라 부르기를 제안한다. 여럿이 특정 문제에 대해 함께 깊이 생각하고 충분히 의논하는 과정을 뜻하는 말로 개인적으로 숙론이 더 마음에 든다. - P17

굳이 이에 상응하는 영어 표현을 찾으라면 나는 ‘discourse‘를 제안하고 싶다. 영어권에서 discourse는 dialogue (담화)나 discussion(토론)의 좀 있어 보이는 표현으로 사뭇 진지하고 심각한 토론serious discussion을 의미한다. - P17

Consilience는 한마디로 ‘지식의 통일성‘을 의미한다. - P18

이 세상 모든 것은 다른 것과 조화를 이루며 통합되어 있으며 문맥을 고려하지 않은채 그들을 분리하면 그들만의 고유한 존재의 이유가 손상될 수밖에 없다 - P18

숙론은 상대를 제압하는 게 목적이 아니라 남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왜 나와 상대의 생각이 다른지 숙고해보고 자기 생각을 다듬으려고 하는 행위다. 서로 충분히 이야기하면서 서로를 이해하고 인식 수준을 공유 혹은 향상하려 노력하는 작업이다. - P19

숙론은 ‘누가 옳은가 Who is right?‘가 아니라 ‘무엇이 옳은가 What is right?‘를 찾는 과정이다. - P19

우리나라의 기적적인 성공을 가능하게 한 교육은 이제 원동력을 잃었다. 내가 읽고 듣고 만난 4차산업혁명 전문가는 단 한 명도 빠짐없이 동의한다. 지금 우리 교육으로는 결코 4차산업혁명 시대에 걸맞은 창의적 인재를 길러낼 수 없다고. 그렇다면 우리 교육은 바뀌어야한다. 근본적이고 혁명적으로. 진화학자가 할 얘기인지 모르지만, 우리 교육은 점진적 진화 evolution를 기대할 게 아니라 과감한 혁명 revolution을 도모해야 한다. - P20

우리 교육이 다음 단계로 도약하려면 무엇보다 학교 현장에 숙론 수업이 도입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 학생들이 학교에서 함께 둘러앉아 무엇이 옳은가를 찾아가는 훈련을 받고 사회에 진출하면 대한민국은 드디어 성숙한 민주국가가 되리라 확신한다. - P21

일상생활의 거의 모든 면에서 세계가 부러워할 정도로 탁월한 역량을 발휘하는 대한민국 국민이 유독 토론만큼은 못해도 너무 못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이유는 지극히 간단하다. 배우지 못해서 그렇다. 어린이집에 다닐 때부터 모든 학습을 토론으로 하는 서양과 달리 우리는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제대로된 토론 수업을 받아본 사람이 거의 없다. 배워본 적이 없어서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제부터라도 학교에서 가르치면 능히 잘할 수 있다. - P22

정규교육에 토론이 반영되기 시작하면 머지않아 사회 곳곳에서 토론의 꽃이 활짝 피어날 것이다. 토론의 꽃이 만개할 날을 대비하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토론을 이끌 진행자를 양성해야 한다. - P22

탁월한 사회자 moderator 혹은 진행중재자 facilitator가 훌륭한 토론자를 길러낸다. - P23

갈등이 수면 아래 가라앉기보다 세상에 드러나고 있는 현상은 우리 사회가 그만큼 선진화하고 있음을 방증한다. 이런 갈등들을 어떻게 슬기롭게 극복하고 보다 합리적이고 따뜻한 사회를 만들어갈지가 우리 앞에 주어진 숙제다. - P28

"유전자의 50퍼센트를 공유하는 부모와 자식 사이도 이해가 엇갈리는데 하물며 혈연으로 맺어지지 않은 배우자간의 갈등은 얼마나 더 격렬할까?" - P31

갈등의 관점에서 행동을 관찰하면 훨씬 더 명확한 분석이 가능하다. - P31

좌파와 우파 혹은 좌익과 우익이라는 말은 프랑스혁명 이후부터 사용되기 시작했다. 1789년 혁명이 끝나고 소집된 국민의회에서 의장석을 기준으로 왼쪽에 공화파가 앉고 오른쪽에 왕당파가 앉은 데서 유래했다고한다. 1792년 공화파가 주도한 국민공회에서도 왼편으로는 개혁적 자코뱅파 의원들, 오른편에는 보다 보수적 지롱드파 의원들, 그리고 중간에는 중도 성향의 마레당 의원들이 자리하며 개혁에 소극적이고 다분히 수구적 세력을 우익 또는 우파, 상대적으로 변화를 갈구하는 진보적 세력을 좌익 또는 좌파로 나누는 관행이 자리 잡았다. - P35

우리 모두는 누구나 보수와 진보의 긴 연속선 continuum 위 어딘가에 놓인다. 그것도 모든 이슈에 있어서 정확하게 늘 동일한 지점에 있지 않고 이슈마다 연속선상 위치가 달라진다. 흑색과 백색만 있는 게 아니라 다양한 음영의 회색이 무궁무진하게 존재한다. - P37

지역 갈등은 영남과 호남 간 대립이 특별히 부각된 것일 뿐 지역 간 감정의 골은 우리나라 전국 여기저기에 파여 있다. 때론 문화적으로 제법 유래가 깊은 감정의 골도 있지만 대부분은 경제적 이득 때문에 불편하게 갈라서는 경우가 많다. - P42

인도 사회에는 대대로 내려오는 카스트제도가 확고하게 자리 잡고 있어 사람들은 제가끔 자기 처지를 운명처럼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 P43

"알면 사랑한다. 사랑하면 표현한다" - P48

환경 갈등은 본질적으로 세대 갈등이다. 누가 제일 먼저 말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환경은 미래 세대로부터 빌려 쓰는 것"은 이제 누구나 아는 말이 되었다. - P55

적어도 우리 세대가 누린 만큼 미래 세대도 누릴 수 있도록 자연을 잘 보존해 물려줘야 한다는 것이 바로 ‘지속 가능성 sustainability"의 기본개념이다. - P56

나는 ‘지속 가능한 발전‘을 ‘경제성과 생태성의 평형을 모색하는 행위‘라고 규정한다. 경제적 타당성 economic feasibility을 의미하는 ‘경제성‘이라는 단어는 우리가 늘 쓰고 살지만 ‘생태성‘은 다소 생소할 것이다. 그러나 경제학에서 경제성의 개념이 나왔듯이 생태학도 ‘생태계의 온전한 정도ecological integrity‘, 즉 생태성을 측정하고 분석할 수 있다. - P57

경제학eco-nomics과 생태학eco-logy은 같은 어원을 지니고 있다. ‘Eco‘는 ‘집house‘을 뜻하는 그리스어다. 둘은 어쩌면 태어나자마자 헤어진 형제일지도 모른다. 그동안 경제학 형님은 부자로 살았고 생태학 아우는 그야말로 손가락을 빨았다. 그런데 요즘 형님이 아우를 찾는다. 경제학과 생태학이 만나기 시작했다. 개발과 보전은 더 이상 제로섬 게임이 아니다. 막대한 국가예산이 투입되는 대형 국책 사업은 경제 예비타당성뿐 아니라 생태 예비타당성 조사도 받아야 한다. - P58

‘소통은 원래 안 되는 게 정상‘ - P64

우리는 너무나 쉽게 소통이란 조금만 노력하면 잘되리라 착각하며 산다. - P64

동물행동학자들은 오랫동안 동물 소통 animal communication을 상호 협력적 행동으로 이해했다. 그러나 1978년 존 크레브스John R. Krebs와 니컬러스 데이비스 Nicholas B. Davies는 《행동생태학: 진화적 접근Behavioral Ecology: An Evolutionary Approach》에서 소통을 기본적으로 송신자sender가 수신자receiver를 조종하려는 의도적 행위로 규정하며 전혀 새로운 관점을 제시했다. - P65

소통은 협력이 아니라 밀당의 과정이다. 그렇다면 소통은 당연히 일방적 전달이나 지시가 아니라 지난한 숙론과 타협의 과정을 거쳐 얻어지는 결과물이다. - P65

교육이란 본디 먼저 사회에 진출한 세대가 살아보니 이런저런 필요한 것들이 있다고 판단해서 사회 진입을 앞둔 다음 세대로 하여금 기성세대와 더불어 조화롭게 살아갈 수 있도록 준비하는 과정이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우리 교육 현장은 공존을 위한 협력과 배려를 배우는 곳이 아니라 오로지 신분 상승을 꾀하는 경쟁의 각축장이 되어버렸다. - P70

기와가 깨져 흩어지고 흙이 무너진다는 뜻의 사자성어로 와해토붕瓦解土崩이라는 말이 있다. 지금 우리나라의 교육 현실은 순서가 뒤바뀐 느낌이다. 흙, 기본이 무너져 내리며 여기저기에서 기왓장들이 쪼개지고 있는 형국이다. - P71

일찍이 그 어느 나라도 경험해본 적 없는 사상 초유의 저출생으로 인해 교육 구조의 뼈대 자체가 무너지고 있다. 이런 와중에도 기울어진 바닥을 바로잡지 않아 끊임없이 유출되는 토사를 지켜볼 수밖에 없는 우리 교육의 현실은 와해토붕瓦解土崩이 아니라 토붕와해土崩瓦解 형국이다. - P71

집단 창의성 collective creativity은 다양성에서 나온다. 하나의 잣대로 모든 걸 재는 상황에서는 다양성을 기대하기 어렵다. 잣대가 다양해야 창의성이 돋아난다. - P73

자연생태계의 생물다양성을 보존하고 증진해야 하듯이 어떻게 하면 우리 교육계의 학습 다양성 learning diversity을 높일 수 있을지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 - P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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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4-09-03 14:3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무엇이 옳은가, 는 소설을 읽을 때 제가 찾는 것 중 하나입니다. 선인과 악인의 구도로만 볼 수 없이 그 나름대로 각자 설득력을 가지는 행동을 취할 때 무엇이 옳은지를 따지는 것이 때론 어렵더군요.^^

즐라탄이즐라탄탄 2024-09-03 15:37   좋아요 3 | URL
예 소설을 읽다보면 정말 다양한 인물들이 나오는데 그 각각의 인물들이 처해있는 상황이 다들 달라서 그런지 어떤 한면만 보고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게 결코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만약 내가 동일한 상황에 놓여있을 때 어떤 선택을 할지 생각해보면 해당 인물의 선택이 일반적인 기준에서는 잘못된 것처럼 보일지라도 적어도 그 상황에서만큼은 용납될 수도 있는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또한 소설뿐만이 아니라 이 책에서 논하는 일반적인 토론의 경우에도 각각의 패널들이 주장하는 바들을 잘 들어보면 어느 한 쪽의 편만 들기에는 뭔가 조심스러울 때가 있는게 각자가 처한 입장이나 이해관계들이 다들 달라서 그런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보게 됩니다. 정말 페크님 말씀처럼 무엇이 옳은지를 따져나가는 과정이 쉽지않음을 저도 댓글을 쓰면서 다시금 느끼게 되는것 같아요. 쉽지않은 과정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옳은 것을 발견해나가는 과정자체에서 어떤 의미를 찾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게 됩니다. 다만 이 책의 저자의 말처럼 토론이 과열되어 언쟁의 장으로 번지기 보다는 상호간의 존중을 토대로 이루어지는 게 전제되어야 할 것 같다는 생각도 해보게 됩니다. 댓글 감사합니다. 페크님 덕분에 ‘무엇이 옳은가‘라는 말을 저도 좀 더 곱씹어보면서 깊이있게 생각해보고 나름의 의견을 정리해볼 수 있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고맙습니다! ^^
 
최재천의 공부 - 어떻게 배우며 살 것인가
최재천.안희경 지음 / 김영사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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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동 저자의 책인《곤충사회》라는 책을 읽고난 뒤 저자의 다른 책에 관심을 갖던 찰나에 알게 되어 읽게 된 책이다.

먼저 이 책에 대한 전반적인 총평을 살짝 해보자면 이 책은 저자의 교육관,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 그리고 일반적으로 한국 사회에 퍼져있는 문화들과는 약간 다른 각도로 보는 저자만의 독특한 시각 등이 담겨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현재 우리나라의 교육환경에 대한 아쉬움만을 나타내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저자가 미국 유학 생활을 통해 몸소 느꼈던 외국 교육 시스템들을 소개하면서 그것의 좋은 점들을 우리나라의 교육에도 적용했으면 하는 저자의 바램도 담겨있다. 다만, 독자인 내가 느끼기에 저자께서 제시하는 대안들이 우리나라 현실에 적용하기에는 너무 이상적인 얘기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도 저자가 이 책에서 제시한 대안들이 장기적인 방향에서는 옳은 방향이라는 것에는 독자인 나도 충분히 동의할 수 있었다.

전반적인 총평은 대략 이 정도로 하고 일단 본문을 읽으면서 개인적으로 느꼈던 저자로부터 배울만한 삶의 태도와 관련된 얘기를 한 가지 덧붙여보겠다.

가장 먼저 저자가 ‘미리 하는 것‘ 의 중요성에 대해 강조하는 부분이 나온다. 예를 들어, 마감기한이 1주일 뒤라고 한다면 그 전날까지 그 일을 질질 끄는 것이 아니라 몇 일의 여유를 두고 일단 일을 끝낸 뒤 남은 기간동안 1차적으로 완성한 일을 다시 검토하면서 일의 완성도를 높여나간다는 것이다. 저자의 말에 따르면 이것은 단순히 일의 완성도를 높이는 차원을 넘어서 일을 일단 여유있게 마쳤다는 사실로 인해 심리적으로도 편안해지는 1석 2조의 효과가 있다는 것이었다.

이 얘기를 보면서 독자인 나는 잠시나마 내 삶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충분히 미리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불필요한 일들로 시간을 질질 끌다가 마감기한이 닥쳐오면 위기의식을 느끼고 부랴부랴 움직이는 일이 많았던 내 자신에게 괜시리 미안해졌다. 문득 몇 달전 출간된 축구선수 손흥민의 아버지인 손웅정 님이 쓰신 책 제목《모든 것은 기본에서 시작된다》라는 문장이 생각났다. 어찌보면 마감기한을 앞둔 일들을 미리미리 잘 준비하는 것이 모든 일의 기본 중에 기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에 ‘바보들은 늘 결심만 한다‘는 말도 어디선가 들은 기억이 있는데 이 말에 나오는 바보가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각별히 신경써야겠다.


뒤이어서 본문에 나온 내용 중에 글쓰기와 관련된 것이 있다. 저자에 따르면 글쓰기는 크게 문학적 글쓰기와 과학적 글쓰기 이렇게 두 가지가 있다고 한다. 두 글쓰기에 대한 정의를 간단히 적어보자면 전자는 기승전결의 구조에 맞춰 결론이 뒤에 나오는 방식이고 후자는 결론을 맨 앞에 적고 그 결론에 관한 근거들을 후술하는 방식이라고 정리할 수 있다. 저자는 어릴 때 책을 많이 읽어서 문학적 글쓰기에 능했다고 하는데, 유학생활을 하면서는 논문같은 것들을 많이 쓰다보니 과학적 글쓰기에 익숙해졌다고 한다. 이로 인해 자신의 글쓰기 방식의 정체성에 대해 잠시 혼란이 오기도 했다는 얘기도 덧붙이는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자신이 쓰는 글의 목적에 맞게 문학적 글쓰기든 과학적 글쓰기든 하나를 선택해서 글을 쓰는 거라고 할 수 있을 듯하다.

이와 관련하여 추가적으로 사견을 덧붙이자면 여기 나온 글쓰기도 마찬가지고 무슨 일을 하든간에 그 일을 하는 목적에 맞는 전략을 가지고 행동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도 해볼 수 있었다. 독자인 나든 이 리뷰를 읽는 여러분들이든 혹은 다른 누구든 간에 자신의 목적에 적합하게 행동해야지 그냥 아무런 목적도 없이 행동하는 건 그닥 의미가 없는 시간을 흘려보내는 것밖에는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다만 여기서 목적이라고 하니까 꼭 거창한 무언가를 생각할 수도 있는데, 뭐 꼭 대단한 것이 아니더라도 휴식이나 놀이같은 것이라도 심신이 지친 자신을 리프레시하기 위한 목적이라면 나는 그 자체로 목적이 있고 의미있는 거라고 생각한다.


또한 이어지는 글에서 저자는 혼자 생각하고 고민하는 것의 중요성에 대해서도 논하는데, 이는 생각하고 고민하는 과정 속에서 창의성이 발현될 수 있고 이러한 창의성이 또다른 결과물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을 저자가 몸소 체험했기 때문이다. 독자인 나도 지금 이 리뷰를 쓰면서 저자의 글을 다시 읽어보고 또 다른 분들이 쓰신 이 책에 대한 서평들을 읽어보면서 내가 미처 느끼지 못했던 것들을 배워가는 시간이 되는 것 같아서 눈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내적으로 채워지는 듯한 느낌이 든다.

저자는 또한 ‘많이 읽은 사람을 당해내기는 어렵다‘(p.136) 는 말과 함께 독자들에게 글을 많이 읽을 것을 권하는데 이는 글을 잘 쓰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기억해야 할 내용이라고 느껴졌다. 이는 글을 읽으면서 생각하는 과정에서 자기만의 문장이 탄생하기 때문(p.134)이다.

이어 p.144에서 ‘독서는 일이어야만 합니다. 독서는 빡세게 하는 겁니다. 독서를 취미로 하면 눈만 나빠집니다.‘ 라는 말을 통해 저자는 독서에 대한 진지한 태도를 가질 것을 독자들에게 주문한다. 또한 이를 위해 저자는 책을 공략(p.145) 하라고 하는데 이러한 공략은 결국 독서하는 사람의 지식의 영토를 넓히는 것(p.146)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그리고 이러한 영토 확장이 계속되면 예전에 보이지 않던 것들이 서서히 보이기 시작할 거라는 말도 덧붙인다.


뒤이어 저자의 삶의 태도와 관련하여 배울만한 것으로 ‘실수를 두려워하지 마라‘(p.154) 는 것이 있었다. 이는 물론 저자가 미국에서 유학하면서 깨달은 거라 한국 사회와는 약간 결이 다르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실수 했을 때의 망신살이 두려워 아무것도 못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어느정도 수습할 수 있는 선에서는 일단 ‘에라 모르겠다‘ 하고 저질러보는 것도 괜찮은 방법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해주었다. 혹여나 저질렀는데 실수가 아니면 가장 좋고 만약에 실수가 나오더라도 사과하면서 쿨하게 넘어가면 된다는 식으로 약간의 용기를 가져보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으로 p.158에서 ‘숙의‘라는 개념과 함께 ‘숙론‘에 대해서 나오는데 먼저 ‘숙의‘라는 것은 여럿이 특정 문제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충분히 의논하는 과정을 의미한다고 한다. 이러한 의미에 ‘토론‘의 뜻을 합하여 저자는 일종의 신조어인 ‘숙론‘ 을 만들었는데, 때마침 몇 달 전에 저자의 신작 제목이《숙론》이라고 나왔기에 지금 이 리뷰를 쓰면서 특별히 p.158에 눈길이 한 번 더 갔다.


뒤이어 p.195에서는 논문에 지도교수 이름이 들어가는 이유에 대한 내용이 나왔었는데, 저자의 얘기에 따르면 이는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처럼 지도교수가 자신의 연구실적을 부풀리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 지도교수의 이름이 들어가야 학교로부터 연구비를 지원받을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이라고 한다.

독자인 나도 처음에는 지도교수가 논문에 자신의 이름을 넣는 것과 관련해서 대학원생들이나 조교수들이 연구한 것에 숟가락만 얹는 거 아니냐는 곱지않은 시선으로 봤던 것이 사실인데, 좀 더 현실적인 이유가 숨어있었음을 생각해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물론 이는 저자가 교수이기에 자기 방어를 위한 논리를 펴는 것이라고도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어찌됐든 중요한 것은 결국 학문활동이나 연구를 지속하는 것도 금전적인 지원이 바탕이 되지 않으면 힘들다는 것을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다. 어디 연구활동 뿐이겠는가? 분야를 막론하고 적어도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돈이 바탕이 되지 않으면 힘든 것이다.

이외에도 몇 가지 인상적으로 느껴졌던 문장들을 몇 개 적어보면 다음과 같다.

한 번 사는 인생이에요.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살아야죠.(p.182)

세상 경험 중에 쓸모없는 경험은 없다. 모든 경험은 언젠가는 쓸모가 생긴다.(p.189)

이런 문장들을 보면서 타의가 아닌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하고 있는지 점검해 볼 수 있었고, 내가 하는 모든 경험들이 다 의미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멘탈을 관리하는데 조금이나마 힘이 되는 문장이라는 생각도 해보게 되었다.

뒤이어서 p.217에서는 걷기가 두뇌를 활성화시킨다는 얘기를 만날 수 있었는데, 개인적으로 요즘 함께 읽고 있는 책 중에《왜 걸어야 하는가》라는 책에 나오는 내용들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어서 진짜 크게 보면 모든 것이 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연결되어 있는 것임을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다.

p.233에서는 벤저민 프랭클린이 남긴 명언 하나가 나오는데, 간단히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나에게 말로 하면 잊을 것이고, 가르쳐주면 기억할 것이며, 참여하게 하면 배울 것이다.˝

이 말은 동물학자인 저자가 침팬지들의 학습과정을 예로들며 우리 인간도 단순히 가르치는 수준을 넘어서 직접 참여하게 하는 방식으로 배웠으면 하는 바램으로 인용한 문장이라고 느껴졌다. 저자는 이를 ‘우리가 약간 동물스러운 교육을 하면 좋겠다‘는 말로 표현하는데, 학습의 효과를 극대화한다는 측면에서 바람직한 방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뒤이어 저자는 공부의 활력을 위해 우리 인간들이 상호간에 존중하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말을 덧붙인다. 그리고 마지막 부분에서 인간의 마음도 결국에는 자연의 마음과 같다는 말을 하며 자연의 마음을 경험해보자는 말로 글을 마무리 하는데, 이게 어찌보면 별 것 아닌 말 같지만 사실 어떤 것의 본질을 좇아가다보면 인간도 결국 자연에 속한 한 개체이기에 저자께서 이런 말씀을 하신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이 자연에 속해있고 자연은 인간들로 이루어져있기에 우리 인간이 자연에서 배울 수 있는 것들을 잘 배운다면 이 사회가 좀 더 좋은 쪽으로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이 책을 읽으며 위에 정리해본 내용 외에도 다양한 생각들을 만나볼 수 있었는데, 부족한 부분들은 다른 분들이 쓰신 서평들을 통해 좀 더 보충해 나가면 좋을 것 같다. 일단 내가 중요하다고 느낀 것들을 대략적으로나마 끄적여봤는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는 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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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 저자의 전작인《공간이 만든 공간》의 마지막 부분을 보면 코로나19로 대변되는 전염병에 관한 얘기들이 나온다. 이와 관련된 라이프스타일의 변화는 공간의 사용방식도 변화시켰다. 저자는 이《공간의 미래》를 통해 향후 펼쳐질 미래에 관해 전망해보고자 이 책을 썼다고 한다. 향후에 저자의 예측이 맞을지 틀릴지는 지금 당장 알 수 없지만 미래를 예측함과 동시에 대비하고, 향후 생존 가능성을 높이며 사회가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기를 바라는 생각이 담긴 책이라는 말도 저자는 덧붙인다. 독자인 나도 이 책을 통해 저자의 의도에 부합하여 미래를 예상해보고 살아남기위한 대책을 강구해보면 좋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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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초반부를 읽고 있는데《공간이 만든 공간》의 후속작이라서 그런지는 몰라도 그 책에서 저자가 언급했던 부분들이 상당부분 반복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목차를 보면 확실히 기존의 저작들과는 좀 다른 주제들이 많이 보인다.

1장의 제목은 ‘마당 같은 발코니가 있는 아파트‘ 인데, 발코니에 관한 저자의 생각들을 만나볼 수 있다. 특별히 건축 법규와 관련된 여러가지 제약들이 독특하거나 창의적인 건축 디자인을 만드는데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또한 이러한 제약들과는 별개로 개인적으로 처음 보는 건축물들을 다양하게 접할수 있어서 굉장히 신선하게 느껴졌다. 몇 가지 예를 들면 서울 용산에 있는 아페르 한강, 밀라노에 있는 보스코 베르티칼레, 싱가포르의 스카이 해비타트와 인터레이스, 덴마크의 마운팅 드웰링, 캐나다의 해비타트 67 등 일반적이지 않은 디자인들이 독자인 나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책에 수록된 이미지를 본 뒤 추가적으로 인터넷에 관련 키워드를 검색해서 해당 건축물의 몇가지 이미지들을 더 살펴봤는데 ‘저런데서 살면 어떤 느낌일까?‘ 하는 생각이 저절로 들었다. 독자인 나는 해당 건축물의 이미지 몇 개만 봤는데도 머리에 전율이 흐르는데, 저런 건물에 실제로 거주하는 분들의 느낌은 어떨지 문득 궁금해졌다. 단순히 좋다 뭐 이런 수준을 넘어, 날마다 신선한 느낌을 가지고 하늘에 붕 떠있는 느낌이 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글을 쓰면서 잠깐 상상만 해봤는데도 글을 쓰는 내 머리가 붕 뜨면서 뇌에서 뭔가 아드레날린이 솟구치는 느낌이 들 정도니 뭐 말 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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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는 절을 바꿔서 2장 ‘종교의 위기와 기회‘ 라는 제목의 글이 나온다. 제목에 나오는 위기나 기회를 언급하기에 앞서 저자는 종교적인 공간의 특징에 대한 얘기를 먼저 꺼낸다. 또한 알타미라 동굴 벽화부터 시작해 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 최근의 AR(증강 현실, Augmented Reality), VR(가상 현실, Virtual Reality)을 이용한 유니버셜 스튜디오 같은 테마파크에 이르기까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실제로 있다고 믿게 하기 위한 노력들이 계속되고 있음을 독자들에게 보여준다.

이외에도 벽을 이용하여 만든 ‘괴베클리 테페‘라든가 높이를 이용하여 만든 ‘지구라트 신전‘ 등을 통해 종교의 권력이 창출되는 이야기를 재미있게 풀어놓고 있다.

오늘 포스팅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종교의 제사 형태의 변화에 따라 종교 건축도 함께 변했다는 얘기가 살짝 나오는데, 추가적인 얘기들은 다음 포스팅에서 좀 더 다뤄보도록 하겠다.

인간은 항상 변화하는 세상을 예측하고 미래를 알기 위해 노력한다. 정확한 예측만이 생존 확률을 높여 주기 때문이다. - P7

관계는 사람 간의 거리를 결정한다. 그리고 사람 간의 거리는 공간의 밀도를 결정한다. 공간의 밀도는 그 공간 내 사회적 관계를 결정한다. - P8

많은 전문가들은 코로나로 인해서 기존의 사회 변화의 방향이 바뀌는 것이 아니라 지난 수십년간 진행돼 오던 변화의 방향과 같은 방향으로 가속도가 붙을 거라고 보고 있다. 기존 변화의 방향이라는 것은 비대면화, 개인화, 파편화, 디지털화를 말한다. - P11

우리가 보는 많은 권력은 공간이 만드는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서 만들어진다. 일반적으로 시선이 모이는 곳에 위치한 사람은 권력을 가진다. - P13

시간적 공간적 제약은 쉽게 벗어 버릴 수 없다. 이 시공간적 제약이 곧 사회 시스템이다. 공간이 만드는 사회 시스템이 주는 제약은 보이지 않게 사람을 조종한다. 이때 공간이 만드는 권력의 크기는 모이는 사람의 숫자와 비례한다. 더 많은 사람이 모여 있는 곳에는 공간에 의해서 더 큰 권력이 만들어진다. - P14

사람에게 시간적, 공간적으로 자유를 많이 줄수록 관리자의 권력은 줄어든다. - P14

미디어에서 권력의 이동은 광고 수익을 누가 더 많이 차지하느냐로 명확하게 판명 났다. - P15

공간 구조가 바뀌면 권력의 구조가 바뀐다. 우리는 향후 몇 년간 급속도로 바뀌는 권력 구조의 재편을 보게 될 것이다. - P15

명확한 목표를 가지고 그에 맞게 공간 구조를 새롭게 구성하는 디자인을 할 필요가 있다. - P15

어렴풋이나마 미래에 대한 그림을 상상해보고 그런 세상이 되기 위해서 어떤 공간 구조를 만들어야 할지 준비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 P15

"공간 디자인이 바뀌면 사회가 바뀐다." - P15

침대는 공간적으로 하루 8시간만 사용하지만 자리는 24시간 차지하는 장치다. 침대는 공간을 낭비하는 ‘공간적 사치‘다. 평당 2천만 원짜리 집에 산다면 침대 하나당 4천만 원을 쓰고 있는 셈이다. - P26

서양에서 침대를 사용한 이유는 난방 시스템이 ‘온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온돌 난방을 하는 우리나라 집의 가장 따뜻한 곳은 방바닥이다. 추운 겨울에는 이불을 깔고 방바닥에 가깝게 잠을 자야한다. 온돌이 없는 서양의 경우에는 반대로 바닥은 춥고 위로 올라갈수록 따뜻하다. 더운 공기가 위로 올라가고 차가운 공기는 아래로 내려가기 때문이다. 그러니 밤에 춥게 자지 않으려면 바닥에서 올라간 높은 침대를 써야 했다. 그래서 과거의 침대는 지금보다 훨씬 높았다. 이러한 서양의 침대 문화가 우리나라에 들어오면서 방이 좁아졌다. - P26

발코니 확장을 통해서 얻은 공간이 있었기에 물건을 더 살 수 있게 됐다. 발코니 확장은 우리나라의 소비를 확대시켰고 결과적으로 제조업을 활성화시킨 ‘공간적 촉매제‘가 되었다. 소유할 제품이 늘어나면 소유한 실내 공간의 크기를 키워야 하고, 공간의 크기를 키우면 다시 소유물을 늘리는 순환 고리가 된다. 우리는 풍요로워졌지만, 동시에 공간과 물건을 키우고 늘리기 위해서 피곤하게 살아왔다. - P27

1~2인 가구 집의 경우에는 굳이 소파와 침대를 분리해서 다른 장소에 둘 필요가 없다. 거실과 침실을 하나로 합치고, 소파와 침대를 하나로 합치면 더 넓은 방을 갖게 된다. - P32

기능에 따라 공간과 가구를 나누는 것은 근대적 사고방식의 산물이다. 현대 사회는 기능에 따라 물건이 나누어지기보다는 합쳐지는 추세다. - P33

한 공간에서 여러 사람이 다양한 행동을 할 수 있는 기술적 해결책이 만들어졌다. 소비와 행동의 개인화와 기술적인 발전은 공간의 의미를 바꾸고 있다. 이러한 경향에 맞추어서 가구들의 통폐합 혹은 융합이 되어 새로운 가구가 나오는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다. 처음에는 가구에서 시작해서 나중에는 건축 평면상 방의 구획이 바뀌는 방향으로 가게 될 것이다. - P33

소득 수준이 높아지면 처음에는 듣는 것에 민감해지고, 더 잘살게 되면 냄새에 민감해진다. - P34

건폐율 : 대지 면적에 대한 건축 면적의 비율 - P361

용적률 : 건축물 총 면적의 대지 면적에 대한 백분율.
즉, (건축물 바닥 면적의 합계/대지 면적) x 100 - P361

우리나라에서는 채광을 위해 아파트 동과 동 사이의 거리를 띄우는 법규가 엄격하다. - P36

현재 우리나라 법규에서 실내 면적으로 계산하지 않는 발코니의 폭은 1.5미터다. 오래전에 지어진 아파트의 경우에는 벽 두께와 난간을 빼고 나면 1.2미터 남짓된다.  - P37

OMA가 설계한 싱가포르의 ‘인터레이스 Interlace‘도 독특한 형태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아파트가 우리나라에 지어지지 못하는 이유는 하나다. 현재 건축 법규를 따른 상태에서 이러한 건축물을 지으려면 너무 많은 건폐율과 용적률 손해가 나서 사업성이 없기 때문이다. - P40

건축 법규라는 것은 양질의 주거를 만들기 위해서 만들어진 법이다. 그런데 그 법규 때문에 좋고, 필요한 디자인이 만들어지지 않는다면 그 법은 바뀌어야 한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맞는 아파트를 설계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법의 철폐와 개정이 필요하다. - P40

테라스 같은 발코니가 있는 아파트의 원조는 이스라엘 태생 건축가 모쉐 사프디가 설계해 1967년에 캐나다에 지어진 ‘해비타트 67‘이다. 이 건물은 공장에서 제작한 콘크리트 패널들을 현장으로 옮겨서 조립해 만든 아파트다. 추운 겨울에 공사하기 힘든 캐나다의 실정에 맞는 방식이었다. - P40

좁은 아파트에 여러 명의 가족이 살게 하려면 방을 나누는 벽이 필요한데, 그 벽을 구조체로 사용하면 실내 면적을 최대한 사용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집합 주거는 대부분 벽식 구조로 되어 있다. - P46

벽식 구조의 문제점은 크게 두 가지다. 첫 번째는 층간 소음이다. 해외의 경우 층간 소음이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데, 그 이유는 아파트에 카펫을 깔거나 신발을 신고 다녀서다. 우리나라는 신을 벗고 생활을 하는데다가 바닥이 딱딱한 온돌로 되어 있어서 충격으로 인한 진동에너지의 전달이 쉽다. - P46

초등학교 자연 시간에 배운 이야기를 해 보자. 소리를 만드는 진동은 기체보다는 액체, 액체보다는 고체에서 더 빠르고 강하게 전달된다. 걸을 때의 충격은 온돌 바닥에 전달되고 그 진동은 고스란히 벽으로 전달된다. 층간 소음의 문제를 줄이려면 벽식구조보다 기둥식 구조가 적합하다. - P46

벽식 구조의 더 큰 문제점은 변화하는 공간의 수요에 맞춰 적절하게 변형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벽을 부수는 순간 집이 무너지기 때문이다. - P46

만약에 우리나라 아파트가 기둥식 구조로 지어졌다면 변화된 주거 수요에 맞춰 적절하게 변형시켜 대응할 수 있었을 것이다. - P47

사실 가장 친환경적인 건축물은 태양광 발전 장치가 많거나 친환경 건축 자재로 지어진 건축물이 아닌, 기둥식 구조로 만들어진 건축물이다. 이 건물들은 시대가 바뀌어도 살아남을 수 있고, 신축을 안 해도 된다. 신축을 안 해도 되면 콘크리트나 철의 소비를 줄일 수 있다. 이는 곧 콘크리트나 철을 생산하는 과정 중에 엄청나게 많이 배출되는 이산화탄소의 양을 줄인다는 것을 의미한다. - P47

건축에서 가장 큰 변화는 건축 재료의 변화에서 시작한다. 과거 동양 건축과 서양 건축의 가장 큰 차이점도 재료에서 왔다. - P49

목구조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진다. 경량 목구조와 중 목구조다. 경량목구조는 각목으로 지은 집으로, 미국 교외 지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2층 주택들이다. 중 목구조는 한옥 같은 구조다. 굵은 나무 기둥과 보를 이용해서 지은 목구조 건축이다. - P50

현대 건축 재료 기술은 본드로 나무를 겹겹이 붙여서 기존 목재보다 더 강한 목재를 만들고 있다. - P50

목구조는 네 가지 측면에서 친환경적이다. 첫째, 목구조는 기둥식 구조이기 때문에 시간이 흘러도 다른 용도로 변형하면서 오랫동안 사용 가능해 친환경적이다. - P53

둘째, 나무로 만든 건축물은 부분적인 보수를 통해서 오랫동안 사용 가능하다. 부석사 ‘무량수전‘ 같은 목조 건축물이 7백 년 가까이 오랫동안 유지되는 이유는 나무는 썩거나 부서지면 부분적으로만 보수 교체해서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부분적으로 보수가 쉬운 목조 건축은 오랫동안 사용할 수 있는 친환경 건축이다. - P53

셋째, 목재로 건축하면 시멘트나 강철을 생산할 때 만들어지는 엄청난 양의 탄소 배출을 하지 않기에 친환경적이다. - P53

넷째, 나무가 자라면서 공기 중의 탄소를 흡수하고 이후 건축 재료로 쓰이면서 탄소를 보관하기 때문에 친환경적이다. - P53

나무는 기본적으로 이산화탄소를 흡수하고 산소를 배출하는 광합성을 하면서 자란다. 이 과정에서 나무는 탄소를 자신의 몸 안에 흡수해서 저장한다. 나무는 몸 안에 탄소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태워서 불을 낼 수 있는 것이다. - P53

문제는 나무가 불에 타거나 썩으면 다시 공기 중으로 탄소를 배출한다. 이를 방지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나무를 건축 재료로 사용해서 썩지않게 만드는 것이다. 나무를 키워서 건축 재료로 사용하는 것은 탄소배출을 줄이는 소극적 자세가 아닌, 문제의 원인이 되는 대기 중의 탄소를 없애는 일이다. 이만큼 적극적인 친환경 건축은 없다. - P53

종교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다. 그래서 예로부터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믿게 하기 위해 눈에 보이는 공간을 많이 이용했다. - P59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믿게 만드는 가장 좋은 방법은 공간으로 체험하게 하는 것이다. - P60

횃불, 스테인드글라스, VR같이 어느 시대나 당대 최첨단 기술은 상상을 공간화시키는 데 사용되었다. 이 모두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믿게 하기 위한 노력의 산물이다. - P60

인류는 커진 집단의 규모 덕분에 더 많은 돌과 벽돌을 옮겨서 더 높게 쌓은 거대한 돌무더기의 건축물을 만들 수 있게 되었다. 건축을 통해서 새롭게 종교 권력을 만드는 방식은 ‘높이‘였다. - P65

내가 만든 ‘공간과 권력의 제1원칙‘은 "같은 시간에, 같은 장소에, 사람을 모아서, 한 방향을 바라보게 하면 그 시선이 모이는 곳에 권력이 창출된다"는 것이다. - P68

일반적으로 높은 곳은 좁고, 낮은 곳은 넓다. 중력에 대항해서 안정성을 갖기 위해서다. 그래서 산의 아래는 면적이 넓고 정상은 좁은 것이다. 당연히 높은 곳에 올라가서 차지하는 사람은 소수고 이들은 수많은 사람의 우러러 보는 시선을 받게 되며 소수의 권력자가 된다. - P68

마치 아무것도 없던 우주 공간에 태양이 생겨나면서 중력장이 생기고 주변으로 행성이 회전하듯, 높이 만들어진 지구라트 건축물은 주변에 권력의 중력장을 만든다. - P68

종교는 건축 공간을 만들고, 그 공간으로 사람의 마음을 하나로 모으고, 그 공간에서 시선이 집중된 곳에 선 사람은 권력을 가진 종교 지도자가 된다. 그 공간에서의 모임이 잦을수록, 그 모임의 규모가 커질수록 권력은 커진다. - P69

기존의 종교 형태는 제사의 형식이었다. 동물을 죽여서 그 피를 흘리고 고기를 태워서 연기가 위로 올라가게 하는 예식을 치르는 것이 종교의 주 행사였다. 당시 신이 존재한다고 믿었던 하늘에 인간이 만든 것 중에서 중력을 거슬러서 올라갈 수 있는 것은 연기밖에 없었다. 그래서 고기 기름을 태우면서 만들어지는 연기를 하늘로 올려 보내는 것이 제사가 되었을 것이다. - P69

과거의 제사 중심의 종교를 제사가 없는 종교로 바꾼 혁명적인 종교가 기독교다. 기독교는 예수가 자신의 몸을 십자가에 못 박혀서피 흘려 죽음으로써 스스로가 제물이 되었고 우리는 덕분에 더 이상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다고 가르친다. 예수 자체가 죄 값을 대신한 희생양이 된 것이다. 그래서 이후의 예배는 설교 말씀을 듣는 행위로 바뀐다. 이는 종교 건축의 큰 변화를 가져왔다. - P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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