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메라를 끄고 씁니다 - 가족을 기록하는 다큐멘터리 영화감독의 특별한 삶
양영희 지음, 인예니 옮김 / 마음산책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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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게 된 계기가 있다. 영화 쪽에 관심이 있거나 종사자라면 '양영희 감독'을 잘 알 것이다. 하지만 나는 단 한편도 관람하지 않았다. 최근 가족 다큐멘터리 3부작의 끝 <수프와 이데올로기>가 개봉했지만 관람하지 않았다. 개봉쯤 아는 기자분이 양영희 감독 인터뷰 후기를 들러주었다. 그때 솔깃했다. 선입견이란 무척 힘이 세다는 것을.

<디어 평양>, <굿바이, 평양>, <수프와 이데올로기>, 그리고 극영화 <가족의 나라> 그 어느 것도 보지 않았다. 오직 그 기자님의 인터뷰 후기를 듣고 호기심이 발동했다. 차일피일 미루다가 영화를 보기 전 에세이 《카메라를 끄고 씁니다》를 단숨에 읽었다. 가족 이야기에 오랜만에 눈물 콧물 다 빼면서 펑펑 울었던 게 오랜만이다.

앉은 자리에서 오랜만에 완독한 영화였고, 후반부로 갈수록 거의 눈물이 앞을 가려 글씨를 읽을 수 없을 정도로 울기 시작했다. 대한민국의 아픈 역사 70여 년이 이 가족의 역사와 맞닿아 있었던 거다. 근현대의 비극이 가족에게 미친 영향력을 훑어본다.

왜 선입견이 생겼는지 생각해 봤다. 이유는 북한, 재일코리안이 낯설기도 했고 잘 알려지지 않은 소재 때문이었다. 대학생 때부터 이와 관련된 영화나 강의를 들어왔는데 지금은 일 때문에 많이 놓아 버렸다. 복잡하고 마음아픈 정치적 이념의 사람들이 20대 초반에는 알고 싶지 않았을 거다.


영화가 가족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만 살짝 들었던 때 일이 바쁘거나, 재미있는 영화에 치여 늘 뒷전으로 밀리지 않았나 생각했다. 하지만 잘 되었다. 지금에서라도 양영희 감독의 에세이를 읽고 영화를 연달아 볼 이유가 생겼다. 어떤 사람은 가족의 고통을 우리고 우려서 팔아 먹는다고 말하지만 양영희 감독의 가족사는 한국, 북한, 일본의 역사로서 가치가 크다.

가족이란 무엇일까? 양영희 감독은 피를 나눈 가족 때문에 애틋했고, 행복했지만 동시에 고통스러웠고 힘들었다. 조총련 간부였던 아버지와 헌신적으로 보필하는 어머니. 세 오빠를 북송 사업으로 보내고 말도 없는 슬픔과 짐을 지게 된 부모님. 양영희 감독은 어린 나이에 부모님이 결정해 준 짝과 결혼 후 곧 이혼하게 된다. 이후 유학도 가고 한국 국적을 얻었다.

가족 중 유일하게 자유를 만끽하면서도 늘 미안하고 힘들었을 마음이 예상된다. 영화를 만들고는 북한에 가끔 들어가 친지들을 만나는 일도 금지당했다. 이후 팬이라며 콘서트 티켓으로 유혹(?)한 지금의 일본인 남편을 만나기까지. 재미있기도 해서 울다 웃다 난리났었다.

어머니가 일본인 사위(아라이 카오루)에게 정성스럽게 백숙(수프)을 만들어주는 모습은 어떤 정치적 이념(이데올로기)도 필요치 않은 사랑이었다. 디아스포라, 조총련, 재일코리안 등 '파친코'의 이야기와도 맞닿아 있다. 이념 앞에 음식은 누구라도 무장해제하는 큰 무기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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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봄에는 할 일이 참 많습니다 - 101세 화가 모지스 할머니의 말
애나 메리 로버트슨 모지스 지음, 류승경 편역 / 수오서재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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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지스 할머니의 그림을 한 번쯤 봤을 거다. 인생은 70부터라는 말에 딱 어울리는 어르신. 삶은 살아봐야 알고 무엇이 될지는 죽을 때까지 고민해야 되는 것 같다.


1860년 태어나 남편을 만나 아이 10명을 낳고 다섯 만 남아 키웠다. 70대 중반에 관절염으로 자수를 놓지 못하자 붓을 들고 그림을 그렸다. 따뜻한 그림은 한 수집가에 의해 알려졌고, 우리가 모지스 할머니를 알게 된 이유가 되어버렸다.


88세에 올해의 젊은 여성으로 선정 93세에 《타임》 표지 장식, 100세는 모지스 할머니 날로 지정받는다. 101세의 나이로 천수를 누리며 1,600여 점의 작품을 남긴 다작왕이다.


책은 인터뷰와 자필 편지, 구술기록을 모아 완성했다. "내가 말이야1세기를 살아보니 이렇더라"라는 후기 혹은 격언집 같기도 하다. 부담없이 읽기 좋고 어디를 펴도 삶과 연결되는 매력이 있다.


나이듦과 죽음, 일상과 삶, 그리는 일, 세계와 자연에 대해 담고 있다. 어르신의 연륜을 듣는 것만으로 위로와 지혜를 얻은 것 같아 마음이 든든했다. 100년이 고스란히 관통한 할머니의 노동과 그림에서 인류의 한 페이지를 습득해 보는 귀한 시간이었다.


인류는 3년간 코로나와 연이은 우크라이나 전쟁까지 겪으며 어느 때보다 정신없고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다. 모지스 할머니도 1, 2차 세계대전을 겪어 온 분이다. 생존과 꿈, 예술까지 섭렵한 버라이어티했던 일생을 오롯이 이해하긴 힘들겠지만. 책과 작품으로 간접경험하며 힘들었던 오늘을 일어설 기회로 삼아보는 건 어떤지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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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랑의 달
나기라 유 지음, 정수윤 옮김 / 은행나무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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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후미의 관계를 표현할 적당한 말, 세상이 납득할 말은 없다.

 

거꾸로 같이 있어서는 안되는 이유는 산더미처럼 많다.

 

우리가 이상한 걸까.

 

그 판단은, 부디 우리 말고 다른 사람들이 하기 바란다.

 

우리는, 이미 거기 없으니.

 

P 356

 

 

 

얼마 전 영화 <유랑의 달>을 보고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일본은 상상이상의 소재의 이야기가 많다. 결핍이 있는 두 사람이 함께하는 이야기를 이런 소재로 풀어낸 걸까. 한국과는 다르게 아직도 아날로그적인 것을 추구하는 일본. 책도 많이 읽는 민족이다. 매년 서점 직원들이 꼽는 책이 있는데 이 책도 그중 하나였다. 2020년 서점 직원이 꼭 읽어 보라고 강력 추천했던 찐후기의 숨겨진 보물이란 뜻이다. 서로의 결핍을 발견하고 포근히 안아 주는 형용할 수 없는 관계, 좀 다른 이야기를 원한다면 읽어보라고 말하고 싶다.

 

 

겉으로 보이는 게 다가 아님을 말하고 있으면서도 굉장한 비밀을 품은 슬픈 이야기였다. 세상의 편견에서 서로를 발견하고 구원하고 자아를 되찾는 모습을 그린다. 151분이란 러닝타임 동안 잔잔하게 흘러가지만 두 사람을 오롯이 지켜보게 만드는 마력이 있었다. 사랑, 의지, 신뢰, 우정, 유대 등 어떤 단어로도 환산할 수 없는 사라사와 후미의 관계를 다룬다. 데이트 폭력, 디지털 타투 등 무거운 소재를 따뜻한 문체로 사로잡고 있다.

 

 

후미와 사라사는 모두 사랑에 굶주렸고, 대안 가족이 되어간다. 사랑의 형태는 다양하고 누군가를 어떠한 잣대로 재단할 수 없다는 걸 이 작품으로 배웠다. 정신적인 교감이 이런 걸까. 육체적인 스킨십이 없다고 해도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플라토닉 사랑 혹은 가족의 새로운 모습을 <유랑의 달>에서 찾아볼 수 있다.

 

 

원작 소설과 영화 무엇이 다를까?

 

 

사람들은 19살과 9살 남녀 만남으로 색안경을 끼고 봤다. 로리콘(로리타), 스톡홀름 콤플렉스로 치부해 버렸지만. 둘이 세상에 전하지 않은 말이 있었다. 방송, 유튜브, 언론에서 떠드는 정보가 진짜가 아님을 둘만 알면 된 거다. 세상이 뭐라고 떠들던 떳떳하면 된 거다. 누가 뭐라고 떠들든 외로움에 지쳤던 둘은 떨어지지 않을 것을 약속한다.

 

 

이상일 감독이 <분노> 이후 히로세 스즈와 원작 소설을 바탕으로 한 번 더 호흡을 맞춘 작품이다. 할리우드에 진출한 홍경표 촬영 감독과 작업해 빼어난 미장센을 자랑한다. 구름과 햇살, 바람을 화면에 담은 흔들리는 커튼의 나른함과 포근함이 스크린을 뚫고 전해진다. 아름다운 영상이 빼어나다. 극장에서 봐야 오롯이 전달받을 수 있는데 아쉽게도 금방 내려갔다. 오늘부터 왓챠에서 스트리밍되니 관심 있다면 찾아보는 걸 추천한다.

 

 

더할 나위 없이 절실하게 필요로 한다 해도,

 

나는 후미와 키스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고,

 

하물며 자고 싶다는 생각은 절대로 들지 않는다.

 

후미와는 그저 함께 있고 싶을 뿐이다.

 

그런 기분에 붙일 수 있는 이름이 떠오르지 않는다.

 

P294

 

 

 

'나기라 유'의 소설 유랑의 달은 영화에서 상징적으로 풀어낸 장면이 소상하게 나와있다. 사라사(히로세 스즈)와 후미(마츠자카 토리)의 전사(캐릭터 역사)를 좀 더 알고 싶어 단숨에 읽어버렸다. 결말도 영화는 둘의 상황을 보여주지 않지만, 소설은 잠시 맡아주었던 리카도 성장해 셋이 연락을 주고받는 시간까지 보여준다. 들키면 숨어버리고 떠나버리는 삶을 반복하지만 서로가 있어 안심인 사이가 되어 안온함을 느낀다.

 

 

차고 기우는 달의 속성과 닮은 둘. 어디라도 유유히 흘러 다니는 둘의 관계를 좀 더 내밀하게 들여다볼 수 있다. 사라사는 calico의 일본어다. 훗날 카페를 운영하는 후미의 가게 이름이 된다. '사라사' 포르투갈어에서 기원한 무늬 염색 직물을 말한다. 발음이 너무 예쁘고 히로세 스즈와 잘 어울렸다.

 

 

특히 가장 충격적인 장면이라 할 수 있는 후미의 나체 신은 소설에서 등장하지 않는다. (생각지도 못한 장면이라 극장에서 혼자 대관했는데 너무 놀랐다) 절제된 문체로 서술할 뿐이다. 그저 2차 성장이 나타나지 않고 병약하게 자라는 물푸레나무에 여러 차례 비교한다.

 

 

결핍으로 고립된 두 사람

 

 

회사를 경영하는 아버지와 교육과 복지에 열심이던 어머니, 공부도 놀기도 잘하는 형과 남부럽지 않은 가정의 아들이었다. 육아서에 나온 대로 올바른 것만 먹고 입히던 어머니. 남들 눈의 의식했던 바른 며느리는 시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집을 리모델링을 했다. 마당에 물푸레나무를 심었다. 하지만 힘 없이 제대로 크지 않자 틀려먹었다며 뽑아 버렸다.

 

 

후미는 그 물푸레나무가 자신이라며 평생을 움츠러들며 살게 된다. 시들하고 희미하게 살면 제거 당해야 맞는 걸까. 그때 받았던 충격은 몸이 자라지 않는 후미에게 큰 트라우마를 안겼다. 부모의 사랑을 제대로 받지 못했고, 성인 여성에게 사랑의 감정이나 욕정이 느껴지지 않았다. 남들 앞에서 옷을 벗을 수 없어 항상 숨어들었다. 어린 여자아이들과 함께 있을 땐 오히려 편했다. 자신을 편견 없이 봐주었고 귀엽기도 했으니까. 신체적 결함을 부모에게도 말할 수 없어 감추고 다녔던 후미. 자신이 남들과 완전히 다름을 사라사를 만나고 확신하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놀이터에서 독서하고 있던 사라사를 만나 집에 데려온다. 사라사는 후미와 정반대 성격의 아이였다. 활달하고 규칙 없이 자유로운 모습에 후미도 고무되어 갔다. 사라사는 부모와 영화 <트루 로맨스>를 보고, 때로는 낮술을 마시는 자유분방한 집에서 컸다. 이모는 이런 엄마를 늘 걱정했는데 아빠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둘은 사라사 앞에서 늘 키스했고 사랑을 표현했다. 위화감 없이 사라사도 행복하게 지냈지만, 아빠의 죽음 이후 모든 게 달라졌다 엄마는 사라사를 이모 집에 맡기고 떠나 버렸다.

 

 

사라사는 이모 집에서 사촌의 추행에 잠 못 이루는 힘든 삶을 살게 된다. 밤마다 문을 열고 들어와 몸을 더듬는 추태에 가출하고 싶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엄마 아빠와 행복하던 때가 그립다. 그러던 중 비 오는 날 후미를 만났고, 무해한 어른과 며칠을 보내며 행복감을 맞이하게 된다. 밥을 먹지 않고 아이스크림을 먹어도 되고, 자고 싶은 만큼 늦게까지 자도 괜찮았다. 그가 로리타라는 소문을 들었지만. 사라사는 돌아가고 싶지 않았고 후미는 등 떠밀어 보내지 않았다.

 

 

세상은 둘 사이를 순수하게 봐주지 않았다. 온라인에 제멋대로 가십의 소재로 전락하고, 후미는 15년을 작은방에서 갇혀 지내게 된다. 두 사람은 15년 만에 만났고 서로를 그리워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어른이 된 사라사는 지금보다 더 많은 규칙을 지키며 살아가야 했다. 아이스크림을 마구 먹던 시절 사라사는 이제 더 이상 밥 대신 아이스크림을 먹지 않는다. 뭐라고 할 어른이 있지 않은데도 말이다. 남자친구의 강압적인 태도에 불만이 쌓이지만 쉽게 절연할 수 없어 질질 끌려다녔다. 이후 수위가 높아지는 데이트 폭력을 겪다가 후미에게도 도망치게 된다.

 

 

책을 읽다가 소설에서 등장하는 토니 스콧의 <트루 로맨스>가 너무 궁금했다. '타란티노 로맨스'라는 부제가 붙을 정도로 잔인하고 폭력적인가 보다. 해피엔드 결말을 주장한 감독과 언해피를 주장한 각본가가 치열했다고 소설에 나온다. 두 종류의 엔딩을 찍었다고 한다. 언해피판은 디렉터판 특별 영상으로 담겼다고 하니 몹시 궁금해졌다. 이번 주말에 꼭 봐야지 하고 다짐했다. 그리고 아이스크림을 먹을 때마다 생각날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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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재가 노래하는 곳 (리커버 에디션)
델리아 오언스 지음, 김선형 옮김 / 살림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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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가재가 노래하는 곳》은 2018년 야생동물 연구가이자 과학자인 일흔 가까운 할머니 '델리아 오언스'가 펴낸 소설이다. 평생 야생을 연구해와서일까. 미국 남부 노스캐롤라이나주 아우터뱅크스의 해안 습지를 배경으로 소녀 '카야'를 창조했다. 아름답고 가냘픈 모습을 한 보호해야 할 것 같은 소녀의 외형 속에는 강인한 생명력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카야를 상징하는 단어는 '고립', '외로움', '자립' 일것이다.


할머니 감성으로 썼다라고는 느낄 수 없는 소녀 감성이다. 습지에 사는 다양한 생물에 대한 짧은 지식을 습득할 수 있다. 부모의 보호와 보살핌이 절실한 7살 아이가 혼자 습지 오두막에서 생존해야 했던 야생의 삶이 녹아들어 있다.


버려진 소녀의 성장


전쟁의 상흔을 안고 돌아와 가정 폭력을 일삼는 아빠. 이를 견디다 못해 엄마는 집을 나갔고 차례로 언니 둘과 바로 위 오빠도 도망쳤다. 아빠와 단 둘만 남겨진 카야는 무서웠지만 다정한 시간을 보냈고 차차 적응하며 자라났다.


하지만 아빠 마져도 딸을 버리고 떠나고, 혼자가 된 카야는 스스로를 지켜야만 했다. 부모, 형제도 없이 습지에서 지금껏 혼자 살아온 여자 아이, 늪지 쓰레기, 버림받은 아이, 단 하루 학교를 다녔던 아이 등. 지역사회는 카야를 품어주지 않는다. 몇 차례 학교 입학과 습지 개발을 위해 땅 소유주를 물으러 온 것 말고는 소꼽친구 테이트와 나쁜남자 체이스가 드나들었을 뿐이다.


로맨스 소설인 줄 알았는데..


소설은 멀티 장르를 표방한다. 성장, 사랑, 서스펜스, 스릴, 치정 드라마, 자연 다큐멘터리, 법정물 등. 두 시점이 교차되지만 정신 없거나 어렵지 않은 타임라인이다. 무지했고 순수했던 시절 만난 테이트에게 글을 배우고 책으로 공부하며 세상과 소통했다.

둘은 습지 생물을 관찰하는 취미가 같았다. 카야에게 테이트는 친구 이상이었다. 가족, 선생님, 어쩌면 연인으로 생각할 법한 삶의 모든 것이었다. 세상과 연결해준 건 테이트였지만 야생에서 모든 것을 배워나갔다. 가끔 먹을 것과 연료, 따뜻한 정을 품어주는 몇몇 주민도 작은 도움을 내어 준다.


하지만 대학 입학을 위해 테이트가 떠나자. 또 다시 버림 받았다는 절망감은 카야의 마음에 단두질 해댔다. 이후 이 동네의 인기남 체이스와 강렬한 사랑에 빠져 몸도 마음도 다 내어주었다. 별도 달도 다 따줄 것처럼 행동했던 체이스는 시간이 지나자 거짓말을 늘어 놓기 시작했고, 따른 여자와 결혼했음에도 카야를 향한 집착을 놓지 못한다. 이로 인한 다툼과 폭력, 그리고 이후에 일어난 일까지. 소설은 파란만장 했던 여성의 성장과 자립에 미스터리한 사건을 끼워 재미를 더했다.


끝까지. 이 아름다운 여성이 정말로 사람을 죽였을지 끈을 놓지 않고 읽게하는 페이지터너다. 결과를 알게 되는 마지막 부분에 다다랐을 때, 전율과 충격은 짜릿한 반전으로 즐거움을 안긴다. 무엇보다, 도시도 아닌 야생에서 여성 혼자 자립할 수 있다는 꿈을 현실로 보여준다.




곤충 암컷은 짝직기 상대인 수컷을 잡아먹고, 과도한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포유류 어미는 새끼를 버리며, 많은 수컷이 경쟁자보다 더 잘 파정하기 위해 위태롭고 아슬아슬한 방법들을 고안해낸다. 생명의 시계가 똑딱똑딱 돌아가는 한, 천박하건 무례하건 아무 상관없다. 카야는 이것이 자연의 어두운 면이 아니라 그저 모든 위험요소에 맞서 살아남으려는 창의적인 방법이라는 걸 알았다. 인간이라면 물론 그보다는 훌륭하게 행동해야겠지만 말이다.

p229




관찰하는 습관과 천부적인 그림 실력이 만나 삽화가로 성공한다. 출판을 통해 인세를 받으며 먹고살아갈 방법은 만든다. 훗날 저명한 생태학자이자 삽화가, 시인이 되어 전 세계 소녀들의 롤모델로 생을 마감한다. 물론 '살인'이라는 윤리적인 판단을 유보해야하지만. 자연에서 교미 후 상대방을 잡아 먹는 일은 생존 본능에 따른 자연스러운 일일 뿐이다.


반딧불

그를 꼬드겨내는 건

밸런타인의 불빛을 깜박이듯 쉬웠지

하지만 숙녀 반딧불처럼

그 불빛들에는 죽음의 은밀한 부름이 담겨 있네

마지막 터치,

끝이 아니야

마지막 발자국, 덫

아래로, 아래로 추작하네

그 눈이 내 눈을 꼭 붙들다

끝내는 나른 세상을 보지

그 눈이 달라지는 걸 봤어

처음에는 질문

다음에는 해답

마침내 끝

그리고 사랑 그 자체가 스쳐지나

그게 무엇이든 시작하기 전으로 돌아가네

A.H (어맨다 해밀턴=카야= 캐서린 대니얼 클라크)


영화와 소설의 다른점


이 책은 출간 즉시 큰 반응을 이끌어 내지 못했다. 하지만 '헬로 선샤인 북클럽' 운영자 리즈 위더스푼이 북클럽 추천작으로 소개하자 '뉴욕 타임스' 베스트셀러 순위 9위로 등장하게 된다. 이후 스테디셀러가 되었고 내침긴에 리즈 위더스푼은 제작에도 참여 했다. [노멀 피플]로 MZ세대 반향을 일으킨 '데이지 에드가 존스'가 마시 걸 카야를 맡았다. 영화를 먼저 본 후 이미지에 매료되어 딱딱한 활자를 깊게 읽어보고 싶었던 나는 원작 소설을 찾아 읽었다.


영화는 소설을 거의 그대로 영상으로 옮겨 왔다. 전 남자친구 체이스(해리스 딕킨슨)를 죽인 일급용의자가 된 카야(데이지 에드가 존스)가 재판을 받기까지의 시점과 어린 시절 가족에게 버려진 7살 꼬마가 오빠 친구였던 테이트(테일러 존 스미스)와 첫사랑을 이루는 시점이 교차된다.


그밖에 카야를 도와 주거나 해친 인물을 빼거나 합쳤고, 습지 생태계를 탐구하는 과정이 영화에서는 축약되었을 뿐이다. 결말까지 똑같았지만 빠져들 수 밖에 없는 탄탄하고 스릴넘치는 이야기가 원작까지 읽어보길 추천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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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이라는 혼란 - 인생의 망망대해에서 표류하는 당신을 위해
박경숙 지음 / 와이즈베리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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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에게나 슬럼프는 온다. 무기력과 혼란, 우울을 어떻게 조절하느냐의 문제다. 저자는 원인 중 하나를 '엔트로피 증가 법칙'이라고 설명한다. 과학자다운 발상이다. 뜨거운 물이 식고, 태어나고 죽는 모든 자연이 열역학 법칙에 의해 돌아가고 인간의 마음에도 영향을 미치는 거다. 프로이트와 융도 마음적 에너지로 엔트로피를 봤다.

 

열역학에서 나온 엔트로피는 '무질서의 정도'를 나타내고 '심리적 엔트로피'로 불린다. 엔트로피는 입자의 배열이나 질서의 정도 같은 물질의 상태 값의 하나다.

 

에너지와 희랍어 트로포스(tropos)의 합성어로 에너지 변화라는 의미를 띤다. 힌두교의 베다 경전에서는 인간 본성을 구나(Guna)라 불렀다. 타마스(무기력, 저항), 라자스(활동에너지), 사트바(기쁨, 평화, 행복)라는 삼덕 트리구나로 불렀다고 한다.

 

엎친 데 덮친 격이다. 할 일이 쌓였는데 엔트로피가 높아지는 이유가 뭘까. 마음의 상태를 나타내는 의식 수준은 일이 많으면 엔트로피 값이 커져 혼란스럽고 복잡해지는 것이다. 집중하면 엔트로피가 감소하고 차분해진다. 질서가 잡히고 유용한 에너지가 많아지는 깨달음의 경지다.

 

그 반대도 힘들다. 극도로 일을 해야만 하는 혼란. 혼란을 만드는 하이퍼그라피아(Hypergraphia)는 일종의 정신질환으로 불린다. 아무것도 못하는 블록과 정반대다. 미친 듯이 다작한 고흐는 매일 16시간씩 그리고 36시간마다 작품 하나를 완성했을 거라고 추정한다. 2년 동안 동생 테오에게 쓴 편지도 200통이 넘는다. 고흐가 뇌전증으로 하이퍼그라피아를 겪었을 거라고 신경의학자들은 말한다. 뇌에 문제가 있었지만 예술행위를 멈추지 못한 사람들을 떠올려 본다면 질서를 주는 일을 당장 시작해야 한다.

 


수많은 천재들이 엔트로피 증가를 견디다 못해 자살로 생을 마감한 사례만 봐도 그렇다. 삶의 엔트로피가 최대치로 차오르면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이 희망을 잃고 무너지고야 만다. 또한 수치심이나 무기력 같은 스트레스가 엔트로피를 증가하고 의식수준은 떨어진다. 높은 자유도가 엔트로피 값을 높인다. 그렇다면 걱정이다. 현대인이야말로 24시간이 모자란 인류 역사상 가장 바쁜 종이기 때문이다.

 

이런 혼란에 빠지기 쉬운 사람들은 특징이 있다. 무언가를 성취했을 때만 만족을 느끼는 경향이 있다. 성취의 상징에만 집착하고 경쟁심도 강하다. 분노를 품고 있거나 한순간 폭발하기도 한다. 맛있는 것을 먹고 쉬는 일상에서도 성공의 흔적을 보여주려 한다. 그래서 끊임없이 나아지려고 움직인다. 그러다 보면 주변에 사람이 없다. 늘 바쁘고 아무것도 버리지 못해 종종거린다. 인격 완성에는 관심이 없고 타인의 삶에도 무관심하다.

 

그렇다면 이런 혼란은 어디서부터 출발할까. 심리학자들은 성격 성형이 유전자, 교육, 양육 배경에 영향을 받는다고 말한다. 어릴 때 부모와 떨어지지 않고 지내는 것, 그렇다고 맞벌이 하지 말라는 건 아니다. 가정에 맞게 다양하게 양육하면 되는 것. 여러 가지 쉽지 않은 문제지만 어릴 때 얼마나 사랑받고 살아갔는냐에 따라 기질은 바뀔 수 있다는 거다.

 


책은 과학자에서 인문학자가 된 저자가 글쓰기를 하지 못한 절망의 순간을 고백하면서 어떻게 도움받았는지 독특한 방식으로 풀어 낸다. 어떨 때는 자기 고백서 같기도 하고, 다양한 과학적 법칙을 내세운 논문 같기도 하며, 정신분석학이나 심리 상담 케이스를 옮겨 놓은 듯 사례집을 보는 것 같다.

 

또한 역사 속 천재의 일화나 개념을 알기 쉽게 풀어내 지식적인 도움도 받아 볼 수 있다. 분명한 것은 뇌와 마음의 혼란 속에서 질서를 찾는 법은 '엔트로피 증가'가 만드는 혼란이며, 이를 길들이고 바로잡기 위해 의식의 자각적 통제, 스스로 어떻게 해야 할지 제시하고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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