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에 나는 응급실로 쏟아져 들어오는 환자의 수치에 집중하며 닥치는 대로 진료했다. 잠깐 만났다가 당일 근무 시간이 끝나면 더는 그들을 볼 일이 없었다. 노련하고 능숙한 의사로 단련되는 게 내 목표였다. 하지만 자신감이 커지면서 매사를 산업적 잣대로 접근하는 데 대한 거부감도 덩달아 커졌다. 의사? 나는 그저 오작동하는 신체 부품을 수선하는 기계공이었다. 결함을 파악해서 후다닥 수선하는 기계공. 우리가 수선한 건 사람이 아니라 장기臟器였다.

"한 가지만 물어볼게요." 내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몇 년 뒤에 두 아들의 모습을 상상해 봐요. 열 살이나 열한 살쯤. 아버지의 존재론적 고뇌에 아이들도 빠질 만한 나이가 됐을 때를 상상해 보세요."

나는 톰이 슬며시 웃는 모습에 힘을 얻어 다시 이야기를 이어 갔다.

"애들이 당신에게, ‘아빠, 어차피 죽을 걸 뻔히 아는 상황에서 우린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거예요?’라고 물으면 뭐라고 대답할 건가요?"

톰이 한참 심사숙고하더니 대답했다. "글쎄요, 아마도 세상이 얼마나 멋진 곳인지 알려 줄 것 같네요. 멋진 세상을 누리는 게 얼마나 즐거운지,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지내는 게 얼마나 행복한지, 일요일에 공원에서 아이들과 축구를 하는 일상의 소소한 즐거움이 얼마나 중요한지… 뭐 그런 걸 알려 주지 않을까요?"

"그게 바로 당신의 답변이에요. 그중에 영원히 지속하기 때문에 소중한 건 하나도 없잖아요. ‘석양이 다 무슨 소용이야? 잠깐 머물다 사라질 건데’라고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잖아요."

톰은 한동안 말없이 앉아 있었다. 그러다 한참 만에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 네, 네.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어요. 도시를 떠나 히피처럼 살라는 말이군요, 그렇죠?"

"아마도." 내가 히죽 웃으며 말했다. "당신이 포르쉐를 얼마나 좋아하는지에 달렸겠죠. 그런데 당신이 아끼는 것들은 결국 일상의 소소한 즐거움 아닌가요? 스쳐 지나가는 찰나의 즐거움 말이에요. 그런 것들이 아름다움이나 가치를 지니기 위해서 왜 영원히 지속돼야 하죠? 난 오히려 그런 게 영원하지 않기 때문에 훨씬 더 좋다고 생각해요. 어쩌면 우리도 그렇고요."

톰은 다음 날 아침 퇴원했다. 흔적도 없이 사라질 운명으로부터 한동안 자신을 지켜 줄 장치를 가슴에 달고 살아서 걸어 나갔다. 우리의 대화가 그에게 도움이 됐는지는 모르겠다. 그래도 내가 그의 두려움을 이해하려고 시도한 덕분에 적어도 그는 담당 의사가 자기에게 마음 쓴다는 건 알지 않았을까.

톰과 이야기하던 중에 문득 어떤 생각이 뇌리를 스쳤는데, 그 당장엔 차마 꺼내지 못했지만 지금 와 생각하면 톰도 일리가 있다고 수긍했을 것 같다. 톰이 급성 심장 마비로 진짜 죽었다고 가정한다면, 그의 삶은 단박에 끝났을 것이다. 그런데 죽음으로써 삶의 덧없음을 보여 주기는커녕 역설적으로 자신의 삶에 의미를 부여했을지도 모른다. 부검을 통해 그의 브루가다 증후군이 밝혀졌을 테고, 그러면 두 아들은 유전자 검사를 받을 것이다. 톰은 인생의 전성기에 목숨을 잃음으로써 두 아들의 생명을 구했을 수도 있다. 유전적 질환이 대부분 그렇듯이, 브루가다 증후군도 자식에게 유전될 가능성이 농후하기 때문이다.

줄리는 방금 론의 병상에서 상실감을 더 이상 이기지 못하고 바닥에 쓰러진 채 흐느꼈던 것이다. 옛날 같으면 의사는 이런 경우에 진정제를 놔 주었다. 하지만 비탄에 잠긴 사람을 둔감하게 하는 벤조디아제핀 주사제는 사실 의사의 불편함을 더는 목적이 더 컸다. 나는 기존의 약물로는 도와줄 게 없는 상황에서 뭔가 실질적으로 도움이 될 만한 방법을 궁리했다. 그러다 불쑥 내 능력 밖의 제안을 하고 말았다.

"줄리, 론에게 작별을 고하고 싶으세요? 내 말은, 그러니까 남편 옆에 눕고 싶으세요?"

흐느낌이 뚝 그쳤다. 줄리는 나를 빤히 쳐다보면서 말을 더듬거렸다.

"그… 그래도 될까요? 그… 그게 가능한 건가요?"

그래도 되는지는 나도 잘 몰랐다. 론은 쿠션이 보강된 침대를 거의 다 차지하고 있었다. 혹시라도 그를 불편하게 할까 봐 걱정되긴 했지만, 일단 간호사들과 힘을 합쳐 무기력해진 그의 몸을 옆으로 살짝 옮겼다. 시간과 요령이 필요한 일이었다. 한참 만에 줄리가 누울 만한 공간이 마련되었다. 줄리는 조심스럽게 남편의 품으로 파고들어 손을 잡고 이마를 쓰다듬었다. 그리고 사랑한다는 말을 주문처럼 속삭이면서 뺨에 와 닿는 가냘픈 그의 숨결을 느꼈다. 나는 입술을 깨물며 눈물을 삼켰다. 사랑하는 부부의 너무도 소중한 마지막 순간을 위해 우리는 조명을 낮추고 조용히 병실을 나왔다.

(…)

그날 내가 취한 행동이 옳거나 적절한지는 모르겠다. 그걸 의술이라고 말할 수 있는지도 모르겠다. 통곡하면서 몸을 일으키는 줄리를 간호사가 얼른 부축해 주었다. 우리는 따끈한 차를 건네고, 안아 주고, 기댈 어깨도 제공했다. 어떤 위로도 줄리의 상실감을 덜어 준 것 같지 않았다. 그런데 몇 주 뒤, 줄리가 선물 바구니를 들고 우리를 찾아왔다. 줄리는 비탄에 잠겨 눈앞이 캄캄할 때 호스피스 의료진이 보여 준 호의와 배려가 얼마나 큰 힘과 위로가 됐는지 모른다고 했다.

병원이라는 공간에 깃든 염려와 연민에도 불구하고, 대학 병원보다 더 삭막한 건축물은 찾아보기 어렵다. 네온 등이 번득이는 각 구역과 기나긴 복도로 이뤄진 병원 건물에서는 오로지 위생과 효율성만 중요하다. 손이 닿는 곳은 전부 소독제로 닦여 있고, 조명은 눈에 거슬릴 만큼 강하고 기능적이다. 병원은 결국 병약자를 위한 대규모 수용 시설에 지나지 않는 것 같다. 실제로, 포드 자동차의 대규모 공장을 여럿 건축한 미국의 유명 건축가 앨버트 칸은 1925년 미시간 대학 병원을 설계할 때 공장 조립 라인의 논리를 적용했다. 효율성과 생산성, 멸균과 청결만을 따졌다. 존엄과 온기가 절실하게 필요한 곳에 공항 탑승구처럼 삭막한 환경을 조성했으니, 사람들이 집에서 눈을 감고 싶어 하는 게 전혀 놀랍지 않다.

어원학적으로 볼 때, 의학은 보이는 모습과 다르다. ‘의사doctor’는 라틴어 도세르docere에서 온 말로 ‘가르치다’라는 뜻이다. 반면 ‘환자patient’는 라틴어 파티엔스patiens에서 온 말로 ‘참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NHS 병원 안팎에서 환자에게 요구하는 인내와 극기는 실로 엄청나다. 가령 응급실에서는 진료 순서가 올 때까지 몇 시간씩 대기해야 하고, 암 치료를 시작하려면 몇 주, 심지어 몇 달을 기다려야 한다. 환자에게 고통을 덜어 주겠다고 해 놓고 오히려 고통을 가중시킨다. 의사가 다가올 때까지 환자는 수술복 차림에 손목 밴드를 차고 초조하게 기다릴 뿐이다. 미력하나마 운명을 스스로 개척하고 결정하도록 타고난 종種으로서, 이러한 현실은 확실히 참아 내기 어렵다.

미학을 중요하게 여기는 호스피스 병동으로 옮길 때, 나는 마치 반란군에 가입하는 기분을 느꼈다. 호스피스는 업무 내용뿐만 아니라 공간 배치에서도 기존의 의료 패러다임을 무너뜨렸다. 출근 첫날부터 온갖 기대와 가능성으로 가슴이 두근거렸다. 병원에선 왜 아내가 죽어 가는 남편 옆에 누워 따스한 온기를 전할 수 없는 걸까? 남은 시간이 별로 없을 때, 우리는 왜 환자가 배우자와 사랑을 나눌 방법을 먼저 찾아보지 않는 걸까? 그들이 어찌할 줄 몰라 소중한 시간을 허비하는 모습을 왜 그냥 지켜보기만 할까? 사랑하는 아빠를 떠나보내기 전에 함께 영화를 보려고 피자를 사 들고 오는 10대에게 왜 문을 활짝 열어 주지 못할까? 반려동물이 사람보다 더 큰 위로를 줄 수도 있는데, 왜 개나 고양이를 건강에 유해하다고만 할까? 통념에서 가장 벗어난 질문을 한 가지만 덧붙이자면, 완화 의료와 관련 없는 일반 병원 환경에선 왜 이 모든 의문을 아예 제기하지도 않는 걸까? 요컨대, 왜 유아 병동에 입원한 어린아이나 죽음의 문턱에 선 중환자일 때만 진정한 환자 중심의 병원 환경을 누리는 것일가? 고통과 불안에 떠는 모든 환자가 이러한 위로를 받아야 마땅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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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0월 3주 신간 에세이 적바림.

황정은의 <일기>는 10월 2주에 이어 추천이 많았다.

10월 3주 신간 중에서도 뉴페이스인 <모든 것은 기본에서 시작한다>와 <노루인간>은 10월 3주 톱 10에 들었다.

<예술가의 편지>에 이어지는 편지 시리즈 2번째 <작가의 편지>는 제인 오스틴부터 수전 손택까지 대문호 49인의 손글씨를 생생하게 담았다.

또 이웃의 힘을 빌리면, 김혼비의 산문집 <다정소감>은 김초엽의 소설집 <방금 떠나온 세계>와 함께 쌀쌀한 날씨에 어울리는 다정한 책으로 추천 받았다. (미니 님께 감사!)

신간 에세이 구경 조금 더 …



에세이 (15)


1. 모든 것은 기본에서 시작한다 [13.1]

#나는삼류선수였다손흥민아버지의고백
#손흥민키운아버지손웅정의삶철학
#손흥민아버지손웅정의인생드리블
#새책 #울로프팔메외
#모든것은기본에서시작한다손흥민父손웅정에세이출간

2. 일기 日記 [9.1]

#소설가가눌러쓴인사말
#사려깊은문장들씩씩하고다정한산문집
#새책 #일기외
#일기는용기있는하루보냈다는증거

3. 노루인간 [8.7]

#북카페 #리더를위한멘탈수업외
#이미지로여는책 #노루눈빛에사로잡혀숲으로간19세그리고7년저는노루인간입니다
#43마리노루에게배운자연야생에서의7년프랑스판정글북
#신간 #모두를위한의료윤리노루인간함께라서조선소녀들유리천장을깨다

4. 작가의 편지 [7.1]

#책의향기 #랭보는마지막순간절망의편지를썼다
#대문호49인의손편지인간성까지엿보이네
#새책 #울로프팔메외

5. 다정소감 [3.2]

#새책 #봄날의새연外
#사려깊은문장들씩씩하고다정한산문집

6. 당신이 모르는 여행 [3.0]

#여행신간 #여행신간

7. 세리, 인생은 리치하게 [3.0]

#리치언니박세리에세이집인생은리치하게출간

8. 가난해지지 않는 마음 [2.7]

#새책 #봄날의새연外
#신간 #신발스타일의문화사나는괜찮지않아도괜찮아가난해지지않는마음

9. 야생초 마음 [2.3]

#새로나왔어요 #야생초마음外
#10월22일문학새책

10. 하루키가 야구장에 가지 않았더라면 [2.3]

#책꽂이 #상처가될줄몰랐다는말外
#BOOKS #이주의새책10월23일자

11. 밥은 먹고 다니냐는 말 [2.0]

#200자읽기 #먹거리둘러싼사회적관계조망

12. 죄책감 없이 먹는 게 소원이야 [2.0]

#책의향기밑줄긋기 #죄책감없이먹는게소원이야

13. 길은 언제나 내게로 향해 있다 [1.7]

#신간 #사유하는기쁨삶이묻고나우웬이답하다길은언제나내게로향해있다

14. 요즘 언니들의 갱년기 [1.5]

#신간 #두번째글쓰기요즘언니들의갱년기트리스탄과이졸데

15. 크루아상 사러 가는 아침 [1.1]

#새책 #울로프팔메외



주1. [] 안의 숫자는 주간 기준 추천+빈도 누적 점수 (나의 주관적인 기준에 따름)
주2. 읽고 있거나 읽은 책의 리스트가 아님 (향후에 읽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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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짧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달콤하지만, 지극히 불안정한 상태에 있다는 것이다.”

응급실에선 무슨 일이든 벌어질 수 있다. 황당무계한 일, 소름 끼치는 일, 비통한 일이 시시각각 펼쳐진다. 삶이 얼마나 위태로운지, 혹은 우리가 그런 위태로운 삶을 얼마나 당연하게 받아들이는지를 여기보다 거리낌 없이 보여 주는 곳은 없다. 칼에 찔리고 총에 맞고 약에 취하고 개에 물리고 불에 데고 뼈가 부러진 사람들 속에서, 응급실은 변함없이 한 가지 메시지를 전한다. 바로 인생은 짧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달콤하지만, 지극히 불안정한 상태에 있다는 것이다. 아침의 푸른 하늘이 오후의 대참사로 이어질 수 있다. 응급실에 오는 사람이 따로 정해져 있지 않다. 지붕의 홈통을 청소하다 발을 헛딛고 떨어져 등골이 부러진 사람이 당신일 수 있다. 갓돌에 걸려 넘어져 대형 트럭 밑에 깔린 사람이 당신일 수 있다. 나비를 쫓다 차에 쾅 하고 부딪힌 아이의 부모가 당신일 수 있다. 성분 표시 없는 샌드위치 속에 들어간 땅콩을 먹고는 목구멍에 튜브를 꽂고 폐로 공기를 주입받는 사람이 당신일 수 있다. 어느 일요일 오후, 도무지 알 수 없는 이유로 탑승형 잔디 깎는 기계에 치어 한쪽 팔을 비닐봉지에 담아 와서 의사한테 도로 붙여 달라고 애원하는 사람이 당신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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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로 2021-10-28 14:1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밑줄 그어주신 글이 맞다는 것을 제가 압니다. 응급실에서 2번 일을 했었는데 정말 나는 결코 응급실에 올 일이 없다는 것을 장담할 수 없어요. 오늘 남편이 그러는데 남편의 친구인 경찰이 있는데 건강하고 튼튼해 보였는데 내일 심장수술을 한데요. 갑작스럽게 가슴에 통증이 와서 응급실에 갔다가 암은 아니지만 비나인 투머를 발견해서 제거 수술을 한다네요. 이 세상이 정말 아름다워 미칠 지경이지만 그만큼 불안정한 것도 사실이에요. 좋은 인용글 감사해요.^^

오거서 2021-10-28 15: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라로님 반가워요! 댓글도 반갑구요!!
라로님은 의료 현장에서 직접 경험하였을 것 테지요. 갑자기 긴급하게 아프지 않으면야 응급실 가는 일이 없지만 응급 상황이 예고없이 찾아오니까 정말 불안할 수 밖에 없지요.
남편 친구분이라도 놀라셨을 것 같아요. 주위에 아픈 사람이 있다는 얘기를 들으면 남 얘기 같지 않더라구요. 휴… ^^;

서니데이 2021-10-28 22:3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인생은 짧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달콤하지만, 지극히 불안정한 상태에 있다는 것이다.”
- 인용해주신 내용에 동의합니다.
오거서님, 좋은 밤 되세요.^^

오거서 2021-10-29 23:06   좋아요 1 | URL
서니데이님 오늘도 편안한 밤을 맞으시길! ^^
 

환자의 의무 기록지에는 흔히 심폐 소생술CPR을 하지 말라는 DNACPR Do Not Attempt Cardiopulmonary Resuscitation 서류가 빠져 있었다. 의료 팀은 환자나 그 가족에게 심정지나 호흡 정지 상황에서 심폐 소생술을 원하는지 미리 문의해야 하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이 절차를 빼먹곤 한다. 이 서류는 쉽게 눈에 띄도록 보라색이나 진홍색 테두리가 둘러져 있다. 그래야 급박한 상황에서 환자의 의도를 파악하려고 서류철을 뒤지느라 아까운 시간을 낭비하는 경우를 피할 수 있다.

서류가 없을 때는 기본적으로 소생술을 시행해야 한다. CPR 전담 팀이 득달같이 달려와 가슴을 압박하고 심장에 충격을 주고 아드레날린을 주입하는 등 중단된 생명을 되살리기 위해 안간힘을 쏟는다. 소생술은 뼈를 으스러뜨릴 만큼 격렬하다. 의사들은 환자의 부활을 소망하며 생명의 기운이 모두 빠져나간 몸에 맹렬한 공격을 퍼붓는다. 하지만 애초에 헛된 소망일 경우, 즉 나이가 너무 많거나 상태가 너무 악화돼 심장이 다시 뛰어도 사람답게 살기 어려울 경우, 그들이 초래하는 결말은 예외 없이 추하고 잔인하다. 존엄이라곤 찾을 수 없다.

오늘날 자행되는 심폐 소생술, 즉 CPR은 인간의 존엄성을 훼손하는 잔인한 과정이다. 말기 심부전처럼 회복 불가능한 질병으로 죽어 가는 환자들에게는 애초에 시행하면 안 되는 처치였다. 건강한 환자들에게도 흉부 압박과 전기 충격은 흔히 실패로 끝난다. 병원 안에서 심정지에 빠진 사람들 다섯 명 중 한 명만 살아서 병원을 나간다. 병원 밖에서 심정지에 빠진 환자들의 소생 가능성은 훨씬 더 낮아서 열 명 중 한 명만 살아남는다.

물론 생사의 기로에 선 환자에게 CPR은 시도할 가치가 있다. 하지만 심장이 정지된 시간 동안 산소 부족이 장기화되면 환자는 살아나더라도 영구적으로 뇌 손상을 입게 될 위험이 있다. 남은 평생을 정신이 온전치 못한 상태로 살아야 하는 것이다. 나를 비롯한 일부 사람들은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한다.

DNACPR에 관한 논의는 환자에게 CPR을 원하는지 사전에 생각해 볼 기회를 제공한다. 그들의 소망을 의무 기록지에 철해 두면, 환자가 스스로 결정할 능력이 없는 응급 상황에서 임상의들은 바로 조치를 취할 수 있다. 보라색 서류는 죽음의 문턱에서 의사의 예측이 아니라 환자의 소망을 중심에 두는 데 꼭 필요하다. 환자는 결정을 내릴 능력이 있는 한, 사전에 언제든 CPR을 거부할 수 있다.

우드먼 씨는 몹시 쇠약하고 수척했다. 게다가 그와 같은 심장병을 앓는 사람의 통상적인 기대 수명보다 수개월을 더 살았다. 만성 질환에 합병증까지 겹쳤으니, CPR을 시도해 봤자 성공할 가망이 거의 없었다. 혈액 가스 분석이 그 점을 입증해 주었다. 그런데 의료 팀은 왜, 도대체 왜 이 문제를 사전에 그와 논의하지 않았을까? 왜 그가 지옥의 변방에서 고통에 몸부림치며 죽어 가도록 방치했을까? 왜 환자의 머리맡에서 하급 의사가 발을 동동 구르게 했을까? 환자에게 좋은 치료를 제공하고자 하는 본능을 억누르게 하면서 말이다.

그 답을 찾으려면 상당히 껄끄러운 문제, 즉 의사들이 환자의 죽음을 대하는 방식과 태도를 살펴야 한다. 의사들도 죽음에 대한 불안감이 크기 때문에 가능하면 회피하려 든다. 오늘날 사회는 죽음의 문제를 전문가에게 위탁했을지 모르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문가가 반드시 그 일을 기꺼워한다는 뜻은 아니다.

의료진은 흔히 시간과 일손이 부족하다는 핑계로 CPR에 관한 중요한 논의를 회피한다. 물론 열악한 근무 여건은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다. 하지만 속내를 더 깊이 들여다보면 다른 이유가 있다. 바로 의사들도 죽음을 두려워한다는 점이다. 오랜 수련에도 불구하고, 혹은 어쩌면 바로 그 수련 때문에 의사들은 일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죽음에 대해 논의하기를 꺼리고 두려워한다. 상황을 개선하려면, 일단 이러한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그런 이유로, 나는 급박한 상황에서 침착하고 노련하게 환자의 가슴을 압박하면 환자가 눈을 번쩍 뜰 거라는 태평스러우면서도 대단히 부정확한 오해를 품고서 의대에 입학했다. 풋내기 의학도로서 병동을 돌아다니기 시작한 후에도, CPR을 받은 환자들이 실제로 살아서 병원을 나서는 경우가 얼마나 드문지, 또 의학 드라마가 생존 가능성을 얼마나 터무니없게 과장했는지 아무도 알려 주지 않았다. 심지어 드라마에서 CPR을 지나치게 낙관적으로 묘사하여 대중의 인식을 왜곡시키는 이른바 ‘텔레비전 효과’를 증명한 연구 결과도 있었는데, 이런 텔레비전 효과는 비단 일반인뿐 아니라 나 같은 초보 의사들에게서도 나타났음이 분명했다. 나는 TV 드라마의 어느 장면처럼, CPR 상황에서 환자의 생사가 전적으로 의사인 나한테 달려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기술을 숙달하고자 매진하는 과정에서 환자는 안중에 없었다. 심정지 환자가 있을 때마다 나는 CPR 팀의 침착하고 듬직한 리더로 거듭나는 데 급급해서, 맞물린 손바닥 아래에서 억눌리는 사람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더 솔직히 말하자면, CPR 상황이 펼쳐지는 순간 온통 나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CPR을 제대로 하겠다는 데 정신이 팔려 정작 환자는 뒷전으로 밀려났던 것이다.

한편에선 그게 뭐가 나쁘냐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만약 내 가족 가운데 한 사람이 입원 중에 심정지를 일으킨다면, 나는 딱 한 가지만 바랄 것이다. 뛰어난 실력을 갖추고서 눈 하나 깜짝 않고 바로 행동에 돌입하는 CPR 팀. 현장에서 당황하거나 머뭇거리면 사랑하는 내 가족이 살아날 가능성은 줄어든다. 인간적 동정이나 연민 따위는 필요 없다. 심정지 시간이 길어질수록 다시 뛸 가능성이 줄어들기에 무자비할 정도로 냉철한 의사들과 간호사들이 필요하다. 그러니까 병상 옆에 놓인 기계에 가장 가까운 버전의 인간을 원한다. 이따금 마주쳤던 미숙한 CPR 팀처럼 결정을 못 내리고 우왕좌왕한다면, 사랑하는 내 가족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

우리는 의사들에게 역설적 요구를 하고 있다. 환자에게 공감하고 환자를 배려하고 따뜻하게 대해 주길 원하면서, 또 한편으론 환자의 상황에 초연하길 바란다. 정지된 심장, 짓이겨진 팔다리, 질식할 것 같은 아이를 마주했을 때, 우리는 그들이 기계처럼 신속하고 정확하게 움직이기를, 움츠러드는 본능을 억누르고 끝까지 밀어붙이길 원한다.

내가 졸업한 의과 대학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다른 의과 대학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우리는 사람이 아니라 질병에 관해서만 꾸역꾸역 배웠다. 아이러니하게도, 정작 중요한 대상인 내 미래의 환자는 배움의 내용에서 빠져 있었다. 내 뇌는 명칭과 수치, 약물과 진단으로 터져나갈 듯했지만, 혼란스럽고 불확실하고 일관성 없고 엉뚱하고 잘 까먹고 두려워하고 의심스러워하는 평범한 인간에 대해서는 배운 게 별로 없었다. 의학 교과서의 명명백백한 세상이 아니라 나와 마찬가지로 끊임없이 변하는 어중간한 세상에서 살아가는 인간에 대해서는 거의 배우지 못했다. 지식 습득이라는 난제에 짓눌리다 보니, 의학의 레종 데트르raison d’être(존재 이유)인 환자는 뒷전으로 밀려났던 것이다. 그 결과, 자격을 갖춘 의사로서 출근한 첫날에 나는 내가 얼마나 아는 게 없는지를 뼈저리게 느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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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로 2021-10-28 14: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DNRCPR이라고 안 하는데 이거 옛날에 써진 책일까요??^^;;
암튼, 저 최근에 제가 맡은 할아버지 환자 분이 CPR 2번 하시고 (각기 다른 날) 소생하셨는데,,, 암튼 그 이야기 제 페이퍼에 써야겠어요.^^;;

라로 2021-10-28 14:31   좋아요 1 | URL
찾아보니 2020년에 나온 책인데... 병원마다 표기하는 것이 다른 건 아닌데 왜 저렇게 되어 있는지 궁금하네요.^^;;

오거서 2021-10-28 15:31   좋아요 0 | URL
저자는 영국 사람. 영국에 있는 병원에서 근무하는 것 같아요. 영국과 미국의 의료 시스템 차이 아닐까요?

라로 2021-10-28 15:32   좋아요 1 | URL
오! 그렇군요!! 그럴 수 있겠어요!!.^^

오거서 2021-10-28 21:33   좋아요 0 | URL
라로님 덕분에 의료 지식이 plus 1 되었어요. ㅎㅎㅎ 감사합니다! ^^
 

10월 3주 신간 역사 적바림.

8월부터 추천이 이어져서 <세계는 어떻게 번영하고 풍요로워졌는가>의 누적 점수가 높았고, 10월 2주에 추천이 포착된 <도둑이야!>와 <소재, 인류와 만나다> 역시 누적 점수가 많았다. 나머지는 뉴페이스.

박노자의 <조선 사회주의자 열전>은 10월 3주 신간 톱 10에 들었다.

피터 라인보우가 쓴 <도둑이야!>의 부제는 ‘공통장, 인클로저 그리고 저항’인데 부제의 용어들이 나한테는 낯설어서 10월 2주에 초면에서 모른 척 하였다.
10월 3주에 추천이 이어지지 않았으면 그만 잊힐 수도 있었는데 …

역사가 피터 라인보우는 1976년부터 2013년에 걸쳐 작성한 글 15편을 모은 책을 2016년에 발간했다. 원서의 제목은 Stop, Thief! The Commons, Enclosures, and Resistance. 원서와 다른 제목으로 번역서는 <도둑이야!>. 번역서 제목이 원제의 의미를 살리지 못한 것 같아서 아쉽다.

“<도둑이야!>의 목표는 다음과 같은 진실을 은폐하는 법적 허위들과 이데올로기적 우화들을 종식하는 것이다. (…)

법은 사람들을 가두어 놓지,
공통장(공유지)에서 거위를 훔치는 사람들을.
하지만 더 나쁜 놈들은 풀어주지
거위에게서 공통장(공유지)를 훔치는 놈들을.
“ (10)


책 구경만 해도 충분하지만 최소한 이 정도의 기초 지식이 필요한 것 같아서 표제에 있는 용어를 검색하였다.

공통장(commons)은 ‘공유지’로도 번역된다.

커먼즈는 공동체에 귀속된 혹은 공동체가 집합적으로 소유하는 ‘공동의 것’을 칭한다. (전환담론으로서 커먼즈)

커먼즈란 우리사회 곳곳에 있는 문화, 토지, 사회적 관계의 형태로 공동자원을 뜻한다. (공동자원 ‘커먼즈’ 발굴과 활용방안 모색의 장 - Landscape Times 2018-04-30)

인클로저는 13세기 영국에서 시작된, 소규모 토지를 대규모 농장에 합병하는 법률적 절차를 의미한다. 이는 목축업의 자본주의화를 위한 경작지 몰수로 요약할 수 있다. (위키백과)

Enclosure. 잉글랜드에서 일어난 사회 변화 현상.
소유 개념이 모호한 공유지나 서로 간의 경계가 모호했던 사유지 간에 가축이 도망가지 못하게 혹은 자신의 소유권을 명확히 하게 위해서 울타리를 쳐서 자신의 영역을 확인하고 자산으로 만들었다. (나무위키)



역사 (11)


1. 세계는 어떻게 번영하고 풍요로워졌는가 [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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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도둑이야! [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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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소재, 인류와 만나다 [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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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조선 사회주의자 열전 [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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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직업, 보람과 즐거움의 이중주 [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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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술, 질병, 전쟁 [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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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서진 흥망사 강의 [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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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대변혁 (전 3 권)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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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역사 속의 독도와 울릉도 [2.0]

#독도와동해연구성과새로운접근법이궁금하다면신간역사속의독도와울릉도분쟁지명동해현실과기대

10. 분쟁지명 동해, 현실과 기대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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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사사건건 경복궁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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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 안의 숫자는 주간 기준 추천+빈도 누적 점수 (나의 주관적인 기준에 따름)
주2. 읽고 있거나 읽은 책의 리스트가 아님 (향후에 읽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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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북사랑 2021-10-29 00: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common field가 아니라 commons였네요^^;;
이번 주 올려주신 신간 중에는 ˝술˝에 한표 하고 싶습니다!
매주 안내해주셔서, 매주 감사드립니다.

오거서 2021-10-29 00:18   좋아요 0 | URL
북사랑님 감사 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