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스이 류이치로가 지은 <세계사를 바꾼 커피 이야기>는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커피 칸타타’의 가치를 새삼 일깨워주었다.
“ 독일인만의 커피문화를 알고 싶으면 바흐(Johann Sebastian Bach)의 <커피 칸타타(Coffee Cantata)>(1732~1735)를 한 번 듣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커피 이야기를 들려주는 책에서 ‘커피 칸타타’와 만남을 어찌 기대하지 않았을까. 반가운 마음을 표시하고자 밑줄을 그었다. 커피 칸타타를 인용한 문장이 속한 문단의 끝까지 밑줄을 긋고 되새김질 하듯이 다시 읽었다.
“ 딸 역할을 맡은 가수는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로 ‘커피는 천 번의 키스보다 달콤하다’고 지겹게 반복한다. 독일인이 마시는 커피는 설탕이 듬뿍 들어가서 몹시 달았는데, 그래서인지 <커피 칸타타>에서 커피를 예찬하는 부분은 전적으로 소프라노가 담당했다. 그에 반해 영국에서는 ‘흙탕물을 들이킨 개구리’ 같은 느낌의 테너 파트 남성이 담당했다. “
밑줄이 그어진 마지막 내용이 무척 낯설다. “테너 파트 남성이 담당”했다는데 “커피는 천 번의 키스보다 달콤하고 모스카토 와인보다도 부드럽다”고 찬미하는 배역이 딸이 아니었다는 말이 아닌가. 그렇다면 아들? 혹시, 범위를 더욱 넓혀서, 남자? 딸인지 아들인지 여자인지 남자인지 혼란스러운 상황이지만 힌트를 얻고자 바흐 작품 정보를 찾아보고 <세계사를 바꾼 커피 이야기>를 찬찬히 들여다 보았다. 그러면서 커피 칸타타를 플레이.
바흐가 작곡한 커피 칸타타는 제목과 달리 소규모 음악극 같은 느낌이 든다. 테너, 소프라노, 베이스 가수들이 배역에 맞게 노래한다. 커피라면 사족을 못쓰는 딸(소프라노)과 커피는 해롭다며 딸을 말리는 아버지(베이스) 그리고 나레이터(테너)가 등장한다. 커피 칸타타는 모두 10 곡 구성으로 독일어 가사로 불리는 곡들이다. (영국에서 원전대로 독일어로 노래를 불렀을까, 아니면 영어로 번역해 불렀을까?)
커피 칸타타의 시작은 여느 칸타타와 다르다. 나레이터가 “조용히! 잡담 그만”을 외치면서 커피하우스에 모인 사람들을 잠시 입다물게 만든다. 당시 커피하우스에는 다수의 사람들이 모여 들어서 시끌벅적 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겠다. 바로 베이스(아버지) 아리아가 불리지만 반주악기의 선율에 커피하우스 분위기를 담아낸 것 같은데 흥겨움이 넘친다. 나레이터가 아버지를 진정시키고, 소프라노(딸) 아리아가 이어진다. 커피 칸타타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아리아로 이 4 번째 곡의 가사를 저자가 책에 인용하였다. 다음에 이어지는 노래에서 아버지는 딸을 협박하기도 하고 딸은 아버지 말을 듣는 척하면서 실랑이를 벌이지만 결국 딸이 원하는 대로 이루어진다. 마지막에 모두 함께 “고양이는 쥐잡기를 멈추지 않는다”를 부른다. (커피를 마시는 것은 자연스럽다.)
바흐가 ‘커피 칸타타’를 작곡한 시기는 대략 1734 년경으로 (1732 년부터 1735 년 사이) 추정한다. (영문 위키백과 참조) 1735 년경에 라이프치히 치머만 커피하우스에서 초연이이루어졌는데 콜레기움 무지쿰이 연주하고 바흐가 지휘를 맡았다고 한다. 바흐는 1723 년에 토마스 교회의 칸토르(음악감독)로 부임하면서 라이프치히에 정착하여 27 년을 살았다. 이 기간 동안, 특히 초반에 교회 칸타타 대부분을 작곡하는 초인적인 창작 열의를 보였다. 이후 교회음악의 최고 책임자가 되고 라이프치히 음악감독 역할을 맡는 것은 당연하였으나 바흐의 음악적 이상을 이해하지 못한 시 공무원과 교회 책임자들과 충돌이 잦았다고 전해진다. 그로 인해 교회음악의 창작은 급격히 줄고 세속 칸타타 또는 기악곡 작품으로 관심을 돌리게 되었다. (바흐가 교회칸타타만 작곡하지 않은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바흐가 작곡한 세속 칸타타 대부분이 소실되었다고 하는데 바흐 작품 번호(BWV) 기준으로 16 곡이 남았다. (그 중 하나가 커피 칸타타!) 바흐는 라이프치히에 살면서 커피 칸타타를 작곡하기 전부터 치머만 커피하우스에 자주 들렀을 것이다. 여기서 콜레기움 무지쿰의 음악 활동을 지도하면서 음악적 이상을 포기하지 않았을 것이고, 교회와 마찰하는 대신 커피 한 잔 마시면서 커피의 효능이 주는 위안을 느끼지 않았을까.
[라이프치히 치머만 커피하우스 (사진 출처: 위키백과)]
<세계사를 바꾼 커피 이야기> 내용을 참고하면, 커피는 아라비아를 거쳐 유럽에 전파되었는데 17 세기에 일반 서민한테 그림의 떡이나 마찬가지였다. 기온 변화에 큰 영향을 받는 등 재배 조건이 까다롭고 재배 지역이 한정되다보니 동방 무역을 통해 소량 유통되었고 때문에 가격이 저렴하지 않았다. 커피가 대량 생산되어 공급이 원활해지고 가격이 저렴해지기 전까지 영국, 프랑스, 독일을 중심으로 나라마다 너무나 딴판인 커피 문화가 형성되었다.
영국의 경우, 다른 나라에서 의약품의 일종으로 커피를 수입하였다. 1652년에 런던에 최초의 커피 하우스가 문을 열었고 30년만에 3천 곳이 넘었고, 1714년에 8천 여 곳이 되었다. 발전 과정에서 여성이 배제되었다. 영국에서 커피는 주로 남성 위주로 즐기게 되면서 결국에 여성이 크게 반발하게 되었다. 17 세기 영국의 커피하우스에 남자들이 생업을 잊은 채 적지 않은 커피 값을 부담하면서도 삼삼오오 모여서 수다 삼매경에 빠졌던 반면에 여자들은 커피하우스에 출입하지 못하였다. 여성은 가정의 울타리 안에만 있었다. 커피를 접하는 기회가 없었던 여자들이 집에서도 손쉽게 마실 수 있는 홍차를 즐기게 되면서 결국 커피의 인기가 내리막길에 들었다. 그래서 영국은 홍차의 나라가 되었다.
[18 세기 영국 커피하우스 사진]
여태 혼란스러운 상황이 조금씩 정리되는 것 같다. 바흐가 활동하던 당시에 유럽에서 커피하우스는 대중을 위한 대화의 장을 형성하였다. 그럼에도 특히 영국에서 커피하우스는 남성을 위한 공간이었다. 당시 영국은 남성 위주의 사회였기 때문이다. 커피만이 아니라 음악도 예외일 수 없었다. 그래서 ‘커피 칸타타’의 소프라노 파트를 남성 가수가 불렀다는 것인가 보다. 다른 한편으로, 아무리 테너라고 해도 여성의 높은 음역대를 전부 소화하지 못한다. 아마도 카운터테너급 가수(18 세기에는 카스트라토)가 노래를 불렀을 것 같다. (아내는 라 포엠의 노래를 매일 듣는데 나도 옆에서 같이 듣게 된다. 그들 중에 보석 같은 존재인 최성훈이 카운터테너여서 결정적인 힌트를 얻었다.)
18 세기 영국 커피하우스와 관련된 역사적 진실은 좀처럼 믿기 어렵다. 그렇지만 역사가 발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기에 숙연해진다. 커피가 세계사를 바꾸었을 정도로 커피와 관련된 역사적 사실은 복잡하였다. 내가 여기에 옮기지 못한 수많은 커피 이야기들이 책에 실려 있다. 책에서 인용한 커피 칸타타에서 부모가 자식을 이기지 못하였다. 비단 커피만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남성은 여성을 따라갈 수 밖에 없다. 여성한테 선택 받지 못하면 사회적으로 문화적으로 널리 받아들여지지 못한다는 역사적 교훈이 아닐 수 없다.
<세계사를 바꾼 커피 이야기>의 저자는 “한 번 듣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하였지만, 나는 커피 칸타타를 듣는 것이 몇 번째인지 모르겠다. 이번엔 영국 태생 소프라노 엠마 커크비가 딸의 배역을 맡아 노래하는 커피 칸타타를 특별히 골랐다. 엠마 커크비 연주는 출중하지만 18세기 영국이었으면 커피를 찬미하는 배역으로 노래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하니까 그의 연주가 귀중하다는 느낌이 든다. 바흐 ‘커피 칸타타’를 다시 한 번 더 감상한다. 어느 때보다 특별한 감상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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