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이한 이야기
메이 싱클레어 지음, 송예슬 옮김 / 만복당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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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층위를 가진
이야기 일곱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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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의 도시 은행나무 시리즈 N°(노벨라) 13
문지혁 지음 / 은행나무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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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효석 문학상 수상집에서 처음 만난 ‘문지혁’의 소설이다.
에필로그와 프롤로그를 제외한 다섯 개의 챕터로 구성됐다. 각 장의 소제목은 다음과 같다.
(순서대로) Professor, Partner, Pursuit, Punishment, Pastor.

제목이 ≪P의 도시≫이고 각 장의 제목이 이렇다면 뭔가 짐작이 간다. 굉장히 멋을 부렸구나. 멋을 좀 부리는 건 나쁘지 않지만 내용이 부실하면 어쩌지. 아주 고약한 편견이라는 걸 알지만 많은 경우 공허한 내용을 커버하기 위해 외양(형식적인 면)에 공을 들이는 경우가 있다는 걸 경험했기 때문에 든 걱정이었다. 그렇긴 하지만, 음... 책은 이미 샀고 분량도 길지 않으니, 시간을 투자해도 괜찮겠지.

(작가에 의하면) ‘사랑’과 ‘고통’을 키워드로 쓴 이야기(라고 한)다. 사랑은 보통 고통을 동반하지만 사랑 자체가 고통은 아니다. 사랑의 순도가 떨어질 때 고통스럽다.

이야기가 자꾸 뭔가 어긋나고 어색하며 자연스럽지 않았다. 좀 억지스러웠다고 할까, 작위적이어서 자꾸 덜커덕거리기도 했고. 한 마디로 사랑 이야기를 하면서 그것에 고통이 자연스럽게 뒤따라 나온 게 아닌 것처럼 보인다. 이 작품은 마치, ‘고통의 연쇄와 상호작용(186쪽, 작가의 말)’을 보여주기 위해 사랑이라는 감정을 이용한 것처럼 읽힌다. 이런 작품을 두고 사랑 운운하는 작가의 말은 참 민망하게 읽힌다.

명색이 사랑 이야기라면 그 감정이 전달되어야 한다. 아름답거나 행복하거나 아프거나 애달프거나 아쉽거나. 하지만 그런 감정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여기 나오는 주요 인물 네 명이 사랑을 하고 있기는 한 걸까? 이들의 감정은 피상적이고 반응은 기계적이고 행동은 어색하기 짝이 없다. 결국 생동감 없고 꼭두각시 같은 인물과 작가가 나름 열심히 머리를 쥐어짜냈으나 교묘하지도 않은, 엉성하기 짝이 없는 얼개만 남는다. 매 중요한 순간마다 (하느님이 보우하사)우연이 개입하는 것을 보면 참 쉽게 썼구나, 하는 생각도 든다.

애초에 일을 키운 ‘미혜’의 거짓말엔 아무런 목적이 없다. 미수에 그친 성폭행을 두고 왜 ‘당했다’고 말하는 걸까. 경찰에 신고하자는 남편에게 광고라도 하자는 거냐며 눈에 불을 켜던(거짓말이니 신고하면 안 되겠지) 미혜는 애인에게도 거짓말을 반복한다. 왜? 도대체 왜? 게다가 그녀는 거짓말을 수습할 기회가 있는데도 하지 않는다. 그저 일이 커지는 걸 지켜보고 있다. 이쯤 되면 남자들을 괴롭히려고 했던 것 같은데 그건 또 아니랜다(대체 뭐하자는?). 그러면서 성폭행범들을 찾아 죽여버리겠다고 펄펄 뛰는 평화를 소극적으로 돕고 방관한다(129쪽).

‘지웅’은 미혜와 결혼하기 위해 칠 년간 사귄 ‘수진’을 차버리고 떠날 때, 수진이 주는 삼백만 원을 왜 숨겼을까. ‘그걸 냉큼 집어 들고 올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놓고 올 수도 없었다(95쪽)’고 하는데, 이게 말이야 방구야? 받기 싫으면 그냥 두고 나오면 되지 굳이 ‘책 사이에 구겨넣고 책을 다시 책장에 꽂았다(96쪽)’는 불필요한 행동을 왜 하고 있나? 보물찾기라도 하려고? 이는 나중에 수진의 동생 ‘평화’로 하여금 그것을 찾고 오해를 하며 분노를 키우게끔 만드는 밑밥이 되는데 작가의 의도가 너무 노골적이라 헛웃음도 안 나온다.

다른 여자와 결혼해서 미국으로 가는 지웅에게 삼백만원을 줄 정도로 너그럽고 통 큰 행동을 보였던 수진이 동생에게는 그들이 ‘불행해졌으면 좋겠(121쪽)’다며 저주를 퍼붓는다. 다중인격인가. 이 정도면 동생한테 자기 대신 복수를 해달라고 부추기는 거 아닌가.

‘PTDS에 따른 양극성 장애, 공황 장애, 우울증, 충동조절 장애, 편집증(122~123쪽)’ 등을 앓고 있는 평화가 누이와 유산으로 죽은 제 조카의 복수를 위해 미국으로 갔을 때, 하필이면 ‘이목사’가 있는 교회에 발을 들인 것은 무슨 운명의 장난인가.

‘황장로’가 이목사에게 권총을 자랑하며 (나중에 알아서 훔쳐가도록) 숨겨둔 금고의 위치나 금고 비밀번호를 알려주는 장면(153~154쪽)을 보라. 이 정도면 개그콘서트다.
나중에 황장로는 위기를 맞는데, 이 사람이 벌을 받을 이유가 무엇인지 설득이 안 된다. 단지 부자라서? 이런저런 사람들 피해주면서 부자가 됐다면 이 세상 부자들은 전부 벌을 받아야 하나? 이목사는 황장로의 죄목들을 조목조목 읊어가며(교만하고, 사람들을 하대하며, 자신이 고용한 히스패닉들을 못살게 굴고, 여종업원들을 상습적으로 성추행하고 임신한 여자들을 해고하거나 낙태를 강요하고, 156쪽) 그에 대한 악의를 정당화하려 하지만, 대체 무슨 자격으로? 자기가 신이라도 되는 줄 아나. 작품 속에서 이 사람이 제일 미쳐 보인다. (제정신이 아닌 것 맞다)

‘이목사’ 캐릭터가 너무 나갔다는 증거는 또 있다. 그는 왜 수진과 평화 남매에게 복수하려고 하는가. 그의 부모를 죽인 자는 남매의 아비다. 아비는 지금 감옥에 있다. 졸지에 남매도 고아 아닌 고아가 됐다. 그들도 피해자다. 그들과 이목사는 비슷한 처지다. 그럼에도 이목사는 ‘DNA에 새겨진 악을 피해갈 수 있는 인간은 없다(155쪽)’고 괴상한 논리를 내세우면서, ‘너희 아비가 시작한 이 고통의 문제(175쪽)’를 아들인 평화에게 뒤집어씌운다.
수진은 왜 용서하는가? 여자라서? 지웅에게 이미 고통을 받을 대로 받아서? 그렇다면 자신의 복수에 지웅과 미혜를 이용하는 이유는 뭔가? 그들도 타인을 배반하고 배우자 몰래 불륜을 저질렀기 때문에? 미예의 불륜은 이목사 자신의 책임도 있는데도?

‘누군가를 사랑하면 불행해져. 사랑은 마음 깊은 곳의 지옥으로 들어가는 문이거든.’
이 정도면 책 뒷표지에 찍힌 위의 문장이 과대포장, 과잉광고가 맞다. 이 책은 사랑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고통에 관한 이야기도 아니다. 복수에 관한 이야기는 되려다가 말았다.

작가가 어떤 것을 노렸는지 짐작이 간다. 건조한 정서에 ‘느와르(Noir)’ 느낌이 물씬 나는, 그럼에도 사랑이라는 감정이 진득하게 들러붙는, 권총이 등장하고 미국이 배경인, 그런 폼 나는 작품을 의도했을 것이다.
작풍(作風)으로 치면, ‘코넬 울리치(Cornell Woolrich)’의 ≪검은 옷을 입은 신부(the Bride Wore Black)≫나 ≪상복의 랑데부(Rendez-vous In Black)≫ 같은 작품이 생각난다. 두 작품 모두 사랑하는 사람을 어이없이 잃고 관련자들을 찾아 복수하는 주인공들의 이야기다. 이 작품들은 기본적으로 살인과 범죄로 점철된 느와르-스릴러-미스터리 장르면서도 지독히도 절절 끓는 로맨스였다.

작가가 원한 게 이게 맞나. 아마도 맞을 것 같다. 하지만 결과물은 (미안한 말이지만) 처참하기 짝이 없다. 최근 발표한 단편을 인상 깊게 읽어서 고른 책이 하필이면 7년 전 작품. 작가가 언제부터 작품을 쓰기 시작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비교적 초기작일 것이란 느낌은 온다. 하지만 ‘아직 어설프고 부족하지만 예쁘게 봐주세요’ 이런 말 안 통한다. 독자가 왜 그래야 하는데?

우리나라 엔터테인먼트 업체에서 준비 안 된 연습생들을 데뷔시킬리 만무하다. 춤과 노래, 퍼포먼스, 그 능력이 최대한 무르익었을 때에라야 노래 한 곡 겨우 주어지고 ‘음방’ 출연 기회 한 번이 떨어진다.
문학 시장이라고 다르겠는가. 독자들은 돈을 지불하고 시간을 투자하여 책을 (단순히 읽는 게 아니라) ‘읽어주는’ 사람이다. 책이 만족스럽지 않으면 화를 내는, 화를 내도 괜찮은, 그래도 마땅한 사람들이다. 독자들이 원하는 건 ‘작가의 발전’이 아니다. 작가가 세상에 나올 때 이미 완성된 모습이길 바란다. 완성된 틀 안에서 자유분방하게 변화하는 모습을 반긴다. 미숙한 모습에서 점점 나아지는 걸 기다릴 겨를이 없다.
그러니 작가들이여. 출판의 기회를 마치 연습무대처럼 삼지 마라. 자비 출판으로 개인소장이 목적이 아니라면 독자들을 만족시키는 걸 최고 목적으로 둬라. 치열하게 써라. 완벽주의자가 되라. 독자들이 돈과 시간을 낭비했다는 생각이 들지 않도록 해라. 종이를 제공한 나무에 죄를 짓지 마라(전자책 제외). 그게 그대들의 사명이다.

사족.

‘은행나무 출판사’의 「N°(노벨라)」 시리즈의 한 권인데, 리커버(개정판)이라고 하는 걸 보니 과거에 같은 제목으로 출판한 이력이 있는 것 맞다.
출판사는 이 시리즈를 장편이라고 우기고 있는데, 판형이나 편집 모양새로 보면 중편 길이 정도밖에 안 된다. 비슷한 콘셉트로 다른 출판사에서도 한국소설 시리즈를 내고 있는데, 그것들에 비하면 정가가 저렴해서 그나마 나은 편이다. ‘위즈덤하우스’의 「위픽(WeFic)」 시리즈는 단편 한 편 책으로 묶어내고 만원이 넘는 가격을 책정하고 있어 가격이 완전 ‘WtF’이다. 독서 인구를 늘이고 모든 사람들의 손에 스마트폰보다 책을 들게 하자는 취지는 좋지만, ‘솔까말’ 책이랑 친하지 않은 건 책이 두껍거나 내용이 길어서가 절대 아니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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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의 도시 은행나무 시리즈 N°(노벨라) 13
문지혁 지음 / 은행나무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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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어설프고 많이 부족하지만
예쁘게 봐주세요.

독자가 왜 그래야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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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윈 영의 악의 기원
박지리 지음 / 사계절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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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디어 좋고
작가의 ‘말빨’도 좋으나
절반의 성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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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윈 영의 악의 기원
박지리 지음 / 사계절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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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고! 스포일러)

아홉 개의 구역으로 나뉘어져 있는 미래 지구 위의 어느 국가. 상위 1지구는 엘리트, 고위 관직들의 거주 지역으로 이를 테면 부촌이다. 1에서 멀어질수록 가난하고 폭력이 빈번하고 치안은 엉망이다. 오래 전, 가난과 불평등을 빌미로 최하위 구역인 9지구를 중심으로 사회를 전복하려는 시도(12월 혁명)가 있었지만 혁명은 실패로 돌아갔다. 그 탓에 9지구는 현재 ‘후디’로 상징되는 범죄의 소굴 정도로 알려져 있으나 여기엔 약간의 오해가 있다.

1지구에 살며 아무나 못 들어가는 기숙학교 ‘프라임 스쿨’에 다니는 십대 ‘다윈 영’. 부친 ‘니스 영’은 현재 교육부 차관으로 차기 대통령을 노리고 있고, 조부인 ‘러너 영’은 부자 사업가다.
이들 주변으로 많은 인물들이 배치된다. 니스 영의 친구이면서 오래 전에 살해당한 ‘제이 헌터’, 그의 동생 ‘조이’. 그의 딸이면서 여학교로선 명문이지만 프라임스쿨엔 한참 못 미치는 ‘프리메라 스쿨’에 다니는 ‘루미’. 루미가 대단히 자랑스러워하는 할아버지는 왕년에 아주 유명한 사진작가였는데 지금은 치매를 앓고 있다.
그리고 니스 영과 죽은 제이 헌터의 친구인 ‘버즈 마샬’은 성공한 다큐 감독이고 그의 아들 ‘레오’는 프라임 스쿨의 반항아이다. 이 아이는 나중에 다윈과 둘도 없는 친구가 된다.

니스 영은 오래 전에 살해당한 제이 헌터의 추도식에 30년째 참석 중이다. 얼굴도 모르는 사람의 추도식에 갈 마땅한 이유는 없으나 다윈은 매년 아빠와 동행한다. 딱히 싫은 건 아닌데, 그 집의 루미에게 호감이 있기 때문. 드디어 바라던 기회가 오고 다윈은 루미와 말을 트는데 루미는 얼굴도 모르는 삼촌의 죽음에 의문을 품고 있다. 과거에 알려진 대로 제이 헌터의 살인은 단순 강도 사건이 아니라는 것. 다윈과 루미는 30년도 더 지난 사건 조사에 착수하기로 의기투합한다.

***

SF적인 무대는 장단점이 있다. 지구 별로 구획되어 있는 사회는 계급의 상징이다. 정책적으로 편견과 몰이해를 방관하고 있다. 실제로 9지구를 처음 다녀온 다윈과 루미는 그곳의 실제 모습이 자신들이 듣고 믿어온 것과 많이 다르다는 걸 깨닫는다. 그들의 시스템은 서로를 격리하고 고립한다. 오해를 종용하고 묵인한다. 계급 간의 몰이해는 대립과 증오로 이어지고 결국 폭력을 낳는다. 사회, 혹은 국가가 그것을 바라는가? 현재의 우리와 많이 겹친다. 디스토피아적인 이미지가 은근히 익숙하다.

반면 미래의 한국인가 싶었는데 인물들 이름이 죄다 영어다. 하나의 언어를 매개로 지구상에 하나로 존재하는, 통합된 신생국가인가 했는데 어딘가에서 ‘다른 나라’를 언급한다. 그럼 대체 여기는 어디일까. 지구 위는 맞나?
작품의 운명을 좌우하는 설정은 아닐지라도 이런 무국적성, 배경의 모호함은 작품에 분명한 영향을 준다. 현실감이 느껴지질 않는다. 미래의, 가공의 무대라도 작가는 ‘그 공간’의 개념을 독자들에게 분명하고 구체적으로 각인시키고 납득시켜야 한다. 잘 보면 이야기 자체도 구체성이 모자란다.

작가는 작품에서 많은 것을 시도한다. 일단 형식적으로 이 작품은 SF, 미스터리, 성장드라마, 캐릭터드라마를 넘나든다. 주제적으로는 사회적인 이슈와 개인적인 이슈를 모두 건드리는데, 가장 삐거덕거리는 부분은 이 지점에서 나온다.

작가는 초중반을 거치며 많은 분량을 할애해 사회적인 이슈들을 다루려고 한다. 특정 계급의 특권의식을 강화하고 계급 간 위화감을 장려하고 있는 사회 시스템이 일단 그렇다. 정부의 교육 관련 요직에 있으면서 자신이 이사진에 포함된 학교에 아들이 학생이라는 설정도 그렇다. 자부심과 열등감을 동시에 갖고 있으면서 편견에 지배된, 타인을 함부로 판단하며 자신의 자만심을 채우려는 루미의 캐릭터도 그렇다. 모두 사회를 비판하기(조롱하기) 위한 재료들로 읽힌다.
하지만 플롯의 초점이 ‘제이 헌터의 죽음’에 옮겨가면서 분위기가 달라진다. 이는 12월 폭동과 연결되어 있고, 한 개인의 동기, 누군가의 아킬레스 건을 건드리게 되는데 사실 폭동과는 별로 관련이 없다. 이런 내용이 소설 후반부에 집약되어 있다.

사회에서 개인으로, 거시적인 시선에서 미시적인 대상으로 옮겨가는 건 사회학자들, 소설을 쓰는 사람들이라면 일명 (일본식으로 표현하자면) ‘사회파’라고 불리는 작가들이 흔히 쓰는 논법(작법)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작품이 후반부로 갈수록 (여태 공을 들인) 사회적인 이슈들을 소홀히 한다는 것이다. 자신의 안전을 위해서, 사회적 평판을 유지하기 위해서. 이런 의도는 지극히 개인적인 것으로 사회 시스템의 기능과는 별개의 문제다. 굳이 저런 사회가 아니어도 인간의 이기심과 욕망은 언제 어디서나 작동한다. 살인이라는 사건을 매개로 전후반부가 긴박하게 연결되어 큰 의미로 확장되어야 하는데 이 작품은 그런 면에서 실패했다. 따로 노는 전후반은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제목에 ‘악의 기원’이라는 말이 있고 이야기 전체의 흐름도 한 인물이 ‘흑화되는 과정’에 관한 것이니 작가가 ‘악’에 대해 말하고 싶었던 것은 맞다. 그런데 과연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걸까. 악의 근원은 사회(환경)에 있다고? 아니면 개인에게? 인간의 악, 범죄성을 연구하는 무수한 사회학자, 심리학자들이 오랜 시간 논의해 왔어도 딱히 이렇다 할 결론이 나지 않은 주제다. 이것도 맞고 저것도 맞다. 여전히 설왕설래 중이다. 하지만 독자들에게 중요한 건, 인간의 악, 악마성, 악한 행동은 어디서 비롯되는지에 대한 작가 ‘박지리’의 생각(의견)이다.
작가는 결론을 뭉뚱그리며 살짝 피해간다. ‘악의 유전’, DNA에 새겨진 악의 근성 정도로 요약되는 결말이라면 사회의 모순에 그렇게 애쓸 필요가 없었다. 다소 생뚱맞은 결론에 산만하고 장황함이 부각된다. 롤러코스터를 타고 있는 ‘다윈’의 심리 변화는 작위적이고 클라이맥스의 행동은 동기가 부실해 당황스럽기까지 하다(저렇게까지?).

전체적으로 용두사미 같은 느낌이랄까. 사공이 많아 배가 산으로 갔달까. 선택의 문제일 수도 있었겠다 싶다. 작가가 하나도 버리고 싶지 않았나 보다. 과욕이다. 그 예로 분량이 이렇게까지 길 필요가 있나 싶다. 버릴 건 버리고 취할 건 취해서 간결하고 타이트하게 구성했더라면 오히려 효과적이었을 수도. 게다가 한 얘기 또 하고 보여준 거 또 보여주고, 이런 부분들이 많다.

미스터리 소설로서는 어떨까. 범죄 구성이 엉성하다. 그저 ‘이래서 이랬다’, ‘저래서 그랬다’, 정도의 동기와 결과만 갖고 구상만 한 것 같다. ‘과정과 방법’에 대해서는 번갯불이 콩 구워먹듯 후딱 해치워버리니 감흥이 없다. 육하원칙 아래 작성된 신문기사가 이런 느낌일까. 범죄에 감정이 실려 있지 않으니 그냥 이야기의 빈틈을 채우는 구성물처럼 보여, 진상이 밝혀진 후에도 독자로서 정서의 파장이 별로 없다.
방법적인 건 어떨까. 이 작품엔 추리의 여지가 거의 없다. 과정이 나오기는 하는데 무용하다. 비밀이 드러나는 순간은 거의 우연에 의존한다. 단서라고 나오는 것들이 설득력이 없다. 목걸이나 얼굴의 점을 사진 속에서 식별한다는 건 TV 일일극에서나 나올 법한 소재다. 무엇보다 다윈은 녹음테이프를 레오에게 왜 재생시키라고 했을까. 위험한 거 뻔히 알면서. 작가에게 너무 편한 일이다.

인물들을 구성하는 방식이나 역할도 식상하다. 도화지처럼 순백의 아이, 영리하지만 반항기 가득한 아이. 거기에 새침 떨고 자존심 센 여자아이. 어른들은 두 말할 것도 없고. 그나마 캐릭터 성을 갖춘 건 루미가 유일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엄마, 할머니의 캐릭터들이 유령처럼 존재하는 이유는 뭘까. 루미 외에 의미있는 방식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여성 캐릭터가 단 한 명도 없다는 게 다소 거슬린다. 작가의 선택이겠지만 이야기의 생동감을 떨어뜨리는 데 한몫한다.

***

전체적인 느낌이, 장독 뚜껑을 너무 일찍 연 것 같다. 덜 삭힌 젓갈 같다. 작가가 조금 더 고민하고 다듬고 아이디어를 숙성시킬 시간을 들였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아이디어도 좋고 가능성은 확실히 있어 보이니, 조금만 더 공을 들였더라면 더 좋은 작품이 되었을 수도 있었을 듯 싶다. 하지만 이미 고인이 된 작가에게 개정을 위해 작품을 수정할 기회는 없을 테고.

그럼에도 작가의 좋은 문장은 여전히 살아 있다. 내가 읽어본 한국작가들 중, 소위 ‘글빨’이 아니라 ‘말빨’이 좋은 작가로 열 손가락 안에 든다. ‘멋 부리는, 아름다운 문장’보다 ‘적확한 문장’, ‘친절하고 설득적인 문장’을 구사한다. 난 그런 문장이 더 좋다. 그리고 이 작품을 많은 독자들이 좋아한다. 뮤지컬로도 제작된 걸로 알고 있는데, 그 정도면 성공작이다 싶다. 구성이 복잡하고 장황해서 각색 과정이 수월치는 않았겠지만.

늦게나마 삼가 박지리 작가의 명복을 빈다. 작가의 새 작품들을 읽으며 작가로서 성장하는 모습을 지켜볼 수 없는 건 독자로서 참 아쉬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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