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ml version="1.0" encoding="utf-8"?><?xml-stylesheet href="https://blog.aladin.co.kr/blog/rss/rssUserXSL.aspx" type="text/xsl" media="screen"?><rss version="2.0"><channel><title>영꽃님의 서재 (영꽃 서재)</title><link>https://blog.aladin.co.kr/764791159</link><language>ko-kr</language><description>책 읽고 끄적끄적. </description><copyright /><generator>Aladdin RSS(Alss) v0.9</generator><lastBuildDate>Sat, 10 Oct 2026 00:02:45 +0900</lastBuildDate><image><title>영꽃</titl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myface/pt_7647911594573865.png</url><link>https://blog.aladin.co.kr/764791159</link><width>100</width><height>100</height><description>영꽃</description></image><item><author>영꽃</author><category>마이리뷰</category><title>26년 일흔아홉 번째 책 - [보이지 않는 소장품 - 슈테판 츠바이크의 대표 소설집]</title><link>https://blog.aladin.co.kr/764791159/17562162</link><pubDate>Fri, 09 Oct 2026 06:24: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64791159/17562162</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582835249&TPaperId=17562162"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28569/86/coveroff/k582835249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582835249&TPaperId=17562162"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보이지 않는 소장품 - 슈테판 츠바이크의 대표 소설집</a><br/>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정상원 옮김 / 이화북스 / 2022년 01월<br/></td></tr></table><br/>26년 일흔아홉 번째 책. &nbsp;★★★★&nbsp;전기 작가로 널리 알려진 ‘슈테판 츠바이크’의 중단편 여섯 편이 실려 있다. &nbsp;가장 놀랍고 감탄했던 건 작가가 인물을 독자들에게 소개하고 보여주는 방식. 보통 심리 묘사가 훌륭하다고들 하는데, 작가는 그것 이상을 해낸다. 작가는 묘사에 그치지 않고 그것을 분석한다. 인물의 심리가 어떤 행동으로 표출되고 그 행동이 또 다른 어떤 심리를 이끌어오는지, 그 흐름의 인과에 독자는 인물들의 행동이 아무리 뜬금없어도 설득이 된다. ‘프로이트’가 가장 좋아한 소설가, 라는 평이 어떤 의미인지 알 것 같다. &nbsp;&lt;아찔한 비밀&gt;은 어머니의 외도를 막으려는 어린 아들 ‘에드거’의 고군분투를 통해 아이의 성장을 그린다. 아이들의 성장을 주도하는 것은 무엇일까, 라는 질문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성장’이란 단어는 육체와 정신 모두를 아우른다. 에드거의 경우는 어른들의 세계를 엿봄으로서 유아기를 벗어난다. 그가 목도한 현실은 수많은 거짓말이 아닌,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우면서도 위태로운(105쪽)’ 현실이다. 아이는 선을 넘어 어른들의 세계로 진입함으로서 성장의 발판을 마련하는데,  이는 엄마와 난봉꾼 남작과의 비밀을 남몰래 공유함으로서 완성된다. 에드거는 이 순간을 통과하며 아이로서의 소외를 벗어난다. 자기들이 쉬쉬한다고 아이들이 정말 모를 거라 여기는 어른들의 판단이 재미있다. 그건 증명된 사실이라기보다 어른들의 바람일 것이다. 조심성 없는 어른들을 통해 아이는 어른들의 삶에 노출되고, 부모에게는 ‘내 자식’이 아닌 경계 밖의 타인이 된다. 연애에 방해되는 아들을 밀어내는 엄마의 모습엔 양가감정이 읽힌다. 엄마의 비밀을 아빠에게 함구함으로 아이는 엄마와 공모하지만, 이로써 권력이 역전된다. 성장한(엄마의 약점을 빌미로 한) 아이는 어느새 부모보다 더 큰 힘을 갖게 된다. 결말에 드러난 여성성이 시대적 특성을 보여는 것 같아 주목된다. 에드거의 엄마는 연애에 대한 환상을 접고 결국 현실에 주저앉는다. 이는 삶의 주체로서의 지위를 포기하고 가정과 아이의 보호자, 남편의 반려자, 주인공이 아닌 조역, 배경으로서의 위치로 전락함으로 읽힌다. ‘쓰고도 달콤한 짐(106쪽)’은 모성에 대한 판타지와 현실을 모두 포함하는 양가적인 표현이다. &nbsp;&lt;불안&gt;은 이 작품집에서 가장 흥미롭게 읽은 작품이다. 도발적인 오프닝의 위기감이 다른 형태의 자극이 되어 서스펜스를 한 가득 이끈다. 오늘날 ‘서스펜스 심리 소설’의 씨앗이 풍부해 ‘알프레드 히치코크’ 감독이 흥미를 가졌을 법한 이야기, ‘퍼트리샤 하이스미스’가 썼을 법한 이야기라고 생각하며 읽었다. ‘불안’이라는 감정이 사람을 조종하는 양상이 재미있다. 이야기의 주된 핵은 ‘불륜’을 저지른 ‘이레네’가 죄를 고백하고 자비와 용서를 구하느냐 마느냐의 갈등이다. 이 작품에 의하면 죄를 지은 사람이 갖는 내면의 불안은 실제 처벌보다 더욱 혹독하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기독교인이라면 참회와 용서에 상당한 가치를 부여할 테지만, 요즘의 현실은 어떨까. ‘양심’이란 것과 마찬가지로 ‘수치’란 감정이 아무 소용없는 시대에, 후안무치, 파렴치한들이 오히려 더 당당하다. 이 작품의 시대성이 드러난다. 그때엔 최소한의 양심이 자구책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엔딩에 반전이 있다. 이레네의 갈등은 해소되는 듯 보이지만 정말 그럴까. 남편은 음흉한 속임수로 이레네를 위기에서 구해내지만 그것은 폭력과 다름없어 보인다. 결말이 드러나면서 이레네의 죄는 남편에게 전이된다. 이 작품의 최종적인 악당은 과연 누구일까. 남편의 의도는 정말 순수한 걸까. 아내를 지키기보다 자신의 가정을 지키고 싶은 욕망이 가장 우선이었을 남편의 의도는, 당시의 남녀 지위, 그들에게 주어진(혹은 기대되는) 사회적 역할, 경계 등을 짐작하게 한다. 불륜과 협박으로부터 벗어난 이레네는 결국 가정으로 돌아온다. 이는 강요된 여성성, 가정 안에서 위안과 행복을 찾으라는 시대적 요구에 부응한 여성성의 한계를 보여준다. &nbsp;&lt;모르는 여인의 편지&gt;는 거의 한 평생 남자를 짝사랑하며 행복의 모든 기회를 차단하고 스스로를 우울의 벽에 가둬 불행하게 살던 여인이, 자신의 죽음을 앞두고 자신의 존재를 몰라준 남자에게 진실을 알리며 복수를 하려는 이야기다. 복수가 아니라고? 여인이 남자에게 정말로 바랐던 것은 무얼까. 남자의 아이를 몰래 낳고 살던 여인은 아이가 죽자 모든 것을 포기한 듯 진실의 칼날을 벼린다. 여인이 자기 말대로 남자를 정말로 원망하지 않았을까. 그녀가 원한 건 분명해 보인다. 남자는 ‘사실’을 알고 난 후, 과연 그 전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여인은 자신의 행동을 ‘파괴적인 광기(200쪽)’에서 비롯된 것임을 이미 알고 있는 것 같다. 그녀는 자신의 역사를 남자에게 알림으로서 그를 지옥에 가두려 한다.이야기의 화두가 ‘모성’이라는 사실에, 앞의 두 작품과 같은 맥락의 여성이 등장하는 것이 재미있다. 여자는 남자와의 사이에서 몰래 낳아 키운 아이가 죽자 폭발한다. 그 동안 잘 숨겨왔던 진실을 드러내고 생을 등지기로 결심한 동기엔 아이의 죽음이란 사건이 있다. 아이가 없는 세상은 여자에게 아무 의미가 없다. 아이가 남자가 남긴 유일한 것이어서, 라는 해석도 가능하지만, 여자는 아이의 존재 자체에만 의미를 둔다. 이런 심리엔 여성은 곧 모성이라는 사고가 작용한다. 여성을 가정에 가두고 남편 뒷바라지에 아이들 교육에 힘쓰라는 무언의 시대적 요구가 읽힌다. &nbsp;&lt;보이지 않는 소장품&gt;은 중편 분량의 다른 작품들에 비해 비교적 짧은 글인데, 임팩트가 상당하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육체의 삶일까 정신의 삶일까. 작가는 이야기 속 인물들을 양쪽에 적절히 배치시켜 인간의 행복을 결정하는 가장 주된 요소가 무엇인지 묻는다. 눈 먼 노인은 정작 아무것도 볼 수 없음에도 ‘순수한 기쁨(256쪽)’을 위해 예술품 수집에 열을 올린다. 그런 동안 남은 식구들은 가난에 시달리고 굶주림에 방치된다. 그의 아내와 딸은 식량과 생필품을 구하기 위해 노인의 수집품을 몰래 판다. 노인의 핸디캡을 이용한 속임수를 동원해 위작과 빈 종이로 대체된 컬렉션이 여전히 노인에게 기쁨이 된다는 설정은 작품에 아이러니와 묵직한 페이소스를 부여한다. 자신만의 즐거움에 집중하는 노인은 가족들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걸까. 노인을 속인 아내와 딸의 기만은 선의에 의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작가는 삶의 의미와 정직이라는 가치, 신뢰 등을 화두로 흥미로운 이야기를 전개한다. 노인을 위해 핑계 하나를 대자면, 화자를 만나 자신의 수집품 소개에 열을 올리는 노인의 모습을 보며 무척 공감을 했다는 사실이다. 자신이 좋아하는 무언가의 진가를 함께 알아보고 의견을 나눌 수 있는 타인의 존재는 정말 귀하고 소중하다. ‘지음(知音)’이란 말이 있다. 아마도 연예인의 ‘팬덤’이 존재하는 이유도 비슷하지 않을까. 수집가는 단순히 물건을 소지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그들이 진정으로 향유하는 건 단순히 물리적 실체가 주는 기쁨만이 아닌, 그것들마다 새겨진 스토리, 기억, 추억 같은 정신적인 어떤 것, 무형의 것들일 테다. 우리가 타인의 역사를 오롯이 이해하기란 정말로 불가능해 보인다. &nbsp;&lt;어느 여인의 24시간&gt;은 도박에 빠진 생면부지의 젊은이를 구하기 위한 중년 여성의 처절한 노력이 그려진다. ‘심판하기보다는 이해한다’는 말에서 타인에 대한 연민, 측은지심이 읽힌다. 타인에 대한, 그를 이해하려는 태도는 소설을 읽는 독자의 자세, 즉 이야기 속 인물에 공감하려는 노력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엿보여 재미있다.‘C부인’의 동기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남자를 향한 연모나 애정은 나중에, 정말 우연히 일어난 일이고 애초에 어떤 감정이 그녀를 움직이게 했을까. 남편과 사별하고 자식들도 집을 떠난 C부인이 ‘빈둥지 증후군’을 앓고 있었다 해도 별로 이상해 보이지 않는다. 그녀는 애정과 관심을 쏟아 부을 대상이 필요한 게 아니었을까. 생면부지의 젊은이에게 ‘구원자’이면서 ‘돌보는 사람’을 자처한 게 아니었을까. 다시 여성들의 모성의 이야기로 돌아온다. 작품 속에 은연히 드러난 ‘돌보는 자’, 고난에 빠진 남성을 위로하고 대책을 마련하고 구원하는 사람으로서의 여성은 작가가 맹렬히 활동한 시기의 ‘바람직한 여성성’의 전형적인 롤 모델을 대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nbsp;&lt;세 번째 비둘기의 전설&gt;은 오늘날 ‘초단편’ 분량의 짧은 작품이다. 성경 속 ‘노아’의 에피소드에 나오는 비둘기를 중심으로, 사회에 널리 퍼진 이기와 악, 폭력 등에 경종을 울리려는 이야기다. 전쟁의 트라우마, 이후의 우울증, 작가의 최후를 고려하면, 그리고 여전히 사라지지 않은, 지구촌 어디선가 지금도 진행 중인 전쟁, 분쟁들을 생각하면 한층 더 마음 아프고 슬픈 이야기로 읽힌다. &nbsp;작품집의 적지 않은 작품들이 그 시대의 바람직한, 받아들여질 만한 여성들의 어떤 이미지를 제시하고 있는 점이 흥미롭다. 예전에 읽은 츠바이크의 두 장편, 성적인 면에서 도발하는 여성이 등장하는 ≪감정의 혼란≫과 노동자 여성이 사회의 구석구석 존재하는 계급 차이와 불균형을 목격하고 각성에 이르는 ≪우체국 아가씨≫에선 건져 올리지 못한 감상이라 무척 생뚱맞다. 이 작품집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장편 작품에 드러난 작가의 태도와의 차이는 또 어떻게 보아야 할까. 작품집 속 여성 캐릭터들의 성격적 맥락과 여성들에 대한 대접을 근거로 작가를 여성 혐오자나 성차별로 치부하는 건 지나치게 박한 평가라고 생각한다. 그보다 작가가 보여주고 싶었던 건 여성들의 시대적 한계, 그 세계를 지배하고 통용됐던 가치관의 모순 등이었다는 게 이 작품집 속 이야기들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nbsp;]]></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28569/86/cover150/k582835249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285698607</link></image></item><item><author>영꽃</author><category>마이리뷰</category><title>26년 일흔여덟 번째 책 - [위대한 개츠비]</title><link>https://blog.aladin.co.kr/764791159/17562158</link><pubDate>Fri, 09 Oct 2026 06:14: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64791159/17562158</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602131287&TPaperId=17562158"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40271/72/coveroff/k602131287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602131287&TPaperId=17562158"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위대한 개츠비</a><br/>프랜시스 스콧 피츠제럴드 지음, 김석희 옮김 / (주)열림원 / 2026년 09월<br/></td></tr></table><br/>26년 일흔여덟 번째 책. &nbsp;★★★&nbsp;읽지도 않았는데 읽었다고 착각하는 소설 작품들이 몇 개 있다. ≪작은 아씨들≫, ≪빨강머리 앤≫, 그리고 바로 이 소설. 그런 데엔 소설의 유명세가 가장 큰 이유다. 원작이 워낙 유명하니 이런 저런 곳에서 어떤 이야기인지 주워들을 기회가 충분했고, 애니메이션이나 드라마, 영화 등도 많이 나와 있으니 소설보다 그것들에 이미 익숙해졌던 것. 이 작품 역시 일찌감치 영화로 접했고, 이십여 년 후 새로 만들어진 영화를 또 봤으니, 책을 읽으면서 내내 ‘로버트 레드포드’와 ‘리나르도 디카프리오’, 두 배우의 얼굴이 오락가락했던 게 하나도 이상하지 않다. 막상 읽고 나니 어땠을까. &nbsp;소설 자체로만 보면 눈에 띄는 요소는 딱히 없어 보인다. 계급 차이와 형편없는 주머니 사정 탓에 사랑을 포기했던 남자가 다소 의뭉스러운 방법으로 부자가 되어 여자 앞에 다시 나타나지만 여전히 존재하는 장벽에 걸려 좌절하고 파멸하는, 다소 평범한, 그리고 충분히 뻔한 이야기. 불륜과 사고, 의심과 오해, 질투와 살인 등의 요소는 이야기에 다이내믹함과 멜로드라마성을 부여하지만, 이런 서사적 장치 역시 크게 주목할 만한 건 아니다. 작품 전반에 흐르는 화려하지만 우울한 정서, 그것에 기인한 독특한 질감은 꽤 좋았다. 일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의 ‘재즈 시대’가 어땠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모던 걸’이나 ‘모던 보이’들이 오늘날 ‘셀럽’, ‘패셔니스타’ 같은 대접을 받았던 우리의 일제강점기 시절과 비슷하지 않았을까 추측해 본다. 하지만 전쟁 후 경제 부흥과 몰락을 앞둔 미국과 식민지 조선은 문화를 소비하는 행태나 심인적 동기가 전혀 달랐을 것이다. &nbsp;‘개츠비’는 법을 어겨가며 돈을 모으고, 아무리 첫사랑이라지만 이미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된 ‘데이지’에게 추근거리다가 낭패를 본다. 작가는 이 사람을 통해 독자들에게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걸까. 작가는 주인공을 소위 반면교사의 인물로 삼으려 했던 것 같다. 그런데 돈에 대한 개츠비의 욕망만 본다면 지극히 당연하고 마땅해 보여 오히려 인간적이다. 물질만능주의나 배금주의를 견제하기 위해 고안된 인물이라면 과연 적절한 인물일지 의문이 든다. 개츠비의 욕망은 ‘이카루스’의 그것과는 전혀 다르다. 당시의 금주법에 반하여 밀주 사업을 벌인 건 범법행위라고 쳐도, 특히나 전쟁이 남긴 폐허에서 살아남으려는 욕망이 팽배한 분위기라면 사람들은 더욱 물불 안 가리지 않았을까. 가난해서 사랑의 기회를 잃은 개츠비 같은 남자라면 더 그랬을 터. &nbsp;개츠비의 파국은 그의 내면에서 온다. 사랑이 너무 지나쳤달까. 이기적인 속도로 폭주했다는 말도 가능하겠다. 당시엔 불륜이나 혼외의 관계에 대한 인식이 어땠는지, 어떤 법적인 장치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데이지의 마음을 돌리기 위한 개츠비의 행동은 너무나 순수하고 외곬수인데다, 치열하다 못해 찌질해 보이기까지 한다. ‘톰’ 부부를 앞에 두고 자신과 데이지의 관계를 털어놓는 장면(7장)에선 ‘뭐 저런 자기 혼자만 알고 경우도 없는데다 머리까지 나쁜 인간이 있나’, 싶기도 했다. 제목의 ‘the Great’가 이런 뉘앙스였을지도. &nbsp;내겐 이 소설이 비극적인 결말의 로맨스 소설 이상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눈이 돌아갈 듯 모든 것이 변화무쌍한 요즘, 모든 동력의 저변에 돈이 흐르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물질만능주의 어쩌구 하는 경고가 여전히 효력을 발휘할까 의심쩍다. 돈을 숭배하듯 하는 오늘의 세태가 위험한 건 사실일지라도 비상식적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이런 관점에서 이 작품을 읽는다면 이 작품은 극히 평범한데다가 ‘올드’하기까지 하다. 이 화두가 2026년의 독자들에게 먹히려면 이 이상의 뭔가가 더 있어야 한다. &nbsp;세상에 나온 지 꼬박 백 년이 된, 대단히 미국적인 이 소설이 당시의 미국과 서양 독자들을 각성시키고, 더 나중의 독자들에겐 대공황의 징조를 품은 선지자 같은 작품으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그렇다면 미국적 배경을 걷어내면 남는 거라곤 화려함과 사치, 이후의 몰락, 치정과 살인 등이 엮어내는 한 남자의 비극일 뿐인 이 작품이 동아시아의 작은 나라 독자들에게 여전히 읽히고 고전으로 회자되며 추앙받는 이유는 뭘까 궁금하다. &nbsp;고전이 시대를 관통해서 백 년 이후의 독자들에게 와닿는 건 이야기의 보편성, 원형성이 여전한 힘을 갖기 때문일 테다. 사실 이 작품엔 특별한 구석이 별로 없다. 통속적인 소재에 남발하는 우연, 자세히 들여다보면 플롯에 구멍 등, 구조적인 측면에서 봐도 흠결이 많다. ‘재의 고개’나 부릅뜬 눈이 그려진 빌보드 같은 상징도 다소 노골적인데다 메시지도 이미 낡았다. 그럼에도 부(富)를 향한 욕망, 일편단심의 사랑, 희생, 이성을 마비시키는 질투, 폭력성, 이기심과 자기 보존 욕구 등의 아주 보편적인, 시대를 뛰어넘는 인간 본연의 성질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데 작품의 매력이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nbsp;아주 비슷하면서도 다른, 비슷한 시기에 쓰이고 발표된 ‘윌라 캐더’의 소설 ≪로스트 레이디(A Lost Lady, 23년)≫가 생각난다. 부유한 사업가의 안주인을 동경하는 마을 소년(이 작품에선 ‘닐’)의 시선으로, 그녀의 몰락과 그 이후의 이야기가 그려지는데, 이 작품에서도 ‘돈’의 문제가 중요한 화두로 다뤄진다. 남편이 죽고 재산을 잃어가는 귀부인이 세상물정 몰랐던 자신을 닦아세우며 어떻게 현실에 적응하는가에 대한 이야기다. 관찰자의 시선으로 전개되는 구성, 세대가 교차되는 시기의 갈등과 혼란, 가치관의 대립 같은 화두는 두 소설이 공통적이지만, 윌라 캐더는 ‘돈’과 ‘물질’을 경계하는 관점은 지양하고 있는데 그런 지점에서 ‘피츠제럴드’의 소설과 차별된다. 윌라 캐더의 소설 역시 충분히 비극적이지만, 결말의 행간엔 희망이 스며있다는 점도 두 소설이 다른 점이다. &nbsp;사족. &nbsp;1. 한글 번역이 아주 까다롭기로 유명한 영미 소설 중 하나라고 한다. 피츠제럴드의 작품이 대개 그렇다고. 그 중에서 번역이 가장 유려하기로 소문난 ‘김석희’의 번역으로 출간된 ‘열림원’의 책을 골랐는데, 글쎄…, 번역 소설의 한계인가 싶기도. &nbsp;2. 이 소재가 만약 당시의 미스터리 작가들의 손에 들어갔다면 어떤 소설이 태어났을까. 이 소설엔 미스터리 소설에 필요한 재료들이 모두 다 있다. 의혹에 싸인 과거를 안고 다시 나타난 남자, 삼각관계, 연적, 의문의 죽음, 시간 차 알리바이, 진실을 암시하는 메타포, 용의자들과 의외의 진상까지. 이 책을 읽는 도중, ‘애거서 크리스티’의 숨겨진 걸작 ≪파도를 타고(Taken at the Flood, 48년)≫가 생각났는데, 은근히 겹치는 설정들이 많아 놀랐다.&nbsp;]]></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40271/72/cover150/k602131287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402717229</link></image></item><item><author>영꽃</author><category>마이리뷰</category><title>26년 일흔일곱 번째 책 - [언어화를 위한 소설 사고 - 모호한 아이디어를 독자에게 전달되는 말로 바꾸는 힘]</title><link>https://blog.aladin.co.kr/764791159/17530566</link><pubDate>Tue, 22 Sep 2026 11:12: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64791159/17530566</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342130735&TPaperId=17530566"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9984/98/coveroff/k342130735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342130735&TPaperId=17530566"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언어화를 위한 소설 사고 - 모호한 아이디어를 독자에게 전달되는 말로 바꾸는 힘</a><br/>오가와 사토시 지음, 박대겸 옮김 / 황금가지 / 2026년 07월<br/></td></tr></table><br/>26년 일흔일곱 번째 책. &nbsp;★★★☆&nbsp;❝소설을 읽는다는 건, 한 번도 만난 적 없고 얼굴도 모르는 상대의 이야기를 듣는다는 비일상적인 행위다. (69쪽)❞&nbsp;❝소설은 작가가 무엇을 표현했는지가 아니라 독자가 무엇을 받아들였는지에 따라 가치가 결정된다. (160쪽)❞&nbsp;저자가 소설에 방점을 두는 건 ‘재미’다. 저자는 소설의 ‘보편적 승리’는 독자들로 하여금 ‘재미있게’ 읽게 만드는 거라고 주장한다. 독서는 일종의 커뮤니케이션으로, 작가와 독자의 관계성이 깊을수록 효과적이라고 말한다. 작가와 독자의 관계성은 뭘까? &nbsp;‘저자는 독자를 향해 무언가를 말하고, 독자는 말해진 내용을 읽고 저자가 전하려는 바를 이해하려 한다. 커뮤니케이션이 제대로 이뤄지기 위해서는 화자가 청자에게 적절한 정보를 전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명료할수록 좋다. (75쪽)’&nbsp;소설은 항상 독자(타자)를 향해 있어야 한다. 소설을 평가하는 기준은 항상 독자가 재미있다고 느끼는지 어떤지(107쪽)이다. 이런 면에서 소설가는 예술가로서의 태도와 상업 작가로서의 태도, 두 가지 면이 요구된다(162쪽)고 말한다. &nbsp;소설에 정답이 있을 수 없다(150쪽)는 말에 공감했다. 소설이란 작가가 자신의 언어를 자신의 방식으로 탐구해 가는 과정에서만 존재(150쪽)한다고 하니, 독자들마다 독법이 다르듯, 작가들도 소설을 쓰는 방식이 모두 다르다는 걸 인정해야겠다. 저자는 ‘소설법(15쪽)’이란 표현을 사용했는데, 단순히 취향이나 선호도 같은 의미를 포함하면서 넘어서는 것으로 이해된다. 소설의 행간에 흐르는 어떤 흐름, 구조적인 조건들, 형태에서의 불문율 같은 것일 테다. 간혹 읽기 곤혹스러운 소설을 만날 때마다 작가 탓을 하거나 나의 수준을 저주해왔던 나로서는 다시 생각해 볼 문제였다. 저자에 의하면 작가와 독자의 ‘소설법’이 다를 뿐이다. 그러면서 ‘독자의 고집대로 소설을 읽는 게 바로 재미(19쪽)’라고 조언한다. 소설법이 맞지 않는 저자의 작품을 읽으면 대부분의 경우 시간을 허비하게 된다(19쪽)는 말은 위안이 된다. &nbsp;우리가 (소설을 포함한) 예술 작품을 감상하는 메커니즘은 압축된 작품을 해제하여 그 근본에 존재하는 ‘어떤 사람(작가)의 인지’를 발견하고 수용하여 ‘그 너머’의 세계로 넓혀가는 과정(148~149쪽)이라고 한다. 저자는 이 과정에서 일어날 수 있는 ‘오독’에 대해서도 언급하는데, 관점이 상당히 재미있다. 저자는 독자의 오독을 ‘작가의 머리에서 나온 이야기가 독자의 경험에 접속하고 정보를 전달한다는 커뮤니케이션 본래의 역할을 이탈하여, 거기에 존재할 리 없는 의미를 불러일으키는 일(80쪽)’, ‘각각의 해제 프로그램을 가지고 있는 독자들이, 작가가 제시한 작품이 작가가 의도한 것과 서로 다른 것을 환기하는 것(150쪽)’이라 보며, ‘많은 사람들에게 지지받는 작품일수록 오독을 유발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150쪽)’고 말한다. 작가의 손을 떠나 시장에 나온 작품은 이미 작가의 것이 아니다. 독자가 그 작품을 읽고 이해하는 과정엔 독자 자신의 삶과 체험에 영향을 받으므로 작품이 독자들에게 스며드는 정도와 양상은 천차만별일 테니, 저자는 그것을 당연한 감상,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로 보는 것 같다. 내게는 있어야만 하는 일로도 보이는데, 감상이 다양해질수록 작품이 생명력을 얻으리란 믿음 때문이다. 이는 곧 독서가 작가와 독자의 커뮤니케이션이라는 저자의 말, 고집대로 읽으라는 조언과도 상통한다. &nbsp;독법을 제시하고 일종의 방향을 제시하는 비평이나 리뷰의 역할에 대해서도 저자는 첨언하는데, 저자에 의하면 그것들이 독자들에게 색다른 결의 소설을 보여주어 감상을 확장시키는 긍정적인 역할을 강조했는데, 그 부분에 있어서 난 약간 회의적이다. 오늘날 소설 비평이 제대로 기능하고 있는지, 가장 원초적인 솔직함이 미덕인 독자 리뷰조차 도서를 협찬 받는 형식에 의해 훼손되고 있지는 않은지, 내 불신이 탄력을 받는다. &nbsp;저자인 ‘오가와 사토시’는 문단 데뷔 11년차인 일본의 중견 소설가로 장르를 넘나드는 전천후 작가다. 소설을 두 권 갖고 있으나 읽기를 미루고 미루다가, 어찌 먼저 읽은 게 이 책이다. 이 책은 소설을 쓰는 사람이 쓴 소설에 관한 에세이 성격이 강하다. 저자 스스로는 작법책이 아니라고 말을 하는데, 소설가가 소설에 관한 에세이를 쓰면서 작법에 대해 쓰지 않는 것이 가능하기나 할까. 작정하고 쓴, 교과서적인 작법책은 아니더라도 작가 자신의 집필 습관이라거나, 소소하게 터득한 know-how 같은 것이 심심찮게 나온다. 추상화와 개별화, 문체, 복선, 아이디어, 작풍 등은 작법의 영역이라 할 수 있는데, ‘(이미) 써버린 것에서 새로운 관점을 발견하고 아이디어도 발견(113쪽)’한다거나 ‘소설의 재미는 집필 과정에서 발생(97쪽)’한다는 걸 보면 ‘일단 쓰고 본다’는 작가의 평소 지침이 엿보인다. &nbsp;짧은 분량에 그리 어렵지 않은 것들을 저자가 수다 떨 듯 하고 있어 쉽게 읽히지만, 번역의 장벽에 자주 걸려 넘어졌다. 번역이 그리 잘 된 것 같지 않다. 일본어 특유의 표현이나 일본 문장을 한글로 옮겼을 때의 특이한 어색함 등이 난무한다. 도대체 ‘탈법소설(22쪽)’은 무엇이며, ‘열화판(158쪽)’은 무엇이란 말인가. 이런 단어들이 더러 눈에 띈다. 앞뒤 문맥으로 의미는 대강 ‘통밥’으로 때린다 쳐도, 어쩔 수 없이 일본 단어 그대로 풀었으면, 각주를 달던가, 한자라도 남겨 놓던가. 독자와의 소통을 이야기하는 책을 번역하면서 번역자야 말로 독자와의 소통은 아랑곳 않는 것처럼 보이니, 정말 어이없다.  &nbsp;에필로그로, 독자와 원활한 소통을 원하는 편집자와 고집을 부리면서도 독자 곁으로 조금이라도 가까이 가기 위한 작가의 티격태격, 고군분투, 아웅다웅을 보여주는, 짧은 소설이 실렸다. 이 책을 위해 따로 쓴 소설처럼 보이는데, 책을 마무리, 총정리해주는 느낌이랄까. 본문 어딘가에 나온 문장을 인용하자면, 이런 거다. &nbsp;❝작품이 닿기를 원하는 상대에게 부족함 없이 전해지도록(가급적 정확하게), 쓸데없는 시간을 뺏지 않도록(가급적 단도직입적으로), 그리고 가능하다면 상대가 나에게 일절 관심이 없다는 전제로(가급적 상대를 생각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151~152쪽)❞&nbsp;‘상대가 나에게 일절 관심이 없다는 전제로’. 전율이 흐른다. 맞는 말이다. 나는 소설가에겐 관심 없다. 내가 관심 있는 건 그들이 쓴, 지어낸 이야기, 즉 소설 작품이다. &nbsp;사족. &nbsp;위의 인용된 문장에서도 번역에 실수가 있다. ‘쓸데없는 시간을 뺏지 않도록’이 아니고 ‘쓸데없이 시간을 뺏지 않도록’이 맞는 문장이다. (어으. 증말)]]></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9984/98/cover150/k342130735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99849853</link></image></item><item><author>영꽃</author><category>마이리뷰</category><title>26년 일흔여섯 번째 책 - [심령들이 잠들지 않는 그곳에서]</title><link>https://blog.aladin.co.kr/764791159/17521243</link><pubDate>Thu, 17 Sep 2026 07:15: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64791159/17521243</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2922942&TPaperId=17521243"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0860/85/coveroff/8932922942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2922942&TPaperId=17521243"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심령들이 잠들지 않는 그곳에서</a><br/>조나탕 베르베르 지음, 정혜용 옮김 / 열린책들 / 2023년 01월<br/></td></tr></table><br/>26년 일흔여섯 번째 책. &nbsp;★★★☆&nbsp;1800년대의 미국. 초라한 무대에 오르지만 ‘제니’는 마술에 진심이다. 실력이 꽤 출중한 마술사로서 그녀는 자신의(그리고 모든) 마술을 설명이 가능한 속임수, 약간의 기술이 동원된 손재주로 간주한다. 어느 날 쇼를 끝낸 제니에게 한 남자가 나타난다. 탐정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남자는 제니에게 일을 제안한다. 당시 유명했던 영매(靈媒)인 ‘폭스 자매’의 비밀을 알아내 달라는 것. 많은 보수에 이끌린 제니는 그녀들의 강령회에 참여하여 은밀히 접근한다.  &nbsp;이야기의 중심엔 ‘사후 세계란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이 있다. 그리고 만약 그렇다면 그 세계의 존재들과 소통하는 게 가능할까 라는 의문이 뒤따른다. 있을 수 있는 일일까. 그렇다면 어떻게? 유물론자이고 회의론자인 제니는 폭스 자매의 속임수를 밝히려는 처음의 의도와는 달리, 과학과 이성으로 무장된 제 신념을 흔드는 경험을 하고 난 뒤 태도가 살짝 변한다. 의심은 호기심으로 바뀐다. &nbsp;이야기는 폭스 자매의 강령술을 속임수, 이단 행위, 사기 행각이라는 전제를 두고, 믿음(어쩌면 신앙)에 대한 사유들을 중심으로 전개되다가 중반을 넘어서면서 방향을 살짝 튼다.인물들은 각자 나름의 강한 영적 체험을 하게 되고, 이것은 폭스 자매의 ‘딱’ 소리에 얽힌 비밀과 부딪힌다. 어디까지 믿을 수 있고 무엇을 가짜로 치부해야 하는지, 작가는 진짜와 가짜를 섞어놓으며 그 경계를 흐린다. 이런 혼란은 인물들의 대립 관계를 흐리게 만들고 그들을 상처 받고 슬픔이 많은 보통의, 동등한 인간들로 만든다. 아버지의 유품인 보잘것없는 마술 안내서에 집착하는 제니, 누가 아버지의 진정한 아들인가 증명하기 위해 대립하는 ‘로버트-윌리엄’ 형제, 우연한 사건으로 본의 아니게 쇼 비즈니스 계로 내몰려 제대로 된 삶을 살아본 적이 없는 폭스 자매의 갈등은 서로를 위로하며 감긴 눈을 뜨게 도우면서 잦아든다. 모종의 종교 행위로 시작된 이야기는 각자의 마음속 묻힌 상처와 아픔을 다독이는 결말을 맺는다. &nbsp;영혼 운운하는 게 비이성적이고 야만의 찌꺼기라는 결론은 없다. 그것이 실재하니 부정해서는 안 된다는 결론도 없다. 이야기는 그 사이에서 균형을 잘 맞추고 있는데, 결국 아픔을 뒤로 하고 삶을 재정비하는 인물들의 이야기로 읽힌다. 동시에 ‘믿음(신앙, 종교, 뭐든지…)’에 대한 메타포로 읽히기도 한다. 작품은 이런 질문을 하도록 만든다. 슬픔과 좌절의 나락에 빠졌을 때, 우리를 안아 일으키고 구렁에서 건져줄 수 있는 건 무엇일까. 그런 기능만 중시할 때, 우리가 빠질 수 있는 함정, 맞닥뜨릴 수 있는 위험은 무엇일까. 나아가 진짜 종교와 사이비의 경계는 무엇일까. 누군가의 믿음은 다른 이들에게 미신일 수 있지만, 테두리 밖에서 본다면 의심스럽게 보이는 건 거대 종교들도 마찬가지 아닐까. 어떤 믿음이 내게 진정한 힘이 된다면 그것만으로 가치 있는 것일 텐데, 그것이 만약 속속들이 거짓이라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은 의도를 지니고 좋은 결과로까지 이어진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선일까 악일까. &nbsp;사후 세계란 실재하는가. 영혼은 존재하는가. 어떻다고 그 누가 말할 수 있을까. 확인할 수도 없고 확인된 바도 없으니 어떤 말도 섣부를 테고, 유일하게 확인할 방법은 스스로 경험하는 것일 텐데 그러기엔 증명하기에 너무 늦었으니, 우리 산 사람들은 결코 모를 일이다. 그런 걸 두고 있네 마네, 사기네 어쩌네 하면서 입씨름해봤자 무의미하고 불필요한 체력 낭비에 지나지 않으니, 그냥 잠자코 있는 게 제일 낫지 않을까.   &nbsp;2011년의 영화, ≪디 어웨이크닝(The Awakening)≫과 구조가 비슷하다. 1차 세계대전 후의 혼란한 영국을 배경으로 영매들 ‘털기’ 전문인 여성 수사관이 으슥한 고성에서 진짜 유령을 마주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인데 상당히 재미있다. 소재로 비슷하기는 ‘사라 페너’의 소설 ≪런던 비밀 강령회≫도 떠오르는데, 이 소설은 (내가 읽기에) 완전 개망, 폭망이다. 무당 ‘김금화’의 삶을 다룬 다큐멘터리 ≪만신(2014)≫도 생각난다. 다른 건 둘째 치고 ‘무교(武敎)’가 ‘무속(-俗)’이란 멸칭을 갖게 되는 과정에서 정치적인 힘이 어떻게 작용했는지, 토속 종교를 주류 사회에서 어떻게 밀어내려고 안간힘을 썼는지에 관해서라면 이 작품과 관련이 많다. 거대 시스템의 횡포라면 우리 영화 ≪불신지옥(2009)≫도 생각난다. 기독교 중심적인 시선으로 한 가정 내의 비극을 통렬하게 보여준다. &nbsp;사족. &nbsp;1. 작품 속 ‘폭스 자매’와 ‘로버트-윌리엄’ 형제 모두 실존 인물이라고 한다. ‘핑커튼 탐정 회사’ 역시 현재까지 존재하는 실제의 기업이다. 지금은 보안 업체에 매각되어 명맥만 유지하는 중이라고.&nbsp;2. 미국을 배경으로 한 소설이지만 작가는 프랑스인이다. 여성 캐릭터들의 심리를 섬세하게 잘 그렸는데 작가는 남자다. 이런 발언도 차별일까.&nbsp;&nbsp;]]></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0860/85/cover150/8932922942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08608536</link></image></item><item><author>영꽃</author><category>마이리뷰</category><title>26년 일흔다섯 번째 책 - [말없는 주검 은밀한 애도]</title><link>https://blog.aladin.co.kr/764791159/17521239</link><pubDate>Thu, 17 Sep 2026 07:07: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64791159/17521239</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462130838&TPaperId=17521239"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9838/36/coveroff/k462130838_3.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462130838&TPaperId=17521239"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말없는 주검 은밀한 애도</a><br/>오가와 요코 지음, 박성민 옮김 / 시와서 / 2026년 08월<br/></td></tr></table><br/>26년 일흔다섯 번째 책. &nbsp;★★★&nbsp;열한 편의 단편이 실려 있다. 연작이라고 해야 할까, 작품들이 서로 느슨하게 연결되어 있다. 일단 큰 역할은 없더라도 공통된 공간 배경이 언급된다. 그리고 인물들이 서로 겹치는데, 첫 번째 이야기에 스치듯 나왔던 인물이 다음 작품에 중요하게 다뤄지고, 그 작품의 단역이 또 다음 작품의 주요 인물이 되고… 이야기들이 이렇게 조금씩 겹치다가 마지막 작품은 첫 작품으로 되돌아오는, 그런 식의 구성이다.  &nbsp;이야기들로 말할 것 같으면 제목처럼 ‘죽음과 애도’에 관한 이야기로 읽기엔 조금 모호한 작품들이 있다. 작가는 죽음을 생(生)의 반대 개념으로서만이 아니고 ‘존재의 사라짐’으로 그 의미를 확장한다. ‘애도’라는 단어도 행위보다는 감정과 정서를 드러내기 위해 선택된 단어로 보이는데, 작품들마다 기저에 흐르는 감정이란 게 약간 독특하다. 쓸쓸하면서 서늘하달까. &nbsp;형식적인 측면에서 이 작품집은 적당히 흥미롭고 예쁘게 꾸며졌지만 시커먼 아가리를 벌린 동굴이 도사린 ‘인형의 집’ 같다. 작품들마다 슬픔과 외로움, 한탄과 애수, 아련한 노스탤지어 등이 적절히 배어있고 여기에 이야기의 그늘 아래 은밀한 어둠, 사악함, 기괴함 등이 어우러져 왜곡된 아름다움 같은 독특한 질감을 만들어낸다. 작정하고 무서운 이야기를 의도한 것도 아니고 첫사랑 같은 설렘도 없고 눈물샘 자극하는 신파도 없는, 독특하면서도 밍밍한, 일본 소설 특유의 맛이랄까, 분위기랄까, 그런 걸 느꼈는데, 이는 일본 소설에 대한 편견일 수 있다.  &nbsp;각각의, 혹은 전체의 이야기들은 어떤 의미일까. 아리송하다. 모든 소설 작품에 의미란 게 있을 리가 없고 또 그것을 굳이 캐내려는 노력이 그야말로 무의미하다고 말들은 하지만, 난 솔직히 그런 독자고 그런 식으로 책을 읽어 왔다. 내가 소설을 읽으며 필요한 건 ‘이건 무엇에 관한 이야기인가’이다. 적어도 작가가 ‘왜 이런 작품을 써야만 했던 건지’ 그 의도라도 짐작할 수 있길 바란다. 그런 면에서 이 작품집은 ‘글쎄올시다’라는 감상이 적절하겠다. 강렬하면서 동시에 편집증적인 이미지를 주기 위한 시도라면 일단은 성공했다. 하지만 의미가 있는 읽을거리로서는 약간 미심쩍다. &nbsp;]]></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9838/36/cover150/k462130838_3.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98383654</link></image></item><item><author>영꽃</author><category>마이리뷰</category><title>26년 일흔네 번째 책 - [엔터를 누르세요 ■]</title><link>https://blog.aladin.co.kr/764791159/17517205</link><pubDate>Tue, 15 Sep 2026 07:38: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64791159/17517205</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022939934&TPaperId=17517205"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3687/48/coveroff/k022939934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022939934&TPaperId=17517205"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엔터를 누르세요 ■</a><br/>존 발리 지음, 최세진 옮김 / 아작 / 2024년 04월<br/></td></tr></table><br/>26년 일흔네 번째 책. &nbsp;★★★☆&nbsp;독신에 싱글, 거의 은둔형 외톨이로 살고 있는 ‘빅터’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온다. 합성된 기계 음성으로 전해지는 내용에 의하면 이웃에 사는 ‘클루지’에게 당장 가봐야 하며 할 일을 해야 한다는 것. 그 후엔 적절한 보상이 있을 것이라는 것. 할 일이란 뭘까? 그리고 보상이란 건 또 뭘까? 빅터는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이웃집을 향하는데, 그곳에서 죽은 남자를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집안을 가득 채울 정도의 컴퓨터와 어마어마한 양의 약물. 후에 경찰이 오고, 컴퓨터에 저장된 클루지의 유언이 발견되는데, 그 내용인 즉, 모든 재산을 빅터에게 남긴다는 것. 그저 눈인사 정도만 나누던 남자의 호의치곤 너무나 뜬금없고 엄청난데다 클루지의 사인도 자살인지 타살인지 의심스럽다. 컴퓨터 전문가인 ‘리사’가 수사에 투입되고 빅터 역시 사건에 말려든다. &nbsp;미스터리의 얼개를 지닌 SF 이야기다. 읽다 보면 흔히 요즘 상상하는 SF의 전개와는 거리가 좀 있다. 이 작품이 발표된 시기가 80년대 중반. 당시의 미국 가정에 컴퓨터 보급률은 고작 10퍼센트였다고. 그것이 여전히 미지의 영역, 용도를 확정할 수 없는 기계, 비씨기만 한(없어도 되는) 사치품, 대중화되기 이전의 최첨단 기술이었음을 고려할 때, 작품의 SF적인 상상력이 아우른 영역이 지금의 그것과는 많이 달랐음은 분명하다. 당시의 대중이 그것에 대해 가졌던 호기심, 두려움은 오늘날 우리가 A.I. 기술이나 사람을 대신한다는 로봇에 대해 갖는 감정과 비슷하지 않았을까. &nbsp;작품 안에서 컴퓨터라는 소재를 대하는 방식을 보면 조금 더 분명해진다. 이야기 속 컴퓨터(정확히는 통신망)는 50~60년대 SF 영화에 나오는 살인 광선이나 지구에 떨어진 외계 생명체의 알처럼 취급된다. 그것은 사용자를 조종하고 두뇌를 마비시키고 세뇌시킨다. 각각의 기계들은 그 자체로도 괴물이지만 하나의 거대한 네트워크를 구축할 때 더 큰 위용을 드러낸다. 스스로 생각하고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지능을 갖게 되어 수뇌인 정보국을 통해 대중들을 통제하고 감시한다(‘조지 오웰’의 ≪1984≫가 생각난다). 그것은 오늘날처럼 업무와 실생활에 활용하고 게임 등의 여가를 즐기는, 그런 친밀한 기계와는 달랐다. (현재의 독자가 80년대의 SF 소설 속 컴퓨터를 보는 방식과 80년대의 작가가 자신의 소재와의 유사성을 30년 전 SF 영화에서 찾는 것과 닮았다.)&nbsp;충분한 유머가 있음에도, 이야기 전반엔 공포와 불안이 녹진하게 흐른다. 컴퓨터라는 소재는, 낯섦, 잘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란 감정을 기반으로 당시의 자국 내 과장된 안보의식, 소련에 대한 적대감, 첨예한 긴장, 과거 전쟁의 트라우마 등과 얽히고설켜, 작품 안에 현재의 불안과 미래에 대한 공포를 적절하게 심어놓는다. 한국 전쟁 트라우마가 있는 빅터와 베트남 전쟁의 피해자였던 리사는 캐릭터의 쓸모가 너무나 눈에 띄지만 이야기 안에 잘 스며든다. &nbsp;미스터리, 범죄 소설이 아니므로 그에 상응하는 해답 같은 건 없다. 결말은 대체적으로 모호하다. 다만 특정 짓기가 어려울 뿐, 독자는 이 비극적인 이야기 뒤에 도사린 거대한 음모의 실체가 무엇인지 모르는 건 아니다. &nbsp;미래, 그리고 그에 따른 과학 기술의 비약적인 발전. 기술 개발의 주체는 우리 인간이지만 인류가 과연 그것을 따라잡을 수 있을까, 뒤처지고 도태되어 오히려 기계의 지배를 받는 것이 아닐까, 이런 고전적인 두려움. 그런 것들은 항상 존재했던 것 같다. 글쎄. 그건 동전의 양면 아닐까. A.I.에게 일자리를 빼앗기느니, 인간이 하는 일은 모두 로봇으로 대체된다느니, 이런 예측들. 오늘날의 기후 위기 역시 같은 맥락의 위협이다. 반대로 과학과 기술의 덕을 보는 부분도 있으니, 그것이 주는 비전이 언제나 긍정적인 것도 부정적인 것도 아닐 것이다. 문제는 균형일 텐데, 그게 어려운 거다. &nbsp;이 소설이 세상에 나온 지 꽉 채워 40년. 당시엔 하이 테크놀러지 SF 대접을 받으며 해당 장르의 주요 문학상을 휩쓸며 명실상부 작가의 대표작 중 하나가 되었다고 하는데, 지금의 우리에게 너무나 친근한 컴퓨터가 이리도 무서운 존재였나, 하는 생각에 격세지감을 느끼는가 하면, 가상의 통신망이 우리에게 가할 수 있는 해악이 요즘에도 분명 존재하므로, 시기와 위상만 달라졌을 뿐 여전히 두려움의 대상인 건 여전한 것 같다. &nbsp;사족. &nbsp;1. 출판사 ‘아작’은  ≪The John Varley Reader; 30 Years of Short Fiction≫이란 미국에서 2004년 출판된 중단편 선집을 ≪베스트 오브 존 발리≫라는 제목으로 번역 출판하는데, (이유는 명확하지 않으나) 중편 세 편을 따로 뽑아 ‘아작 YA’ 시리즈의 단행본으로 낸다. 당연히 ‘베스트 오브 존 발리’에는 빠져 있다. 이 책도 그렇게 우리나라 독자들을 만나는데, 출판사 하는 짓이 참 얌체 같다가도 출판 시장 형편을 생각하면 좀 짠하기도 하고.<br>2. 그런데 미국의 원작엔 각각의 단편 앞에, 작가가 작품을 소개하는 ‘사설’이 실려 있는데, ‘아작’은 이 사설들만 떼어 전자책으로 출판한다. 얌체를 떠나 좀 구질구질해 보인다. <br>3. ‘영 어덜트’ 독자들을 독자층으로 겨냥한 시리즈로 짐작하는데, 이 책은 여러 면에서 성적인 장면, 표현들이 흔하게 나온다. 행간에 이성애자 백인 남성이 갖고 있는 (여성에 대한, 아시아에 대한)편견도 작가는 서슴없이 드러내는데 괜찮은 건지? 작품이 발표된 시기를 감안하면 어쩔 수 없는 것 같기도 하고. 혹시 ‘YA’가 그 의미 아닌 건가? <br>4. 제목의 ‘■’ 기호는 오타나 글씨가 깨진 게 아니다. 아마도 커서 같은데, 컴퓨터 모니터의 화면을 그대로 옮긴, 작가의 유머로 보인다. &nbsp;]]></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3687/48/cover150/k022939934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36874831</link></image></item><item><author>영꽃</author><category>마이리뷰</category><title> 26년 일흔세 번째 책 - [이토록 평범한 미래]</title><link>https://blog.aladin.co.kr/764791159/17508624</link><pubDate>Fri, 11 Sep 2026 03:25: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64791159/17508624</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54680003&TPaperId=17508624"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0211/80/coveroff/8954680003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54680003&TPaperId=17508624"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이토록 평범한 미래</a><br/>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22년 10월<br/></td></tr></table><br/>&nbsp;26년 일흔세 번째 책.&nbsp;★★☆&nbsp;김연수의 작품집. 여덟 편의 작품이 실렸다. 오롯이 개인적인 감상이다. &nbsp;작가의 전작을 섭렵한 건 아니지만, 내가 읽은 김연수의 작품집 중에서 가장 이질적이다. 뭔가 새로운 걸 시도했다는 생각이 든다. 책을 읽고 처음 든 느낌. ‘백가흠’의 소설집, ≪같았다≫를 읽고 난 후와 비슷했다. 한국 문학계에서 ‘대가’ 대접은 조금 이를지라도 ‘노련한 중견’ 소리는 충분히 들을 수 있는 사람이 이렇게 무너지나, 하는 생각. 어딘지 아등바등해 보인다고나 할까, 처연해 보인다고나 할까. (내가 읽은) 전작들에 비하면 약간 쥐어짜는 듯, 안간힘을 쓰는 듯해서 안쓰럽다는 생각도 조금은 했던 것 같다. 작가의 개성이나 장점들이 이 작품집에선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nbsp;작품들이 공허하다. 실체가 없다. 아이디어와 설정, 개념을 소개하고 끝나는 이야기들이 많다. 심하게 표현하면 겉만 번드르르하다. 뭔가 알록달록 그럴 듯한 포장을 벗기고 나면 모래 한 줌 들어 있는 선물 상자 같다. &nbsp;관념적이고 명확하지 않은 문장들도 한몫한다. 좋게 말하면 시적이고 감각적이라 할 수 있겠으나, 당의(糖衣)를 입힌 듯, 현혹하지만 솔직하지 못한 문장들이 많이 거슬린다. 달큰하고 화사한 색깔의 솜사탕을 주먹에 쥐면 설탕 한 줌 남는 것에 비유할 수 있겠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문체 비슷하다는 생각은 오래전부터 해왔으나, 이 작품집에선 하루키 ‘짝퉁’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다. &nbsp;‘올드’한 느낌이 강하다. 작가의 경력이나 연령을 고려하면 이상할 것도, 딱히 거슬릴 것도 아니지만 시대의 흐름이나 인식과 시각의 변화를 따라잡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다. 어떤 작품에서 작가는 여전히 과거 어딘가에 머물러 있는 것 같다. 젊은 척을 하라는 게 아니다. 현재의 물결에 잘 적응한 작가로서의 스탠스랄까. 그런 점이 아쉽다. 다른 작가와 비교하는 건, 이 작가에게나 저 작가에게나 예의가 아닌 건 알지만, 어쩔 수 없이 ‘이청해’의 21년 출간된 소설집, ≪어디까지 왔나≫와 비교를 하게 된다. 팔순이 다 된 작가가 쓴 작품들에선 이런 ‘촌스러움’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으니까. &nbsp;표제작 &lt;이토록 평범한 미래&gt;는 삶의 긍정성을 이야기한 작품으로 읽히는데 전반적으로 설득력은 떨어진다. 독자가 ‘아!’하는 지점이 없다. 현재와 미래, 과거라는 시제에 대한 어떤 개념, 아이디어는 흥미롭지만 작품은 이를 설명하느라 바쁘다. 그게 전부다. ‘미래를 기억한다’는 표현은 이 작품의 핵심처럼 보이는데, 대체로 의미가 모호하다. ‘최진영’ 역시 23년 이상문학상 대상을 받은 단편, &lt;홈 스위트 홈&gt;에서 똑같은 문장을 쓴 바 있다. 하지만 최진영의 그 문장은 이야기 안에서 ‘시간은 발산한다’는 표현과 어우러져 받아들이는 데 크게 무리가 없다. 이야기와 인물에 잘 녹아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김연수의 이야기에선 이야기랄 것도 없고 인물들 역시 극적으로 과장된 캐리커처들(관심종자)뿐이라 독자들이 감응할 여지가 없다. 작가는 이런 빈틈을 메우기 위해 여기저기서 많은 것들을 끌어넣는데 그 통에 산만하고 정신이 없다. 집약적인 간결함이란 단편소설의 미학적 측면에서 봐도, 이 작품에 점수를 후하게 주지 않을 이유는 충분해 보인다. &nbsp;&lt;난주의 바다에서&gt; 역시 산만하게 읽힌다. 여기저기서 데려온 것들로 크게 부풀려진 덩치에 비해 속은 텅 비어 있다. ‘정난주’의 이야기가 작품 안에서 지나치게 강조되어 있는 탓에 막상 주요 인물인 ‘통계학과 은정이’의 시름이 크게 와닿지 않는다. 주객이 전도됐다고 할까. 추자도 관광 홍보 영상에 어울릴법한 이야기이긴 하지만 소설 작품으로는 무리다. 어중간한 곳에서 멈추지 않고 경험의 극대치를 찍자는, ‘끝까지 가본다’는 메시지는 좋았다. &nbsp;&lt;진주의 결말&gt;은 이 책에서 그나마 눈에 띈 작품이었다. ‘유진주’라는 인물의 행위와 의도를 알려는 노력, 과정이 이야기의 핵심인데, 그 끝을 말끔히 보여주지 않는 미완의 결말이 매력적이었다. 범죄 수사 드라마나 사이코스릴러에 어울리는 소재도 난 잘 쓸 수 있어, 라고 작가가 말 하는 듯하다. 썩 잘 한 것 같다. 한 인간을 파악하는 것, 한 마디로 정의하는 것이 가능할까, 라는 질문은 언제나 유효하다. 동시에 누군가를 이해하는 것도 거의 불가능하지 않을까. 인간은 ‘혼돈 그 자체’다. 인간에게 ‘진심’이란 없다는 전제 아래, 오로지 임시방편의 핑계와 구실만 있고 그건 ‘참’이 아니라는 사유는 흥미로웠다. &nbsp;&lt;바얀자그에서 그가 본 것&gt;은 몽골에 대한 환상이 있는 나로서는 대단히 흥미롭게 읽은 작품이었다. 특히 수려한 자연 풍광의 묘사나, ‘빅토르 위고’를 인용하면서 밤의 신비로움을 표현한 부분은 나를 사로잡았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연애 이야기를 이다지도 진부하고 장황하고 재미없게 할 수도 있구나, 하고 놀랐다. 이해할 수 없는, 도무지 무슨 감정인지 헤아리기 어려운 인물을 보면서, 작가가 작품에 과한 치장을 하고 있다는 생각, 약간 허세랄까, 현학적이라고 할 수도 있겠는데, 독자의 공감, 독자와의 교감과는 크게 상관없는 것에 더 힘을 쓰고 있지는 않았는지 우려가 들었다. &nbsp;&lt;엄마 없는 아이들&gt;에서는 이혼과 외부모 가정, 남겨진 아이들에 대한 작가의 고루한 상상력, 때 늦은 현실 감각 등이 보이는 것 같아 안타까웠다. 이 작품 역시 독자의 감정이 얼마나 움직이느냐가 중요한 작품처럼 읽히는데, 공감이 쉽지 않았다. 가장 단 적인 예로, ‘명준’과 ‘혜진’을 같은 수위에 놓고 마치 땡처리 하듯 취급하는 작가의 태도가 거슬렸다. 엄마 없는 가정에서 크긴 했어도 명준과 혜진이 품은 내면의 결은 완전히 다르다. 명준은 엄마에 대한 ‘그리움’이 큰 사람인 반면, 혜진이 엄마에게 지닌 감정은 ‘분노’가 대부분일 것이다. 명준은 엄마 없이 자란 자신의 숙명에 순응했을 테고, 혜진은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고 반항하고 저주처럼 여겼을 것이다. 두 사람이 어찌 같을 수 있을까. 독자는 누구에게 감정을 줘야 하는가. 두 인물의 내면이 합쳐졌을 때 시너지가 생겨 이야기가 의도한 효과가 날 텐데, 서울과 부산을 한데 엮으려니 무리가 생긴다. &nbsp;지나치게 낭만적인 설정의 &lt;다만 한 사람을 기억하네&gt;는 타인의 기억 속의 나, 기억의 주체가 아닌 대상으로서의 나에 대한 이야기로 읽었다. 잊히는 건 정말 두려운 일일까. 영원히 기억되는 것이 좋기만 한 일일까. 잊히는 것과 기억되는 것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나는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위로’에 대한 화두도 엿보였는데, 진정한 위로란 의외로 평범하고 사소한 것에서 오는 게 아닐까, 보잘 것 없는 삶이라도 그것에 만족하고 감사하지 않는다면 위로란 게 과연 의미가 있을까, 무엇보다 제 상처를 어루만지고 살필 수 있는 건 바로 자신이라는 생각. 빤하지만 행동이 어려운 그런 생각들을 했다.반면, 결국 ‘희진’의 이야기를 하고 있으면서 메일이란 수단과 다른 인물을 동원한, 이유 없이 복잡한 얼개는 흠처럼 보인다. &nbsp;&lt;사랑의 단상 2014&gt;는 사랑에 실패한, 이별을 겪고 상처받은 짐승처럼 웅크리고 있는 남자가 아픔을 극복하고 자신을 다시 세우는 회복의 과정을 담은 이야기다. 이국적인 여행지와 낯선 소재들이 제법 나오는데, 이런 멋부림이 감상적이고 낭만적인 이 작품에서는 썩 어울린다. ‘몸은 무죄, (늦된) 마음은 유죄’라는 문장 역시 매우 트렌디하게 들려 이 작품의 정서에 잘 스민다. 자칫 바람 맞은 남자가 징징거리는 공허한 이야기로 읽혔을 법도 하지만, 작가는 형식적인 면에서 기교(과거와 현재의 경계가 모호한 대화 구성과 영화의 오버랩(overlap)같은 장면, 등)를 부려 위험을 극복한다. 마지막에 ‘세월호 참사’ 이야기는 정말 뜬금없다. 본 이야기에 잘 섞이지 않을뿐더러 이런 식으로 그 사건을 ‘소비’해도 되는지, 작가가 무슨 생각이었을지 궁금하다. &nbsp;영화 ≪인터스텔라≫를 연상케 하는 &lt;다시, 2100년의 바르바라에게&gt;의 중요한 화두는 ‘시간’이다. 그런 이유로 책 머리에 실린 표제작, &lt;이토록 평범한 미래&gt;의 변주처럼 읽히는데, (작품이 어땠는지와는 별도로) ‘시간’이라는 소재를 작가 자신의 말로 좀 더 잘 풀어낸 것 같다. 우리는 광활한 우주, 영원한 시간 속에서 ‘나’라는 존재를 어떻게 인식할 것인가. 과거는 현재의 나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을까. 그리고 현재의 나는 미래에 어떤 영향을 주게 될까. 이런 사유가 가능했다. 과거의 영향을 받았으므로 나는 과거에도 존재했고, 현재의 나는 미래에 영향을 줄 것이므로 나는 미래에도 존재할 것이다. 나의 육체는 머지않아 사라질 테지만 ‘실재하지 않음’의 상태로 나는 존재할 것이다. 과거에도 나는 존재했다. 시간의 영속성(eternity) 위에서 우리는 어쩌면 영원하다. 과거와 현재, 미래는 분명한 경계로 서로 단절된 것이 아니고 겹치고 영향을 주고받는다. 시간의 연속성(continuity) 위에서도 우리는 영원하다. (작품을 읽으면서 들었던 생각과는 달리 글로 적으려니 뭔가 횡설수설하게 된다)존재와 시간, 철학과 과학, 심지어 영성적인 색채까지 어우러져, 작품을 읽으면서 드는 생각이 풍성했는데, 이야기 자체보다 이런 상상들이 더 재미있었다. 반면, 시간이 중첩되고 서로 원인을 제공하고 결과를 야기한다는 개념이 언제나 세계의 확장, 존재의 확장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돌고 도는 뫼비우스의 띠나, 꼬리를 물고 영원히 도는 우로보로스의 뱀이나,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의 질문은 인간의 내면, 인식을 고립시키는 설정이 되기도 한다. SF-호러 장르나, 다크 판타지 장르의 다수의 영화에서 종종 보이는 서사 장치이기도 하다.  ‘소설=이야기’라는 엄격한 기준 아래라면, 이 작품 역시 앞의 몇 작품과 마찬가지로, 극화, 이야기화, 소설화에 실패한, 소재와 개념에서 주저앉은, 이야기를 적극적으로 펼쳐 보이는 대신 기존의 무언가를 끌어다 지면을 때운 것처럼 보인다. 하나마나 한 말이지만, 이는 독자에 따라 다를 것이다. &nbsp; - - - - - -&nbsp;문학, 특히 소설을 어떤 관점에서 보느냐는 독자마다 다르다. 그건 취향이나 선호도의 문제 이상이다. 보다 먼저, 소설이 무엇인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독자 스스로의 고민이 먼저 이뤄져야 할 것이다. 독자는 자신의 결정에 따른다. 자신의 기준으로 소설을 읽을 권리가 있다. 그건 또한 독자로서의 의무이기도 하다. 작가의 손을 떠난 한 권의 책은 멀리 나아가 세상의 파도에 휩쓸린다. 세파에 휩쓸려 만신창이가 되는 것도, 고이 모셔져 성물(聖物)로 숭배받는 것도 모두 작품의 운명이다. 그리고 그건 온전히 독자에게 달려 있다. 응당 그래야 한다고 믿는다.&nbsp;]]></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0211/80/cover150/8954680003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02118006</link></image></item><item><author>영꽃</author><category>마이리뷰</category><title>26년 일흔두 번째 책 - [쥐덫]</title><link>https://blog.aladin.co.kr/764791159/17504203</link><pubDate>Wed, 09 Sep 2026 03:49: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64791159/17504203</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8201031&TPaperId=17504203"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5/9/coveroff/8938201031_3.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8201031&TPaperId=17504203"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쥐덫</a><br/>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유명우 옮김 / 해문출판사 / 2002년 05월<br/></td></tr></table><br/>26년 일흔두 번째 책. 애거서 크리스티 다시 읽기 스물여섯 번째 책. &nbsp;★★★★&nbsp;작가의 대표작 중 하나인 중편 ≪쥐덫(the Mousetrap)≫과 여덟 편의 단편이 실려 있다. &nbsp;작가는 일찌감치 자신의 소설 작품을 희곡으로 각색하여 무대에 올려왔는데, 이 작품이야말로 희곡 작가로서 작가의 인기와 성공의 정점을 찍은 계기가 됐다고 할 수 있다. 원래 이 작품은 영국 왕실, 메어리 공주의 생일 선물을 위한 라디오드라마 극본(원래 제목은 ≪Three Blind Mice, 47년≫)이었다. 이후에 소설로 개작된 것이 이 책에 실린 것이고 나중에(52년) 희곡으로 각색, 무대에 올라 지금에 이른다. 연극 ≪쥐덫≫은 지금도 공연되고 있는데, 세계에서 가장 롱런한 연극 작품으로 ‘기네스 북’에 이름을 올린다. &nbsp;소설로서 ≪쥐덫≫은 클로즈드 서클(closes circle) 미스터리의 고전적인 작품이다. 폭설로 고립된 산장이라는 매력적인 무대와 그곳에 갇혀 오도 가도 못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살인이 벌어지고, 여기에 ‘아동 학대’라는 사회적 이슈가 범죄 동기로 드러난다. 전형적인 후던잇(whodunit) 작품으로 구성이 지나치게 도식적이지만 이야기가 주는 긴장감과 수수께끼는 언제 읽어도 생생하다. 작가는 범인은 누구일까, 하는 문제에는 물론이고 과연 다음에 누가 죽을까, 에도 힘을 쏟는다. 이 작품의 피살자들은 모두 과거의 어떤 사건에서는 가해자였다. 이야기가 진행하면서 범죄의 동기가 ‘복수’라는 게 서서히 드러나는데,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인 범인을 향한 양가감정이 감상의 핵심이다. 살인이 성공하면 복수가 이뤄졌다는 것을 의미하지만 동시에 손에 피를 묻힐 수밖에 없는 범인에게 독자는 안타까움을 느낀다. 45년 영국, 위탁 가정에서 실제 발생한 ‘데니스 오닐(Dennis O’neill) 학대 치사 사건’이 모티프가 됐다고 한다. 작가가 처음의 라디오드라마 극본을 단 일 주일만에 써냈다는, 혀를 내두를만한 일화도 전해진다. &nbsp;그 외에 실린 단편 작품들은 작가가 과거에 잡지에 발표한 단편들을 추려 모은 것들인데, 출연진(?)이 화려하다. ‘포와로’, ‘미스 마플’, 그리고 귀하디귀한 ‘할리 퀸’까지. 작가의 팬이라면 화려한 상차림 앞에서 군침만 흘려도 분명 행복할 터. &nbsp;죽은 삼촌이 남긴 유산을 찾으려는 커플의 이야기인 &lt;이상한 사건&gt;, 질투와 열등감에서 비롯된 살인을 해결하는 &lt;줄자 살인사건&gt;, ‘완벽함’ 뒤에 도사린 사악함을 경고하는 &lt;모범 하녀&gt;, 화려하고 비밀스러운 연막 뒤에 가려진 진실을 파헤치는 &lt;관리인 노파&gt;에선 미스 마플이 활약한다. 그리고 이기심에 의한 치정 살인을 고발하는 &lt;4층 아파트&gt;, 유괴된 아이를 구하는 이야기인 &lt;조니 웨이벌리의 모험&gt;, 습관과 일관성에 어긋난 행동을 단서로 범죄를 추적하는 &lt;24마리의 검은 티티새&gt;에서는 포와로가, 살인 사건을 두고 서로 자신이 범인이라고 주장하는 커플의 자백을 앞에 두고 진위를 밝히는 &lt;연애 탐정&gt;엔 할리 퀸이 등장하여 장기를 유감없이 발휘한다. &nbsp;이 작품집이 특별한 또 다른 이유는 작가의 다른 장편들과 비슷한 단편들이 무려 두 편이나 된다는 사실이다. &lt;관리인 노파(the Case of the Caretaker, 42년)&gt;는 ≪끝없는 밤(Endless Night, 67년)≫과 비슷하고 &lt;연애 탐정(the Love Detective, 26년)&gt;은 미스 마플의 데뷔 장편인 ≪목사관 살인사건(the Murder at the Vicarage, 30년)≫을 연상케 한다. 각각의 작품들을 짝을 지어 두고 비교하면 단편을 장편으로 발전시킨(다시 쓴) 경우라고 여겨지는데, 작가가 플롯을 재활용하는 것으로 유명했던 걸 염두에 둔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nbsp;사족 &nbsp;태어나 처음 관람한 연극이 바로 ≪쥐덫≫. 아직 기억에 남는다. 고등학교 졸업을 앞둔 겨울이었고 정동의 ‘마당 세실극장’을 향해 가는동안 입에서 피어오르던 입김, 발 아래 사박사박 눈 밟히는 소리가 지금도 눈과 귀에 선하다. 생전 처음의 연극. 그것도 내가 좋아하는 작가의 이야기라니. 그 흥분, 그 설렘. 어찌 행복하지 않을 수가.내가 애거서 크리스티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알았던 누나가 데리고 갔었는데, 정작 누나는 그걸 기억 못 한다.&nbsp;]]></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5/9/cover150/8938201031_3.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50938</link></image></item><item><author>영꽃</author><category>마이리뷰</category><title>26년 일흔한 번째 책 - [에티의 여름]</title><link>https://blog.aladin.co.kr/764791159/17501962</link><pubDate>Tue, 08 Sep 2026 04:29: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64791159/17501962</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962130733&TPaperId=17501962"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9981/58/coveroff/k962130733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962130733&TPaperId=17501962"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에티의 여름</a><br/>루시 스티즈 지음, 노진선 옮김 / 다산책방 / 2026년 08월<br/></td></tr></table><br/>26년 일흔한 번째 책.<br> ★★★&nbsp;‘내셔널갤러리’ 안. ‘성찬’이란 제목의 그림. 13인분의 음식이 차려진 테이블을 그린 대작이다. 그림의 어두운 한 구석에 ‘에두아르 타르튀프’라는 화가의 사인이 보인다. 그 앞에 초로의 여자가 서 있다. 그녀는 그 그림이 36년 전, 불에 전소됐음을 기억한다. 그녀 자신이 그 불을 질렀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재, 그녀가 마주한 그림은 바로 그 그림이다. 어떻게 된 일일까. &nbsp;짧은 프롤로그엔 이야기 전체의 가장 중요한 비밀이 숨겨진 동시에 가장 핵심적인 스포일러를 흘리기도 한다. 과거에 불에 타 사라진 그림이 지금 눈앞에 있다면, 그건 뭐다? &nbsp;시간을 거슬러 1920년. 인물들이 소개되고 그들의 이야기가 시작되면, 어떤 사정인지 대강 짐작이 된다. 하지만 그 사정이란 게 절대 수월하지 않다. &nbsp;‘빛의 거장’으로 불리는 타르튀프(타타)는 은둔한 화가다. 그의 작업과 생활 전반을 관리하며 돕는 사람은 그의 조카인 ‘실베트(에티)’. 두 사람의 조용하고 틀에 짜인 일상은 타르튀프에 대한 기사를 쓰려는 기자 ‘조지프’의 출현으로 조금씩 흔들린다. 사실, 이런 표현은 조지프에게는 조금 억울한 일이다. 그의 등장으로 타타와 에티 사이의 갈등이 좀 더 가시화된 건 사실이지만, 그 조짐은 벌써부터 존재해 왔다. 촌구석에 틀어박혀 집안일이나 잔심부름에 얽매인 삶이 젊은 에티에게 만족스러웠을까. 타타의 은둔은 그냥 자연스러운 것이었을까. 행동은 필요와 욕구에 의한 결과라고 볼 때, 타타의 은둔엔 어떤 동기가 작용했을까. &nbsp;하나에서 열까지 전부 독(毒)인 사람도, 약(藥)인 사람도 없다. 약을 주려고 했는데 독으로 가는 경우도 있고 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 타타와 에티는 서로에게 악당이고 은인이다. 두 사람을 삼촌과 조카가 아닌, 엄마와 딸, 아빠와 아들, 그 외에 양가적인 감정이 사이에 진득하니 흐르고 있는 어떤 관계로 상상해도 그림이 된다. 각자의 욕망은 얽히고설키다가 결국 비틀리고 날카로워져 서로를 찌르고 만다. 작가는 이들의 갈등을 사회 전반(특히 예술계)에 존재하는 다양한 형태의 성차별로 발전시키다가 다시 개인의 영역으로 데리고 와 폭발시킨다. &nbsp;‘개인의 영역으로 데리고 왔다’는 표현엔 다소 주저앉은 감상을 포함한다. 에티의 결말 때문이다. 그녀는 사회적으로 비난을 면했다. 자신의 행동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는다. 이기적이고 폭력적인 타타가 ‘제 몸에 흐르는 피 같은’ 작품의 소실로 벌을 받았다면, 에티에겐 어떤 처벌이 가해졌나? 에티의 기만적인 (동시에 어리석고 아무 의미도 없는) 행동에 어떤 설명이나 핑계가 있을 수 있을까. 심리학 도구들을 동원한다면 가능할지도. 하지만 액면 그대로 본다면 에티의 행동은 명백한 범죄다. 캐릭터 성의 시너지 효과로 에티의 행위에 동정과 연민과 더불어 면죄부를 줄 수 있다고 쳐도, 결말에서 타타를 취급하는 작가의 방식엔 변명이 어렵다. 타타 역시 희생자고 피해자다. 어린 조카딸과 함께 촌구석에 처박힌 이유도 에티와 전혀 무관하지 않았다. 하물며 화마에 희생된 일생의 작업물들을 생각한다면…. 예술가, 창작자의 관점에서 볼 때, 이 작품의 가장 참혹한 피해자는 바로 타타가 아닐까. 그런데 결말에서 타타를 작가가 어떻게 대하는지 보라. 그 사람이 아무리 악인이었어도 이야기 안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면 그에 합당하고 적절한 퇴장을 마련해 줘야 한다. 그게 바로 캐릭터에 대한 애정이고 마땅한 예의다. 하지만 작가는 그냥 타타를 슬그머니 무대 밖으로 밀어낸다.   타타에 대한 작가의 푸대접은, 에티와 조지프의 시점이 교차되어 진행되는 작품의 구성에서도 보인다. 사실 조지프는 개인의 서사도 있고 중요한 인물인 척하곤 있지만, 불쏘시개 역할을 빼고는 거의 하는 일이 없다. 그보다 내면에 얼음과 불이 공존하는 타타가, 이야기에 헌신하고 기여하는 정도만 보더라도 훨씬 중요한 인물이다. 이야기의 균형은 둘째치더라도, 에티와 조지프를 통해서만 전달되는 타타의 모습은 독자로서 어딘지 부족해 보인다. 그 인물에게 뭔가, 드러나지 않은, 독자들만 볼 수 있는 내밀한 뭔가가 분명 더 있을 것이다. &nbsp;에티는 자신의 분노를 엉뚱한 방법으로 푸는 대신 좀 더 용기를 낼 필요가 있었다. 이 말이 피해자를 향한 이차 가해로 들릴까? 에티와 타타는 서로에게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다. 자신의 꼬리를 물고 영원히 맴도는 ‘우로보로스’처럼 두 사람의 갈등과 애증은 영원처럼 보인다. 절대 끊어지지 않을 관계를 청산하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강한 결단이 필요하다. 행동에 나선다면 누구에게 수월했을까. 그림이 인생의 전부이고 은둔 생활에 비교적 만족하는 타타보다는 폐쇄적이고 고립된 생활에 환멸을 느끼는 에티에게 좀 더 많은 동기와 기회가 있지 않았을까. 그녀 스스로도 절실히 원하던 바이기도 하고. &nbsp;‘폴 세잔느’, ‘페기 구겐하임’ 등의 실존 인물들이 심심찮게 나온다. 특히 폴 세잔느는 복잡하고 더러운 사생활로 파렴치한 악당 역할을 부여받는데, 알고 보니 작가의 상상이랜다. 실존 인물에게 작가의 상상으로 이런 터무니없는 오명을 씌워도 괜찮은가? 덕분에 작품은 역사 소설의 냄새를 살짝 풍긴다. 본격적인 시도는 아니고 약간 그런 척만 한다. 출판사는 로맨스+미스터리 장르로 선전하고 있던데, 로맨스로서는 너무 빤하고 미스터리라니. 정말 어처구니가 없다. 내가 읽기엔 처절한 심리 소설, 싸이코드라마에 더 가깝다. 타타와 에티의 소설 속 심리를 다룬 에세이나 소설 비평이 나온다면 기꺼이 읽고 싶다. &nbsp;사족. &nbsp;온라인 서점의 이 책 페이지를 보면, 책 소개보다도 작가 소개가 더 눈에 들어오는데, 뭐, 신인 작가라 그럴 수도 있지만, 책에 대해 얼마나 자신이 없으면(혹은 할 말이 많지 않으면) 작가 홍보로 때우나, 그런 생각 잠깐. 그렇다고 이 책이 아주 형편없었다는 말은 아니고….&nbsp;]]></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9981/58/cover150/k962130733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99815841</link></image></item><item><author>영꽃</author><category>마이리뷰</category><title>26년 일흔 번째 책 - [읽고 읽고 말하다]</title><link>https://blog.aladin.co.kr/764791159/17501959</link><pubDate>Tue, 08 Sep 2026 04:24: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64791159/17501959</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2325006&TPaperId=17501959"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9876/1/coveroff/8932325006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2325006&TPaperId=17501959"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읽고 읽고 말하다</a><br/>아사쿠라 가스미 지음, 전화윤 옮김 / 현암사 / 2026년 07월<br/></td></tr></table><br/>26년 일흔 번째 책. &nbsp;★★★&nbsp;❝살아 있잖아, 살아 있잖아요. (336쪽)❞&nbsp;‘카페 시트론’에서 한 달에 한 번씩 독서 모임이 열린다. 벌써 이십 년 가까이 됐다. 이름 하여, ‘언덕 중간의 책 읽는 모임’. 참가자는 78세에서 92세까지의 노인 여섯 명. 여기에 고모를 대신해 운영을 맡게 된, 카페의 매니저 ‘얏쿤’이 최근 합류한다. 얏쿤은 등단한 소설가이지만, 어떤 이유로 쓰기를 멈췄다. &nbsp;아기자기한 분위기와 낭만적인 배경, ‘책’이라는 소재와 ‘읽기’라는 활동을 주재료로 삶과 죽음, 인간에 대한 소소한 이야기를 풀어내며 사랑과 관용, 연대와 위로를 전달한다. &nbsp;독서 모임 참여자 개개인의 스토리를 상세히 드러내기보다 겉보기엔 비슷해 보이는 노인들을 한데 모아놓고, 무리 안에서 한 개인을 차별화시키는 요소들, 개성과 인격, 사람됨, 그(혹은 그녀)다움을 결정하는 것이 무엇인지 집중한다. 그런 탓에 기대했던 드라마틱한 작품은 아니었지만 대신 삶의 과정에서 발견되는 연속성, 외형은 변할지라도 죽을 때까지 간직되는 개인의 본질과 성격의 핵심, 개별성을 지닌 각자로서의 개인이 타인과 우연히 만나는 순간, 그 교차점에서 불꽃이 튀듯 보이는 유사성 등이 책읽기라는 공통된 행위를 중심으로 보이고 탐구된다. &nbsp;젊은 소설가가 슬럼프에 빠져 쓰기를 중단한 이유도 이야기의 작은 핵을 이룬다. 얏쿤의 그런 사정은 ‘작가’는 과연 어떤 사람이고 무엇을 하며 어떤 책임을 지는가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진다. ‘쓰는 사람’으로서 작가는 그저 받아 적는 사람, 옮겨 적는 사람에 지나지 않는 것인가. 글감과 소재는 어디에서 오는 걸까. 타인의 삶이 작가에게 영향을 미친다면, 그렇게 쓰인 글을 작가만의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nbsp;예상과는 많이 달랐던 작품이었다. 좀 더 차분하고 건조하며(독자의 태도에 따라 다소 지루할 수 있는), 읽는 내내 경건한 마음까지 들었다. 삶에 대한 자세랄까. “살아 있잖아요.(336쪽)”라는 ‘쇼코’의 외침은 이 세상을 사는 모든이들을 위한 응원처럼 들린다. 이건 살아 있음에 대한 찬미로서 삶에 대한 집착만은 아니다. 살아 있는 것들에 대한 연민과 애정, 지나온 시간에 대한 경의와 동경, 그리움이랄까. 살아 있다는 것. 호흡하고 감각하고 유기생명체로 존재하는 것, 우리에게 기대할 수 있는 미래와 추억할 수 있는 과거가 있다는 게 얼마나 기쁘고 다행한 일인지. &nbsp;작품 속, 독서 모임에서 텍스트로 삼는 &lt;아무도 모르는 작은 나라&gt;라는 작품(실제로 존재하는 판타지 동화이고 우리나라에도 번역된 적이 있다)에 대한 이해도가 떨어져서, 그 부분에 대한 대화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고 공감할 수 없었다는 점은 아쉽다. 이 동화에 대해 잘 알았더라면, 이 작품에 대한 감상도 좀 더 풍성해지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nbsp;]]></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9876/1/cover150/8932325006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98760171</link></image></item><item><author>영꽃</author><category>마이리뷰</category><title>26년 예순아홉 번째 책 - [친구]</title><link>https://blog.aladin.co.kr/764791159/17467135</link><pubDate>Sun, 23 Aug 2026 16:41: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64791159/17467135</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2921121&TPaperId=17467135"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27587/71/coveroff/k552733015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2921121&TPaperId=17467135"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친구</a><br/>시그리드 누네즈 지음, 공경희 옮김 / 열린책들 / 2021년 07월<br/></td></tr></table><br/>26년 예순아홉 번째 책. &nbsp;★★★☆&nbsp;❝문학의 악덕에는 치료제가 없는 것 같다. 감염된 이들은 거기서 더 이상 쾌락을 얻지 못한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버릇을 고치지 않는다. - W. G. 제발트 (70쪽)❞&nbsp;글도 쓰고 문학 강의도 하는 ‘나’는 최근에 선배이면서 스승이기도, 멘토이면서 연인이기도 했던 남자의 자살을 겪고 충격에 빠졌다. 와중에 그의 세 번째 부인으로부터 그가 키우던 개, ‘아폴로’를 맡게 된다. 늙은 개는 화자로 하여금 끊임없이 ‘그’의 기억을 곱씹게 만든다. 고인이 된 연인의 개를 보살피는 이야기를 중심으로 상실과 애도, 위로, 사랑과 이별, 삶과 죽음, 젊음과 노화, 죽어감, 예술과 문학에 대한 사유가 다양하게 펼쳐진다. 애초에 상상했던, 인간과 개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었는데 난 오히려 이게 더 좋았다. 제목의 ‘친구’는 화자와 아폴로의 관계이기도 하지만 화자와 고인의 관계이기도 한데, 화자의 애도 방식은 약간 특이한 구석이 있다. &nbsp;지난주에 읽었던 작가의 다른 작품, ≪그해 봄의 불확실성≫과 공통점이 많다. 소설과 에세이의 모호한 경계, 작가인 화자, 1인칭 시점, 동물(앵무새가 나오더니 여기는 그레이트 데인 종의 초대형견)을 중심으로 한 기둥 이야기, 자유로이 흘러가는 의식, 다양한 이슈의 사유, 특히 문학과 글쓰기에 대한 작가의 생각. &nbsp;가장 최근작(2023년 출판)인 ≪그해 봄의 불확실성≫을 먼저 읽은 나로서는 이 책에 대한 (처음의 호기심과는 달리) 만족도는 그리 크지 않다. 비슷한 형식에 거의 흡사한 구성은 식상하기까지 하다. ≪그해 봄의 불확실성≫에서 들렸던 작가의 목소리가 ‘조곤조곤 읊조리는’ 것에 가까웠다면, 이 책에서의 작가는 거의 ‘주절거리는’ 것으로 들린다. 이 책을 탓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활동 기간 동안 내내 ‘자기 복제’를 일삼는 예술가(창작자)가 적지 않으니, 작가에게도 그럴 권리가 있다면, 같은 작가의 책을 거의 연달아 두 권이나 읽은 나에게 문제가 있지 않을까. 아마 이 책을 먼저 읽었더라면 감상은 또 달랐을 터. &nbsp;이 책만 가지고 이야기 하자면, 이 작품은 문제가 없다. 작품 안에서 작가는 더 깊이 있는 사유를 펼친다. ≪그해 봄의 불확실성≫에서 작가의 생각이 여기서 저기로 널을 뛴다는 점이 없지 않았다면, 이 작품에서 작가는 소수의 이슈에 집중한다. 바로 삶(죽음)과 글쓰기.  &nbsp;작품의 포문을 여는 사건이 ‘자살’이므로 작품 전반에 드리워진 죽음의 그림자와 그 대척점에 놓인 삶에 대한 사유는 어쩔 수 없다. 화자는 그 슬픔에 내내 짓눌린다. &nbsp;❝일정한 나이가 된 사람에게는 그것(자살)이 합리적인 결정일 수 있다고. 완벽한 선택이, 심지어 해결책이 될 수도 있다고, 젊은 사람이 자살하면 실수일 수밖에 없지만 그 경우와는 다르다고. (12쪽)❞&nbsp;화자는 고인의 선택과 결정을 존중하면서도 슬픔과 충격에서 헤어 나오고 있지 못하는 자신을 이렇게 항변하기도 한다. &nbsp;❝자살은 이기심과 자기 연민으로 꽉 찬 괴물이죠. 고귀한 선물인 생명을 그렇게 배은망덕하게 내치다니. 또 자살자들은 자신을 증오했겠지만, 자살이 망친 것은 자신만이 아니라 남은 친지들이었죠. (180쪽)❞&nbsp;자살을 옹호하는 건 아니지만, 자살자들의 상황과 심리는 무시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덮어놓고 무조건 ‘자살은 자신을 향한 범죄’라는 프레임을 씌우는 사회에서 자살(죽음)에 대한 자유롭고 솔직한 논의는 불가능해 보인다. 어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솔직하고 열린 마음이 최우선이 되어야 한다. &nbsp;문학과 글쓰기에 대한 작가의 사유는 작가들은 물론이고 독자라는 존재들에게 더 할 나위가 없는 좋은 충고처럼 들린다. 작가와 독자의 관계(난 작가에게서 작품을 구원하는 것은 독자 리뷰, 140쪽), 오해와 오독(내가 사람들을 저녁 식사에 초대해 근사한 쇠고기 스튜를 대접하자 다들 맛있게 먹고 이렇게 말합니다. 와, 맛있네요. 먹어 본 중 최고의 양고기 스튜인 걸요! 그게 어때서요? 손님들이 잘 먹은 게 핵심 아닌가요?, 140쪽), 작가의 특권과 저술(글쓰기)라는 소명(저술이 엘리트 위주의 자기중심적 행위라는 점은 부인 못 해요. 관심을 받고 출세하려고 글을 쓰니까요. 세상을 더 정의로운 곳으로 만들려고 글을 쓰는 게 아니고요. 물론 거기에는 약간의 수치심이 수반되겠지만, 223쪽), 등의 질문을 통해 오늘날 한 권의 책, 출판시장, 작가(저술가)의 현실을 되짚고 비판한다. &nbsp;≪그해 봄의 불확실성≫에서와 마찬가지로 작가는 ‘다큐멘터리 픽션’이란 이름으로, 허구가 아닌 픽션(아이러니하게 들린다)의 필요성을 강조하는데, 거듭 듣고 있으니, 내겐 마치 작가의 변명처럼 들리기도 한다. &nbsp;❝평범한 개인의 삶에서 추려 낸 이야기들이 필요해요. 지어내지 않은 이야기. 필자의 관점이 개입되지 않은 이야기. (222쪽)❞&nbsp;같은 맥락은 아니지만, ‘실제로 고초 속에서 사는 이들이 제대로 말하는 게 목적이고, 작가의 역할은 그들이 말할 수 있게 하는 데 국한된다(222쪽)’는 말은 현재의 퀴어 문학이나 페미니즘 문학이 귀 기울여야 할 충고 같다. &nbsp;작가의 작품 중 가장 대중적으로 성공한, 그야말로 대표작이고 출세작(2018년 전미도서상 수상작)이다. 번역도 무려, 영문학 번역계의 대모라고 할 수 있는 ‘공경희’. 작가를 처음 접한다면 (내가 읽은 두 권 중에) 이 책을 가장 먼저 읽기를 권하고 싶다. &nbsp;책꽂이에 작가의 다른 책(‘줄리앤 무어’ 주연으로 영화화된 책)이 보인다. 한동안 잊고 있다가 나중에 읽기로.&nbsp;&nbsp;]]></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27587/71/cover150/k552733015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275877191</link></image></item><item><author>영꽃</author><category>마이리뷰</category><title>26년 예순여덟 번째 책 - [지켜야 할 세계 - 제13회 혼불문학상 수상작]</title><link>https://blog.aladin.co.kr/764791159/17457918</link><pubDate>Tue, 18 Aug 2026 16:52: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64791159/17457918</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732935544&TPaperId=17457918"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2611/82/coveroff/k732935544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732935544&TPaperId=17457918"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지켜야 할 세계 - 제13회 혼불문학상 수상작</a><br/>문경민 지음 / 다산책방 / 2023년 10월<br/></td></tr></table><br/>26년 예순여덟 번째 책.<br> ★★★☆&nbsp;환갑을 앞두고 때 아닌 죽음을 맞은 국어교사 ‘정윤옥’의 삶을 그린다. &nbsp;교사로서 윤옥은 투사에 가깝다. 전교조 가입으로 해임됐다가 복직했으며, 교육에 대한 열정을 불태우고 원대한 꿈을 함께 품었던 동료가 육욕에 굴복하고 돈과 명예에 변절하는 동안 자신의 자리를 지켰다. 동료 교사들과 친밀한 우정을 나누지 못하는 단단하고 꼿꼿한 원칙주의자고, 거의 모험에 가까운 수업으로 학부모들의 원성을 듣지만 무시할 정도로 배짱이 있다. &nbsp;개인으로서 윤옥은 슬픈 가족사를 지닌 비운의 주인공이다. 뇌병변장애를 갖고 있는 동생 ‘지호’를 포기하는 엄마를 방관하고 어린 나이에 임신한 제자의 아이를 거두어 키운다. 정체가 모호한 시설에 떠맡겨진 동생을 지키지 못했다는 기억은 윤옥의 일생을 지배한다. 학생들을 진심으로 대하고 교육에 헌신하는 모습은 과거의 속죄일 수 있다. &nbsp;내겐 ‘좋은 선생님’에 대한 기억이 거의 없다. 몇 명의 선생님이 생각나긴 하는데, 거의 초등학교 시절에 만난 분들이었다. 너무 어려서 아무것도 몰랐을 때. 그런데 그 시기에 난 정말 아무것도 몰랐을까. 적어도 어느 선생님이 친절하고 누가 아이들에게 진심이었는지, 정확히는 몰라도 대강 눈치채고 있지 않았을까. 어리고 세상 모르고 행동과 반응은 굼떴어도 분위기를 읽는 건 빠르고 정확한 편이었으니까. (눈치가 빠르다고 뭐를 어떻게 반응하는 건 아니었지만) 나는 선생님이란 존재를 절대 좋아할 수 없었다. 모든 걸 떠나서 그들은 내가 절대 이룰 수 없는 것들을 요구했고 내 실패에 대해선 매우 엄격했다. &nbsp;굳이 내 과거를 거울 삼지 않아도 윤옥이라는 캐릭터는 비현실적이다. 너무나 일관된 모습뿐이라 얇은 종이처럼 팔랑거린다. 그 영웅적인 모습은 소위 교육계의 히로인, 어벤저스 대접을 받을 만하다. 이런 사람이 있다고? 아니, 이런 선생님이 있다고? &nbsp;소설이니까. &nbsp;하지만 무엇보다, 주인공이 위인에 가까운 인물임이 분명해도 정의와 올바름에 선다는 건 내게 일종의 각성이 되었다. 나, 자신이 비겁하고 기회주의적인 인간이지만, 인간이라면 정의와 올바름에 마음이 기우는 건 인지상정 아닐까. 정의롭게 행동하는 건 전혀 별개의 문제지만. 그러기 위해선 용기와 자신에 대한 신뢰가 필요하다. 그것은 나의 미덕이 아님을, 내게 그것이 충분치 않음을 깨달을 때 수치스러워야 할까. 아니면 부러움?&nbsp;이야기는 윤옥이 한 일보다 그녀의 삶 자체에 집중한다. 그래서 굉장히 바쁘다. 초반엔 산만해서 눈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몰랐다. 여러 일이 일어나는데 깊이는 없다. 큰 위험도 위기도 없다. 뭔가 일이 터질 만하면 운 좋게 잘 넘어간다. 다이나믹(dynamic)하기보다 파노라믹(panoramic)하다. 이런 이야기에서 흔히 보이는 건데 교훈을 너무 노골적으로 외치고 있다. 불필요한 사건들도 많다. 적어도 윤옥은 왜 죽어야 했는지, ‘영숙’은 왜 자살한 건지, 등은 설명 내지는 이유가 필요하다. 출판을 위해 분량을 많이 줄였다고 하는데(목차 포함 244쪽), 지금보다 좀 더 길었다면 어땠을까 상상해 본다. &nbsp;‘서이초 교사 자살 사건’이 작가에게 계기가 됐다고 하는데, 그 이슈를 정면에서 파고든 작품이라고는 보기 어렵다. ‘교권침해’, ‘학부모의 갑질’ 같은 이슈가 등장하긴 하는데, 다른 이슈들에 파묻혀 유야무야된다. 할 이야기는 많고 분량은 정해진(짧은) 탓에 진중하게, 사건의 드라마성을 차분히 다룰 공간이 없다. 오히려 ‘서이초’ 사건에 대한 정보는 이 작품에 대한 선입견을 갖게 한다. 아무것도 모른 채 이 책을 손에 드는 게 낫다. &nbsp;그럼에도 (주인공의 한결같이 영웅 같은 면모를 무시하면) 작품은 꽤 읽을 만하다. 작품에서 힘이 느껴지는데 그게 이야기에서 나온다기보다 캐릭터에서 비롯된 것처럼 보인다. 윤옥에게서 우러나오는 에너지는 여전사의 기개에 가까워 마음을 흔드는 힘이 있다. 간결하고 안정적인 문장이 눈에 착 붙는다. 윤옥의 죽음을 서두에 두고 그녀의 삶을 되짚는 세 장(chapter)의 구성도 적절해 보인다. 초반의 산만함은 오륙십 쪽을 넘어서며 질서를 찾아간다. (대사는 살짝 오골오골하다) 교육 현장에 관한 디테일이 상당하다. (그 바닥을 전혀 모르므로 그렇게 보인다고 말하는 게 낫겠다) 작가의 본업이 교사이니 아마도 실제 지식과 경험에서 온 디테일일 것이다. 선생님이 주인공이 아닌, 학교가 무대가 아닌 소설도 작가가 잘 쓸까, 이런 의심 살짝 해본다.&nbsp;결말에 대해서. 윤옥은 자신이 치른 전쟁에서 이겼을까. 그건 어떤 관점에서 보는지에 따라 다르다. 여러모로 이런 싸움은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격이다. 윤옥의 상대는 거대한 시스템과 삶 자체였다. 결과를 떠나 무언가를 시도했다는 것만으로 그 가치는 빛난다. 윤욕은 용감했고 자신을 희생했고 행동하며 버텼다. 삼가 정윤옥 선생님의 명복을 빈다. &nbsp;제13회 (2023년) 혼불문학상 수상작이다. &nbsp;]]></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2611/82/cover150/k732935544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26118200</link></image></item><item><author>영꽃</author><category>마이리뷰</category><title>26년 예순일곱 번째 책 - [그해 봄의 불확실성]</title><link>https://blog.aladin.co.kr/764791159/17457892</link><pubDate>Tue, 18 Aug 2026 16:42: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64791159/17457892</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2924929&TPaperId=17457892"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5627/3/coveroff/8932924929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2924929&TPaperId=17457892"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그해 봄의 불확실성</a><br/>시그리드 누네즈 지음, 민승남 옮김 / 열린책들 / 2025년 01월<br/></td></tr></table><br/>26년 예순일곱 번째 책.<br> ★★★☆&nbsp;몇 년 전, 전 세계를 얼어붙게 만든 ‘코로나 팬데믹’ 시기를 무대로 한다. ‘얼어붙게 만든’이라는 표현은 (돌이켜 보면) 전혀 과장이 아니다. 말 그대로였다는 걸 모두가 안다. &nbsp;작품은 그 시기를 지나는 한 개인(아마도 작가 자신)의 사적인 기록이다. 친구의 지인 집에 머물며 홀로 남은 앵무새를 돌보게 된 이야기를 기둥으로 남성과 여성, 문학과 예술, 글쓰기, 삶과 죽음, 유머의 힘, 선과 악, 타 생명체에 대한 예의와 책임감, 환경 문제 등에 대한 작가의 사유가 다양하게 흘러나온다. &nbsp;인간이 아닌 다른 생명체에 대한 윤리 의식에 대한 저자의 생각에 깊이 공감했다. 이슈는 곧바로 환경 문제로 이어지고, 환경 운동이 어떻게 좌파의 이데올로기가 되었는지 설파한 ‘데릭 젠슨’의 저서 ≪거짓된 진실 (아고라, 2008년 刊≫을 생각나게 해서 흥미로웠다. 또한 작가는 ‘제인 구달’을 인용하기도 하는데, 팬데믹 시절에 본, 코로나 바이러스(COVID-19)의 출현에 대해 ‘야생 동물 학대’, ‘지구촌 빈곤을 줄이기 위한 노력의 부재’에 원인을 둔 제인 구달의 인터뷰 영상도 생각났다. 환경에 대한 인간의 이기적 행동과 태도를 악(惡)으로 규정지으려는 노력은 의외로 드문 것 같다. 선함과 악함, 둘 모두 인간 본성의 속성이라면, 대개 선함보다 악함이 더 쉽게 드러나는 것 같다.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nbsp;❝인간의 몰인정함보다 예측하기 쉬운 게 있을까? 그게 얼마나 이른 나이에 시작되는지 목격하는 것보다 섬뜩한 일이 있을까? (151~152쪽)❞&nbsp;❝나는 세상에 악한 사람들보다 선한 사람들이 더 많다고 믿는다. 하지만 수적으로 우세하다고 해서 반드시 선이 승리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우리가 반드시 고려에 넣어야 할 점은, 특정 상황에서는 악이 선으로 하여금 악을 행하게 만들 수 있으며 더 나아가 특정 목적-이를 테면 전쟁에서의 승리-을 이루기 위해서는 그것이 꼭 필요한 일이 된다는 것이다. (219~220쪽)❞&nbsp;이 소설엔 (굳이 첨언한다면) 플롯이 없다. 에세이와 소설의 경계를 허문다는, 혹은 두 장르를 혼용한다는 점에서 ‘박완서’의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현기영’의 ≪지상의 숟가락 하나≫, 멀리 ‘아니 에르노’의 작품들이 떠오른다. 소위 ‘에세이 소설’들 대해 적어도 독자로서의 나의 인식은 부정적이다. 소설은 ‘지어낸 이야기’, 즉 거짓의 이야기(하지만 진실을 말하는)여야 한다는 사고방식을 버리지 못한다. 그런 내게 작가는 이런 말을 하고 있다. &nbsp;❝전통적인 소설은 우리 시대에 주요 장르로서의 자리를 잃어 가고 있다. 아직 죽지 않았을 수는 있어도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다. (중략) 여전히 인물의 성격과 체험을 그려 내는 강력한 도구로 남아 있지만, 허구의 이야기는 점차 핵심에서 벗어난 인상을 줄 것이다. 점차 작가들은 ‘당신은 왜 지어낸 이야기를 하죠?’라고 묻는 목소리를 잠재우는 데 어려움을 겪게 될 것이다. (288쪽)❞&nbsp;작가의 말대로 이 주장에 대해 공감하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질까. 작가의 주장대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개인의 역사와 성찰을 담은 문학(289쪽)’일까. 작가는 이란의 영화감독 ‘아바스 키아로스타미’의 말을 인용하기도 한다. &nbsp;❝셰에라자드와 왕의 시대-이야기의 시대-는 끝났다. (289쪽)❞&nbsp;소설이 어떤 모습이든, 혹은 어떤 모습이어야 하든 분명한 게 있고 이건 내게 위로와 힘이 된다. 작가는 ‘플래너리 오코너’의 말을 인용한다. &nbsp;❝희망이 없는 사람들은 소설을 쓰지 않는다. (220쪽)❞&nbsp;매력적인 인물이 등장하고 그, 혹은 그녀에게 일어나는 드라마틱한 사건과 클라이맥스, 반전의 결말 등을 이 작품에 기대하는 건 무리이다. 그리고 문학, 특히 소설에 대한 인식이 변화하고 있다는 작가의 주장엔 아직까지 동의하기 힘들다. 하지만 잔잔히 물 흐르듯 작가의 의식을 쫓으며 조곤조곤 읊조리는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건 분명 편안하고 좋은 경험이었다.&nbsp;]]></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5627/3/cover150/8932924929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56270320</link></image></item><item><author>영꽃</author><category>마이리뷰</category><title>26년 예순여섯 번째 책 - [그래도 춤을 추세요]</title><link>https://blog.aladin.co.kr/764791159/17449887</link><pubDate>Fri, 14 Aug 2026 03:42: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64791159/17449887</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472030229&TPaperId=17449887"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6991/19/coveroff/k472030229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472030229&TPaperId=17449887"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그래도 춤을 추세요</a><br/>이서수 지음 / 문학동네 / 2025년 08월<br/></td></tr></table><br/>26년 예순여섯 번째 책. &nbsp;★★★&nbsp;여덟 편의 단편이 실려 있는 ‘이서수’의 작품집. 지극히 개인적인 감상이다. &nbsp;전체적으로 평타는 치는데 ‘정말 좋다’라고 할 만한 작품이 없다. 물론 겨우 한 권 읽고 이런 말 하기엔 섣부른 감이 있지만 (더 읽어봐야 하겠지만), 이 작품집 한 권만으로 감상을 밝힌다면 이서수 만이 쓸 수 있는, 오리지널한 무언가는 찾기 어려웠다. &nbsp;‘평타를 친다’는 말은 평균적인 감상이다. 아마추어 같은, 습작처럼 읽히는 작품(전반부)이 있는가 하면 뒤로 갈수록 작품들이 그럴싸해진다. 이걸 다 한 사람이 썼다고? ‘예소연’의 ≪사랑과 결함≫을 읽으면서도 거의 똑같은 생각을 했더랬다. 하지만 예소연과는 달리, 이서수는 장편과 단편집을 이미 여러 권 펴낸, 소위 ‘중견’이라 할 만한 작가다. 그럼에도 이 책으로 작가의 역량, 문체의 개성, 상상력과 구성력, 필력 등을 가늠하기 어려웠다. 한 권만으로도 팬심이 솟아나게 만드는 작가들이 있는데 이 작가가 그렇다고는 말할 수 없겠다.&nbsp;이야기마다 공통된 특징이 있는데, 바로 모녀 관계(혹은 그 유사 관계)에 집중하고 있다는 것. 반면 남성들은 철저히 소외된다. ‘거세된 남성성’이란 표현은 좀 과할지라도 작품들마다 남자들(주로 아버지들)은 나쁜 사람이거나 필요가 없거나 거추장스러워 무대 밖으로 치워진다. 뿐만 아니다. 이야기들의 ‘문제적 인물’들은 거의 남성들이라는 점에서 성차별적인 요소가 보인다. &nbsp;너무 불평만 한 것 같은데, 나름 좋았던 점도 언급해야겠다. 이건 차별이야, 이건 혐오야, 그건 꼰대 마인드야, 그건 가스라이팅이야, 그건 가부장이야. 이런 말들은 요즘 너무 쉽다. 그리고 너무 편리하다. 상대방의 입을 한순간에 닫게 만드는 너무나 강력하고 유용한 ‘칼’의 말들이다. 작가는 가끔 이런 말들에 고민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시류에 묻어가지 않고 주변을 관찰하고 살핀 결과로서, 그런 말들조차 다른 형태의 폭력이고 편견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려 한다. 그런 부분은 꽤 신선했다. &nbsp;작품집을 여는 &lt;이어달리기&gt;는 경쾌한 톤, 긍정적인 분위기로 쉽게 읽히지만 책의 첫 작품으로서 독자들을 휘어잡는 데엔 역부족이다. 별론데? 하면서 책을 쉽게 내려놓는 독자들은 분명 존재한다. 일단 화자의 상황이 설득력이 없는 건 물론이고 신뢰가 가지 않는다. 상사의 갑질에 시달리고 격무에 혹사당하고, 이런 불만들이 화자 자신의 시선과 발언에 머물고 있어 과연 그 말들을 믿을 수 있는지, 의심을 하게 만든다. 이는 균형의 문제다. 객관성이 결여된 시선은 이야기 전체에 암시되는 화자의 미성숙한 모습으로 탄력을 받는다. 재취업 의지를 보이지 않는 화자가 엄마를 대하는 태도는 가관이다. 엄마를 ‘씩씩하고 단단한 삶 대신 아름답고 슬픈 삶을 선택한 사람(27쪽)’으로 판단하며 희생을 종용하는가 하면, 막무가내로 회사에서 사라지려 했던 에피소드에서(36쪽), 엄청난 소동을 예상했으나 자신의 부재가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했다는 사실에 실망하는 모습은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하는 한편 연민과 동정을 구하는 어리광이나 투정에 지나지 않게 보인다. (완전한 성장과 독립을 이루지 못하고 엄마의 그늘 아래로 숨는 자식은 뒤에 실린 &lt;AKA 신숙자&gt;에서도 보인다) 화자의 상황에 설득이 되질 않으니 이야기 전체에 공감이 안 간다. 실직한 엄마와 도서관을 들락거리는 에피소드 역시 허무맹랑한 판타지, 과한 사치로 보인다. 과한 설정은 또 있다. 엄마의 교통사고는 도대체 무슨 의미, 무슨 소용일까. 화자가 고백하듯, ‘어려운 글 말고 그냥 내 이야기’, ‘하루를 낭비하는 이야기’, ‘의미 따위는 없는 글, 내가 이렇게 산다고 적는 글, 우리 외엔 아무도 읽지 않는 글(31쪽)’이 이 작품의 본질이라면 독자로서 무슨 말을 더 얹을 수 있을까. &nbsp;&lt;춤은 영원하다&gt;는 엔딩이 인상적인 작품이다. 무덤가에서 세 명의 여자가 춤을 추는 모습은 그리스 신화의 디오니소스 제례나 ≪맥베스≫의 세 마녀, 러시아 설화를 소재로 ‘고골’이 쓴 작품들 연상하게 한다. 이 장면은 말하자면 이 소설의 가장 강렬한 장면,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게 전부다. 오직 엔딩 장면을 위해 쓰인 작품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이야기가 빈약하다. ‘춤’이라는 소재는 신선하다. 신과의 소통, 주술적 의식 이상으로 속을 비워내고 무아지경(trance)이 이르고 자신을 잊고 고달픈 현실을 벗어나는 행위는 모두에게 위로가 된다. 외할머니, 엄마와 이모, 화자로 이어지지는 세대를 아우르는 운명과 그것을 극복하거나 마주하기 위한, 시공을 초월한 연대를 보여주겠다는 의도도 괜찮다. 하지만 결과물로서의 이 작품은 공허하다. 인물들의 춤은 위로가 아닌 ‘환각’처럼 보인다. 모든 시름을 잊고 한바탕 춤이나 추자는 결말은 너무나 진심 없는 위로, 대책 없는 파이팅으로 들린다.  &nbsp;‘직장사실주의’를 표방한 듯한 &lt;광합성 런치&gt;는 앞의 두 작품에 비해 늘씬한 모양새가 돋보인다. 여러모로 중간에 끼어 있는 인물 ‘차진혜’를 화자로 세대와 계급, 권력의 차이에서 오는 어쩔 수 없는 갈등을 흥미롭게 보여준다. 차진혜의 짝사랑은 자칫 빈틈을 메우기 위한 소비적 에피소드로 전락할 수도 있었으나, 차진혜에게 ‘그들’의 시각과 입장을 적극적으로 헤아리는 계기가 된다. 더불어 차진혜에게 타인과의 차이를 인식하는 인물, 그것을 극복할 의지가 있으며 적어도 노력은 하는 사람이라는 인간적인 매력을 부여한다. 전형적인 Z세대인 ‘박이재’라는 캐릭터가 평면성을 넘어서 입체적인 인간으로 반전하는 결말도 좋았다. X세대(대표, 홍차장), M세대(차진혜), Z세대(박이재) 등, 각 세대의 대표성을 지닌 인물들을 골고루 등장시켜 이야기를 천천히 빌드-업 시키는 구성, 인물 간 대화가 주는 재미가 좋으며 ‘차이와 다름에서 오는 갈등을 어떻게 최소화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독자 스스로 던지게 만드는 방식이 세련됐다. 단, 차진혜의 계모인 ‘김순화’는 쓸모가 없어 보여 지면 낭비처럼 보였다. ‘광합성’과 ‘런치’라는 두 단어를 결합한 제목에 대해선 핑계가 필요하다. 인간의 끼니는 박이재가 원하는 진지만큼이나 자본과 노동의 집약적 산물이다. 광합성도 마찬가지로 식물의 노동(명반응, 암반응)과 자본(빛에너지, 물, 이산화탄소 등)을 필요로 한다. ‘광합성 런치’라는 제목은 저절로, 혹은 손쉽게 얻어지는 무엇이라는 의미보다는 ‘식집사’인 박이재의 관심과 애정을 갈구하는 화자의 욕망을 반영한 제목으로 여겨지는데, 작품의 제목으로는 부적절해 보인다. &nbsp;노동자인 엄마, ‘신숙자’와 미숙한 딸, ‘박미리’가 등장는 &lt;AKA 신숙자&gt;는 모녀 서사를 빌려 어떤 면에서는 아직 아이에 머물러 있는 청년 세대를 꼬집는 것 이상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작가는 줄곧 미숙한 딸의 이기심과 엄마의 희생을 비교하는데 미리 스스로는 엄마를 부양한다고 믿지만 그녀가 실제로 진심어린 성의를 쏟는 대상은 길고양이 ‘퐁이’다. 딸에게 신숙자는 그저 엄마일 뿐, ‘인간 신숙자’가 되기엔 요원하다. 딸은 엄마의 온라인 지원서를 작성하면서 쓸 게 별로 없다는(아는 게 거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반면, 엄마는 계속되는 노동에 내몰린다. 그녀에겐 꿈이 있지만 아직은 일을 내려놓을 수가 없다. 그녀는 딸을 위해 끊임없이 희생한다. 무당은 아니어도 딸에게 도움이 된다면 서툴게 무당 흉내까지 낼 수 있다. 초반에 등장하는 ‘헬레나 루빈스타인’의 초상화는 인간이 지닌 여러 겹의 얼굴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잘 안다고 생각하는 누군가를 정말로 잘 알고 있는 것일까. 피상의 일부만으로 전체를 본다고 착각하고 있지나 않을까. 인간의 시간은 과거를 지나 현재에 이르러 미래를 향하는, 선(線)으로 흐르기보다 ‘차곡차곡 쌓이며(&lt;미식 생활&gt;, 252쪽)’ 흐른다. 위에 것을 덜어내고 깊이 파헤치는 노력 없이는 결코 그 아래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없다. 작품은 우리가 타인을 보다 잘 보고 이해하기 위해 들이는 노력이 충분한지 묻는다. 다만, 한 문단 안에서 시점이 ‘널을 뛰고 있다’는 건 치명적인 흠으로 보인다. 이런 아마추어 같은 실수가 진짜 실수일까. 아니면 어떤 의도로 계획된 예술적 허용일까.  &nbsp;&lt;운동장 바라보기&gt;는 이 작품집에서 베스트로 추천할 만한 작품이다. 인물들의 편견과 설레발로 점철된 이야기는 부분으로 전체를 안다고 믿는 오만, 전형적인 패턴을 진실로 착각하는 오류, 소수와 약자를 위하는 척 드러내는 다른 형태의 가부장, 비판 없이 공식처럼 작동되는 PC적 사고, 이런 습관적이고 기계적인 인식과 반응에 역차별적 행동을 보이는 아이들의 결말로 대항한다. 현실을 마주한 당사자가 아닌 외부인의 시선은 한계가 있다. 숫자뿐인 통계, 교묘히 선발되고 왜곡된 이미지 등은 사고를 무력화 시킨다. ‘김희서’의 일기를 제 식대로 윤색해서 친구들에게 들려주는 ‘청미’의 행동(161쪽)은 황색언론의 전형적인 수법이다. 돕고 싶다는 청미의 말에 희서는 ‘언니는 내가 부족한 사람이라고 생각해?(153쪽)’라며 되묻고, 귀촌한지 얼마 안 되어 곤충들에 익숙하지 않은 ‘설경’에게 ‘벌레를 무서워하면 벌레 많은 시골에서 못 산다(166쪽)’고 따끔한 일침을 놓는다. 김희서로 대변되는 결혼이주여성들은 보통의 걱정, 우려와는 달리 타국 생활에 대해 이미 완벽한 준비와 각오가 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들을 그저 타국에서 고생하는, 타국으로 ‘팔려온’ 피해자, 약자라는 프레임을 습관처럼 씌우고 있는 건 아닌지 질문해 볼 일이다. &nbsp;&lt;잘 지내고 있어&gt;는 논쟁적인 이야기가 될 뻔했으나 실패한 작품으로 보인다. 뭔가 아귀가 안 맞는 느낌이랄까, 초점이 어긋난 사진을 보는 느낌이 든다. 가장 눈에 거슬리는 건 연명 치료를 포기한 걸 ‘살인’에 비유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딜레마를 제대로 보여주길 바랐다면 ‘안락사’ 정도의 이슈가 나왔어야 하지 않을까. 이 작품은 줄곧 ‘모녀 서사’에 매달리던 작가가 (이제야 아빠들에게 미안했는지) ‘아빠’라는 캐릭터를 전면에 내세운 (작품집의 유일한) 이야기라는 점에서 일단 눈에 띈다. 하지만 시종일관 의식불명으로 누워 있는 게 전부이므로, 아빠에 대한 이야기라고 하기에도 민망하다. 서사의 촉매제로서의 도구 역할에 지나지 않는 아빠 캐릭터는 소외되고 거세당한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내면적으로는 조금 다른 형태의 모녀 서사로 읽히는데, 혈연이 배제된 모녀 관계(딸들과 아빠의 내연녀)가 이야기 저변에서 활발하게 작동하기 때문이다. 아빠에 대한 힌트, 정보가 거의 전무하므로, ‘주연-세연’ 자매의 감정이 잘 살지 못하고 독자로서 이야기에 멀찌감치 거리를 두게 된다. 치열한 척 분위기를 내지만 이야기는 빈약하다. 공감할 여지가 많지 않다. 완성도와는 별도로 이 작품의 의미는 죽음, 웰 다잉(well dying)에 대한 사유를 촉발한다는 데 있다. 죽음에 있어 최소한의 품위를 잃지 않는 게 가능할까. 어떻게? 인간이라는 필멸자로서 우리는 무엇을 준비해야 할까. 연명 치료를 거부하는 건 물론이고 안락사 역시 사회적으로 합당한 방법으로 용인되어야 하지 않을까. 죽음에 임박해 고통에 시달릴 때 그들의 인권과 복지를 위해 사회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을까. 동시에 사랑하고 함께 오랜 세월 동고동락 했어도 실제적으로는 가족으로서 아무런 권리도 보장도 없는 이야기 속 사실혼 관계를 통해, 결혼이라는 제도 밖에 있는, 가족이지만 가족이 아닌 관계들(대표적으로 동성애자 커플)의 미래는 어떤 모습일지 숙고해 볼 일이다. 이들 관계를 법이라는 틀 안에서 효력을 갖게 하려면 사회는 어떤 시도를 하고 어떤 변화를 겪어야 할까. &nbsp;&lt;미식 생활&gt;에선 먹는 입, 넣는 입, 토하는 입, 탐하는 입, 죽으려는 입 등의 다양한 ‘입’이 등장한다. 작가는 ‘씹고 삼키는’ 흔하고 평범하며 익숙한 행위를 미시적인 시선으로 관찰하고 풀어헤치다가 경험, 삶, 역사로 시야를 확장(음식은 그저 음식이지 않고 입은 그저 입이지 않다. 그것은 기억을 불러일으키고 생과 사에 개입하며 특정한 리듬 안에 잠기게 된다, 250쪽), 무너지고 있는 타인을 외면하지 않으려는 인간애, 휴머니티의 결말로 이끈다. 서사의 흐름이 무척 유려한데, 마치 각기 흐르던 수많은 지류들이 마침내 깊고 푸른 강으로 합쳐지는 것에 비유할 만하다. 특히 손 끝에 혼이 붙은 듯 써내려간 결말 즈음의 페이지들에선 행간에 휘몰아치는 에너지가 고스란히 느껴진다. 먹는 행위를 나만의 경험, 그것만이 내 역사의 근간으로 보는 작가의 인식이 독서라는 행위에도 마찬가지임을 깨닫는 건 새롭다. 책을 읽는, 나만의 고전, 나만의 명작을 찾는 과정도 비슷해 보인다. &nbsp;노동을 소재로 한 &lt;청춘 미수&gt;는 통통 튀는 문체와 경쾌한 톤, 화자 주변의 발랄한 조연들 덕에 유쾌하게 읽힌다. 이슈 메이커로서 울림이 꽤 묵직하다. ‘김아혜 선생님’의 행동을 시혜적 태도로 볼 것인가. ≪악인의 서사 (돌고래, 다수의 저자, 2023년 刊≫에서 ‘전승민’은 이런 태도를 ‘연민과 동정, 이해를 앞세운 우월한 자의식이 깃든 나르시시즘’으로 간주하고 소극적인 악(惡)으로 봤다. 김아혜 선생님의 친절 역시 있는 자의 여유, 가진 자가 보이는 가부장적 온정으로 볼 수 있을까. ‘미수’의 노동은 성실하지 않은가. 그렇다면 과연 ‘성실한 노동’은 무엇일까. 그리고 어떤 형태일까. 작가는 아마도 김아혜의 편을 들어주려는 모양이다. 미수의 꿈 속에 나타난 두 명의 엄마는 미처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엄마 품을 벗어난 미수를 위한 다른 엄마의 존재를 암시하는 것으로 보인다. 때문에 이 작품 역시 살짝 비튼, 다른 형태의 모녀 서사로 읽힌다. 김아혜의 친절이 진심이었는지, 그리고 진심이 통했는지, 미수는 자신이 받은 실망을 거두고 김아혜의 안녕을 빌어준다.  &nbsp;요즘의 한국 소설을 읽다 보면 이런 생각이 들곤 한다. ‘한국 문학’이란 어떤 장르적 특색, 경계가 존재하는 건 아닐까. 한정된 단어들만 가지고 생각하고 글을 쓰라는 무형의 압박이(마치 ‘오웰’의 ≪1984≫처럼) 작가들에게 가해지는 것은 아닐까. 물론 심각한 비약이고 과장인 줄 안다. 소설 역시 시대적 유행을 타는 것임을 부정해선 안 된다. 하지만 거의 대부분의 주류 문학들이 어떤 틀 안에서 머무는, 그 경계를 벗어나지 않고 있다는 느낌을 버릴 수가 없다는 건 분명하다. 읽을수록 좀 더 새롭고, 좀 더 파격적이거나 독창적이고, 좀 더 용감하고, 좀 더 획기적인 이야기에 대한 갈망이 커진다. &nbsp;‘영혼을 때리는 울림’이라는 건 분명 있다. 과거엔 소설을 통해 종종 그런 경험을 했던 것 같다. 하지만 요즘의 독서 이력을 살펴보면 그런 경험이 매우 귀하다. 무엇이 문제일까. 내가 변한 걸까. 아마도. 하지만 변화는 내 밖에도 있을 것이다. 단순히 기교나 기술적 측면이 아닌 건 확실해 보인다.&nbsp;]]></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6991/19/cover150/k472030229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69911971</link></image></item><item><author>영꽃</author><category>마이리뷰</category><title>26년 예순다섯 번째 책 - [버트램 호텔에서]</title><link>https://blog.aladin.co.kr/764791159/17436111</link><pubDate>Thu, 06 Aug 2026 19:43: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64791159/17436111</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8202577&TPaperId=17436111"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27/85/coveroff/8938202577_2.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8202577&TPaperId=17436111"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버트램 호텔에서</a><br/>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정성희 옮김 / 해문출판사 / 1991년 05월<br/></td></tr></table><br/>26년 예순다섯 번째 책. 애거서 크리스티 다시 읽기 스물다섯 번째 책. &nbsp;★★★☆&nbsp;❝사람은 절대로 과거로 돌아갈 수가 없다는 것, 그리고 그렇게 돌아가려고 해서도 안 된다는 것을 말이에요. 인생의 본질이란 앞으로 계속 나아가는 것이니까 말이죠. 인생이란 결국 일방통행로 아니겠어요? (210쪽)❞&nbsp;영국 런던. 중심가에서 벗어난 한적한 곳에 위치한 ‘버트램 호텔(Bertram’s Hotel)’. 시대의 흐름에 발맞춰 많은 게 진보적인 변화를 거듭하고 있지만, 이 곳만은 과거 에드워드 왕조 시대(1901~1910년)의 매력을 한껏 뽐내고 있다. 요즘 같으면 ‘레트로’라는 키워드 아래 SNS 페이지마다 인증샷으로 도배될 핫플이 될 수 있겠지만, 우리의 명탐정 ‘미스 마플’의 눈에는 부자연스럽다. &nbsp;호텔의 손님인 ‘레이디 셀리나 헤이지’에서 ‘데릭 러스컴 대령’으로 시점을 옮겨가며 작품의 주무대인 버트램 호텔을 보여주는 도입부가 무척 인상적이다. 독자는 작가가 이끄는 대로 호텔의 구석구석을 목격한다. 이 작품은 전체적으로 한 편의 연극처럼 느껴지는데 고풍스럽고 우아한, 한편으로는 폐쇄적이고 어딘지 모르게 비밀을 품고 있는 장소 덕이다. 무대 자체가 하나의 캐릭터인 셈이다. 환상적인 연극 무대 같다는 미스 마플의 말은 버트램 호텔의 핵심을 찌르고 있다. &nbsp;전체를 구성하고 있는 요소들은 다소 산만하다. 난삽한 사행활의 사교계 ‘셀럽’, 나이 어린 상속녀, 카리스마 넘치는 카레이서, 구시대의 완벽한 호텔 종업원, 각양각색의 손님 들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펼쳐지는데, 강도 사건과 살인, 실종, 막대한 재산, 삼각관계의 연애 문제에 ‘내가 네 엄마다’류의 가족의 비밀까지, 작가는 다룰 수 있는 거의 모든 재료들을 한 작품 안에 쏟아붓는다. 그렇지만 혼돈은 혼돈이되 보기에 좋다. 갖가지 문제들이 치고 빠지며 질서와 균형을 잘 유지한다. 각각의 사건들은 서로를 배반하지 않으면서 영향을 끼친다. 한 사건은 다른 사건의 원인이 되기도 결과가 되기도 한다. 많은 사건들이 돌고 돌아 다시 돌아오는 장소는 바로 버트램 호텔. 결국 오랜 역사를 지닌 호텔 건물처럼, 인간의 범죄도 한 순간의 오류가 아닌, 오랜 세월에 걸쳐 곪아온 상처가 터진 결과로 보인다. 인간의 악행을 바라보는 작가의 인식이 드러난다. &nbsp;외부의 사건과 복잡한 내면의 미로를 절묘하게 배합하여 이야기의 단순함을 극복하고 인간의 이기심과 사악함에 집중하는 구성은 작가의 트레이드 마크처럼 보이지만, 50년대 이후의 후기작 (≪비둘기 속의 고양이, 59년≫, ≪핼로윈 파티, 69년≫ 등)에서 보다 더 두드러진다. 65년에 발표된 이 작품은 작가의 대표작은 아니지만, 쉽게 잊히지 않는 인상을 남긴다. 전체적인 소재는 굵직굵직하지만 강렬한 긴장감보다 아기자기한 잔재미가 돋보인다. 매력적인 인물들과 강한 멜로드라마 성은 작가의 팬들은 분명 반길 요소다. 그렇다고 ‘코지함(coziness)’만을 내세운 작품은 아닌 게, 결말이 꽤나 묵직하다. 악을 고발하는 데 있어 무엇보다 중요한 건 ‘정의(justice)’이다. &nbsp;미스 마플이 등장하지만 활약은 크게 두드러지지 않는다. 미스 마플의 런던 나들이는 그 인물에게도 독자들에게도 귀한 경험이지 싶다. 젊은 시절을 추억하며 곳곳을 누비는 미스 마플을 구경하고 그녀의 과거를 상상하며 그 머릿속을 엿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단순히 ‘노처녀 할머니 명탐정’이란 소설 캐릭터에서 벗어나 인간 ‘제인 마플’로 돌아가는 순간을 작가는 선물하고 싶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nbsp;사족. &nbsp;극 중 인물인 ‘베스 세지윅’이 도넛을 먹으면서 잼이 턱으로 흘러내리는 모습을 묘사하는 장면이 있는데, 얼마나 인상적이었던지 도넛을 먹을 때마다 이 소설이 생각나곤 했다. 동시에 흘러내릴 정도로 잼이 꽉 채워진 도넛은 도대체 어디 가면 먹을 수 있을까, 하는 아쉬움도. &nbsp;]]></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27/85/cover150/8938202577_2.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278597</link></image></item><item><author>영꽃</author><category>마이리뷰</category><title>26년 예순네 번째 책 - [녹색 갈증]</title><link>https://blog.aladin.co.kr/764791159/17436089</link><pubDate>Thu, 06 Aug 2026 19:32: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64791159/17436089</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5444833X&TPaperId=17436089"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29651/42/coveroff/895444833x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5444833X&TPaperId=17436089"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녹색 갈증</a><br/>최미래 지음 / 자음과모음 / 2022년 06월<br/></td></tr></table><br/>26년 예순네 번째 책. &nbsp;★☆&nbsp;단편 세 작품에 ‘프롤로그’, 그리고 작가의 에세이 한 편이 실렸다. 프롤로그의 분량이 꽤 긴데다 뒤에 이어지는 연작 형식의 세 작품과 내용이 이어지니, 독립된 단편 작품으로 봐도 무방할 것이다. ‘단편 세 편+에세이 한 편’이 기본 포맷인 다른 ‘트리플’ 시리즈와 달리 다른 작가들에게 제공된 공간보다 더 많이 주어진 셈이다. 작가는 이 넓고 빈 터에 어떤 세계를 펼쳐 보일까. &nbsp;꾸역꾸역, 힘들게 읽었다. 인물은 호감이 전혀 생기지 않고 감정을 줄 여지도 없다. 인물의 지극히 사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그 고뇌의 실체가 없어 공감하고 응원하는 게 거의 불가능하다. 재미가 없다. 인물들이 꾸준히 움직이고 계속 뭔가를 하는데, 동기도 모호하고 그 ‘뭔가 함’의 의미를 모르겠다. 페이지는 계속 넘어가는데 어떤 이야기인지 감이 안 잡힌다. 이야기가 뜬구름 같으니 흥미가 안 생긴다. 호기심이 안 생기고 뒷일이 궁금해지지도 않는다. 결말이 궁금하긴 했다. 과연 이 혼돈을 작가는 어떻게 마무리할 것인가.  결국 지루해지다가 책을 읽는 게 고역스러워진다. 소설에서 재미와 즐거움을 추구하는 나 같은 독자들에게 어필할 요소는 눈을 씻고 봐도 없다. 그럼 어떤 모종의 의미라도 있을까? 글쎄. &nbsp;형식적인 면에서도 그다지 장점이 보이지 않는다. 평범한 문체에 소위 문장 수집가들을 유혹하는, 시선을 붙드는 문장도 눈에 띄지 않는다. 작가 만의 ‘그 무엇’도 찾아보기 힘들다. 작가 자신이 쓰고 싶은 것을 쓸 뿐, 자신의 머릿속에 머무르려는 태도도 개성이라면 개성이겠지.  &nbsp;작가가 이런 작품들을 (무려 네 편씩이나) 쓴 데엔 무슨 이유가 있지 않을까 싶어서 에세이를 정독했으나 머리만 더 어지러울 뿐이었다. 그나마 문학비평의 힘을 빌려 이 작품들을 이해하고 싶은 마음에 평소에 읽지도 않는 작품 해설을 읽었지만 별 도움이 안 됐다. 비평이란 게 원래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 아니던가. &nbsp;충분히 매력적인 혼돈은 분명 존재한다. 모호하기만 한 혼돈은 그냥 혼돈 그 자체다. 질서가 결여된 환상성은 난삽하고 산만해 보인다. 소설 작품은 이성과 감성이 함께 동원되어야 한다. 잘 쓰인 소설은 정교한 건축물, 맛있는 음식과 같다. &nbsp;최미래 작가를 좋아하고 응원하는 독자들도 있을 것이고 이 작품집을 좋아하는 독자들도 있을 터이니, 이 모든 감상은 그저 나의 취향과 안 맞았던 것으로, 내 독법이 모자란 것으로 돌릴 수밖에. &nbsp;]]></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29651/42/cover150/895444833x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296514265</link></image></item><item><author>영꽃</author><category>마이리뷰</category><title>26년 예순세 번째 책 - [사례 연구]</title><link>https://blog.aladin.co.kr/764791159/17436080</link><pubDate>Thu, 06 Aug 2026 19:26: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64791159/17436080</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2924252&TPaperId=17436080"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3725/4/coveroff/8932924252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2924252&TPaperId=17436080"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사례 연구</a><br/>그레임 맥레이 버넷 지음, 허진 옮김 / 열린책들 / 2024년 04월<br/></td></tr></table><br/>26년 예순세 번째 책. &nbsp;★★★&nbsp;‘버로니카’라는 장래가 촉망되는 여성이 육교에서 떨어져 자살한다. 가족들에게는 그것만으로 충격인데, 생전에 그녀가 가족 몰래 정신과 상담 치료를 받고 있었음이 사후에 밝혀진다. 버로니카의 동생은 언니의 자살에 정신과 상담의 ‘브레이스웨이트 박사’가 원인을 제공했다고 믿는다. 언니의 뜻밖의 비극에 얽힌 진실을 밝히기 위해 ‘리베카 스미스’라는 가명으로 브레이스웨이트 박사의 상담실 문을 두드린다. &nbsp;이야기는 크게 두 갈래로 나뉜다. 하나는 리베카 스미스라는 가명의 여성이 상담 치료를 받으면서 기록한 수기이고 또 하나는 브레이스웨이트 박사의 전기 형식의 글이다. 두 종류의 글이 번갈아 나오며 진행하는데, 가상의 작가(아마도 실제 작가 자신)가 익명의 기증자로부터 전달받은 리베카의 수기를 중심으로 자신이 한 조사를 토대로 쓴 브레이스웨이트 개인의 삶의 기록을 추가하여 완성한 책, 이라는 것이 이 작품의 전체적인 설정이다. 내가 보기엔 이런 얼개가 꽤나 복잡하고 불필요하게 느껴진다. 아무튼, 작가는 이 책이 독자들에게 ‘실제 일어난 일’로 여겨지길 바랐던지, ‘콜린 윌슨’, ‘폴 매카트니’,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같은 실존 유명인사들을 카메오로 등장시키거나 언급한다. &nbsp;일단, 정신의학을 부정하면서 정신과 상담치료를 업으로 삼고 있는 브레이스웨이트는 여러모로 특이한 사람이다. 이 사람은 60년대 정신의학계의 ‘앙팡 테러블’로서 기존의 질서를 파괴하고 반목하며 갖은 방법으로 반기를 드는 그 바닥의 문제아다. 난잡한 사생활과 여성 편력은 덤이요, 기성세대에 도전하면서 그들의 악습을 답습하는 모순도 보인다. 강한 매력과 캐릭터성에 반해 이 인물의 서사는 그에 합당한 대접을 받지 못한다. 작가는 브레이스웨이트의 삶을 마치 유명인의 ‘위키피디아’에서 볼 수 있는 ‘바이오그라피’ 수준의 글로 압축한다. &nbsp;리베카라는 가명으로 박사에게 접근한 인물은 보다 마땅한 대접을 받는다. 언니의 죽음에 박사가 원인을 제공했다는 의심은 거의 일방적이다.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이 인물이 보이는 (까도 까도 끝이 없는 양파 같은)모습은 그녀의 의심이 전혀 근거가 없을뿐더러, 어쩌면 이 여자가 제정신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적어도 평범한 보통의 정신상태가 아닐 수도 있다는 의심을 독자로 하여금 품게 만든다. 이 인물이 작품 전반에 걸쳐 보이는 모습은 마치 서랍 안에 작은 비밀 서랍이 있고 그 안에 또 다른 서랍이 발견되는 식이다. 그렇게 다양한 양상의 성격과 인격이 한 인간의 내면에 존재할 수 있을까. &nbsp;‘진짜 나’는 존재하지 않고 ‘현재의 나’만이 존재한다는 브레이스웨이트의 주장은 설득력이 있다. 드라마에 흔히 등장하는 ‘나다운 게 뭔데?’라는 대사도 말이 된다. 우리의 사회적인 모습은 모두 가면이다. 그것들은 신중히 선택되고 교묘히 연출된다. 그 중에 ‘진정한 나의 모습은 바로 이것’이라고 우리는 분명하게 말 할 수 있을까. 그 어느 것도 내가 아니고 동시에 모든 게 나다. 리베카 스미스의 실제 이름이 끝까지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도 주목할 만하다. 그녀는 리베카인 동시에 어떤 누구도 될 수 있다. &nbsp;소재나 이슈가 꽤나 흥미로운데 반해, ‘이야기책’으로서 성공적인가, 에 대해서는 의문이 든다. 작품 전체가 심리학이나 정신의학의 한 ‘주장’, 내지는 ‘학술적 이론’을 설파하기 위해 소설 형식을 빌려온 느낌이 강하다. 브레이스웨이트 쪽의 이야기는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위키피디아의 한 페이지처럼 읽히고, 리베카 스미스 쪽의 이야기는 제목처럼 정신과 상담 치료의 한 사례 연구 보고서처럼 읽힌다. 이제 생각해 보니, 불필요하게 복잡한 얼개는 소설로서의 얄팍함을 커버하기 위한 ‘가면’이었던 것처럼 여겨진다. 여운도 없고 의미도 없는 에필로그도 마찬가지.&nbsp;]]></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3725/4/cover150/8932924252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37250472</link></image></item><item><author>영꽃</author><category>마이리뷰</category><title>26년 예순두 번째 책 - [다른 사랑]</title><link>https://blog.aladin.co.kr/764791159/17436065</link><pubDate>Thu, 06 Aug 2026 19:15: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64791159/17436065</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982139317&TPaperId=17436065"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9481/1/coveroff/k982139317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982139317&TPaperId=17436065"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다른 사랑</a><br/>최은미 지음 / 문학동네 / 2026년 06월<br/></td></tr></table><br/>26년 예순두 번째 책. &nbsp;★★★&nbsp;문장들에 서린 긴장감이 좋다. 쉽게 끌어다 쓸 수 있는, 클리셰 같은, 빤한 문장들이 별로 보이질 않아 생동하는 느낌이었다. 이 문장이 이렇게 끝난다고? 이런 순간들이 많았는데, 단어의 조합이나 표현들에 들였을 작가의 고민과 숙고가 드러난다.  배경과 설정이 정말 다양하고 인물들의 직업, 소재들이 참신하다. 전작 ≪눈으로 만든 사람≫에서도 느꼈던 바인데, 작가가 이 모든 글감들을 제 것처럼 소화할 수 있다는 게 경이로울 정도다.  &nbsp;반면 난해하고 모호한 작품들이 많이 보인다. 작가의 전작들과 비교해 볼 때, 작가가 뭔가 새로운 걸 시도한 느낌이 확연하다. 자신의 세계에 좀 더 집중했다고 보이는데, 수록작 절반이 굵직한 문학상 수상작임에도 내겐 그다지 좋아 보이지 않았다. 독자로서 조금 소외된 기분이 들었던 것 같기도 하고, 이해와 공감을 가로막는 무언가를 느꼈던 것 같다. 서툰 건 분명 아닌데 조금 빈약했달까. ‘작가 세계’와 ‘작가만의 세계’는 엄연히 다른 거란 생각도 했다.&nbsp;인물들 사이에 존재하던 성적 긴장감이 나중에 와르르 무너지는 모습이 쾌감을 주는 한편, 인간 본성의 잔혹함을 부각한 &lt;상리&gt;, 튀르키에의 난민촌을 배경으로 타인의 상처와 고통을 대면하는 이의 진심에 대한 이야기인 &lt;이 모든&gt;, 1980년 ‘사북항쟁’을 소재로, 폭력 피해의 경계를 묻는 &lt;김춘영&gt; 등은 비교적 쉽게 읽혔다. &nbsp;유적 발굴 현장을 무대로 쌓이고 퇴적된 폭력의 상흔을 고발하려 한 듯한 &lt;무장하는 날&gt;, 화자의 노스탤지어를 긴 호흡으로 풀어낸 &lt;정선&gt;, 동시다발적인 재난들을 배경으로 한 장소에 인물들을 고립시킨 후 그들을 관찰한 듯한 &lt;그곳&gt;, 시어머니의 장례식을 계기로 여성 화자의 각성을 보여준 듯한 &lt;고별&gt; 등의 작품은 선뜻 이렇다고 할 만한 감상이 없어 어려웠다. 읽는 데엔 막힘이 없었으나, 음식을 실컷 먹고 체한 느낌 같다고나 할까. 이런 작품들은 이해하려 하지 말고 느끼라고 하던데 뭘, 어떻게 느껴야 할지.  &nbsp;작가는 작품집의 제목으로 왜 ‘사랑’이라는 단어를 선택했을까. 가시적으로 사랑에 대한 작품은 별로 눈에 띄지 않는데. 그 이유를 고민하고 유추해보면 어렵사리 읽어냈던 작품들을 제대로 ‘느끼는’ 것이 가능해질까.  &nbsp;]]></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9481/1/cover150/k982139317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94810106</link></image></item><item><author>영꽃</author><category>마이리뷰</category><title>26년 예순한 번째 책 - [그건 심리학적으로 맞지 않습니다만 - 의심 많은 심리학자 최승원의]</title><link>https://blog.aladin.co.kr/764791159/17404350</link><pubDate>Tue, 21 Jul 2026 20:04: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64791159/17404350</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422938659&TPaperId=17404350"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3517/1/coveroff/k422938659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422938659&TPaperId=17404350"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그건 심리학적으로 맞지 않습니다만 - 의심 많은 심리학자 최승원의</a><br/>최승원 지음 / 책사람집 / 2024년 02월<br/></td></tr></table><br/>26년 예순한 번째 책. &nbsp;★★★☆&nbsp;❝믿음은 고민을 종결시키고 정신의 평화를 가져온다. 인간과 사회에 대한 어떤 법칙이 내 마음에 든다면 오래 간직하며 삶에 적용하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냥 망각하고 살면 그만이다. 하지만 그 믿음이 자칫 우리의 인생을 위험하게 만들 수도 있다. 나만의 신념이든 대다수의 믿음이든, 그것이 틀린 것이라면, 창피하고 억울한 일이다. (작가의 말, 217쪽)❞&nbsp;상술과 마케팅, 어쩌면 미디어의 호들갑에 동원된 심리학에 관한 오해와 편견을 걷어내고, 그때는 맞지만 지금은 틀린 과거 심리학 연구의 실수를 바로잡으려는 책이다. 학술적 진실을 증명하고 설득하기 위해 실시된 여러 심리학 실험들도 다양하게 소개되어 신빙성을 높인다. 심리학자이면서 현역 임상심리전문가인 저자는 속시원하게 폭로도 하고 차근차근 설명하기도, 오해로 인한 상처를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독자들에게 위로를 건네기도 한다. &nbsp;실험의 오류와 결과의 과장으로 결국 돈벌이 수단으로 전락한 ‘모짜르트 효과’, 타인을 판단하고 폭력과 차별의 근거가 되고 만 유사 심리학 ‘MBTI 성격유형’, 복지 국가와 자살률의 상관관계, ‘마시멜로 실험’의 오류, 과장된 웃음 치료의 효과 등의 내용이 재미있었다. &nbsp;경제적 약자들이 왜 보수당을 지지하는지, ‘시스템 정당화 이론’을 들어 그 행동을 분석할 땐 소름이 돋았다. 매 선거 때마다 갖곤 했던 불가사의였는데 그 저변의 심리를 명쾌하게 들려준다. 한때 트렌드의 키워드였던 ‘소확행’이 ‘소소하고 확실한 행복’이 아닌 단순한 소비 형태로 어떻게 와전됐는지, 주식이나 도박에서 왜 이익을 얻는 사람들보다 손해를 보는 사람들이 많은지,  홈쇼핑에 중독되는 사람들은 어떤 마음인지, 마음에 드는 상대에게 호감을 이끌어내기 앞서 자신의 ‘무해함’을 증명해야 한다는 내용은 우리의 일상과 밀접해서 친근하면서도 귀기울일 만한 조언들이다. &nbsp;책의 후반부엔 자폐 스펙트럼, ADHD, 조현병, 조울증, 우울증 등의 정신병리학에 관한 세간에 널리 퍼진 오해들을 바로잡는다. 저자는 ‘정신과 환자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과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볼 수밖에 없는 이유(15쪽)’를 설명하며 그들을 향한 혐오와 차별의 시선을 경계할 것을 촉구한다. &nbsp;‘중심을 잡는다는 것, 균형을 맞춘다는 것(11쪽)’이란 말에서 저자의 의도를 읽을 수 있다. 이 책은 단순히 심리학적인 지식을 전달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행복한 개인’과 ‘올바른 사회’를 지향한다. 주요 골자만 적고 있어 얇고 쉽게 읽히는 책이다. 심리학 도서보다 현재의 한국 사회를 진지하게 탐구한 저서로 읽힌다. &nbsp;]]></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3517/1/cover150/k422938659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35170182</link></image></item><item><author>영꽃</author><category>마이리뷰</category><title>26년 예순 번째 책 - [애니가 돌아왔다]</title><link>https://blog.aladin.co.kr/764791159/17401372</link><pubDate>Mon, 20 Jul 2026 06:58: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64791159/17401372</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462635224&TPaperId=17401372"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19577/49/coveroff/k462635224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462635224&TPaperId=17401372"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애니가 돌아왔다</a><br/>C. J. 튜더 지음, 이은선 옮김 / 다산책방 / 2019년 06월<br/></td></tr></table><br/>26년 예순 번째 책. &nbsp;★★★&nbsp;전직 교사인 ‘조’가 고향인 ‘안힐’로 돌아온다. 이유가 있다. 우선 도박 빚. 조가 있는 곳은 채권자에게 금방 발각된다. 조는 이 돈을 동창 ‘스티븐’을 통해 해결하려 한다. 부자에 깡패, 재수 없는 스티븐을 옭아매고 돈을 우려낼 강력한 무언가가 있는 것 같다. 그리고 과거에 여동생 ‘애니’에게 일어난 비극. 아마 조가 쥐고 있는 스티븐의 약점이 이 일과 관련이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자신을 고향으로 불러들인 문자메시지, 최근 고향에서 일어난 살인+자살 사건도 과거 여동생 사건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 모든 의문이 과거, 폐광에서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난 동생 ‘애니’를 향하고 있다. &nbsp;우선 장점. 이야기는 미스터리+스릴러+호러+하드보일드(hard-boiled) 등의 장르적인 성격을 두루 갖췄다. 그럭저럭 모양새는 잘 갖췄다. ‘영국의 여자 스티븐 킹’이라는 별명에 큰 반감은 없다. 여러 요소들이 적절하게 치고 빠지며 독특한 분위기를 만든다. &nbsp;폐쇄된 탄광이란 공간은 호러의 좋은 효과를 낸다. 얼핏 ‘스티븐 킹’의 ≪애완동물 공동묘지≫를 연상하게 만들고 죽은 자가 살아 돌아온다는 설정은 ‘W. W. 제이콥스’의 유명한 단편 &lt;원숭이 손&gt;이나 여러 좀비 영화들의 연장선상에 있다. 여기에 범죄와 비밀이라는 미스터리가 추가되는데 크게 어색하지 않다. &nbsp;인물들이 생생하게 살아 있다. 주인공, 조는 ‘필립 말로우’나 ‘샘 스페이드’의 매력을 답습한다. 주변에 배치된 서로 차별화된 성격의 세 여자들(베스, 글로리아, 마리), 티격태격 유쾌하고 잘 짜인 대화 역시 하드보일드의 유산으로 보인다. ‘썩은 세력가’의 전형인 스티븐 역시 잘 만든 악역이다. 지역 공동체의 정계, 재계, 학계 등을 손아귀에 쥐고 제멋대로 놀린다. 이 사람의 영향력은 막강하지만 절대 선하지 않다. 여기에 주인공과는 여자 문제도 얽힌다. &nbsp;무대와 인물 셋팅. 소설을 위해 가장 중요한 문제는 해결한 듯 싶다. 이럼 된 건가? 이야기는 결말을 향하면서 정연함에 조금씩 금이 가기 시작한다. &nbsp;가장 큰 단점은 주인공에게 감정을 이입하고 이야기에 푹 빠지는 데 장벽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주인공에게 가해지는 겹겹의 압박과 해결해야 하는 일이 대개 일치하지만 이 작품에서는 살짝 어긋난다. 이 작품의 가장 큰 동력은 ‘애니’라는 인물에게서 나오는데, 그에 관해 주인공이 하려는 일이 대체로 모호하다. 작가는 애니에게 무슨 일이 생겼는지 보여주길 거의 최후까지 미룬다. 그 덕에 주인공의 모험에 적극적으로 동참하지 못하고 그저 방관하게 된다. 잘 만든 음식 모형 바라보는 것과 다를 게 없다.  &nbsp;작품의 재미와 완성도를 위해, 무엇보다 독자의 호기심을 붙들기 위해, 특히 미스터리 장르라면 작가는 ‘숨기는 것’에 능해야 하지만 그것에도 완급은 필요하다. 미스터리 장르는 지문을 확대한 사진만으로 인체를 알아맞히는 게임과 비슷하다. 당근 냄새도 못 맡은 말이 달릴 이유가 없다. 이 작품은 이야기의 중요한 토대가 되는 사실을 거의 막판에서야 보여준다. 지반이 약한 땅에 지은 사상누각처럼 보인다. 조가 원하는 게 복수인지 비밀을 풀기인지 저주를 막는 것인지 모호하다. 결국 셋 다인데 이래서는 곤란하다. 뭔가 강력한 깃발이 있어야 한다. 나머지는 부수적이 되어야 한다. 주인공은 뭔가를 열심히 하기만 한다. 그러다 결말에 가서야 사실들이 폭죽처럼 터진다. 그리고 허겁지겁 엔딩. 감정이 요동치고 아드레날린이 솟구치다가 서서히 가라앉는 정서적 묘미가 생길 여유가 없다. 그냥 폭주하는 통에 정신이 하나도 없다. 작가가 결말에 터뜨리는 사실들이 모두 중요한 것도 아니다. 독자들이 몰라도 될, 궁금하지 않은, 이야기에 크게 상관이 없어 보이는 것들도 있다. 트리비아에 불과한 것들을 마치 대단한 비밀인 양 폭로한다. 도대체 ‘팻맨’의 정체를 궁금해 했던 독자가 과연 있을까. &nbsp;감히 넘겨짚는 말이지만, 작가가 미스터리를 구성하는 데 아직 완성된 재능은 갖추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장점은 분명히 있지만 얼개는 엉성해 보인다. 후반으로 갈수록 말이 안 되는 설정들이 눈에 띈다. 속도감이 갑자기 떨어지는 데엔 그만한 이유가 있어 보인다. 중반까지 이 작가의 다른 작품이 궁금했더랬다. 하지만 후반부에 들어서면서 이 책으로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뒷심이 모자란, 여러모로 아쉬운 작품이었다.&nbsp;]]></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19577/49/cover150/k462635224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195774996</link></image></item><item><author>영꽃</author><category>마이리뷰</category><title>26년 쉰아홉 번째 책 - [세이프]</title><link>https://blog.aladin.co.kr/764791159/17394524</link><pubDate>Thu, 16 Jul 2026 07:37: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64791159/17394524</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222835306&TPaperId=17394524"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28355/82/coveroff/k222835306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222835306&TPaperId=17394524"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세이프</a><br/>S. K. 바넷 지음, 김효정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21년 11월<br/></td></tr></table><br/>26년 쉰아홉 번째 책. &nbsp;★★★&nbsp;여섯 살 딸, ‘제니’가 사라졌다. 유괴로 짐작된다. 지역 사회에 큰 파문을 일으키지만 어느새 미제 사건이 된다. 그리고 12년 후. 딸이 돌아온다. 그런데 열여덟의 제니는 어딘가 수상쩍다. &nbsp;이야기의 초반은 돌아온 제니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다. 이야기는 그런대로 잘 흘러가지만 열여덟의 제니의 정체는 짐작이 가능하다.중반을 넘어가면서 돌아온 제니의 정체가 까발려지고 국면이 전환된다. 제니에게 맞춰져 있던 포커스가 주변으로 확장된다. 제니는 음흉한 음모자에서 추적자의 입장이 된다. 과거의 제니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이것이 이 작품의 진짜 노림수다. 그런데 이 부분을 지나면서 흥미가 뚝 떨어진다. &nbsp;결말을 예측 가능한 게 가장 큰 이유인 것 같은데, 사실 그것도 그리 중요한 문제는 아니다. 뻔한 결말이라도 그것에 이르는 과정, 주인공의 활약과 통찰을 바라보는 재미도 무시할 순 없다. 제니의 부모인 ‘로리’와 ‘제이크’는 뭔가를 숨기고 있고, 까칠한 오빠 ‘벤’이나 과거의 제니를 기억하는 이웃들 역시 주목할 만하다. 작가는 이런저런 단서를 흘리고 미심쩍은 사건들을 전시하는데 그게 좀 빤하다. 발견한 사실들을 토대로 과거를 재조립하는 과정이 이 작품에서 가장 빛나야 할 부분인데, 작가가 썩 잘 한 것 같지 않다. &nbsp;일단 너무 쉽다. 그리고 우연이 너무 많다. 주인공이 운이 좋아도 너무 좋다. 벤의 입원, 치료 기록을 찾아가는 부분에선 실소가 터져 나왔다. 책장을 뒤지다 보니 아주 중요한 서류가 나오고 키보드를 몇 번 두드리니 사이트가 열린다. 해킹이 이렇게 쉬운 일이었나. 정신분석이나 꿈이 너무 자주 등장하는 것도 눈에 거슬린다. 이 정도면 귀신이 사또를 찾아와 ‘저를 죽인 범인은…’ 하고 알려주는 『장화홍련전』이나 다름없다. 무의식 같은 소재는 캐릭터를 설명하는 수단, 암시 정도로 그쳐야 하는데 너무 결정적이다. 시점을 다른 인물에게 나눠주는 것도 작가의 편리를 위해서라는 것 외에 다른 목적이 보이지 않는다. &nbsp;이야기를 읽다보면 독자가 가장 크게 느끼는 ‘주도적인 감정’이란 게 있는데, 이 작품엔 그게 모호하다. 어느 인물과 감정을 함께 해야 하는지 모르는 것과 비슷하다. 이야기에서 가장 힘을 받는 인물은 ‘어린 제니’이다. 이 인물은 이야기 곳곳에 나오지만 실제로는 등장하지 않는(일찌감치 무대에서 퇴장한) 인물로서, 이 사람에게 건질 건 과거의 사실과 추측뿐이다. 과거의 사실은 박제된 동물과 다름없다. 아무리 험한 일을 겪었어도 생동감이 없어 독자의 감정도 그 밖에 머문다. ‘돌아온 제니’는 중반 이후의 역할이 너무 기계적이고 전형적이다. 처절한 서사를 갖는다고 캐릭터 성이 강화되는 게 아니다. 기능에 치우친 캐릭터의 얄팍함은 꼭꼭 숨어 있다가 엔딩에 이르러서야 모습을 나타내는 메인 빌런에게도 있다. 완전한 감정 이입이 어려운 독자의 눈에 들어오는 건 결국 ‘사건’뿐이다. 인물들은 사건을 보여주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한다. 신경이 쓰이는 인물이 있기는 하다. 바로 ‘벤’과 ‘로리’. 그렇지만 누구 못지않은 악몽을 겪고 불행을 떠안은 이들은 그냥 방치된다. &nbsp;아주 나쁜 작품이라고 말하려는 건 아니다. 그럭저럭 즐거운 시간을 보냈지만 썩 좋았다고 하기엔 퍽 부족하다. 장르 소설 특유의 쾌감, 칼에 베이는 듯한 날카로움 같은 게 없다. 충분히 비극적인 이야기임에도 감흥이나 페이소스가 없어, ‘그랬다더라’ 하는 사실만 남는다. 클리셰 범벅에 여기저기서 좋은 것들만 주워다 엉성하게 엮은 공산품의 느낌, 어딘가에서 읽은 듯한 ‘헌 것’의 느낌이 강하다.&nbsp;]]></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28355/82/cover150/k222835306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283558253</link></image></item><item><author>영꽃</author><category>마이리뷰</category><title>26년 쉰여덟 번째 책 - [마지막 이야기들]</title><link>https://blog.aladin.co.kr/764791159/17392420</link><pubDate>Wed, 15 Jul 2026 01:49: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64791159/17392420</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54692583&TPaperId=17392420"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1791/26/coveroff/8954692583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54692583&TPaperId=17392420"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마지막 이야기들</a><br/>윌리엄 트레버 지음, 민승남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05월<br/></td></tr></table><br/>26년 쉰여덟 번째 책. &nbsp;★★★☆&nbsp;&lt;피아노 선생님의 제자&gt;; 천재적인 재능을 가진 제자에게 도벽이 있다면? 작은 의심은 도화선이 되어 과거의 불행까지 소환해 ‘미스 나이팅게일’의 마음을 소란스러운 지옥으로 만들지만, 제자의 완벽한 연주는 ‘그것으로 충분(17쪽)’하게 만든다. 현실이 주는 작은 위안에 안주하고 삶과 타협하는 결말은 독자들에게 위로가 될까. 현재의 만족은 인생의 부정적인 요소들에 맞서게 해주는 치료제일까, 아니면 곳곳에 도사린 위험을 보지 못하게 눈을 가리는 마약 같은 것일까. &nbsp;&lt;장애인&gt;; 타인의 삶에 거리를 두려는 것은 비겁한 외면일까, 사생활의 존중일까. 영어가 서툰 폴란드 형제는 장애인에게 정확히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모른다. 타인에 대한 이런 무지와 굳이 파고들려 하지 않는 태도는, 제자에게 도난에 대한 책임이 있는지 캐지 않으려는 (위 작품의) 미스 나이팅게일과 닮았다. 이 작품집 안에 ‘타인’을 모티프로 한 이야기 중, 가장 강력한 여운을 남긴다. &nbsp;&lt;다리아 카페에서&gt;; 남편과 절친의 불륜으로 이중의 배반을 경험하고 이중의 상처를 지니고 살아오다가 남편을 빼앗은 친구 역시 (자신과 비슷한 이유로) 불행했음을 알게 된 ‘애니타’는 과연 ‘클레어’에게 용서(연대)의 손을 내밀 수 있을 것인가. 암시로 가득한 결말이 인상적이다. &nbsp;&lt;레이븐스우드 씨 붙잡기&gt;; 범죄를 목적으로 접근했던 자산가에게서 그의 인간적인 면모를 보고 머뭇거리게 되는 ‘로잰’의 이야기. 타인을 미지의 영역에 남겨두는 이야기들과는 달리, 타인을 좀 더 알게 됨으로서 스스로의 행동에 변화(혹은 발전)를 경험하는 주인공으로, 위의 &lt;다리아 카페에서&gt;와 같은 맥락의 작품으로 읽힌다. &nbsp;&lt;크레스소프 부인&gt;; ‘추근거림’에 가까울 정도로 자신을 유혹하려는 여자에 대한 ‘에서리지’의 거부감은 미지(未知)는 곧 두려움임을 상징하는 장치로 보인다. 이야기는 ‘크레스소프 부인’의 사적이고 인간적인 면을 비교적 드러내는데, 에서리지는 그 여자가 어떤 사람인지 끝까지 모른다. 엔딩에 이르러 주인공이 갖는 감정은 연민보다 동정에 가까워 보인다. &nbsp;&lt;모르는 여자&gt;; 모든 것을 지워버리는 죽음 앞의 무력함과 더불어 타인이라는 영역은 우리에게 영원히 알 수 없는 존재이지 않을까. &nbsp;❝한 아이가 두려움 때문에 도망쳤다. 아버지가 약속했다. 순종적인 어머니도 약속했다. 그래도 아이는 자신을 숨기는 데서 힘을 찾기 위해 도망쳤고, 영원히 돌아가지 않았으며, 영원히 발견되지 않았다. (127쪽)❞&nbsp;본문 안에서 의미 파악이 어려웠던 위의 문장은 결코 가닿을 수 없는 타인의 진실에 대한 경구처럼 읽힌다. &nbsp;&lt;대화를 이어가기 위해&gt;; 어긋나고 되돌아오지 않는 감정은 상처가 될까. 오늘날 스토킹 범죄의 요소가 보이는 이야기로, 이 역시 타인의 진심을 모름으로 생긴 공백을 제멋대로 해석해 채운 결과로 생길 수 있는 소동을 다소 코믹하게 풀어낸다. 현재와 과거를 병치시켜 단순한 친절을 거듭된 오해로 문제를 키우고 긴장을 쌓아가는 구성이 돋보인다. &nbsp;&lt;조토의 천사들&gt;; 상대의 약점을 이용해 도둑질을 한 인물이 판화 작품 속 천사의 모습에 각성 받아 훔친 돈을 되돌려주려 하지만 생각에 그친다. 옳은 일을 하기가 결코 쉽지 않음에 대한 이야기로 인간 본성에 대한 작가의 고찰이 잘 드러난다. &nbsp;&lt;겨울의 목가&gt;; 절절한 사랑 이야기. 그런데 불륜이다. 결말은 당연하고 인물들의 죄책감 역시 마땅하다. 감정의 흐름과 서술, 배경 묘사가 아름답다. 주인공의 어린 시절에서 성인이 된 시기를 짧은 분량에 효과적으로 담아낸다. &nbsp;❝상처받은 사람들은 점잖게 사라지지 않고 악마들을 풀어놓는다. (202쪽)❞ &nbsp;위 문장에서 불륜으로 타인에게 상처를 준 ‘메리 벨라’의 죄책감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nbsp;&lt;여자들&gt;; 출생의 비밀이 소재이지만 ‘그 여자가 네 엄마’라는 결말은 없다. 비밀의 열쇠를 쥔 인물의 말은 모호하고 의심을 하는 인물은 함구한다. 인물들을 오리무중 속에 남겨두어 독자들 역시 갈피를 못 잡게 만드는 결말은 &lt;장애인&gt;의 엔딩과 비슷하다. 이야기 속 인물들 간의 거리, 타인이어서 어쩔 수 없는 무지(無知)를 독자들 역시 똑같이 경험한다. 엔딩까지 유지되는 호기심과 긴장감이 매우 좋다. &nbsp;명성은 익히 들어 책 몇 권을 무작정 사놓은 게 오래전인데, 막상 읽은 건 최근이다. 작가 사후 출판된 유고 소설집이라고 하니, 가장 마지막의 작품으로 스타트를 끊은 셈이다. 더 읽고 싶어졌다.  작가가 ‘관찰자’를 고집했던 만큼 그 특징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설명하기보다 보여주기. 결말이 명확하지 않은 것도 여러 갈래의 생각에 단초를 제공하기 위함으로 여겨진다. 그러므로 질문하게 된다. 이거일까, 저거일까. 이야기가 끝나도 그 세계 안에 좀 더 머물게 된다. ‘여운’이라고 해도 좋고 독자를 작품 안에 끌어들이고 경험하게 만드는 무엇이 있는 것 같다. &nbsp;‘단편소설의 거장’이라는 별명은 얼핏 ‘레이먼드 카버’를 연상케 하지만 두 작가의 개성이 좀 달라 보인다. 이렇게 말하려니 좀 우스운 게, 카버는 두 권, 트레버는 겨우 한 권 읽었을 뿐이다. 그래도 카버의 소설들보다는 읽기 편하다고 분명하게 말 할 수 있겠다.&nbsp;]]></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1791/26/cover150/8954692583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17912645</link></image></item></channel></r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