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은 길 찾기 이금이 청소년문학
이금이 지음 / 밤티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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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과 소설 사이 놓인 길을 기쁘게 걷다


이금이 작가님의 청소년 성장소설 3부작 <너도 하늘말나리야>, <소희의 방>, <숨은 길 찾기> 초판이 출간된 때가1999년, 2010년, 2014년이다. 그리고 2021년인 지금, 세월의 공백에 구애받지 않고 이 세 작품을 정주행하여 연달아 모두 읽은 일을 올해 가장 '행운'의 독서라고 꼽고 싶다. 소희와 미르, 바우는 물론 재서, 채경, 재이.. 이 아이들을 만난 게 너무나 큰 힐링이기 때문이다. 지금 어딘가에서 미르가 세상 쿨한 척 능글능글 웃다가 노트북 앞에서 훌쩍 훌쩍 또는 잉잉 울고 있을 것 같고, 평소에는 무심히 지나쳤던 아파트 화단에 핀 이름모를 보라색 꽃을 보며 바우를 떠올렸다(바우라면 이 꽃이 뭔지 조근조근 설명해주었겠지?). 소희같은 아이가 정말 존재한다면 분명 훌륭한 작가가 될 것이다. 설령 작가가 아니더라도 타인의 마음을 헤아리고 보듬을 줄 아는 귀한 인재가 될테니, 든든하다.


수없이 연결된 길 앞에 선 열여섯 살


열세살이던 아이들이 어느새 훌쩍 자랐다. 소희가 바우에게 받았던 "소희를 닮은 꽃, 자기 자신을 사랑할 줄 아는 꽃"이라는 글귀 앞에서 눈물이 핑 돌땐 언제고, "아, 오글거린다!(13p)"고 웃다니 살짝 섭섭할 뻔 했다가, 지극히 정상적인 것 같아 반갑기도 했다. <소희의 방>을 읽으며 먹먹하고 찡해서 몇 번이고 목이 메였다면, <숨은 길 찾기>를 읽으면서는 미르의 맹랑한(?) 독백마다 큭큭큭큭 웃음이 터졌다. 재이가 자기에게 연극의 주인공 라이샌더 배역을 맡기자, 미르가 중얼거린 말, "뭐. 공과 사는 구분할 줄 아네(58p)". 바우가 '죽은 시인의 사회' 영화 얘기를 꺼내자, "죽은'도 싫고 '시인'도 싫고, '사회'도 싫었다(122p)"바우의 순박한 생각을 보는 재미도 만만찮다. 대본을 읽던 중 라이샌더의 대사가 오글거렸을 때, "처음엔 자기 험담을 하고 다니는 미르에게 주인공 역을 준 재이가 대단해 보였는데 대본을 보니 지능적인 안티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66p)". 딱 그 나이다운 솔직함들이 선명하게 와닿아서 역시 좋은 이금이 작가님 소설이었다.


미르는 소희가 특목고를 준비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부끄럽기 싫어 느닷없이 뮤지컬배우를 꿈꾸기 시작한다. 탐탁치 않게 여겼던 연극부 부장 재이 앞에서 자존심을 누르고 오디션을 보기도 하고, 엄마를 졸라 시내의 뮤지컬 학원도 다니며 예고입시를 준비한다. 어수선한 동아리 발표회 연극무대 위에서 진지하게 집중하여 멋지게 독창하는 대목에서는 나도 현장을 상상하며 들뜨고 감격했다('꿈이 이루어지는 순간'이란 노래가 실제 있는 곡인지 너무 궁금해서 찾아봤는데, 없어서 좀 아쉬웠다. 어떤 곡과 매칭해볼 수 있을까). 미르는 공연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듯이 소질이 없다고 볼 순 없지만, 방학 중 서울 학원을 다니면서 실력의 한계를 실감하며 자신의 꿈에 대한 의문이 싹튼다.


바우는 소희가 떠난 빈 집 마당에 자기만의 비밀화원을 가꾼다. 재이의 부탁으로 교내 연극무대를 진짜 꽃과 풀로 꾸미는 일을 맡고, 성공적인 공연에 성취감도 느낀다. 처음엔 아빠의 반대에 부딪혔지만, 생명과학고에 진학하기로 했다. 바우가 정원을 가꾸는 일을 좋아하는 이유는 그 곳에서는 온전한 자기가 되기 때문이물론 좋아하는 이성친구 앞에서는 식물을 향한 자신의 사랑을 순간 의심하기도 하지만 말이다.


이제 열일곱 살을 문턱에 둔 아이들이 아직 자신의 앞길에 대해 명확히 말할 수 없다. 어떨 때 가장 자기다운 지, 무엇을 제일 좋아하고 무엇을 원하는 지를 더듬거리며 길 위에 제 발자국을 조심스레 새겨나가고 있을 뿐이다.


"보상으로 사랑받는 거 이제 안 하려고. 부모라면 자식이 공부 못해도, 잘못해도 사랑해야 하는 거잖아… 날 위해서도 안 가려는 거야. 이번에 영어 캠프에 가서 많이 힘들었어. …아무리 정소희가 돼서 부잣집 딸 코스프레를 해도 내 속은 달밭마을 윤소희야. 전엔 윤소희를 감추려고만 했었는데 생각해보니까 그걸 버리면 내가 아닌 거야. 작가가 되겠다면서 진짜 나를 버리면 안 되는 거잖아. " (98p 외고에 가지 않기로 한 소희)


정원에서는 낯가릴 일도, 남들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할지 걱정할 일도, 생각을 말로 바꿔야 할 때 느끼는 어려움이 없었다. 그냥 자기 자신으로 충분하고 충만했다.(102p 흙을 만질 때 가장 편안한 바우)


"글쎄, 아직 잘 모르겠어. 뮤지컬이 진짜 좋은 건지 공부하는 게 싫어선지 잘 모르겠어."

"공연할 때 소름 돋았다는 것도 뻥이었어?"

"아니, 그건 진짜야."

"그럼 지금까지 그만큼 소름 돋았던 적 또 있어?"

잠시 생각하던 미르는 고개를 저었다.

(197p 무대 위에 선 자신을 좋아하는 미르)


바우는 유학은 몰라도 유럽의 정원들은 직접 가서 보고 싶은 마음이 있으니, 모종삽을 잠시 내려놓고 책을 파고 드는 공부에 심취하게 될 지도 모른다. 소희는 더 큰 세상에서 자기의 이야기를 전하고 싶어져서 독학으로 외고출신보다 훨씬 더 외국어에 능통해질 수도 있다. 미르는 자신이 전율했던 순간을 오래도록 간직하며, 그 기억을 발판 삼아 다른 어떤 일에도 용기있게 도전해볼 수 있지 않을까. 그러니, 지금의 이 마음과 계획이 변형된다해도 괜찮다. 길은 반드시 어디론가 여전히 이어져 있다는 것만을 꼭 믿는다면.



부모에게도 부모만의 길이 있다는 진실


<숨은 길 찾기>에서는 유독 어른들의 마음에 감정이입 해보는 대목이 많았다. 우선, 대학이 아니라 고교 진학에서부터 진로방향이 대략 잡히는 현실파악을 하고 나니, 자녀의 진로이야기를 들을 날이 훨씬 빨리 다가오겠구나 싶어, 내심 긴장된다. 바우 아빠의 마음이 전혀 이해되지 않는 바는 아니다. 하지만, 내가 바우 부모였다면? 바우에게 야망이 없다고 다그쳤을까..? 음..그건 아닐 것 같다. 박사학위도, 출세도 나쁠 건 없다. 하지만, 그 전에 반드시 전제해야만 하는 것을 분명하게 설정해주는 부모가 되고 싶다. 자녀의 주체성. 스스로 하고 싶었던 건지 말이다. '평생직장이 없는 시대', '콘텐츠 1인기업' 시대가 도래해서 그럴까? 하여간 좋아하는 분야를 벌써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바우가 얼마나 대견하고 부러운지. 심지어 나는 "그나저나, 바우아버님, 회장님이야말로 기왕 유기농농법에 대해 유튜브 한번 해보시는 건 어때요?" 라고 말하고 싶은 지경.


미르 엄마가 달밭마을에 오게 된 비하인드 사연이나 재이 엄마의 과거 심경을 들었을 때는 같은 기혼유자녀 여성으로서 마음을 다해 공감이 됐다. 사실 아이들만큼 미르엄마나 재이엄마는 달밭마을에서의 생활을 어떤 마음으로 적응해가고 있는지 궁금했었다. 미르엄마가 이혼을 선택한 이유도 너무나 납득이 가고, 재이엄마의 그늘졌던 기억도 그저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만약 앞으로 인생의 어떤 어려움을 겪을 때 자녀를 진짜 존중하는 방법이 뭔지도 배웠다. [그런 사정을 처음부터 알았다면 이 곳을 그렇게 싫어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른들은 아이들을 좀 더 존중하고 믿을 필요가 있다. 자기에게 닥친 일인데 아이라는 이유만으로-아이를 위해서라는 명분으로-결정이나 판단에서 소외되고 제외되는 것, 진짜 기분 나쁘다 (195p)]


미르 엄마의 이 말에 유독 심장이 찌릿했다- "너희들한텐 3년이 별 게 아닐지 몰라도 엄마 나이엔 아니거든. 아직 용기 낼 수 있을 때 하고 싶은 거야.(160p)"화사하게 웃고 있는 엄마의 사진을 보다 눈물을 쏟는 미르의 이 문장에도 그만 코가 시큰하다- "진료소장도, 미르 엄마도 아닌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한 사람이었다(196p)바우 아빠가 무던하게 뱉던 이 말은, 마치 느티나무 그림자길 어딘가에 쓰여있는 어느 여행자의 편지같다- "농사 망친 것도 억울한데 굶기까지 하면 더 손해지. 그리고 먹고 기운 내서 일해야지, 엎어져 있으면 벼가 저절로 일어난다냐.(62p)" 삶의 성숙이 쌓이면 막힌 길도 뚫어내는 법을 터득하게 되는 걸까. 소설 속 아이들에게 했던 말을 되려 내게 향해 한번 더 반복해 말해야할 것 같다. 지금의 이 마음과 계획이 변형된다해도 괜찮다. 길은 반드시 어디론가 여전히 이어져 있다는 것만을 꼭 믿는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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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희의 방 이금이 청소년문학
이금이 지음 / 밤티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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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님의 고백이 나의 욕망을 채웠다

<소희의 방>의 마지막 페이지, '작가의 말_개정판(310p)'을 읽다가 눈을 크게 떴다. <너도 하늘말나리야>를 따스해지는 마음으로 흥미롭게 읽은 건 분명하지만, 뭔가가...뭔가가...내 안에서도 깔끔하게 매듭지지 않아졌던 그 틈을 완벽하게 직접 정리해주시는 대목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여지없는 '미르 과'였기 때문에, <너도 하늘말나리야>에서 보여진 소희의 어른스러운 의연함을 보면서, 전혀 '하늘말나리'스럽지 못한 자아로 가득했던 소녀시기의 나를 돌아보면 무안하고 부끄러웠다. 작가님은 <너도 하늘말나리야>(1999년 초판)에서 소희의 억눌린 본성을 모른 척 해온 것이 자꾸 마음에 걸렸고, 11년 만에 <소희의 방>(2010년 초판)을 세상에 내었다. 그리고 다시 11년 후 시대에 맞춰 재개정판(2021년)을 내어놓는 소회의 글에서도 집필의도를 거듭 명확히 밝혔다. 작가로서의 성찰이 담긴 고백과 청소년을 본성 그대로 존중하신 마음을 되새기며 가장 진한 밑줄을 긋고 싶다.


"가장 힘든 상황에 놓인 소희를 그리면서도 그 애의 현실, 그로 인한 심리나 상처를 핍진하게 표현하는 대신 내 아이들이 갖기를 바라는 마음가짐이나 삶의 자세를 그리는 데 더 애를 썼다. 어려운 환경에서도 바르게 잘 자라는 아이의 모습은 어른의 시각으로 그려진 것이다. ……소희를 이상적인 아이로 만들어 그 작품을 읽는 독자들에게도 소희처럼 되기를 은연 중에 강요한 것은 아닌지 뒤늦게 돌아보게 되었다.…… 그 뒤 10년 세월이 흘렀지만 아이들은 결코 일찍 철들 필요가 없다는 생각은 더 확고해지고 있다. 어른과 사회는 아이들이 그렇게 자랄 수 있게 해주어야 할 의무가 있다.('작가의 말_개정판 중' 312p)


"건강한 욕망은 인간을 성장하게 만들고, 삶의 질을 높이는 원동력이 된다고 생각한다. 소희가 욕망을 표출하며 본성을 회복해 가고, 어렵게 이뤄가는 과정을 통해 인간과 삶의 본질과 그 이면을 그려 보고 싶었다.(작가의 말_초판 중 310p)"


원하는 걸 말할 수 있을 때 길은 열려

이금이 작가님의 청소년 성장소설 3부작 시리즈[너도 하늘말나리야-소희의 방-숨은 길 찾기]의 두번째 작품 <소희의 방>. 책을 펼친 자정부터 몇시간을 내리 읽다가(멈출수가 없다! 뒷이야기가 궁금해서), 자다 깬 아들의 거듭된 소환에 눈물을 머금고 도중에 덮어야했다. 그것도 소희 앞에 '디졸브'가 헐레벌떡 나타난 결정적 그 순간에잉! 다음날에야 남편과 아이가 놀고 있는 옆에서 틈틈히 읽으며 마침내 결말까지 확인했다. 아아, 기뻤다. <너도 하늘말나리야>의 마지막 장면 이후 소희는 어떻게 지낼까?에 대한 궁금증이 풀렸고, 소희가 '막연히'가 아닌, 정말로 '하늘말나리'가 되는 복잡다단하고 섬세한 과정을 몰입하며 지켜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소희와 엄마 사이에 놓인 세월의 공백이 주는 거리감을 보는 동안엔 내내 마음이 먹먹했다. 친어머니의 대한 기억을 박탈당한 내 아버지의 어린 시절 모습을 그려보았다. 친모의 생사를 알아도 평생 만날 의사가 없으셨던 그 마음을 나는 헤아릴 주제가 못 된다. 가족사진 속 엄마와 닮지 않은 이유는 자기가 친엄마를 닮아서일 거라며 덤덤하게 사연을 말해주던 옛 남자친구도 떠올랐다. 소희의 마음을 읽으며 나도 너무 궁금했다. 자식에게 등을 돌리고 떠난(혹은 떠날 수 밖에 없었던) 그 분들은 어떤 마음으로 살아갔을까. 소희의 엄마는 대체 어떻게 살아온 걸까.. 소희와 엄마 사이를 가로막던 벽이 와해됐던 그 날, 어쩌면 나는 알고 있었던 걸 재확인했는지도 모른다. 엄마가 되어보니 단언할 수 있다. 살아있는 자식을 가슴에 묻고 사는 삶은 절대 진심으로 맘편히 행복할 순 없을 거란 걸. (물론...故구하라나 강한얼 소방관 사연을 보면 상식에 반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소희는 자신을 꼭 닮은 엄마를 만나고 설레던 마음에 서서히 금이 갔다. 별뜻없던 엄마의 말이나 행동들 하나하나가 슬픈 가시가 되어 박혔다. 어디에도 자기가 쉴 방은 없어 보였다. 외투를 입고 있어도 어깨가 시리는 기분이 그럴까. 고작 열네살, 열다섯살의 아이가 굽은 어깨로 비질을 하고, 으리한 식탁 구석에서 묵묵히 밥만 먹고 있을 장면을 상상하는 것만도 가슴이 지르르하다. [잔뜩 웅크린 채 자는 버릇이 그 때문인지, 스스로를 거치적거리는 존재라고 생각하는 몸이 무의식중에도 자리를 조금 차지하고자 애쓰는 건지 알 수 없다. (12p)]


친구들이 자신의 처지를 알게 될까봐 점차 거짓말을 하거나 과시를 하는 모습과 불안한 심리가 안타까우면서도 이해는 됐다. 열다섯살이다. 지름길을 놔두고 빙 돌아서 누가 보는 사람이 있나 확인하며 후다닥 귀가했던 그 나이의 내 모습이랑 사실 다를 바 없을 것이다. 소희의 자존심이 자존감으로 변화할 때까지 피치 못할 과정으로 보고 싶다. 소희의 욕망과 자존심을 자연스러운 과정으로 이해할 수 없다면, 그건 타고난 자존감을 가진 승자 뿐이리라.


-소희는 그동안 떼 지어 몰려다니는 아이들과 자신은 다르다고 여겨 왔다. 그런 아이들과 어울려 돌아가니고 싶지 않았고, 유행 따위를 따르기도 싫다고 생각해 왔다. 하지만 소희는 자신이, 동경이나 욕망 자체를 느끼지 못했던 게 아니라 가질 수 없는 것에 대해서 무관심으로 자존심을 지켜 왔음을 깨달았다. 가장했던 무관심은 살얼음처럼 얄팍해서 채경의 말 몇 마디에 파삭하고 깨져 버렸다. (121p)


-문득 그동안 자청한 거라고 여겼던 모범생 역할이 실은 보이지 않는 강요 때문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모 없이 할머니와 사는 환경이, 할머니한테도 버림받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동정이나 손가락질이 죽기보다 싫었던 자존심이, 모범생 노릇을 할 때나 대견한 시선으로 바라봐 주는 어른들이.. (188p)


엄마에게 마음의 문을 닫는 심정 또한 정당하게만 느껴진다. 그런 감정의 혼란을 고스란히 겪어내는 소희를 가만히 응원하고 싶기만 했다. 부러운 건 부럽다고, 갖고 싶은 건 갖고 싶다고 말하고, 화나는 건 화난다고, 싫은 건 싫다고 말할 수 있는 것. 내 마음의 진실을 속이지 않는, 그게 진짜 자존감이야. 라고 나도 옆에서 자꾸 알려주고 싶었다. 의외로 소희 고모가 고마운 말을 해주셨다.

-"그동안은 일찍 철든 게 안쓰러우면서도 대견했는데 이제 보니 아니었다. 애들이 부모 속 썩이고, 반항하고, 형제들하고 싸우는 시간도 다 약정 시간에 있는 거야. 너희 때는 그게 당연한 거야. ……".. 자식이 속썩이고 대들 땐 미워 죽겠다가도 돌아서면 보고 싶고 그리워지는 게 엄마 마음이거든 (238~239p)


마침내 소희가 더이상의 상처나 인내를 거부하며 하고 싶은 말들을 지르는 모습을 보는 게 반갑다 못해 후련했다. 지하철역 사물함 안에 범생이 옷을 처박고 문을 닫았을 때, 엄마에게 억눌린 서러움을 표출하고 '질문' 을 쏟아냈을 때, 그리고 그 폭풍의 끝에서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바우가 그려준 하늘말나리는 정말 소희를 닮았을 것 같다.


-시간이 지날수록 비참한 감정이 옅어져 갔다. 내성이 생겨서가 아니라 어느날 문득 깨달은 생각 하나가 자리를 넓혀갔기 때문이다. 떨어져 산 내내 엄마 삶을 옥죄는 족쇄였다는 말은, 소희를 한시도 잊은 적 없다는 고백이기도 하다. 그 생각은 냉기로 가득 찼던 소희의 마음을 가장 깊은 곳부터 서서히 데우기 시작했다. (218p)


-어쩔 줄 몰라 하는 표정에서 진심이 읽혔다. 소희는 그 때문에 아파하고 힘들어했던 게 생각난 허탈하면서도 그때 그 자리에서 참지 말고 말했으면 풀렸을 텐데 하는 후회가 밀려왔다. (246p)


강해지고 싶은 욕망의 이유는 따로 있다

'상처입은 조개만이 진주를 키울 수 있다'는 말'에만 의지할 수밖에 없었던 소희에게 친구 채경은 단비같은 아이다(내가 사랑한 '홍주('알로하, 나의 엄마들' 등장인물)'가 여기 또 있었네!). 영화감상동아리 모임에서 사복으로 만나는 대목, 아 기습당했다. 소희의 세상진지한 해석에 고개를 끄덕이며 씁쓸해하다가.. 채경의 해맑은 핀잔(120p)에 웃음이 터졌다. 둘이 옷 얘기를 하는 걸 보니, 새삼 나도 옷이 사고 싶어져서 읽다 말고 잠시 쇼핑몰을 서핑하는 샛길로 새기도. 응?

누군가는 소희가 사실대로 말해주고 난 후엔 그동안의 소희를 가증스럽게 바라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채경이는 아예 진주를 투척해주었다. 소희 홀로 상처를 핥느라 낑낑대며 고군분투해야만 진주를 뭉칠 수 있는 걸까. 상처에 집중하는 대신 반질반질한 친구조개와 천천히 예쁜 바다를 감상하는 것도 괜찮은 일이지 않을까. 그런 동행 자체도 '진주'가 아닐까.["뭐래. 정소희든, 윤소희든 너는 너잖아. 그거면 됐어. 너 오늘 햄버거 쏴. 부잣집 딸인 것도 그대로잖아"(306p)].


소희는 이제 점점 지켜주고 싶은 이들이 많아질 것이다. 엄마, 채경, 지훈, 재서, 우혁, 우진, (새아빠는 유보 : 솔직히 아직 못 미덥다), 양평 할머니, 그리고 다시 미르와 바우... 그동안 자신의 결핍만으로도 버거웠던 소희였다면, 앞으로의 결핍을 채울 자신만의 방 안에서 사랑하는 사람들을 지켜줄 수 있는 힘을 함께 욕망하게 될 것이다.


그저 배경적 요소의 인물 정도로 언급되는 줄 알았던 새아빠의 딸 리나가 가장 결정적인 이야기를 해주고 갈 줄은 몰랐다. 소희만큼 힘든 시간을 보냈고 회복하며 성장해가는 리나만이 자신있게 힘주어 얘기해줄 수 있는 조언이었다. 열다섯 살하고도 스물일곱살을 더 먹은 내 마음에까지도 그 진동이 오래 머무는 문장이다.


"엄마의 불행이나 고통을 외면하라는 게 아니라 그걸 네 것으로 만들어선 안 된다는 말이야. 엄마는 엄마고 너는 너야. 우리는 모두 각자 인생을 사는 거야. 이건 닥터가 내게 해 준 말이야. 대신 넌 너나 네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부당한 일을 당할 때 할 수 있는 일을 하면 돼. 네 마음이 건강해야 어떤 상황이 벌어졌을 때 올바른 판단을 하고 당당하게 표현하거나 행동할 수 있어."



 

* 출판사에서 책을 지원받아 읽고, 솔직하게 작성한 감상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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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도 하늘말나리야 - 중학교 국어교과서 수록도서 이금이 고학년동화
이금이 지음, 해마 그림 / 밤티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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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너도 하늘말나리야>가 2021년 개정판(초판 1999년)으로 재출간됐다는 소식이 들렸다. 이금이 작가님의 '성장소설 3부작'의 첫 작품인만큼 꼭 읽어봐야할 독서목록이었는데, 현대적 느낌의 산뜻한 애니메이션풍 일러스트 표지로 만나니 더욱 반갑다. (이금이 작가님은 개정판을 출간할 때, 표지만 바꿔 다시 찍는 게 아니라 내용도 현 시대에 맞게 많은 수정을 하신다고 함)

아빠와 헤어지고 시골마을 진료소장이 된 엄마를 따라 달밭마을로 전학온 미르. 부모의 기억이 희미한 채 할머니와 단 둘이 사는 소희. 자신의 모든 이야기를 받아주던 세계인 엄마를 잃고 입을 닫은 바우. 열세살 세 아이들의 사연과 마음이 각자의 시선으로 교차 서술되는 구성이다. 처지가 같은 듯 하면서도 달라 서로를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지만, 어느새 헤어짐을 앞두고 뭉클한 우정을 확인한다. 서로가 서로의 따뜻한 느티나무였음을 인정하면서.

소희 편에서 '혼자만의 얼굴을 본 사람이 가져야 하는 아주 작은 예의(76p)'라는 제목이 강렬하게 마음에 남는다. 미르는 엄마를 오해하고 속상하게 하고 싶어 뾰족하고 삐딱하게만 행동했다. 엄마가 바라는 대로 하기 싫어 달밭마을 학교 아이들에게도 마음을 열 의향없이 냉랭하기만 했다. 하지만 미르를 처음 보았을 때 그 아이의 불안하고 외로워보였던 얼굴을 기억하는 소희는 일기장에 이렇게 적었다. 가만히 관찰하는 감각이 섬세한 바우도 이렇게 생각했다.

소희는 미르가 못마땅하다가도 느티나무 아래에 서 있던 모습이 떠오르면 마음이 누그러들었다. 혼자만의 얼굴을 보지 않았으면 자기 역시 미르를 재수 없는 아이라고 생각하고 말았을 거다.

나는 미르를 이해하기로 했다. 그 애가 보여 준 게 아니었다고 해도 혼자만의 얼굴을 본 사람이 가져야 하는 아주 작은 예의다. 그렇지 않으면 그건 남의 일기장을 봐 놓고 남들에게 그 내용을 떠들고 다니는 짓이나 마찬가지다.

<너도 하늘말나리아> 81p

바우는 미르가 날카롭게 구는 이유를 이해했다. 자신이 말하지 않는 것으로 엄마 잃은 슬픔을 나타냈듯이 미르는 가시를 세운 모습으로 아빠와 헤어진 슬픔을 표현하는 거라고 바우는 생각했다. 그래서 그 아이를 보면 엉겅퀴꽃이 생각났다. 뾰족하고 날카로운 가시 같지만 만져 보면 부드러운 엉겅퀴꽃. 어쩌면 다른 사람보다 여린 마음을 들키기 싫어 가시 돋친 모습을 하고 있는 건지 모른다.

<너도 하늘말나리아> 149p

미르는 소희와 바우에게 마음을 열고 가까워질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우리는 그 누구도 예의없는 사람 곁에 있고 싶지 않으니까. '이해'하려는 노력이 곧 '인간에 대한 예의'라고 말한다. 말하고 싶어하지 않는 것을 집요하게 묻지 않고 기다려주는 예의. 보여지는 것만으로 섣불리 판단하지 않는 예의. 이건 연습에 연습을 거듭해야 익숙해지는 능력 같다. 그 연습 자체가 예의인지도 모르겠다.

소희와 바우가 미르를 이해했다면, 나는 책을 읽으며 소희를 이해한다. 나의 성정(성질과 심정)은 소희보다는 미르 쪽에 가깝다. 소희가 단 한번도 미르처럼 주저앉아 울음이 터트려본 적 없으며, '결손'의 평가를 받지 않기 위해 의식적으로 더 성실한 모범생처럼 지냈다는 이야기에 먹먹해졌다. 부모에 대한 원망조차 없고, 미르나 바우가 엄마아빠를 그리워하고 상실감에 힘들어하는 게 차라리 부러운 이유를 깨닫는 순간엔 [(용서할 수 없는 건 추억이 많기 때문이다(121p)], 내가 가진 것들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다.

소희는 자기 자신과 이야기를 나눈다고 했다. 자신이 말할 대상이 사라졌다고 믿었던 바우는 '자기 자신과 이야기를 나누는' 소희가 진짜로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에 대한 믿음이 없으면 그러기 힘들다고. 소희가 당당한 건, 기본적으로 자신에 대한 믿음이 있어서다. 소희에겐 소중한 할머니와 가족처럼 도와주는 이웃어른들이 있었다. 자신에 대한 믿음은 느티나무같은 존재들이 있을 때만 무럭무럭 자랄 수 있다.

이제 바우와 미르는 어떨까? 바우와 미르에게는 친구가 있다. 바우는 미르가 아이들에게 둘러싸여 타박당하고 있는 걸 목격했던 순간엔 너무 말을 하고 싶었다. 아빠가 미르의 엄마를 좋아한다고 짐작했을 땐, 감정에 완전히 충실해져서 자기도 모르게 미르에게 질문이 튀어나왔다. 바우는 자신의 의지를 믿을수록 점점 말이 필요한 순간을 외면하지 않게 될 것이다. 바우가 엄마에게 쓰던 편지도 언젠가는 자신을 향하게 될 날도 그려진다. 미르는 엄마가 자신을 더이상 어린아이 취급하지 않는 게 좋았다. 엄마가 마을에서 얼마나 중요한 일을 하고 있는지 직접 지켜보면서 엄마를 조금은 이해하게 되었다. 미르는 엄마를 미워하고 반항하는 데 쓸 에너지를 이제 자신과 대화하는 데 써 가겠지?

땅만 내려다보지 않고, 고개를 들고 당당히 서 있는 꽃, 자신을 사랑할 줄 아는 꽃, 하늘말나리들이 어딘가에서 고고하게 피어나는 소리가 들린다. 느티나무가 가르쳐주는 지혜를 터득하면서 말이다.

'오백 살이라고?' 이제 열세 살인 미르는 얼마큼 오래 살아야 오백 살이란 나이를 먹을 수 있는 건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그 세월 동안 한 자리에 붙박인 채 서 있었을 걸 생각하자 가지 하나하나가 나무가 겪은 일 같아 보였다. 그러자 지금 벌어진 일이 그렇게 큰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얼핏 스쳐 갔다.

<너도 하늘말나리야> (31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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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단 현상 - 초등학교 국어교과서 수록도서 이금이 고학년동화
이금이 지음, 오승민 그림 / 밤티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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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조하게 어쩔 줄 모르며 손이 떨리는 그 현상? 어린이에게 '금단현상'이 올만한 간절한 것이 뭘까? 어린이의 마음을 가늠하기엔 내 나이가 너무 멀어진건지, 저 어휘에 부합될만한 소재로 고작 흡연 외엔 짐작되는 게 없었다. 호기심 듬뿍 묻은 책을 바로 짐가방에 넣었다. 강원도 부모님댁을 향해 달리는 차 안 보조석에 앉아, 쉬엄쉬엄 차창 밖 산등성이 풍경과 책 속 소년소녀들의 내밀한 마음에 번갈아 눈을 옮겼다. 어느덧 열두세살의 내가 되어 있었다. '금단현상 돋고도 남지!' 고개를 주억거리고 있었다.


『금단현상』은 이금이 작가님의 동화 다섯 편(<꽃이 진 자리> <한판 붙어 볼래?> <금단현상> <십자수> <임시보호>)이 담긴 동화집(2021년 개정판/2006년 초판)이다.


이야기 속 아이들은 모두 도시에서 살아간다. 엄연한 사회구성원데도 어쩐지 안식처가 없어 배회하거나 입술을 불퉁히 내밀고 웅크려있는 모습이다. 낡기만 한 빈 집을 뒤로 하고 벚나무 한 그루에게 위로 받거나["벚꽃 등 아래에 있으면 외롭지 않았다(9p)], 피시방에서 시간을 잊고 게임에 몰두하거나["새 학교의 아이들은 날 촌놈이라고 놀리며 자기들 무리에 끼워 주지 않았습니다(33p)"], 부모의 전폭적 교육 지원을 받아온 하은조차도 유기견보호소에서 푸들 강아지가 오기만을 목빼고 기다리며["포포가 오면 집에 혼자 있어도 외롭거나 무섭지 않을 것 같았다(98p)"] 말이다.


아이들의 결핍된 마음에 따뜻한 활기와 희망이 들어서는 계기는, 타인과의 새로운 관계에서 비롯된다. 그 관계는 아이들 스스로의 의지와 용기로 이뤄진다. 심지어 그 노하우를 어른에게 가르쳐주기도 한다["아빠가 팔찌를 만들면서 엄마가 화난 이유를 생각해 보면 좋겠다.(93p)"]. 소녀가 할머니의 집으로 스스로 직접 찾아가보지 않았다면(<꽃이 진 자리>), '촌놈' 최영훈이가 '떡장수' 이장수에게 반격하고, 또 실수로 상처를 준 것에 대해 진심으로 사과하지 않았더라면(<한판 붙어 볼래?>), 소원해진 친구 유나가 말을 걸며 다가왔을 때 하은이가 닫힌 마음을 끝까지 열지 않았더라면(<임시보호>) 어땠을까. 사람과 사람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차가운 담이 사소한 계기로 와륵 무너지는 순간은 언제 보아도 찡하다. '훈훈하다'고 표현하기엔 아쉬울만큼 뭉클하다. 이금이 작가님의 동화를 읽으면, 어른 눈에는 미숙하게만 보이는 어린이들이 작은 반전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힘을 갖고 있다는 걸 다시 알게 된다. 내 어린시절을 까먹고 살아가는 내가 부끄러워진다.


동화집 제목과 같은 세번째 동화 <금단현상>을 무척 재미있게 읽었다. 아니 왜 내가 이 나이먹고 같이 두근거리고, 궁금해죽겠냔 말이지. 라떼는 휴대전화가 대학교1학년이 되어서야 보편화되고 SNS도 없던 시절이니, 초중고시절에는 집전화나 공중전화로 마음 졸이며 통화를 하곤 했다. 짝사랑하는 남자애 집에 전화해서 목소리만 듣고 끊는 일도 부지기수였고, 삐삐사서함에 익명으로 음악을 남기는 짓을 했던 것도 같다(아아 소름!). 그래서 현기의 답장과 성규의 전화를 다시 기다리는 동안 겪는 효은이의 '금단현상'이 어떻게 끝날지 알고 싶어 손가락이 근질근질했다. 효은이가 하진에게 피구공을 던지게 되기까지, 그 순간의 감정을 묘사하는 문장은 정말 최고다. "마음 밑바닥에서 뜨거운 무엇인가가 솟구쳤다. 처음엔 그것이 불길처럼 타오르다 연기처럼 흩날리고 말 질투 같은 건 줄 알았다. 하지만 뜨거운 무엇인가는 점점 단단해지더니 마음 한가운데 기둥처럼 곧추섰다. 그 기둥이 마음을 받쳐 주는 것 같았다(69p)'불의에 대한 반감'은 치기어린 시샘과는 분명히 다르다. 옳은 행동을 선택한 그 순간은 어른인 내가 봐도 통괘하고 멋졌다! 그리고, 그 이유에 대해 설명하는 이 문장을 보고, 다시 실감한다. 나를 성장하게 하는 동력은, 나를 지지하는 타인과의 상호작용이라는 사실도. "오늘 하진이에게 했던 행동은 충동적인 감정에서 나온 것이기보다 성규와 통화하며 차곡차곡 쌓았던 다짐 덕분에 나온 것이었다. 오늘 일을 이야기하고 싶었다.(72p)"


<임시보호>에서 하은이 부모는 당연히, 아이를 너무나 사랑하는 마음에서 헌신을 다한다. 하지만 정작 하은이는 외롭고 버겁다. ["부모님을 실망시키는 게 솔직히 걱정스럽기보다 두려웠다. 내가 공부를 못해도, 엄마 아빠가 바라는 걸 이루지 못해도 나를 사랑해 줄까.(120p)"] . 하지만 하은이가 원하는 것을 스스로 말할 수 있을 분위기로 전환되는 점이 참 다행스러웠다. ["부모역할은 자식을 임시 보호하는 거지, 애 인생을 평생 책임져 줄 수는 없다는 생각이 자꾸 들어.(123p)"] . 부모님이 마음을 표현하지 않은 상태에서 아이에게 네가 바라는 것을 알려달라고 해봤자, 하은이는 결코 본심을 표현할 수 없었을 것이다. '말하고 싶은 것을 말하지 못해 어쩔 줄 모르는 고통'도 금단현상이다. 얼마나 많은 어린이들이 금단현상을 겪으며 살아가고 있을까. 혼자서 극복하기엔 역부족일 것이다. 효은이가 차곡차곡 '말할 수 있는 힘'을 쌓아갔던 것처럼, 누군가는 그것을 들어줄 수 있는 귀가 탁 트여 있어야만 한다. 진구가 내달리는 벌판의 풍경이 그 이치를 말해주는 것 같다.


2분도 안 되는 짧은 동영상 속에서 진구는

목줄도 입마개도 없이 끝없이 펼쳐진

옥수수밭 사이를 달려가고 있었다.

한 다리를 절뚝거리면서도 신나게 달렸다

<임시보호> 중 121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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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흔을 앓다가 나를 알았다 - 이 시대를 사는 40대 여성들을 위한 위로 공감 에세이
한혜진 지음 / 체인지업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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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즈코 상> 소설에 대한 추천사에서 정혜윤 작가님이 이런 표현을 썼다. "나는 이 책을 읽고 한참 동안 눈을 감고 있었다." 나는 <마흔을 앓다가 나를 알았다(이하 마앓나알)>를 읽으며, 자꾸 눈을 꾸욱 감고 잠시 멈추어서곤 했다. 전화를 끊고 봇짐처럼 뒤에 아기를 업은 채 망연자실하게 서 있는 한 여성의 모습이 그려져서. 이제 손아귀 힘도 제대로 못쓰게 된 몸뚱이라, 식당 설거지 알바조차 못할 거라는 위기감으로 덜컥 겁이 났던 내 설움도 떠올라서. 자신이 좋아하는 일에 몰입하며 경력을 쌓았고, 인정과 경제적 자립을 누리며 살아왔어도 소용이 없다. 안에서는 궤도에서 이탈된 무력감에 누가 뭐라하지 않아도 자존감이 위태롭기만 한데, 밖에서 찌르는 가시에 더욱 아프다. 싫든 좋든 엄마의 외피를 쓰고 속절없이 나이들어가는 여성의 삶은 대체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

여성작가가 쓴, 더 정확히는 '대한민국 엄마인 작가'가 쓴 '여자의 마흔 책'이 나왔다. 목이 빠질 뻔 했다. 왜 이제야 나왔냐고 엄한 작가님에게 징징댈 뻔 했다. 실은 재작년 겨울 나는 마흔을 앞두고, 마음의 의식 차원(?)에서 마흔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책을 한 권 읽어보았지만, 해갈되지 않는 허기가 남았었다. 책에는 내 삶이 들어있지 않았다. 그러니 안타깝게도 나를 위한 지침으로 깊게 와닿지가 않았다. 그리고 당시 나는 여전히 고막이 찢어지게 악을 쓰는 꼬맹이를 폭풍육아 중이었기에, 내 나이를 셈할 여력보다는 내 자식 개월수를 셈하느라 절박했다.

나의 ' 마흔앓이'는 일년이 지나 마흔 한살을 코앞에 두었을 때, 잠복기를 깨고 실체를 드러냈다. 11개월 간격으로 무려 두번의 지독한 독감과 후유증으로 생전 모르던 식도염까지 앓으면서 나는 땅에 얼굴을 파묻고 싶었다. 아둥바둥 더 살아가야할 날도 벌써 지긋지긋해서 이대로 증발해도 미련이 없을 것만 같았다. 처음엔 이유를 몰랐다. 한 두번 아파본 것도 아니면서 왜 이렇게 유난히 우울해 죽을 것만 같지. 나중에야 '명료한 언어'를 통해 깨달았다. 그동안 깡으로 자만했던 내 몸도 이제 더는 '청춘'이 아니구나,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구나, 직시하고서야 말이다.

"'나이 든다'는 그 느낌을 자세히 말해보자면, 처음에는 긴가민가하다가 일정 기간에 이르러서는 하루하루가 다르게 느껴지는 것이다. 시간에 가속도가 붙는 순간이 오면,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내가 비교가 될 정도로 나이가 든 느낌이 든다(21p)"

<마앓나알>에는 노산후유증이 노화와 조우했을 때, 삶의 질을 얼마나 떨어뜨리는지, 머뭇거리지 않고는 하기 힘들었을 고백까지 솔직하게 담겨 있다(케이트 윈슬렛 진짜 감사하고 멋지네요. 저도 사랑해도 될까요?). 나 역시 작가님과 유사한 고충은 물론, 더는 족집게 뽑기로 따라갈 수가 없는 흰 머리 자괴감, 비비크림을 발라도 푸석하기만 한 피부, 상냥한 눈웃음보다 더 먼저 눈에 띄는 눈주름, 만성으로 시큰거리는 손목, 어깨죽지마저 어긋난 것 같은 통증, 아랫니가 점점 비뚤게 돌아가고 있는 걸 발견했을 때의 충격, 세상 모르고 살았던 두통의 빈번함까지.. 모든 노화가 아주 신나게 현재진행형 중이다. 이 모든 게 정말 마흔을 기점으로 심화되었다. 그야말로 인체의 신비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 나니 내 노화가 대수롭지 않게 느껴진다. 나도 그래요. "나도 그래요"의 힘이 얼마나 큰 지, 알게 해준다.

하루 차이로 새해가 왔을 뿐인데 마흔이라고 유별나겠나 싶지만, 이 정의를 대입해보면 수긍하지 않을 수가 없다. "마흔이란, 젊지도 늙지도 않은 나이, 살아온 날과 살아갈 날의 수가 비슷해지는 나이(4p), 무엇을 하기에도, 멈추기에도 애매한 나이(6p)" 정말 그렇다. 이십대에서 삼심대로 넘어가는 것과 차원이 다른 느낌이다. 아무리 말이야 백세시대라고 하지만, 아무래도 마흔은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적어지는 분기점임을 부인하기 힘들다. 하아. 당혹감을 분명 느끼면서도, 하루하루 육아와 가사 과업을 완수하느라 막상 진지하게 현 시점에 대해 사유해볼 기회를 갖지 못해왔다. 그런데, 책이 내게로 왔다.

마흔이 되고 보니

가만히 앉아서 저절로 얻어지는 것은

나이와 노화뿐인 것 같다.

일부러 살아야 한다.

-<마흔을 앓다가 나를 알았다> 78p 중에서-

한혜진 작가님은 그동안 자신의 내면아이를 보듬으며 쏟아낸 눈물들을 거두어, 또 다른 마흔들에게 씨앗을 건넨다. 자기학대, 자기비하, 자기혐오의 고통에서도 끝내 생존해서 자신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는 그가 보인다. 글을 쓰면서도 울고, 원고를 다시 읽으면서도 울고, 책을 내고서도 떨고 있는 작가님.. 그런 그이기에, 그가 전하는 '일부러 살기' 미션이 겸허하게 들릴 수 밖에 없다. 일부러 살아가게 하는 동력은 다름아닌 '가장 나다움'을 되찾는 일이라고 말한다. "내가 나를 정확하게 규정하지 않으면 남들이 나를 부정확하게 규정한다(87p)"는 말이 참 와닿았다. 여자라서, 엄마라서 씌어진 잘못된 프레임에 휘둘리지 않으려면, 내가 정의할 수 있는 내가 되어야 한다. 불혹은 무슨, 마흔은 흔들릴 일투성이지만, 흔들리지 않기 위한 내공 기르기에 열중해야 한다(18p)고 알려주었다. 살아지는 대로 살아서는 안되고 일부러 살아야만 쌓을 수 있는 내공 말이다. 나는 이제사 좀 앞으로 보람있고 즐겁게 임할 수 있을 나다운 평생업을 탐구해가고 있는 터라, 이 문장을 믿고 계속 용기내어 나아가고 싶다. "엄마의 일은 내가 눈높이를 낮춘다고 오는 것이 아니다. 로또처럼 한방에 인생역전하듯 찾아오는 것도 아니며, 남을 따라서 한다고 그 사람처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저 내가 나를 제대로 알면 일이 생긴다.(112p)"

보통 마흔무렵의 엄마는 사춘기에 진입하는 자식을 양육하는 시기다. 내 아이는 이제 다섯살인 마당이라 당장 시급하진 않지만, 5년 뒤면 반드시 닥칠 일이다. 한혜진 작가님은 양육서 베스트셀러인 <극한육아 상담소>, <무조건 엄마편>, <위대한 유산>을 집필하신 분 답게 특유의 명민한 통찰이 이번 책에서도 어김없이 드러난다. 점점 떠나가는 큰 딸아이를 바라보는 변함없는 사랑과 마음의 준비, 중심을 단단히 세우는 양육철학은 작가님의 사적인 영역을 넘어서서 함께 지혜로운 엄마가 되자고 손을 내미는 공언이다. 나는 청소년은 무조건 반드시 기필코 "반항하는 망나니"라는 고정관념이 있어서 두려웠는데, "아이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아이가 가진 일부 행동이나 성격, 습관 같은 것이 문제(194p)"임을 깨닫고 "인간 존재로서 10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195p)"는 참지식을 얻었다. 인용된 기질 영어 전문가 김세희 님의 이야기에도 눈이 번쩍 뜨였다. "밖에 나가는 것만이 경험이 아니예요. 소통의 스펙트럼이 어디까지 넓어질 수 있느냐가 진짜 아이의 경험이죠. 아이와의 대화가 어디까지 쭉쭉 뻗어 갈 수 있는지가 중요해요(201p)"

내가 필요로 했던 실질적인 마흔 책, <마흔을 앓다가 나를 알았다>를 읽으면서, 딱 이 생각이 든다. 같이 늙어가는 언니가 있어서 너무 좋다. 같이 늙어가는 마흔친구들이 있어서 좋다. 마흔의 고비를 넘어선 내가 좋다. 내가 나를 좋아하게 해주는 이 책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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