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3시, 오잔호텔로 오세요
후루우치 가즈에 지음, 남궁가윤 옮김 / 놀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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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의점, 서점, 중고상점, 백화점, 부엌... 요즘 소설의 트렌드가 '특정한 공간적 배경을 나타내는 키워드'인 것 같다. 그래서인지, 이번엔 '호텔'이다. 후루우치 가즈에의 소설 <오후 3시, 오잔호텔로 오세요>는 호텔 라운지 접객직원들과 파티시에들의 이야기다.


원제는 SAIKO NO AFTERNOON TEA NO TSUKURIKATA. 구글 수사로 확인했으니 망정이지, 얼핏 '사이코'(サイコ)로 오독할 뻔 했다(**;;). 일본어 뜻을 찾아보니, 最高(さいこう)のアフタヌーンティーの作り方 (つくりかた) = '최고의 애프터눈티 만드는 법'으로 해석된다. 원제대로, 애프터눈티를 소재로 하기에, 애프터눈티를 구성하는 음식과 차에 관한 정보(종류, 식재료, 역사 등)도 무척 풍성하고 정성스럽다.


<오후 3시, 오잔호텔로 오세요>는 시각, 후각, 미각을 매료하는 '애프터눈티'를 테이블 중앙에 두고, 그 곁을 둘러싼 모든 세대의 현실문제를 꽤 자연스럽고 세련되게 토핑한 일본소설이다. 달콤 고소한 향을 품은 갖자기 명칭에 눈이 뱅글뱅글 돌면서 마냥 황홀한 벚꽃비 같다고 생각했던 이야기가, 절반쯤 이르자 소나기가 되어 가슴을 서늘하게 적셨다. 잠시 현실의 눅눅한 냄새를 맡으며 씁쓸한 혀맛을 다셨지만, 그래도 결국 소설은 계절을 한바퀴 돌아 따스한 봄햇살 아래로 독자를 이끈다.


"과자는 상이란다" 할아버지의 말씀을 기억하며, 오잔호텔의 애프터눈티를 찾아 홀로 즐기는 손님들에게 진심을 다해 서비스하는 스즈네. 해외유학 경험이 전혀 없어도 실력이 출중한 셰프 파티시에 다쓰야. 고즈넉한 자연풍광이 일품인 오잔호텔의 창가와 그들이 섬세한 손길로 만들어내고 서빙하는 애프터눈티는 편견과 무시에 시달리는 누군가에겐 호사스럽기 그지없는 '마인드풀니스'가 된다.


하지만 "비일상을 연출하는 판타지(246p)"인 애프터눈티 뒤에는 영락없이 현시대의 현실이 있다. 다쓰야는 정상이 아니라고 치부받는 '알파벳 난독증'으로 인한 상처를 갖고 있고, 스즈네가 의지했던 중국인 동료 우스이린은 정규직과 외국인 비정규직 사이의 괴리와 차별 속에서 살아왔다. 가오리는 경력, 자격 모두 완벽한지만 그저 외롭고 피폐한 고령출산자가 되어버렸으며, 여권신장의 시대흐름에 반감이 큰 전형적인 가부장제 남성이었던 원로 파티시에 히데오는 가족에게 버림받았다. 20대의 후배 루리는 '여유와 선택지가 없는 대신 언제나 최단으로 가야한다'며 열심히 파티에 출석한다. 스즈네는 자신이 애프터눈티를 향한 열의만 갖고 주변의 상황과 의도를 간파하지 못한 것 같아 자신감을 잃어간다. 스즈네를 비롯한 이들은 결국 어떤 메뉴를 고를까?


각자가 필요로 하는 재료는 모두 다를 것이다. 마찬가지로 똑같은 재료라도 그것을 어떻게 조합하고 빚어내고 실험하느냐에 따라 다른 맛과 식감, 향이 만들어질 것이다. "솔직히 평소에 선뜻 낼 만한 가격은 아닌 사치스러운 간식이지만 그러기에 열심히 애쓴 자신에게 주는 최고의 상이기도 한(15p)" 각자의 애프터눈티를 찾아 스푼을 드는 사람들. 각자의 욕망을 만족시키기 위해 성실히 내 갈길을 가는 이를 누가 조롱할 수 있는가. 그 길에는 거친 돌과 다정한 꽃이 동시에 있다.



현실이라는 건 언제든 냉엄한 법이지.

그걸 안 상태에서

아름다운 면을 보는 것도

하나의 각오란다.

<오후 3시, 오잔호텔로 오세요> 208p



주요 등장인물의 시선에서 각자 교차하며 서술하는 방식은 여느 소설에서도 늘 흥미롭고 재밌게 읽고 있는데, <오후 3시, 오잔호텔로 오세요> 경우는 상황이 설명적이면서 동일하게 반복(중복)되는 대목들이 더러 보여서 아쉬운 점은 있었다. 하지만, 짚어야할 것들을 꼼꼼하게 짚어내어 후련하고, 비록 너무 이상적인지도 모를 결말로 마무리졌다할지라도 그 가능성을 엿보는 해피엔딩은 지금 어느 상황에 서 있는 누구에게든 위로와 감동을 전하리라 예상된다. 그게 소설의 역할이지 뭔가. 작가의 고급진 이야기솜씨에 기분좋게 턱을 열고 바라보다가 혀끝이 간질거린다. 당장 나의 '애프터눈티'를 찾아 나서고 싶어진다.


인생은 고생스러운 법이란다.

그러기에 더더욱

단것이 필요하지.

<오후 3시, 오잔호텔로 오세요> 212p



[이런 분들에게 추천]


이렇게 살아도 될까,

이게 맞는 걸까,

조금은 지치고 자신감이 떨어지신 분


혼밥, 혼술, 혼극, 혼행의

참맛을 느끼며 당당해지고 싶은 분


팍팍한 현실에서도

작은 희열과 보람을 깨닫고 싶은 분




*본 포스트는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솔직하게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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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대로 안 돼요 - 엄마 아빠 1학년 때 이금이 저학년동화
이금이 지음, 서지현 그림 / 밤티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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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표지에서 '내 마음대로 안돼요'라는 제목보다 '엄마 아빠가 1학년때'라는 자그마한 문구가 내 눈길을 더 끈다. <내 마음대로 안돼요>(이금이 글 서지현 그림)는 <선생님은 나만 미워해>(이금이 글 서지현 그림) 주인공 은채 부모의 오정아(엄마)와 강민호(아빠)의 초등학교 시절 이야기 네 편이 담겨 있다. 초등(국민)학교 동창이었던 정아와 민호가 훗날 부부가 된 것! ('아이러브스쿨'이 맺어주었나~*0*)


★ 친구가 아파요

-혜미가 복통으로 괴로워하자, 119구급대원이 꿈인 민호는 위급한 상황이라고 판단해 119에 신고한다. 선생님들께 먼저 알리지 않았던 것에 대해선 혼났지만 그래도 친구를 위한 훌륭한 행동을 했다고 칭찬받는다.

★ 내 마음대로 안 돼요

- 정아는 학교 앞에서 파는 햄스터를 사면 안된다는 걸 알고 있지만, 도저히 그 앞을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 선생님이랑 결혼할래

- 선생님을 좋아하는 민호는 엄마의 새 가방을 몰래 꺼내와 스승의 날에 선생님께 선물한다.

★ 미리 쓰는 일기

- 방학일기가 밀린 정아는 과거에 할머니 댁에 가서 즐거웠던 일들을 회상하며 미리 일기를 쓴다.

한참 어른이 되어버린 나는 새삼 여덟살 시절로 돌아간다1~2학년 시절의 초등학교 생활은 단편적으로 몇가지 장면만 기억이 난다. 내가 입학했던 당시(1987년)만 해도 과밀학급이라(베이비붐 에코세대) 오전/오후반으로 나누어서 등교를 했다. 일렬로 담임선생님 뒤에 바짝 붙어서 골목을 내려갔던 기억이나 20분 거리를 혼자 등하교하며 본 동네풍경이 조각조각 떠오르고, 운동장에서 한 남자애가 벤치와 벤치 사이를 건너뛰며 노는 걸 따라했던 일(그때 생애 처음 '두근'거림을 느꼈던 것 같다!), 자꾸 학교까지 태워주겠다고 나를 따라오며 탑승을 권유하던 택시기사 아저씨와 어떤 여자승객도(당시에는 어린이유괴사건도 많았음) 생각난다. 책 속에서 정아가 학교 앞에서 햄스터를 사고 말았던 것처럼, 학교 앞에서 산 병아리가 어느날 죽어 딱딱해져있어 소름끼쳤던 일, 어떤 병아리는 거의 닭까지 자랄만큼 옥상에서 키웠던 일(동화책을 보니 우리 아버지가 병아리에게 항생제를 먹였던 건가?!! 그 닭을 어떻게 했는지는 노코멘트)..


아이에게 이렇게 저렇게 질문하며 유익하게 읽어줘야지 했던 마음은 온데간데 없고, 나의 어린시절 풍경만 거듭 떠올리고 있다. 이 책은 그저 이 재미만으로도 각별해졌다. 안하려고 하는데 해버리고, 하려고 했는데 못하고. '내 마음대로 안 되는 건', 어릴 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구나 깨달으면서.

내 마음대로 안 돼요.

안 사려고 했는데, 그랬는데,

내 마음대로 안 돼요

*도서를 지원받아 읽고, 솔직하게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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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은 나만 미워해 - 나는 나는 1학년 이금이 저학년동화
이금이 지음, 서지현 그림 / 밤티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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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4/14) 유치원 등원길에 아이가 여기서부터는(정문까지 50m는 족히 남긴 거리) 자기 혼자 가겠다고 나를 막아섰다. 단지 안이라도 도중에 잠깐 차도도 있고 혼자 보내는 게 영 내키지 않아서 슬금슬금 따라갔더니, 울며 화까지 내기에 별 수 없이 그쯤에서 배웅을 했다(유치원 창밖에서 몰래 들여다보니, 혼자 왔다고 자랑을 했는지 인솔선생님이 폭풍칭찬 중). 나는 새로운 시즌이 열렸음을 깨닫았다. '초등학생 형님될 시간이 성큼 왔구나..'


마침 '믿고읽는 아동문학가' 이금이 작가님의 1학년 대상 칭작동화책 <선생님은 나만 미워해> 개정판이 출간되었다. 학교나 학원에서 기대치만큼 관심과 도움을 받지 못한다고 느낄 때, '선생님은 나만 미워해' 이런 생각을 한번쯤은 해본 아이들이 많을 것이다. 설령 사실인지 확신이 없더라도, 서운하고 부끄럽고 작아지는 이상한 자신의 감정을 감싸안고자 뱉는 괜한 말일지도 모르겠다. 이러저러한 아이의 마음을 콕 집어 읽어주는 제목이 아닐 수 없다.


<선생님은 나만 미워해>는 초등학교 1학년이 된 은채가 학교선생님과 친구들 관계에서 오해를 풀며 한뼘 성장해 가는 네 편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 선생님은 나만 미워해

- 은채는 오해했던 선생님이 은채를 의젓하게 여기고 참 좋아한다는 속마음을 듣게 된 후 무척 기쁘다.

★ 주운 사람이 임자

- 친구를 위한 마음으로 은채는 자기가 돈을 가져간 범인이라고 거짓자백을 했다가 다행히 일이 해결된다.

★ 새 친구가 생겼어

- 질투심 때문에 전학생 유주의 흉을 보며 심술을 부렸지만, 속상했을 유주에게 미안해진다.

★ 빨리 학교에 가고 싶어

- 나쁜 아이라고 생각했던 민찬이의 어려운 사정을 알게 된 은채는 민찬이의 몫까지 조별준비물을 챙긴다.


'유치원 선생님이었다면 은채 말을 들어주었을텐데요(11p)' 이 문장에서 그만 웃음이 나왔다. 학교는 유치원과 다른데 어쩐다. 일곱살과 여덟살은 고작 한 살 차이인데, 초등학교에 갔다고 갑자기 훌쩍 의젓한 사람이 되어야하는 분위기 속에서 당혹스러울 아이들의 마음이 십분 이해된다. 신나고 설렌 기분과 마찬가지로 긴장되고 불편한 학교생활에 적응해가는 아이들이 조금 애잔하면서도 기특하다. 


은채는 거짓말도 하고, 시샘도 하고, 친구 흉을 보기도 하지만, 결국은 타인의 입장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으로 조금씩 성장해 간다. 헌데, '주운 사람이 임자'편에서 친구를 위해 거짓자백을 했던 은채의 상황은 솔직히 아찔했다. 만약 그 타이밍에 맞춰 돈을 주웠던 한서가 사실대로 고백하지 않았다면 그 뒷수습은 어찌했을 것인가! 어린이독자들끼리 은채의 행동에 대해 토론해볼 생각거리로 좋은 대목같다. 


일곱살 내 아이에게 이 책을 읽어줬던 날은, 마침 아이가 체육시간에 장난을 치다가 벌칙을 받고 한바탕 울어재낀 일이 있었다던 날이었다. '선생님은 나만 미워해' 편에서 은채가 선생님에 대한 불평을 계속하는 대목을 읽어주던 중, 아이가 끼어들며 말했다. "미워하는 게 아닌데~~~~"


한걸음 떨어져서 바라보면 그렇게 보이지? 매사를 유연하게 생각할 수 있는 힘을 길러주고 싶다. 그럼 어떤 실망과 좌절을 겪더라도 금새 이렇게 외칠 수 있는 '진정한 초등학생 형아'가 될 수 있을 테니까.


"빨리 학교에 가고 싶어!"

-<선생님은 나만 미워해> 60p-


이금이 작가님은 개정판을 낼 때, 변화한 시대상이나 인식에 맞게 작품의 문장을 전면수정하시는 걸로 알고 있다. 이 동화책에서는 학부모상담을 위해 엄마가 아닌 아빠가 회사를 조퇴하고 참석한 대목이나, 식사시간에 아빠가 요리를 하는 삽화 등 아이들에게 자연스럽게 양성평등(및 부모의 공동양육책임)을 익힐 수 있게 반영된 점이 참 좋았다. 나는 동화책의 이런 역할이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도서를 지원받아 읽고, 솔직하게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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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인의 땅에서, 우리 이금이 청소년문학
이금이 지음 / 밤티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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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늘 저 위에 고비보다 더 넓은 땅 있어요.

그곳에 양 치는 거인 사는데 밤마다, 밤마다 불 피워요.

불똥이 튀어서 거인 옷에 구멍이 아주 많이 났는데

그 구멍으로 불 보여요. 그게 저 별들이에요.

<거인의 땅에서, 우리> 78p


동서남북으로 보이는 건 지평선 뿐인 넓은 고비사막조차, 거인이 입고 있는 옷 하나로 다 덮히는 세상이란다. 대한민국 속 작은 도시, 사방이 막힌 비좁은 방 한칸에 짱박혀 있는 나는 거인의 손톱 사이에 낀 모래 부스러기의 100만분의 1보다도 작겠군. 이런 곳에서도 나는 '우리'를 떠올릴 수 있을까.


<거인의 땅에서, 우리>(2022)는 이금이 작가님의 2012년작 <신기루>(푸른책들 출판사)의 개정판 장편소설이다. '신기루'의 본질은 '허상'인데, 그 자리를 '거인의 땅'과 '우리'라는 단어가 대체했다. 바꾼 제목이 흡족하다는 작가님의 소감대로, 독자 입장에서도 '신기루'라는 얼핏 울적한 단어가 이 책 전체의 대문이었다면 좀 아쉬웠을 것 같다. 그보다는 더 선명하고, 지속가능하며, 훨씬 희망적이니까.


이 소설은 크게 두 이야기로 나뉜다. 40대 중반 아줌마들 틈에 끼어 몽골여행을 떠난 열다섯살 다인이 이야기. 그리고 자궁암 진단을 받은 후 딸을 데리고 고교시설 문학동아리 친구들과 몽골여행 중인 다인의 엄마 숙희의 이야기.


다인은 지루할 줄 알았던 오지 여행이 잘생긴 지노오빠를 빼닮은 몽골인 가이드 바타르 덕분에 하루하루 1분1초가 귀하다. 심장이 벌렁대고 현기증을 느끼거나, 고독의 똥폼을 잡으며 귀여운 나르시시즘에 빠져있는 사춘기 소녀의 독백을 보며 나는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심지어 바타르 때문에 들뜨고 흥분한 나보다, 쓸쓸함 그 자체인 듯 노을 진 언덕에 홀로 앉아 있는 내가 더 마음에 들었다. 뭔가 한층 고결해진 느낌이라고나 할까. (103p)"] 수많았던 나의 바타르들을 추억하며 다인을 깊이 공감하고 다독여주고 싶었던 것 외에도, 아이의 현실고발이 뜨끔하다. [아줌마들은 내 존재를 까맣게 잊고 있다가 어느 순간 문득 떠올리는 것 같았다. 그러면 자신이 어른이라는 사실도 함께 깨닫고는 체통을 되찾겠다는 듯이 갑자기 근엄해졌다. 만난지 24시간도 지나지 않아 유치한 모습을 바닥까지 다 들켰다는 걸 모르는 모양이다.(70p)]


다인의 이야기와 균등한 부피로 담긴 숙희의 이야기를 읽으며, 과연 이 소설의 장르를 '청소년문학'으로만 분류해도 괜찮을 것인가 손을 들고 질문하고 싶어졌다(근데 어디에??). 이건 내 이야기, 우리 이야기, 엄마들의 이야기잖아. 와락 전환되는 성인의 화법과 심리묘사에 가슴이 콕콕 찔리고, 울컥 코 끝이 찡하다. 고작 6일의 시간 안에서 이들 각자가 살아온 시간들이 와르륵 펼쳐져서 보여지고 만다. "언제 이래 나이를 먹었노.(128p)" 친구의 말에, 눈은 울고 있는데 입은 웃고 있는 일곱명의 여성들 얼굴에 '할많하않' 말풍선이 가슴으로 느껴진다.


사실 숙희는 "내는 저 초원 위를 말 타고 달릴 거 생각만 해도 막 가슴이 뛴다.(71p)"는 설렘으로 여행을 시작했더라도, 여행 내내 마음의 멀미를 겪고 있었다. 내쳐버린 문학 대신 숙희가 이제까지 붙들고 있던 것들의 '허상'에 대해, 현실을 잊으러 떠난 여행의 가장 끄트머리에서, 현실을 처절하게 깨닫고 만다. 하지만 이제 숙희의 마음은 어디로 향할까. 6일전보다는 조금 혹은 훨씬 더 자유로워지진 않을까. 딸 세대가 엄마세대의 생각과 마음을 훔쳐볼 수 있는 취지여도 무척 좋은 책이지만40-50대 엄마들에게야말로 우리를 위해 읽자고 권하고 싶은 책이다.



"만약에 그때까지 신기루를 한 번도 못봤으면 어떻게 불안하고 무서운 걸 이겨 냈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거야." …(중략)…"그리고 엄마, 그런 일이 아니더라도 사막에 신기루가 없으면 너무 지루하고 심심할 거 같지 않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막에서는 우물만큼 신기루도 필요한 거였다.

<거인의 땅에서, 우리> 235~236p


다인은 신기루 덕분에 여행이 좋았다고 했다. 숙희에게는 '모든 날이 좋았다'지만 딸 다인과 내내 함께했던 여행이었기에 더 좋았다. 아줌마들은 다인과 만난지 24시간 만에 온갖 유치한 모습을 들켰다. 숙희는 딸 앞에 민망하고 조마할 때도 있었다. "그런데 아줌마도 여자애였잖아.(208p)다인의 말이 맞다. 엄마도 감정이 있는 사람이다. 수천개의 기억을 가진 사람이다. 그러니 얘들아, 좀 봐줘라. (그리고 엄마, 나도 미안해요)


나 역시 그 어떤 다채로운 도시여행보다 황량했던 울룰루 캠프여행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그때 난 죽어도 저 백인여자처럼 멀리서도 까벗은 엉덩이가 다 보이게 빈약한 부쉬 뒤에서 오줌을 눌 수 없다며 내 방광에게 기도했다. 동행자가 없는 혼자였어서 더 그랬을 것이다. 지금의 나라면 어떨까. 이제는 '깔깔거리며 멀어져간 세 아줌마처럼(57p)' 가장 예쁜 양산을 골라 같이 폴랑폴랑 걸어갈지도 모르겠다. 친구야, 같이 가자! 같이 늙어가는 '우리'가 있어 좋다. 여자애였던 게 분명한 중년의 유치한 친구들과 정말 어디로든 가고 싶어진다. 여자애에서 아주 미세하고 미세하게 각자 거인이 되어가는 중인 우리라면, 여행의 끝은 뭐가되었든 분명 성공일 것 같다.


내 그림자가 대지 위에 길게 드리워졌다. 멀리멀리 뻗어 지평선에 닿을 듯한 그림자를 보자 나도 거인족이 된 것 같았다. 나는 발은 땅을 디디고 머리는 하늘에 닿은 거인이 돼 엄마와 아줌마들과 바타르가 잠들어 있는 게르를, 끝없이 펼쳐진 초원을 굽어보았다. 몸만 늘어난 게 아니라 왠지 마음도 함께 커진 것 같았다.

<거인의 땅에서, 우리> 83p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지원받고 솔직하게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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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매일 블로그로 출근한다
한혜진 지음 / 경이로움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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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신기한 일이었다. 빳빳한 새 책을 중간 정도에 엄지를 끼워 탁 펼쳤는데...어엇, 이 상담사례 내 사연 같은데! 마침 그날 나는 어떤 과감한 도전에 실패한 결과를 확인하고 조금 시무룩해 있던 차였다. 턱없이 부족했으므로 예상했던 바였기도 했지만 아쉬운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런데, 마치 <나는 매일 블로그로 출근한다> 책에서 손 하나가 쑤욱 나와 내 등을 토닥여주고 있는 게 아닌가? 이 타이밍 소름.


"………선택은 오직 당신의 몫이다.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이고, 버릴 건 버리면서 자신의 뚝심을 다듬어보길 바란다. 어떤 선택을 하든 당신을 응원한다. (201p)"


불특정 독자를 향한 '당신'이라는 워드가 나를 콕 찝어 쏘아보낸 텔레파시처럼 느껴졌다. 울컥. 크헉. ㅠ 0 ㅠ 나는 즉각 마음을 고쳐잡았다. '그래, 이깟 실패 한 번이 뭔 대수야. 무엇이 애매하고 무엇이 부족한지 알고 있잖아. 다시 내 뚝심을 복원하고 계속 다시 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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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블로그에 글을 2007년에 처음 끄적여봤으니 주변 이들에 비해 개설한 지는 꽤 된 편이다. 남들은 해독하기 통 어려운 함축적인 허세문장이 그득한 일기장으로나 뜨문 뜨문 써왔더랬다. 당시 싸이월드 미니홈피를 애용하다가 슬며시 이사를 온 셈이었는데, 그 이유는 블로그의 시원스런 포맷 때문이었다. 써봐야 내 글을 읽어주는 사람은 먼저 블로그를 하고 있던 오프라인 지인 두세명에 불과했는데도 내 답답한 마음을 좀 더 넓은 바닥에다 줄줄줄줄 시부렁거릴 수 있는 것만으로도 너무나 좋았다. 이 좋은 걸, 아니 이 좋은 걸, 왜 아직도 안해요?? 하고 다짜고짜 지인들의 멱살을 잡아 흔들고 싶은 마음일 때도 있었다.


<나는 매일 블로그로 출근한다>는, 저렇게 추천하고 싶은 마음만 어설프게 가득한 나와 다르게, 왜 블로그를 해야 하는지, 어떻게 블로그를 꾸려가야하는 지 최상급의 설득력을 갖고 알려주는 책이다. 일단 블로그와 관련한 작가님의 살아있는 경험과 파생된 이력이 그 근거다. 거기에 객관적인 데이터, 틈만 나면 나오는 참고문헌들, 한 눈에 이해가 팍 되게 돕는 도식화된 설명들!! 이렇게 처음부터 끝까지 내실이 꽈악 찬 실용서가 고작 14,400원(온라인판매가, 정가16,000원)이라는 게 너무하게 느껴질 정도다.


물론 이미 시중에 나와있는 블로그 관련 책들은 더 있다. 블로그를 하려는 목적에 따라 어떤 책들은 독자의 니즈를 충족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매일 블로그로 출근한다>는 가이드의 출발점과 본질이 좀 다르다. 블로그가 수익화 모델이 될 수가 있겠지만, 그것을 위해 블로그를 시작하라는 것이 절대 아니다. 바로 '자신의 삶을 가꾸기 위함'임을 강조한다. 그래서 나는 만약 누군가가 글을 써보고 싶어한다거나, 아니 그전에, 배회하듯 살아가는 자신의 삶에 지쳐있는 이가 도움을 원한다면 이 책을 꼭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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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한혜진 작가님에게 개인적으로 퍼스널 브랜딩 1:1 코칭 수업을 받은 바 있다. 퍼스널 브랜딩을 '마케팅하는 기법 정도'로만 알고 접근했었던 무지한 나는, 퍼스널이 퍼스널로 끝나는 게 아닌 잠재력을 뒤늦게 배워가고 있다. 내 안에 이미 자리잡고 있던 씨앗이 무엇인지를 알고 나자, 비록 아직 굉장한 떡상 히스토리의 주인공은 아니지만, 물방울이 똑똑 떨어지듯 꾸준히 한명 한명 이웃수가 늘더니 13년 걸려 맺어진 이웃수가 지난 1년새 두배가 늘어있었다. 나를 기록하는 곳으로, 콘텐츠 베이스캠프로 유용하게 블로그를 가꾸다가 이제는 쓸모있길 바라는 정보들을 생산하는 재미까지 더해졌다. 느리더라도 소처럼 찰진 속근육을 키우며 살아가는 중이다. 한혜진 작가님을 블로그로, 책으로, 강의로 꾸준히 만나온 덕이다.


블로그를 본격적으로 해보고 싶은 분이라면 무조건 구매각. 설령 나처럼 블로그를 이미 하고 있는 중이라도 이 책을 만나게 된다면 당신의 마음은 분명 다시 두근두근 기쁘게 벌렁거릴 것이다.


보석이 가득한 당신의 인생

혼자만 알지 말고 블로그에 써라

<나는 매일 블로그로 출근한다> 29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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