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많은 사람 중 누구 하나도 손을 뻗어 도와주지 않는다는 게, 그리고 이 상황을 외면하면서도 지금 벌어지는 일들을 모두 듣고 보고 있다는 게 소름이 끼칠 정도로 끔찍하기만 했다.
오싹할 정도로 차갑지만 동시에 불처럼 뜨거운 그의 시선에, 알아 버렸다. 그가 이미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불행히도 자신 역시 그 답을 알고 있다는 것을.
그건 단지 애정 결핍이었다. 아니, 그래야만 했다. 너무나 쉽게 그에게 안기는 데에 익숙해진 것도, 그의 품이 아주 싫지만은 않은 것도, 단순한 애정 결핍일 뿐, 다른 이유는 없다. 그냥 그뿐이다.
그는 믿지 않고 자신은 거짓말을 하면 모든 게 해결된다. 가해자도 피해자도 없다. 그쪽이 자신은 마음 편하다. 이제 자신이 왜 도망치고 싶어 했는지, 기억한다. 뭐가 그렇게 무서웠는지 무엇으로부터 그렇게 도망치고 싶어 했는지, 모두 알고 있다. 그러니 남은 건 이번엔 제대로 도망치는 것뿐이다. 이번엔 확실하게, 실수 없이, 깨끗하게 사라져야 한다. 되돌릴 수 없다면 지워야 하니까.
하지만 어떻게 해도 한 번 있었던 일은 없었던 일이 될 수 없다. 그리고 자신 역시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그러니까…… 과거를 되돌릴 수도, 지울 수도 없다면 그 과거를 끌어안은 채 사라질 수밖에 없다. 그것들이 튀어 나가기 전에, 다른 이들이 그걸 알아채기 전에 그것들을 영원히 소멸시켜야 한다.
자신의 앞에 놓인 가장 근원적인 문제가 뭔지는 이미 알고 있다. 그리고 직시도 하고 있다. 하지만 그걸 받아들이거나 극복하는 건 불가능하다. 그러니까, 그게 문제였다.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그와 자신 중 하나가 죽었다 다시 태어나거나 지금의 관계를 완전히 끊어 내야 한다. 하지만 전자도 후자도 불가능하다. 그러니까 이건 어떻게 해도 해결될 수 없는 문제다.
나긋한 목소리와 조용조용한 말투. 하지만 그 안에서 뿜어져 나오는 건 분명한 살의와 증오였다. 지금 그는, 그에게 지난 석 달간의 시간이 어떠했는지를 토로하며, 고통과 회한을 담아 분노하고 있었다.
"그렇게 인정할 수 없다면 부정하고 도망쳐. 얼마든지 따라가 줄 테니까. 하지만 너도 언젠가는 인정하게 될 거야. 그건, 부정한다고 사라지는 게 아니니까. 부정하면 할수록 더 선명하고 깊어지고 도망치면 칠수록 집요하게 발목에 휘감겨 오지. 너도, 나처럼 도망칠 수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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