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새벽, 자연히 눈이 떠진 순간 가장 먼저 생각난 건 ‘아, 그 사람 있다’라는 거였다.
등 뒤에서 끌어안긴 채라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전신을 감싼 체온과 건조하고 따뜻한 공기 속에서 느껴지는 익숙한 냄새에 그가 옆에 있다는 사실을 알아챌 수 있었다.

항상 생각하지만, 사람의 육감이란 예리하다. 뭔가 꺼림칙하다 느껴질 때는 반드시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거다.

이곳으로 도망친다고 그와 자신의 관계가 사라지는 것도, 그 외의 복잡한 문제들이 해결되는 것도 아니지만 그의 말대로 그가 진짜 모든 걸 내려놓을 수 있다면, 그래서 아주 조금이라도 이 기만의 시간을 연장할 수 있다면…….

상냥하고 다정한 음성과 함께 눈꺼풀 위로 닿아 오는 그의 입술에 완전히 마음이 놓였다.
다시 악몽을 꾸더라도 이 사람이 있으면 괜찮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마지막 말에 온갖 복잡한 감정이 들끓어 올랐다. 아직도 그 녀석은 과거에 매달려 살고 있었다. 자신이 의도적으로 잊으려 했던 과거가 지금까지 그 녀석의 발목을 잡아끌고 있었던 거다.

회피이자 비겁한 전가다.
결국 모든 건 자신이 선택한 거다. 결심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건 핑계일 뿐 이미 자신은 그를 선택했다.

하지만 그걸 인정한 뒤 따라올 책임과 자신이 지고 가야 할 죄악감이 무서워 모든 걸 그의 탓으로 돌린 채 지금의 행복한 일상이 깨질까 무서워 바로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들에서 시선을 돌리곤 그저 괜찮을 거라고 스스로를 설득하며 현실을 무시했다.

모든 일이 벌어지기 전으로 되돌아가 다시 시작하기 위해서, 그리고 그에게 흔들리는 자신을 완벽하게 지워 버리기 위해서.

자신의 애매한 태도에 그 남자 역시 계속해서 상처받고 있었고, 재원이 역시 그 자리에서 더 나아가지 못한 채 같은 곳을 맴돌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의 냉랭한 태도와는 달리 뭔가 이상하다는 사실을 눈치챈 이후이기에, 자신이 변명이라도 해 주길 기대했던 건지도 모른다. 어쩌면 모른 척 지나간 것 역시 자신에 대한 원망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왜 이제야 찾아온 거냐는…….
원래 그런 녀석이니까.

순간 심장이 내려앉았다. 그를 닮아 푸른빛을 띨 정도로 검고 깊은 눈동자가 당장 눈물을 흘릴 듯 일렁거리는 모습에 아연해졌다.

아주 오래된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하지만 다시는 그때로 돌아갈 수 없다는 걸 알기에 더 아픈 그 단어에 말없이 그 녀석을 바라보고 있자 재원이의 손이 강하게 손목에 휘감겨 온다.

이어지는 꿈같은 이야기에 수려한 녀석의 얼굴을 안타까운 듯 바라봤다. 그와 너무나 닮은 얼굴로 그 남자처럼 말도 안 되는 꿈을 꾸는 재원이가 너무 안타깝고 가여워서 슬퍼졌다.

뭐라고 정의할 수 없는 복잡하고 낯선 기분에 멍하니 땅을 바라보며 걸음을 서둘렀다.
이제,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오기 전 걱정했던 것에 비해 이상할 정도로 머릿속은 차분하고 마음은 한없이 고요했다. 또 한 번 그 녀석의 삶을 뒤흔들고 평생 사라지지 않을지도 모를 상처를 주고도 자신은 괜찮았다. 그리고 앞으로도 괜찮을 거다.
그저 조금 공허하고 지친 기분이 들 뿐이었다.

"그렇다고 도망치고 싶다고 생각했던 건 아냐. 오히려 도망치고 싶지 않아서 무시해 버린 거야. 내가 도망쳐도 당신이 잡아 줄 거라는 건 알지만 더는 도망치고 싶지 않아. 이젠 나도 지쳤으니까. 그리고…… 더 이상 당신한테 상처 주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기면 아무 죄책감 없이 그의 곁을 지킬 수 있다는 걸 알기에 그에게 타협안을 제시했고 그 안에서 안락하게 머물렀지만 이제 더는 그럴 수 없다는 걸 알아 버렸다.

이미 자신의 마음이 확실한 형태를 드러낸 이상 더는 그의 등 뒤로 숨어 버리는 짓은 할 수 없다.

어차피 언젠가는 끝날 관계라면 최선을 다해 이 시간을 지키고 싶으니까. 최후의 순간, 그를 제대로 안아 주지 못했다고 후회하고 싶지 않으니까.

잠든 사이에도 자신의 어깨를 안고 있는 그 팔에 그제야 최근 악몽을 꾸고 일어날 때마다 그에게 꼭 안겨 있었던 게 떠올랐다. 옆에서 부스럭거리는 걸 싫어해 그다지 붙어 자는 걸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요 몇 달간은 자신을 끌어안은 채 자고 있었다.

지난 몇 년간 수없이 ‘그날 그곳에서 그를 만나지 않았더라면’이라는 가정을 해 봤지만 그래 봐야 아무 의미 없는 일이다. 이미 지난 과거를 되돌릴 수도 없지만 그날 그곳에서 그를 만나지 않았다 해도 그와 자신은 결국 이렇게 되었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언제 어디서든 어떻게든 만나 지금 이 자리에 있었을 것 같다는…… 그냥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주 드물게도 풀네임을 부르는 부드러운 그의 음성에 그를 돌아본 순간 가볍게 입술이 겹쳐졌다.
다정한 인사 같은, 상냥한 입맞춤에 손을 뻗어 그의 목을 끌어안아 주었다.
이미 10년 전의 일임에도 그를 처음 만났던 날의 기억이 선명히 떠오르는 건 그 풍경 속에 선 남자가 너무나 아름다운 탓이었다.

가슴을 치는 통증도 죄악감도 여전하지만 이젠 그 역시도 자신의 지병으로 안고 가야 한다.
운명이라는 거창한 단어로 포장할 생각은 없다.
그저 지금 눈 부신 태양 아래에 선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다운 남자를 안아 주고 싶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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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BL] 레퀴엠 : 메모리얼(Memorial) 1 [BL] 레퀴엠(Requiem)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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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간 일상의 소요 속에 묻힌 채 살아가며 이젠 저 담 밖과 안의 경계가 명확해졌고 그 선을 긋는 데에도 어느 정도 요령이 생겼다. 아니, 단지 기만에 익숙해진 건지도 모른다.

단둘이 살다 보니 동화되어 가는 것과는 별개로 그와 자신이 근원적인 부분에서 많이 닮았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었다.

하루하루가 전쟁 같았던, 그래서 늘 신경을 곤두세운 채 버티는 게 피곤해 차라리 혼자인 게 편했던 과거와 달리 너무나 평화로운 지금은 혼자인 걸 외롭다고 느끼고 있다.

무뎌졌다는 건, 그만큼 안정감을 느끼고 있다는 거니까.

너무 무뎌져 아주 사소한 부분에서 이렇게 쓸데없는 기 싸움을 하고 아무렇지 않게 화해하기를 반복하고 있지만 이것도 나쁘지는 않다.

성격을 제외한 모든 걸 갖고 태어나 그 덕에 뭐든 자기 마음대로 하고 편하게만 사는 사람이니 이 사람에게도 불편해도 참아야 하는 한 가지 정도는 있어야 한다.
그래야 세상이 그나마 조금이라도 공평하다고 믿을 수 있으니까.

오늘만은 저 지긋지긋한 비가 그다지 불쾌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비가 좋아진 건 아니지만 그와 함께할 때의 비는 나쁘지 않은 것 같았다.
물론, 아주 가끔뿐이지만.

대부분은 너한테 관심 없어.
분명 그의 말대로, 자신은 타인에게는 수많은 사람 중 하나일 뿐이고 대부분의 사람은 스쳐 가는 타인에게는 관심이 없다. 그건 잘 알고 있지만 과연 그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남자에게도 관심이 없을까, 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회의적이었다.

어차피 그와 자신의 관계에 끝이 온다는 건 이미 정해져 있는 일이었고 그 끝이 절대 좋을 수 없다는 것 역시 너무 명확한 진실이기에, 지금은 그에 대해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단지 현실 도피일 뿐이라도 그게 자신이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최고의 선택이었다

그간 치열하게 자신의 감정을 부정하며 싸웠지만 어떻게 해도 결론이 나지 않는 그 길고 지리멸렬한 전쟁 끝에 자신은 너무나 지친 채였다.
더는 생각을 하는 것도, 뭔가를 시도하는 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저 이젠 편해지고 싶을 뿐이었다.

이제 자신이 진짜 지우고 싶었던 게 뭔지 알고 있다.
그렇기에 더는 도망칠 수 없다는 것 역시 너무 잘 알고 있다.
그간 평화로운 일상에 익숙해져 잠시 기억의 저편에 묻어 둔 진실들이 흘러나오며 결정의 시간이 왔음을 알리고 있었다.
그때처럼 도망쳐 버릴지 스스로 선택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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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BL] 레퀴엠 : 패럴랙스(Parallax) 2 [BL] 레퀴엠(Requiem)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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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까지 자신이 이 상황을 버틸 수 있을지, 그리고 언제까지 사람들을 속이고 아무렇지 않게 살아갈 수 있을지 자신할 수 없었고, 언젠가 최악의 상황에 치달았을 때 닥쳐올 일이 두려웠다.

그 모든 것들을 아무렇지 않게 무시할 수 있을 정도로 자신은 대담하지도 않고, 그렇게 절실히 그를 원하지도 않는다.

자신의 세계는 그만으로는 완성될 수 없다. 그게 그와 자신의 가장 큰 차이였고, 그렇기에 늘 그에게 죄책감을 느껴야 했다.

분명 그에게 끌리고 흔들리면서도 그 죄악감을 견디지 못해 혼란스러워하고 그를 위해 모든 것을 버릴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더 이상 그에게 상처 주고 싶지 않다는 이율배반적인 감정이 정신없이 머릿속을 들쑤시고 있었다.

지금도 이전에는 생각지도 못한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다. 그와 이렇게 단둘이 평화롭게 지낸다는 건 열여덟의 자신은 상상도 못 했던 일이었다. 그래서 받아들이기 힘들고 믿을 수 없었지만, 결국 여기까지 왔다. 그리고 지금 역시 불과 1년 전만 해도 상상할 수 없던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 독에 닿으면 이성도, 도덕심도, 현실감마저도 마비되어 버린다. 그리고 그가 주는 강렬한 쾌감에 자신이 누구인지도, 그리고 그가 누구인지도 잊은 채 그 열기에 휩쓸려 그에게만 집중하고 매달리게 된다.

이 질 나쁘고 달콤한 독에 이미 취해 버렸기에 끝까지 갈 수밖에 없다.
이 끝이 어디든, 설혹 그 끝에 남은 것이 파멸뿐이라 해도 즐거이 그 최후를 맞이할 생각이었다.
그와 함께, 그가 만들어 놓은 그 성 안에서.

점점 어지럽게 흔들리는 머리와 뜨거워지는 몸, 그리고 강하게 맥박치는 심장의 고동.
마치 취한 듯 어지러운 그 느낌은 이 남자가 가진 독(毒)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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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BL] 레퀴엠 : 패럴랙스(Parallax) 1 [BL] 레퀴엠(Requiem)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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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건 그다지 바람직하지 않다. 삶이 한 사람으로만 가득 차는 건, 좋지 않다. 그걸 알고는 있지만 어쩔 수가 없다.
이 남자 자체가 너무나 강렬하고 기괴해, 도저히 머릿속에서 몰아낼 수가 없다.

그래, 처음부터 그랬던 것 같다. 죽어도 그걸 인정하기 싫어 외면하고 부정했지만 이제는 인정할 수밖에 없다.
이 남자를 처음 본 그 순간부터 끌렸던 거라고.

그리고 조금은 서로를 이해해 가고 있다.
지금은 그거면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이렇게 평온할 수 있기를, 조용히 바랄 뿐이다.

그의 품이 편안하다. 그의 체온도 호흡도 이젠 완전히 익숙해져 편안해진 채였다. 그도 자신도 이제 겨우 이 생활에 익숙해져 안정을 찾아가고 있었다.
그러니까, 아주 조금만 이대로 있고 싶었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영원히…….

아무렇지 않은 척, 아무 일도 없었던 듯, 현실에서 눈을 돌린 채 귀를 막고 눈을 감고 그렇게 평화로운 척 잘 지내 왔다.
누군가 바로 눈앞에 현실을 들이밀기 전까지는.

자신은 그처럼 대담하고 무심해질 수 없고, 단 하나만을 위해 모든 걸 포기할 수 있을 정도의 열정도 없다.
그게 바로 그와 자신의 가장 큰 차이였다. 그리고 동시에 그와 자신 사이의 시차(視差)를 좁힐 수 없게 만드는 가장 근원적인 원인이기도 했다.

적어도 지금, 이 평화로운 세상 속에서만은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의 말대로 마치 이 세상에 그와 자신 단둘만 남은 것처럼 그의 품에 안겨 있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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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참할 정도의 굴욕감과 비참함, 그리고 자존심의 상처에 이번에는 절대 이 녀석에게 흔들리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실수는 두 번이면 된다. 세 번의 실수는 안 된다. 절대로 이 녀석을 믿는 것도, 어떤 희망을 갖는 것도 안 된다.

그러고 보니 처음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그 녀석을 이겨 본 기억이 없다. 겉보기야 어떻든 항상 휘둘리는 건 자신이었고 결정적인 순간에 마음이 약해져 한발 물러서는 것도 자신이었다. 그리고 그건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이곳을 영원히 없애 버릴 생각이었다. 하지만 차마 그러지 못한 건 그 물안개 속에 선 그 녀석을 본 탓이었다.
그 풍경 속에 젖어 든 소년이, 너무나 아름다운 탓이었다.

그 아이에 대해 알면 알수록 점점 더 그 녀석의 기를 꺾어 내리고 싶다는 욕망이 강해져 가고 있었다. 단순한 호기심을 넘어, 이젠 그 욕망 자체에 사로잡혀 버렸다.
그건 단순한 오기였다.
적어도 그 순간에는 그러했다.

이건, 어떻게 보면 전쟁이다. 서로의 자존심과 헤게모니를 건 치열하고 뜨거운 전쟁이다. 그리고 한번 시작한 전쟁에서는 절대 먼저 물러서는 것도, 패배하는 것도 용납할 수 없다.
그래서 온 힘을 다해 그 전쟁에 임했다. 가끔 치열함에 지칠 때도 있었지만 바로 그다음 순간 오는 뜨거움에 도취되어 브레이크를 걸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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