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책] [BL] 개의 난(犬의 難)
유렴 / 필연매니지먼트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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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은 보는 사람이 많았기에 웃는 낯을 유지하며 염표에게 속삭이듯 말하는 천범과 달리 염표는 기분이 나쁘다는 듯 인상을 찌푸린 채로 휙 몸을 돌렸다

어떻게든 염표의 기분을 풀어놓지 않으면 식사 자리에까지 영향을 미칠 게 분명하여 잠시 생각하던 천범은 휴대폰을 꺼내 누군가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팔짱을 낀 채 인상을 팍 찌푸리고 있는 염표를 보며 천범은 속으로 몇 번이고 자신의 성격 더러운 고용주를 욕했다.

고정적인 인연을 만들지 않은 건 한참 된 일이었다. 가장 마지막으로 만난 애인과 헤어진 것은 6년 전이었고 헤어지게 된 계기도 어찌 보면 만족스럽지 않은 성생활 탓이었다. 물론 천범이 그 일을 모를 리가 없었다.

염표에게 필요한 건 애정으로 키우는 관계가 아니라 당장 밤잠을 재워줄 수 있는 만족스러운 섹스였다

목염표는 본인이 작품을 보는 눈은 뛰어났으나, 패션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작업복 하나면 된다는 주의라서 그런지 지금 염표의 옷장은 다 그의 보좌관 곽천범의 노력으로 이뤄진 결과물이었다.

벌써 천이백 번째 이런 고용주 아래에서 일해야 하나 고민하던 천범은 매달 들어오는 월급을 떠올리고는 역시 돈이 최고라는 생각을 하며 염표의 뒤를 따라 나갔다.

견오는 부랴부랴 청바지에 다리를 끼워 넣고 버클을 잠그며 문을 열었다. 몸이 땀으로 흥건했고 방 밖에 샤워실은 있는지, 지금 있는 곳이 어딘지도 몰랐지만, 늑장 부릴 여유가 없었다. 남자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정말 제 목숨이 남아나지 않는다는 걸 몸소 경험했던 터라 말로 나가라고 할 때 나가는 게 최선이었다. 그나마 밖에 바로 호텔 복도나 바깥 풍경이 펼쳐지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

몸이 땀으로 흥건했고 방 밖에 샤워실은 있는지, 지금 있는 곳이 어딘지도 몰랐지만, 늑장 부릴 여유가 없었다. 남자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정말 제 목숨이 남아나지 않는다는 걸 몸소 경험했던 터라 말로 나가라고 할 때 나가는 게 최선이었다. 그나마 밖에 바로 호텔 복도나 바깥 풍경이 펼쳐지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손을 떼자 표정 변화는 없었으나 귀 끝이 붉어진 백 비서가 일어나 꾸벅 고개를 숙이고 나갔다.

정말 악당이 자기 손에 피를 안 묻히고 일을 처리하는 것처럼, 재단을 운영하는 핵심 요소는 염표가 다 갖추고 있었다. 그중 하나가 돈이었고 다른 하나가 사람을 보는 눈이었다.

남들이 볼 때는 아닌 것 같아도 뼈대가 되는 건 다 염표가 잡아 왔기에 재단이 설립되고 지금까지 흔들림 없었다. 천범은 그저 짜인 틀이 굴러가도록 독려하는 사람이었다.

염표는 한 번도 견오의 스타일에 신경 쓴 적이 없었고, 염색하든 추리닝을 입고 다니든 좆 간수만 잘하면 뭘 하고 다니든 상관하지 않았다. 돈을 들여서 꾸미는 천범의 목적이 무엇인지 궁금했으나 물어볼 자신은 없었다.

이번에는 또 어디로 끌려가는 걸까. 차에 올라타며 견오는 심각하게 곧 다가올 제 미래를 걱정했다.

염표는 작업실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나무를 매만져도 떠오르는 건 시건방진 개새끼뿐이었다.

견오는 또다시 천범의 일이 끝날 때까지 방치당했다. 어차피 계약 파기면 모든 게 끝난 거 아닐까 싶어 나가려다가 천범의 매서운 시선에 슬그머니 무릎 꿇고 바닥에 앉은 게 두 시간 전이었다.

신체 일부분을 그렇게 파는 게 인권침해이고 누군가는 인간 이하의 생활이라 생각할지 몰라도 몸뚱이를 막 굴리고 아무렇게나 살아온 견오에게 그리 대수롭지 않았다.

충성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었지만, 이보다 더 개 같은 생활을 하고 싶진 않았기에 견오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새로운 개를 들일 생각도, 내쫓은 개를 다시 데려올 생각도 없었다. 염표는 자고 싶었다.

지키라고 한 건 사실이었으나 흑기사가 되라고 한 적도, 염표의 건강을 챙기라는 말을 한 적은 없었다. 견오를 알게 된 이후 염표의 행보는 처음 보는 것들이었지만, 그걸 마주하는 견오도 만만찮은 인물이라는 걸 새삼스럽게 느끼며 천범은 적당히 식은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다만 견오는 제 얼굴을 박고 있는 단단한 가슴팍에서 쉬이 일어날 수 없어 눈을 감은 채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희미한 단내와 나무 냄새가 섞여 났다.

염표는 작업실이 아니라 바로 집을 향했다. 최근 행보를 생각하면 상당히 드문 일이었는데, 주인이 집으로 간다니 얌전히 뒤따르는 게 개의 본분이었다.

그건 정말 31년의 길고도 짧은 인생 동안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는 기이한 일이었다.

수면제 부작용이 커서 제대로 잠들지 못했으나, 장기간 복용할 수 있는 게 아니었기에 휴약기를 가졌다. 마취해서 강제로 재울 수도 없었으니 날카로워진 신경은 옆에서 아무리 달래주려고 해도 방법이 없었다.

원래 하던 일에 재능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물려받은 재산이 있는 것도 아니었기에, 죽지 않을 정도로 벌어먹고 살던 당시의 생활과 지금은 달라도 한참 달랐다

제멋대로에 폭군이나 다름없는 목염표에게 이런 울렁거리는 감정을 느끼고 있다는 자체가 인정하고 싶지 않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계절이 한 번 바뀔 동안 견오도 진지하게 고민을 많이 했고 결국 인정해야 했다.

염표가 자신을 무시하거나 없는 사람 취급 하는 건 상처받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젊고 잘생긴 다른 남자에게 관심을 갖는 건 너무도 싫었다.

염표를 바라보는 애틋한 시선과 목소리는 단순히 스승을 존경하는 제자로 보기엔 어려웠다

"주워주신 보답으로 주인님께 봉사 좀 해드려야죠. 또 버려지긴 싫으니까."

꿈을 꾸지 않았다. 정확히는 꿈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눈을 감으면 그저 어둠만이 있었고 그 어둠 속에서 깰 때까지 가만히 기다렸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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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히 잠든 그의 모습은 어쩐지 비현실적이었다. 도시의 빛이 비밀스런 어둠을 파고들어, 그 안에서 빛의 부각처럼 튀어나온 듯이 보였다. 비밀스런 존재, 손대면 안 되는 금단의 존재. 박영민을 현실의 인간으로 느끼게 해주는 건 그의 이마에 흘러내려 온 몇 올의 머리카락뿐이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별것도 아닌 일, 그저 동료의 잠든 얼굴을 쳐다본 것뿐인데. 그의 머리털을 더듬었을 뿐인데. 나쁜 짓을 저지른 기분이었다. 봐서는 안 되는 걸 훔쳐보고, 손대면 안 되는 것에 손댄 것처럼 느껴졌다. 금기를 어긴 것처럼 심장이 팔딱거렸다.

파란이 쓸고 간 자리. 연우는 오전 내도록 어느 시절의 자기와 마주한 채 시간을 보냈다. 저걸 붙인 날로부터 몇 년밖에 흐르지 않았지만, 사진 속의 자기는 10년 전처럼 앳되어 보인다고 여기면서. 엊그제 마신 술이 아직 덜 깬 건지, 왠지 월요일부터 아무것도 실감나지 않는다고 생각하면서.

물의 겉면을 나타내는 수면이라는 단어처럼, 하늘에도 ‘천면’이라는 단어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연우는 회사 옥상에서 하늘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일 초, 이 초, 삼 초. 서로에게 눈길을 박은 채로 꽤 많은 시간이 성큼성큼 지나갔다. 저 멀리, 시베리아 어디에선가 첩첩히 쌓였던 다음 계절의 공기가 한 줌씩 두 사람을 스치고 지나갔다. 저 먼 은하계에서는 아기별이 태어났고, 또 다른 행성은 내핵마저 식었다.

‘나에게는 좋은 사람이 능력 있는 사람이야. 그런 사람에게는 늘 자기 ‘편’이 있다고. 당신이 모를 뿐이지.’

온화한 잠이었다. 타인의 숨소리에서 느끼는 따스함이, 서리를 막아 주는 반구처럼 감쌌던 날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4년이 흘러 어느 가을이 완전히 산화하던 밤.
두 사람은 거기에 앉아 있었다. 색색의 낙엽들이 땅의 폭죽처럼 부채꼴로 펼쳐져 있던, 그 밤의 출발선에.

어쩐다, 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단 한 사람, 연우에게만은 나쁜 남자가 되고 싶었다.

그는 자신이 지금껏 좋은 사람이었던 적도, 나쁜 사람이었던 적도 없다고 간주했다. 남들이 가끔 그를 친절하다고 오해하는 건 그의 마음의 온도가 늘 평연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왠지 단 한 사람에게만은 그 온도가 지속될 것 같지 않았다.

그 새벽의 키스 이후, 나인스타 앞에서 영민이 저돌적으로 발언을 꺼낸 이후, 두 사람은 한사코 서로를 피하고자 했으면서도 가끔 이랬다. 어떤 섬세한 순간이 그때까지 유지하던 일상을 바꾸었다. 비싼 공기정화기가 내뿜는 청결한 향마저 진득한 케미처럼 작용하던 시간.

얌전한 강연우가 조용하고 초연한 남자 박영민과 친해진 계기. 그 이유 안에는 몇 가지 키워드가 존재했다.
운수, 숨쉬기, 달리기, 그리고 장의사와 무당, 이라는…, 소설 제목 같은 키워드들이다.

공격적이거나 방어적인 가족들, 일이 잘못되면 남의 탓을 하며 다른 사람의 시선 앞에서만 그럴 듯한 인격으로 위장하는 사람들.

‘연우 씨가 그렇게 숨이 찰 정도라면…, 이제 가족을 위해서 무리하는 걸 그만두고 연우 씨 자신을 위해서 뭔가를 해 줘야 하지 않느냐는 겁니다. 상대방이 내 말을 듣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연우 씨가 자기 생각을 가장 어려운 대상에게 이야기하는 게 중요한 거죠.’

그렇게 둘은 그 밤에 함께 달렸고, 밤의 공기를 조용한 열기로 나눠 가졌다. 이후로 인턴 기간을 제외한 지난 4년 6개월 동안, 둘은 그야말로 성격답게 조용하고 꾸준한 동료애를 유지했다.

그렇게 인턴 기간을 제외한 5년 남짓, 두 사람은 둘만의 시간과 물건들을 공유하고 또 공유하며 편안한 관계를 유지했다.

둘은 자신 외의 사람들을 안으로 들이는 데에 많은 시간이 필요한 이들이었고, 서로의 그런 닮은 점들을 충분히 존중했다.

우주는 연우에게 가족들이라는 한계선, 출발선과 결승선이 없는 유일한 장소였다. 어린 시절부터 내내, 연우에게 ‘가족’은 지구 끝까지도 쫓아올 무거운 존재들이었다. 그래서 그는 우주로 나가고 싶었다. 그래서 장의사가 되고 싶었고.

시간은 그때마다 유독 더 무료하면서도 삼삼하게 지나갔다. 저 멀리 어느 곳에서는 또 작은 백색왜성이 산화하고, 어딘가로 흡수되고, 또 그렇게 하얀 구멍에서 쏙 하고 튀어나와 별이 생기고, 그 별에서 미토콘드리아보다 작은 미생물들이 왁다글닥다글 시끄럽게 굴고, 공룡들이 ‘부동산 관광’이라는 작은 깃발을 들고 행성들을 일렬로 도보했다.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시간은 그렇게 많은 것들을 품고 있었다.

연우는 그 안에서 마음껏 게을렀고, ‘지금’을 잔뜩 누렸다. 그는 지금 부릴 수 있는 게으름들이, 우주의 시간에 담긴 지루함이, 한만한 자의 느릿한 페이스가 허무하면서도 참 좋았다. 그렇게 완만한 심장의 박동 속에서 편하게 숨을 쉬며 이따금 별거 아닌 듯이 눈을 마주치는 것마저도 너무 좋았다.

영민과 자연스럽게 시선을 교환할 때마다, 연우는 가끔 생각했다. 내게 이만큼이라도 가까운 존재가 있었는지를. 또 이런 동료를 잃으면 이 관계를 갖기 전보다 얼마나 심각한 상황에 처하게 될 건지를.
연우에게 있어 영민과 단절된다는 건 미래가 아니라 ‘지금’마저 잃는 것이었다.

연우는 자기 가족에게 매우 익숙했다. 그에게 가족들은 혈연이라는 이름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약자를 협박하고 괴롭히는, 그러면서도 희생을 강요하는 사람들, 곧 몰상식의 집단이었다.

사람이 그리웠다는 듯이 선뜻 다가온 고양이. 그리고 언제 들이닥쳐 진상을 부릴지 모르는 혈연 집단들. 사실 이사 문제만 생각하면 어렵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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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BL] 죽은 친구가 흡혈귀가 되어 돌아왔다
나니에 / 더클북컴퍼니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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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주가 진심으로 참회하는 표정을 지었다. 잘생긴 얼굴에 서글픈 표정을 짓자 다른 사람보다 배나 안쓰러워 보였다. 죽었다 살아 돌아왔다는데 모진 말을 하기도 힘들었다. 사는 것도 힘든데, 죽었다 다시 살아나는 건 얼마나 힘이 들까.

희주가 내 등 뒤에 있다. 석 달 전에 죽었다. 죽고 나서 되살아났다. 흡혈귀가 되었다. 내 집에서 함께 살아야 한다. 모든 일이 다 억울하고 기가 막혔다.

나는 왜 내가 희주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을까. 나는 희주를 몰라야 정상이었다. 세상 사람 누구도 자신 있게 ‘그’를, 타인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내 말에 희주가 웃었다. 눈에 애교살이 접히고 뺨에 보조개가 잡혔다. 참으로 시원하면서도 예쁜 웃음이었다. 대체 저 집안은 하나 있는 아들을 어떻게 저렇게 잘생기도록 낳아 놓았을까.

나는 깊게 잠든 희주를 보며 생각했었다. 앞으로도 계속, 영원히, 희주는 이렇게 해가 뜨면 잠들어 버리는 걸까.

같이 사는 게 불편하긴 해도 그가 완전히 죽어 버리는 건 싫었다. 병원에서 부고를 들었을 땐 이상하게도 아무렇지 않았지만 지금은 실감이 들어서인지 몰라도 슬플 것 같았다. 어쨌든 희주는 내 친구였다.

사막에 폭우가 내린다. 혹은, 사막에 폭우가 내리는 꿈을 꾼다. 누군가는 사막에서 익사하고, 누군가는 설원에서 불에 타죽는다. 누군가는 전쟁터에서 사랑으로 죽고, 누군가는 전쟁터에서 증오로 재생한다.

희주는 먼 사막에서 한 단계 진화하여 내게 돌아온 것이다. 나의 친애하는 흡혈귀로. 낮에는 비록 움직이지 못하더라도, 힘과, 예리한 감각과, 사람을 매혹하는 기술과, 정신을 조종하는 능력을 지니고 돌아온 것이다.

괜찮지 않았다. 얼음송곳이 심장으로 들어가 사정없이 온몸을 훑고 다니는 것 같았다. 평소에는 괜찮던 다리까지도 쑤셔 왔다. 식은땀이 뚝뚝 떨어졌다. 나는 손을 땅을 짚고 바닥에 주저앉아 버렸다. 바닥을 짚은 손이 파르르 떨렸다. 나는 얕게 구역질을 했다. 심장이 너무 아팠다. 사고로 시퍼렇게 멍이 든 심장과 폐를 아껴 써야 했는데 그렇지 못했다. 마음 같아서는 이 자리에서 엎드리고 싶었다. 엎드려서 심장에 압박을 가하면 좀 좋아졌다.

하지만 나는 결코 운이 좋다고 느끼지 않았다. 삶이 가늠할 수 없는 지옥이라고만 느꼈다. 그리하여 나는 모든 두려움을, 무서움을, 공포를 느끼지 못했다.

나는 살고 싶지 않다고.
죽고 싶다는 말보다는 훨씬 소극적인 말이었다. 죽고 싶은 마음이 능동적이라면 살고 싶지 않음은, 누군가 나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기를 기다리는 말이었다.

그 목소리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저 먼, 아득한 지하, 우리가 과학 시간에 배운 지식들, 지각, 멘틀, 핵 이런저런 것들로는 설명할 수 없는 발아래의 공간, 그곳에서 흘러든 신성하고도 아름답고, 또한 섬뜩한 목소리.

나도 흡혈귀가 되고 싶었다. 희주를 잡아먹기 위하여. 실은 흡혈귀가 된 희주가 24시간 언제나 외롭지 않게 지켜 주고 싶어서.
아, 그렇구나 나는.
희주를.

입술은 눈으로 보는 것보다 부드럽고,
상상하던 것보다 차갑다.
하지만 그게 그렇게 중요한 일인가?

인간이 인간 아닌 존재와 인연을 맺으면 다 그렇게 되는 법이었다. 나의 선조는 참으로 어리석거나 미친 사람이 분명했다.

누군가 내 심장에 알록달록한 스카프를 두르고 희주에게 그 모습을 보여 주고자 하는 것 같았다. 너를 위해 내 심장을 이렇게 꾸몄다고, 그러니 제발 봐 달라고. 나는 스스로 가슴을 갈라 그렇게 보여 줄 수 있었다.

한참 기능을 잃었던 내 머리는 희주에 관한 기억들을 뒤죽박죽으로 만들어 버렸다. 이 혼란스러운 기억의 용광로가 식으면 무엇이 나올지 알 수 없었다.

뱀이 속삭인다.
나보다 다른 사람을 더 좋아하면 어떻게 되는지 꼭 보여 줄게.

"희주야, 나 입 맞춰 줘."
나는 널 좋아하지 않아.
나는 널 경멸해.
그러나 나는 희주에게 입맞춤을 조른다.
우리, 이 대화 없던 일로 하자.

가끔은 죽음의 세계가 가까웠다. 산 자보다 죽은 자들이 압도적인 세계를 상상해 본 적이 있는가. 그것은 파열된 잿빛 뇌와 보랏빛 내장의 세계이다. 붉은 피와 새파란 창백함의 세상이다.

도시의 불빛은 강물에 또 다른 세계를 만들고, 불빛이 만든 세계는 지상의 세계보다 훨씬 다채로우며 섬세하다. 바람에 따라 쉽게 일렁이고 깨어지지만 모든 것들이 대체로 그렇듯 수명이 짧은 것들은 대부분 아름답다.

우리는 강변을 천천히 걸었다. 사람들의 웃는 소리가 아득했다. 아니, 모든 것이 멀었다. 가까운 것은 희주의 숨결뿐이었다. 조금은 기이하게 느껴지는 숨결이었다. 단지 심장이 뛰지 않는다는 것뿐으로 희주를 사람이 아니라 할 수 있을까. 그는 이렇게 숨 쉬고 있는데.

우리는 드뷔시의 월광을 들었다. 흔하고 자주 들리는 곡이니 이 곡을 들을 때면 우리는 언제나 이날 밤을 떠올리게 되리라. 달빛은 밝았고, 수면에는 또 하나의 세계가 어리고, 사람들의 목소리는 점점 아득해지는, 고요한 세상. 한 명의 사람과 한 명의 흡혈귀가 앉아 손끝을 겹치는 밤.

나의 흡혈귀.
나는 오로지 나의 흡혈귀만을 걱정했다. 아무리 비가 온다지만 흡혈귀에게 햇볕은 너무 강했다. 태양은 비에도 지지 않았다. 물에 축축하게 젖어 빛이 바래 버렸더라도, 귀신에게도 흡혈귀에게도 공평하게 떨어졌다.

그리고 우리는 다시 만났지.
네가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만났지.
이러고 보니 어떻게 흡혈귀가 되는 걸까. 많은 책에서는 흡혈귀에게 피를 빨리는 것만으로는 흡혈귀가 되지 않는다고 했다. 흡혈귀의 피를 빨아야 진짜 흡혈귀로 탄생한다고 적혀 있었다.

이제는 희주가 죽었다거나, 살아났다거나, 또 죽을지도 모른다거나 하는 것들이 아주 사소하게 느껴졌다. 나는 희주와 입맞춤을 했고, 하는 중이었고 꼭 살아 있지 않더라도 움직이는 동안은 입맞춤을 할 예정이었다.

어차피 모든 삶에서 나는 남겨진 사람이었다. 내 인생에 섬이 있다면 희주가 유일했다. 희주를 제외하면 나는 몸을 기댈 암초조차 없었다.

내 기억들이 한 군데로 뭉쳐 휘저어지고, 재배열된다. 나는 또 많은 것을 잊는다. 나는 판공초의 기억을 잊는다. 그때 내가 얼마나 두근거렸는지를 잊는다. 높은 하늘을 날던 연과 그 연과 나란히 날아가던 새와, 그러니까 믿을 수 없이 높이 날던 그 새를 잊어버린다. 손을 뻗으면 바로 우주로 향하던 그 천공을 잊는다. 한강변을 잊어버린다. 달빛을 들으면, 그날의 강물이 생각날 것이라는 사실을 잊는다. 작고 섬세한 불빛들을 잊는다. 나의 흡혈귀와 손끝이 닿아 있던, 그 손끝이 유난히 뜨거웠음을 잊는다.

죽은 사람은 그저 죽은 상태로 있어 주면 충분했다. 물론 되살아나면 좋고, 애초에 죽지 않으면 가장 좋았다.
나는 몸 안의 모든 의지력을 끌어올렸다. 내가 가끔은 바보긴 해도 여러 번 같은 수에 당할 정도로 멍청이는 아니었다

이대로 눈을 감는다면, 희주를 잊어버릴 게 분명했다. 그저 인생에 가느다란 선을 남긴, 친구로만 기억하게 되리라.

희주는 죽었고 다시 살아났고 또 죽었다. 나는 살았고, 계속 살아 있다. 아마도 계속 살아 나가리라. 큰 이변이 없는 한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애도를 다하면서.
나는 무덤 옆에 눕는다. 부질없는 짓이다.

희주는 이 무덤 속에 없는데, 무덤으로 돌아올 가능성조차 없는데. 하지만 나는 그런 기적이 일어나길 빈다. 무지갯빛으로 폭삭 내려앉았던 재가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후에 사람의 신체를 이루는 꿈을, 그리하여, 희주가 다시 내 앞에 허기진 얼굴을 하고 나타나는 것을 꿈꾼다.

그러나 남는 것은 한 줌 재의 가벼움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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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BL] 게임에서 만렙거지를 주웠을 때 1 [BL] 게임에서 만렙거지를 주웠을 때 1 1
마린코드 / 글로번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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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조용히 게임하려던 생활이 거대한 폭풍에 휘말린 거 같은데……. 그렇다고 다시 빠져나오기에도 이미 늦은 것 같았다.

이러면 안 되는데, 자꾸 오르카는 그리핀이 마음에 들고 있었다.

다만 지금 오르카가 믿을 수 있는 건 오직 자신의 감뿐이었다. 그리핀이 나쁜 사람이 아닐 거라는 감.

마지막 모습은 아름다운 소금 사막에서 그리핀이 여우 귀를 쫑긋대며 환하게 웃는 모습이었다. 나쁘지 않았다.

그리핀은 졸린지 자신의 뺨을 매만지더니, 퐁! 곧 여우로 변해 오르카의 다리를 앞발로 긁었다. 안아 달라는 거였다.

그리핀은 푹신한 이불을 덮고 기분 좋게 몸을 웅크렸다. 처음으로 그가 이름을 불러 주니, 별것도 아닌 일인데 특별하게 느껴졌다.

너른 품에 휘말린 여우는 버둥대다가도, 곧 잠잠해질 수밖에 없었다. "너랑 이렇게 쉬니까 좋은 거 같아." 그의 나른한 속삭임에 애꿎은 상념들이 모두 휘발되고 말았다.

그리핀은 소리 없이 기분 좋게 웃었다. 자꾸 별것도 아닌 거로 칭찬해 주는 오르카가 좋았다. 그가 허튼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란 걸 알아서 더 좋았다.

"야, 뭐 잊는 데 연애가 최고야. 넌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할 수 있잖아."

하지만 도현은 사회적인 미소만을 머금은 채 결혼식만을 보며 나직이 대답했다.

"싫어."

여우 키워야 해.

오르카가 깐죽대던 여우의 주둥이를 쥐며 혼냈다. 그리핀은 입이 꼭 막혀서도 눈을 휘며 키득거렸다. 오르카가 귀 끝까지 빨개진 걸 발견해 버려서. 우리 형 순진해서 어쩌나.

"너한텐 좋게 보이고 싶어서 욕심낸 거지, 너 괴롭히는 놈들한테까지 좋게 보이고 싶진 않아."
"……."
"난 내가 편하게 게임하는 것보다 네가 더 중요해."

잠시 울음이 멈추길 기다려 주던 오르카는 작은 여우 몸을 안아 들며 말했다. 여우 꼬리와 귀까지 서글픔에 축 처져 있었다. 그간 참았던 눈물이라도 다 흘리는지 눈물길이 선했다. 오르카는 여우 몸을 계단에 앉혀 두곤 서러운 눈물을 엄지손가락으로 꾹꾹 눌러 닦아 주었다.

"넌 선택만 해."
"저는……."
"책임은 내가 질 테니까."
"……."
"네가 손해 보는 건 없어."

그리핀은 잠시 작게 숨을 고르더니, 결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어떻게든 다시 세져서, 꼭 형을 지켜 줄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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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의식한 순간 잔잔한 수면 위로 파문이 인 듯 묘한 두근거림이 느껴졌다. 생소하고 어색하면서도 발아래가 붕 뜬 듯한, 이상한 느낌이었다. 어쩌면 조금은 설레는 것도 같았다. 그리고 뭔가가 터져 나가는 듯한 이상한 해방감마저 느껴지고 있었다.

세상에도, 타인과의 관계에도 미숙하고 서툴러 상대의 예상 밖의 움직임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는, 그리고 동시에 떠오른 감정들을 얼굴과 눈빛으로 모두 드러내 보이는 아주 순수한 소년.
그 천진함이 이상하게 마음을 흔들었다.
역시 이상하게 마음에 드는 녀석이었다.

그건 그냥, 우연이었고 실수였다.
살다 보면 누구나 한 번쯤 할 수 있는, 오늘의 멍청한 짓에 추가될 법한 작은 해프닝이었다. 그리고 그 남자 역시 다시는 만날 일 없는, 자신과는 전혀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이었다.

충동적인 호기심으로 그 녀석이 건드리지 않았으면 하는 부분을 건드리는 건 안 된다. 그렇게 마음먹으며 그 남자에 대한 호기심을 필사적으로 억눌렀다.
하지만 그럼에도 자꾸만 시선으로 그 녀석을 좇으며 그 남자의 그림자를 찾고 있었다.

그 감정이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운 사람에 대한 호기심인지, 아니면 근사한 성인 남자에 대한 동경 같은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지나칠 정도로 그를 의식하고 있는 건 사실이었다.
스스로도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에게 끌리고 있었다.

이 남자는 안 된다. 어떤 의미로든 위험한 남자다.
자신의 본능이, 그리고 육감이라는 게 그렇게 이르고 있었다.
관심도 갖지 말고, 궁금해하지도 말라고.

그와 함께 일순 멈춘 듯했던 시간과 공간이 갑자기 빠르게 흐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걸음을 뗄 수가 없었다.
오로지 그가 한 말만이 머릿속을 가득 채워 어서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도 하지 못한 채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멈춰 서 있었다.

이 남자는 위험하다.
결국 이 남자가 내 인생을 망칠 거라는, 그런 예감이 들었다.

자신이 꿈꾸던 삶은 평범하고 조용한, 어느 누구에게도 흠 잡히지 않을 완벽한 삶이었다. 대단한 성공을 하겠다는 야망 같은 건 없지만 보통의 아이들처럼, 아니 그 아이들보다 더 완벽한, 누가 봐도 잘 자랐다고 할 만한 인생을, 지금껏 꿈꿔 왔다.

모든 걸 내던져 버리더라도, 그와 함께하고 싶었다.
태어나 처음으로 느끼는 강렬한 충동에 이성이 마비되어 버렸다. 이래선 안 된다는 걸 알지만 그 충동을 억누를 수 없었다.

꿈속의 그는 냉랭해 보이지만 다정한 사람이었는데 현실의 그는 더없이 매섭고 차갑기만 하다.
꿈속의 그와 현실의 그 사이의 괴리에 문득, 만약 진짜 전혀 모르는 타인으로 만났다면 그의 태도도 조금은 달랐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겨우 세 번째의 만남에 그렇게까지 깊이 빠져들었다는 것도 웃기지만 자신이 먼저 그를 따라갔다는 건 더 이상한 일이었다. 무엇보다 꿈속에서조차 자신은 재영이와 재원이를 버리고 이 남자를 선택했다.
그저 꿈일 뿐임에도, 그 사실을 인식한 순간 묵직한 죄책감이 뱃속 깊이 내려앉았다.

그와 자신이 완전한 타인으로 살았다면 어땠을까? 적어도 지금보다는 조금 행복하지 않았을까?

그게 꿈이라는 건 알고 있다. 이제 와 그런 생각을 해 봤자 결국 그것들은 모두 가정일 뿐이다. 이미 엄마는 그 순간 선택을 했고 자신 역시 선택을 했다. 그리고 그 결과가 현재다.

이제 와 과거의 선택을 바꿀 수도, 지금 이 현실을 되돌릴 수도 없다.

지금 얼굴을, 그에게 보이고 싶지 않다. 지금 그에게 얼굴을 보이면 절대 알리고 싶지 않은 뭔가를 들킬 것 같아, 싫다. 그라면 언뜻 비치는 찰나의 감정조차도 읽어 낼 것 같아서, 무섭다.

의식 아래 깊은 곳에 깔려 있는 희미한 감각의 기저 따위는 알고 싶지 않다. 그걸 깨닫게 되는 순간 무서운 일이 생길 것 같아, 조금이라도 그걸 내비치고 싶지 않다.

아주 간혹, 사람은 순간의 충동과 착각으로 자기 무덤을 파기도 한다.
바로 지금의 자신처럼.

이젠 이 사람이 뭘 하든 마음대로 하라고 포기하고 자신이 맞춰 주는 수밖에 없다. 어떻게 해도 이 남자는 평생 변하지 않을 거다. 변해야 할 이유도 없고 변할 의지도 없는 사람이니까.

그리고 그 순간 이 질리지 않는 남자와 함께라면 이 세계의 끝까지 가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러고 보니 첫 번째와 두 번째의 소원은 어떻게든 이루어졌다. 하지만 아마 마지막 소원은 앞으로도 영원히 이루어지지 않을 거다.

자신에게 이 이상의 행복은 존재할 수 없기에 더할 수 없이 만족하고 있다.
다만, 단 한 가지 바라는 건…….

아니, 단순히 아름답고 화려하다는 감상만으로는 부족하다. 처음에는 단순히 아름다운 외형에 시선이 끌리지만, 그 뒤에는 불길하고 기괴한 그의 분위기에 절대 그에게서 눈을 뗄 수 없게 된다.

아주 소극적인, 하지만 명확한 그 의사 표현에 잠시 멈칫한 그가 천천히 이쪽을 돌아본다. 조금 당황한 듯 그답지 않게 놀란 얼굴로 이쪽을 바라보는 그의 얼굴 위로 이내 미소가 흐른다.

늘 바라 오던 건 이런 일상이었다.
평화롭고 잔잔하고, 누구나 누리고 있고 누구나 누릴 수 있는, 손을 잡고 거리를 걸을 수 있는 느긋한 보통의 일상.

자신은 크리스천도 아니고 소원 따위는 빌지 않으며 산타클로스 따위는 더더구나 믿지 않지만 만약 올해의 소원이 내년에 이루어진다면 매해 같은 소원을 빌고 싶었다.
다음 크리스마스 역시 그와 함께 보낼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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