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책] [세트] [BL] 세컨드 윈드 (총2권/완결)
Joy / 비욘드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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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잔하면서도 섬세한 감정선이 너무 좋았어요. 일상 리맨물이라 현실피폐도 있고 힐링도 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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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애기야, 어서 태어나라. 형아가 잘해 줄 테니까, 응?’

내가 무얼 바라 왔었지? 뭘 하려던 건가. 그건 단순히 혼자 소망한다 해서 이루어질 일이 아니었다. 설명 아닌 설득, 아니 것보다도 허락, 아니 아니, 그것보다 더 중요한 첫 번째 계단도 오르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시도해 본다 한들, 손끝 하나로 튕겨나질 수도 있었다

바로 그날, 어서 자랐으면 좋겠다고도 생각했다. 어서 자라서 이루고 싶은 것이랄까, 무엇이 되어 어떤 일을 하고 싶다든가 하는 기대나 장래희망을 새로이 세웠다기보다는, 내내 간직해 왔던 바람을 다시 한번 일깨웠다는 쪽에 가까웠다.

믿을 수가 없었다. 악몽이었으면 했다. 내가 꺼내들 수 있는 칼이란 고작 나를 향한 그의 행동에서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몇 개월 동안에 쌓인 감정 따위와는 비교할 수 없는, 그는 물론이고 다른 가족들과의 유대관계를 과시함이 내 유일한 무기였기 때문이다.

슬프고 초조하고 불안한 마음이 어지럽게 들끓었다. 오래전, 한때 내 작은 세계를 먹물처럼 캄캄하게 뒤덮었으나 마법 같은 목소리로 씨앗처럼 작아져, 이윽고 배꼽 아래 깊숙이 숨듯이 심어졌던 나겁한 마음이 순식간에 넝쿨처럼 자라 온몸을 조여 왔다.

그가 나를 세상에 불러들인 운명의 사람이라는 것을, 살면서 단 한 번도 의심해 본 적이 없다.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그때 내가 품고 있었던 것들이 내 존재에 대한 불안과 설움, 그리고 수치심이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 요란한 울음으로 그것들을 모두 풀어내 버렸던가에 대해선 확신할 순 없지만, 그날 이후 내가 스스로를 이해하게 되었음은 분명하였다.

간신히 울음을 멈추고, 얼마간 후련함을 느끼며 나는 그와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그것은 그와의 비밀약속인 동시에 나 자신과의 최초의 화해였다. 그리고 몹시 피로해져 그대로 그의 가슴 위에서 잠들어 버렸다.

누구에게나 나름의 취향이 있겠지만, 나의 경우엔 지극히 평범하고 현실적인 쪽이 좋다. 독특한 콘셉트나 특별한 장소가 아닌 평범한 방의 침대 위에서 두 사람이 서로 얼굴을 마주보며 부드럽고 친절하고 다정하게 사랑을 나누는 것.
굳이 따지자면 사람에 대한 취향 역시 그와 같아서, 짓궂고 파렴치한 쪽에 속하는 현우종은 몹시 어긋난 경우여야 할 테지만, 하필 그의 목소리에 이끌려 태어난 이상 안타깝게도 내게 선택권이란 것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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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수용소에서 저 수용소로 몇 년 동안 끌려다니다 보면 결국 치열한 생존 경쟁에서 양심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사람들만 살아남게 마련이다. 그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들이었다. 자기 목숨을 구하려고 잔혹한 폭력을 일삼고 도둑질을 하는 건 물론, 심지어 친구까지 팔아넘겼다. 운이 아주 좋아서였든아니면 기적이었든 살아 돌아온 우리들은 알고 있다. 우리 중에서 정말로 괜찮은 사람들은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는 것을….

수용소에 들어온 사람들은 이것 말고도 비슷한 놀라운 일들을 많이 경험했다. 나 같은 의학도가 수용소에서 제일 먼저 배운 것은 우리가 공부했던 ‘교과서가 모두 거짓‘ 이라는 사실이었다. 교과서에는 사람이 일정 시간 이상 잠을 자지 않으면 죽는다고 적혀 있다. 하지만 완전히 틀린 말이었다. 그때까지 나는 내가 세상에서 정말로 할 수 없는 일이 있다고 생각했다. 이것이 없으면 잠을 잘 수 없고, 이것 혹은 저것이 있으면 살 수 없다. 이런 식으로 생각했다.

아우슈비츠 수감자들은 첫 번째 단계에서 충격을 받은 나머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됐다. 그리고 며칠이 지나면 가스실조차 더이상 두렵지 않게 된다. 오히려 가스실이 있다는 사실이 사람들로 하여금 자살을 보류하게 했다.

이런 감정과는 별도로 수용소에 들어온 사람들은 정신적으로 엄청난 고통을 겪으며, 그 고통을 약하게 하려고 안간힘을 쓴다. 무엇보다 먼저 찾아오는 것은 집과 가족에 대한 끝없는 그리움이다. 이그리움은 너무나 간절해서 그리워하는 데 자기 자신을 완전히 소진할 정도가 된다.
그런 다음에는 혐오감이 찾아온다. 자기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것에 대한 혐오감, 심지어 그저 생긴 모양에서도 혐오감을 느낀다.

인간이 더는 어느 것에도 관심을 갖지 않는 정서와 감정의 둔화를 의미하는 무감각은 수용자들이 보이는 정서적 반응의 두 번째 단계에서 나타나는 징후이다. 수감자들은 마침내 매일같이 반복되는 구타에 대해서도 무감각해진다. 이런 무감각을 수단으로 삼아 사람들은곧 주위에 꼭 필요한 보호막을 쌓기에 이른다.

그와 같은 긴장 상태는 살아남아야 한다는 과제에 끊임없이 집중해야 할 필요성과 결합돼 수감자들의 정신세계를 원시적인 수준으로 끌어내린다. 밖에서 정신 분석을 배운 적이 있는 동료 수감자들은 수용소에 있는 사람들이 보이는 ‘퇴행‘ 현상에 대해 자주 이야기한다. 이것은 정신세계가 원시적인 수준으로 퇴보하는 것을 말한다.
그런 그들의 소원과 욕망은 꿈속에서 극명하게 드러났다.

나는 동료가 괴로워하는 소리를 듣고 잠에서 깼던 어느 날 밤의일을 결코 잊을 수 없다. 잠을 자면서 몸부림치는 걸 보니 악몽을 꾸고 있는 게 분명했다. 평소에도 악몽이나 황홀경에 시달리는 사람을특히 딱하게 생각하고 있었던 나는 그 불쌍한 사람을 깨우려고 했다.
그러다 갑자기 내가 무슨 짓을 하려고 했지 놀라면서 그를 깨우려던손을 거두었다. 그 순간 꿈을 꾸지 않는다는 것은, 비록 나쁜 꿈일지라도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수용소의 현실만큼이나 끔찍한 일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이다. 그런 끔찍한 곳으로 그를 다시 불러들이려고 했다니…….

그때 한 가지 생각이 내 머리를 관통했다. 생애 처음으로 나는그렇게 많은 시인들이 시를 통해 노래하고, 그렇게 많은 사상가들이 최고의 지혜라고 외쳤던 하나의 진리를 깨달았다. 그 진리란 바로 사랑이야말로 인간이 추구해야 할 궁극적이고 가장 숭고한 목표라는것이었다. 나는 인간의 시와 사상과 믿음이 설파하는 숭고한 비밀의 의미를 간파했다.
‘인간에 대한 구원은 사랑을 통해서, 사랑 안에서 실현된다.

수용소에서는 항상 선택해야 했다. 매일같이, 매 시간마다 결정을 내려야 할 순간이 찾아왔다. 그 결정이란 당신으로부터 자아와 내적인 자유를 빼앗아 가겠다고 위협하는 저 부당한 권력에 복종할 것인가 아니면 말 것인가를 판가름하는 것이었다. 그 결정은 당신이 보통 수감자와 같은 사람이 되기 위해 자유와 존엄성을 포기하고 환경의 노리개가 되느냐 마느냐를 판가름하는 결정이었다.

그때 나는 이 세상에 남길 것이 하나도 없는 사람이라도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하며(그것이 비록 아주 짧은 순간이라고 해도) 여전히 더할나위 없는 행복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극단적으로 소외된 상황에서 자기 자신을 적극적으로 표현할 수 없을 때, 주어진고통을 올바르고 명예롭게 견디는 것만이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일 때, 사람은 그가 간직하고 있던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을 생각하는 것으로 충족감을 느낄 수 있다. 내 생애 처음으로 나는 다음과 같은 말의 의미를 이해하게 됐다.
‘천사들은 한없는 영광 속에서 영원한 묵상에 잠겨 있나니!‘

이렇게 내면세계를 극대화시킴으로써 수감자들은 멀리 과거로 도피해 자기 존재의 공허함과 고독감 그리고 영적인 빈곤으로부터 피난처를 찾을 수 있었다. 상상의 나래를 마음껏 펼치며 과거 일들을 회상했다. 그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작은 해프닝이나 사소한 것들이었다. 그 향수 어린 추억이 그들을 성스럽게 만들었으며, 때로는이상한 성격을 가진 것처럼 보이게도 했다. 그들의 세계와 그들의 존재가 현실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것 같았다. 그들의 영혼은 그리움을 향해 먼 과거로 달려갔다.

강제 수용소에 예술 비슷한 것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놀라워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예술뿐만 아니라 유머도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면 더욱더 놀랄 것이다. 비록 그 흔적이 아주 희미하고 몇 초 혹은 몇 분 동안만 지속되지만, 유머는 자기 보존을 위한 투쟁에 필요한 또 다른 무기였다. 이미 잘 알려진 대로 유머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그것을 딛고 일어설 수 있는 능력과 초연함을 가져다준다.

만약 강제 수용소에 있는 사람이 자존심을 지킬 마지막 노력으로 이에 대항해서 싸우지 않으면, 그는 자기가 하나의 인간이라는 생각, 마음을 지니고 내적인 자유와 인격적 가치를 지닌 인간이라는 생각을 잃어버리게 된다. 그리고 자신을 거대한 군중의 한 부분에 불과한 존재로 생각한다. 존재가 짐승과 같은 수준으로 떨어지는 것이다.

수용소에 살아남은 사람들, 여전히 일할 능력이 있는 사람들은살아남을 수 있는 가능성을 높이는 데 온갖 수단을 다 사용해야만 했다. 그들은 절대로 감상에 빠지는 일이 없었다. 그들은 자신의 목숨이 전적으로 감시병들의 기분 - 운명의 노리개라고나 할까? 에 달려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이것이 그들 자신을 환경이 강요하는것보다 훨씬 더 비인간적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인간의 자유는 어떤가? 어떤 주어진 환경에 대한 사람들의 행동과 반응에 아무런 정신적 자유도 없단 말인가? 우리가 믿고있는 이론, 즉 인간은 여러 조건과 환경적인 요인 - 생물적, 심리적,
사회적 성격으로 이루어진 이 만들어 낸 하나의 피조물에 지나지않는다는 것이 정말로 사실일까? 인간은 이런 여러 요소들에 의해우연히 만들어진 존재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강제 수용소라는 특별한 상황에서 수감자들이 보인 반응이 ‘인간은주변 환경의 영향을 피할 수 없다‘ 라는 이론을 입증해 줄 수 있는가하는 것이다. 그런 환경에 직면한 인간에게는 자기 행동을 선택할 자유가 없단 말인가?

내가 세상에서 한 가지 두려워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내 고통이 가치 없는 게 되는 것이다.
수용소에는 남을 위해 희생한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과 친해진 후 나는 도스토옙스키의 이 말을 자주 머릿속에 떠올렸다. 수용소에서 그들이 했던 행동, 그들이 겪었던 시련과 죽음은 하나의 사실,
즉 마지막 남은 내면의 자유를 결코 빼앗을 수 없다는 사실을 증언해준다. 그들의 시련은 가치 있는 것이었고, 그들이 고통을 참고 견뎌낸 것은 순수한 내적 성취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삶을 의미 있고 목적 있는 것으로 만드는 것. 이것이 바로 빼앗기지 않는 영혼의 자유이다.
III

적극적인 삶은 인간에게 창조적인 일을 통해 가치를 실현할 기회를주는 데 그 목적이 있다. 반면 즐거움을 추구하는 소극적인 삶은 인간에게 아름다움과 예술, 혹은 자연을 체험함으로써 충족감을 얻을수 있는 기회를 준다. 그러나 창조와 즐거움 두 가지가 거의 메말라있는 삶에도, 외부적인 힘에 의해 오로지 존재에 대한 자신의 태도를선택할 수 있는 지고의 도덕성을 요구하는 삶에도 목적은 있다. 물론그에게는 창조적인 삶과 향락적인 삶이 모두 금지되어 있다. 그러나창조와 즐거움만이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다. 만약 그곳에 삶의 의미가 있다면, 그것은 시련이 주는 의미일 것이다. 시련은 운명과 죽음처럼 우리 삶의 빼놓을 수 없는 한 부분이다. 시련과 죽음 없이 인의 삶은 완성될 수 없다.

최악의 통증이 곧 찾아올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러다 보면 어느새 통증이 끝나 있는 것이다.
강제 수용소에 있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언가를 성취할 수 있는 인생의 진정한 기회가 자기들에게 다시 오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그곳에도 기회가 있고 도전이있었다. 삶의 지침을 돌려놓았던 그런 경험의 승리를 정신적인 승리로 만들 수도 있었고, 그와는 반대로 도전을 무시하고, 다른 대부분의 수감자처럼 무의미하게 보낼 수도 있었다.

‘왜’ 살아야 하는지 아는 사람은 그 ‘어떤 상황도 견딜 수 있다.
이 말은 수감자들을 대상으로 심리 치료와 정신 위생학적 치료를 하려는 사람에게 귀감이 되는 말이다. 수감자를 치료할 기회가 있을 때 그들이 처한 끔찍한 현실을 어떻게든 견딜 수 있는 힘을 주려면 그들에게 살아야 할 이유, 즉 목표를 얘기해 주어야 한다.

만약 어떤 사람이 시련을 겪는 것이 자기 운명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그는 그 시련을 자신의 과제, 다른 것과 구별되는 자신만의 유일한 과제로 받아들여야 한다. 시련을 당하는 중에도 자신이 이 세상에서 유일한 단 한 사람이라는 사실에 감사해야 한다. 어느 누구도그를 시련으로부터 구해 낼 수 없고, 대신 고통을 짊어질 수도 없다.
그가 자신의 짐을 짊어지는 방식을 결정하는 것은 그에게만 주어진독자적인 기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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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BL] 세컨드 윈드 1 [BL] 세컨드 윈드 1
Joy / 비욘드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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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히 잠든 그의 모습은 어쩐지 비현실적이었다. 도시의 빛이 비밀스런 어둠을 파고들어, 그 안에서 빛의 부각처럼 튀어나온 듯이 보였다. 비밀스런 존재, 손대면 안 되는 금단의 존재. 박영민을 현실의 인간으로 느끼게 해주는 건 그의 이마에 흘러내려 온 몇 올의 머리카락뿐이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별것도 아닌 일, 그저 동료의 잠든 얼굴을 쳐다본 것뿐인데. 그의 머리털을 더듬었을 뿐인데. 나쁜 짓을 저지른 기분이었다. 봐서는 안 되는 걸 훔쳐보고, 손대면 안 되는 것에 손댄 것처럼 느껴졌다. 금기를 어긴 것처럼 심장이 팔딱거렸다.

파란이 쓸고 간 자리. 연우는 오전 내도록 어느 시절의 자기와 마주한 채 시간을 보냈다. 저걸 붙인 날로부터 몇 년밖에 흐르지 않았지만, 사진 속의 자기는 10년 전처럼 앳되어 보인다고 여기면서. 엊그제 마신 술이 아직 덜 깬 건지, 왠지 월요일부터 아무것도 실감나지 않는다고 생각하면서.

물의 겉면을 나타내는 수면이라는 단어처럼, 하늘에도 ‘천면’이라는 단어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연우는 회사 옥상에서 하늘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일 초, 이 초, 삼 초. 서로에게 눈길을 박은 채로 꽤 많은 시간이 성큼성큼 지나갔다. 저 멀리, 시베리아 어디에선가 첩첩히 쌓였던 다음 계절의 공기가 한 줌씩 두 사람을 스치고 지나갔다. 저 먼 은하계에서는 아기별이 태어났고, 또 다른 행성은 내핵마저 식었다.

‘나에게는 좋은 사람이 능력 있는 사람이야. 그런 사람에게는 늘 자기 ‘편’이 있다고. 당신이 모를 뿐이지.’

온화한 잠이었다. 타인의 숨소리에서 느끼는 따스함이, 서리를 막아 주는 반구처럼 감쌌던 날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4년이 흘러 어느 가을이 완전히 산화하던 밤.
두 사람은 거기에 앉아 있었다. 색색의 낙엽들이 땅의 폭죽처럼 부채꼴로 펼쳐져 있던, 그 밤의 출발선에.

어쩐다, 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단 한 사람, 연우에게만은 나쁜 남자가 되고 싶었다.

그는 자신이 지금껏 좋은 사람이었던 적도, 나쁜 사람이었던 적도 없다고 간주했다. 남들이 가끔 그를 친절하다고 오해하는 건 그의 마음의 온도가 늘 평연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왠지 단 한 사람에게만은 그 온도가 지속될 것 같지 않았다.

그 새벽의 키스 이후, 나인스타 앞에서 영민이 저돌적으로 발언을 꺼낸 이후, 두 사람은 한사코 서로를 피하고자 했으면서도 가끔 이랬다. 어떤 섬세한 순간이 그때까지 유지하던 일상을 바꾸었다. 비싼 공기정화기가 내뿜는 청결한 향마저 진득한 케미처럼 작용하던 시간.

얌전한 강연우가 조용하고 초연한 남자 박영민과 친해진 계기. 그 이유 안에는 몇 가지 키워드가 존재했다.
운수, 숨쉬기, 달리기, 그리고 장의사와 무당, 이라는…, 소설 제목 같은 키워드들이다.

공격적이거나 방어적인 가족들, 일이 잘못되면 남의 탓을 하며 다른 사람의 시선 앞에서만 그럴 듯한 인격으로 위장하는 사람들.

‘연우 씨가 그렇게 숨이 찰 정도라면…, 이제 가족을 위해서 무리하는 걸 그만두고 연우 씨 자신을 위해서 뭔가를 해 줘야 하지 않느냐는 겁니다. 상대방이 내 말을 듣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연우 씨가 자기 생각을 가장 어려운 대상에게 이야기하는 게 중요한 거죠.’

그렇게 둘은 그 밤에 함께 달렸고, 밤의 공기를 조용한 열기로 나눠 가졌다. 이후로 인턴 기간을 제외한 지난 4년 6개월 동안, 둘은 그야말로 성격답게 조용하고 꾸준한 동료애를 유지했다.

그렇게 인턴 기간을 제외한 5년 남짓, 두 사람은 둘만의 시간과 물건들을 공유하고 또 공유하며 편안한 관계를 유지했다.

둘은 자신 외의 사람들을 안으로 들이는 데에 많은 시간이 필요한 이들이었고, 서로의 그런 닮은 점들을 충분히 존중했다.

우주는 연우에게 가족들이라는 한계선, 출발선과 결승선이 없는 유일한 장소였다. 어린 시절부터 내내, 연우에게 ‘가족’은 지구 끝까지도 쫓아올 무거운 존재들이었다. 그래서 그는 우주로 나가고 싶었다. 그래서 장의사가 되고 싶었고.

시간은 그때마다 유독 더 무료하면서도 삼삼하게 지나갔다. 저 멀리 어느 곳에서는 또 작은 백색왜성이 산화하고, 어딘가로 흡수되고, 또 그렇게 하얀 구멍에서 쏙 하고 튀어나와 별이 생기고, 그 별에서 미토콘드리아보다 작은 미생물들이 왁다글닥다글 시끄럽게 굴고, 공룡들이 ‘부동산 관광’이라는 작은 깃발을 들고 행성들을 일렬로 도보했다.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시간은 그렇게 많은 것들을 품고 있었다.

연우는 그 안에서 마음껏 게을렀고, ‘지금’을 잔뜩 누렸다. 그는 지금 부릴 수 있는 게으름들이, 우주의 시간에 담긴 지루함이, 한만한 자의 느릿한 페이스가 허무하면서도 참 좋았다. 그렇게 완만한 심장의 박동 속에서 편하게 숨을 쉬며 이따금 별거 아닌 듯이 눈을 마주치는 것마저도 너무 좋았다.

영민과 자연스럽게 시선을 교환할 때마다, 연우는 가끔 생각했다. 내게 이만큼이라도 가까운 존재가 있었는지를. 또 이런 동료를 잃으면 이 관계를 갖기 전보다 얼마나 심각한 상황에 처하게 될 건지를.
연우에게 있어 영민과 단절된다는 건 미래가 아니라 ‘지금’마저 잃는 것이었다.

연우는 자기 가족에게 매우 익숙했다. 그에게 가족들은 혈연이라는 이름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약자를 협박하고 괴롭히는, 그러면서도 희생을 강요하는 사람들, 곧 몰상식의 집단이었다.

사람이 그리웠다는 듯이 선뜻 다가온 고양이. 그리고 언제 들이닥쳐 진상을 부릴지 모르는 혈연 집단들. 사실 이사 문제만 생각하면 어렵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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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히 잠든 그의 모습은 어쩐지 비현실적이었다. 도시의 빛이 비밀스런 어둠을 파고들어, 그 안에서 빛의 부각처럼 튀어나온 듯이 보였다. 비밀스런 존재, 손대면 안 되는 금단의 존재. 박영민을 현실의 인간으로 느끼게 해주는 건 그의 이마에 흘러내려 온 몇 올의 머리카락뿐이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별것도 아닌 일, 그저 동료의 잠든 얼굴을 쳐다본 것뿐인데. 그의 머리털을 더듬었을 뿐인데. 나쁜 짓을 저지른 기분이었다. 봐서는 안 되는 걸 훔쳐보고, 손대면 안 되는 것에 손댄 것처럼 느껴졌다. 금기를 어긴 것처럼 심장이 팔딱거렸다.

파란이 쓸고 간 자리. 연우는 오전 내도록 어느 시절의 자기와 마주한 채 시간을 보냈다. 저걸 붙인 날로부터 몇 년밖에 흐르지 않았지만, 사진 속의 자기는 10년 전처럼 앳되어 보인다고 여기면서. 엊그제 마신 술이 아직 덜 깬 건지, 왠지 월요일부터 아무것도 실감나지 않는다고 생각하면서.

물의 겉면을 나타내는 수면이라는 단어처럼, 하늘에도 ‘천면’이라는 단어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연우는 회사 옥상에서 하늘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일 초, 이 초, 삼 초. 서로에게 눈길을 박은 채로 꽤 많은 시간이 성큼성큼 지나갔다. 저 멀리, 시베리아 어디에선가 첩첩히 쌓였던 다음 계절의 공기가 한 줌씩 두 사람을 스치고 지나갔다. 저 먼 은하계에서는 아기별이 태어났고, 또 다른 행성은 내핵마저 식었다.

‘나에게는 좋은 사람이 능력 있는 사람이야. 그런 사람에게는 늘 자기 ‘편’이 있다고. 당신이 모를 뿐이지.’

온화한 잠이었다. 타인의 숨소리에서 느끼는 따스함이, 서리를 막아 주는 반구처럼 감쌌던 날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4년이 흘러 어느 가을이 완전히 산화하던 밤.
두 사람은 거기에 앉아 있었다. 색색의 낙엽들이 땅의 폭죽처럼 부채꼴로 펼쳐져 있던, 그 밤의 출발선에.

어쩐다, 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단 한 사람, 연우에게만은 나쁜 남자가 되고 싶었다.

그는 자신이 지금껏 좋은 사람이었던 적도, 나쁜 사람이었던 적도 없다고 간주했다. 남들이 가끔 그를 친절하다고 오해하는 건 그의 마음의 온도가 늘 평연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왠지 단 한 사람에게만은 그 온도가 지속될 것 같지 않았다.

그 새벽의 키스 이후, 나인스타 앞에서 영민이 저돌적으로 발언을 꺼낸 이후, 두 사람은 한사코 서로를 피하고자 했으면서도 가끔 이랬다. 어떤 섬세한 순간이 그때까지 유지하던 일상을 바꾸었다. 비싼 공기정화기가 내뿜는 청결한 향마저 진득한 케미처럼 작용하던 시간.

얌전한 강연우가 조용하고 초연한 남자 박영민과 친해진 계기. 그 이유 안에는 몇 가지 키워드가 존재했다.
운수, 숨쉬기, 달리기, 그리고 장의사와 무당, 이라는…, 소설 제목 같은 키워드들이다.

공격적이거나 방어적인 가족들, 일이 잘못되면 남의 탓을 하며 다른 사람의 시선 앞에서만 그럴 듯한 인격으로 위장하는 사람들.

‘연우 씨가 그렇게 숨이 찰 정도라면…, 이제 가족을 위해서 무리하는 걸 그만두고 연우 씨 자신을 위해서 뭔가를 해 줘야 하지 않느냐는 겁니다. 상대방이 내 말을 듣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연우 씨가 자기 생각을 가장 어려운 대상에게 이야기하는 게 중요한 거죠.’

그렇게 둘은 그 밤에 함께 달렸고, 밤의 공기를 조용한 열기로 나눠 가졌다. 이후로 인턴 기간을 제외한 지난 4년 6개월 동안, 둘은 그야말로 성격답게 조용하고 꾸준한 동료애를 유지했다.

그렇게 인턴 기간을 제외한 5년 남짓, 두 사람은 둘만의 시간과 물건들을 공유하고 또 공유하며 편안한 관계를 유지했다.

둘은 자신 외의 사람들을 안으로 들이는 데에 많은 시간이 필요한 이들이었고, 서로의 그런 닮은 점들을 충분히 존중했다.

우주는 연우에게 가족들이라는 한계선, 출발선과 결승선이 없는 유일한 장소였다. 어린 시절부터 내내, 연우에게 ‘가족’은 지구 끝까지도 쫓아올 무거운 존재들이었다. 그래서 그는 우주로 나가고 싶었다. 그래서 장의사가 되고 싶었고.

시간은 그때마다 유독 더 무료하면서도 삼삼하게 지나갔다. 저 멀리 어느 곳에서는 또 작은 백색왜성이 산화하고, 어딘가로 흡수되고, 또 그렇게 하얀 구멍에서 쏙 하고 튀어나와 별이 생기고, 그 별에서 미토콘드리아보다 작은 미생물들이 왁다글닥다글 시끄럽게 굴고, 공룡들이 ‘부동산 관광’이라는 작은 깃발을 들고 행성들을 일렬로 도보했다.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시간은 그렇게 많은 것들을 품고 있었다.

연우는 그 안에서 마음껏 게을렀고, ‘지금’을 잔뜩 누렸다. 그는 지금 부릴 수 있는 게으름들이, 우주의 시간에 담긴 지루함이, 한만한 자의 느릿한 페이스가 허무하면서도 참 좋았다. 그렇게 완만한 심장의 박동 속에서 편하게 숨을 쉬며 이따금 별거 아닌 듯이 눈을 마주치는 것마저도 너무 좋았다.

영민과 자연스럽게 시선을 교환할 때마다, 연우는 가끔 생각했다. 내게 이만큼이라도 가까운 존재가 있었는지를. 또 이런 동료를 잃으면 이 관계를 갖기 전보다 얼마나 심각한 상황에 처하게 될 건지를.
연우에게 있어 영민과 단절된다는 건 미래가 아니라 ‘지금’마저 잃는 것이었다.

연우는 자기 가족에게 매우 익숙했다. 그에게 가족들은 혈연이라는 이름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약자를 협박하고 괴롭히는, 그러면서도 희생을 강요하는 사람들, 곧 몰상식의 집단이었다.

사람이 그리웠다는 듯이 선뜻 다가온 고양이. 그리고 언제 들이닥쳐 진상을 부릴지 모르는 혈연 집단들. 사실 이사 문제만 생각하면 어렵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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