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별일 아니라는 말로 스스로를 혹사시키지는 말고. 정말로 별일이 아니면 아프지도 않거든."
그는 오늘 유난히도 다정했던 사람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고서야 오른손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귀는 물론이고 목 뒤까지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지금 내 마음을 가장 사실적으로 설명하면, 조별 과제에서 최고로 앙숙이던 놈 덕분에 버스를 탄 조원 1의 기분이다.
아름다움에는 성별이 없다. 인간의 욕망만이 존재할 뿐이다.
일리야 황녀가 죽고 여주가 메인남주와 맺어진 후에도, 변함없이 여주의 곁을 지킬 정도로 무식한 인내심과 철의 이성을 가진 남자. 그게 소설 속 페르디난트 공작이다.
이곳은 수많은 권력이 밀집된 황궁이고, 내가 상대방에 대한 적대행위를 멈춰도 암투는 이어진다는 걸.
‘모두가 그런 생각을 한다. 하지만 내가 아니면 아무도 이 일을 하지 않을 것 같아서 그만둘 수가 없다. 이게 내 운명인가 보다.’하고…….
이토록 이성적인 인물이 자신의 반란이 무모하단 사실을 몰랐을 리는 만무하다. 그럼에도 그만둘 수 없는 이유가 있기에, 평범한 삶을 포기하고 감행했을 터다. 실패할 걸 뻔히 알면서도.
그런데 정작 내 눈에 비치는 이 세상은, 여느 사람 사는 세상과 마찬가지로, 범죄자가 도처에 횡행하고 있다. 황태자는 이런 사회의 단면을 알고도 황제의 치세가 완벽하다고 믿을까?
그 사실이 카이사를 더 울컥하게 했다. 때때로 일리야는 정작 자신의 삶에는 미련이 없는 사람처럼 보였다. 당신의 정체조차 모르는 저 행인들이 무슨 의미가 있다고.
겪고 있는 나조차도 안 믿기는 이야기다. 아직도 매일 아침 눈을 뜰 때마다 내가 미친 게 아닐까 고민한다. 이렇게 살다가는 정말로 미칠지도 모르니, 제발 내가 있어야 할 장소로 돌려보내 달라고 매일 밤 기도한다.
"그때도 제가 울고 있다는 이유로 황녀궁에 숨어든 저를 벌하지 않으셨지요."
이 고상한 황녀의 눈에는 자신이 얼마나 꼴불견으로 보였을까. 좀 멀끔하고 완벽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코앞에서 본 일리야의 모습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초췌했고, 창백한 피부에는 푸른 핏줄이 희미하게 비쳤다. 그럼에도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이 몸으로 눈을 뜨고 생활하는 동안 늘 느꼈던 기시감과도 닮아 있었다. 분명 낯선데, 왜 이렇게 익숙할까.
그렇다면 내 의식과 기억은 어디에서 나오는 걸까? 내 몸도, 내 뇌도 아닌데. 누가 기억하고 있는 거지?
애써 인지하지 않으려 했던 의문이 해일처럼 밀려들었다. 시야가 흔들렸다. 대체 어디서부터 내 기억이고 어디까지가 몸에 새겨진 지식일까.
의문에 대한 답을 찾으려 할수록, 과부하가 걸린 기계처럼 머리가 뜨거워졌다. 어디에선가 모래가 떨어지는 듯한 환청도 들렸다.
기억이란 게 이상해서, 떠오를 듯 말 듯한 것일수록 명확히 떠올리려 하면 희미해지다가 어느 순간 단서조차 휘발되었다.
"이제 제 검은 전하께 보여드리기에 결코 부끄럽지 않습니다. 약속드렸던 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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