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소설 속에서도 페르디난트는 정말로, 배신 따위는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페르디난트가 아니라면, 소설에서 일리야의 반란을 밀고한 존재는 누구일까? 더 가까이에 있는 짐작조차 하지 못한 인물인 건가. 그렇다면 내가 페르디난트에게 품었던 의심과 경계는 모두 그릇되었다. 불합리한 누명이다.
겨우 수위를 유지하고 있던 마음속의 우물에, 죄책감과 미안함, 구분할 수 없는 감정들이 솟구치듯 차올라 이성으로 범람했다.
나를 의심하도록 해. 나는 당신이 아는 그 사람이 아니야. 당신이 쌓아 온 추억과 관계의 대가를 받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닐지도 몰라.
알지도 못하면서. 바보같이 알맹이가 바뀐 것도 모르고 속고 있으면서! 나는 벗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발악에 가까웠다. 하지만 우직한 팔에 기어이 움직임이 봉쇄당했다. 언젠가 벌어졌던 몸싸움의 반복이었다.
"한 사람을 오랫동안 바라보면, 그 사람보다 그 사람에 대해서 잘 아는 부분도 생깁니다. 그냥 그렇게 돼요."
"당신 자신조차 모르는 표정, 인지하지 못하시는 습관. 그런 것들이 저를 설레게 하고, 때로는 행복하게 했습니다."
허구 속의 ‘빙의’와 현실의 사정은 엄연히 다르다. 사람은 자신의 자아가 흔들리는 것을 견디지 못한다. 내가 미친 건지, 혹시 몸 주인이 미쳐서 ‘나’라는 인격을 만들어낸 건 아닌지 끊임없이 의심하게 되니까.
마지막으로 돌아보고 싶었던 장소가 자신의 방이 아니라, 오래전 세상을 떠난 어머니의 방이었다는 점에서. 아이텔이 품고 있는 오래된 외로움과 결핍이 느껴졌다.
성물의 권능은 결코 인간이 항거할 수 없는 기적을 일으킨다. 그 권능을 탐하여, 감히 주제를 모르고 중앙신전에 안치된 성물을 사용하려 한 자들이 전부 어떻게 되었던가.
막 숨어들었을 때는 삭막하게만 보이던 정원의 풍경이, 세상에서 가장 반짝이는 공간처럼 보였다. 부드러운 바람과 안온한 빛으로 감싸인 외딴 낙원 같았다. 이 장소에 황녀가 있다는 오직 그 이유 하나 때문에.
얼마 전까지 부모의 그늘에서 보호받으며 살아온 철부지에게 들이닥친 현실은 너무 버거웠다. 그가 이해하고 있던 것보다 훨씬 가혹했다.
‘그것뿐이라면 그냥 내버려 뒀겠지만. 모처럼 이성과 감정의 판단이 일치하는데, 그대를 돕지 않을 이유가 있을까?’
정확한 선후관계를 따지면, 첫 만남에 이미 뇌리에 각인된 사람이 절망적인 순간 저를 구해 준 것이었다. 그것을 어떻게 잊는단 말인가?
구해 준 사람은 잊더라도, 구원받은 사람은 결코 잊지 못한다.
그는 후회했을 것이다. 일리야가 저를 이곳으로 떠밀어 주지 않았다면, 평생토록 이날을 곱씹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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