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작을 비틀어도 상관없는 사건이 있는가 하면, 별것 아닌 것 같지만 함부로 건드리면 돌이킬 수 없는 사건이 존재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건 두려움을 닮은, 다른 감정이다. 허리를 휘어잡은 뜨거운 손을 통해 전해지는 열렬한 욕망이 버거웠다.
때때로 결말은 이렇듯 불시에,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나온다.
매일 아침 눈을 뜰 때마다 공포 속에서 거울을 보았다. 갑자기 타인의 삶에 내동댕이쳐진 버거움을 의식하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나는 제삼자일 뿐이라고. 그 모든 게 아무렇지 않다고 자신을 세뇌해 왔지만, 사실은…….
내가 내 사람을 지킬 수 있도록, 그가 기꺼이 나의 방패와 검이 되어 주었음을 알기 때문에.
‘당신의 탐욕이 쌓은 죄업을 잊지 마. 당신은 내 어머니의 모든 것을 훔쳐 간 도적일 뿐이야.’ 그렇게 따지는 것처럼.
황제는 어딘가 괴람(乖濫)하고 상궤를 벗어난 느낌을 풍겼다.
‘차라리 이게 다 꿈이었으면 좋겠다.’ 식물인간 상태로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거라면, 제발 이 꿈에서 깨어났으면 좋겠다. 그럼 더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아도 될 텐데…….
"시계를 뒤집는 대신 ‘죽음’을 상쇄할 수 있는 모래시계를."
"그런데 시계를 뒤집으면, 원래는 비어 있었어야 할 윗부분에 모래가 떨어져 내려. 기억은 여전히 현생의 것인데, 영혼의 시간만 뒤집히는 거야."
반대로 원래 내 기억들은 가장 중요한 부분이 비어 있었다. 이름과 얼굴. ‘나’라는 사람을 정의할 수 있는 핵심이 전부. 아무리 떠올리려 해도 떠올릴 수 없었다.
"전생의 인격에 현생의 기억이 쏟아지면, 어떻게 될 거라고 생각해?"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게 최선이라는 걸 납득하고 있었다. 누군가는 힘든 순간 다정한 위로 한마디에 기대어 다시 일어서지만, 어떤 누군가는 백 마디 위로보다 칼날 같은 진실을 붙잡고 일어선다.
"그건 대답 안 할래." "왜?" "그래야 가끔 내 생각을 할 테니까."
이 몸에서 눈을 뜬 순간부터 늘 돌아가고 싶었다. 혼란 때문에 견딜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을 느낄 때에도, 일상을 보내는 순간에도.
선의와 인류애, 도덕심. 모두 훌륭한 가치들이다. 그러나 추상적인 개념만 가지고 현실에 부딪히면 그저 허울 좋은 얘기가 될 뿐이다. 저마다 추구하는 도덕의 기준치가 다른데, 어떻게 모순이 발생하지 않겠는가?
가치관의 차이겠지만, 적어도 범죄와 관련된 상황에 한해서는 무작정 인간의 선의를 믿기보다 인간의 악의를 의심하는 게 낫다.
고작 그것뿐이다. 그것만으로도 그는 죽고 싶어졌다. 이게 현실이 아니라면 지금 죽고 싶다고.
빛이 걸릴 듯 길게 드리운 속눈썹과 섬세하게 흘러내린 매끄러운 머리칼, 자신의 눈가에 닿은 옅은 분홍빛 엄지.
피차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넌 사이에, 보는 시선도 없는 곳에서 굳이 시간을 허비할 필요는 없다.
식물에는 뿌리가 있다. 나는 뿌리고, 일리야는 잎이다. 영혼이 같다는 건 그런 의미다. 내가 이를 진정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가와 별개로, 현실이 그렇다.
서로의 숨소리만이 들리고 초침이 반 바퀴쯤 회전했을 때, 나는 겨우 그 사실을 인정했다. 이 순간을 기점으로 우리의 관계가 비가역적으로 변하리란 사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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