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책] [BL] 연(緣) 1 [BL] 연(緣) 1
이윽고 지음 / 조은세상(북두)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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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상에 놓인 찻잔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청우(靑宇)의 시선이 소녀를 향했다. 달싹이던 입술이 조용히 벌어지며 무겁게 가라앉은 공기를 가른다.

천천히 눈을 뜬 청우가 황제의 얼굴을 바라본다. 쇠약한 얼굴이 강인하게 다물려 있었다. 꺼지기 직전, 새빨갛게 타오르는 불빛처럼 황제의 얼굴에 낯선 위압감이 흘러넘쳤다. 자식을 살리려는 부정(父情)이다.

"전하의 치세에 누가 되지 않도록 조용히 몸을 낮추고 살겠습니다."

건은 다시 한 번 청우를 일별했다. 담담한 얼굴에 여러 가지 감정이 스치는 것을 지켜본다. 난감함, 미안함, 자괴감, 그런 것들이 차례로 청우의 얼굴 위로 떠올랐다 사라진다. 건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은제국이든, 연국이든, 저는 그저 조용히 살고 싶을 뿐인데 그것이 참으로 어려웠다. 아무리 봐도 연국 왕의 눈 밖에 난 듯했기 때문이다. 남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손에 넣는 평범한 삶이, 왜 제게만 이리도 벅찬 것인지, 청우의 쓴웃음이 짙어졌다.

살아낼 것이다. 청우가 천천히 주먹을 그러쥐었다. 조용히 살아지지 않는다면 시끄럽게라도 살아야겠다, 어떻게 해서든 살아야겠다, 여물게 마음을 먹는다.

상소를 훑어보던 건이 손에 든 상소문을 거칠게 던지며 눈살을 찌푸렸다. 벌써 일곱 개째 같은 내용의 상소였다. 종묘사직(宗廟社稷)을 위해 하루 빨리 세자를 세우라는 내용의 상소

구실, 입속으로 그 말을 굴려보던 건의 눈매가 문득 가늘어졌다.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아니, 생각해 보니 꽤나 좋은 구실이 되어 줄 것 같았다

건의 시선이 청우의 얼굴에 멎었다. 단정한, 그러나 어딘지 모르게 시선을 끄는 얼굴이었다. 화려해서라기보다 오히려 반듯해서 시선이 가는 얼굴이다. 이 자를 끌어 들여도 될 것인가.

내가 원하는 삶.
청우는 건이 한 말을 무심코 중얼거려 보았다. 누군가에 의해 좌우되는 삶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삶이라고 했다. 그것은, 어쩐지 가슴이 두근거리는 말이었다. 한 번도 가져본 적이 없는 것을 눈앞에 두고 설레어 하는 어린아이처럼 청우의 볼이 발갛게 상기되었다. 술렁이는 심장을 애써 누르며, 청우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은 더 이상 숨죽인 채, 있는 듯 없는 듯 살아야 하는 곳이 아니었다. 이곳에서도 제국에서와 마찬가지로 몸을 낮추고, 조용히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저의 숙명이라 받아들였는데, 그렇지 않았다.

이곳은 제가 의도하여 무언가를 할 수 있고, 누군가를 도울 수 있으며, 원하는 것을 생각하고 말할 수 있는 곳이었다.

남들은 못 받아서 안달이 난 것들을, 제 발로 걷어차는 천치가 여기 있구나.

그런데 그 순간, 아무 이유 없이 문득 말갛게 웃는 얼굴이 떠올랐다. 물색없는 동그란 눈이 선명하게 다가왔다.

갈팡질팡 하는 생각 사이에서 청우의 속내를 가늠하던 건이 일순 픽, 하고 헛웃음을 터뜨렸다. 어느 하나 기우는 것 없이 팽팽하다 생각했던 저울이, 실은 언젠가부터 ‘거짓이 아니다’ 쪽으로 기울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챈 탓이다.

목숨 부지하는 것이 바빴을 뿐, 백성과 신료들의 힐난에서는 자유로웠던 황자로서의 삶과는 근본부터가 다른 것이었다. 비가 많이 오는 것도 왕의 탓이오, 날이 가무는 것도 왕의 탓이다.

청우는 비의 자리가 갖는 무게감을 떠올리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긴 밤이 될 것 같았다. 제가 연국의 비라는 사실을 처음으로 실감하는 밤이었다.

어느새 뜰로 내려선 청우가 하얗게 부서지는 햇살 아래를 아이와 함께 걸었다. 바람이 따뜻합니다, 기분 좋은 혼잣말이 봄바람에 섞여 들었다. 아이의 작은 걸음에 맞추어 청우의 걸음도 작아졌다.

"먹을 수 없고, 스스로를 지킬 수 없다 하여도, 그냥 저 곳에 가만히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습니까. 저 꽃을 보며, 누군가는 아름답다 감탄할 것이고, 또 다른 누군가는 위로를 받을 것입니다."

산도, 나무도, 풀도 모두 그대로인데, 어둠과 함께 내려앉은 무거운 적막 탓에 마치 소란스러운 낮과는 전혀 다른 세상인 듯했다. 아무리 소리를 질러도 모양은 그대로 본뜰지언정, 고요한 외침만이 가득한 면경(面鏡) 속 세상처럼, 온 세상에 팽팽한 밤이 내려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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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BL] 연(緣) 1 [BL] 연(緣) 1
이윽고 지음 / 조은세상(북두)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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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상에 놓인 찻잔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청우(靑宇)의 시선이 소녀를 향했다. 달싹이던 입술이 조용히 벌어지며 무겁게 가라앉은 공기를 가른다.

천천히 눈을 뜬 청우가 황제의 얼굴을 바라본다. 쇠약한 얼굴이 강인하게 다물려 있었다. 꺼지기 직전, 새빨갛게 타오르는 불빛처럼 황제의 얼굴에 낯선 위압감이 흘러넘쳤다. 자식을 살리려는 부정(父情)이다.

"전하의 치세에 누가 되지 않도록 조용히 몸을 낮추고 살겠습니다."

건은 다시 한 번 청우를 일별했다. 담담한 얼굴에 여러 가지 감정이 스치는 것을 지켜본다. 난감함, 미안함, 자괴감, 그런 것들이 차례로 청우의 얼굴 위로 떠올랐다 사라진다. 건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은제국이든, 연국이든, 저는 그저 조용히 살고 싶을 뿐인데 그것이 참으로 어려웠다. 아무리 봐도 연국 왕의 눈 밖에 난 듯했기 때문이다. 남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손에 넣는 평범한 삶이, 왜 제게만 이리도 벅찬 것인지, 청우의 쓴웃음이 짙어졌다.

살아낼 것이다. 청우가 천천히 주먹을 그러쥐었다. 조용히 살아지지 않는다면 시끄럽게라도 살아야겠다, 어떻게 해서든 살아야겠다, 여물게 마음을 먹는다.

상소를 훑어보던 건이 손에 든 상소문을 거칠게 던지며 눈살을 찌푸렸다. 벌써 일곱 개째 같은 내용의 상소였다. 종묘사직(宗廟社稷)을 위해 하루 빨리 세자를 세우라는 내용의 상소

구실, 입속으로 그 말을 굴려보던 건의 눈매가 문득 가늘어졌다.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아니, 생각해 보니 꽤나 좋은 구실이 되어 줄 것 같았다

건의 시선이 청우의 얼굴에 멎었다. 단정한, 그러나 어딘지 모르게 시선을 끄는 얼굴이었다. 화려해서라기보다 오히려 반듯해서 시선이 가는 얼굴이다. 이 자를 끌어 들여도 될 것인가.

내가 원하는 삶.
청우는 건이 한 말을 무심코 중얼거려 보았다. 누군가에 의해 좌우되는 삶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삶이라고 했다. 그것은, 어쩐지 가슴이 두근거리는 말이었다. 한 번도 가져본 적이 없는 것을 눈앞에 두고 설레어 하는 어린아이처럼 청우의 볼이 발갛게 상기되었다. 술렁이는 심장을 애써 누르며, 청우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은 더 이상 숨죽인 채, 있는 듯 없는 듯 살아야 하는 곳이 아니었다. 이곳에서도 제국에서와 마찬가지로 몸을 낮추고, 조용히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저의 숙명이라 받아들였는데, 그렇지 않았다.

이곳은 제가 의도하여 무언가를 할 수 있고, 누군가를 도울 수 있으며, 원하는 것을 생각하고 말할 수 있는 곳이었다.

남들은 못 받아서 안달이 난 것들을, 제 발로 걷어차는 천치가 여기 있구나.

그런데 그 순간, 아무 이유 없이 문득 말갛게 웃는 얼굴이 떠올랐다. 물색없는 동그란 눈이 선명하게 다가왔다.

갈팡질팡 하는 생각 사이에서 청우의 속내를 가늠하던 건이 일순 픽, 하고 헛웃음을 터뜨렸다. 어느 하나 기우는 것 없이 팽팽하다 생각했던 저울이, 실은 언젠가부터 ‘거짓이 아니다’ 쪽으로 기울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챈 탓이다.

목숨 부지하는 것이 바빴을 뿐, 백성과 신료들의 힐난에서는 자유로웠던 황자로서의 삶과는 근본부터가 다른 것이었다. 비가 많이 오는 것도 왕의 탓이오, 날이 가무는 것도 왕의 탓이다.

청우는 비의 자리가 갖는 무게감을 떠올리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긴 밤이 될 것 같았다. 제가 연국의 비라는 사실을 처음으로 실감하는 밤이었다.

어느새 뜰로 내려선 청우가 하얗게 부서지는 햇살 아래를 아이와 함께 걸었다. 바람이 따뜻합니다, 기분 좋은 혼잣말이 봄바람에 섞여 들었다. 아이의 작은 걸음에 맞추어 청우의 걸음도 작아졌다.

"먹을 수 없고, 스스로를 지킬 수 없다 하여도, 그냥 저 곳에 가만히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습니까. 저 꽃을 보며, 누군가는 아름답다 감탄할 것이고, 또 다른 누군가는 위로를 받을 것입니다."

산도, 나무도, 풀도 모두 그대로인데, 어둠과 함께 내려앉은 무거운 적막 탓에 마치 소란스러운 낮과는 전혀 다른 세상인 듯했다. 아무리 소리를 질러도 모양은 그대로 본뜰지언정, 고요한 외침만이 가득한 면경(面鏡) 속 세상처럼, 온 세상에 팽팽한 밤이 내려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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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천히 눈을 뜬 청우가 황제의 얼굴을 바라본다. 쇠약한 얼굴이 강인하게 다물려 있었다. 꺼지기 직전, 새빨갛게 타오르는 불빛처럼 황제의 얼굴에 낯선 위압감이 흘러넘쳤다. 자식을 살리려는 부정(父情)이다.

"전하의 치세에 누가 되지 않도록 조용히 몸을 낮추고 살겠습니다."

건은 다시 한 번 청우를 일별했다. 담담한 얼굴에 여러 가지 감정이 스치는 것을 지켜본다. 난감함, 미안함, 자괴감, 그런 것들이 차례로 청우의 얼굴 위로 떠올랐다 사라진다. 건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은제국이든, 연국이든, 저는 그저 조용히 살고 싶을 뿐인데 그것이 참으로 어려웠다. 아무리 봐도 연국 왕의 눈 밖에 난 듯했기 때문이다. 남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손에 넣는 평범한 삶이, 왜 제게만 이리도 벅찬 것인지, 청우의 쓴웃음이 짙어졌다.

살아낼 것이다. 청우가 천천히 주먹을 그러쥐었다. 조용히 살아지지 않는다면 시끄럽게라도 살아야겠다, 어떻게 해서든 살아야겠다, 여물게 마음을 먹는다.

상소를 훑어보던 건이 손에 든 상소문을 거칠게 던지며 눈살을 찌푸렸다. 벌써 일곱 개째 같은 내용의 상소였다. 종묘사직(宗廟社稷)을 위해 하루 빨리 세자를 세우라는 내용의 상소

구실, 입속으로 그 말을 굴려보던 건의 눈매가 문득 가늘어졌다.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아니, 생각해 보니 꽤나 좋은 구실이 되어 줄 것 같았다

건의 시선이 청우의 얼굴에 멎었다. 단정한, 그러나 어딘지 모르게 시선을 끄는 얼굴이었다. 화려해서라기보다 오히려 반듯해서 시선이 가는 얼굴이다. 이 자를 끌어 들여도 될 것인가.

내가 원하는 삶.
청우는 건이 한 말을 무심코 중얼거려 보았다. 누군가에 의해 좌우되는 삶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삶이라고 했다. 그것은, 어쩐지 가슴이 두근거리는 말이었다. 한 번도 가져본 적이 없는 것을 눈앞에 두고 설레어 하는 어린아이처럼 청우의 볼이 발갛게 상기되었다. 술렁이는 심장을 애써 누르며, 청우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은 더 이상 숨죽인 채, 있는 듯 없는 듯 살아야 하는 곳이 아니었다. 이곳에서도 제국에서와 마찬가지로 몸을 낮추고, 조용히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저의 숙명이라 받아들였는데, 그렇지 않았다.

이곳은 제가 의도하여 무언가를 할 수 있고, 누군가를 도울 수 있으며, 원하는 것을 생각하고 말할 수 있는 곳이었다.

남들은 못 받아서 안달이 난 것들을, 제 발로 걷어차는 천치가 여기 있구나.

그런데 그 순간, 아무 이유 없이 문득 말갛게 웃는 얼굴이 떠올랐다. 물색없는 동그란 눈이 선명하게 다가왔다.

갈팡질팡 하는 생각 사이에서 청우의 속내를 가늠하던 건이 일순 픽, 하고 헛웃음을 터뜨렸다. 어느 하나 기우는 것 없이 팽팽하다 생각했던 저울이, 실은 언젠가부터 ‘거짓이 아니다’ 쪽으로 기울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챈 탓이다.

목숨 부지하는 것이 바빴을 뿐, 백성과 신료들의 힐난에서는 자유로웠던 황자로서의 삶과는 근본부터가 다른 것이었다. 비가 많이 오는 것도 왕의 탓이오, 날이 가무는 것도 왕의 탓이다.

청우는 비의 자리가 갖는 무게감을 떠올리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긴 밤이 될 것 같았다. 제가 연국의 비라는 사실을 처음으로 실감하는 밤이었다.

어느새 뜰로 내려선 청우가 하얗게 부서지는 햇살 아래를 아이와 함께 걸었다. 바람이 따뜻합니다, 기분 좋은 혼잣말이 봄바람에 섞여 들었다. 아이의 작은 걸음에 맞추어 청우의 걸음도 작아졌다.

"먹을 수 없고, 스스로를 지킬 수 없다 하여도, 그냥 저 곳에 가만히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습니까. 저 꽃을 보며, 누군가는 아름답다 감탄할 것이고, 또 다른 누군가는 위로를 받을 것입니다."

산도, 나무도, 풀도 모두 그대로인데, 어둠과 함께 내려앉은 무거운 적막 탓에 마치 소란스러운 낮과는 전혀 다른 세상인 듯했다. 아무리 소리를 질러도 모양은 그대로 본뜰지언정, 고요한 외침만이 가득한 면경(面鏡) 속 세상처럼, 온 세상에 팽팽한 밤이 내려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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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천히 눈을 뜬 청우가 황제의 얼굴을 바라본다. 쇠약한 얼굴이 강인하게 다물려 있었다. 꺼지기 직전, 새빨갛게 타오르는 불빛처럼 황제의 얼굴에 낯선 위압감이 흘러넘쳤다. 자식을 살리려는 부정(父情)이다.

"전하의 치세에 누가 되지 않도록 조용히 몸을 낮추고 살겠습니다."

건은 다시 한 번 청우를 일별했다. 담담한 얼굴에 여러 가지 감정이 스치는 것을 지켜본다. 난감함, 미안함, 자괴감, 그런 것들이 차례로 청우의 얼굴 위로 떠올랐다 사라진다. 건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은제국이든, 연국이든, 저는 그저 조용히 살고 싶을 뿐인데 그것이 참으로 어려웠다. 아무리 봐도 연국 왕의 눈 밖에 난 듯했기 때문이다. 남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손에 넣는 평범한 삶이, 왜 제게만 이리도 벅찬 것인지, 청우의 쓴웃음이 짙어졌다.

살아낼 것이다. 청우가 천천히 주먹을 그러쥐었다. 조용히 살아지지 않는다면 시끄럽게라도 살아야겠다, 어떻게 해서든 살아야겠다, 여물게 마음을 먹는다.

상소를 훑어보던 건이 손에 든 상소문을 거칠게 던지며 눈살을 찌푸렸다. 벌써 일곱 개째 같은 내용의 상소였다. 종묘사직(宗廟社稷)을 위해 하루 빨리 세자를 세우라는 내용의 상소

구실, 입속으로 그 말을 굴려보던 건의 눈매가 문득 가늘어졌다.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아니, 생각해 보니 꽤나 좋은 구실이 되어 줄 것 같았다

건의 시선이 청우의 얼굴에 멎었다. 단정한, 그러나 어딘지 모르게 시선을 끄는 얼굴이었다. 화려해서라기보다 오히려 반듯해서 시선이 가는 얼굴이다. 이 자를 끌어 들여도 될 것인가.

내가 원하는 삶.
청우는 건이 한 말을 무심코 중얼거려 보았다. 누군가에 의해 좌우되는 삶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삶이라고 했다. 그것은, 어쩐지 가슴이 두근거리는 말이었다. 한 번도 가져본 적이 없는 것을 눈앞에 두고 설레어 하는 어린아이처럼 청우의 볼이 발갛게 상기되었다. 술렁이는 심장을 애써 누르며, 청우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은 더 이상 숨죽인 채, 있는 듯 없는 듯 살아야 하는 곳이 아니었다. 이곳에서도 제국에서와 마찬가지로 몸을 낮추고, 조용히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저의 숙명이라 받아들였는데, 그렇지 않았다.

이곳은 제가 의도하여 무언가를 할 수 있고, 누군가를 도울 수 있으며, 원하는 것을 생각하고 말할 수 있는 곳이었다.

남들은 못 받아서 안달이 난 것들을, 제 발로 걷어차는 천치가 여기 있구나.

그런데 그 순간, 아무 이유 없이 문득 말갛게 웃는 얼굴이 떠올랐다. 물색없는 동그란 눈이 선명하게 다가왔다.

갈팡질팡 하는 생각 사이에서 청우의 속내를 가늠하던 건이 일순 픽, 하고 헛웃음을 터뜨렸다. 어느 하나 기우는 것 없이 팽팽하다 생각했던 저울이, 실은 언젠가부터 ‘거짓이 아니다’ 쪽으로 기울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챈 탓이다.

목숨 부지하는 것이 바빴을 뿐, 백성과 신료들의 힐난에서는 자유로웠던 황자로서의 삶과는 근본부터가 다른 것이었다. 비가 많이 오는 것도 왕의 탓이오, 날이 가무는 것도 왕의 탓이다.

청우는 비의 자리가 갖는 무게감을 떠올리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긴 밤이 될 것 같았다. 제가 연국의 비라는 사실을 처음으로 실감하는 밤이었다.

어느새 뜰로 내려선 청우가 하얗게 부서지는 햇살 아래를 아이와 함께 걸었다. 바람이 따뜻합니다, 기분 좋은 혼잣말이 봄바람에 섞여 들었다. 아이의 작은 걸음에 맞추어 청우의 걸음도 작아졌다.

"먹을 수 없고, 스스로를 지킬 수 없다 하여도, 그냥 저 곳에 가만히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습니까. 저 꽃을 보며, 누군가는 아름답다 감탄할 것이고, 또 다른 누군가는 위로를 받을 것입니다."

산도, 나무도, 풀도 모두 그대로인데, 어둠과 함께 내려앉은 무거운 적막 탓에 마치 소란스러운 낮과는 전혀 다른 세상인 듯했다. 아무리 소리를 질러도 모양은 그대로 본뜰지언정, 고요한 외침만이 가득한 면경(面鏡) 속 세상처럼, 온 세상에 팽팽한 밤이 내려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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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BL] 낙화난상지(落花難上枝) (외전증보판) 1 [BL] 낙화난상지(落花難上枝) (외전증보판) 1
앰버 지음 / 비하인드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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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움직이자 박력이 생기고 주변에 기운이 펄펄 날렸다. 그는 생명과 기운으로 가득 찬 화신이었다. 그 생명력이 얼마나 강한지 어깨 위로 아지랑이가 돋아나는 환상이 보일 정도였다.

우희는 이사하의 말을 끊었다. 답지 않게 그의 얼굴 위로 땀 한 방울이 흘러내렸다. 우희는 이제 이사하를 노려보았다. 아까처럼 끓는 기름 같은 눈빛이 아니라, 좀 얄밉다는 듯이.

붉어지고 붉어지고 붉어지고……. 잘 익은 과일처럼 붉어져 얼굴이 터질 것 같았다. 귀까지 분홍이라 보는 이의 눈이 다 시었다.

그 말에 이사하가 우희를 올려다보았다. 붉은 뺨이 너무 꽃이라 우희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뺨 입술 귀 콧잔등까지 붉으니 사람이 어찌 이럴까.

파르르 떨리는 눈꼬리에는 눈물이 맺혀 있어 우희는 잠시 넋을 잃었다.

"악용이 두렵다고 시도조차 하지 않으면 고통받는 것은 전하의 백성이옵니다."

지나치게 옳은 말만 하니 주위에 사람이 없어 오히려 좋다. 너무 맑은 물이라 정쟁에 끼지조차 못하니 왕이 닦아 세상을 보는 창구로 쓰리라.

이사하는 보석이었다. 그 보석으로 손에 쥐는 찻잔을 만들건 빛을 밝힐 촛대를 만들건 그 가치는 변하지 않는다. 오히려 세공할수록 더욱 귀해진다.

창밖에 복사꽃 피어 새 지저귀고. 화창하게 날이 개어 하늬바람 불어오는 아침. 주군과 신하는 더 이상 말이 필요치 않았다. 주군이 말하면 신하가 알아듣고, 신하의 생각을 주군이 이해한다.

짐승이 주인을 문다. 짐승이 주인을 물어 죽이려 한다. 세상에, 그 점괘가 진짜였구나.

법사의 말은 독이 되어 태후의 귀에 고였다. 법사가 그녀의 독에 검은 독이 줄줄 흐르도록 독을 부었다.

이사하는 우희를 불렀다. 단호하게 다물린 입술과 굳은 표정 위로 보일락말락 한 뭔가가 있었다. 그건 흥분, 노여움, 고통, 불안.
불안. 그래, 그것은 불안이었다.

어떤 무리에서도 이사하는 겉돌았다. 정쟁에 관심이 없고, 사익보다 국익을 생각하는 자는 두루두루 불편한 존재인 것이다.

평화로운 시대였다. 영원히 계속되지 않을 좋은 날임을 알지만 당장은 평화로웠다. 태후를 제외하면 위협도 없었고 동맹은 강건했다.

누군가 말을 걸어주길 바라지만 겉으로 드러나는 표정이 그래서야 아무도 다가가지 않는다. 사실은 이렇게 여린데. 이렇게 사랑스러운데.

저기서 범나비가 쌍가락지처럼 붙어 날아갔다. 그 위로 눈처럼 꽃잎이 난분분했다. 햇빛의 온도가 포근했고 하늘이 맑아 청량했다.

이사하는 가슴이 뛰었다. 그의 부채 속에 난초가 숨어 있었다. 난초로 부친 바람에서는 향기가 흘렀다.

가진 것 없는 일개 무관 나부랭이면서 여유가 넘쳤다.
두려운 것은 하나도 없는, 발밑이 좁아서 견딜 수가 없는 한 마리 화룡.
숫돌에 갈아놓은 검날 위로 범나비 날아든 얼굴을 한 이.

이사하는 깊은 실망감을 느꼈다. 친애하는 친우가 자신을 이해하지 못함에 아팠다.
늦게 얻은 친우라 내 눈이 멀어있어 너 역시 그저 그런 무인임을 이제야 알았다.

어차피 감정은 상했다. 깨진 도자기를 붙이려 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차라리 질그릇을 다시 만드는 편이 낫다.

대답을 듣지는 못했으나 이사하는 느꼈다. 그녀의 몸에서 독기가 빠져나갔음을. 처음에 만났을 때처럼 질주하던 분노가 어느 정도 갈무리 됐음을.

귀환하는 길에 이사하는 탄식했다. 세상 모든 책을 읽어 사단칠정(四端七情, 인간의 4가지 마음과 7가지 감정)을 아무리 공부한들, 사람의 맘은 알 수가 없구나.

이렇듯 차이 나는 병력에 경험 없는 병사를 이끌고 그대 어떻게 이길 것인가.

내가 내 숨소리에 질식할 것 같은 날에는 머리를 높이 들어 달빛을 보리다. 그 빛으로 눈을 씻으며 오늘의 약속을 떠올리리다.

언제나 당당하던 친우는 그렇게 속삭였다. 임무를 실패해 동맹은커녕 선수 칠 시기를 빼앗겼음에도 이사하를 탓하지 않았다.

비통한 울음소리가 산천을 흐르고. 바람이 불 때마다 화곡을 대신해 죽은 자의 이름이 우수수 떨어지는 나라.

처음부터 만나지 않았다면 모를까, 이미 만나버렸으니 다시는 이별하지 못하리.

돌아갈 수도 없고 곁에 있을 수도 없다. 남은 것은 하나. 죽음뿐.

한 번 피어보지도 못한 나이에 적군의 장수에게 맘을 빼앗겨, 조국도 민족도 버리고 이제… 여기서 죽는다.

새가 울었고, 마지막 남은 꽃잎이 흔들렸고, 가지에 매달린 설익은 열매들이 햇빛을 받아 유리알처럼 반짝거렸다.

더 이상 목소리에 놀리는 기색은 없었다. 낮디낮은 목소리로 다시 한 번 말하기를, 정말로 보고 싶었다오…….

군마가 일으킨 먼지 구름이 부옇게 밀려와 햇빛 속에서 춤추고 있었다. 친우는 목숨을 걸고 전쟁하러 떠나며 무운을 빌어 달라 말했다. 어떤 원망도 없이, 그저 무운을 빌어주길 바랐다.

3년이었다. 장장 3년간 전장의 소식을 받아볼 때마다 그의 생사를 걱정했다.
동백이 필 때마다 그를 생각했고, 동백이 지면 쓸쓸해 했다.

완전히 들판을 벗어나기 전 뒤를 돌아보니 우희가 여전히 그 자리에 서서 배웅하고 있었다.
예전에도 보았던. 변함없는 친우의 얼굴이라 안심이 되었다.

웃는 친구의 얼굴 위로 누가 종야등을 드리웠는가. 아니면 갑자기 달이 구름을 벗었는가. 여전히 어두운 골목길에 빛이 비치니 이사하는 알 수가 없었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그러고 보니 전쟁터로 떠나기 전에 그가 상을 달라 했었다. 동백꽃 피는 날에 돌아와 새로 해준 옷을 입고 꽃구경을 가자 했었다.

사랑스런 자식. 너무도 귀한 자식. 저승꽃 핀 나이에 첫아들을 얻었으니 얼마나 귀할까. 눈에 넣어도 안 아프단 말을 왕은 이 아이를 보면서 알게 되었다.

그는 오래전 딸의 복수를 위해 수만의 목숨을 빼앗고 결국 망국의 길로 접어든 녕시의 왕을 생각했다. 왕은 핏줄을 위해 나라의 명운을 걸었다

아래에서 올라오는 힘은 세상을 전복시키는 힘이 있었다. 가장 밑바닥에서부터 주먹을 쥐고 기어 올라온 것에는 세상의 논리가 통하지 않았다. 웃전들이 만들어놓은 법과 질서가 순식간에 뒤집어지는 것이다.

세상은 평화로운데 왕의 목을 쳐야 한다. 명분이 없으니 휘몰아쳐서 일을 치러버려야 했다.
원래 명분이란 승리한 뒤에 만들어지는 것이었다. 폭군(暴君)이니 암군(暗君)이니 혼군(昏君)이니 하는 것들은 모두 전쟁에 진 왕들의 새로운 이름이 되는 것이다.

한쪽이 견딜 수 없을 때까지 버티다 승리한들 무엇할까. 이미 군마가 휩쓸고 간 곳에는 도시의 잔해만 남았으니. 전쟁으로 얻는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너를 이해할 수 없어 나는 은둔하기를 택했다. 너와 싸우지도 않고 너를 용서하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완전히 버리지도 못해서 나는 은둔했다. 그렇게 10년이 흘렀고, 그 후에도 변하는 것이 없자 나는 도망쳐버렸다.

이해할 수 없는 증오를 닮은 감정이 맹렬하게 타올랐다. 실체가 없는 불이 몸을 태우고, 불길한 어둠이 땅바닥을 짚고 기어와 막사 안에 번졌다.

인내심에 있어서만큼은 누구보다 강하다 생각했거늘……. 스스로를 너무 믿었던 것일까. 지난 50년간의 인내가 광기가 되어 올라오려 했다. 평정심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

마주하게 된 적의 얼굴은 그들과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같은 나라, 같은 백성, 같은 얼굴이었다.

사방에 죽음이 만연했다. 그러자 집 안의 기왓장 속에서, 주춧돌 아래서 잠들어있던 미신이 생명을 얻고 활활하게 살아나기 시작했다.

아무리 높은 절벽에 성을 쌓고, 그 성벽이 아무리 단단하대도, 결국 그 성 안에는 사람이 산다. 그것이 늘 문제인 것이다.

세상의 어떤 짐승도 낼 수 없는 포효였다. 화룡의 고함 소리는 우렁우렁 퍼져나가 사람들 사이로 흘러들었다가, 말라붙은 우물을 통해 땅 밑으로 내려간 뒤, 지하로까지 울려 퍼졌다. 컴컴한 지하로에 짐승이 외치는 소리가 종을 치는 것처럼 메아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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