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가장 먼저 든 감정은 두려움이었다. 미지의 상황에 던져진 것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외국인에 대한 두려움. 나 아마 영어 잘 못 할 텐데? 아니, 차라리 영어면 낫지 들어보지도 못한 나라 말을 하거나 하면 어쩌지.
이상의 아들. 맹약의 군주. 가장 빛나는 왕. 그 말이 누구를 가리키는지 나는 잘 알고 있었다
나는 세상에는 딜레마에 빠질 수밖에 없는 일이 있다고 생각한다. 동화를 빌려와 말하자면 땅에서 금 절구를 발견한 농부의 경우가 그렇다. 고백하자면 어릴 때 읽었던 것이 아니라 다 커서 읽은 책이다.
이 세계엔 한번 결심한 일은 끝장을 보라는 법칙이라도 있는 모양이었다.
두 번. 두 번이나 눈이 마주쳤다. 내가 그를 보자마자. 그건. 그가 계속 나를 보고 있었단 뜻이었다.
불편하다. 이 화제는. 이 분위기는. 이담이 무슨 뜻으로 그런 말을 했는지 알고 싶기도 했지만 모르고 싶기도 했다
기억은 안 나도 촉이란 게 있거든. 그럴 것 같다고. 무엇을 하건 어설프고 못난 나와는 정반대였겠지, 이담 저 녀석은. 그래서 나는 항상 저 녀석을 부러워하고 질투하고 괜히 옆에 있으면 비교가 될까 싶어서 멀어지고 싶어하고.
헤이다르가 캐스터에게 맹세한 충성이 과연 순수한 것이었을까? 질투나 분노는 정말 없었을까?
나는 어째서 이렇게 못난 걸까. 내가 만든 이곳에서조차, 나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
이담은 그런 헤이다르를 말없이 노려보고 있었다. 나는 그 사이에서 어찌할 줄을 몰랐다. 이담의 굳어진 옆얼굴을 보니 마음이 절로 무거워졌다. 그러다 나는 이담의 손가락 끝이 창백하게 변한 것을 발견했다. 얼음장 같은 손. 심장이 쿵 작고 묵직한 소리를 내며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내가 만든 이야기는 정치극이라기 보다는 영웅담에 가깝다. 누구에게나 사랑받고 존경받을 만한 캐스터라는 남자가 자신의 힘으로 악당을 쓰러뜨리고 동료를 얻고 이름을 알리고. 그러다 결국 모두의 축복 속에서 가장 빛나는 자리에 오르는.
그 말은 그가 그만큼 캐스터를 좋아한다는 걸까. 그렇다면 속 모를 헤이다르보다는 에닉 쪽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내가 그렇게 못을 박아도. 마치 열쇠를 잃어버린 잠긴 문처럼, 그는 완고하게 입을 열지 않았다.
얼굴도 저렇게 못 알아보게 변하고 이름까지 달라지면…. 다음에 나올 때는 정말 다른 사람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가 되어 있는 게 아닐까.
아니, 넌 절대로 몰라. 어설프게 아는 척하지 말고 위로하는 척도 하지 말고 그냥 꺼져줬으면. 그 애는 애꿎은 빨대만 꾹꾹 씹으면서 생각했다.
악한 것은, 나쁜 것은, 차가운 것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아 그 애는 괜히 찜찜해졌다. 말하지 말걸.
지금 눈을 마주치면 자신이 하는 생각을 소년에게 들킬 것만 같았다. 아니, 사실 생각을 들키는 건 상관없었다. 그저 혹시나 소년의 눈에 그딴 생각이나 하는 자신이 초라하게 보일까 봐 그게 싫었다.
"저는. …사람마다 제일의 가치는 다릅니다만, 아마 기사에게 있어 제일의 가치는 충성의 맹세일 것입니다. 왕을 우선으로 생각하고 왕을 우선으로 하여 행동하며 왕을 위하여 모든 것을 바치는. 그것이 기사로서의 덕목이라 한다면 저는 끝의 끝까지, 적어도 마음으로는 충성의 맹세를 어긴 적이 없습니다."
흔한 일이다, 라는 말은 얼마나 황홀한 말인가. 내가 이상한 게 아니라는 말이니까.
사람이란 게 참 간사하다. 나는 헤이다르가 악마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내 귀에 단 소리만 들려주는 이가 있다면 그는 천사가 아닌 악마일 거라고, 누군가 말하지 않았던가.
불러도 그는 내 쪽을 돌아보지도 않고 대답했다. 나는 미안해졌고, 답답해졌고, …동시에 쓸쓸해졌다.
가시가 박힌 그 손가락의 모습이 그 애의 눈에도 또렷하게 박혔다. 그 애는 또 다른 손이 다가와 작은 아이의 손을 받쳐 드는 모습을, 그 손이 가시를 빼내는 모습을, 작은 상처에 약을 바르고 알록달록한 캐릭터 밴드를 붙여주는 모습을 말없이 보고 있었다.
그 애는 얼굴을 들었다. 그 애로부터 작은 아이를 지키듯이 선 소년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작은 아이는 이전에 꿨던 꿈에 나왔던 얼굴이 흰 동급생의 어린 시절이었다. 그리고 그 작은 아이의 앞에 서서 그 애의, ‘자신’의 시선으로부터 아이를 가리고 있는 소년은. 이담이었다. 그래서, 사라지는 건 누구?
하지만 나는 정확히 ‘뭘’ 두려워하는 거지? 내가 이상해지는 거? 그럴 수도 있다. 그건 누구나 무서워할 만한 일이잖아.
어쩌면 더 불쾌한 기억을 떠올리게 될지도 모른다. 입버릇처럼 똑똑하지 않다, 둔한 편이다, 멍하니 있는 것이 버릇이다 말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진짜 바보인 건 아니다.
살이 얼어 있는데 갑자기 더운 것이 닿으면 아프구나. 나는 그걸 이제야 알았다.
그저 나는 내가 조금 혐오스러웠다. 얼어있던 살이 녹자 아픈 것 대신 따뜻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혹시 나는 안기고 싶었나? 누군가 안아줬으면 했나? 내겐 아무도 그렇게 해주는 사람이 없었던 것 같다. 그럼 나는 누군가를 안아주고 싶었나? 누가 먼저건 따뜻해질 수 있으니까. 안아주고 싶었던 사람은 있었나? 있었을까? 있었으면 왜 해주지 않았지? 왜? 내 주위엔 누가 있었지?
어이없어할까. 저런 머저리는 처음 봤다고 할까. 숙맥이라고 생각할까. 아니면 찌질하다고? 무엇이건 좋은 감정은 가지기 힘들겠지. 그가 나를 비웃어도 나는 할 말이 없었다. 그냥 나는 이곳을 벗어나고 싶었다. 여기서 일어났던 일을 ‘없었던’ 것으로 하고 싶었다. 그 대가로 받아야 하는 게 비웃음이라고 해도. 나는…
"어떤 일이 생긴다고 해도 한 번 일어났던 일을 없었던 것으로는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나는 알고 싶지 않았던 사실을 새삼스럽게 알아차렸다. 처음부터 헤이다르는 나를 원래부터 알고 있던 사람처럼 대했었다는 사실을. 캐스터일 때에도, 그리고 지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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