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책] [BL] 활주로 1 [BL] 활주로 1
해저500M / 블릿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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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마신 건지, 누구랑 마신 건지 알 수도 없다. 어쨌든 저 혼자 고주망태로 취해 나를 불러낸다는 사실이다.

일말의 양심이나 죄책감은 그에게도 있을 것이다. 늦은 시간에 저 혼자 술을 마시고, 내일 학교에 가야 되는 나에게 전화를 건 것에 대해서 말이다.

녀석이 흘려보내는 목소리는 딱 지금의 계절과 같다. 쓸쓸하고 외로운 늦가을.

아무리 그가 내 울타리 안의 사람이라고 한들, 그럼에도 나는 이욱찬에게 한없이 약했다.

그냥… 늘 이렇게 살아갈 거라고 생각했다. 이욱찬은 이욱찬 나름대로, 나는 그의 옆에서, 때때로 쓰레기통 역할을 해 주면서.

나는 사춘기가 시작되면서 일깨워 온 감정을 밟으며 종착지로 향하고 있었다.

그 종착점이 동정인지, 애정인지 정확하게 알지 못했다. 어쩌면 둘 다일 수도 있고.

일말의 죄책감이 남아 있었는데 이욱찬이 거기에 기름을 부었다. 불이 타올랐다.

성격에 높낮이가 없다. 그리고 다정하고… 나쁜 녀석은 아니다.

관계라는 게 마냥 웃고 떠들고, 행복하다고는 할 수 없다는 걸 아는데 그 정도로 깊게 사귀고 인연을 이어 가는 것도 극소수였다.

나에게 잘해 주고, 나를 특별하게 대해 주던 정현우가… 왜 그런 말을 던지고 간 걸까.

그는 외로움을 추위라는 무기로 감춘 듯한 목소리를 냈다.

익숙한 것은 무섭다. 늘 보아 오고, 불러 왔던 것들. 사라져도 잔상은 꽤 오랫동안 남아 있었다. 아마도 이욱찬에게 내가 그런 존재일 거다.

우리는 서로의 상처와 과거를 건드려도 되었다. 이욱찬 부모님, 형, 누나… 사실 제대로 된 사람이 없다는 것을 나도 잘 알고 있지 않던가.

사람 마음이란 게 그러하다. 마음대로 조절할 수가 없다. 나는 이욱찬이 나쁜 새끼라는 걸 알지만, 아주 예전부터 알아 왔지만 그렇다.

눈에 보이면 짜증 나고, 그렇지만 대화를 나누고 싶고, 안 보이면 걱정된다.

정말 걱정되어서 묻는 게 아니라는 건 안다. 사람들은 왜 이렇게 타인의 불행을 즐기는 걸까. 단지 유흥거리의 일부라고 생각하는 걸까. 당하는 사람의 사정은 생각지도 못하고.

인정하고 인정해야만 하는 나의 첫사랑은 결국 이 겨울바람과 하등 다를 게 없었다. 고여 있다고 하기도 민망할 정도로 빠르게 스쳐 지나갈 거다. 그리고 그 겨울바람이 사라진 자리에는 우정만이 남아 있겠지.

술로 모든 걸 비운다. 모든 게 다 술 때문에 벌어졌던 건데, 아빠의 폭력적인 성향도 술 때문에 빛을 보였고….

내 마음을 빼앗긴 것도 아닌데, 고작 라면 한 젓가락뿐인데. 자존심이 상했다.

그냥 묵묵히 살아가겠지. 제대로 대화조차 해 본 적 없는 형을 가장 깊은 곳에 묻어 두고 말이다. 초등학생 때, 부모님도 없고 누나도 방황해 제대로 들어온 적 없던 집에 이욱찬을 버리고 그대로 나가 버린 형을 말이다.

벼랑 끝에 몰리면 어떤 사람이든 은인처럼 보이고, 의지하게 될 수밖에 없듯이 두 사람도 그랬다. 그나마 가족이라고 할 만한 상대가 두 사람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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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마신 건지, 누구랑 마신 건지 알 수도 없다. 어쨌든 저 혼자 고주망태로 취해 나를 불러낸다는 사실이다.

일말의 양심이나 죄책감은 그에게도 있을 것이다. 늦은 시간에 저 혼자 술을 마시고, 내일 학교에 가야 되는 나에게 전화를 건 것에 대해서 말이다.

녀석이 흘려보내는 목소리는 딱 지금의 계절과 같다. 쓸쓸하고 외로운 늦가을.

아무리 그가 내 울타리 안의 사람이라고 한들, 그럼에도 나는 이욱찬에게 한없이 약했다.

그냥… 늘 이렇게 살아갈 거라고 생각했다. 이욱찬은 이욱찬 나름대로, 나는 그의 옆에서, 때때로 쓰레기통 역할을 해 주면서.

나는 사춘기가 시작되면서 일깨워 온 감정을 밟으며 종착지로 향하고 있었다.

그 종착점이 동정인지, 애정인지 정확하게 알지 못했다. 어쩌면 둘 다일 수도 있고.

일말의 죄책감이 남아 있었는데 이욱찬이 거기에 기름을 부었다. 불이 타올랐다.

성격에 높낮이가 없다. 그리고 다정하고… 나쁜 녀석은 아니다.

관계라는 게 마냥 웃고 떠들고, 행복하다고는 할 수 없다는 걸 아는데 그 정도로 깊게 사귀고 인연을 이어 가는 것도 극소수였다.

나에게 잘해 주고, 나를 특별하게 대해 주던 정현우가… 왜 그런 말을 던지고 간 걸까.

그는 외로움을 추위라는 무기로 감춘 듯한 목소리를 냈다.

익숙한 것은 무섭다. 늘 보아 오고, 불러 왔던 것들. 사라져도 잔상은 꽤 오랫동안 남아 있었다. 아마도 이욱찬에게 내가 그런 존재일 거다.

우리는 서로의 상처와 과거를 건드려도 되었다. 이욱찬 부모님, 형, 누나… 사실 제대로 된 사람이 없다는 것을 나도 잘 알고 있지 않던가.

사람 마음이란 게 그러하다. 마음대로 조절할 수가 없다. 나는 이욱찬이 나쁜 새끼라는 걸 알지만, 아주 예전부터 알아 왔지만 그렇다.

눈에 보이면 짜증 나고, 그렇지만 대화를 나누고 싶고, 안 보이면 걱정된다.

정말 걱정되어서 묻는 게 아니라는 건 안다. 사람들은 왜 이렇게 타인의 불행을 즐기는 걸까. 단지 유흥거리의 일부라고 생각하는 걸까. 당하는 사람의 사정은 생각지도 못하고.

인정하고 인정해야만 하는 나의 첫사랑은 결국 이 겨울바람과 하등 다를 게 없었다. 고여 있다고 하기도 민망할 정도로 빠르게 스쳐 지나갈 거다. 그리고 그 겨울바람이 사라진 자리에는 우정만이 남아 있겠지.

술로 모든 걸 비운다. 모든 게 다 술 때문에 벌어졌던 건데, 아빠의 폭력적인 성향도 술 때문에 빛을 보였고….

내 마음을 빼앗긴 것도 아닌데, 고작 라면 한 젓가락뿐인데. 자존심이 상했다.

그냥 묵묵히 살아가겠지. 제대로 대화조차 해 본 적 없는 형을 가장 깊은 곳에 묻어 두고 말이다. 초등학생 때, 부모님도 없고 누나도 방황해 제대로 들어온 적 없던 집에 이욱찬을 버리고 그대로 나가 버린 형을 말이다.

벼랑 끝에 몰리면 어떤 사람이든 은인처럼 보이고, 의지하게 될 수밖에 없듯이 두 사람도 그랬다. 그나마 가족이라고 할 만한 상대가 두 사람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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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일곱 살이란 그랬다. 어떤 생각을 하든 상관없지만, 얕보이고 싶지 않아 모든 걸 삼켜 내야만 하는 고달픈 나이였다.

나는 덤이다. 껌딱지에 눌어붙은 먼지 구덩이다. 다행인 건 머리로는 살아남을 수 없고, 힘만으로 모든 게 평가되는 우리 동네에서 내가 눌어붙은 상대가 이욱찬이라는 것이다.

입 더러워. 나는 속으로 이욱찬을 씹으며 집으로 향했다.
그러나 사실은 나나 이욱찬이나 별반 다를 바 없다. 그게 가장 문제다.

누구나 들어올 수 있는 1층 현관, 우우웅, 삐꺽삐걱 큰 소리를 내는 낡은 엘리베이터, 복도, 아무리 몸을 움직여도 빛이 들어오지 않는 무의미한 자동 센서 조명.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벗어나지 못한다는 게 조금은 슬펐지만, 그래서 가끔은 안도가 들 때도 있었다.

어쨌든 이욱찬과 나는 똑같으니까. 내가 공부를 잘하든, 돈이 없든, 이욱찬이 어떤 학교에 다니든 우리는 같은 양동이 속에 있었다.

그 말에 이욱찬이 비로소 웃었다. 분명 개구쟁이처럼 장난스럽게 웃는 것 같긴 한데, 억지로 안면을 구기는 것 같기도 한 미소였다.
나는 그 미소를 보고 조금 슬퍼졌다.

언젠가는 비행기를 타 보기도 할까. 비행기를 타서 하늘을 날까. 그것이 설레지 않는 순간도 언젠가는 올까.
그러나 경험이 없는 나는 상상조차 되지 않는다. 평생을 이렇게 살아가야만 할 것 같다.

나는 끊임없이 사람을 의심하고 분석했다. 음침하기도 하지. 그러나 어쩔 수 없었다. 호의와 선의라는 것도 결국엔 저에게 이득이 있으니까 베푼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친구라는 게 뭘까.
늘 함께 있는 것? 마음을 주고받는 것? 연애 감정까지는 닿지 않는 것?
그만큼의 신뢰와 믿음이 필요하겠지. 하지만 나와 이욱찬 사이에 그런 게 있을까.

우리는 늘 불신만을 품고 살아왔다. 배운 게 그것뿐이었다.
믿음이니, 신뢰니 우리 사이엔 유치한 단어였다. 불신 역시 추상적이었지만, 신뢰나 믿음 따위보단 우리의 삶에 가까웠다.

어렸을 땐, 이 길이 무서웠는데 이제는 무섭지 않다. 공포라는 건 오직 내 상상이었을 뿐이구나, 라는 걸 느낀 순간부터 그랬던 것 같다.

조금만 더 이렇게 해 볼걸, 조금만 더 저렇게 해 볼걸, 하는 후회는 당연히 뒤따를 것이다.
그래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그래도 됐다. 그래도 되는 나이였다. 열일곱은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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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일곱 살이란 그랬다. 어떤 생각을 하든 상관없지만, 얕보이고 싶지 않아 모든 걸 삼켜 내야만 하는 고달픈 나이였다.

나는 덤이다. 껌딱지에 눌어붙은 먼지 구덩이다. 다행인 건 머리로는 살아남을 수 없고, 힘만으로 모든 게 평가되는 우리 동네에서 내가 눌어붙은 상대가 이욱찬이라는 것이다.

입 더러워. 나는 속으로 이욱찬을 씹으며 집으로 향했다.
그러나 사실은 나나 이욱찬이나 별반 다를 바 없다. 그게 가장 문제다.

누구나 들어올 수 있는 1층 현관, 우우웅, 삐꺽삐걱 큰 소리를 내는 낡은 엘리베이터, 복도, 아무리 몸을 움직여도 빛이 들어오지 않는 무의미한 자동 센서 조명.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벗어나지 못한다는 게 조금은 슬펐지만, 그래서 가끔은 안도가 들 때도 있었다.

어쨌든 이욱찬과 나는 똑같으니까. 내가 공부를 잘하든, 돈이 없든, 이욱찬이 어떤 학교에 다니든 우리는 같은 양동이 속에 있었다.

그 말에 이욱찬이 비로소 웃었다. 분명 개구쟁이처럼 장난스럽게 웃는 것 같긴 한데, 억지로 안면을 구기는 것 같기도 한 미소였다.
나는 그 미소를 보고 조금 슬퍼졌다.

언젠가는 비행기를 타 보기도 할까. 비행기를 타서 하늘을 날까. 그것이 설레지 않는 순간도 언젠가는 올까.
그러나 경험이 없는 나는 상상조차 되지 않는다. 평생을 이렇게 살아가야만 할 것 같다.

나는 끊임없이 사람을 의심하고 분석했다. 음침하기도 하지. 그러나 어쩔 수 없었다. 호의와 선의라는 것도 결국엔 저에게 이득이 있으니까 베푼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친구라는 게 뭘까.
늘 함께 있는 것? 마음을 주고받는 것? 연애 감정까지는 닿지 않는 것?
그만큼의 신뢰와 믿음이 필요하겠지. 하지만 나와 이욱찬 사이에 그런 게 있을까.

우리는 늘 불신만을 품고 살아왔다. 배운 게 그것뿐이었다.
믿음이니, 신뢰니 우리 사이엔 유치한 단어였다. 불신 역시 추상적이었지만, 신뢰나 믿음 따위보단 우리의 삶에 가까웠다.

어렸을 땐, 이 길이 무서웠는데 이제는 무섭지 않다. 공포라는 건 오직 내 상상이었을 뿐이구나, 라는 걸 느낀 순간부터 그랬던 것 같다.

조금만 더 이렇게 해 볼걸, 조금만 더 저렇게 해 볼걸, 하는 후회는 당연히 뒤따를 것이다.
그래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그래도 됐다. 그래도 되는 나이였다. 열일곱은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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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일곱 살이란 그랬다. 어떤 생각을 하든 상관없지만, 얕보이고 싶지 않아 모든 걸 삼켜 내야만 하는 고달픈 나이였다.

나는 덤이다. 껌딱지에 눌어붙은 먼지 구덩이다. 다행인 건 머리로는 살아남을 수 없고, 힘만으로 모든 게 평가되는 우리 동네에서 내가 눌어붙은 상대가 이욱찬이라는 것이다.

입 더러워. 나는 속으로 이욱찬을 씹으며 집으로 향했다.
그러나 사실은 나나 이욱찬이나 별반 다를 바 없다. 그게 가장 문제다.

누구나 들어올 수 있는 1층 현관, 우우웅, 삐꺽삐걱 큰 소리를 내는 낡은 엘리베이터, 복도, 아무리 몸을 움직여도 빛이 들어오지 않는 무의미한 자동 센서 조명.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벗어나지 못한다는 게 조금은 슬펐지만, 그래서 가끔은 안도가 들 때도 있었다.

어쨌든 이욱찬과 나는 똑같으니까. 내가 공부를 잘하든, 돈이 없든, 이욱찬이 어떤 학교에 다니든 우리는 같은 양동이 속에 있었다.

그 말에 이욱찬이 비로소 웃었다. 분명 개구쟁이처럼 장난스럽게 웃는 것 같긴 한데, 억지로 안면을 구기는 것 같기도 한 미소였다.
나는 그 미소를 보고 조금 슬퍼졌다.

언젠가는 비행기를 타 보기도 할까. 비행기를 타서 하늘을 날까. 그것이 설레지 않는 순간도 언젠가는 올까.
그러나 경험이 없는 나는 상상조차 되지 않는다. 평생을 이렇게 살아가야만 할 것 같다.

나는 끊임없이 사람을 의심하고 분석했다. 음침하기도 하지. 그러나 어쩔 수 없었다. 호의와 선의라는 것도 결국엔 저에게 이득이 있으니까 베푼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친구라는 게 뭘까.
늘 함께 있는 것? 마음을 주고받는 것? 연애 감정까지는 닿지 않는 것?
그만큼의 신뢰와 믿음이 필요하겠지. 하지만 나와 이욱찬 사이에 그런 게 있을까.

우리는 늘 불신만을 품고 살아왔다. 배운 게 그것뿐이었다.
믿음이니, 신뢰니 우리 사이엔 유치한 단어였다. 불신 역시 추상적이었지만, 신뢰나 믿음 따위보단 우리의 삶에 가까웠다.

어렸을 땐, 이 길이 무서웠는데 이제는 무섭지 않다. 공포라는 건 오직 내 상상이었을 뿐이구나, 라는 걸 느낀 순간부터 그랬던 것 같다.

조금만 더 이렇게 해 볼걸, 조금만 더 저렇게 해 볼걸, 하는 후회는 당연히 뒤따를 것이다.
그래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그래도 됐다. 그래도 되는 나이였다. 열일곱은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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