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으로는 답을 기다리겠다 약조해 놓고서는, 육신이란 것은 이리도 쉬이 정신에 반하는 욕구를 품다니

그를 돌보는 동안 자신이 무언가 부적절한 행동을 했던가. 온갖 상념들이 주자헌의 머릿속에서 빙글빙글 돌았다.

억겁처럼 느껴지는 시간이 흐른 뒤, 나른한 흥분감에 떠밀려 두서없이 떠올랐다 가라앉던 여러 생각들이 마침내 어느 지점에서 멈추었다

그렇다면 그도 조금쯤은, 자신에게 마음이 있다 보아도 되는 것일까.

그 천진한 낯을 응시하던 주자헌은 불현듯 심장이 조여드는 듯한 기분에 시선을 떨구고 말았다.

가슴 안쪽을 간질이던 기대감은 수증기로 화해 흩어져 버렸고, 슬픔이 들불처럼 번지며 몸을 태우는 것만 같았다.

달이 차고 기울고, 별이 떠올랐다 스러지는 모든 새벽마다 주자헌은 백은래를 생각했다.

그런 날이 오기만 한다면, 백일이든 천일이든 기다릴 수 있을 것을.

답을 기다리겠다고 약조하고서는 어찌 이렇게 정도에서 벗어난 짓을 하느냐며 공손하고 흠 없는 문장들로 지탄과 낙담을 쏟아 낼까 봐.

그래도, 답을 기다리겠다 약조하였으니 기다려야 한다.

한심하구나, 주자헌. 제 것도 아닌 이를 두고 질투라니. 꼭 백은래가 물건이라도 되는 것처럼.

불현듯 슬픔이 폭풍처럼 밀려들어 폐부에 들어찼다. 몸 안에 모래라도 가득 들어 있는 듯 호흡이 힘겹고, 입 안이 온통 버석했다

누가 자신에게 적개심이나 경계심을 갖고 있는지, 누가 자신에게 호의를 갖고 있는지를 구분해 내는 데만도 그는 충분히 바빴으므로.

그대는 늘 그렇지. 타인을 원망하기에 앞서 자신의 흠결을 찾아 바르게 고치고자 하는 사람이라.

세상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이에게서 그 의지를 빼앗는다면, 남는 것은 껍데기뿐일 터였다.

윗사람이라 하여 바른 말을 삼가지 않고, 어떤 문제든 예와 이치에 맞게 해결하려 애쓰면서도 필요하다면 주저 없이 활시위를 당기며, 스스로의 안위를 걱정해 몸을 사리지도 않는 이였다.

사람인 이상 어찌 지치지 않을 수 있을까. 그가 바꿀 수 없는 요소로 인해 되풀이되는 모멸과, 사적인 이득이나 영달에 눈먼 자들의 적의에 맞서며 살아온 생이었다. 그 고단함을 온전히 달래 줄 길은 없을 터였으나, 조금이나마 위안을 주고 싶었다.

기다린다 한들 원하는 답이 돌아온다는 보장이 없다는 사실은 알았다. 사사로운 감정 따위에 이끌려 이루고자 하는 대업에서 눈을 돌릴 이가 아니었다.

잊을 수는 없을 것이다. 살구꽃이 피는 봄이 올 때, 피서를 위해 행궁으로 향하게 될 여름에, 활을 쏘며 옥외에서 시간을 보내기 좋은 가을과, 눈이 소복하게 처마 위를 덮는 겨울에. 홀로 편전에 앉아 관인을 찍을 때마다, 정갈하게 차려진 다과상을 마주할 때마다, 반짝이는 눈을 한 젊은 관원들을 볼 때마다, 모든 순간에 백은래를 생각할 수밖에 없으리라.

다만, 아무것도 시도하지 않고 놓아 버린다면 이 마음이 너무도 덧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대가 이토록 찬란하게 빛나고 있건만, 하늘 아래 모든 것을 가질 수 있음에도 가장 바라는 한 가지만은 손에 들어오지 않으리라는 사실이 못내 서글퍼서.

고작 덫에 걸린 새를 풀어 주는 정도의 가벼운 측은지심으로, 제 안위까지 걸어 가며 타인을 구하는 이가 있던가?

그저 외면하고 싶었을 따름이다. 그는 누구와도 동족이 아니었으므로.

그저, 다정한 당신이 지복을 누리기를 오래도록 소망했던 탓에.

돌이켜 보면 얄궂은 일이었다. 두 사람 모두 서왕으로 인해 양육자를 잃었고, 삶이 크게 뒤바뀌었으며, 그로 인해 향주에서 재회하게 되었다.

그리 말하면서도 목소리에는 조금도 강압의 기미가 없고, 그저 옷깃을 여며 주는 손길이 애틋할 따름이었다

그저 주자헌이 이렇게까지 말할 때에는 언제나 외사랑하는 상대에게 무언가를 해 주고 싶어 하는 소년 같은 얼굴이었기에, 더 강경하게 나설 수가 없었다

얼굴을 덮은 그림자가 사라지자 그의 두 눈이 담묵빛에 창천의 빛깔을 한 방울 섞은 듯 오묘한 빛깔로 반짝였다. 아리따운 동시에 잘 벼린 철처럼 단단한 의지가 엿보이는 눈이기도 했다.

그러나 어쩌면, 그와 자신이 이렇듯 재회한 것은 필연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스치고 말았다. 그러자 흉곽 안쪽에서 새가 날갯짓을 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누군가를 향한 마음이란 그런 것이리라. 무엇이 그리 각별한지 답을 내놓을 수는 없어도, 그저 존재만으로도 애틋해서.

돌연 어떠한 감정이 백은래의 가슴 안쪽에서 치밀어 올랐다. 빗장을 걸고 단단히 잠가 자기 자신조차 꺼내 볼 수 없도록 두었던 마음이었다. 그러나 무기를 들어 파괴하는 대신 물처럼 고요히 기다리기를 택한 이의 미소에 끝내 빗장은 녹슬어 부스러졌고, 이제 백은래는 그 두렵고도 경이로운 감정을 똑바로 마주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그는 자신의 유일한 이해자가 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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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돌보는 동안 자신이 무언가 부적절한 행동을 했던가. 온갖 상념들이 주자헌의 머릿속에서 빙글빙글 돌았다.

억겁처럼 느껴지는 시간이 흐른 뒤, 나른한 흥분감에 떠밀려 두서없이 떠올랐다 가라앉던 여러 생각들이 마침내 어느 지점에서 멈추었다

그렇다면 그도 조금쯤은, 자신에게 마음이 있다 보아도 되는 것일까.

그 천진한 낯을 응시하던 주자헌은 불현듯 심장이 조여드는 듯한 기분에 시선을 떨구고 말았다.

가슴 안쪽을 간질이던 기대감은 수증기로 화해 흩어져 버렸고, 슬픔이 들불처럼 번지며 몸을 태우는 것만 같았다.

달이 차고 기울고, 별이 떠올랐다 스러지는 모든 새벽마다 주자헌은 백은래를 생각했다.

그런 날이 오기만 한다면, 백일이든 천일이든 기다릴 수 있을 것을.

답을 기다리겠다고 약조하고서는 어찌 이렇게 정도에서 벗어난 짓을 하느냐며 공손하고 흠 없는 문장들로 지탄과 낙담을 쏟아 낼까 봐.

그래도, 답을 기다리겠다 약조하였으니 기다려야 한다.

한심하구나, 주자헌. 제 것도 아닌 이를 두고 질투라니. 꼭 백은래가 물건이라도 되는 것처럼.

불현듯 슬픔이 폭풍처럼 밀려들어 폐부에 들어찼다. 몸 안에 모래라도 가득 들어 있는 듯 호흡이 힘겹고, 입 안이 온통 버석했다

누가 자신에게 적개심이나 경계심을 갖고 있는지, 누가 자신에게 호의를 갖고 있는지를 구분해 내는 데만도 그는 충분히 바빴으므로.

그대는 늘 그렇지. 타인을 원망하기에 앞서 자신의 흠결을 찾아 바르게 고치고자 하는 사람이라.

세상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이에게서 그 의지를 빼앗는다면, 남는 것은 껍데기뿐일 터였다.

윗사람이라 하여 바른 말을 삼가지 않고, 어떤 문제든 예와 이치에 맞게 해결하려 애쓰면서도 필요하다면 주저 없이 활시위를 당기며, 스스로의 안위를 걱정해 몸을 사리지도 않는 이였다.

사람인 이상 어찌 지치지 않을 수 있을까. 그가 바꿀 수 없는 요소로 인해 되풀이되는 모멸과, 사적인 이득이나 영달에 눈먼 자들의 적의에 맞서며 살아온 생이었다. 그 고단함을 온전히 달래 줄 길은 없을 터였으나, 조금이나마 위안을 주고 싶었다.

기다린다 한들 원하는 답이 돌아온다는 보장이 없다는 사실은 알았다. 사사로운 감정 따위에 이끌려 이루고자 하는 대업에서 눈을 돌릴 이가 아니었다.

잊을 수는 없을 것이다. 살구꽃이 피는 봄이 올 때, 피서를 위해 행궁으로 향하게 될 여름에, 활을 쏘며 옥외에서 시간을 보내기 좋은 가을과, 눈이 소복하게 처마 위를 덮는 겨울에. 홀로 편전에 앉아 관인을 찍을 때마다, 정갈하게 차려진 다과상을 마주할 때마다, 반짝이는 눈을 한 젊은 관원들을 볼 때마다, 모든 순간에 백은래를 생각할 수밖에 없으리라.

다만, 아무것도 시도하지 않고 놓아 버린다면 이 마음이 너무도 덧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대가 이토록 찬란하게 빛나고 있건만, 하늘 아래 모든 것을 가질 수 있음에도 가장 바라는 한 가지만은 손에 들어오지 않으리라는 사실이 못내 서글퍼서.

고작 덫에 걸린 새를 풀어 주는 정도의 가벼운 측은지심으로, 제 안위까지 걸어 가며 타인을 구하는 이가 있던가?

그저 외면하고 싶었을 따름이다. 그는 누구와도 동족이 아니었으므로.

그저, 다정한 당신이 지복을 누리기를 오래도록 소망했던 탓에.

돌이켜 보면 얄궂은 일이었다. 두 사람 모두 서왕으로 인해 양육자를 잃었고, 삶이 크게 뒤바뀌었으며, 그로 인해 향주에서 재회하게 되었다.

그리 말하면서도 목소리에는 조금도 강압의 기미가 없고, 그저 옷깃을 여며 주는 손길이 애틋할 따름이었다

그저 주자헌이 이렇게까지 말할 때에는 언제나 외사랑하는 상대에게 무언가를 해 주고 싶어 하는 소년 같은 얼굴이었기에, 더 강경하게 나설 수가 없었다

얼굴을 덮은 그림자가 사라지자 그의 두 눈이 담묵빛에 창천의 빛깔을 한 방울 섞은 듯 오묘한 빛깔로 반짝였다. 아리따운 동시에 잘 벼린 철처럼 단단한 의지가 엿보이는 눈이기도 했다.

그러나 어쩌면, 그와 자신이 이렇듯 재회한 것은 필연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스치고 말았다. 그러자 흉곽 안쪽에서 새가 날갯짓을 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누군가를 향한 마음이란 그런 것이리라. 무엇이 그리 각별한지 답을 내놓을 수는 없어도, 그저 존재만으로도 애틋해서.

돌연 어떠한 감정이 백은래의 가슴 안쪽에서 치밀어 올랐다. 빗장을 걸고 단단히 잠가 자기 자신조차 꺼내 볼 수 없도록 두었던 마음이었다. 그러나 무기를 들어 파괴하는 대신 물처럼 고요히 기다리기를 택한 이의 미소에 끝내 빗장은 녹슬어 부스러졌고, 이제 백은래는 그 두렵고도 경이로운 감정을 똑바로 마주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그는 자신의 유일한 이해자가 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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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돌보는 동안 자신이 무언가 부적절한 행동을 했던가. 온갖 상념들이 주자헌의 머릿속에서 빙글빙글 돌았다.

억겁처럼 느껴지는 시간이 흐른 뒤, 나른한 흥분감에 떠밀려 두서없이 떠올랐다 가라앉던 여러 생각들이 마침내 어느 지점에서 멈추었다

그렇다면 그도 조금쯤은, 자신에게 마음이 있다 보아도 되는 것일까.

그 천진한 낯을 응시하던 주자헌은 불현듯 심장이 조여드는 듯한 기분에 시선을 떨구고 말았다.

가슴 안쪽을 간질이던 기대감은 수증기로 화해 흩어져 버렸고, 슬픔이 들불처럼 번지며 몸을 태우는 것만 같았다.

달이 차고 기울고, 별이 떠올랐다 스러지는 모든 새벽마다 주자헌은 백은래를 생각했다.

그런 날이 오기만 한다면, 백일이든 천일이든 기다릴 수 있을 것을.

답을 기다리겠다고 약조하고서는 어찌 이렇게 정도에서 벗어난 짓을 하느냐며 공손하고 흠 없는 문장들로 지탄과 낙담을 쏟아 낼까 봐.

그래도, 답을 기다리겠다 약조하였으니 기다려야 한다.

한심하구나, 주자헌. 제 것도 아닌 이를 두고 질투라니. 꼭 백은래가 물건이라도 되는 것처럼.

불현듯 슬픔이 폭풍처럼 밀려들어 폐부에 들어찼다. 몸 안에 모래라도 가득 들어 있는 듯 호흡이 힘겹고, 입 안이 온통 버석했다

누가 자신에게 적개심이나 경계심을 갖고 있는지, 누가 자신에게 호의를 갖고 있는지를 구분해 내는 데만도 그는 충분히 바빴으므로.

그대는 늘 그렇지. 타인을 원망하기에 앞서 자신의 흠결을 찾아 바르게 고치고자 하는 사람이라.

세상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이에게서 그 의지를 빼앗는다면, 남는 것은 껍데기뿐일 터였다.

윗사람이라 하여 바른 말을 삼가지 않고, 어떤 문제든 예와 이치에 맞게 해결하려 애쓰면서도 필요하다면 주저 없이 활시위를 당기며, 스스로의 안위를 걱정해 몸을 사리지도 않는 이였다.

사람인 이상 어찌 지치지 않을 수 있을까. 그가 바꿀 수 없는 요소로 인해 되풀이되는 모멸과, 사적인 이득이나 영달에 눈먼 자들의 적의에 맞서며 살아온 생이었다. 그 고단함을 온전히 달래 줄 길은 없을 터였으나, 조금이나마 위안을 주고 싶었다.

기다린다 한들 원하는 답이 돌아온다는 보장이 없다는 사실은 알았다. 사사로운 감정 따위에 이끌려 이루고자 하는 대업에서 눈을 돌릴 이가 아니었다.

잊을 수는 없을 것이다. 살구꽃이 피는 봄이 올 때, 피서를 위해 행궁으로 향하게 될 여름에, 활을 쏘며 옥외에서 시간을 보내기 좋은 가을과, 눈이 소복하게 처마 위를 덮는 겨울에. 홀로 편전에 앉아 관인을 찍을 때마다, 정갈하게 차려진 다과상을 마주할 때마다, 반짝이는 눈을 한 젊은 관원들을 볼 때마다, 모든 순간에 백은래를 생각할 수밖에 없으리라.

다만, 아무것도 시도하지 않고 놓아 버린다면 이 마음이 너무도 덧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대가 이토록 찬란하게 빛나고 있건만, 하늘 아래 모든 것을 가질 수 있음에도 가장 바라는 한 가지만은 손에 들어오지 않으리라는 사실이 못내 서글퍼서.

고작 덫에 걸린 새를 풀어 주는 정도의 가벼운 측은지심으로, 제 안위까지 걸어 가며 타인을 구하는 이가 있던가?

그저 외면하고 싶었을 따름이다. 그는 누구와도 동족이 아니었으므로.

그저, 다정한 당신이 지복을 누리기를 오래도록 소망했던 탓에.

돌이켜 보면 얄궂은 일이었다. 두 사람 모두 서왕으로 인해 양육자를 잃었고, 삶이 크게 뒤바뀌었으며, 그로 인해 향주에서 재회하게 되었다.

그리 말하면서도 목소리에는 조금도 강압의 기미가 없고, 그저 옷깃을 여며 주는 손길이 애틋할 따름이었다

그저 주자헌이 이렇게까지 말할 때에는 언제나 외사랑하는 상대에게 무언가를 해 주고 싶어 하는 소년 같은 얼굴이었기에, 더 강경하게 나설 수가 없었다

얼굴을 덮은 그림자가 사라지자 그의 두 눈이 담묵빛에 창천의 빛깔을 한 방울 섞은 듯 오묘한 빛깔로 반짝였다. 아리따운 동시에 잘 벼린 철처럼 단단한 의지가 엿보이는 눈이기도 했다.

그러나 어쩌면, 그와 자신이 이렇듯 재회한 것은 필연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스치고 말았다. 그러자 흉곽 안쪽에서 새가 날갯짓을 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누군가를 향한 마음이란 그런 것이리라. 무엇이 그리 각별한지 답을 내놓을 수는 없어도, 그저 존재만으로도 애틋해서.

돌연 어떠한 감정이 백은래의 가슴 안쪽에서 치밀어 올랐다. 빗장을 걸고 단단히 잠가 자기 자신조차 꺼내 볼 수 없도록 두었던 마음이었다. 그러나 무기를 들어 파괴하는 대신 물처럼 고요히 기다리기를 택한 이의 미소에 끝내 빗장은 녹슬어 부스러졌고, 이제 백은래는 그 두렵고도 경이로운 감정을 똑바로 마주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그는 자신의 유일한 이해자가 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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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웃음을 팔아 받은 핫초콜릿을 들고서 자기 쪽이 손해를 보았다고 생각했다.

선량한 노족장은 늘 인족 동포의 고난을 걱정했지만, 선조의 가르침에 얽매여 산을 나가 세상을 구할 수 없기에 항상 한숨을 쉬며 탄식했다. 만약 그 어른께서 지금의 광경을 보신다면 안심하며 기뻐하셨을까?

무인족 주술의 원리는 아직 잘 모르지만 베테랑 외근팀의 경험과 식견으로 봤을 때 이 주문은 폐기된 게 분명했다.

이렇게 된 이상… 이것도 하늘의 뜻이 아니겠는가?

그 새인간이 말하고 흉내 내고 웃기고 노래하는 온갖 것에 정통하다고는 하나, 입을 닫아야 할 때는 결코 삼킨 말을 다시 뱉지 않는다.

샤오정은 전신이 가벼워졌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공장초기화’로 복구되었다는 착각마저 들었다. 빙의되고 벼락을 맞으며 입은 내상이 사라진 것은 물론이고 오래된 고질병과 가벼운 통증까지도 전부 깨끗하게 사라졌다.

자신은 다른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는 투명 인간이었다…

속눈썹이 드리운 그늘은 눈동자의 가장 깊은 곳에 가라앉은 듯해 너무나도 쓸쓸해 보였다. 눈동자 가장 깊은 곳에는 침상의 휘장과 밤새 꺼지지 않는 촛불만이 비쳤다.

갈 곳 없는 고통 속에서 영원히 벗어나지 못할 불지옥으로 가라앉는 것만 같았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빙의한 사람과 마음이 통한 찰나, 이유도 없이 가없는 상실감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꿈에서 깨어난 지금이 언제인지도 알 수 없었다. 아직도 황홀한 악몽에 빠져 있는 느낌이었다. 잠시간 마음속이 텅 비었다. 남아 있는 것은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또 그를 잃을 수는 없어.’

자신이 칠정[2]을 제대로 못 갖춘 건지, 아니면 양심이 없는 건지는 쉬엔지도 잘 몰랐다…

마치 가시가 걸린 듯, 난생 처음으로 밥이 맛없다고 느껴질 만큼 목이 막혔다.

그러나 가짜라는 걸 분명하게 알고 있는데도, 꿈속에서 느낀 격렬하고 부정적인 감정들은 여운을 남기는 데 그치지 않았다. 그것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끝도 없이 이어질 기세로 그를 쫓아왔다.

그는 언제나 모든 일에는 정도가 있어야 한다고, 과유불급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랑에 고생하고 미움이 깊어지면 이런 걸 고민할 필요도 없어진다.

그러니까 색을 밝히는 마음과 부정적인 감정이 섞이면서 미묘한 화학반응이 일어난 거겠지. 이건 이상한 일이 아니다.

이른바 ‘신’이 높으신 분들의 거짓말이라면 ‘귀신’은 불쌍한 사람들의 서글픈 환상일 뿐이다

사람들은 다시는 돌아오지 못해도 좋다는 각오를 하고 몸을 던져 악귀가 되면, 생전에는 얻지 못한 능력을 손에 넣어 정의를 구현할 수 있으리라는 환상을 품는다.

‘혼’은 사람이 죽은 후에 생기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본존이 살아 있어야 존재할 수 있다.

곰곰이 생각했지만 이렇다 할 이유가 떠오르지 않았다. 어쩌면 편하게 망나니짓을 하려고 자신이 저 좋을대로 아무렇게나 설정했는지도 모르지.

‘장’이란 매우 강력한 에너지가 밖으로 흘러나와 형성되는 것으로 일종의 결계와 비슷했다.

모든 특능인에게는 자신만의 비밀이 있다.

벼락으로 사람을 때렸으니까 그 잘못을 만회하려고 특별히 직접 부상을 치료해 주러 행차하신 건가?

그리하여 성령연은 지금 여기의 천지가 그의 존재를 용납하지 않으며, 온 세상이 자신에게 채워진 족쇄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적연이 봉인된 지 이미 3천 년이 흘렀다. 이 세계는 영기든 마기든 똑같이 희박했다. 천도에는 새로운 규칙이 형성되었으며, 이 새로운 규칙은 지나치게 강한 외력이 끼어드는 것을 허락치 않았다.

인족이 천하를 통일한 지 3천 년이나 되었건만 어찌 어엿한 사람으로 살지 않고 굳이 짐승 쪽에 기대는 것인가?

여기 숨어 있던 게로구나. 물건을 급히 찾을 땐 찾을 수가 없어도 잊어버리고 있으면 오히려 금방 찾게 된다더니.

사람의 무리가 서툴게 요족의 표준어를 흉내 내며 이미 3천 년 전 작고한 늙은 요족왕을 참배하고 있다니… 대체 이들은 뭐가 문제길래?

결국 적연을 봉인한 사람은 그 자신이다. 그러니 지금 상황 역시 자업자득인 셈이었다

여기서 천도에 손발이 묶이기까지 한다면 얼마간 더 불편해질 테니, 무슨 수라도 내야 한다…

봉래 회의, 아니, 벌써 이공국 본국까지 본진교가 침투해 있는 건 아닐까?

그건 대체 어떤 인생이었을까? 이것이 그가 인생 후반에 실성한 듯 포악해졌던 진짜 이유일까?

아마도 아주 어려서부터, 인족이 그를 선택했을 때부터, 운명은 정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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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인황 폐하는 신도 아니고 사람도 아니며,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니다. 도무지 어떤 존재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어엿한 친자를 놔두고 사칭한 아이에게 황위를 물려주었다는 것은 더욱 상식적이지 않은 일이다.

극악무도한 봉건사회 지배계급 같으니, 이 무슨 거지발싸개 같은 태도야!

하지만 이제는 안다. 당시 자신이 지나치게 신중했다는 걸. 이곳 사람들은 그야말로 금기라는 게 아예 없었다.

자신과 저 위대하신 황제 사이에 대체 무슨 연관이 있단 말인가? 대대로 양시를 했고, 상대방의 피가 묻으면 강제로 뇌를 공유하게 된다…

하지만 거울이며 세면대, 바닥에는 피가 흩뿌려져 있었다. 방울방울 떨어진 핏방울이 줄에 꿰인 듯 이어진 모습은 마치 애처롭고 아리따운 홍매화 가지 같았다.

그가 이렇게 웃으니 전신의 거무스름하던 기색이 순식간에 흩어졌다. 남은 건 또 언제든지 사람을 속여 함정에 빠뜨릴 준비를 하는 작태뿐이었다

"그렇다는 건 앞으로 그가 빚을 지면 네가 갚아야 하고, 그가 사람을 죽이면 네가 목숨으로 보상해야 된다, 이 말이지."

전설에 따르면 바다에는 ‘신충(蜃蟲)’이라는 해양생물이 있다고 한다. 바닷속의 쇠똥구리 같은 거라고 볼 수 있는데, 더러운 것을 좋아해서 항상 어딘가에 한가득 모아둔다.

내가 그렇게 낭패를 본 건 이상한 길로 안내한 누구 탓이잖아!

그 눈빛은 평온했고, 어쩐지 안도한 듯 기뻐 보이기도 했다. 동시에 아득한 슬픔도 약간 담겨 있는 것 같았다.

인황을 통제? 말도 안 되는 소리하지 마!
더군다나 성령연은 진짜 검령도 아니다.

싸워도 이길 수 없고 통제하려고 해도 통제할 수 없으니 차라리 서로 간섭하지 않는 게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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