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 오브 어스
줄리 클라크 지음, 김지선 옮김 / 밝은세상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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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422 다만 남자의 시선으로 여자 사기꾼 이야기를 만들 경우 평면적인 내용이 될 게 뻔했다.

 

장편 소설의 가장 중요한 덕목은 흡입력이다. 아무리 좋은 가치관과 스토리를 담고 있어도 독자를 단번에 빨아들이지 못하면 장편으로써 성공하기는 힘들다. 줄리 클라크의 투 오브 어스는 그런 흡입력이 대단한 작품이었다. 블랙 커버에 마치 영화관 조명처럼 책 테두리를 따라 어둡게 칠해진, 상당이 특이한 내지 디자인과 짧은 챕터로 여러 번 캣과 메그의 시점을 넘나드는 구성이 다소 난해할 수 있는데도 깔끔하고 매력적인 문체가 순식간에 독자를 매료시킨다. 긴박한 동시에 재미있고, 흥미진진한 동시에 속 시원하다. 앉은 자리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눈을 뗄 수 없는 드라마를 읽은 기분이었다.

 

메인 주인공 메그는 엄마에게서 집을 빼앗은 론에게 복수하기 위해 사기를 치는 인물이다. 부정한 방법으로 재물을 얻었거나 범죄를 저지르고도 제대로 된 처벌을 받지 않은 남자들을 대상으로 사기를 쳐 돈을 빼앗고 그들을 추락시킨다. 또다른 주인공 캣은 그런 메그에게 복수할 목적으로 접근한 기자인데, 사실 책을 읽는 동안은 캣이 메그에게 복수하려는 이유가 조금 아리송하다고 느껴질 때도 많았다. 복수의 방향이 틀리지 않았나 생각되기도 하고 자신에게 현실적인 조언을 해 주는 메그보다 도박 중독 남자친구의 말을 믿을 때마다 갑갑하기도 했다. 그러나 결말을 읽고 나서 다시 생각해보니 그런 입체성이 캣을 더 현실적인 캐릭터로 만든다. 두 주인공은 완전히 무결하거나 막연히 도덕적이지 않다. 속고 속이고, 때로는 비윤리적이고 답답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여성들은 원하는 바를 이루고 앞으로 나아간다.

 

p.407 어른이 된 나는 이 나라의 사법 제도가 둘로 나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론 애시턴 같은 부유한 백인 남자에게 적용되는 법과 나머지 사람들에게 적용되는 법이 다르다는 사실을.

 

투 오브 어스의 첫 페이지는 다음과 같은 대사로 시작한다. “우리는 연약하지 않아. 남자에게 기대서 얻는 안락은 필요 없어. 너와 내가 힘을 모아 바라는 걸 쟁취하면 돼. 오직 우리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어.” 줄리 클라크의 글은 언제나 이 목소리를 담고 있다. 여성들은 연약하지 않다. 오직 그들 스스로만이 그들을 구원할 수 있기 때문에 구원을 위해 남자에게 기대야 할 필요가 없다. 어렵고 무거운 이야기를 하는 여성학 도서가 아닌 쉽게 읽히는 드라마틱한 서사의 소설에서 이런 메시지를 준다는 점이 꽤 근사하게 여겨졌다. 희망과 연대, 재미와 스릴을 동시에 전하는 작품이다.

 

메그가 그런 사기로 그들을 심판해야 했던 까닭은 법이 그들을 심판해주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로즈의 집을 빼앗고도 떵떵거리며 살아온 론, 크리스틴이 학교를 떠나게 하고도 여전히 교사직에 있는 코리, 아내를 폭행하고도 재산분할을 해주기 싫어하는 필립. 그런 남자들이 메그에게 속아 넘어가 사회적 명성이나 부를 잃는 모습을 보면 독자들은 통쾌해지고 웃음이 나온다. 더 글로리모범택시처럼 사적 제재를 통한 복수를 그려낸 작품들이 흥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국가가, 법이, 사회가 약자를 향한 폭력을 암묵적으로 눈감아주고 있기 때문이다. 권력자의 편에 선 사회가 지쳐 창작물로나마 그런 속시원한 복수극이 보고 싶은 독자들에게 너무나도 매력적인 여성의 복수극 투 오브 어스를 추천한다.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솔직하게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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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연약하지 않아. 남자에게 기대서 얻는 안락은 필요 없어. 너와 내가 힘을 모아 바라는 걸 쟁취하면 돼. 오직 우리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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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가 사랑한 여자들 - 두려움과 편견을 넘어 나만의 길을 가는 용기에 대하여
이예지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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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303 문학계에서는 오로지 실력으로만 평가받고, 이젠 독자층도 여성이 훨씬 더 많아졌기 때문에, 젊은 여성 작가도, 여성이 주요하게 등장하고 입체적으로 다뤄지는 소설도 더 많이 볼 수 있게 됐다고 생각합니다.




 

여자가 사랑한 여자들이라는 제목은 읽는 것만으로 얼마나 마음을 설레게 하는가. 이 책은 그 속에 담긴 내용으로도 물론 대단하지만 책의 제목을 굉장히 잘 골랐다고 느껴진다. 미소지니에 기반을 두는, 남자의 목소리로 쓰여진 창작물이 만들어낸 여적여만이 사실이라고 굳게 믿는 사람들이 수두룩한 세상에 여자가 사랑한여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선보이는 용기가 얼마나 귀한지 알기 때문에 더 값진 제목이다(다행스러운 것은 집게손처럼 공격받을 가능성은 낮을 것이다. 그들은 책을 읽지 않으니까). 허상의 질투와 배척 대신 현실의 연대와 지지를 담은 여자들의 이야기를 세상에 책으로 내보여 주신 이예지 에디터와 위즈덤하우스에 깊은 감사를 드리며 책을 폈다.

 


다양한 직업에 종사 중인 여성들의 목소리를 인터뷰 형식으로 담았다는 점이 특히 매력적이라고 느껴졌다. 잡지에서는 흔히 봤지만 단행본으로는 보기 드문 구성인데, 오히려 더 술술 읽히고 순서에 상관 없이 골라 읽을 수 있다는 점에서 접근성도 좋다고 느껴졌다. 작가는 물론이고 스포츠 선수, 영화감독, 댄서, 아나운서 등 여러 직업군의 이야기를 담아 많은 여성 롤모델을 보여주고 있는 점이 근사했다. 여자가 사랑한 여자들을 읽고 있으면 이 세상에 대단한 여자들이 너무 많고, 그들에 대한 평가는 너무 많이 낮추어지고 있다고 느껴진다. 남성의 작은 성과는 크게 칭찬해주고 여성의 큰 성과는 작게 축소하는 사회에서 자신의 길을 묵묵히 걸어 정상에 선 여자들의 목소리! 우리 사회에는 언제나 이런 책이 필요했다.


 



p.88 나이가 많든 적든 언니라고 부르고 싶어지는 포인트가 그거 아닐까요? 할 말 못 할 말 가리지 않고 쓴소리도 하고, 앞장서는 모습이 지금 여성들이 바라는 여성상이라고 생각해요.

 

개인적으로 자우림의 팬인 관계로 특히 김윤아의 인터뷰를 닳고 닳도록 여러 번 읽었다. 김윤아의 자우림 데뷔가 1997년이었던 것을 생각해보면 밴드 프론트맨이 여성이라는 것이, 여성 뮤지션이 사근사근하게 사랑해달라는 노래를 부르는 대신 밀랍천사 같은 노래를 부르는 일이 얼마나 센세이션한 사건이었는지도 충분히 예상이 가능하지 않는가. ‘사회가 없으면 예술이 있을 필요가 없다는 대답에서 마음이 오래 머물렀다. 여전히 약자를 위해, 사회를 위해, 더 나은 세상을 위해 노래하는 사람. 그가 이 귀한 책의 한 챕터를 장식하고 있다는 사실에 즐거워하는 동시에, 열다섯 명이나 되는 인터뷰이의 커리어와 가치관을 줄줄 꿰고 있는 이예지 에디터의 사전 조사력에도 수시로 감탄했다.

 

여자가 사랑한 여자들에는 치열하게 살아온 여자들의 삶이 담겨 있다. 300페이지가 넘는 책에 오직 여자들의 목소리가 꽉 차 있다니, 이보다 설레는 일이 또 있을까. 새삼스럽게도 이제 문학도 글도 독서도 남성의 전유물이 아니다. 오히려 여성이 출판의 흐름을 선도하는 세상이 왔다. 그런 세상을 만드는 일에 이 책에 실린 여자들이, 이 책을 만든 여자들이, 오늘도 제 자리에서 제 목숨을 열심히 살아낸 여자들이 분명히 기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어느 여자의 적은 여자일지도 모른다. 여성은 무결하고 흠 없는 존재가 아니라 그저 인간이니까. 그러나 또 어느 여자의 아군도 여자일 것이다. 우리는 이끌어주고 밀어주는 방법을 아니까. 적도, 아군도, 연대하는 동지도, 투쟁하는 대상도, 여자라고 해서 문제가 될 필요가 없다. 사회 어느 곳에서나 여자의 얼굴을 더 많이 볼 수 있는 세상이 되기를 원하며 책을 덮었다


여성들에게, 특히 롤모델이 필요한 여성 청소년들에게 반드시 일독을 권한다.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솔직하게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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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당의 역사 1955 2025 - 시민과 더불어 써 내려간 대한민국 현대 정치사
박혁 지음 / 들녘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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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319 그러나 정권교체로 만족할 수도, 기뻐할 수도 없는 처지였다. 국민은 이게 나라냐며 현직 대통령을 탄핵했다. 나라에 드리운 그림자가 너무 짙고 국민 가슴에 새겨진 상처가 몹시도 컸다.

 

책을 받은 이후 가장 먼저 한 일은 책에 북커버를 씌우는 일이었다. 나는 내 서재보다도 지하철이나 카페에서 책을 읽을 때가 많은데, 보수의 심장이라 불리는 이곳에서 이 책을 바깥에 들고 다니기에는 아무래도 많은 용기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비겁하다고 말하겠지만 TK에서 민주당 지지자로 살아간다는 건 꽤 험난한 일이다. 탄핵 피켓을 들고 돌아가다가 지하철에서 모르는 영감님께 빨갱이라고 쌍욕을 먹는 일은 겨울 내내 너무 많이 겪어서 면역이 생겼다.

 

그런 비겁함을 씻어내려는 마음으로 책을 읽었다. 읽고 또 읽고 몇 번이나 읽으며 민주당이 걸어온 70년의 길을 되새겼다. 그리고 600쪽에 달하는, 소위 말하는 벽돌책이라고 할 만한 민주당의 역사 1955 2025가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기를 간절히 바랐다. 민주당이라고 무조건 옳아서라거나, 오로지 민주당만이 좋은 정당이라서가 아니다. 첫째로는 우리가 민주주의와 진보라는 가치를 지키기 위해서는 현대 정치사를 잘 알아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고, 두 번째로는 지난 123일 밤 우리 모두가 민주당에게 빚을 졌기 때문이다.

 

p.582 독재자는 언제나 무자비했고, 조금도 아량이 없었다. 민주당은 때로 흔들렸고, 때로는 쓰러졌다. 그럴 때마다 일어섰고, 다시 앞으로 나아갔다. 그렇게 뿌리를 단단히 내렸으니, 이제 마음이 향하는 길을 걸어가도 국민이 바라는 그 길에서 결코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역사라는 제목을 달고서 시간순으로 사건이 나열되지 않은 구성은 다소 특이하다고 느껴졌으나 읽다 보니 각 장마다 결이 비슷한 사건들이 묶여 있어 이해가 어렵지는 않았다. 오히려 탄생, 분열, 통합, 수난, 저항이라는 각 장의 주제가 잘 느껴져서 원하는 주제부만 골라 읽기에는 더 나은 선택 같기도 했다. 4장과 5장을 읽을 때는 마음이 힘들어져서 몇 번이고 책을 덮었다 다시 폈다. 내게는 역사책 속 사건인 독재 정권 시절부터 2025년의 내란 종식까지, 현대사의 많은 굴곡이 책 안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한국 현대사에서 민주주의는 한 번도 그냥 공짜로 주어진 적이 없었다. 누군가가 광장에서 피 흘려 얻어낸 결과물이고 그 선봉에 항상 민주당이 있었다. 이건 찬양이나 선동이 아닌 담백한 사실이다. 민주당이 싫어도, 미워도, 아니꼬워도, 이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는 일이다.

 

이 책은 민주당을 무작정 추앙하고자 하는 책이 아니다. 그런 의도였다면 2장은 굳이 필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책의 각 장 사이에 흑백 사진과 까만 소제목 페이지가 들어 있어 책을 측면에서 봤을 때에 나뉘어진 장의 분량이 보이는데, 2분열의 순간이 얼마나 긴지 3장이나 4장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다. 그러나 이런 부끄러운 역사마저도 고스란히 담은 것은 그것 또한 민주당의 역사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저자와 민주당과 민주시민들은 그 분열을 딛고 일어서서 다시 앞으로 나아간다. 지난 겨울밤 동안 깨어 있는 시민이 비유적 의미가 아니라 진짜로 밤에 눈을 뜨고 깨어 있는 시민이라는 농담이 생겼다. 1955년 독재와 혼란 속에 창당된 민주당은 그렇게 70년간 한국 정치사에서 깨어 있는역할을 하는 거대 정당이 되었다. 민주주의를 구하기 위해 겨울밤 광장에서 촛불을 들고 깨어 있던 동지들에게, 한국 현대사와 정치사를 알고 싶으나 어떤 기준으로 무얼 찾아 읽어야 할지 모르는 사람들에게, 심지어는 민주당이 꼴같잖아 그들이 70년 중 틈틈이 해온 삽질을 자세히 알고 싶은 사람에게마저도 일독을 권하며 출판사의 건승을 기원한다.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솔직하게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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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어 올리버
올리버 색스.수전 배리 지음, 김하현 옮김 / 부키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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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294 인생에는 그런 순간들이 있다. 드물긴 하지만 내 우주에 있는 모든 별과 행성이 나란히 정렬하는 것 같은 때. 이날도 그런 순간이었다.

 

메일과 sns가 보편화된 현대에는 편지라고 하면 으레 문학과 낭만이 떠오른다. 반대로 과학이라는 학문은 굉장히 이성적이라는 이미지가 강해서, 문학과는 정반대에 있다고 여겨진다. 그래서인지 신경과학자였던 수전과 올리버라는 인물은 어쩐지 편지와는 조금 동떨어져 보인다고 느껴지기까지 한다. 그러나 과학은 분명히 낭만적인 학문이다. 올리버 색스의 글을 보면 더더욱 그렇다. 그의 글에서 드러나는 과학은 단지 수치를 재고 따지고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삶과 그 무엇보다 닿아 있는 학문에서 세계의 퍼즐을 맞추는 일이다. 서로를 누구보다 잘 아는 두 과학자가 깊은 우정으로 나눠 서로의 세상에서 퍼즐 조각이 된 편지가 디어 올리버에 고스란히 실려 있었다.

 

수전은 어릴 때부터 갖고 있던 사시 때문에 쉰이 다 되어가는 나이에야 세상을 처음 입체로 볼 수 있게 된다. 입체시 교정은 어릴 때만 가능하다는 정설로 인해 자신의 이야기를 할 곳을 찾지 못하던 수전은 올리버에게 편지를 보내고, 그렇게 둘의 우정이 시작된다. 반대로 올리버는 수전과 편지를 나누기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안구 흑색종으로 인해 시력을 잃어가며 세상을 평면으로 보게 된다. 두 사람의 세상이 교차되는 순간이었다. 게다가 그 흑색종은 그의 시각뿐만이 아니라 건강까지도 앗아가며 그를 죽음에 점점 가까워지게 만든다. 그러나 올리버는 좌절하는 대신 계속해서 쓰고 기록하고 연구한다. 책을 읽는 것도 편지를 쓰는 것도 멈추지 않는다. 수전 역시 그를 동정하는 것보다 격려와 위로를 보낸다(무려 두족류 봉제 인형으로).

 

p.293 올리버는 호기심을 보이며 저를 면밀히 살폈지만, 그와 동시에 늘 친절했고 종종 재미있었습니다. 저를 대상화하거나 내려다보는 일은 절대로 없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올리버는 저를 비롯한 많은 사람의 이야기에서 본질에 가 닿을 수 있었습니다.


둘의 편지에서는 끊임없이 올리버와 수전의 연구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지기 때문에 관련 지식이 있거나 두 사람의 기존 저서를 읽은 독자라면 좀 더 이해가 쉬울 듯하다. 다행스럽게도 대학 시절 뇌신경을 지겹게 공부한 입장이라 신경가소성이나 뇌에 관련된 이야기는 비교적 쉽게 알아들을 수 있었지만 시각의 상세한 부분들, 음악, 원소, 오징어들에 대한 이야기는 종종 곱씹어가며 읽어야 했다. 나중에는 갑오징어에 정이 드는 기분마저도 들어 올리버를 더 잘 이해하게 되었다는 뿌듯함마저 들었다.

 

또한 두 과학자가 편지로 나눈 삽화가 고스란히 삽입되어 있는데다 편지 원본을 스캔한 부분들은 서명이나 수정한 흔적까지도 그대로 드러나 독자들의 몰입도를 더욱 높인다. 어느 때에는 타자기로, 어느 때에는 알아보기 힘든 손글씨로 쓰인 편지들을 보며 이 문장들에 꾹꾹 눌러담은 희망이 얼마나 크나큰 것인지 가늠하다 보면, 이 편지는 단순한 안부인사가 아니라 그들의 삶에 대한 예찬이자 기록이고 서로를 온전히 이해하는 소통의 흔적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둘의 세상은 10년간 써내려간 150통의 편지를 품은 페이지들만큼 넓어지고 다정해졌다.

 

인간은 누구나 늙어 죽음을 맞이한다. 그 과정에서 몸의 주도권을 잃거나 어떤 감각이 손상되기도 한다. 그 과정에서 끝까지 함께 이야기를 나누어줄 친구가 있다는 건 얼마나 기쁜 일일까. 그들만큼 대단한 이야기는 하지 못하겠지만 오랜만에 친구에게 편지를 써볼까 싶다.

 

 

*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솔직하게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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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뚝들 - 제30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김홍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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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제공

 

p.59 불행을 통과한 인간에게는 질문이 찾아온다. 노크도 없이 불쑥 들어오는 질문은 불행한 인간을 더욱 불행하게 만든다. 불행한 인간은 대체로 자신이 겪은 불행으로 말미암아 질문에 대답하는 능력이 현저하게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펼친 자리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읽은 책은 오랜만이다. 바쁜 숏폼 시대에 발맞춰 문학계도 단편들이 주로 인기를 얻는 추세지만, 그런 시대이기에 더더욱 장편의 가치를 알아주는 한겨레문학상이 의미있다고 생각한다. 말뚝들은 평범하게 살던 주인공 장이 갑자기 납치를 당한다는 다소 특이한 이야기로 시작된다. 얼핏 보면 갑자기 나타난 말뚝들과 장의 삶은 별다른 관련이 없어 보이지만, 페이지가 넘어가면 넘어갈수록 말뚝들은 장에게로 점점 가까워진다. 같은 나라로, 같은 도시로, 회사로, 집으로. 마치 말뚝이 장을 찾아오는 것처럼.

 

이야기의 본질을 깨닫고 나면 아무렇지 않게 지나쳐 온 장면들이 다시금 벼락처럼 머릿속으로 찾아온다. 광장에서 말뚝을 보고 이유도 모르는 눈물을 흘리는 시민들, 그리고 그걸 백에 넣어서 치워버리는 정부. 처음 정부에서 나온 사람들이 말뚝을 백에 넣어 치우는 장면에서는 사실 이렇다할 특이점을 느끼지 못했다. 오히려 당연한 일이라고 느껴지기까지 했다. 그러나 소설의 후반부로 달려가면서 그 장면을 곱씹으면 어쩐지 소름이 돋는다. 슬퍼하는 국민들에게서 슬퍼할 까닭을 빼앗아가고, 사람들은 왜 슬퍼했는지도 모른 채 일상으로 돌아간다. 어떤 참사들은 충분한 애도의 시간을 갖지 못하고 그렇게 잊히고 만다.

 

p.248 누군가에게 말뚝은 전복된 선박의 선원이었고 부모였다. 바다에 가라앉은 자식이었고, 길에서 죽은 청년이었으며, 정리 해고로 생명줄이 끊긴 노동자였다. 그게 전부 살아남은 사람의 기억으로 쓰여 있었다. 지우는 사람이 기록하는 사람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했다.

 

300페이지에 달하는 장편의 구석구석을 스쳐가는 문장들에서 독자들은 같은 사건들을 떠올리게 된다. 참사가 남긴 일종의 트라우마다. 바다에 가라앉은, 길에서 죽은, 정리해고를 당한……. 그러나 슬픔은 빚과 같아서 묻어 놓는다고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이자가 붙어 더 커진 슬픔이 되어 돌아온다. 말뚝들은 그렇게 장의 삶에, 한국 사회에 나타났다. 정부가 묻어 두고 감춰 둔 슬픔들이 말뚝이 되어서 빚을 진 사람들의 거실까지 침입했다. 그들은 뉴스에서 집계되는 아무개가 아니라 이름을 가진 개인이다. 누군가 이름을 불러 주고 저승을 건널 삯을 쥐어주고 그들을 위해 실컷 슬퍼하고 울었을 때에야 비로소 말뚝은 사라진다.

 

왜 나한테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겠다는 장의 말에 데보라는 되레 왜 그런 일이 일어나면 안 되냐고 묻는다. 어떤 일은 그냥 일어나는 것이라고. 그 말은 마치 책 바깥의 독자들에게 얘기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불행을 겪은 누구나 장처럼 생각할 것이다. 왜 하필 나에게? 내가 뭘 잘못했다고? 그러나 데보라의 말처럼 어떤 사고는, 어떤 죽음은, 어떤 슬픔은 그냥일어난다. 말뚝들 중 그 누구도 내가 언젠가 말뚝이 되리라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 말은 동시에, 어느 누구도 그렇게 되어 합당한 사람은 없다는 말과 같은 뜻이다. 누구나 일상을 평온하고 안전하게 영위할 권리가 있다. 노동자든 학생이든.

 

자동차 납치와 시랍화 된 시신이라는 다소 비현실적인 소재들이, 백종원의 역전우동이나 배철수의 라디오라는 지나치게 일상적인 이야기와 맞닿아 순식간에 몰입도를 올린다. 무거운 이야기를 하는데도 페이지가 술술 넘어가도록 독자를 빨아들이는 흡입력이 대단한 책이었다.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솔직하게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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