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죄
이언 매큐언 지음, 한정아 옮김 / 문학동네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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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영국작가 이언 매큐언의 이 두꺼운 장편소설을 작년에 앞부분의 분수대 장면까지 읽다가 말았는데, 이 참엔 맘먹고 완독했다. 1년 정도의 시간이 흘러서 기억이 가물가물한지라 처음부터 읽어야 했는데, 다시 읽으면서 내가 왜 읽기를 중단했는지 알겠다. 이 소설에 대해서 언론을 포함한 권위자들의 찬사를 보니 작가의 문체에 대해 섬세하고 장중하다고 평가한다. 영어 원본을 읽지 못해(능력도 안된다.)잘 모르겠지만 솔직히 섬세하다는 표현은 지나치게 세밀한 묘사로 지루하다는 인상이고, 장중하다는 의미는 엄숙하고 묵직하며 지적이다는 뜻이 아닌가 싶다.

 

또한, 역자후기를 보니 브리오니의 생각을 묘사한 부분은 버지니아 울프의 문체를 연상시킨다고 하는데 역시 의식의 흐름기법을 써서 그런지 초반이 다소 지겹기는 하지만, 1부 후반부터는 이 소설의 미덕인 감동적인 스토리와 예기치 않은 반전을 맛 볼 수 있다.

 

1930년대 중반 영국 남부 중산층 가정을 배경으로 13살 소녀인 브리오니와 23살인 언니 세실리아, 그리고 세실리아와 사랑을 막 시작한 파출부 아들 로비. 이렇게 세 명의 주인공이 등장하는 이 소설은 1,2,3부와 에필로그 등 총 4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사실 공상과 글쓰기를 즐기는 사춘기의 브리오니는 언니의 연인이 된 로비를 사랑했던 것인데, 1부에서는 로비를 사이에 둔 자매간의 삼각관계를 다루는 연애 소설인가 싶다가 분수대 장면과 서재 장면을 거쳐 사촌 롤라의 성폭행 장면에 이르기 까지 영화 라쇼몽을 연상시키는 시점변화가 이채롭다.브리오니의 의도된(?) 판단착오로 억울하게 성폭행범으로 몰린 로비가 체포된다. 2부에서는 작년에 본 영화 덩케르크를 떠오르게 하는 전쟁 소설인 듯도 한데, 브리오니의 일관된 진술때문에 강간혐의로 기소되어 재판을 받은후 3년 넘게 감옥살이를  한 로비.그가 화자로 등장하면서  전쟁터로 떠나 수많은 죽음을 목격하고, 독일에 패퇴한 후 귀국을 위해 덩케르크를 향해 가는 1940년의 상황이 그려진다. 3부에서는 속죄의 의미로 수련간호사라는 고행의 길을 가는 브리오니를 중심으로 하는 메디컬 드라마가 연출되다 후반엔 진짜 성폭행범이 누구인지 밝혀진다. 용서를 빌기 위해 언니 세실리아를 찾아간 집에서 브리오니는 로비와도 재회한다.그리고, 마지막 편 에필로그에서는 운명의 1940년으로부터 59년이 지난 1999년 런던을 배경으로 77세의 유명소설가가 된 브리오니의 시점에서 또 다른 반전이 일어난다.

    

이 소설을 꼼꼼하게 의미를 되새기며 다 읽고 나니 세련되고, 섬세한 심리묘사와 서사의 구성적 묘미가 압도적일뿐더러 작가가 이 소설을 쓰기 위해 얼마나 많은 자료와 정보를 취합하고 공부했을지 짐작 될 만큼 공들인 흔적이 역력하다. 과연, 이언 맥큐언의 최고 걸작이라는 찬사가 입에 발린 소리는 아님을 알 수 있다. 인상적인 몇 장면을 꼽아본다.

 

결국 다시는 만나지 못하는 연인들의 안타까운 이별장면.

[그녀는 그의 뺨에 눈물을 흘렸고 그런 슬픔 때문에 그녀의 입술은 그의 입술을 더욱 강하게 끌어당겼다. 버스가 다시 도착했다. 그녀는 그에게서 떨어져 나와 그의 손목을 꼬옥 쥐더니 한마디 말도 없이 버스에 올라탔다.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그는 그녀가 자리에 앉는 것을 지켜 보았다. 버스가 움직이기 시작했을 때에야 그는 자신도 버스에 올라 병원까지 그녀와 함께 갔어야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그는 다음 정류장에서 버스를 따라 잡을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며 차도를 따라 뛰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녀가 탄 버스는 저 멀리 달려가고 있었고 곧 의사당 앞 광장으로 사라져 버렸다.(292)

 

로비가 겪는 전쟁의 비극과 무참한 죽음을 묘사하면서도 삶은 계속된다는 사실을 서술하는 듯하지만 후반의 반전을 역설적으로 암시하는 장면.

[전쟁은 전쟁광들의 취미일 뿐 심각할 건 없었다. 사냥개를 풀어 미친 듯이 사냥감을 쫒는 동안, 울타리 저 너머로 지나가는 자동차 뒷좌석에 앉은 여자는 뜨개질에 여념이 잆었고, 새로 지은 집의 휑한 정원에서는 한 남자가 아들에게 공차기를 가르치고 있다. 그렇다. 쟁기질은 계속될 것이고, 누군가는 그 농작물을 거둬들여 빻을 것이며, 또 누군가는 그것을 먹고..... 모두 다 죽지는 않을 것이다.....](332)

 

후반의 반전이 돋보이는 이 소설을 자세히 다시 읽어보면, 초반에 이미 복선이 깔려있음을 알수 있는데 분수대 장면을 두고 전지적 작가 시점에서 서술한 부분을 살펴보자.

[이 어린 소녀가 창가로 되돌아가 바깥을 내다보았을 때, 자갈길에 생겼던 젖은 자국은 증발해 버리고 없었다. 이제 기억을 빼고는, 세 명의 마음속에 남은 같은 일에 대한 서로 다른 기억을 빼고는, 분수대 옆에서 일어난 무언극을 증명하는 것은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되었다. 진실은 허구만큼이나 붙잡을 수 없는 유령 같은 것이 되어버렸다. 브리오니는 지금 당장 작업에 착수 할 수 있었다. 우선 자신이 본 내용을 글로 옮기는 것, ~ 그리고 나서는 세실리아 언니의 눈을 통하여, 그 다음에는 로비의 눈을 통하여 그 장면을 재구성하면 될 것이었다.](68)

 

이렇게 독자의 글 읽기를 방해하는 듯한 갑작스런 작가의 틈입은 '기억과 진실'이라는 문제에 대해 파고들면서 '왜곡과 오류'의 가능성을  내비치다가 결국 이 소설을 소설이란 무엇인가? 또는 소설가는 누구인가? 하는 매우 본질적인 물음과 함께 이야기의 중첩성을 암시하는 기능을 한다. 그래서, 이 소설을  소설()() 위한 철학적,우화적 소설로 읽히게 하는 역할까지도 하지 않나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이 소설의 에필로그 마지막 페이지에 솔직하게 드러나는데 ,여기서 [소설가가 결과를 결정하는 절대적인 힘을 가을 진 신과 같은 존재라면 그는 과연 어떻게 속죄를 할 수 있을까? ~ 소설가 바깥에는 아무도 없다. 소설가 자신이 상상 속에서 한계와 조건을 정한다.]라는 소설속의 소설가인 브리오니의 진술을 빌어 이언 매큐언의 철학이 언급된다. 따라서 소설가에게 속죄란 불가능하고 필요 없는 일이기에 이 소설에서 브리오니의 잘못()() 결코 용서받지도, ‘속죄되지 못한다. 그래서 브리오니는 다시 이 소설의 결말을 아래와 같이 재구성해 볼 수도 있는 것이다.

 

[내 생일 축하파티에 그들이 모습을 드러내는 것으로 그려낼 힘이 있다면.....아직까지 살아 있는 로비와 세실리아가 서재에 나란히 앉아 <아라벨라의 시련>을 보며 미소짓는 것으로 결말을 바꿀 수 있다면.....불가능하지는 않다.](521) 아마도 브리오니가 한숨 자고나서 다시 손을 댄다면 이 소설의 결말이 해피엔딩으로 바뀔지는 모르겠지만, 현실의 소설가 이언 매큐언은 결코 결말을 바꾸지 않을 것이다(않았다). 지금까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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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키모카 2018-06-24 17: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처음부분 읽다가 손을 뗐는데 꼭 읽고싶은 작품이에요. 스포가 될까봐 첫부분만 읽었는데 다 읽고 나서 후기 제대로 읽겠습니다^^

sprenown 2018-06-24 18: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예, 꼭 완독하시기 바랍니다.^^
 
중세는 정말 암흑기였나 살림지식총서 25
이경재 지음 / 살림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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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중세에 대해 재평가하는 분위기가 확산되어 입문서 수준의 맛보기용으로 훑어봤다. 흔히들 중세는 서로마제국 멸망(476)과 게르만족의 대이동이 있었던 5세기부터 르네상스와 더불어 근세가 시작된 15세기 또는 1453년 동로마 제국(비잔티움 제국) 멸망까지의 약1,000년을 일컫는다. 이러한 시대구분에 대해 유럽에만 한정할 뿐 동양사에는 적용하기 어렵다는 의견도 있는 모양이다.

 

책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중세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떠한 것도 생성되지 않는 암흑기는 아니었다는 것이 이 책의 주제다. 당연하다. 아무리 중세가 암흑시대라 한들 그 시대에도 사람은 살고 있었고, 먹고 살아야 했다. 그러니 학문과 예술이 신 중심의 가치관으로 교조적이며 단순하다 할지라도 나름의 삶의 방식과 철학이 있었을 것이다. 중세시대의 신학을 비롯해서 교부철학이니 스콜라 철학이니 하는 어려운 주제에 대해 별로 아는 바 없고, 또 알고 싶지도 않다. 그런거야 중세를 전공하는 학자나 작가 등 중세로 먹고 살아야 하는 자나 무조건 중세(또는 그 분위기)가 좋다는 중세 덕후들의 몫이지 나같이 근·현대의 산출물에 대해서도 허덕대고 있는 일반독자에게는 중세일반에 대한 인문학 고전이나마 찾아 읽는 것도 벅찬 듯 하다.

 

저자는 토마스 아퀴나스 전공자 답게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적 세계관을 이어받은 아퀴나스의 사상을 중심으로 인간의 본질이란 동물적 욕망덩어리나 신의 지시에 의한 기계적 도구가 아닌 도덕적인 선의지를 가진 자율적 존재임을 강조한다.

 

또한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했다고 하는 알기 위해서 믿는 것이 아니라 믿기 위해서 알아야 한다는 언술과 신 존재 증명 논쟁 등을 통해 종교가 앎의 영역인지, 믿음의 영역인지와 관련한 풀리지 않는 문제들을 언급하면서 '역설적'으로 중세는 이성을 매우 중요시한 시대였음을 역설한다.

 

물론 일리 있는 주장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중세를 인간중심의 휴머니즘 시대라거나 이성중심의 부흥기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인류역사를 통시적, 정량적으로 보는 시대구분으로서의 중세는 공시적, 정성적 구분으로서 암흑기였음에는 틀림없다. 그래서 르네상스시대가 도래한 것 아니겠는가?

 

요즘 학계나 출판계의 중세에 대한 재평가 분위기는 어쩌면 유행했던(하고 있는)포스트모더니즘에 의한 전복적 사고와 더불어 중세를 전공한 학자들과 불황에 시달리는 출판계의 영역(파이) 키우기를 위한 공급측면이 중세에 대해 알고 싶어하는 수요측면의 독자들을 이끌고 가는 양상으로 1,000년이라는 기나긴 시대의 축적물에 대한 부분적 연구성과와 게임, 영화 등을 통해 새로움(마술적이고, 기괴한)에 대한 호기심에서 일어난 일시적 현상에 불과하지 않을까? 아니면 자본의 생리상 더 이상 우려 먹을 게 없는 학계나 출판계에서 중세가 새로운 블루오션으로 등장한 것이 아닐까? 삐딱하게 생각해 본다. (이런 삐딱함은 최근 북미회담의 성사를 두고, 트럼프가 한반도의 평화를 염원하는 척하면서도 결국은 북한의 부동산가치에 커다란 관심을 갖고 있어 가능하지 않았을까? 중국 견제라는 정치적 목적외 향후 북한의 부동산가치와 무역이익이 더 탐났을 수 있지 않았을까? 로 이어진다)

 

내가 살고 있는 현대는 근대 르네상스 이후 이성중심, 인간중심의 사고에서 출발한 것이 확실하다. 하기야 그 근대라는 것도 중세라는 보이지 않는 수면아래의 거대한 빙산에서, 수면위로 간신히 드러난 일각에 불과하다는 주장에는 머리를 끄덕일 수밖에 없다. 그나저나 이 게으른 독자는 하위징아의 중세의 가을이나 움베르토 에코의 중세1,2,3,4은 도대체 언제쯤 읽을 수 있으려나? 에코의 중세는 1,000년처럼 너무 길어 엄두를 낼 수 없고, 하위징아는 왠지 가을에 읽어야 분위기가 살 것 같긴 한데, 올가을쯤에나 만나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 안되면 내년 가을.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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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17 06: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그림 속 나의 인생 - 김원일 산문집
김원일 지음 / 열림원 / 200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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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좋아하는 <겨울 골짜기>,<마당 깊은 집>,<불의 제전>의 작가 김원일. 그의 그림에 대한 산문집이다. 미술 문외한이 내가 알라딘 중고서점에서 이 책을 발견하고, 선뜻 구매한 이유는 요즘 그림에 관심을 가져 볼까 하던 참인데다 그의 소설은 많이 읽었지만 한번도 읽어보지 못한 그의 산문집이기 때문이고, 게다가 그림에 대한 글인 까닭이다.

 

소설가는 그림을 어떻게 이해하고, 해석할까?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아마도 그림과 화가에 대해 이미지와 이야기를 엮어서 자신의 삶에 투영해 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은 이 책을 읽으면서 그대로 적중했다. 수준에 맞는 딱 내취향이다.

그가 쓴 소설 <노을>을 읽으며 상당히 회화적이다는 느낌을 받은 적이 있었는데, 작가에 대해 알아보니 어린 시절 그림과 화가에 대한 열망과 동경이 있었던 모양이다. 특히 <발견자 피카소>라는 그림 해설서까지 낸 걸로 보아 피카소를 가장 좋아하지 않았나 싶다.(운좋게 <발견자 피카소>도 같이 구매했다.)

 

책 서문격인 글쓴이의 말을 보면 내성적인 소년 시절에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던 순정이 이 나이가 되도록 미련으로 남았던가, 언젠가 다시 그림을 시작해보겠다는 꿈을 간직한 채 유명한 화가의 그림을 쫒아 다닌 탓일까.”(6) 그의 그림에 대한 열망이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다. 화가가 되고 싶었지만, 남로당 간부인 아버지, 월북자 가족 장남으로서의 가난하고, 신산한 삶이 그 길을 막았을 것이다. 글쓰기는 종이와 연필만 있으면 되는, 뻗쳐오르던 예술적 열망을 펼칠 수 있는 가성비 좋은 방편이었을 테니, 소설은 그에겐 어쩌면 숙명일 수밖에.

 

그림에 조예가 깊은 소설가의 글 답게 밀레의 이삭 줍는 여인들부터 시작해서 베이컨누워있는 여자에 이르기 까지 유명 서양화가, 뿐만 아니라 장승업의 호취도, 김관호의 해질녁등 우리나라 화가의 이름난 그림까지도 망라하면서 그림과 화가에 대한 이야기를 유장하게 풀어 놓는가 하면, 그림과 관련된 작가 개인의 삶 또는 아픈 가족사를 반추하면서 쓴 글들에는 김원일 특유의 감성이 묻어나고, 묵직한 울림이 있다. 예를 들어 고갱의 그림흰 말」앞에서 영국 소설가 서머싯 몸의 달과 6펜스을 떠올리며, 고갱의 삶에서 토마스 만의 시민성예술성의 갈등과 긴장을 느낀다던지, 로트레크의 아델 백작부인의 초상에서는 슬픔에 잠긴 어머니의 모습속에서 슬픔을 이기는 인내를 느끼며 엄격하고, 강인했던 홀어머니를 생각하며 가족사를 언급하는 것이다.

 

한편, 그림에 취해선지 과거 회상에 취해선지인지 모르지만 이러한 감성적 글쓰기가 글의 논리적 전개와 모순된 듯 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퇴폐적인, 황홀한 관능미, 클림트의 키스에 대한 글을 보자.

 

[여자의 옴츠린 어깨와 얼굴을 두 손으로 다소곳하게 감싼 그림속의 남자 옆모습은 에티오피아의 용병인 듯 완강한 넒은 어깨에 근육질의 구리색 피부요 곱슬머리다.그런 강건한 체격이 여자들이 잠자리에서 원하는 전형적인 남성성이다. 눈을 살풋 감고 남자에게 입술을 찍히려 교태를 부리듯 넓은 망토 안에 몸을 반쯤 순긴 여자야 말로 여성성의 아름다움을 한껏 뽐내는 요염한 자태다. 매달리듯 팔을 남자 어깨 뒤로 돌리고 무릎을 꿇은 여자의 맨발이 풀밭 끝 벼랑에 떨어질 듯 닿아 있다. 남자에게 매달리지 않거나 남자가 포옹을 풀어버리면 벼랑 아래로 떨어질 듯 위태로워 보인다. 숨막히는 사랑의 절정, 풀밭의 절정에서 관능만의 몸과 몸이 맺어 지는 한 순간이다.(34) 그래, 그렇다 치고.

 

마지막 서술은 이러한 감상평에 대한 비판을 의식한 듯 느껴져 왠지 불편하고, 어색하다. [키스에서도 보여주듯, 클림트는 겹겹의 옷 속에 은밀하게 감추어져 있던 여성의 관능을 대담하게 밖으로 끌어내어 남성의 지배 아래 놓였던 여성의 상대적 평등과 화해를 시도했다. 그러므로 클림트는 그의 사후, 여성의 활발한 사회 진출과 함께 성의 담론을 본격적으로 매스컴에 올리는데 크게 공헌했다.페미니즘 시대가 곧 도래할 것임을 그는 이미 예견하고 있었을까.](37)

 

클림트의 키스가 페미니즘의 길을 연 위대한 작품이란 말인지, 아니면 역설의 미학을 표현 한 건지, 아리송하다. 어쩌면 이러한 방식의 서술이 그의 소설이 갖고 있는 한계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비겁? ‘시민성예술성사이에서의 고뇌의 흔적? 균형감각? 그럼에도 그는 당대 누구 못지 않은 개방성과 진보성, 인간애와 진정성을 갖춘 뛰어난 소설가임에는 틀림없다.) 돈이 없어 화가의 길을 가지 못하고, 먹고 살기위해 신문을 돌리면서 간신히 학교졸업을 했던 그. 집안을 일으켜 세워야 한다는 장남으로서의 책임감...7,80년대 엄중한 군사독재 정권에서 소설을 쓰면서도 알게 모르게 자기검열을 해야 했던 트라우마가 작용했던 것이 아닐까? 어쩌면 그는 우리의 가부장적 사회에서 여성 못지않은 피해자였을지도 모르겠다.

 

고통의 뿌리라 할 수 있는 아버지. 원망과 그리움의 대상인 아버지를 생각해서였을까? 이 책에는 아버지로 인해 가난과 고통을 겪은 가족사가 자주 등장한다. 유형지에서 돌연 귀가한 혁명가를 그린 일리야 레핀의 아무도 기다리지 않았다편에서는 유격투쟁을 벌이고, 월북한 사회주의 혁명가였던 아버지가, 삶의 벼랑으로 내몰린 가족을 그린 케테 콜비츠의 스케치화 시립구호소편에서는 아버지의 월북이후 삯바느질로 연명하며 고단한 삶을 산, 그래도 세상에 대해서는 자존심을 지키던 어머니가, 온유한 그리스도의 모습을 그린 조르주 루오의 작품 성스러운 얼굴편에서는 형님, 나 더 좋은 시를 쓰고 싶은데...”마지막 말을 남기고 25세 꽃다운 나이로 요절한 시인 막내아우가 등장한다. 눈물겹도록 애달픈 가족사다. 후반부에 월북화가 길진섭외 3인의 전쟁이 끝난 강선 땅에서라는 작품 설명에서 작가의 단상은 다음과 같이 이어진다.

 

[통일이 된다면 자기 이념의 선택으로 월북한 예술가들의 그 땅에서의 삶과 내면적 고뇌를 듣고 싶다. 분단 반세기를 넘겼으니 이제 얼추 세상을 떠났을 테고, 청소한 나이에 월북하여 아직 생존해 있을 살아남은 인사를 생각해서라고 통일이 더 늦추어져서는 안된다.](201)

 

이 책이 거의 20년 전에 출판되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청소한 나이에 월북한 사람들도 생존해 있을 확률은 거의 없다고 봐야한다. 북미정상회담을 앞두고, 이제 한반도의 봄이 더욱더 무르익어 열기를 더해가고 있다. 이 기회를 놓치면 결코 안된다는 절실한 심정으로 한반도의 평화, 나아가 한반도의 통일을 염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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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로 보는 서양미술 살림지식총서 176
권용준 지음 / 살림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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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가 더워지는 요즘은 두꺼운 책보다는 이런 식의 소책자 형태의 책들에 눈이 간다. 작고, 얇은 책이면서도 무식을 면할 만한 기초지식이 나름대로 알차게 담겨 있는데다 가격도 착하다.

 

일단 목차를 보면,

인간- 절대미의 탐구

()의 이름으로: 관념적 리얼리즘

죽음-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향락 혹은 그 반대로

이성에서 감성으로

 

이것만 봐도 뭔가 화~악 땡기는 느낌? ㅎㅎ

일단 이 책은 기본적으로 저자의 서양미술에 대한 주관적 느낌과 이해를 바탕으로 씌여졌다. 물론 전문가가 보기에는 미흡해 보일수 있겠지만, 나에게는 서양미술을 보는 시야를 틔여 주었다는 점에서 유용하다.

 

[인류역사를 통시적으로 볼 때, 구석기는 시각성을 앞세우며 신석기와 이집트는 관념성을 추구한다. 고대 그리스 로마시대에는 시각성을, 중세에는 관념성을 주로하고, 르네상스 및 철저한 이성의 예술인 고전주의는 다시 시각성을 위주로 한다. 그리고 인간의 감성을 인식의 수단으로 하는 낭만주의는 관념 중심이며 사실주의는 그 반대이다. 이후의 인상주의와 야수파,입체주의 등 현대 미술은 다분히 관념성을 우위에 두고 있다고 할 수 있다.](44)는 서술은 단순하고 투박하지만 상당한 통찰력이 있는 듯 하다.

 

또 이 책의 미덕은 서양미술사에서 중요한 작품에 대해 그 배경과 저자의 이해를 이야기식으로 엮어내서 재미와 지식을 얻을 수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메멘토 모리: 한스 홀바인의 대사들편을 보면 바니타스에 대한 생각을 가장 적확하게 표현한 작품으로 꼽으면서 이 작품하단에 위치한 해골의 왜상(anamophosis)’에 대해 분석한 내용은 꽤나 흥미롭다.

 

[이 해골에 맑은 크리스털 잔을 갖다 대면 양옆이 수축되면서 두개골의 모습이 확연하게 잔에 맺힌다는 사실을 상기하자. , 두개골의 코 부분과 왼쪽 눈 부분에 유리잔을 갖다 대면 그 컵속에 두개골의 형상이 그 정확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런 구도에서라면, 댕트빌의 성에서 만찬이 한참 진행되는 동안 알코올의 취기와 들뜬 분위기의 열기를 이기지 못한 사람이 석연찮았던 초상화 속의 이미지를 확인하기 위해 거실로 나와 그림의 주인공에게 잔을 들어 건배를 청하는 순간 컵 속에 느닷없는 죽음의 이미지가 새겨졌을 것이다. 좌중의 웃음과 알코올의 열기가 그 형상 앞에서 무슨 가치가 있겠는가?](59)

 

덧붙이고 싶은 이야기는 낭만주의 선구자인 제리코의 메두사의 뗏목에 대한 배경설명과 세심한 분석에 대한 것이다. 프랑스에서 아프리카 식민지 개척이라는 명목으로 황금에 눈이 멀어 대서양에 띄운 배가 뇌물을 주고 그 배의 선장이 된 부패하고 무능한 인물 때문에 좌초된 사건을 묘사한 이 그림.

 

굶주림과 갈증, 죽음의 공포 속에서 삶에 대한 아무런 희망도 없이 그저 뜨거운 열기의 바다를 떠다니다 느닷없이 배를 발견하고는 새로운 삶의 희망이라는 환희의 감정을 안게 된 순간을 그린 것이라는 일반적 평가와 더불어 [~ 중앙의 시체는 바다에 떠밀려가야 하는데 다리가 나무에 끼었다. 그래서 바다로 떠내려가지 못한 채 상체가 바닷물에 잠겨 퉁퉁 불어 부유하고 있는 것이다. 이 자가 입고 있던 옷은 뒤로 뒤집혀 지고 얼굴은 바다에 잠겨 인물의 형체를 알아볼 수 없다.~ 그 노인의 왼쪽으로는 어떤 사람이 앞으로 넘어져 고꾸라져 있고, 술통 옆에서 나뒹굴고 있는가 하면, 삶에 대한 새로운 희망을 부르짖는 동료들의 외침 소리에 몸을 가누며 소리가 나는 곳을 향해 몸을 드는 사람들도 있다. 그리고 뗏목 가운데에는 피 묻는 도끼가 보이는데, 바로 이 도끼가 굶주림과 갈증을 이기지 못해 동료를 살해했던 도끼이다.](84,85쪽 발췌)

 

이런 다양한 주제와 이야기를 전하는 그림들이 20세기 현대에 와서 회화의 본질을 회복하고자 형태보다 색을 중시하고, 눈으로 본 것이 아니라 대상에 대해 주관적으로 생각한 것을 화폭에 옮기면서 추상화되고 있는 상황으로 이어졌다고 한다. 글쎄... 회화의 본질은 무엇일까? 사람마다 취향과 호불호가 있겠지만 나 같은 그림 초보자는 이야기가 있는 시각적 리얼리즘, 사실주의 화풍에 끌리고 더 마음이 움직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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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가치 비타 악티바 : 개념사 8
박영균 지음 / 책세상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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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출판사 책세상에서 나온 Vita Activa 개념사 시리즈인가 본데, 작지만 상당히 알차게 구성되어 있다. 그래서인지 알라딘 중고서점에 이런 책이 나오면 선뜻 구입하게 된다. 책날개 안쪽을 보니 일단 저자는 마르크스에 대한 탈현대적 모색과 21세기 변혁의 새로운 희망을 꿈꾸며 <진보평론> 편집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는 박영균 교수다. 그러니까 이 책은 마르크스 사상에 기반한다는 얘기다.

 

그래서 저자는 노동에 대한 사유가 윤리적이고 철학적인 영역과 사회학적이고 정치학적인 영역, 그리고 정치경제학적인 영역 전반에 걸쳐 어떻게 진행되었으며 최종적으로 마르크스에 의해 이 세 영역이 어떻게 통합적으로 제시되는지를 살펴보고, 노동가치에 대한 역사적 전개과정을 따라 관점의 차이점을 드러내며 노동가치의 현재적 의미를 제시하고자 한다”(왜 노동가치인가: 12,13)고 밝히고 있다.

 

노동에 의해 소유권의 정당화가 이루어진 것이다는 논리는 존 로크(1632~1704)에 의해 확립되었는데, 그러면 자기가치를 증식하는 자본의 소유권은 어떻게 정당화 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은 차치하더라도 노동가치에 대한 논쟁은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아마도, 아담스미스와 리카도의 노동가치론을 받아들인 마르크스(잉여가치론으로 발전)로부터 촉발되었던 모양이다.

[역사적으로 이 논쟁은 마르크스가 <자본>을 쓴 직후 제기된 여러 논쟁들에서 비롯되었다. 마르크스는 가치와 생산가격의 괴리문제가 개별 자본의 입장에서는 발생하지만 사회적 총자본 이라는 입장에서는 발생하지 않는다고 보았다. 이 생각을 표현한 것이 바로 총가치=총생산 가격, 총잉여가치=총이윤이다. 그러나 한계효용학파의 창시자로 여겨지는 오스트리아 경제학자 뵘 바베르크(1851~1914)1896<마르크스 이론 체계의 종언>이라는 책에서 <자본>1권과 3권이 모순적이며 평균 이윤율과 생산가격에 관한 이론 사이에는 치명적인 결함이 내포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이에 독일 사회민주당의 이론가였던 힐퍼딩(1877~1904)이 즉각 반론을 제기하면서 오늘날 가치 논쟁또는 전형 논쟁이라고 알려진 논쟁이 시작되었다.](131,132)고 한다.

 

아마도 죽을 때까지 읽지 못할 마르크스의 <자본>을 당연히 읽어보지 못한 내가 뭐라 말할 입장도 아니고, 이러한 논쟁의 전개과정을 제대로 이해할 능력도 없다. 다만 마르크스 입문서나 인터넷 강의를 통해 간신히 알게 된 경제학 기초지식을 동원해 마르크스의 경제사상을 나름대로 정리해 본다.

      

일단 경제성장의 원동력을 주류경제학은 자본으로, 마르크스 경제학에서는 노동으로 본다.(노동가치설: 노동만이 가치를 창출한다.) , 외형적으로 자본으로 보이나 실질적으로는 노동이다는 것이다. 따라서 자본은 절대로 잉여가치를 생산하지 못한다.

마르크스의 주장에 따르면, 자본주의는 생산수단을 가진 자본가가 노동자를 착취하는 사회로 죽은 노동이 산 노동을 지배하는 사회다. 다시 말하면, “과거노동에서 축적된 자본이 현재의 노동을 억압하고 지배한다. 또한 현재 노동이 새로 창출되었다면, 과거노동은 단지 투입물에서 산출물로 이전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노동에서 착취가 발생하는 이유는 사용가치(노동가격)교환가격(임금=생계비)이다. ,형식적으로 등가 교환인 것 같지만 실질적으로는 부등가 교환인 것이다.(정보의 비대칭성으로) 자본가의 착취방식은 노동자들을 더 오래, 더 열심히 일하게 한다.(절대적 잉여가치 추구) 이윤추구를 위한 경쟁을 통해 한계에 도달하게 된다. 그래서 사회기술 발전노동(가변자본)투입감소’, ‘자본(고정자본)투입증가잉여가치 감소하게 된다.(평균이윤율 저하경향의 법칙) , 자본가는 고정자본을 늘려 임금만큼의 가치생산에 필요한 시간을 짧게 만든다.상대적 잉여가치추구.(자본주의는 성장을 멈춘다.)

 

여기서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일어나는 이유가 설명된다. 자본의 유기적 구성 고도화 평균이윤율 하락 노동자의 증가 공장규모의 증대 노동자의 조직화 평균이윤율 더 하락. 이러한 과정을 통해 자본주의는 필연적으로 몰락하고, 프롤레타이아 혁명이 일어나 공산주의사회가 도래한다는 것이다. 다시말해, 마르크스도 맬서스의 영향을 받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생산물 총액이 산술급수적으로 증가하는 임금(소비여력)총액 보다 더 커지게 되는 가치실현의 실패(‘공급이 수요를 창출한다는 고전경제학자 세이의 법칙이 깨진다.)를 얘기한다. 그래서 수요보다 공급이 더 많아 필연적이고, 영구적인 공황이 일어난다는 것이다.(자본주의의 내재적 모순)

 

이와 관련하여 마르크스의 빈곤 궁핍화테제를 보면, 자본가 계급내 경쟁 자본의 유기적 구성 고도화 산업예비군 증가(실업자) 임금하락(자본가 이윤증가) 빈부격차 증가 로 이어져 빈부격차의 심화로 인해 자본주의는 필연적으로 붕괴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변증법을 통해 마르크스는 [생산력의 발전이 생산의 사회화에서 나오는 것, 즉 생산을 둘러싸고 거기에 참여하는 인간의 사회적 힘이 집약된 결과로 보았고 그래서 생산력 발전의 몫은 인류 공통의 자신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바로 자본주의 이후의 대안적 사회, ‘생산의 사회화에 조응하는 생산수단의 사회화로 조직된 사회, 즉 공동체가 생산 수단을 소유·통제하고, 생산-소비-기획을 공동체 전체가 자치적인 원리에 의해 자율적으로 통제하는 사회로 제시되었다.](126)

 

마르크스가 꿈꾸는 이러한 공산주의 사회가 도래하지 못하였다는 사실은 이미 역사적으로 확인되었다. <21세기 자본>의 저자 피케티의 마르크스 비판에 의하면, 19세기말 노동자의 구매력 확산이 발생하였고, 지속적인 기술진보와 꾸준한 생산성 향상 가능성을 무시했다는 것이다. 그는 프랑스 아날학파의 전통에 따라 250년간의 부의집중과 분배에 관한 연구를 통해 자본의 수익률이 경제성장률보다 높아질 경우 불평등 또한 그에 비례해 늘어난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상당히 설득력이 있다. 마르크스의 주장과 달리 자본주의가 승승장구하면서 현재의 부의 독점과 경제적 불평등이 심화되는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다.

      

아마도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교활한 자본주의는 불평등이 심화돼 붕괴될 조짐이 생기면 또 다른 정책적 결정을 통해 교묘하게 계속 유지해 갈 것이다. 일단 경제적 불평등 해소문제와 관련해서도 피케티가 주장하는 글로벌 자본세는 도입되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그동안 경제적 불평등이 더 심화되더라도 체제에 위협이 된다면 모를까. 신자유주의를 공고히 하고 있는 미국을 위시한 국가들의 이해관계로 국가간의 합의하기도 어렵겠지만, 도입되어 일정부분 영향을 준다하더라도 국가간, 계층간 경제적 불평등이 제대로 해소될지도 의문이다.

       

[마르크스는 자유로운 개인의 노동이 자기 삶의 가치를 실현하는 사회적 과정이 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여기서 새로운 공동체는 근대적인 합리성의 통제를 받는 세상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개인들의 차이가 생성의 힘이 되는, 역동적인 삶의 공동체다. 이런 측면에서 노동의 종말은 노동의 가치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에 의해 강제되는 노동을 부정하는 것이다. 그것은 노동에 의해 창조된 가치가 오히려 각 개인의 삶을 통제하는 권력이 되는 세계, 즉 자본주의의 소유권을 벗어나 노동이 자기 가치화하는 세상을, 사회적 연대와 접속을 통해서 개인의 노동이 사회적 노동 과 가치가 되는 코뮌을 건설해야 한다는 지향을 보여주고 있다.](163, 164) 역사적으로는 실패했다 할지라도 앞으로 언젠가는 나의 노동이 가치있게 대접받는 사회, 마르크스가 꿈꾸는 이런 세상, 이런 공동체가 건설되는 날이 올 수 있을 것인가?

 

인간의 이기적 욕망이 사라지지 않는 한, 그 욕망을 가장 체계적이고, 이론적으로 구축해 설사 반대하거나 저항하는 모든 것들에 의해 위기를 맞게 되더라도 그것들을 변형해 스펀지처럼 체제내로 흡수해 버리고 마는, 놀라운 생명력을 가진 이 자본주의... 아마도 접두사는 바뀔지언정 결코 붕괴되지는 않을 것 같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순진하고, 순박하게 로크 식으로 말한다면, 결국은 체제내에서 개인과 개인, 국가와 국가 등 경제활동 주체 상호간 이기적 욕망을 이성적, 민주적으로 통제할수 있는 사회계약을 맺어 각자의 노동이 가치를 인정받고, 평등하게 존중되는 사회, 인간의 얼굴을 한 ~ 자본주의사회를 향해 나아가는 것...그 꿈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 아닐까 싶다. 과연?...글쎄...

조금 엇나간 얘기긴 하지만, 이익을 위해서는 최소한의 신의마저 져버리는 자본주의의 교활성은 이번 미국 트럼프의 북미회담 취소통보에도 여실히 드러나는 듯하다. 씁쓸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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