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영원한 제국
이인화 지음 / 세계사 / 1993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처음 이 책을 접한 대학신입생시절, 마지막장을 덮은 후 끓어오르는 감동을 억누를길이 없어 애꿎은 친구 불러내 소주와 조선당쟁사 이야기로 하룻밤을 보냈던 기억이 내게 있다. 그때는 정조가 그렇게 멋있을 수 없었으며, 그 '위대한 군주'를 독살했을지도 모르는 '흉악한 놈'들에게 직접 의분의 철퇴를 가할 수 없는 상황이 대단히도 안타까웠었다. 정조대왕과 같은 '난사람'이 한번 더 출현해야 우리민족과 국가의 역사가 흥성기를 맞을 수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시절이기도 했다.
이제 몇년의 시간이 지나 사고의 폭도 조금은 넓어지고 여러 다른 의견들도 접해 본후 다시 읽어본 이책. 소설적 재미는 여전했다. 궁중내 의문사로 시작되어 만 하루동안 일어나는 일련의 사건들의 배후가 조금씩 밝혀지면서 느끼는 재미는 여타의 추리소설들이 주는 그것과는 색다른 무엇이 있다. 거기에 방대한 자료조사와 역사지식이 뒷받침되었음직한 여러 야담적 에피소드들은 작가의 소설가로서의 능력을 남다르게 생각되어지게 하기도 한다.(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의 플롯을 도입한것은 차치하고.)
하지만 나는 작가의 역사인식관점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지금의 나는 '정조대왕'으로부터 실패한 독재자를 보며, 그를 우직하게 따르는 주인공과 몇몇 작품속 인물들로부터 '악마적 초인사상'에의 광신을 느낀다. 작품의 주된 대립구조는 정조와 노론으로 대표되는 당파싸움이다. 작품에서 작가는 당쟁은 절대악이며, 우민을 바른길로 이끌 '초인'의 방해물(반드시 제거되야할)로 그리고 있다. 물론 여기서 초인은 정조대왕일 것이다. 당쟁은 물론 많은 폐해를 조선에 끼쳤다. 그러나 당쟁이라는 현상이 가지는 장점도 많았던 것이 사실이다. 동시대의 지구상 어느나라가 폭력적 방법이 아닌 논쟁으로 국가의 대사를 결정지었을까? 장점을 무시하고 단점만을 취해 그것의 피해자를 무조건 높혀보는 것은 저울의 한쪽이 기운다고 다른 한쪽을 너무 덜어내어 오히려 반대의 불균형을 이루는 형국이 아닌가싶다.
소설은 그저 개연성을 띈 허구일 뿐이라는 반박도 있을 수 있겠다. 그리고 재미만 있으면 그만이지라는 의견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의견들은 소설을 문학적 테제로만 이해할때 가능한 것들이다. 이책을 읽으며 나는 다분히 정치적,계몽적(?)테제의 냄새를 각장마다 맡을 수 있었다. 작가가 박정희를 국가역사상 가장 뛰어난 지도자로 인정하며 그의 치적(?)을 존중하는 사실은 이미 공공연하다. 이는 작가가 3부작으로 진행중인 '인간의 길'시리즈에서도 확인될 수 있겠다. 그런데 왜 아무 상관도 없어보이는 '영원한 제국'을 읽으며 내 머리속에 '정조=초인=박정희'라는 등식이 떠오르는 지 씁쓸한 입맛이 가시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