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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바꾼 만남 - 스승 정약용과 제자 황상 ㅣ 문학동네 우리 시대의 명강의 1
정민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12월
평점 :
정해진 운명이란 말은 믿지 않지만 어디서 어떻게 이 사람을 만났을까 싶은 이들이 있다. 그리 오래 살지 않았지만, 그 인연이 참으로 감사하고 신기하여 어디서 어떻게 시작된 만남인지 곰곰이 거슬러 올라갔더랬다. 허나 그런다고 어찌 알까. 인생이란 나라는 인간 하나가 생각해 본다고 밝혀질 문제가 아닐 텐데. 이 선물 같은 인연이 끝까지 그 아름다운 모습 그대로이려면 많은 것이 필요하다. 우리는 아니 나는, 그 인연들을 잘 가꾸어가고 있을까.
넓게 닦인 입신양명의 길이 펼쳐질 것만 같았는데, 삶의 저 너머에 놓인 유배 생활을 눈앞에서 보게 되었을 때, 정약용은 어떤 심정이었을까. 그 시간이 점점 기약 없이 길어져만 갔을 때 그 마음은 또 어땠을까. 말이 18년이지 갓난아이가 성인이 다 되어갈 그 세월은 참으로 엄청난 것이다. 그러나 그곳에서 얻게 된 귀한 만남. 생의 끝에도 사라지지 않을 향을 지닌 제자를 만난다. 정약용의 충실한 제자로, 그 아들들의 오랜 벗으로 끝까지 남은 사람.
둘째 형님 정약전이 흑산도로 유배를 떠나고, 그곳에서 소실을 얻어 아들까지 보자 자녀가 없던 그 부인은 일찍 남편을 잃은 며느리와 자신의 처지가 서글퍼 양자를 들이려 했다. 그러나 정약용은 법도를 들어 반대하고, 형수의 처절한 애원에 마지못해 승낙을 한 일화가 있다. 이만 보더라도 이 선비님, 보통 분이 아니다. 물론 그렇기에 그 긴 유배 생활을 견뎌내며 엄청난 저술 사업과 제자들까지 길러냈을 것이다. 하지만 돌려 생각하면 스승으로 모시기가 얼마나 힘들었을까!
책의 중반까지 이어지는 유배지 시절의 일화들을 보면, 그 꼿꼿하고 까칠한 성격이 그대로 드러난다. 특히 황상이 혼례를 올리고 깨소금이 쏟아질 시기에 보낸 벼락 같은 서찰과 아버지의 유언으로 삼일장만 치른 뒤에 보낸 불벼락 같은 서찰을 보면서 나는, 아 어쩌라고! 거참 너무하시네. 싶은 마음이 들기도 했다. 물론 그 까칠한 서찰 또한 모두 제자를 생각하는 스승의 지극한 마음이었을 것이지만, 솔직히 스승님의 말이라면 무조건 따른 황상이 너무나도 대단해 보였다. 그 스승에 그 제자라는 말이 딱 어울린다고 할까. 정말 그 스승에, 그 제자다. '유인(幽人)'의 삶을 스승에게 전해들은 황상이 그 뒤 자신의 삶을 어떻게 꾸려갔는지를 보면, 진정 스승님을 따르며 그에 그치지 않고 자신의 철학을 펼쳐간 사람이구나 싶다. 유배지에서 서울로 돌아온 정약용의 삶을 그리 유쾌하지 못하게 만든 옛 제자들과의 불화. 노학자는 우직했던 옛제자를 그리워하고 또 그리워한다. 그리고 삶의 끝자락에서 만난 제자에게 책과 문방구를 남기는 모습은 코를 시큰하게 했다.
인연이란 일 대 일이 아니라고 했던가. 정약용이 세상을 떠난 뒤에도 그의 아들들은 황상과 마음을 나누는 귀한 벗이 된다. 책의 후반부에 펼쳐지는 이들의 이야기와 황상의 삶은 정말 흥미로워서, 밤이 늦도록 덮지 못하고 끝까지 읽었더랬다. 자세한 이야기는 스포가 될 테니 생략하지만, 나는 참 안타깝고 분하고 화도 나고 슬펐는데 책 속의 황상은 그 또한 담담하고 담담하게 받아들이더라. 역시 그릇이 다르기 때문일까. 인생은 참 알 수가 없다는 생각을 하며 책을 덮었지만 살짝 살짝 눈물이 날 뿐 잠을 들 수 없었다. 이 사람은 왜 그렇게 오랜 시간 동안 잊혀졌을까. 정약용과 황상, 그리고 다른 이들과의 잊혀진 이야기가 또 많겠지. 그렇지만 이제라도 알게 되어 감사하다. 오래오래 기억될 책을 읽게 되어 기쁘다. 정말 인연이란 어디서 찾아오는지. 천천히, 그 많은 시와 서찰, 일화 들을 음미하며 다시 읽어내려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