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홀 이야기 - 별의 죽음에 관한 논쟁에서 블랙홀 발견까지
아서 밀러 지음, 안인희 옮김 / 푸른숲 / 2008년 3월
평점 :
품절


내가 어릴 적, 고향 시골 마을 앞의 시내에는 특별한 서점이 세 군데 있었다. 작은 서점들이 여럿 있었지만 대부분 문제집 위주로 팔았고, 이들만 그나마 다양한 책들을 구비한 것이다. 책을 좋아하는 아빠를 따라 종종 나도 들렀는데, 규모는 작았지만 저마다 특색이 있었다. 인문사회역사책이 많은 서점, 청소년들이 읽을 만한 책이 많은 서점, 잡지류가 많은 서점. 아빠의 오토바이를 타고서 세 서점을 도는 일이, 어린 나에게는 여행과도 같았다. 그 횟수가 아주 많았던 것은 아니지만 그 경험이 아빠와의 관계를 돈독히 해준 것은 분명하다. 역사책 만화책 소설책 등 그때는 아빠가 내게 책을 선물했고, 아빠가 산 책을 뒤따라 내가 읽었다. 그러다 대학교 3학년 때쯤, 내가 산 책을 처음으로 아빠가 읽기 시작했다. 나의 도서 목록을 아빠가 참고했다는 그 작은 쾌감을 지금도 기억한다. 사회에 나오면서 가끔씩 부모님이 좋아할 만한 책들을 선물하고 있다. 그리고 언제부터인가 아빠가 관심있는 책들을 말하면 구입해서 보내드린다. 우리가 갔던 서점뿐 아니라 지방의 많은 서점들이 문을 닫고 앞으로도 그리 평탄하지 않을 상황을 만든 데 한몫 한 인터넷 서점을, 아주 활발하게 이용하는 것이다. 그 씁쓸함이 여전히 마음 한 구석을 쿡쿡 쑤셔대지만, 이 광대한 인터넷의 세계에서 생각지 못한 책을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은 그럼에도 매력적이다. 이것 참 산다는 게 만만치 않다. 

여튼, 아빠는 픽션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본인 말씀으로는 확실한 것이 좋다는데, 과학이든 수학이든 역사든 이론에 오류가 발견될 수도 있고, 해석이 달라질 수도 있으니 불변하는 것은 아니잖냐고 딴지를 걸어도 그래도 괜찮아! 하시며, 픽션은 읽지 않으신다; 그러고 보면 아빠와 엄마, 나 모두 역사책를 좋아한다는 공통점이 있구나. 아, 오토바이와 자전거를 좋아하셔서 여행기에도 재미를 붙이시기는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잔뜩 들뜬 목소리로 이 책을 이야기하셨다. 새 책이 없어서 헌 책을 보내 드렸는데, 며칠 지나 감상을 물으니 또 잔뜩 들뜬 목소리로 정말 재미있다고 하신다. 만약에 고등학교 때 이 책을 보았다면 수학의 매력을 알았을 거라고까지 하시는 걸 보니, 어지간히 재미있나 보다. 이제는 60을 바라보는 나이니 그 만남이 너무 늦었지만 그래도 어떠랴. 곱씹으면서 천천히 읽으고 있다시니 아마 며칠을 두근두근 콩닥콩닥 즐거우실 텐데. 대학을 나온 큰 고모와 작은 아버지와 달리 아빠는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뒤로 고향에 정착해 열심히 일하며 살았다. 아마 그 전부터 지금까지 책을 열심히 읽어 온 것은 단순히 재미 때문만은 아니었을 거란 생각을 한다. 그래도 어떠랴. 아빠는 과거의 기억을 담담하면서 짠하게, 그렇지만 웃으면서 이야기해주신다. 그리고 자식들과 책을 주고받으며 살 수 있는 다리를 놓으셨다.(물론 그 사이에서 엄마의 역할이 지대했음을 알고 있다!) 아마 집에 내려가면 신이 나셔서 내게 이 책을 권하시겠지. 그 모습이 생생해 살짝 코가 시큰해지면서 웃음이 나온다. 수화기 너머로 아빠의 들뜬 목소리를 들으면서 문득 이 책을 쓴 작가에게 고마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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