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정약용 지음, 박석무 엮음 / 창비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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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정약용 하면 '목민심서'가 바로 떠오른다. 아마 많은 사람이 그러지 않을까 한다. 하지만 목민심서의 정약용은 양반 관료로서의 모습밖에 보여주지 못한다. 정약용은 목민심서뿐만 아니라 시와 산문을 포함한 다양한 저술활동을 했고, 수원화성을 축조하는 거중기를 설계했고, 자식을 잃은 슬픔에 의학을 공부하는 등 그의 활동 범위는 사실 놀라울만큼 넓었다. 정조의 총애 아래 명문가의 선비로서 넓게 닦인 입신양명의 길을 걸어갔어야 했는데, 인생이란 참 알 수 없고 때론 너무나 잔인하다. 그의 인생에 20년에 가까운 귀양이 예정되었을 줄 누가 알았을까. 

이 책은 제목 그대로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를 엮은 것이다. 자식들과 둘째 형님 정약전, 그리고 제자들에게 길고 긴 편지들. 놀랍게도 정약용은 형님에게 보내는 편지에만 유배지 삶의 곤궁함에 대해 살짝 드러낼 뿐, 자식들과 제자들에게는 미안함, 염려, 당부만을 이야기하며 아버지로서 스승으로서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특히 하루아침에 폐족으로 전락해 절망한 자식들에게 보내는 편지는 엄하면서도 따스한 아버지의 사랑이 녹아 있다. 자신 때문에 출세의 길이 막힌 자식들에게 얼마나 미안했을까. 하지만 그 미안함을 내보이면서도 학문과 독서, 삶의 태도 등에 대해 써내려간다. 내가 가장 관심 있던 것은 둘째 형인 정약전에게 보낸 편지다. 형제로 지기로 평생 토론을 하며 우애를 닦아온 이 두 사람의 관계가 나에게는 그 무엇보다 흥미롭다. 정약용이 정도를 걷는 깔끔하고 꼿꼿한 선비였다면 정약전은 벼슬에 뜻을 버리고 신분에 상관없이 사람들과 어울리며 술도 좋아하는, 정약용과는 거의 대척점에 선 사람이었다. 그렇게 다른 둘이 서로를 가장 잘 이해하는 형제로서 친구로서 살았다는 것이 놀랍고 부럽다. 정약전의 편지는 실려 있지 않으니 다른 책을 찾아봐야 할 듯.  

앞날은 고사하고 당장 내일 일도 알 수 없는 게 우리네 인생이다. 정약용은 남부러울 것 없는 상태에서 나락으로 떨어졌다. 그 비참함과 절망이 얼마나 컸을지 누가 알 수 있을까. 하지만 그런 시련을 겪으면서도 학문과 독서에 대한 열망을 불태웠고, 고통받는 백성을 살폈으며, 끊임없는 붓을 잡아 책을 엮었다. 평범한 나는 그저 놀랍다고 밖에는 할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하지만 정약용을 흠모하는 것은 그 위대함 때문만은 아니다. 유배시절, 부인이 혼례날 입은 활옷을 받은 그는 옷감을 잘 말려 책을 만들고, 남은 것에는 그림을 그려 자식들에게 물려줬다고 한다. 그 험난한 유배지의 삶 속에서 가족에 대한 애틋한 사랑과 낭만을 간직한 꼿꼿한 선비님. 알면 알수록 더 알고 싶고, 그럴수록 더 좋아할 수밖에 없다. 정약용에 대한 팬심만이 아니라 나의 삶을 돌아보게 하는 좋은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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