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이 밝은지 11년째..  

한때 2000년이 될 때 밀레니엄 버그가 어쩌니 저쩌니 하더니,   


인제는 벌써 그 후로 11년이 됐다.

 
결국.. 올해도 해는 밝았고, 그후에도 일주일이 되는 오늘.
 

年의 숫자만 바뀌었나 했더니, 내 나이도 하나 더 추가되었다.
 

그만큼, 야물차게 여물어야지....
 

그리고 그것을 위한 부적이 강림하셨으니..!!!!!!!



아싸 좋구나!!!!

모름지기, 사람은 쌓은 선(善)으로 인해서 덕(悳)을 보고, 복(福)을 쟁취해야 하는 법!!!!

 

다 늘어놓기 귀찮아서 안늘어놓는게 절대 아닌,

다양한 분야에서 자신과 타인과 세계를 위해 최선을 다하는 많은 사람들이,

그 노력의 한... 백만배 만큼만 행복해지도록..!!!

(배..배도 백만배? ㄷㄷ)

 

코알랄라~~!!!!

 

 

 

그런데... 아직도 <코알랄라>가 뭐얏!!?? 하는 사람들.... 앗 아직도 <코알랄라>를 모르는 사람이 있는가??

<코알랄라>는 현재 애니북스에서 출간되어 절찬리에 판매되고 있다는 사실!!!



 

먹부림의 신화. 웹툰으로 연재 당시 많은 사람들에게  

다이어트를 포기하게 만든 마성의 만화!!!

이제 웹툰으로 보다가 모니터 핥는 불상사를 그만두고, 한장한장 넘겨가다 당장 부엌으로 달려나가기 용의한 책으로 만나보시라~~

  

 

게다가, <코알랄라>출간기념으로 거의 융단폭격과 같은 이벤트가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

잘 참여하시면 신년의 처묵처묵을 <코알랄라>와 동시에 해결할 수 있다는 일석...몇..조인지 셀수도 없네

[마감] 이 만화를 읽어봐. 넌 배불러지고 (구매자 이벤트!)  <-마감됐음.ㅠ_ㅠ

http://cafe.naver.com/anibooks/565

욜심히하면, 정말로 먹여준다! (처묵처묵 먹부림단 모집 이벤트)

http://cafe.naver.com/anibooks/571

 

내 야식이 니 야식보다 맛있을껄!? (야식추천 스크랩 이벤트)

http://cafe.naver.com/anibooks/572

 

<코알랄라>부적, 궁상맞게 출력말고, 애니북스서 받아보자!! (부적 실물 받기 이벤트)

http://cafe.naver.com/anibooks/608

 

올해의 시작은 럭셔리하게 만화읽으며, 처묵처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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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의 서 2
미야베 미유키 지음, 김은모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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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조금이라도 장르문학에 대한 편견과 거부감을 갖고 있다면 서점에서 눈길 한번 안줄지도 모르는, 분위기의 책. 판타지를 많이 읽었다고 할 순 없지만, 몇가지 이야기를 읽은 후에 느낀것은, 항상 그게 그거인 것 처럼 보이는 세계관과 쏟아져나오는 판타지소설들. 그 풍파속에서 순수문학이나, 이야기의 힘이 아닌, 언어자체의 힘을 가진 책들을 많이 접했던 독자라면, 이런 책에 흥미를 갖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물론 나또한 예외는 아니다. 물론 기억속에서, 예전에 봤던 여러가지 판타지소설들은 확실한 재미를 보장해 줬었다. 이 '영웅의 서'도 그런 책인가? 그래. '판타지소설 같은거' 라고 누군가 말해도 그것들은 말그대로 재미있었고, 각기 나름의 깊은 울림과 사색거리가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결국, 완간될때까지 그 호기심과 기다림을 간직하지 못해 결국 내팽겨쳤던 몇몇 판타지소설들. 아마 <영웅의 서>의 2권이라는 분량이 다른 1권의 책들에 비해선 다소 부담스러울지도 모르겠지만, 책의 사이즈 그 자체 때문인지 큰 부담까지는 없이 펼칠 수 있었다. 그리고 아무리 '이야기'를 가지고 어떤 왈가왈부를 한다고 해도 판타지는 판타지일 터. 그저 한번 보고 상상의 끝을 달리고, 그 종착지에서 마지막 문장을 읽어내고 책을 덮기전에, 나는 잠시 현실세계를 완벽히 떠났다 돌아오면 되는 것이라 생각하고 나는 가볍게 책을 들면 될 것이었다.

그렇게 생각했다. 유리코가 '엉터리 사전'인 아쥬를 만나고 실제적인 이야기의 썰이 풀어지기 전 까진. 

유리코는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초등학생이다. 어느날 그 평범한 나날을 깨는 비보를 듣게된다. 그의 오빠인 히로키가 동료2명에게 흉기를 휘둘러 한명이 목숨을 잃고, 한명은 크게 다친 것. 그리고 그 히로키는 자취를 감추게 된다. 이야기는 그렇게 시작된다. 일상속에서 어떤 순리를 갖고 차근차근 파생되는 것이 아닌, (미스터리, 추리물등 관객을 지루하지 않게 할줄아는 작가인만큼) 격정적으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히로키의 돌발행동으로 유리코를 포함한 가족들은 깊은 시름에 잠긴다. 그러던 중 유리코는 어떤 검은 형체에 무릎꿇은 듯한 오빠의 형상을 보게되고, 그걸 계기로 오빠의 방에서 책 한권을 발견한다. '의사소통'할 수 있는 그 책은 유리코를 많은책들이 모여있고, 이야기를 진전시키는데 핵심이 되는 작은할아버지의 별장으로 데려간다. 여기서부터 수난은 시작된다.  

유리코는 거기에 있는 '생명을 지닌' 책들에게서 히로키에 대한 자초지종을 다소나마 들을 수 있게되고, 오빠를 구하기로 결심한다. 여기서부터 등장한다. 주인공인 유리코보다 더 독자를 혼란스럽게, 혹은 간단한 여러가지 이론과 개념들. 

여기서부터 굉장히 복잡하고 미묘한, 어찌본다면 말장난과도 같은 갖가지 혼란스러운 개념들이 쏟아져나오기 시작한다. 그리고 거기서 모두 이해하지 못한 것들은 미스터리의 요소를 간직한 채 <영웅의 서> 이야기의 말미에서 보충해 주기도 한다.

일단 유리코가 사는 곳을 '테두리' 로 명명할 필요가 있다. 세계란것은 인간세상이 생겨나기 이전부터 존재했고, 천체, 자연, 삼라만상의 모든 것이 든 곳이다. 그에비해 유리코와 같은 인간들이 살아가는 '테두리'란 곳은 인간이 그 '세계를 해석하려 하는 순간 태어난 것이다. 인간세상은 그 테두리 안에 속해있으며, 그 테두리는 세상보다 커지기도 했다. 

아마 나처럼 머리나쁜 독자는 초등학생인 유리코와 같은 혼란에 빠질수도 있다. 다만 한페이지에서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이야기가 진행되는 중간중간에 그것들의 개념이 보충설명되기도 하며, 다른예로 그려지기도 한다. 

'영웅'이란 모든 위업의 원천이 되는 이야기다. 인간이 알고있는 테두리 안의 영웅의 모습은 원천인 '영웅'이라는 이야기에서 생겨난 복사본이다. 유리코의 오빠인 히로키는 그 영웅에 홀려, '엘름의 서'라는 책을 쥐게 됨으로써 일을 저지르고 만 것이다. 

"그만큼 인간은 '영웅'을 원하고 있어. '황의를 입은 왕'의 부정함을 알면서도 기다리기를 마다하지 않는 거지. 그 또한 인간의 업. 천성이라고" (2권 339p)

그리고 나아가, <영웅> 이라는 존재를 과연 '선'그 자체로 볼 수 있는지 의문을 제기한다. 애초에 태양이 비치는 곳의 반대편에는 그림자가 질 수 밖에 없다. 그것은 빛이 강력할 수록 어둠이 짙어지는 이치다. 인간은 그 영웅의 좋은 모습만을 바라보고 흉내내려 하지만, 그 방법적인 면에서 영웅의 악한 모습을 취하기도 한다. 히로키는 그 영웅의 사악한 부분에 홀렸던것이다. 물론 제 스스로는 그런 영웅적인 면모를 갖추고선 현실을 타파하기를 바랬다. 

어쨌든, 그렇게 히로키를 찾아나선 유리코는 아슈외에도 소라, 애시 등의 동료를 만나며, 이야기와 영웅의 근원과 진실을 파헤치며 점점 앞으로 나아간다. 유리코는 황의를 입은 왕을 저지하고, 오빠를 무사히 구해낼 수 있을까?

숱한 개념들이 다양하게 설명되기는 하지만, 이것은 확실히 판타지 성장 드라마다. 모든것이 혼란스럽고, 가치를 가늠할 수 없는 나이에 어른들이 세계에 발을 하나 들여놓는 것이 아닌, 이야기의 근원과 배경을 탐구하고 도전한다. 

그럼에도 이 <영웅의 서>에서 가장 중요한것은, 이야기에 대한 새로운 접근방법과 그 이야기가 갖는 양날의 검을 인지하는 것이다. 이야기는 공기처럼 우리 주변에 산재해있다. 아니 책에 따르면 이야기는 어떤 이름없는 땅에서 무한대로 만들어지고, 그것이 인간세계로 들어오며, 그리고 다시 왔던곳으로 흘러들어간다. 그런 이야기들은 '자아내는 자' 를 통해 현실에서 어떤 형태를 띄게되고, 인간이 거기에 열광할수 있게된다. 그리고 곧 그것은 인간의 업이 되기도 한다. 자아내는 자 가 아니더라도, 인간은 그 삶을 살아감으로서 이야기를 엮어낸다. 그러니깐 굳이 자아내는 자의 손을 빌려 이야기가 허구적으로 탄생되지 않더라도, 인간이 자연적으로 사는 그러한 삶 자체가 이야기가 된다는 것.  

"그걸 돌이킬 수 있다고 속이고, 뒤집을 수 있다고 말하는 게 이야기의 힘이야. 그것이 '테두리'의 이치야. 그것은 아름답고, 따뜻하고, 때로는 사람 마음의 진실과도 상통하지. 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야. 그렇기 때문에 '테두리'의 이치를 이야기하는 '자아내는 자'들은 죄업을진 자로 불리는 거야. (2권 260p)

살아간 흔적이 이야기를 엮어내는 것이 순리인데, 때때로 인간은 이야기를 앞장세우고 그 '있어야 할' 이야기 들을 모방하기도 한다. 그것들은 정의, 승리, 정복, 성공이라고도 부른다 한다. 자연의 법칙을 무시한, '있어야 할 이야기'를 따라가다보면 인간은 그 방법적인 고민을 제쳐두게되고, 오로지 그 목표만을 향해서 나아가게된다. 그런 와중에 죄를 짓고, 업을 쌓게된다. 자아내는 자 들은 그런 있어야 할 이야기들을 만들기때문에 업을 떠안지만, 따뜻한 이야기또한 만들어 내기때문에, 그 업을 지고 살아가는것을  용서받는다 한다. 그리고 앞서 말했듯이, 인간은 그 자체가 걸어온길이 이야기를 만들기 때문에, 우리는 자아내는 자 와 아닌 자를 구분할 필요없이 제 몫의 업을 지니고 살아가는 것이다.

이 책은, 이야기의 근원과 철학을 판타지라는 장르를 차용하여 우리에게 접근하고 있다. 얼핏 '선'으로 보이는 영웅의 모습은 그것을 따라가는 인간들이 악을 만들기도 하며, 의도치않게 악을 행한다. 어쩌면, 성인들의 문화인 폭력과, 성, 혹은 책이 아니라 영화, 게임, 만화 등으로 발전한 이야기를 통해 인간은, 인간이 처음에는 의도치않았던 악을 만들기도 하는 듯 싶다. 이야기는 공기처럼 어디에도 존재한다. 한장의 일러스트, 한장의 사진또한 따지고보면 개별적인 이야기를 갖는다 할 수 있다. 게다가 작가는 정의가 무너지는 사회일수록 인간이 요구하는 '영웅'의 모습에 대하여 무조건적인 선망을 경계하기를 바라고 있다. 모든 만물은 빛 아래서 탄생하고, 그 빛은 필연적으로 그림자를 발생시키니깐. 공기같이 둥둥 떠다니는 이야기들을 인간이 어떻게 해석하고, 자아내느냐 에 따라 그것은 인류를 풍요롭게도, (극단적으로 말한다면)쇄락으로도 이끌 수 있는 것이다.  

"이야기란 뭐지, 유리?" 하고 애시는 물어왔다.  

-중략- 

"'자아내는 자'만이 창작자는 아니야. 인간은 모두 살아감으로써 이야기를 엮어내지." 

"그러니깐 이야기는 인간이 가는 걸음 뒤에서 따라와야 하는 거야. 인간이 지나간 뒤에 길이 생기도록."  (2권 331p)

이야기는 먼곳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한글에서 보면 자음과 모음이 결합되어 글자가 만들어지고, 문장이 만들어지면서 이야기는 거기서부터 끝없이 파생될 수 있다. 그것은 '자아내는 자'가 만들어내는 문장이기도 하고, 인간이 살아가면서 만들어내는 '행동'으로부터 시작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것을 다시 인간이 어떻게 해석하고, 기억하고, 기록하느냐에 따라 셀수 없는 이야기가 탄생된다고 생각한다.  

가볍게 들었던 책을 무겁게 내려놓는다. 어쩌면 난, 유리코보다 더 이해하지 못한 부분들이 많을지도 모른다. '시간성'을 아주 아름답고, 넘치는 상상력으로 표현해냈던 '모모'가 떠오른다. '이야기'의 근원과 철학, 그리고 고정됐던, 혹은 생각조차 해보지못했던 이면을 이렇게 흥미진진한 판타지로 엮어놓은 책이 어디 흔할까. 저자는, 이야기가 탄생되고 소멸되는 과정을, 엄청난 상상력으로 풀어나가면서 또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어 냈다. 그래서 그녀는 펜을 통해 이야기를 짓는, 업을 지닌 '자아내는 자'이며, 우리또한 이 책을 읽는 행위에 의해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자아내는 자'가 되는 것이다. 아마 인류가 행동을 통해 만들었던 이야기서부터, 구전으로 전해지는 이야기들, 지혜를 물려주고 심심함을 달래기 위해 시작했던 벽화들을 통해 이야기는 단 한순간도 존재하지 않았던 적이 없을 것이다.  그러니 인류의 역사는 곧 이야기의 역사라 봐도 무방한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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렛미인 1 블랙펜 클럽 BLACK PEN CLUB 10
욘 아이비데 린드크비스트 지음, 최세희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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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개봉했던 헐리우드판 <렛미인>. 영화는 분명 아름다웠다. 개인이 가진 최후의 공간에 서로를 엮어놓는 오스카르와 엘라의 모습은 시리도록 아릅답고, 때로는 잔혹하기도 했다. 영화내내 많이 등장하는 하얀 눈은 공간, 계절적 배경이 되는것과 동시에 여주인공 엘리의 모습과도 대비됐다. 그리고 어쩌면, 내내 떠날 수 없는 피의 붉음을 가장 선명하게 드러내주는 색이기도 했다. 영화는 기본적으로, 그리고 중심적으로 엘리와 오스카르에 대한 이야기가 전개된다. (아마 그럴수 밖에 없었을 것. 엘리와 오스카르에 초점을 맞춘다 해도 2시간은 그리 넉넉하지 않은 시간이었을테니깐.) 원작을 읽지 않았더라도, 눈치빠른 관객이라면 알수도 있을테지만 렛미인의 주변인들은 영화에서 보여지는 것 이상으로 많은 이야기들을 가지고 있었다. 조연으로서가 아니라 또 하나의 주인공들로 볼 수도 있을만큼. 영화속에서 호칸의 모습을 보며, 감독이 택해야만 했던 이야기, 그 바깥에 있는 이야기들이 더욱 궁금해졌다. 그것이 바로, 영화를 보고나서도 소설을 펼칠 수 밖에 없었던 이유였다. 


 
- 부득이하게 스포일러성 이야기들을 다량 포함하고 있습니다. - 
 
렛미인은 80년대 스웨덴 스톡홀름의 교외지역 블라케베리에 사는 이들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이야기들이다. 이렇게 설명을 하면, 마치 일상적인 소설로 보여진다. 하지만 여기에는 뱀파이어가 등장한다. 수많은 시간을 외롭게 견뎌내온, 피에.. 아니 그 흐르는 생명의 따스함에 굶주렸던 한 뱀파이어가.
 
오스카르. 이혼으로 인해 편모 아래서 살고있는 그는 몇몇 급우들에게 심한 따돌림과 괴롭힘을 당하고 있다. 아이들은 그런 그를 도와줄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외면할 뿐이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우둔하지 않다. 필요에 따라 도둑질까지 할 정도의 대범함이 있으며, 자신을 괴롭히는 아이들을 생각하며 허공에, 나무에 힘껏 칼을 휘두를 만큼의 증오심은 가지고 있다. 다만 그는 아직까지 껍질속에 자신을 밀어넣고 있는 달팽이기에, 그들에게 당할 수 밖에 없다.
 
호칸. '비뚤어졌다' 라고밖에 할 수 없는 성적취향을 가진 그는 엘리에게 사랑받기 위해, 사랑하는 이로 인정받기 위해 살아있는 이에게서 피를 훔쳐온다. 시작점부터 다르지만, 갈수록 극명하게 그 노선이 갈리는 이 두 남자를 중심으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일자별로 진행되는 서사는, 후반부에서는 그 시간대로 나눠지기도 하며 독자에게 긴장감을 고조시킨다.
 
그들을 중심축으로 이야기바퀴는 돌아간다. 하지만 아이들로 인해서 다소 치우칠 수 있는 이야기를, 작가는 그들을 둘러싼, 혹은 필연적으로 연결되는 인물들을 통해서 함께 보여준다. 맞물린 톱니는 더 멀리까지 큰 힘을 내어주게 되는 것. 방법은 사회적으로 비난받아 마땅했고 실제로 그런 범죄를 저지른 경력도 있음에도 실상 그 마음이 뿌리까지 차갑다고는 할 수 없었던 호칸으로 부터, 부랑자이지만 사랑하는 이를 포기할 수 없었던 라케, 그리고 많은 인물들이 이 '렛미인' 이라는 한마디를 통해서 돌아가는 하나의 톱니들이다.
 
영화에서 보여졌던 만큼, 그런 사랑의 감성만을 따라가는 (뱀파이어를 차용한) 이야기만이 아니라는 것을 이미 초반에 확인할 수 있었다. 렛미인은 굉장한 스릴러적 요소를 가지면서 고차원적인 사랑의 이야기와 상대적 선과 악에 대한 고민을 뱀파이어를 끌어다 이야기하고 있다. 그리고 절대 간과해서는 안될것이 라케와 비르기니아 다. 이들은 하루하루를 근근이 버텨내는 사람들이다. 거의 수입은 없다시피하며 선술집에서 만나 다른 친구들과 왁자지껄하게 술과 농을 즐기는게 유일한 낛일 수 밖에 없는 사람들. 
   

 
- 인간의 고통과 어쩔 수 없음, 실망으로 이어져온 수천 년 세월이 잠깐이나마 라케의 노구에서 출구를 찾아 계속 쏟아져 나오는데, (2권 266p) -
 
다만 너무 늦게, 혹은 (역설적이게도) 엘리를 통해 알게된, 사랑에 대한 깊은 가르침으로 인해 비극아닌 비극을 맞게되는 이들이다. 
 
 
- 구름기둥이 날 도울 거야. 그런 새끼한테는 눈물이 쏙 빠지게 귀싸대기를 날리는게 약이야. (2권 105p) -
 
물론, 톰미. 톰미 또한 아버지가 안계시는 것을 제외하고는 오스카르와 같이 편모아래서 자라고 있고, 오스카르보다는 더 실제적으로 어긋난 생활을 하고있다. 톰미는 오스카르와 엘리, 라케와 비르기니아와는 다르게 좀 더 그 사회적인 배경과 맥을 같이 하고 있다. 그 어린아이들을 결국 그런 상황으로내몬 기성세대들은 여전히 그들의 위엄과 기득권을 강요하고, 또 가르치려 한다. 그들은 어느정도는 아이들에게 존경받을 수 없는 요소요소들을 갖추었음에도, 그것들을 인정하지 못하고 아이들을 훈계하려 든다. (실제로 여기서 어머니의 모습들은 그래도 대게 온화하고 따스하게 그려진다. 아버지의 위치에 놓여있는 그들의 행동들은 작가의 의도를 잘 담았는지 대부분 한심하고 허섭스럽게 그려진다) 이렇게 렛미인은 인간의 안과 밖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를 적당한 거리를 갖고선 함께 끌어나가고, 종국엔 그것들을 한데 묶어버려버린다. 그 경계선을 구분할 수 없을만큼 교묘히.
 

어쩌면 그런데로 평범한 아이였을지 모를 오스카르는 불안전한 가정사와, 괴롭히는 급우들로 인해 결코 평범하다고 할 수 없다. 그런 요소들로 인해 꾹꾹 눌러담아진 분노와 증오. 적절히 나갈곳을 찾지 못하고 압축되어오기만 했던 그것들이 오스카르의 손에 칼자루를 쥐어준다. 바로 여기, 이곳에서 독자들은 그런 오스카르의 감춰진 모습을 바라보는것이 아니라, 스스로 칼자루를 쥐고있는 듯한 착각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작가는 그렇게 치밀하고 교묘하게 오스카르를 그려넣는다. 더불어서 불가피하게 살아움직이는 피를 강제적으로 뺏어올 수 밖에 없는 호칸의 모습과 교차적으로 이어진다. 치밀하게 짜여진 이 둘의 교차점들과 작가의 트릭을 보면서, 어쩌면 이 둘의 공통점을 이렇게 시사하는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다만 살짝 틀어진 각도와 더 깊은 곳에서 드러나지 못했던 차이들이 이들의 결과를 완전히 대립시키지만 말이다. 
 




무언가를 빈틈없이 채운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일인지 상징이나 하는 듯한 큐브를 갖고 오스카르와 엘리는 만나게 된다. 그 만남으로 인해 오스카르는, 자신들을 괴롭히는 급우들에게 날을 세울 줄 아는 용기를 갖게되고, 엘리는 인간이라는 존재를 자신에게 피를 대어주는 혹은 그것을 조달해주는 수단 이상으로 볼 수 있게 된다. 초반에서부터 오스카르의 혼란스러운 자아에 들어갔고, 상식적인 서사를 살짝씩 벗어나는 진행에 영화에서의 차가운것 이상으로 따뜻한 눈의 모습을 잊게 된다. 이즈음 알게된 듯 싶다. 그렇게 감성적으로 흘러가기만 하는 소설이 아니란것을.
 
함께 할 친구가 있다면 천국같은 따스한 곳이 되기도 하고, 그 반대의 경우라면 지옥같은 외로움이 존재하기도 하는 곳. 놀이터에서 에스카르와 엘리는 서로를 처음만나게 된다. 에스카르는 학교에서는 따돌림을 당하는 아이고, 때마침 열심히 칼을 휘두르는 중이었다. 엘리는 씻지않은 것 같은 냄세를 풍기고, 머리는 몇일 감지않은 것처럼 기름져있다. (엘리의 경우가 에스카르와 같다고 할 순 없지만) 그들은 서로가 가진 단점, 혹은 이상한 점들에 갖고 서로를 비난하거나 멀리하지 않는다. 냄세가 나는 것을 좋은 향기라고 생각하는것 까진 할 수 없지만, 거기서 으레 사람들이 갖는 오만가지 편견과 멸시 등이 없었다. 서로에 대한 어떠한 색안경도 끼지 않고, 상대의 단점이든 이상한점이든 그대로 받아들이고 인정할 수 있는 마음. 그로인해 그들은 친구가 되게되고, 그것들이 오스카르와 엘리를 놀이터에게 계속해서 만나게 하고, 얇은 벽을 사이에 두고 모스부호를 사용해 의사소통 할만큼 창의적으로 만들기까지 한다.
 
하지만 결국, 방법과 욕심이 비뚤어졌다해도 자신의 쾌락앞에서 동정심과 이성을 끄집어 낼 수 있었던 그 내면까지 악하다고 할 순 없었던 호칸은 엘리를 위해, 사랑받기 위해 할 수 밖에 없었던 살인을 그만두고 싶어하고, 결국 엘리는 지나가던 취객을 제 먹이로 삼게된다. 그리고 그 희생자와 아주 절친한 친구였던 라케의 비극또한 시작된다. 호칸이 정말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어떻게든 마지막이 될 것이고 아마 돌아오기 쉽지 않을거라고 예상했던 그의 마지막 계획은 결국 제 얼굴에 염산을 뿌려가며 끝날 것처럼 보여지지만, 그것은 잔혹하고 거대한 이야기의 시작에 불과했다.
 
사실 영화를 보면서 가장 이해가 되지 않았던 부분이다. 영화에서의 호칸의 설정은 다르지만, 어쨌든 엘리를 위해서 피를 구하는것은 같은데.. 그의 배경이 설명되지 않은 채, 경찰에게 잡히기 전 자신때문에 엘리의 신변에 위협이 가해질까봐 제 얼굴에 염산을 부을정도의 맘을 가진 그를, 엘리는 너무 덤덤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점. 그것때문에 사실 나는 엘리와 오스카르의 이야기에 남들만큼의 큰 감흥을 받지 못했던 것 같다. 이 원작에서는 완벽히 설명된다고 할 순 없었지만, 왜 엘리가 호칸을 그렇게 대할 수 밖에 없었는지 잘 묘사되어 있다. 누군가의 마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사실 어느누구도 비난할 수 없는 일이었다. 


 
 
엘리는 옷을 사고 다시 집을 얻을 수 있는 돈을 주었다.  

그는 엘리가 '악'인지 '선'인지, 혹은 다른 어떤 것인지 궁금해하지 않고 시키는 대로 했다. 

 엘리는 아름다웠고, 엘리는 그에게 자존감을 되찾아 주었다. 그리고 극히 드물게나마...... 다정하게 대해주었다 (1권 331p) -
 
호칸은 가정이 있었다. 그의 성적 성향은 왜곡되어있었지만, 어쨌든 그도 남들만큼의 삶을 살아가고 있던중에 그것을 잃고, 그 상실의 부분에 엘리가 먼저 손을 내민다. 아마 엘리도 호칸의 그런 성향을 알았다면 다른 이를 끌어들였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 누구나 자기 생각만 한다. 나의 행복, 나의 미래란 말만 할 뿐이다.  
진정한 사랑은 자신의 삶을 다른사람의 발 밑에 내려놓는 것이지만, 그런 면에서 오늘날의 인간들은 불능이다. (1권 p39) -
 
이것을 최소한으로 지킬 수 있었던 호칸은 결국 선을 넘기고 마는 비극을 만들어 낸다. 뱀파이어의 피가 섞이고, 죽음을 뛰어넘고 이성을 상실하기전까진 그래도 그에겐 절제가 있었고, 선택받지 못하는 비극에 대해 무릎을 꿇을지언정 무단침입하지는 않을 만큼의 이성과 배려가 있었다. 하지만 언데드라 부를 수 있는 존재가 된 후 그 이성은 그 육체속 깊은 곳으로 빨려들어가 절대 빠져나올 수 없게 되어버린다. (어쨌든 인정받기 쉽진 않겠지만) 엘리에 대한 사랑과 오스카르에 대한 질투, 그로인한 집착으로 인해 왜곡된 그의 마음은 종국엔 그를 괴물로 만들어 버리고 엘리를 강제로 범하려 하기까지 한다. 이것은 잔혹한 씁쓸함과 쓸쓸함을 갖게 한다.
 
- 사람들은 개나 소나 다 친구라면서, 그 말을 아무 데나 갖다붙였다, 그에겐 한명만이,
단 한 명의 친구가 있었지만, 그마저 어이없게도 피도 눈물도 없는 강도에게 빼앗기고 만 것이다. (1권 276p) -
 
죽마고우였던 요케를 잃은 라케는 비르기니아의 존재에 대해서 다시금 생각할 수 있게된다. 가진것이라고는 물려받은 고가의 우표인 라케는 자신을 사랑하는 비르기니아에게 심한말을 하게된 후 정말로 자신이 그녀를 원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그녀와 함께 행복한 삶을 꾸려가려 하지만, 비르기니아는 이미 예전의 그녀가 아니게 된다. 마침내 비르기니아를 자신이 가진 개인적 최후의 공간에 들여놓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 그는 한 생을 구원하려고 돌진하고 있었다. 바로 그의 생을 (1권 338p) - 
하지만 결국 그녀를 잃게 된 라케는 그녀를 그렇게 만든 엘리에게 복수를 하기위해 달려든다..
 
호칸과 라케는 오스카르와 대조되고, 비르기니아는 엘리와 대조된다. 어쩌면 호칸과 비르기니아는 우리가 선망하는 오스카르와 엘리의 모습을 극명하게 드러내주기 위한 장치이기도 하는 동시에, 그렇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을 대표하기도 한듯 보여졌다. 
   

호칸은 앞서 말했듯이 그래도 진정 사랑하는 것에 대하여 최소한의 사랑과 집착의 경계를 정할 줄 알고있었다. 아니 어쩌면 시간이 그 부족한 사랑을 채워주길 바랬다. 하지만 오스카르의 등장으로 인해 그 희망은 무너져갔고, 결국 그녀를 위해 최후까지 헌신했지만 그의 심장은 육신과 따로 떨어지게 되고, 이성이 사라진 자리에 남는 욕망과 집착은 엘리를 막다른 벽으로 몰아넣는다.
  
- 호칸이 문간에 우두커니 서 있다는 사실이 한가지는 암시해주는 듯 했다. 그가 초대를 받아야 들어올 수 있다는 것 (2권 221p) -
 
하지만 그것은 엘리의 착각이었다. 이미 이성따윈 상실한 호칸은 결국 그녀에게 '들어가도 될까' 라고 물어보지 않은 채 엘리의 공간을 침범한다. 하지만 오스카르는 그것과는 대조적으로 순수함을 갖고선 엘리의 공간에 들어가고, 엘리를 선택하고, 엘리에게 선택받는다. 오스카르와 호칸의 마음에 큰 차이는 없다고 생각한다. 다만, 어쨌든 호칸은 엘리에게 선택받지 못한 존재였고 그는 그것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호칸이 선택받지 못한 이유는 사랑의 크기가 아닌, 그가 갖지 못했던 오스카르 같은 순수함이었을지도 모른다. 이미 성인이 된 호칸에게는 찾을 수 없는 순수한 욕망.
 
 
- 라케는 목이 메도록 케이크를 먹으면서 인간의 상대적 선과 상대적 악에 대해 생각했다. (2권 200p) -
 
너무 늦게 비르기니아에게 '들어와' 라고 말했던 라케의 비극은, 사실 엘리로 인한 것이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이것은 아무리 엘리와 오스카르의 사랑을 순수로 포장한다고 해도 불변하는 사실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엘리와 오스카르의 순수함과 동시에 라케와 같이 '상대적 선과 상대적 악' 을 생각하게끔 만든다. 어쨌든, 다만 비르기니아는 엘리가 뱀파이어가 됐을때와는 다르게 성인이었고, 그가 선택한 라케에게도 선택받았다. 그 사랑은 그녀가 라케와 함께 살아가고싶은 욕심과 더불어, 역으로, 라케를 위해서라도 그렇게는 절대 살아가서는 안된다는 결심을 심어주며 자신을 태울 수 밖에 없었다. 그녀가 그런 결심을 하는 부분, 자살아닌 자살을 할 수 밖에 없었던 부분에서 정말로 울컥할 수 밖에 없었다. 그 어떤 오스카르와 엘리의 사랑보다 더 심장을 쥐어짜듯 아파왔다. 살아가고 싶은 욕구는 누구나 강하다. 그럼에도 그녀는 남들과 동일하게 살아갈 수 없는 운명을 갑작스레 짊어지게 되고, 그렇게 라케와 사는것은 결국 라케를 파멸하는 것이라 생각하게 되므로써, 스스로의 삶을 끊게끔 만든다. 그녀는 엘리가 살아야만 했던 이유, 그저 자신에게 펼쳐질 '無'에 대한 두려움 보다 더 큰 '타인의 마음속에 들어갈 수 있는 행복' 을 갖게 됨으로써 마침내 고통스럽고, 미치도록 싫지만, 그래도 조금이나마, 아주 조금이나마 행복하게 삶을 끊을 수 있던 것이다.   
- "비르기니아! 비르기니아! 자기야, 사랑하는......" (1권 342p) - 
그녀는 결국 라케의 마음속에 들어갈 수 있었고, 라케를 자신의 마음속에 들일 수 있었기에...
 
 
- 그러나 머릿속에서는 계속그 생각이 맴돌았다. 난 존재하지 않아. 난 존재하지 않아 (2권 p95) -
 
- 그 몇 초 동안 오스카르는 엘리의 눈을 통해 보았다. 그가 본 것은...... 그 자신이었다.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근사하고, 더 잘생겼고, 더 힘이 센, 그리고, 사랑을 하고있는. (2권 302p) -  
 
물론 주인공은 오스카르와 엘리이다. 분노를 쌓아놀 수 밖에 없었던 오스카르는 아빌라 선생의 말처럼 달팽이 껍질에 숨어있다가, 엘리를 만남으로 인해 용기를 내서 자신을 위협하는 것들에 대해서 좀 더 눈을 치켜뜨고 바라볼 수 있게된다.
 
 
- "나 들어가도 되니? 들어가도 된다고 말해줘." /
이젠 엘리가 무서웠고 보고싶지도 않았지만, 정말로 그렇게 되길 바라는 건 아니었다. (1권 347) -
 
 엘리는 오스카르에게 들어가도 된다는 허락을 받아야만 온전하게 그의 영역에 들어갈 수 있다. 1권에서도 언급됐듯이, 남을 마음에 들이는 것은 아픔이 따른다. 아마 몇백년을 살았던 엘리는 그것을 뼈저리게 체감하고 있었거나, 그동안 갖지 못했던 그것을 동경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고작 몇십년, 십몇년을 산 이들은 그것들을 잘 이해할 수 없을지 모른다. 혹은 많이, 아주 많이 아프고 나면 이해한다. 남의 마음에 들어가기 전에 상대에게 동의를 구하고 그것이 설령 자신의 행복과는 어긋나는 결과일지라도 인정해야 하는 것.  

 
- 나는 떠나야만 살 수 있고, 머무르면 죽으리. 너의 엘리가 (1권 291p) -
 
보통때와 비교하면 보기드물게, 난 이들의 뒷 이야기에 대해서 상상했다. 개인적으로 생각하기에, 아마 엘리는 숨을 끊을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 누군가의 진심속에 들어갈 수 있었고, 진심으로 누군가를 들일 수 있게 된 엘리는 이제 그 지난한 자신의 생을 마감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마치 비르기니아 처럼 말이다. 

 



이 소설은 그것들을 위한 이야기라고 생각되어진다. 타인과의 거리. 자신의 사랑과 타인의 사랑. 그것이 만나는 지점에서 상대를 배려하는 일. 내가 향하는 마음을 허락 받는 일, 그것이 설령 no 라도 인정하게되는 일. 그리고 그 누군가를 들이는 사람은 아플지도, 정말 아픈 일 일지라도,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 그것은 아픔과 동시에 최고의 행복이 되니깐.
 
그러니깐.. 나는 렛미인이 이런 이야기를 하는게 아닌가 하고 생각할 따름이다. 순수함과 성숙함을 동시에 지닌 아이들도, 어른들도 관통하는 이야기. 누군가의 마음속에 들어가고, 누군가의 마음을 들이는 것은.. 그래. 쉬운게 아니다. 자칫했다간 피같은 눈물을 쏟을 수 있다. 엘리처럼. 그래도 인류의 역사를 따라서 끊임없이 행해지는 것. 행해질 수 밖에 없는 것. 그것이 바로 단순한 이 한마디. 'Let me in' 으로 아주 심플하게 표현되고 있는게 아닐까.  

  


 
사람을 가슴에 품으면 상처를 입게 되는 법.
비르기니아가 관계를 길게 이어가지 않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사람을 가슴에 품지 마. 그들이 들어오면 상처받을 일도 많아져.
너 자신외에 너를 위로해줄 사람은 없어. 너 자신만의 문제라면 고통스러워도 그럭저럭 살 수 있을 거야.
희망을 품지 않는 한 괜찮을 거야.그러나 라케와 함께하면서 그녀는 희망에 매달리게 되었다.
그들 사이에 무언가가 서서히 싹틀 거라고, 그래서 마침내는. 언젠가는. 무엇이? (1권 338p) 
   
그럼에도 우리는 언젠가 말할 것이다. '들어와' 라고. 그것이 개인이 가진 불완전한 행복을 채워주는 유일한 길 일테니깐.
이것은, 사랑을 넘어 우정까지 관통하는, 관계와 소통에 관한 이야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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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과 장미 문학동네 청소년문학 원더북스 13
캐서린 패터슨 지음, 우달임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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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곧 생각이 났다. 부실하고 무관심한 기억이 마치 작년이었는지, 재작년 이었는지, 정확히 언제인지도 이미 아득한 옛 이야기처럼 까마득하게 여겨지게끔 해준다. 다시한번 그때를 생각해보며 시간을 되짚어보니 그때는 2008년 여름이었다. 집에도 아무얘기도 하지 않았고, 같이갔던 친구들을 제외하고는 거의 아무도 모르게 행해졌던 일. 2008년 여름, 시청광장을 비롯한 광화문 거리는 2002년 월드컵을 연상시킬 정도로 엄청난 인파가 정부의 쇠고기협상과 대운하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기위해 몰려들었다. 외신기자도 놀랄정도로 그 물결은 거대하게 타올랐다. 사실 나는 절대 그런곳에 참여할 성격은 되지 못했다. 그럼에도, 나는 그곳에 (고작)두어번 참여한적이 있다. 같은 생각을 가진 수많은 사람들이 보여주는 용기와 의지가 나를 행동하게 했다. 하지만 사실상 나는 그때에 그 문제를 해결하기위해 힘을보태는 것과는 약간 미묘하게 다른 이유로 나섰던 것 같다. 분명 그때의 쇠고기협상과 대운하 문제에 대해서 분명히 반하는 의사를 갖고 있었지만, 나를 정말로 움직이게 했던것은, 내가 분명 옳다고 생각하는 혁명이 가져올 변화된 세상에 대하여 무임승차 하기가 부끄러웠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아마도 그때에 나는 그 촛불집회가 분명한 승리를 거두리라는 확신이 있었을 것이다. 허나 별 시덥잖은 일상을 핑계삼았는지 나의 참여또한 오래가지 못했고, 집회또한 가능성은 보여줬지만 실질적으로 원하는 성과를 이뤘다고는 할 수 없었다. 나에겐 고작 이정도이지만, 어떤 사람들에겐 씻을 수 없는 정신적, 신체적 상처를 가져다준 이 사건이 나를 비롯한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서 잊혀져 가고 있을까. [빵과 장미]는 실제로 내가 그때 느꼈던 감정들과 그때에 내가 느꼈을, 행복에 대한 방법적인 고민또한 다시한번 되짚어 보게 했다. 

20세기초 미국 매사추세츠주 로렌스의 거대 방직공장들에서 일어났던 실화를 다루는 [빵과 장미]는 실제로 그 파업을 일으킨 주체인 어른들이 아니라 그 테두리안에서 어쩌면 그 어른들보다 더 깊은 현실적 고민을 할 수 밖에 없었던 아이들 -로사와 제이크-를 통한 시선으로 보여진다. 활활 타오르는 행복이라는 불꽃을 거뭐지기 위해서 뜨거운 열기속에 기꺼이 뛰어들 준비가 되있던 어른들의 입장이 아니라, 그 어른들에게 드리워질지 모르는 죽음과 그로인해 자신들이 실제 피부로 느껴야했던 배고픔과 추위를 걱정해야 했던 순수한 아이들의 시선을 통한 이야기 인 것이다. 그렇기때문에 마치, 고리끼의 ‘어머니’ 같은 역동적이고 치열한 혁명의 모습보다는 좀 더 차분한 시각을 보여준다.  

선생님에게서 파업은 결국 법을 어기는 폭동이라고 배우는 로사는 자신의 엄마를 비롯한 수많은 어른들의 열성적인 행동을 보며 인간답게 살 권리를 위해서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은것인가 라기보단, 추위와 배고픔을 이기기 위해서 어떤행동이 더 옳은가로 고민할 수 밖에 없다. 자식을 학대하는 아버지를 피해서 쓰레기 더미에서 잠을 자기도하고, 허기를 채우기 위해 제 꾀를 십분 발휘하기도 하고 때로는 소소한 범죄를 저지르기도하는 제이크 또한 파업의 열정적인 현장에 고무되기도 하지만, 결국 제 자신이 눈앞에 맞닥뜨린 추위와 배고픔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가 가장 중요한 문제이다. 분명 성장의 시기에서의 이런 고민은 어른보다 좀더 혼란스럽겠지만, 실제 우리사회의 현실에서는 이것들이 비단 아이들만이 갖는 고민일까 하는 의구심이 든다. 현실문제에 대해서 실제적으로 어떻게 해결하는 것을 옳다고 믿는지에 따라 혁명과 집회의 주체자인 어른들또한 이 책에서의 아이들과 어른들의 모습처럼 나눠진다고 생각한다. 아이들이 갖는 신념과 믿음의 혼란은 훌쩍 자란 어른들에게도 풀리지 않는 문제인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이런 가치관의 차이들이, (실제로 어떤 문제에 대한 찬반으로 인해 참여여부가 갈리는 것이 아닌) 파업이나 집회에 참여여부를 갈라놓는 것 아닐까. 그러니깐 연대의 성공여부는 실제적으로 반대의사를 가진 사람들을 설득하는일 뿐만아니라, 의견에 공감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일단은 눈앞의 문제를 먼저 해결하려는 사람들을 설득하는일에 달려있는 것은 아닐까. 이런 방법적 가치의 혼란은, 마치 미국 토박이와, 이탈리아계, 기타 등등 국가의 사람들이 저마다의 언어로 뒤죽박죽이 되기도 하는 모습으로 비춰지기도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내가 촛불집회에 장기적으로 참여하지 못했던 것은, 바로 눈앞에 맞닥뜨린 내 자신의 현실의 문제들 때문이었는지, 옅어져 가는 희망때문이었는지, 무참히 짓밟히는 시민들을 보고 느낀 두려움 때문이었는지, 그도 아니면 그저 게을렀던 것인지 예나 지금이나 확신이 없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참여했던때의 기억을 떠올려보면, 두려움이 가장 큰 이유였던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친구들 둘과 시청앞에서 촛불을 켜고 거리를 행진했다. 소심한 성격에도 친구들과 함께 사람들이 열창하는 노래와 구호들을 크게 외쳤다. 누가 시작한지도 모르게 들려오면, 큰소리로 따라했다. 행진은 많은 사람들을 이끌고 아주 천천히 천천히 진행되었고, 우리들이 그 페이스를 맞추지 못했기 때문인지, 아니면 그 군중들이 갖고있는 제각각의 두려움들이 그들의 걸음을 붙들었는진 모르겠지만, 경찰의 저지선에 다다랐을때 나와 친구들은 거의 맨 앞줄에서 그것들을 맞닥뜨렸다. 모두가 연대해서 구호를 외치고 노래를 불렀지만 적잖은 두려움은 내내 나를 두드려댔다. 그러다 물대포를 연상케하는 무언가가 그 저지선 높은곳에서 우리를 향했고, 나는 더이상 앞에 있을 수 없었다. 그래도 나 혼자 뒤로 빠질수는 없다고 생각했는지, 친구들을 잡아다가 함께 뒤로 가려했다. 물대포를 뒤집어쓸 각오로 무장한 사람들은 그것을 피할 것들을 머리위로 이고서 앞으로 향했다. 허나 그것은 맥빠지는 일이었다.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무시무시한 일이었겠다. 그것은 후에 검거를 용이하게 하고, 국가의 녹을 받을 사람에게는 족쇄가 될지도 모를 채증용 카메라였다. 그후얼마만큼의 시간이 지났는진 모르겠지만, 집에는 가야할 것 아니냐는 친구의 의견에 의해 우리는 어느틈엔가 군중속에서 살짝씩 벗어나고 있었다. 겉으로는 마치 몇날 몇일을 세울 것 같으면서도 속으로는 내심 그런 이야기를 해주길 바랬었을 것이다. 분명히. 나는 그만큼의 의지도 열정도, 용기도 없었을테니깐.

파업과 집회, 즉 작던 크던간에 혁명을 위한 참여에 대하여 어른에게는 그것들이 책임이 따르는 선택일지 모를지언정, 이 순진한(그럼에도 현실적일수 밖에 없는) 아이들에게는 행복을 위해 결사항전 하는 것이 진정 어떤 의미이고, 어떤것이 옳은지 판단하는 것이 쉽지않은 성장의 과정이다. 그렇게 이책은 사회현상에 대해서 어떤 가치를 갖고, 옳고 그름을 판단하고, 그에따라 어떻게 행동할것인가의 대한 문제제기를 통해 삶을, 사회를 둘러싸고 있는 일들을 고민하는 것은 어쩌면 어른이 되기위한 과정중에 굉장히 중요한 점이라는 것을 계속해서 환기시켜 주고있다. (물론 어른이 되기전 확고한 신념을 세웠다 하더라도 후에 끊임없이 그것을 흔드는 바람이 불어올테지만 말이다.) 

허나, [빵과 장미]는 행복을 위한 가치추구에 대해서 아이들이 보는 시선과 혼란, 순수성, 성장과정의 이야기로 그치지 않는다. 그것들을 통해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요소에 대하여 먹는 것을 넘어선 질문을 던진다. 그 부분은 아이들이 버몬트로 향하게 되면서 전환점을 맞는다. 그리고 그동안 대비되었던 로사와 제이크의 삶에 대한 차이를, 둘을 한집에 붙여놓음으로써 더욱 분명하게 드러낸다. 그나마 돌아갈 따뜻한 가족이 있는 로사가 던지는 질문들과, 그렇지 못한 제이크가 던지는 질문들은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자신은 배불리 먹으면서도, 가족들을 생각하면 눈물을 흘릴 수 밖에 없는 로사와, 아버지가 죽은게 제 탓으로 여겨질까봐, 뉴욕으로 도망치지 못할까봐 전전긍긍하는 제이크의 상황또한 분명하게 다르다. 그럼에도 확실한 공통점은, 결국 모든사람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가장 최소한의 공간은 가정이라는 곳이라는 것. 이로써 타인이 가진것을 좌지우지 할 수 있는 위치가 아니라면은, 조금 덜 가진자든, 조금 더 가진자든 저마다 비슷한 깊은 고민이 있다는 것 또한 보여진다. 

그리고 마지막 메세지는, 버몬트를 떠나면 정말 어디에도 제 자신이 마음놓고 쉴 수 없는 상황의 제이크를 통해 이뤄진다. 죽은 아들을 생각하며 돌을 살려내려고 작정한 듯 거기에 꽃을 새기며 살아가는 제르바티와 이제는 자신의 모든 가족이 사라지고, 어린나이에도 너무나 치열한 문제와 싸워야만 했던 제이크가 진심으로 서로를 채워주는 모습을 통해서 말이다. 결국 연대는, 결국 공장주들에 대항하여 승리한다. 오로지 빵만을 위해, 그저 동물적 생존본능에 의해서만 이뤄진 파업이 아니라, 더 나은 인간적 삶을 영위하기 위한 파업이 결국 승리한 것이다. 

이것이 승리한 궁극적인 이유는 무엇인가. 바로 사람이다. 사람때문이다. 파업에 현장에서 로사의 엄마와 연대했던 이들을, 그들이 파업을 계속할 수 있게 각종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이들을, 제르바티의 상처입은 가슴에, 제이크의 얼어붙은 가슴에 장미꽃을 새겨준 이를 가리켜, 우리가 그것을‘사람’이라고 부른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들을 거뭐지기위해 하나가 아닌 둘 이상(연대)이 필요하다면, 이 [빵과 장미]에서의 제르바티와 제이크가 불신의 벽을 허무는 모습은 연대의 기초가 믿음과 진정성을 바탕으로 시작해야 함을 말하고, 로사를 통해 보여지는 그 행복을 이루기 위한 방법적 고민과 혼란을 통한 내적성장은 연대를 이루는 개인구성원이 거쳐야할 과정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러한 신뢰와 고민들을 통해 차근차근 쌓아올려진 구성원간의 빈틈없는 연대가 행복을 향해 앞으로 전진할때야말로, 돌같은 희망위에 장미를 새겨넣을 수 있다는 것을 로렌스 지방의 모든 이들이 온몸으로 증명했다.

[빵과 장미]가 보여주는 이 강한 연대와 그로인해 이들이 얻을 수 있었던 행복이야말로, 2008년 여름 서울의 한복판에서, 촛불을 들었던 이들이 그토록 갈망하던 것이었음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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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불류 시불류 - 이외수의 비상법
이외수 지음, 정태련 그림 / 해냄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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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언뜻 몇페이지를 읽었을땐.. 글과 그림은 참 가슴에 닿지만, 이거 너무 쉽게 읽히는게 아닌가 하고 생각을 해봤다.
마치 넘처나는 자기계발서와 소설의 중간쯤 역할을 하고 있는건가하고 생각이 들정도로 책은 쏜살같이 읽히려고 했다.
그렇지 않아도 독서량이 적으니, 이런책은 쉬이 냉큼 읽어버리고 다른책을 또 읽어야지하는 한심한 생각도 조금은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책을 읽다보면 절로, 페이지를 쉬이 넘기면 안되겠구나 하는 생각을 갖게된다.
사랑, 꿈, 철학, 정치, 사회.. 모든분야를 총 망라하며 삶을 구성하는 다양한 요소들 중 어느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그의 명쾌하고 유쾌한, 그리고 종종 가슴을 후벼파는 짧은 글들을 보노라면, 그리쉽게 읽어내기가 염치없다는 생각을 들게한다.
짧은 글은 긴 여운을 남기고, 희고 흰 여백만큼이나 깊게 사고할 것들이 넘쳐난다. 인고의 세월을 견뎌내온 작가만이 해줄 수 있는 간단하지만, 쉽게 흘려보낼수 없는 삶에 관한 따뜻하고, 때로는 냉철한 시선이 마치 그 여백들이 거울이라도 된것마냥 나를 부끄럽게 만든다.

여백이 많다고 그 여백들을 우습게 보지말자. 그게 바로 당신이 생각하고 명상할 '틈'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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