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능력자
박이정 지음, 김민석 각본 / 피카디리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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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과 ‘을’의 착취적 관계가 사회적 이슈로 떠오르고 있다. 물론 이런 관계가 기본적인 사회의 근간인 것이 현실. 이 ‘갑’과 ‘을’은 ‘을’들이 자신들의 신세를 한탄하는 용어로 사용되다가, 극 최근에 한 우유 대리점의 폭로로 사회 전체로 촉발된 것은 대다수가 알고있을 것. 나는 극소수의 ‘갑’과 대다수의 ‘을’이 존재하는 세상, 마치 초능력 같은 ‘갑’의 힘에 대응할만한 힘을 가진 ‘을’ 을 만들어 한판 붙여보려는 욕망이 투영된 것이 바로 이 <초능력자> 라고 보았다.

 

쓸모없는 것들이 처분되는 폐차장, 세상의 끝바닥으로 상징되는 곳에서 일하는 규남, 애초에 ‘평범’과 ‘보편’에도 끼지 못하는, 경계 바깥의 사람을 보여주려는 듯 주변인들도 모두 외국인 노동자 들이다. 누구라도 ‘최후의 만찬’을 떠올릴만한 폐차장에서의 점심먹는 장면에서도 규남은 가장 낮은 책상에서 밥을 먹고 있다. 특수할 만큼은 아니되, 보편적 통념에서 가장 바닥같은 인생을 살고있는 인물인 규남은, 설상가상으로 사고를 당하지만, 오히려 새로운 곳에 취직하여 새로운 ‘가족’들을 만난다.

 

하지만 초능력 때문에 혼자 살아가던 초인이 등장해서 규남의 가상 가족에서의 ‘아버지’를 빼앗고, 그의 주변을 위협한다. 흔하지만 매우 상징적인 ‘돈’과 ‘자유’를 빼았는 ‘갑’ 같은 초능력을 가진 초인에게, 있는건 의욕밖에 없는 모든 ‘을’ 가족들의 가장이 되어버린 규남이 자신의 가족과 주변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초능력자>의 가장 큰 갈등이 아니닐까

 

무엇보다 초인의 초능력이 ‘갑’ 과 ‘을’ 크게 상징한다. 초인은 규남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을 자기 마음대로 부릴 수 있다. 좀비처럼 움직이는 사람들과 초인의 관계는 중간에 돈이나 어떤 조건들이 생략되어 있을 뿐이다. 규남과 다르게 초인에게는 트라우마가 된 슬픈 과거와 무서운 능력이 있고, 그는 그것을 이용해 편하게 살아왔다. 우월한 사람들에게 농담처럼 ‘전생에 나라를 구했다’ 라고 말하듯, 차상위계층같은 초인의 과거는 설명해줘야만 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에 비해 ‘을’의 상징인 규남의 과거는 전무하다. 아마도 그는 수많은 ‘을’들 처럼, 그냥 살다보니 여기까지 온 것이기 때문아닐까. 각자의 ‘을’에도 나름의 사정들이 존재하겠지만, 결국 우리는 비슷한 ‘을’ 들을 보며, 사는게 다 그런거지 하고 이야기 하듯 규남의 과거는 너무 보편적이라 설명되지 않은 듯 보인다.

 

규남이 전당포에서 일한 기간을 나타낼 때 음식점에 전화할때의 단축번호, 전화태도, 사장의 대사를 자기 인생관처럼 흉내내는 것처럼 은근히 보여준다거나, 특별한 이유없이 자신의 목숨을 걸고 사람들을 구하려고 한다거나 하는 등 ‘을’에 대한 설명은 압축 혹은 생략되고 있다. 그러니깐 ‘을’인 규남이 가상의 가족과 사람을 구하려고 하는 것은, 마치 ‘보편적 인간으로서의 감정과 생각’인 것이다.

 

하지만 이것들은 캐릭터와 주인공의 혼선을 가져오기도 한다. 특히 규남의 행동은 초인 뿐만 아니라 관객에게 이해되기에도 무리수가 생길때가 있었다. 오히려 규남이 없었다면 조용히 넘어갔을 일들을 보면 더욱 그렇다. 밀어내기 폭로로 어딘가에는 불어닥칠 찬바람이나 (가령 납품거부로 인한 타 대리점의 도산이나, 기업 자체의 구조조정 등), 서민들 삶을 위해 열린 집회가 그 주변 상권이나 작은 경제요소들을 위협한다고 주장하던 모양세 처럼 말이다.

 

또한, 이 <초능력자>에서는 매스컴이라는 존재와 공권력의 존재가 거의 전무하게 그려진다. 마치, 누군가 죽거나 폭로하지 않으면 평소에 관심기울이지 않는 언론의 현실같다는 (자의적) 해석도 가능은 하겠지만, 결국 개인간의 대립을 극대화 시키기 위한 영화적 생략으로 보여졌다. 하지만 매스컴의 배제로 결국은, 사회적 코드를 직접적으로 읽을 요소들이 거의 전무해버려서, 영화가 대충보면 마치 초능력자들의 개인적 대립들로만 이뤄져 있듯 보이는 것 같다. 그래서 ‘임대리’를 계속 외치게 되는 것 아닌가 하고 생각될 지경이다.

 

어쨌든, 한쪽 다리가 없는 초인과, 사고 때문에 잠깐 비슷한 신세였던 규남은 그들의 대사처럼 정말 친구가 될 수 있었을까. 서로 비슷한 핸디캡, 혹은 트라우마를 가진 ‘갑’과 ‘을’의 세상에서, 일그러진 ‘갑’으로 태어난 이가 결국 ‘을’ 을 조종하는 세상이 아니라, 서로가 동시에 ‘갑’이 되어 위로하는 ‘유토피아’는 가능할까. 실상은 서로 상처를 감싸는게 아니라, 결국 각자의 고난을 갖고 살아가면서도, ‘초’능력자들은 자신의 힘으로 상처를 묻어버리며, 위에 서버리는 전통적 갑을 관계의 계승이다. 하지만 감독은 그렇게 갑을의 근원적, 인간적 공통점을 강조하면서도 결국 드라마의 완성을 위해 화해를 보여주거나, 현실을 그대로 그리지 않고, 특별한 ‘을’에게 손을 들어준다. ‘을’의 승리는, ‘갑’ 과 ‘을’의 화해보다 더 먼, 영화 같은 이야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어쩌면 이 영화는, 수많은 '을' 들의 고된 삶이야 말로 초능력과 같은 능력으로 오늘을 버티고 있는 것이라 말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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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라노 게이치로 의 <책 읽는 방법>을 읽던 중, <아주 사적인 독서>라는 흥미로운 책을 발견했다. 알라딘 에서 로쟈 라는 필명으로 활동하며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그의 신간이었다. 개인적인 욕망에 의해서 겨우 가끔 글을 끄적이고 있긴 하지만, 인터넷으로 장문을 읽는데 힘겨운 나는 사실 그의 글들을 유심히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내가 읽고 있던 책의 테마와 상응하는 부분이 있다는 점과, 언젠가 로쟈가 쓴 책에 관한 글을 읽어보고 싶었던 막연한 생각이 이 책을 들게했다. 사실 히라노 게이치로의 글은 독서법에 관한 분석 수준이라 피곤하거나 할 경우 제대로 집중이 되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물론 책은 꽤 유익하다) 하지만 저자의 의도에 따라 고전들을 쉽게 풀이한 이 책은 비교적 손쉽게 읽혔다. 물론 두 책이 가고자 하는 방향은 다르기 때문에 비교는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지만. 어쨌든, 무엇보다 가장 큰 소득은, 정말로 이 책에서 소개하는 고전들을 '읽어보고 싶다'는 욕망을 만들게 하는 것이었다. 

저자인 로쟈는, 소개하려는 책에 대한 독자의 관심을 환기시키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사용한다. 책의 스토리에 대한 것은 물론이고, 해당 책의 저자와 책의 연관성, 사회적인 위치까지 논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런 일련의 과정들이 무척 쉽게 읽힌다는 것이다. 애써 어려운 표현을 쓰지 않고선, 캐릭터를 내밀하게 분석하고 비교한다. 이야기를 중심적으로 보는 내게, 캐릭터의 욕망을 통해서 이야기가 펼쳐지는 지점은 흥미를 끌기에 충분했다. 그렇게 해당 고전 속 캐릭터의 욕망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스토리는, 집필 당시의 저자에 대한 분석은 물론, 출간, 혹은 고전의 반열에 서서히 오르게 되는 사회적 환경을 망라하며, 마지막에는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욕망에 대입된다. 한권의 고전을 둘러싼 이런 외적 이야기 들은 흥미와 몰입을 자아내고, 고전 안에서의 캐릭터, 스토리에 대한 분석은 쉽고, 현대인들과 접목되는 부분들은 다시금 세상과 사람들을 돌아보게 한다.

다시 말하지만, 고전에 대한 다양한 접근과 틀을 깨는 해석은, 고전을 읽어야겠다는 의무가 아니라, 정말 읽어보고 싶게끔 만든다. 그것이 이 책의 가장 큰 역할이었다고 생각하고, 충분히 그 역할을 해냈다고 본다. 한 권의 책을 통해 여러 고전의 발견은 물론, 흥미가 생겼다. 앞으로 읽을 고전은, 의무가 아니라 욕망이 될 것이다. (언제까지고 늘 그럴수야 없겠지만) 그리고 아래와 같은 책들을 우선적으로 읽으려 마음먹었다. 여기에는 이 <아주 사적인 독서>를 통해서 거의 처음 접한 것들도 있고, 이전부터 읽으려고 막연하게 생각만 하던 것이 좀 더 의욕과 기대가 충만해진 것들도 있다.

 

 <아주 사적인 독서>에서는 <햄릿>과 <돈키호테>를 비교하는 지점이 있다. 그것은 바로 실행하느냐 머뭇거리느냐 의 차이였다. 햄릿은 아버지에 대한, 어머니를 위한 복수가 머뭇머뭇 거리는 데에 할 이야기들이 꽤 많았다. 아주 예전에 읽었던 셰익스피어의 희곡들은 대부분, 그 유명세를 의아하게 할 정도였다. 꽤 긴 시간이 지나고, 다시 만나는 셰익스피어의 작품은 어떨까. 로쟈의 말을 빌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아이러니함을 통해 '복수 지연극' 을 테마를 중심으로 읽을 것에 대한 기대도 충만하다. 무엇보다, 늘 많은 것들을 미루는 나와는 무엇이 다르고, 무엇이 같을까.   

 

 

 

<돈키호테>에 대해서 사실 많은 것들을 모르고 있었다. 사실 이번에 거의 처음으로.. 구체적으로 알게된 이야기는 무척 흥미로웠다. 패닉의 '로시난테' 의 노래가 계속 머릿속을 돌아다녔다. 기본적인 모험의 틀을 가지고선, 구시대적 유물이 되어버린 광기와 모험에 대해서 스스로 인지하면서도, 기꺼이 자신의 이상을 시대에 구애받지 않고 내던지는 그의 모습을 만나고 싶다. 어쩌면 그것이 바로 내가 가려는 방향일 것 이라 생각되기에

 

 

외도는 사회적인 죄일까, 도덕적인 죄일까. 우리는 개인이 갖춰야할 도덕적 덕목을 어디까지 간섭해야 하는 것일까.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음에도 학습된 도덕적 기준을 벗어남으로 인해 한 인간을 사회적으로 압박하는 법적으로 제제하는 것에 대해서 물음을 던질 것이다. 타인의 욕망을 법으로 통제하기 위한 제도는 얼마만큼 정당한 것일까. 주홍글자는 우리가 제재하는 인간의 욕망과의 정당성을 생각케 해줄 것이다.

 

 

 프란츠 카프카의 작품중에서 가장 대중적으로 알려진 <변신>이란 작품을 아직도 제대로 읽어보지 못했음은 사실 많이 부끄러운 지점이지만, 그래서 더 공개적으로 독서를 천명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주 오래전부터 관심을 갖고 있었음에도, 대략의 줄거리를 알고있다는 얄팍한 만족감에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났다. 매력적인 일러스트가 함께하는 변신은 좀 더 쉽고 매력적으로 다가오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에밀리 브론테에 대한 어떤 설명할 수 없는 궁금증으로 <폭풍의 언덕>또한 예전부터 읽고싶었던 고전 중 하나다. 하지만 그런 막연한 사랑이야기로 상상만 하던 이야기는 이제 인간의 '욕구' 너머의 '욕망' 과 그에 따른 '도덕' 그리고 구원 혹은 결론을 어떻게 그려내느냐는 <안나 카레니나> 와 <채털리 부인의 연인>을 통해 서로 비교해 본다면 흥미로운 지점이 있을 듯 싶다. 물론 <주홍글자>도 여기에 비교 텍스트로 또 적합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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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여우
콘 사토시 감독 / 대원DVD / 200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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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라며, 한 남자의 간절한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우주선에 탑승한다. 결코 돌아오지 못할 것을 알고도 그녀는 떠난다... 이것은 비디오 테잎이 가득한 편집실에 있는 다치바나가 보고 있는 후지와라 치요코의 출연작 중 한 장면이다. 하지만 영상 속 우주선 발진에서 느껴지는 진동과 때를 같이 하며, 다치바나가 있는 곳의 현실 또한 미세한 지진에 흔들린다. 후지와라 치요코의 영화속 한 장면과 함께 현실 또한 흔들리며 균열을 일으킨다. 그렇게 다치바나, 그리고 다치바나가 곧 만나게될 후지와라의 현실이 곧 영화와의 경계가 무너질 것임을 암시한다.

 

'은영영화사' 는 촬영장 철거를 기념하며, 전설적인 여배우 후지와라 치요코의 다큐멘터리를 기획한다. 다치바나는 30년간 은둔 생활을 한 치요코를 겨우 수소문해, 허락을 받아내었다. 그리고 촬영조수를 데리고 그녀의 저택으로 향하는 길, 다치바나의 들뜬 마음과 긴장된 마음이 역력하다. 이윽고, 치요코를 만나게 된 감격의 순간. 다치바나는 그녀에게 아주 귀한 선물을 건넨다. 낡은 옛날 열쇠. 그녀는 그 열쇠를 감격스레 받아들지만, 이내 다시 지진의 조짐이 보인다. 이제 정말로 본격적으로, 한 여배우의 파란만장한 지난 삶과, 영화와, 그리고 그 현재의 삶에 경계에 균열이 생기며 붕괴되는 순간이다.

 

치요코의 말은 곧 그림으로 펼쳐진다. 전쟁 중, 소녀잡지를 좋아하며 왕자님을 기다리던 꿈많던 치요코는 우연히 영화사 전무의 눈에띄어 배우의 길에 오를 기회를 얻지만, 엄마의 반대로 쉽지가 않다. 내심 기대했던게 틀어지자, 그녀는 실망한채 밖으로 나온다. 그리고 밖에서 눈을 던지며 괜한 심술을 부리던 중, 누군가에게 쫓기던, 부상당한 '운동가' 인 그를 우연히 마주친다. 그리고 엉겁결에 그를 숨겨주게 된 치요코. 그림을 그리는 그에게, 치요코는 짧은 시간 동안 나눈 대화속에서 깊은 호감을 갖게 되지만, 그는 며칠을 못가 이내 추적을 피해 다른곳으로 도망쳐야 했다. 뒤늦게 그 뒤를 쫓은 치요코, 하지만 열차는 만주로 이미 떠나버리고, 그녀는 그를 꼭 쫓아갈 것임을 다짐한다.

 

하지만 이 기차역에서 등장하는, (치요코를 인터뷰하는) 다치바나는 이 장면에서 수십번을 울었다고 한다. 카메라를 든 조수는 놀란다. '이게 그럼 실제가 아니라 영화의 한 장면이라는 거?' 그리고 다시 인터뷰를 하는 현재. 치요코는 이 일을 계기로, 영화사에서 제안했던 영화가 만주에서의 촬영이라는 이유로, 영화배우가 되기로 결심했다고 말한다. 자 여기서 촬영조수는 한번 더 놀란다. 말하진 않지만 딱 봐도 관객과 같은 질문 '뭐야, 좀전엔 영화라더니?? 진짜인거야??'

 

자, 어차피 이 애니메이션에서 명확한 경계를 지으려는 시도는 무의미하다. 혹, 자신만의 기준으로 그것을 세웠다 하더라도, 이내 그것은 다시 무너지고 만다. 이미 치요코의 인터뷰가 그려지는 모든 장면들, 그러니깐 그녀의 영화의 장면 장면마다 다치바나와 조수는 옆에서 함께하며, 때로는 해당 영화의 한 역할로 출연해서, 그녀가 그를 찾아가는 여정을 돕는다. 현실과 영화와의 경계. 무의미다. 영화와 현실은 풀어질 수 없을 만큼 교묘하게 얽혀있다. 추론할 순 있어도, 확신할 순 없다.

 

그녀, 후지와라 치요코는 그 당신 전설의 7작품의 한장면 한장면에 대해 시공간을 넘나들며 어딘가로 향했을 그를 향해 내달린다. 달리기도 하고, 거의 날기도 하고, 말을 타고, 마차를 타고, 자전거를 타며 그를 향해 내달린다. 이 모호한 경계가 치밀한 연출적 계산으로 매끄럽게 넘어가며, 관객또한 현실과 영화 사이에서 너무나 박진감 넘치는 줄타기를 시도하게 된다.

 

전쟁이 끝나고, 그에게로 향하는 열쇠마져 사라지고, 그녀는 결국 감독과 결혼하게 된다. 하지만 그녀가 몰랐던 진실이 곧 밝혀지고, 그녀는 다시금 첫사랑의 그를 찾아 내달린다. 현실을 뛰고 뛰어, 영화의 극적인 순간들을 다시금 주마등처럼 통과하며, 달린다....

 

누군가, 과거의 자신을 추억하는 것. 첫사랑을 추억하는 것, 누군가, 우상과 같던 사랑을 추억하는 것. 이런 이야기들을, 한 인생이 여러편의 영화와 병치되며 그려진 한 파란만장한 여배우의 삶. 이제는 기억조차 잘 나지 않는 그 사람이지만, 여전히 마음 깊히 남아있는 애잔한 감정. 가장 순수했던 첫사랑. 잊을 수 없는. 그런 이야기...

 

 

 

 

 

(아래는, 스포일러성 포함한 마무리)

 

 

 

 

 

끝내 고백하지 못하고 그녀를 목숨바쳐 구해주기만 했던 다치바나의 순정, 여전히 추억속의 그를 잊지 못하고 죽음을 앞두고도 그를 따라가는 그녀의 순정. 바보같지만 아름답다. 어쩌면 사람은 추억을 더듬는 것만으로도, 이미 돌아갈 수 없는, 죽은 시간의 누군가를 그리워하고, 추억하는 일을 통과하며 살아갈 수 잇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지난 시간의 누군가를 순수하게 끝없이 추억하는 일, 그것으로도 한 인간의 삶은 만족할 수 있는지도 모르겠다.

 

사실 치요코의 '그'는 이전에 갖은 고문으로 이미 오래전에 죽은 사람이었다. 후지와라는 죽은 이를 찾고 잇던 것이었다. 어쩌면 추억속에 사는 사람은 그렇게 죽은 이다.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죽음이자, 현재의 시간성에는 존재하지 않는. 하지만 그런 죽은 시간을 쫓는 일, 그것은 인간이 할 수 있는 숭고한 일 중에 하나가 아닐까. 바보같지만, 비난 할 수 없는 일, 그 순수한 마음이, 결국은 아름답게 번져가는 일. 가장 소중한 것을 열 수 있는 열쇠, 그 열쇠를 쥐고있는 후지와라는 영화라는 초월성의 시공간을 넘나들어서라도 다시금 돌아갈 수 없는 첫사랑의 추억의 마침표인 그에게 갈 수 밖에 없던 것이다.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그에게 그렇게 향하려 하는 것은, 어쩌면 현실적으로 이미 부질없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우리가 그것을 아름답게 볼 수 밖에 없는 이유는, 그녀의 영화 인생은 한편한편이 곧 자신의 삶이 되고, 이후 아무도 제대로 말할 수 없는 사후세계에서 조차도 그를 찾고 있는 순수한 마음 때문이다. 사후 저 어딘가에서는 어쩌면 그를 만날 지도 모른다는 것을 기대해보는 일은 이미 그녀가 스스로, 자신의 영화들을 삶 그 자체로 받아들이고 있는 증거일 것이다. 그리고 죽음의 순간까지도, 영영 만날 수 없는지도 모를 그를 찾고 있는, 그 자신을 보고 행복해하는 모습이야말로 우리가 삶에서 어떻게 스스로 충만감을 느끼고 행복해 할 수 있는지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죽은 시간, 추억이라는 삶의 한 순간을 아름다게 간직하는 일, 그것을 끊임없이 더듬어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야말로 행복 아니겠는가.

 

끄적이긴 끄적였지만, 이 애니메이션을 글로 설명하는게 참 뭣하다. 누군가의 표현처럼, 로맨스도, 판타지도, 드라마도 (적어도 내 기준에선) 완벽하다고 밖에 말할 수 없다. 더욱이, 영상으로만 그려질 수 밖에 없는 부분은 아무리 내 깜냥에 애써 설명해봤자 발끝에도 못미칠 것이다. 환상적인 분위기속에는 탄탄한 이야기와 캐릭터가 받쳐지고 있다. 두번째 감상이후 감정을 주체할 수 없어 정말로 졸음을 꾸역꾸역 참아가며, 오히려 처음에 느끼지 못했던 감정들을 새로이 느끼며 눈물이 그렁거렸다. 대단한 애니메이션이다. 정말 최고다. 콘 사토시 감독은 분명 천재다. 그렇기에 너무 빨리 세상을 등진 것이라는 생각까지 들 정도다. 아 이 애니메이션을 극장에서 볼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너무 늦게 알아버렸다...

 

 

다른 리뷰를 보며, 내가 놓친것이 있다고 생각해서 덧붙이는 글

 

노파는 정말 마지막에는 치요코의 모습과 많이 닮아있다. (점의 존재는 내가 봤을때 눈치채지 못했으니 어쨌거나) 치요코는 자신이 가장 순수하고, 풋풋한 사랑을 했던 그때가 아닌, 나이가 들어 어른이 된 자신과 그가 만나는 것을 상상할 수, 원하지 않았던지도 모른다. 그녀는 극 후반부에 스스로, 나이가 든 자신을 보여줄 자신이 없었다고 말한다. 그것을 보면, 어쩌면, 계속해서 그녀는 끝까지 그를 찾은게 아니라, 그 스스로, 자신의 아픈 마음이 남아있을 때 까지만 그에게 다가가려 했는지도 모르겠다. 물론 이것은 좀 이래저래 무리가 있는 해석이다.

 

차라리 아래와 같은 해석이 더 맞는 듯 하다. (타 리뷰 꽤 활용/인용)

치요코는 자신이 순수하게 한 남자를 마음에 두었던 소녀시절의 마음이, 나이를 먹어서도 계속 존재하고, 또 앞으로도 그렇게 되길 원한 나머지 노파라는 환상을 스스로 만들어내어 자신이 저주 받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계속해서 그를 사랑하며, 자칫 그를 사랑하지 않게 된다면 늙어가며 서서히 사라질 그런 사랑에 가슴 시린 감정을 붙잡아두려고 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사랑'을 연기해서, '젊음'을 연기한다라..  여성의 궁극적 자기애.. 사랑하는 자신을 사랑하는... 깊게 생각해 보고 싶다.. 조만간, 천년여우를 다시 만나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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킬리만자로의 눈
어니스트 헤밍웨이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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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하면서도 다양한 관점이 존재하는 선굵은 단편들의 향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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