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
김여진 지음 / 클 / 2012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비유하자면 그녀는,
자신 한사람 만을 위해서도 맛좋은 음식을 차릴 줄 알고 또 넉넉히 만들어서 소중한 이들에게 도시락을 싸줄 사람. 그것을 스스로 즐기는 사람.
자신과 상대 모두 행복하길 기원하고, 그 방법을 고민하고, 행동하는 사람.

문학적으로 훌륭한 업적이나 혹은 그런 수준을 갖고있는것과 상관없이 이렇게 자신의 삶을 사랑하고, 타인과 함께 더 나은 길을 고민하고 함께 나아가려는 이들을 만나는 일은 언제나 너무 벅찬일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작가는 작품을 쓸 때 영상을 떠나서는 안 된다.
스토리는 계속 진전되어야 한다. 즉 한 시퀀스에서 스토리가 정지되지 않고, 머물지도 않고, 완전히 마무리되지도 않아야 한다. 또한 다음 시퀀스를 기다리게 연속성을 가져야 한다. 즉 한 장면의 내용은 다음 장면을 불러내야 하는 것이다.
한 장면을 설정할 때도 반드시 이유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모든 장면은 주제가 담겨 있어야 한다. 그렇지 못한 장면은 다른 작품애서 차용해온 것처럼 보인다.
좋은 스토리 구성은 흥미를 지속적으로 끌고가고, 진실하다고 믿게끔 하는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직까지 북플 사용법을 잘 모르겠다. 나 멍청해지고 있는걸까.. 타 도서에 관해 메모하고자 하는데, 임시저장된 글을 삭제하겠다고 엄포를 놓으니 일단 올리고 보자..ㅜ ㅜ




`죽지 뭐` 머나먼 타향, 아무도 떨어져 죽은 사람 없는 이 보잘것없지만 겁나는 산에서, 죽지 뭐. 그럼 뭐 어때. 별 의미도 없고 시시한 죽음이지만, 뭐 어때.
참 이상하지. 왜 이런 생각이 들었고, 왜 이런 생각이 들자마자 겁이 사라지고, 다리에 힘이 들어갔을까? 정말 꽉 쥐고있던 마지막의 것. 목숨. 난 그걸 살짝 내려놓았다. (...)
아무튼 그 순간 난 일어서서 걸을 수 있었다. 아니 뛸 수도 있었다, 놀랍게도. (...)
그날의 감각을 잊지 못한다. 벽 하나를 뛰어넘은 느낌. 용기를 내는 요령을 익힌 기분이었다. 두려움을 이기는 법. 고집을 꺾는 일. "반드시 결과가 이러이러해야 해. 안 되면 어쩌지?" 라는 내 기대를 내려놓는 일. 뭐 어때 실패하면, 실수하면, 잘 안 되면, 가진 것을 잃으면, 다치면, 혹 죽기라도 하면, 뭐 어때. 그만큼 인생을 자유롭게, 재미있게 즐겼으면 됐지 뭐.
(112-113)

하지만 스무 살 그때, 사랑을 해야 할 나이였다. 사랑하면서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야 하는 나이였다. 세상도 바꿔야 하지만 무엇보다 자신을 돌봐야 할 나이였다.
(138)

그래도 결국은 일어나 졸린 눈을 뜨고 걸어야 했다. 그렇게 유년은 끝났다. 그 짧았지만 서러웠던 느낌을 기억한다. 세상이 네게 자고 싶어도 자지 말고 참으라 말했다. 내 몸은 너무 커져 이제 안겨 다닐 수가 없었다.
(224)

자신의 판단, 결정, 행동의 근거가 결국 `두려움` 인지 잘 살펴볼 일이다. 막말로, 죽기밖에 더 하는가 말이다. 249


댓글(2)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cyrus 2015-04-02 18: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북플이 사용하기가 편해도 예전 PC 상태에서 글 쓰는 것도 편안해서 좋아요. ^^

기다리는 자 2015-04-03 00:41   좋아요 0 | URL
아아.. 저는 며칠째 북플에 적응을 못하고 있는지..ㅜ 생각보다 개방성이 높아서 마음내킬때 메모도 안되는 글들이 타인의 타임라인에 올라간다는게 민폐같아요..ㅜ쓸때마다 비공개를 거는것도 약간 찌질해보이고..헷.
쨌든, 저 사실 알라딘 할때도 눈팅만하다시피 했는데, 이리 낯선곳에서 먼저 관심갖아주셔서 감사할따름입니다!!
 
삶을 바꾼 만남 - 스승 정약용과 제자 황상 문학동네 우리 시대의 명강의 1
정민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어쩌다보니 좌식 책상위에 책을 두고 읽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황상이 평생을 두고 잊지 않던 ‘삼근계’의 가르침. 부지런함은 그저 단발성인 나에 대해 지레 무안해서 복사뼈로 바닥을 꾹 눌러본다. 인지하지 못했던 뼈와 바닥의 단단함에 정신이 집중된다. 괜스레 다리를 바닥에 더 붙여보자, 단단한 뼈가 바닥을 밀며, 혹은 바닥이 뼈를 밀며 통증이라고 불러야 할지 말지 한 감각이 새롭게 느껴진다. 일정한 통증과 단단함을 버티어 내고, 나아가는 일. 스승 정약용과 제자 황상의 이야기는 그런 부지런함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시간과 집중은 점차 감각을 삼킨다.

 

  다산이 가르친 황상, 황상이 섬긴 다산. 이 둘이 서로간의 삶을 변화시켜 이롭게 살아가는 서사는 지은이를 통해 해설로, 때로는 시 로, 부 로 이어진다. 그 어느것하나 맛깔스럽지 않은게 없다. 이런 다양한 형태를 통해 다산이 황상을 이끌고, 황상이 다산의 뜻을 받들어 흐트러짐 없이 나아가는 이야기는 어느새, 인물에서 인물로 뻗어나간다. 굳건한 나무가 단단한 가지를 뻗어 주변 나무와 공간을 공유하듯, 인연이 인연으로 이어진다. 자식은 물론이거니와, 형제와 벗까지 나아가는 길목 길목에서 뜻 은 뜻으로 만났다. 위대한 삶이 또 하나의 삶을 위대하게 이끄는 과정이 여간 감격스러운게 아니다.

 

“다산을 정점으로 당대 최고 명류들의 인연이 종횡으로 그물망처럼 얽히는 광경은 보기에도 아름답다. 큰 나무 한 그루의 그늘이 이리도 넓었다.” (448p)

 

  읽는 맛을 보자면 소설과 견줘도 부족함이 없는 이 [삶을 바꾼 만남]은 다산과 황상, 그리고 그 시대를 함께 살아간 몇몇 인물들의 업적을 기리는 가운데도 허물을 숨기지 않은 솔직한 일대기이자, 삶을 살아가는 근본적인 태도에 대한 계발서이기도 했다가 때로는 운치있는 시집이기도 하다. 지은이는 행간 곳곳에서 때론 황상으로, 다산으로, 또 다른 이들로 겹쳐보인다. 다산과 황상이 일궈놓은 삶과 만남의 기록은 분명 작은 의미가 아니었으리라고 감히 생각해본다. 고맙게도 지금에서야 이렇게 쉬이 엮인 글을 만날 수 있는것 또한, 지은이의 뜻과 노력, 그리고 애정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 아니었겠는가. 그리고 이들에 대한 정성스런 기록과 정리는 한 인간의 성취를 그리고 만남이 주는 깨달음을, 다른 누군가의 삶에 끼워넣기에 충분한 근거가 된다.

 

 다산으로 시작해 황상으로 맺어지는 이야기를 되새겨보니, 내가 나를 향해 어떤 태도로 살아갈 것인지는 분명 내가 다른이를 어떤 태도로 대할 것인가와 크게 떨어져있지 않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이제는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 몇날 며칠을 걸어야 할 필요도, 편지를 부칠 필요도, 그것을 기다리거나 분실을 노심초사 할 필요도 없다. 만남의 순간은 어디에서건 차고 넘친다. 그 흔한 ‘만남’ 중에서 ‘맛남’을 가려내는 일은 때론 요원해 보인다. 하지만 그런 시대에 필요한 건 스스로 먼저 부지런함을 초석삼아 세워진 뜻(그것이 비록 남 보기에 대단한 것이 아닐지라도)과, 두터운 ‘신의’를 갖는 것 아닐까. 그렇다면 절로 맛남을 구별하는 일뿐만 아니라, 나아가 흔히 스쳐갈 수 있는 만남을 맛남으로 이끄는 것도 가능치 않을까.

 

“인생에서 귀한 것은 서로 마음을 알아주는 것일세” (242p)

 

 정약전이 다산에게 보낸, 황상을 두고 말한 편지에서 건진 이 한 문장에서, 이 책을 통해 다시 정의된 ‘만남’이 간결하고 값지게 간추려진다. 다산과 황상, 그리고 여러 이들의 기록은 이것에 대한 명명백백한 증명이다. 여러 번의 만남에서도 마음을 나누지 못한 이, 한번의 만남에서도 지워지지 않는 이, 그리고 여태 만남을 이어가는 고마운 이들을 떠올려보면 결국, 오래도록 귀한 것은 사람 사이에 있었다. 그 깨달음의 시작에 '이런 사람이 있었네’, 라고 아무렇지 않은 듯, 깊게 기억될 것이다. 멋쩍은 내 복사뼈와 함께.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초능력자
박이정 지음, 김민석 각본 / 피카디리 / 2010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갑’과 ‘을’의 착취적 관계가 사회적 이슈로 떠오르고 있다. 물론 이런 관계가 기본적인 사회의 근간인 것이 현실. 이 ‘갑’과 ‘을’은 ‘을’들이 자신들의 신세를 한탄하는 용어로 사용되다가, 극 최근에 한 우유 대리점의 폭로로 사회 전체로 촉발된 것은 대다수가 알고있을 것. 나는 극소수의 ‘갑’과 대다수의 ‘을’이 존재하는 세상, 마치 초능력 같은 ‘갑’의 힘에 대응할만한 힘을 가진 ‘을’ 을 만들어 한판 붙여보려는 욕망이 투영된 것이 바로 이 <초능력자> 라고 보았다.

 

쓸모없는 것들이 처분되는 폐차장, 세상의 끝바닥으로 상징되는 곳에서 일하는 규남, 애초에 ‘평범’과 ‘보편’에도 끼지 못하는, 경계 바깥의 사람을 보여주려는 듯 주변인들도 모두 외국인 노동자 들이다. 누구라도 ‘최후의 만찬’을 떠올릴만한 폐차장에서의 점심먹는 장면에서도 규남은 가장 낮은 책상에서 밥을 먹고 있다. 특수할 만큼은 아니되, 보편적 통념에서 가장 바닥같은 인생을 살고있는 인물인 규남은, 설상가상으로 사고를 당하지만, 오히려 새로운 곳에 취직하여 새로운 ‘가족’들을 만난다.

 

하지만 초능력 때문에 혼자 살아가던 초인이 등장해서 규남의 가상 가족에서의 ‘아버지’를 빼앗고, 그의 주변을 위협한다. 흔하지만 매우 상징적인 ‘돈’과 ‘자유’를 빼았는 ‘갑’ 같은 초능력을 가진 초인에게, 있는건 의욕밖에 없는 모든 ‘을’ 가족들의 가장이 되어버린 규남이 자신의 가족과 주변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초능력자>의 가장 큰 갈등이 아니닐까

 

무엇보다 초인의 초능력이 ‘갑’ 과 ‘을’ 크게 상징한다. 초인은 규남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을 자기 마음대로 부릴 수 있다. 좀비처럼 움직이는 사람들과 초인의 관계는 중간에 돈이나 어떤 조건들이 생략되어 있을 뿐이다. 규남과 다르게 초인에게는 트라우마가 된 슬픈 과거와 무서운 능력이 있고, 그는 그것을 이용해 편하게 살아왔다. 우월한 사람들에게 농담처럼 ‘전생에 나라를 구했다’ 라고 말하듯, 차상위계층같은 초인의 과거는 설명해줘야만 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에 비해 ‘을’의 상징인 규남의 과거는 전무하다. 아마도 그는 수많은 ‘을’들 처럼, 그냥 살다보니 여기까지 온 것이기 때문아닐까. 각자의 ‘을’에도 나름의 사정들이 존재하겠지만, 결국 우리는 비슷한 ‘을’ 들을 보며, 사는게 다 그런거지 하고 이야기 하듯 규남의 과거는 너무 보편적이라 설명되지 않은 듯 보인다.

 

규남이 전당포에서 일한 기간을 나타낼 때 음식점에 전화할때의 단축번호, 전화태도, 사장의 대사를 자기 인생관처럼 흉내내는 것처럼 은근히 보여준다거나, 특별한 이유없이 자신의 목숨을 걸고 사람들을 구하려고 한다거나 하는 등 ‘을’에 대한 설명은 압축 혹은 생략되고 있다. 그러니깐 ‘을’인 규남이 가상의 가족과 사람을 구하려고 하는 것은, 마치 ‘보편적 인간으로서의 감정과 생각’인 것이다.

 

하지만 이것들은 캐릭터와 주인공의 혼선을 가져오기도 한다. 특히 규남의 행동은 초인 뿐만 아니라 관객에게 이해되기에도 무리수가 생길때가 있었다. 오히려 규남이 없었다면 조용히 넘어갔을 일들을 보면 더욱 그렇다. 밀어내기 폭로로 어딘가에는 불어닥칠 찬바람이나 (가령 납품거부로 인한 타 대리점의 도산이나, 기업 자체의 구조조정 등), 서민들 삶을 위해 열린 집회가 그 주변 상권이나 작은 경제요소들을 위협한다고 주장하던 모양세 처럼 말이다.

 

또한, 이 <초능력자>에서는 매스컴이라는 존재와 공권력의 존재가 거의 전무하게 그려진다. 마치, 누군가 죽거나 폭로하지 않으면 평소에 관심기울이지 않는 언론의 현실같다는 (자의적) 해석도 가능은 하겠지만, 결국 개인간의 대립을 극대화 시키기 위한 영화적 생략으로 보여졌다. 하지만 매스컴의 배제로 결국은, 사회적 코드를 직접적으로 읽을 요소들이 거의 전무해버려서, 영화가 대충보면 마치 초능력자들의 개인적 대립들로만 이뤄져 있듯 보이는 것 같다. 그래서 ‘임대리’를 계속 외치게 되는 것 아닌가 하고 생각될 지경이다.

 

어쨌든, 한쪽 다리가 없는 초인과, 사고 때문에 잠깐 비슷한 신세였던 규남은 그들의 대사처럼 정말 친구가 될 수 있었을까. 서로 비슷한 핸디캡, 혹은 트라우마를 가진 ‘갑’과 ‘을’의 세상에서, 일그러진 ‘갑’으로 태어난 이가 결국 ‘을’ 을 조종하는 세상이 아니라, 서로가 동시에 ‘갑’이 되어 위로하는 ‘유토피아’는 가능할까. 실상은 서로 상처를 감싸는게 아니라, 결국 각자의 고난을 갖고 살아가면서도, ‘초’능력자들은 자신의 힘으로 상처를 묻어버리며, 위에 서버리는 전통적 갑을 관계의 계승이다. 하지만 감독은 그렇게 갑을의 근원적, 인간적 공통점을 강조하면서도 결국 드라마의 완성을 위해 화해를 보여주거나, 현실을 그대로 그리지 않고, 특별한 ‘을’에게 손을 들어준다. ‘을’의 승리는, ‘갑’ 과 ‘을’의 화해보다 더 먼, 영화 같은 이야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어쩌면 이 영화는, 수많은 '을' 들의 고된 삶이야 말로 초능력과 같은 능력으로 오늘을 버티고 있는 것이라 말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