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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
김여진 지음 / 클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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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배우 김여진의 연기를 극장에서 본건 영화 <아이들>에서 였다. 사라진 자식을 기다리던 한 부부의 아내역할이었던 그녀의 모습은 마치 정말로 그런 사람을 보는 듯 했다. 그녀의 연기는 무척이나 인상 깊었다. 그리고 내가 그것을 아무렇지 않게 잊고 있는 와중에, 이 책을 우연찮게 만났다. 

 

배우다. 배우(!)고 있는 사람이다.

 

 책 날개에 적힌 이 짤막한 자기소개가 왠지 그럴듯해 보인다. 책을 읽다보면 이 말이 그냥 어깨에 힘만주고 한 말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된다. 배움은 남녀노소 에게 다 해당되는 말인데, 배우가 말하는 배움은 남들과 무엇이 다를까. 나는 그것이 '사람' 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사람을 배우는 것이 배우에게만 유효한 건 아니겠지만, 분명 다른 점이 존재한다. 정말 연기에 몰입하고, 그래서 정말 빼어나게 연기를 한 배우들은 심심찮게, 작품이 끝나고서도 그 후유증을 토로 하지 않는가? (그리고 대게 그런 역할은 어두운 면을 강하게 품고있다)

 

 배우가 연기에 몰입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맡은 역할에 대한 몰입인지, 배우 자신이 살면서 가져왔던 감정들에 대한 몰입인지는 각기 다를테지만, 분명한 것은 어쨌든 둘다 사람이란 점이다. 배우가 하는 일이 곧, 사람을 표현하는 일 아니겠는가. 그러니 배우가 가장 잘 알아야 할 것 또한, 사람이 아니겠는가. 자신 스스로 슬프지 않은, 즐겁지 않은 이가 어떻게 진정으로 다른 이들에게 그 감정을 전달할 수 있겠는가? 나는 감히 말하건데 연기를 잘 하는 배우란, 사람을 잘 배운 사람이다. (물론 사람을 잘 배웠다고 반드시 좋은 사람이 되리란 법은 없다.)

 그렇다면 (자신을 포함한) 사람을 배우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 뭘까? 어쩌면 그건 포괄적인 의미로 연애 아닐까.

 

<연애>라는 김여진의 첫 에세이는 이렇게 자신과, 타인과, 세상과 연애하는 이야기가 담겨있다.

어쩌면 풋내기 배우가 그렇게 시작하듯, 어쩌면 모든 풋내기들이 그렇게 시작하듯, 그리고 우리가 누군가를 알아볼 때 으레 그렇듯, 김여진의 이야기는 사회적인 것에서 시작해서, 개인적으로 흘러간다. (편집자의 의도야 편집자만 알터이니)

 

상상해본다, 버릇처럼. 늘 다른 사람의 마음을 상상하는 배우의 습관대로. (16p) 

 

 그녀가 세상을 향해 거는 연애의 시작은 '배우' 답다. 서울대학병원 청소노동자의 (해고에 항의하는) 파업 상황의 트윗 글들을 종종 리트윗 하던 그녀는, 연극 <엄마를 부탁해>를 공연하다가 문득 자신 주변의 청소노동자들을 바라보기 시작한다. 잃어버린 엄마를 찾는 딸의 마음을 매일 말하며 연기하던 그녀에게 어쩌면 그것은 운명같았을지도 모르겠다.  

 

 그녀는 자발적으로 트친(트위터 상의 친구)들과 모여서 사회의 약자들을 위해 시위하거나 시위현장을 돕곤 했다. 누구하나 가르쳐주지 않았고, 누구하나 시키지 않았지만 자발적으로 모여서 신기하게도 트친들 속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각자의 재능을 십분 발휘해 그 일들을 실현케 했다. 트친들과 일명 날라리 라는 모임을 결성해서 고전적이고, 때론 창의적인 방법으로 부당하게 약자가 되어버린 이들의 편에서 함께 했다. 각자가 돕고 싶은 사람들, 만들고 싶은 세상을 위해 그들은 뜻을 모아 뭉쳤다. 그리고 그 연대의 힘은, (책의 후반부에 나오는, 상황은 좀 다르지만) '좋은 사람과 함께하면 어쨌건 즐겁다.' (210p) 는 의미와 같은 맥락이었을 것이다. 각자가 또 함께 꿈꾸는 세상을 위해 자발적으로 모였으니 그 과정은 힘들지만 즐거웠을 것이고, 서로를 사랑했을 것이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하는 그 행복한 도전들은 그렇게 지속되었다. 그리고 홍대 청소노동자들, 한진중공업의 노동자들과 함께한 김여진과 날라리들은 끝내 유의미한 결과와 성과들을 만들어냈다. 

 

 방법이 있다면 알려달라. 노동자들이, 이미 고용형태의 3분의 2가량을 차지하고 있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자신의 권리를 위해 싸울 수 있는 '합법'적인 방법으로 무엇이 있는지. 어떻게 하면 불법시위자가 아닐 수 있는지. 자신과 가족의 밥줄을 지키고, 일한 만큼 정당한 대가를 받기가 이렇게 힘들고 심지어 범죄가 되어버리는 지금의 노동환경을 보면서 제발 누구든 대답해달라. 그들이 법을 지키며 살아낼 수 있는 방법을.(79p)

 

 짧게 요약했지만, 이처럼 사회속에 있던 그녀의 글을 읽는 동안에 나는 이 책을 '세상에 연애 거는 배우 김여진'으로만 예측했다. 그만큼 그녀의 말과 행동, 생각들은 인상적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이야기는 그렇게 거시적이지만은 않다.

 

 두번째 장은 그녀가 자선모금활동을 하다 인도의 둥게스와리로 가서 깨달은 이야기들이다. 참 솔직하다. 그녀는 자선모금활동에서 자신을 지나쳐간 사람들이 주인공 역할의 배우가 모금하는 곳에는 바글바글한 현실에 위축되었다. 그녀는 '내가 왜 여기있나' 하고 후회와 한탄을 하다가, 다시 그 질문을 스스로에게 되묻는다. 그녀는 하루 1달러가 없어서 죽어가는 아이들을 위해 자선모금을 하고있었다. 그런데도 자신을 알아봐주지 않는 이들 때문에 움츠러들고있었다. 그것을 깨닫자 그녀의 목소리에도 힘이 실리기 시작했고, 사람들에게 더 크게 외치기 시작했다.

 

 두려움을 직시하고자 생각했다. 똑바로 보지 않으면 극복할 수 없다. 고통의 실체를 내 눈으로, 내 몸으로 또렷이 보자. 그것만 하자. 싸우려고도 이겨내려고도 하지 말고 그저 똑바로 '응시'하자 (103p)

 

 그리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 실제로 굶주린 이들을 마주하고자 했고, 인도의 둥게스와리로 가는 선재수련을 쫓아간다. 그곳에서 그녀는 짧게나마 굶주림을 체험하며, 또 낯선 지역에서 고생해가며, 낭떠러지 같은 산을 올라가며 깨닫는다. 지금, 여기에 집중하는 법을. 

 

풀, 돌, 물, 먼지처럼 그렇게 가볍게, 자유롭게 살면 되겠구나 싶어졌다. (113p)

 

세번째 장은, 그녀의 대학시절과 연기를 막 시작하게 될 무렵의 이야기가 중심이다. 고등학교 시절과 다를 것이라고 예상했던 그녀는 막상 시작된 대학생활에 큰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그런데 사람들이 자꾸 죽었다. 무섭고 슬펐다. 죽으면서까지 말하고자 하는 그게 도대체 뭔지 알고 싶었다. 그런데 알 수가 없었다. 그러니 집회를 나갈 수 밖에 없었다. 누구도 말해주지 않는 이야기들을 그곳에서는 들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125p)

 

그녀는 목숨까지 바쳐 무언가를 이루려는 사람들에 대한 궁금함으로 데모현장에 나가기 시작했다. 허무하게 다치고 죽어가는 이들을 보며 가슴아파했다. 그리고 그녀가 만났던 한 여선배는 그녀에게 '아름다움'을 다시금 생각하게 해주었고, 그래서 그녀는 이십대의 치기어린 마음과 자기 스스로의 기준을 통해, 조금은 다른 운동들을 하기 시작한다. 정치적인 것과는 약간의 거리를 둔, 노동자의 해고나 강제철거 같은 것들을. 첫사랑을 만나고, 사랑에 실패한다.

 

하지만 스무 살 그때, 사랑을 해야 할 나이였다. 사랑하면서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야 하는 나이였다. 세상도 바꿔야 하지만 무엇보다 자신을 돌아봐야 할 나이였다. (138p)

 

그리고 연기를 시작한다. 만화<유리구두>로 어렴풋하게 접한 연극은 시간이 지나 우연히 그녀를 연극으로 인도한다. 그리고 다시한번 우연을 계기로 주연으로 발탁된다. 연극을 거치고, 그녀는 영화를 시작한다. 아마 그녀가 연기를 막 시작하는 이 부분들이 배우 김여진에게 가장 궁금한 부분이자 흥미로운 부분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녀의 연기인생을 모두 논하기엔 턱없이 부족하겠지만 그 시작과, 여배우로서 갖는, 그리고 연기자로서 같는 즐거움과 고민들이 솔직하게 담겨있다.

 

네번째 장은 (자 드디어) 기다리던 연애에 관한 이야기다. 그리고 그녀가 사는 모습중 가장 평범한 이야기다. 남편과의 이야가 주된 핵심이다. 자신이 출연하던 드라마의 피디와, 아는 배우의 소개로 만나 결혼하고, 또 그 결혼생활을 건강하게 이어가는 이야기들은 어느 연애사가 그렇듯 재밌다. 나아가 짧은 에피소드들 속에 담긴 그녀의 철학과 조언들은, 어떤게 진짜 서로를 위한, 서로를 사랑해주는 연애일까를 생각케 한다. 찰떡처럼 붙어있다가도 떨어져있고, 서로를 인정하는 일 같은 것들. 자신을 지키면서 상대를 지키는 법을. 물론 이 책이 이런 '이성과의 연애' 방법론 적인 책이 아니기에 대단한 것들이 수십 수백까지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간과하고 있거나 혹은 거부하고 있던 것들이 솔직담백 간결하게 때때로 날카롭게 쓰여있다.

 

 한 사람을 사랑해봐야 안다. 내가 무엇에 끌리는지, 어떨 때 행복한지, 얼마나 찌질하고 잔인한지, 얼마나 자주 작은 일에 상처받고 자기연민에 빠지는지, 감정이라는 게 얼마나 쉽게 변하는지, 연애해봐야 안다. 그게 어떤 형태의 사랑이든 해보면 해볼수록 자신에 대해 더 잘 알게 된다. 우리 인생에서 연애만큼 매순간 자기성찰을 필요로 하는 일도 없으므로. (230p)

 

 이 책은 이렇듯 배우 김여진의 다양한 모습을 엿볼수 있게 한다. 그녀는 자신을 사랑하는것과 타인을 위하는 것 어느것 하나 소홀히 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자신을 사랑하는 그만큼 타인을 사랑한다. 마치 자신을 사랑하지 않고서 타인을 사랑할 수 없다는 진리를 확인케나 하듯.

 

 김여진은, 자신을 사랑하고 타인을 사랑하고 그래서 내가 사랑하는 타인이 아프지 않게 더 좋은 세상을 만들고자 하는 사람이고, 배우다. 그 고통스러운 과정을 그녀는 즐긴다. 자신이 좋아서 한다. 자신의 환경이 허락할 때, 누구보다 열심히 참여하고, 움직인다. 어떻게보면 자신이 즐거울 수 있는 만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즐거움'은, 그 '일' 들을 지속케 한다.

 

그래서 나는 배우 김여진을 이렇게 말하고 싶다.

 

 '맛있는 음식을 스스로 즐겁게 요리해서, 자신이 사랑하는 이들과 나누기 위해 먼길 마다 않고 찾아가는 사람.'

 

매력적인 배우고, 매력적인 사람이다. 언젠가 함께 작업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참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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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이 없는 너를 부를 수 없는 나는 - 나에게서 가장 멀리 뒤돌아선 곳으로 떠나는 여행
김태형 지음 / 마음의숲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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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턴가 하루하루에 조바심내고 있다. 그저 막막한 미래에 대한 불현듯한, 그러니까 으레 안고 살아가는 '흔한' 불안이 아닌, 내가 선택한 삶의 방향, 그러니깐 정말로 삶의 지속성에 대해서 아무것도 보장해 주지 않는 그 길이 내게 요구하는, 하루하루 무언가 어제보다 달라져야만 하는 강박감은 오늘이 어제와 같고, 내일도 오늘과 같았던 반복적인 패턴에서 나를 더욱 채근했다. 거기다 최근에는 전개가 빠르거나 혹은 적어도 분량적인 부담이 적거나, 이해 자체가 어렵지 않은 이야기들을 주로 만났었기 때문일까. 어쨌든 그렇기 때문에 처음 이 책을 만났을 때는 한장 한장, 문장 하나 하나 읽어 내려가는게 쉽지가 않았다. 그래서 느릿느릿 쉬엄쉬엄 읽다 내려놓다를 반복하고 나니, 한달이란 시간이 훌쩍 지나가 있었다.

 

 

처음에는 책에 대한 순수한 받아들임 보다는, 이런 질문들이 더 강하게 남아있었다. 나는 왜 이 책에 집중하지 못하는가, 시인이 쓰는 언어를 받아들이는 데에는 나의 언어적 사고가 아직은 많이 부족한 것 아닌가. 물론 그것들은 기본적인 이유가 되었음은 분명하다. 도대체 언제까지 '시'에 대한핑계를 붙들고 있어야 할지, 조금은 한심스럽고 막연한 심정이지만 어쨌든 그랬다. 반면에 문득 이런 생각이 들기도 했다. 내가 왜 이 책을 오랫동안 붙잡고 있지 못하는지. 왜 너무도 쉽게 길을 잃어 버리는지...

 

 

두번을 다녀온 사막에 관한 이야기가 담긴 이 <이름이 없는 너를 부를 수 없는 나는>은 사막위에서, 그리고 수많은 별 아래에서 시인 김태형이 느낀, 사막에 대한 기록이면서 헌사이고, 자신에 대한 성찰이자, 세상과 사람에 대한 깊은 애정이었다. 하지만, 어쨌거나, 사막을 여행하면서 받아들인 것들에 대한 이야기는, 사막에 대한 정보, 혹은 사막에 대한 흔한 예찬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아마도 내겐 그것이 가장 적응하기 힘들었던 것 같다.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 이야기. 한 곳에 잠깐 머물며 그곳에 대하여 풀어놓고, 또 이동하여 다른 곳을 예찬하는, 그것이 많이 느렸다. 김태형의 기록은, 달려가는 차 안에서 창밖을 바라보며 읇조리는 것이 아닌, 자신의 마음이 동하는 곳에서, 긴 시간동안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 사막의 모래를 바라보거나, 혹은 서서히 저물어 가는 황혼을, 그리고 영원처럼 반짝이는 별들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부르는 노래였다.

 

 

뉘엿뉘엿 펼쳐지는 언어에서 나는 조금은 빠른 이야기의 전개를 원했던가. 아, 나름의 고민끝에 나를 돌아본 바로는 그랬다. 김태형의 이야기는 사막을 가로질러 달리고 있지 않았다. 때로는 모래 바닥에 바짝 웅크려 바라보고, 때로는 몸을 곧게 펴서 하늘을 한없이 바라보았다. 앞으로 나가야하는, 그래야 하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멈춰있는 이야기 같으면서, 아주 천천히 움직이는, 천천히 앞으로 나아가지만, 그 느릿한 발걸음은 앞으로 향하는 것보다 더 값진, 안으로 향하는 이야기였다. 얼핏보면, 삶을 움직일만한 대단한 깨우침도, 거창한 예찬도 없을지 모르지만, 끊임없이 돌아보고, 돌아보는 고백들은 너무나 솔직하고, 또 아름다웠다. 물은, 음료보다 자극이 없지만, 질리지 않고 늘 하루의 일부를 구성하듯, 김태형의 이야기들은 그랬다. 모래폭풍의 스펙터클함을 침튀기며 설명하는 것이 아닌, 고요한 태풍의 안쪽에서 하나하나 풀어내는 이야기와 같았다.

 

이 별 아래에서 나는 내 한마디 말을 삼키고 있었다.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잊지 않기 위해, 사막의 황량한 아름다움에 미쳐 온 세상을 떠도는 방랑자가 되지 않기 위해 나는 내 가슴속에 남은 한마디 말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황량한 아름다움을 보았다. (281)

 

그것을 느끼자, 시선은 아주 약간 달라졌을 뿐인데도, 그의 움직임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고, (그래 사실 그의 움직임은 그렇게 느리지 않았었다!) 사막이 보이기 시작했고, 그가 무슨말을 하는 지, 조금씩 더듬어 볼 수 있었다. 그는 포기하면서도 포기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가 자꾸로 안으로, 안으로 하는 말들이 주는 묵직함을 조금은, 그러니깐 아주 약간은 더듬어볼 수 있게 되자, 나는 그의 뒤를 따라, 그리고 그가 손끝으로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그리고 그가 언어로 빚어내는 과거와, 현재, 미래, 그리고 인류와 지구와 생명을 묶어내는 초월적인 노래를 들을 수 있었다.

 

 

다른 이유로 책장을 넘기기가 힘들어졌다. 그의 문장 하나, 단어 하나가 시처럼 강렬해서, 그만큼 소중해서 앞으로 나아가기 힘들었다. 차를 타고 먼저 달려가 바라보길 바랐던 내가, 그의 뒤 꽁무니를 최대한 천천히 따라잡기 위해서 책을 내려놓기를 반복했다. 사막의 형태와, 모래, 그리고 그곳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믿음과 순수. 그로인해 그 어느때보다 더 깊이 들여다보는 우리 자신의 모습들. 그가 그만큼 오래도록 바라보았던 별은 너무나 아름다웠다. 그리고.... 그 마음의 허기와 그리움을 눌러담았을 그의 글을 이뤄놓은 글자 하나하나가 별처럼 빛나기 시작했다.

 

신과 나, 그리고 무엇인가를 마주할 수 있는 곳, 그곳이 바로 사막이었다. (314)

 

가치있고, 좋았던, 그동안 접했던 몇권의 여행에세이들이 내게 주는 감정이 '저 곳에 가보고 싶다'는 것이었다면, 김태형의 글이 내게 준 감정은, '저 곳을 느껴보고 싶다.' 였다. 비록 그처럼 풀어내는 것은 어불성설 일지라도 말이다.

 

 

사막이란 도대체 어떤 곳일까. 사막에 있는 모든 해와 달과, 별과, 모래와, 동물과, 사람과, 그리고 보이지 않는 모든 것들을 눌러 담은 그의 이야기. 느릿하지만 분명히 앞으로 나아가며, 어느 하나도 소홀히 하지 않았던 그의 '느낌'들은 앞으로 앞으로 나아갈수록, 내 안으로 안으로 들어와서 깊고 맑은 눈으로 나를 돌아볼 수 있게 해주었다. 그가 사막을 두번째로 찾은 이유는, 첫번째 여행에서 보았던, 버려진 신발이 큰 이유였다 한다. 내게 강하게 남은 기억은, 그의 이야기와, 그가 보여준 별들 이었지만, 아마도 내가 언젠가, 그리고 반드시 다시한번 이 책을 펼칠때는, 남들은 시시하게 생각될 그 무언가 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이 책은, 사막으로 들어가기전 눈을 씻어낼 바위샘물과도 같은게 아닐까... 눈을 멀게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는 과정 같은.

 

나 역시 그러기 위해서 이곳까지 온 것이 아니었을까. 나를 찾아서, 다시 한 번 자기가 되기 위해서. (298)

 

이 책은 내게 우연찮게 찾아왔다. 전혀, 정말로 예기치 못하게. 의아했던 처음의 기분과는 달리, 이제는 그것이 참 고맙다. 사막의 모래 사이, 밤 하늘의 별들 사이, 그리고 사람과 세계, 자신과 자신 사이의 이야기들을 오래도록 기억할 것이다.

 

아름다움을 따라가는 것이 일생이라면, 그 일생이 비로소 아름다움이라면 내가 이곳에서 마주할 수 있는 것은 유일하게 자신뿐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내 그림자로 뒤덮인 밤하늘을 맞이할 것이다. 그 아래 나는 밤새 별을 보며 추위에 떨고 있을 것이다. (326)

 

 

언젠가 이 길을 지나갈 것이라는 오랜 예감마저 이제는 나에게 옛 이름으로 남을 것이지만, 나는 들판을 향해 자꾸만 뒤돌아보고 있었다. 누가 저 멀리 언덕 너머에서 나를 부르고 있었을까. 내 이름은 뒤돌아보는 순간 저 멀리에서 무한이 되고 있었으리라. (2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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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지 않는다는 말
김연수 지음 / 마음의숲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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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김연수란 작가는, 되는대로 읽어대는 줏대없는 독서습관을 가진 내게도 가장 좋아하는 몇몇의 작가중 한명이다. 당연히, 그 작가의 글에 대해 충분한 신뢰를 갖고 있다는 뜻. 그래서 김연수 작가의 신작 에세이가 나온다는 이야기에  무척이나 반가웠다. 괜히 내가 아는 사람이 책을 내는 것 마냥 즐겁다.(쌍방 알지 못할뿐 내가 아는건 맞기도 하지만^^) 그리고 이런 작가의 책들은, '읽을까 말까'의 문제가 아닌, (늘 읽고싶은 책을 바로 읽을 수 있는 여건은 아닌지라), '언제 읽을까'하는 문제가 되곤 하는데, 기회가 좋아 비교적 빠른 시간내에 이 책을 만날 수 있었다. 다만, 소설이 아닌지라, 그가 어느 한 시간 한 공간에서 느낀 것들을 뭉텅이로 한꺼번에 받아들일 깜냥이 없어 천천히, 읽어갔고, 여차저차한 핑계로 서평을 쓰는 것은 또 약간의 시간이 흘렀다.

 

이런 유명작가들의 에세이 같은 장르를 읽을때면, 창작자는 작품으로 말해야 한다는 사람들이 생각난다. 물론 창작자들부터 '작품으로 보여줘야 한다'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다. 그것은 창작자의 시각과 자세에서 비롯되지만, 결연한 의지가 느껴진다. 그래서 틀린말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그것은 분명 멋지고, 또 원대한 일이며, 사실 위대한 많은 예술가들이 걷는 길이기도 하다. 하지만 나는 그것과는 별개로 이런 창작자 자신의 이야기를 만나는게 즐겁다. 인간은 어찌되었든 사회적으로 한가지 일을 주업으로 삼긴 하지만, 그 한 인간이 가진 능력과 재주, 이야깃거리는 무궁무진하며, 한 인간이 한가지 창작을 잉태하기까지는 결국 수많은 이야기가 농축되기에, 창작자를 만나는 것은, (특히 미술작품의 경우) 창작품을 이해하는 범위를 넓혀주기도 한다. 작품 하나에 정말로 누구나 인정할만한, 인간 이상의 가치를 담아낼 수 있는 것들도 있겠지만, 결연한 예술혼을 논외로 한다면, 인간의 가치는 결코 창작의 가치에 뒤쳐지지 않는다. 그 어떤 드라마도 삶보다 아름답거나 슬플 수 없다. 무엇보다도 우린 결국, 우리가 사는 드라마에 출연할 뿐 아니겠는가. 그래서 나는 (생각의 차이에 따라 다르겠지만) 작가가 아닌, 평범한 김연수란 사람이, 걸어온 길에서 사색한 것들을 만날 수 있음이 즐거웠던 것이다. 

 

하나로 정의할 수 없는, 삶에 관한 많은 이야기들이 여기 <지지 않는다는 말>에 녹아있다. 어떤 것은 그가 한참전에 지나온 꿈결같은 시절을 돌아보며 이야기 하고, 어떤 것은 얼마되지 않은, 나와 같은 동시대의 자신과 사람들의 모습을 이야기 한다. 삶을 대하는 자세, 자신을 대하는 태도, 그리고 지나간 추억을 음미하는 방법, 그리고 그것들을 통해서 한 계절을 살아가고, 잠시 스쳐가는 모든 것에서 행복을 찾아내는 것이, 다양한 시간과 다양한 사람들을 통해 말해지지만, 특히 두드러지는 것은 아마도 마라톤에 관한 부분일 것이다. 실제로 마라톤에 관한 이야기와 거기에서 얻는 통찰은 꽤 많은 부분을 할애한다.

 

세상에는 비슷하게 보이는 수많은 이들이 있고, 한명 한명의 삶은, 비슷한 듯 보임에도 분명한 차이를 보인다. 그러므로 그 분명히 다른, 한명한명의 개인이 써내는 삶은 그리고 그 삶에서 만난 사람과 순간을 통한 통찰들은 얼핏 비슷하지만, 분명 다르다. 그중에서도 특히 김연수가 풀어내는 삶의 이야기가 다른이와 또 다른 점은, (정말 끈질기게도) 달린다는 행위를 통해서 삶을 만나고 있는 부분이다. 아무래도 웬만한 독자라면 하루키의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싶은 이야기>를 함께 떠올리겠지만, 나는 아직 집에 있음에도 못읽었으니, 김연수의 '달리기' 만을 갖고 말하자면, 이것은 완벽한 예찬이다. 달리기에 대한, 달리는 동안에 대한, 달리는 사람에 대한. 그리고 그것은 수많은 그의 글 속에 녹아있음에도, 개인적으로 몇가지 추려내보자면,

 

몸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머리로 이해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의미다. 몸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경험한다는 얘기다. 경험한다는 것은, 절대로 잊지 못하게 된다는 뜻이다. (...) 내게도 달리기는 내가 속한 세계를 이해하는 하나의 방법이다. 나는 그걸 육체의 지리학이라고 부른다. 달리기를 통해 나는 길의 생김새와 각도와 냄새를 경험한다. 달리기를 통해 나는 새들의 지저귐과 사람들의 안색과 바람의 느낌을 경험한다. 그렇게 해서 나는 이 세계가 어떤 곳인지 말로 설명하지는 못하지만, 온몸으로 경험할 수는 있게 되는 것이다. (272)

 

결국 우리가 그렇게도 매번 쏟아져 나오다시피하는 책을 고르고 골라서, 읽고있는 이유는, 바로 나, 너, 우리, 세계를 이해하기 위함이다. 그럼에도 어쩐지 그는 우리가 궁극적으로 머리로 이해하는 것을 넘어서, 몸으로 이해하기를 역설한다. 글자를 읽는다고 해서 모두 머리로 받아들이는 것은 아닐뿐더러, 가슴으로 받아들이면 되는 것 아니냐 따지고도 싶지만, 나또한 속으론 인정할 수 밖에. 가령, 아무리 가슴아픈 사랑이야기라도, 지구상에서 우주상에서 가장 가슴아픈 사랑이야기라도 내 사랑이야기보다 슬프지 않듯 말이다. 머리가 경험해야만 하는 순간들도 있을 것이고, 몸으로 경험해야 하는 순간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많은 '실제'들이 실제와 같은 '가상현실'로 하나하나 차곡차곡 대체되고 있는 시대에 분명 작가의 말은 더 의미를 지닌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시대는, 머리와 몸으로 배우던 것들의 조화가 무너져가며, 방 안에 앉아 머리로 받아들이는 것이 '스마트'한 세상이 되어가니깐.

 

그가 달리기에서 말하고자 함은 고통과 아픔의 가치다. 운동중에서 특히 달리기란, 다른 운동처럼 지난한 연습을 거쳐서 한 순간에 그것을 펼쳐내는게 아니라 연습과 같이, 실전에서 또한 고통의 연속을 거쳐서 결승점에 도달하는 것이기 때문에, 긴 시간을, 매 순간 순간 고통을 넘어서는 일이다.

 

에밀 자토펙은 "아픔과 고통의 경계선을 넘어서면서 어른들은 아이들과 헤어진다."고 말했다. 흔쾌히 고통과 아픔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하지만 완주할 때마다 나는 고통과 아픔을 흔쾌히 받아들인다. 그 고통과 아픔의 의미가 무엇인지 잘 알기 때문이다. 내가 이제까지의 삶에서 겪은 고통과 아픔 역시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건 바로 그때다. 누구라도 35킬로미터 지점까지만 가면 이 말을 이해할 것이다. (285)

 

지금은 친구들과 달리기를 할 일도 없을 뿐더러, 뛰는 것 자체에 별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 뛰는 것은 심장과 폐와, 다리, 게다가 요즘같은 날씨에는 온몸이 고통이다. 더욱이 지금 뛴다는 것은, 어딘가에 늦었단 경우가 많으니깐. 중학교 때에는 반 대항 계주도 나가고, 오래달리기에서 1등도 해봤다. 계주야 그저 앞만 보고 미친듯이 바닥을 찼던 순간이라 잘 기억도 나질 않고, 기껏해야 경기가 끝나고, '아이들이 나도 응원해 주더냐?'라고 물을 처지였지만, 오래달리기는 인내 그 자체였다. 막판까지 접전을 벌였던 친구를 두고, 나는 정말 '젖먹던 힘까지' 쥐어 짜내, 속도를 붙여 결승점을 들어왔다. 그 친구는 우스갯소리로 내게 치사하다고 말했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그때에 나는, 내가 끝이라고 생각했을 때 한번 더 힘을 쥐어 짜낼 수 있는 사람이란 걸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공원 잔디에 누워 얼마나 숨을 헐떡였겠는가.

 

그 후로 내가 달린 것을 기억하는 일은, 개인적으로 힘든 시기였을 때다. 어디에 있던 고통이었다. 살아있으면서 하는 모든 것, 만나는 모든 것, 보고 듣는 모든것이 고통이었다. 그러니깐 내가 살아있다는 자각이 고통이었음에도 아무것도 할 수 있는게 없을 때, 나는 (비록 졸업한 초등학교 운동장일 지라도) 달렸다. 때론 친구와 달리고 때론 혼자 달렸다. 누군가와 달릴땐 결국 누군가와 이야기기 했지만, 혼자 달릴땐, 또 나 자신과 이야기 했다. 얼마 후엔 곧 러닝머신 위를 달리긴 했지만, 그래서 사람의 안색과 바람의 느낌을 오롯이 만나진 못했을 지라도 분명 난, 내 막연한 심경을 달리면서 더 정확히 맞닥뜨리고 위로했음은 분명하다. 지나간 시간속에서 후회하며 가슴을 치는 나에게서 멀어져, 늘 제자리 같지만 또 한번 어딘가로, 누군가에게로 달려야 한다는 것을 일깨우고 있었다. 비록 그것이 이후의 삶의 방향을 완고히 했다고 말은 못할지라도 분명, 그 순간을 살 수 있게한 중요한 순간임은 분명하다.

 

인생이 마라톤으로 비유되는 이유는 결코 그것이 페이스를 조절하며 끝까지 완주해야만 하는 특징때문만은 아닌 듯 싶다. 마라톤과 인생은 누군가를 앞질러가는 것이 중요한게 아니라, 자신이 목표로한, 혹은 필연적으로 가야만 하는 그 지점 어딘가까지 가 닿아서, 우리가 사랑하는 혹은 누군가를 만나는 일로써 같다. 그리고 김연수는 그 과정에서 우리가 어떻게, 어디를 보고, 어떤 마음으로 한발 한발 나아가야 하는지 그의 삶을 증거로 들려주고 있다.

 

마지막으로, 내가 이 김연수의 삶에서 들은 이야기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기억에 남을 일은 달리는 것이 아니었다. 바로 '칭커' 였다. 언제인지도 기억나지 않는 아주 오래전, 어딘지도 정확히 기억나지 않고 무슨 책인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리더스다이제스트'나 '좋은생각' 같은 책에서 만난 '칭커'에 관한 이야기는 문득 기억속에서 남아있는 물음이었다. 언젠가 한번 그 뜻을 다시한번 찾으려 했었지만 원론적인 뜻풀이를 만났을 뿐 내가 그때 만난 깨달음은 없었다. 언젠가는 한 모임자리에서 중국어에 능통하고 종종 번역을 하고 있는 분에게 '칭커'의 뜻을 물어보기도 했었다. (공교롭게도 그분은 나보다 김연수 작가에 대해 몇십배의 애정을 갖고 계신 분이다) 그때에는 내가 그 '칭커'란 말을 만난 배경을 설명하지 못했기에, 그저 '한턱 쏜다'는 농담아닌 농담에 낚였지만, (혹시 이 글을 보고 얘기해주신다면 가볍게라도 한턱 쏘겠다. '칭커'로써) 드디어 많은 시간이 흘러 나는 잊다, 잠깐 기억하다 살아온 그 뜻을 마치 그때처럼 완벽하게 마주하게 되었다. 마치 어떤 것들의 의미는, 오랜시간이 지나서 우연찮게 만날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기라도 하듯.

 

말이 모든 것을 바꾼다. 어쩌면 우리는 이 삶에 '칭커'당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누구나 한 번쯤은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이 왜 여기 있는지 말해야만 할 때가 올 것이다. 요령은 간단하다. 지금은 호시절이고 모두 영웅호걸 절세가인이며 우리는 꽃보다 아름답게 만나게 됐다. 의심하지 말자. (93) 

 

그렇다. 칭커란 누군가에게 정말 푸짐하게 (배가 터지도록) 식사대접을 하는 것이고, 그 자리에선 '그 자리의 이유'를 설명해야만 한다. 마치 삶처럼, 자신이 왜 여기 있는지 말해야만 할 때가 올 것이다. 그것은 자신이 이 자리에 있는 이유를 말하기 위함이며, 상대가 여기에 있는 것을 말하기 위함이고, 우리가 이 귀한 시간에 같은 공간에서 같은 시간을 함께 보내는 것의 가치를 증명하는 일이 된다. 그것은 곧 각자 모두가 이 시간을 살아가는 존재로서의 가치를 증명하는 일과 닿는 것이다. 그래서 삶은 어느 한 순간도 허투로 살 수가 없는 것이다.

 

자기가 경험할 수 있는 그 끝까지 가면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는 막막한 벽이 나온다. 상상력이 필요한 시점은 바로 거기다.(...) 다들 먼저 온몸으로 경험하기를. 온몸으로 수없이 부딪히고 실패하고 좌절하기를. 더 이상 갈 수 없는 데까지 가 보기를.(...) 아마 거기까지 갈 수 있다면 왜 상상력으로 인류의 역사를 바꾼 사람들의 전기가 실패담으로 가득한 것인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281)

 

그렇게 자신이 왜 이 삶에 '칭커' 당해 여기에 있는지, 설명할 수 없다면, 존재 그 자체로 그것을 증명할 수 있게 더 이상 갈 수 없는 데까지 가 봄으로써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 어떤 상황에 처하든, 그 어떤 일들을 겪든, 자신에 대해 실망하든 절망하든, 피로하든 죽고 싶든, 한 번이라도 결승점에 들어가 본 러너라면 그 사실을 이해하기를. 결승점은 어떤 경우에도 충만한 상태로 들어갈 수 있는 지점이 아니면서 동시에 그 순간의 충만함은 어떤 경우에도 파기되지 않는다. 삶의 희망 역시 마찬가지다. (289)

 

그리고 아마도 더이상 갈 수 없는 막막한 벽에 서기까지 우리는 충만한 상태일 수 없을 것이지만, 그 '갈 수 없는 바로 앞' 이라는 결승점의 경계를 만나는 찰나의 순간의 그 충만함은 오직, 심장이 뛰고 있을때만 가능할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는 그 순간 속에 우리 삶의 모든 의미가 담긴다는 것을. 천국이란 다른 게 아니다. 심장이 너무나 빠르게 뛰었던 어느 한 순간이 영원히 이어지는 일을 뜻한다. (...) 천국은 대단히 빨리 뛰는 심장으로만 맛볼 수 있다. (291)

 

그러니까 우리는 우리의 심장을 뛰게 하는 일을, 몸으로 경험하고 느낄 수 있는 일을 당장 시작해야 한다. 최고의 순간은 현재고, 먼 훗날엔 또 그 당시의 현재가 곧 최고의 순간일 것이다. 그렇게 늘 우리가 사는 지금을 사랑하고, 가슴뛰게 산다면, 우리가 행복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김연수 작가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러니깐, 오늘 하루도 가슴 뛰게 하는 일을, 가슴 뛰게 하는 사람과 함께 행복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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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바다를 너와 함께 걷고 싶다 - 매물도, 섬놀이
최화성 지음 / 북노마드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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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하나는 좋다. (실제 표지색은 사진보다 당연히 좀 더 진하다) 사진도 좋고, 글자 폰트도 좋고, 책의 질감도 좋다. 헌데, 조금 난감한 부분이 있었다. 바로 책의 제목이다. 얼마전 짧은 여행길에 이 책을 들고갔더니, 친구가 내게 (사실 어지간하면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알만한) '버스커 버스커'가 먼저인지 이 책이 먼저인지 물었다. 이 책이 그 이후에 나온거야. 라고 얘기했다. 솔직히 말해, 그닥 잘 지어진 제목이라는 생각까진 안들었다. 왜일까. 별 생각없이 '베낀것' 이라고 얘기를 하지 않아도 (버스커 버스커가 불러서 그 문장이 유명해진 것이지 어차피 거기서 처음 나온것은 당연 아닐테니깐) 그냥 내 마음엔 똑같은 이 제목이 왠지 성의 없어 보였다랄까. (책을 출간하는 입장에선 얼마나 고민이 있었겠냐만은) 그런데 지하철 같은 곳에서 책을 읽다 덮다 계속계속 제목을 한번씩 바라보니, 왜 내 마음에 안들었는지 알겠다. 내 생각에, 아니 내 입장에선, "이 바다를 '그들과 함께' 걷고 싶다." 가 이 책에 더 어울렸으니깐! 정말 이런 사람들 곁에 잠시 있는 것만으로도 놓쳤던 주변, 자연속 행복들을 다시금 들여다 볼 수 있겠다 하는 생각이 들만큼,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너무나 마음이 푸근해졌으니깐. 최화정 작가가 만들어낸 두명의 시인과 한명의 소설가가 함께한 매물도 3박 4일은, 읽기에는 3시간 4분 처럼 읽히고, 음미하기엔 3년 40일 같았다. 책의 제목은 아무래도 독자에게 권하는, 희망하는 어투처럼 느껴지지만, 독자들은 분명 나와 같은 생각을 할 것이다. "이 바다를 그들과 함께 걷고싶다" 고.

 

"함께하는 사람의 반짝 빛나는 에너지에 물들 수 있다는 건 즐거움이다. 나는 그들의 에너지에 마음껏 물들기로 했다."

 

이야기는 어렵지 않다. 오토바이로 지구 열바퀴 되는 거리를 여행다닌 지리산 거주민 이원규 시인이나, 자연 하나 하나를 자식처럼 소중히 여기는 또 다른 지리산 거주민 박남준 시인, 그리고 소설가보다는 미스터가 어울릴 법한 소설계의 마도로스 한창훈 작가가, 최화성 작가를 중심으로 매물도에서 3박 4일 동안 봄나들이 하는 이야기가 이 책의 전부다.

 

"근데 뭔 짓을 하러 섬까지 가라는 거야?"

 

하지만, 그렇다고 별 그저그런 여행에세이 정도로 보았다간, 마음앓이를 할지도 모를 정도다. 무덤가에 앉았다 갈때도 이름모를 무덤 주인에게 인사를 잊지 않는, 달래를 켄 자리에 포자가 다시 생명을 틔울 수 있도록 다듬어주고 떠나는, 먹는 순간 까지도 그 (물고기의) 형태를 유지해서 죽은 것에 대한 예의를 지켜주려는 그런 그들의 여행을 따라가다보면, 그들의 삶을 따라가게 된다. 그리고 삶을 따라가다보면 정말로 우리가 엄한데에 관심두고 살아가는것 아닌지 문득 질문던지게 된다. 희극파트를 담당한 미스터 한(한창훈 작가)를 필두로 어설프게(박남준 시인) 혹은 기괴하게 (이원규 시인) 풀어놓는 다양한 이야기들은 가슴에 '지잉' 하고 맺혔다가도 이내 '파핫' 이라는 탄성을 내지르게 하는데, 따뜻한 태도가 위트와 만나면 정말 행복한 웃음이 터져나오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중간에 짧게 실린 그들 각자의 '자연레시피' 는 그들이 그 재료들-자연들을 음식으로 만들어 먹는 그 순간까지도 '각자의 스타일대로' 얼마나 많은 자연과 생명을 배려하는지 느껴지기에 무척이나 독특하고 인상깊은 레시피로 기억되리라.

 

"그들의 이야기는 순식간에 깊숙이 파고들지만 그 진지함에 오래 머물지 않고 경쾌한 웃음과 함께 튕겨져 나온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뭔가 여운이 남는, 한 편의 시를 읽듯, 한 편의 소설을 읽듯, 나는 그들을 읽고 있다. 매물도, 당금 마을, 구판장에서."

 

그들이 풀어놓는 이야기, 그들이 지나가는 이야기, 그들의 짧은 3박 4일의 이야기가 어느 긴 여행이야기 못지않게 가슴에 남는다. 엎드려 책을 읽다가 펼쳐놓고 문득 잠이 들랑 말랑 했더니, 책에서 달래냄새와 바다냄새가 나는 것을 느낀 것도 같다. 무엇보다 잊을 수 없음은, 그들이 풍겼던 사람 내음이 아니려나. 아, 최화정 작가 참 부럽다. 정말로. (제목 별로란 말도 취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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끌림 - Travel Notes, 개정판
이병률 지음 / 달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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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 책을 '너'라고 쉽게 칭할 수 없는 것은, 그 '너'라는 것이 정말로 그때의 나에게 '너'였던 그 사람을 지칭하는지, 아니면 이 비누거품에 담갔다 나온 듯 뿌연 표지의 이 책을 말하는 건지 나도 좀처럼 모르겠기 때문이다. 이 책, 이병률이라는 사람이 누군지도 모를 때 처음 들었다. 그저 좋았다. 열정에 관한, 청춘에 관한, 사랑에 관한, 이별에 관한, 여행에 관한, 삶에 관한, 결국... 사람에 관해서 셀수없는 별만큼 많은 이야기 보따리를 영원히 풀어낼 것만 같은 이 책이 좋았다. 이미 이성적 사고란 어딘가로 귀향보내고 바닥에 있던 감성들이 박박 긁어져 먼지처럼 날리던 그때, 그래서 쉴틈없이 재채기를 쏟아붓던 그때, 나는 그토록 나를 간지럽히던 감성입자들을 어딘가에 쏟아부을 것이 필요했을 것이고, 그것이 바로 이 책이었을 것이다.

 

지금보다도 더 시를 멀리했던 내게 이 책은 하나의 반짝이는 보석과 같았다. 언어가 이렇게 빛날수도 있구나 싶었다. 그때 처음 느낀 황홀은 내게 깊게 배어있는 상처를 잠시나마 낭만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해주었다. 그것은 단순히 세균이 침투하고, 딱지가 생기거나 혹은 덧나거나 최악이라면 흉터가 남을 수 있는 그런 상처가 아니라, 그 상처가 한 인간을 안으로 훌쩍 더 자랄 수 있게 해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상상도 해볼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물론 그것은 잠시였을 것이다. 초침에 한발씩 밀려 생이 앞으로 나아가고 결국, 해야할 일이 지난 몽상을 휩쓸어가면 나는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을 터. 그렇지만, 모르긴 몰라도 밤의 무게가 느껴지던 그 수많은 밤들 중에 분명 몇날 몇일을 나는 이 책으로 버텼으리라.

 

나는 아프면서도, 이 책이 나를 즐겁게 해줄 때 피식하며 웃었고, 행복한 이들을 봐도 질투내지 않았다. 글이 아파하면, 내 등뒤로 나를 받쳐줄, 나와 똑같은 각도로 서로의 등을 마주대줄 수 있는 무언가가 있는 것처럼 고마워했다. 한 단어로 곤궁하게 표현되던 것들이 이토록 간절하고 견고한 수식어로 포장되어 각양각색의 사유로 변신하는 것이 놀라웠고, 세계 어디에서든 인간의 감정사이의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음에 놀라웠다.

 

하지만 그럼에도 참 좋았던 것은, 그 우연성이 아닌가 싶다. 방심하던 내게 던져주던 질문들, 사유들, 혹은 단상들, 혹은 편린들. 전 우주적으로 존재해왔기 때문에 당연히 저 하늘꼭대기 위에 걸려있을 것만 같았던 범 우주적 주제들이 중력을 받아 지상으로 내려왔고, 영혼을 부여받아 그 어디라도 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엇다. 그뿐인가, 마치 제각각 흐려지는 기억처럼 페이지 하나 표시되어 있지 않은 이 불친절함은 어떤가, 페이지를 뒤져보며 어디까지 읽었나 세어보던 (얼마되지 않던)나의 습관이 무력화 되었을 것이다. 이야기로 나눠두긴 했지만, 사실 페이지가 없는 마당에 그것으로 굳이 이야기를 기억하고 싶지 않아서인지, 그래서 이책은, 아주 우연히, 우연한 순간에 우연한 이야기와 만나게 해준다. 그저 무언가, 그의 이야기가 다시금 궁금해질때, 우리는 어느곳을 펴기만 해도 좋았다. 그가 정해준 곳도 없고, 우리가 정한 곳도 없다. 그저 우리는 우연에 기댈뿐이었다. 우연에 기대어 때로는 죽인다는 표현을 쓰고싶은 이야기를 만났고, 어떤때는 별 특별한거 없는 날이네 하고 이야기 하고픈 때도 있었다.

 

그런데 이즈음 이 책을 이렇게 다시 만났을때는 왜인지 예전과 조금 다르게 다가왔다. 대부분 꽤 멋지고, 아주 가끔 평범했던 이 책이 바로 친구처럼 느껴지는 것이었다. 마치 누구나 화장실을 가고 방귀를 끼듯, 이 책도 내겐 그런 존재가 되어버린 것 같다. 특별함과 평범함을 모두 간직한 오래된 벗 처럼. 어쩌다, 책을 펼쳤을 때 시시한 이야기라 해서 조금이라도 시큰둥 해지기만 한다면야 페이지 표시하지 않은 이를 향해 구시렁 거리고 싶건만, 그 평범함에서 그의 사람 내음이 더 진하게 풍기기도 하더라. 거기에서조차 아직도 그가 남기고 간 발자욱이 남아있는 것 같아서 마음 한켠이 쓸쓸하기도 하며 말이다. 때론 일상이 더 큰 존재감으로 밀려오듯 그랬다.

 

다시 한번,너를 만났을 때를 떠올린다. 수 많은 삶 중, 나의 삶, 그중에서도 폭풍과 같은 시기, 그 중에서도 그 여러 서점에서, 그 수많은 책들 중에서 이 책이 내 손에 쥐어지게 됬었음을 알게된다. 어딘가에 갈무리 하지 않고, 어딘가를 펼쳐봐도 그의 일기같은 독백도 좋고, 가을밤 같은 사색도 좋다. 그저 우연의 어딘가에 그 문장들이 있어서 좋다. 나처럼 모호해서 다행이고, 나만큼 짠해서 반가우며, 나보다 순수해서 좋고, 나보다 앞서 그 아픔과 불안을 쓸어담았기에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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