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요일의 기록 (10만 부 기념 리커버 에디션) - 카피라이터의 시선으로 사로잡은 일상의 순간들
김민철 지음 / 북라이프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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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인생을 잘 살 수밖에 없는 기본기가 있었으면 좋겠다. 그 기본기를 키우기 위해 책을 읽고, 음악을 듣고, 사진을 찍고, 여행을 다니고, 뭔가 끊임없이 하고 있다. 그렇게 비옥하게 가꿔진 토양이 있어야 새로운 아이디어도 내고, 새로운 카피도 쓰고, 무엇보다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고 믿는다."

물리적인 환경뿐만이 아니라 인간관계적 환경에서도 나는 천혜의 환경을 누리고 있다. 남편은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몸도 일으키지 않고, 안경도 끼지 않은 채로 침대 옆에 있는 책부터 펴는 사람이다. 책을 읽다 좋은 부분이 나오면 꼭 내게 읽어준다. 책을 다 읽고난 후에도 그 책을 정리한 글을 써서 내가 읽을 수 있도록 해준다.

남편과 나의 책 취향은 꽤 다른 편인데, 내가 남편의 관심 분야에 무관심한 것과는 달리, 남편은 내 관심 분야에도 관심을 놓치지않고 괜찮은 책이 나왔다는 말을 들으면 꼭 선물로 사서 준다. 간혹내가 남편 분야에 관심을 보이면, 남편은 입문서부터 자신이 좋아하는 책까지 차근차근 선물해준다. 자부한다. 누구나 쉽게 가질 수 없부럽다는 책 친구를 나는 가지고 있다. - P16

많은 작가들도 모두 숨죽여 기다리고 있다. 이미 거쳐 간 책들도 모두 자신의 시간을 숨죽여 다시 기다리고 있다. 그 책의 시간은 언제일까. 알 수 없다. 다만 사람과 책의 관계에도 때와 환경과 감정의 궁합이 맞는 순간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상상하는 시간이 있다. 조금 더 나이가 든 내가 책장 앞에 서서어떤 책을 손 가는 대로 펼친다. 내 글씨를 발견한다. 내가 해둔 체크표도 발견한다. 왜 그곳에 그런 메모를 해놓은 건지, 그 구절의 어떤부분이 좋았길래 체크를 해놓은 건지 쉽사리 기억나지 않는다. 나도기억하지 못하는 나를 거기에서 발견한다. 그때의 내가 궁금해서 다시 그 책을 읽는다. 그리고 완전히 새로운 책을 발견한다. 그리고 새로운 부분에 새로운 감정으로 줄을 긋는다. 그렇게 영원히 새로운책을 발견해나가는 것이다. 어쩌면 이것은 내 유난한 기억력이 준축복일지도 모른다. - P33

"내가 신기한 책 하나 보여줄까?"
그리고 남편은 책 한 권을 꺼냈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책이었다.
아니 수없이 본 책이었다. 우리 집에도 있는 책이었다. 《자본론 이었다. 그런데 책이 이상했다. 책이 아팠다. 두드려 맞은 것 같았다. 오랜 시간에 걸쳐, 갖은 방법을 통해 고문을 받은 사람의 모습을 책으로 재현한다면 그 모습일 것 같았다. 아니, 고문이라는 말은 정확하지 않다. 소중히 읽었다는 걸 딱 봐도 알 수 있었다. 소중히 한 글자한 글자 쓰다듬으며 읽었다는 걸 누가 봐도 알 수 있었다. 얼마나 읽었으면, 얼마나 잘근잘근 씹으며 읽었으면, 얼마나 스스로를 다독이며, 좌절하며, 희망하며, 다시 좌절하며 읽었으면 책이 이럴까. 모든장이 손때가 덧입혀져서 부풀어 있었다. 종이 한 장보다 손때의 두께가 두꺼웠다. - P31

그래서 나는 계속해서 소설을 읽는다. 소설을 읽으며,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들 사이에 일어나는 사건을 통해 막연하게나마 인간을 배운다. 감정을 배운다. 왜 그 사람이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는 것인지, 왜 그런 판단을 내릴 수밖에 없는 것인지, 왜 분노하지않는 것인지, 왜 그렇게 격한 반응을 보이는 것인지, 왜 나와는 다른지, 왜 나와는 다른 선택으로 다른 삶을 살 수밖에 없는지 짚어간다.
현실 속에서 사람들을 만날 때는 희박한 이해의 가능성을 소설을 통해서 약간이나마 늘릴 수 있지 않을까 소망하면서 읽는다. 어쨌거나나는 카피라이터니까. - P48

스스로에게 말해주었다. 내가 이해할 수 없어도, 내가 껴안을 순 없어도, 각자에겐 각자의 삶이 있는 법이다.
소설책을 편다. 거기 다른 사람이 있다. 거기 다른 진실들이 있다. 각자에게 각자의 진실을 돌려주려면 책을 읽을 수밖에 없다. 좁고 좁은 내가 카피라이터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그럴 수밖에 없다. 적어도 나는 그렇다. - P51

봄이 어디 있는지 짚신이 닳도록 돌아다녔건만,
돌아와 보니 봄은 우리 집 매화나무 가지에 걸려 있었다.
- 중국의 시 - P77

자신에게 맡겨진 시간 안에서, 일상적인 세계의 일상적인업무에 불후의 생명력을 불어넣을 것 같지 않은 그런 인물에게는 진실이 어울리지 않는다.‘
마이클 커닝햄 (세월) 비채 - P71

하지만 김화영이 딱 잘라서 말을 했다. 냉정하게도, 잔인하게
"참으로 이곳에는 행복하지 않은 사람들, 아니 ‘지금 행복하지 않은 사람들은 올 것이 아니다. 이곳은 내일의 행복을 준비하는 사람들이 올 곳은 아니다. 지금 여기서 행복한 사람, 가득하게, 에누리 없이 시우며 행복한 사람의 땅"이라고 지중해에 대해 딱 잘라 말을 말했다. - P84

이것이 처음 《행복의 충격을 읽었을 때 내 마음속의 지진이었다.
지금 행복하지 않은 나를 위한 공간은 지중해 어디에도 없다고 선언해버린 것이었다. 《결혼, 여름도, 《안과 겉도, 《이방인》도, 시지프신화에서도 같은 선언이 이어졌다. 중요한 것은 떠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가능한 한 그곳에 살아남아 버티면서 멀고 구석진 고장에서식하는 괴이한 식물들을 가까이에서 관찰 "2 하라고 말하고 있었다.
계속 미래를 바라보고 있는 내게 일침을 놓고 있었다.

광채 없는 삶의 하루하루에 있어서는 시간이 우리를 떠메고 간다. 그러나 언젠가는 우리가 이 시간을 떠메고 가야 할때가 오게 마련이다. ‘내일‘, ‘나중에‘, ‘네가 출세를 하게 되면,
나이가 들면 너도 알게 돼‘ 하며 우리는 미래를 내다보고 살고있다.
이런 모순된 태도는 참 기가 찰 일이다. 미래란 결국 죽음에 이르는 것이니 말이다 (알베르 카뮈,시지프 신화)


2. 알베르 카뮈, 《결혼, 여름, 책세상, 1998 - P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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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72
마쓰이에 마사시 지음, 김춘미 옮김 / 비채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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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이 낸 세금으로 만드니까 이 시설은 보기에는 그럴싸하지만 전혀 쓸모가 없다는 소리를 들어서는 안 되지. 또 하나 건축가란 말이야, 역시 후대까지 기억되는 건축물을 만들지 않으면 주어진 역할을 다한 것이 못 돼. 그것은 관공서 시설관리과든 종합건설사든 똑같아. 전화국이든우체국이든, 저절로 감탄이 나오는 건축물이 있어. 건축가가 누군지 모르는 건축물이지만 안에 들어갔을 때 방문한 사람이 편안함을 느끼고, 언제 누가 어떤 생각으로 이것을 설계했는가 상상하게 된다면 정말 멋지지 않겠나? 국립현대도서관을 어디에서 수주하게 될지 모르지만, 실현되지 못하더라도 플랜은 남겠지. 낙찰받지 못하더라도 젊은 건축가들이 이쪽이 더 좋았을라고 생각할 만한 것으로 만들고 싶네. 건축가가 죽은 뒤에 완성되는 건물도 있으니까 말이지."

구겐하임 미술관은 선생님이 사사했던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가 죽고 반년 뒤인 1959년에 준공되었다. 의뢰받았을 때부터 십육 년이라는 세월이 흐른 뒤였다. - P140

는다. 개구부는 쓴다. 예컨대 여름 별장의 뛰어난 점을 몇 가지들라고 하면 나는 맨 먼저 설계실의 개구부라 할 것이다.
남쪽의 미닫이 유리창을 좌우로 활짝 열어젖히면 바깥에서일을 하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을 하게 된다. 여름 별장에 와서, 나에게 주어진 설계실 책상에 앉아서 맨 처음 생각한 것은 이 큰유리창은 계수나무가 잎사귀를 활짝 펼치고 있는 가운뎃마당경치를 보기 위한 것 같다는 것이었다. 계수나무의 황록색 잎사귀는 날이 맑든 흐리든 밝고 경쾌하다
둥근 모양의 잎사귀를 내려다보면 살짝 부유감이 느껴지기도 한다 - P143

우치다 씨는 이미 전체 도면을 다 그렸다. 균질한 연필선이 트레이싱페이퍼 위를 달리고 있다. 청사진이 되어도 우치다 씨가그린 연필선의 아름다움은 확고하게 뉘앙스를 남기고 있다. 이런 선을 그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여자도 능숙하게 대할 거라고생각했다. 섬세하면서도 속도와 결단력이 있다. 내가 만일 여자라면 이 연필 한 줄에서 우치다 씨의 손가락 움직임까지 떠올릴지도 모른다. - P144

선생님이 손을 보신 것은 우치다 씨 디자인을 좀더 세련되게 연마하는 것이아니고 반대로 좀더 투박하게 만들려고 하는 게 아닌가 느껴지는 부분도 있지만, 실제로 완성된 것을 보면 원안보다 좀더 합리적이고 쓰기 좋은 형태가 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신경이 구석구석 미친다는 것과 신경질적인 것이 어떻게 다른가, 선생님이 덧붙인 선에 그 대답이 보이는 것 같았다. - P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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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스퍼 네트워크
챈들러 베이커 지음, 이동교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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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랬겠죠." 캐서린의 피부가 촉촉하게 빛났고, 슬론은 그것이땀인지 술기운인지 아니면 뜨거운 햇살 탓인지 알 수 없었다. 캐서린은 굳이 돈 때문은 아니라는 말로 문제를 포장하려 들지 않았다.
(몇 년 전에 우리는 얼마나 더 적은 돈을 받고 있었는지, 따라서 성공으로부터 얼마나 뒤처져 있었는지 깨달았다. 그 이후로 성공이꼭 돈을 의미하진 않는다‘는 말을 믿지 않았다. 그와는 정반대로돈이 곧 성공의 척도라는 교훈을 어렵게 배웠다. 돈은 선택권이다.
돈이 있어야 다음 단계로 도약하기 위한 위험도 감수할 수 있다. 돈으로 모든 것을 살 수는 없다. 우리는 언제나 이 말을 듣고 살았다. 돈으로 시간을 살 수는 없다. 다 헛소리다. 케어닷컴과 인스타카트"가이를 증명한다. 돈이야말로 우리가 좇는 목표다.) - P229

그녀에게는 다른 비밀이 또 있었다. 사랑하는이들은 모르게 표면 아래 숨어서 잠자고 있는 비밀이. 그녀는 언제나 비밀을 지켜야만 아무도 상처받지 않는다고 믿어왔다. 그러나어쩌면, 그냥 어쩌면 그것 또한 언젠가 그녀의 면전에서 폭로될 또다른 거짓말일지도 모른다. - P234

월요일이 되자 우리의 심경은 복잡해졌다. 죄책감과 두려움, 스트레스와 피로, 그리고 안도감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주말이 끝나갈 무렵 우리는 인터넷 서핑을 갈망했다. 방해받지 않고 온라인 쇼핑몰을 꼼꼼히 들여다보면서 회사에서 후원한 커피를 한잔할 여유에 군침을 흘렸다. 하지만 일요일에 최대한 많은 볼일을 해결해둬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욕실 전구도 교체해야 하고, 지난달부터 부엌 식탁에 그대로 놓여 있는 의료비 청구서도 지불해야 했다. 월요일이 되면 이제 여름방학을 기다릴 나이는 오래전에지났고, 업무라는 단조로운 강이 사계절 내내 쉼없이 흐를 것이며,
주말만이 그야말로 유일한 휴일이지만 자유시간을 계획대로 활용하지 못한 우리는 다가오는 평일의 맹공에 맞서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해야 한다는 사실을 씁쓸하게 깨닫는다. 유일한 휴일을 뜻하지 않게 〈제인 더 버진〉을 정주행하며 허비한 탓이다.

월요일마다 우리는 신년 다짐과 똑같은 맹세를 반복했다. 앞으로는 더 건강하게 먹고, 더 자주 운동하고, 일을 더는 미루지 않고, 애들한테 텔레비전을 많이 보여주지 않겠다고. 그 맹세의 절반이 금요일 전에 깨질 것이라는 본능적이고도 겸허한 직감 역시 월요일과 함께 찾아왔다. - P236

이제는 너무 늦어버렸지만, 우리가 하려던 말은 건물에 불이 났는데 그저 "불이야!" 하고 속삭이고만 있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것이다. 머리 위로 연기가 솟구치는데 책상에 가만히 앉아 부지런히 업무를 보면서 오타나 확인할 사람은 없다. 동료에게 방해되지않게 숨죽인 목소리로 살짝 "살려주세요"라고 외칠 사람은 없다.
그런데 우린 왜 그랬을까?

쉿, 아무한테도 말하면 안 되는데…… 밖으로 새면 안 되는 말인데….… 아직 아무한테도 얘기 안 한 건데…… 너랑 나랑 둘만 알고 있어야 하는 건데…

어쩌면 우리와 가장 가까운 지인은 가까스로 대피했을지도 모른다. 지인의 가장 가까운 지인도, 또 그 지인의 지인도, 또 그 지인의 지인의 지인도, 하지만 귓속말은 퍼지는 데 한계가 있다. 그게귓속말의 목적이니까. 모두가 듣지는 못하게 하는 것.

쉿, 건물이 불타고 있어. - P2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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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72
마쓰이에 마사시 지음, 김춘미 옮김 / 비채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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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별장에서는 선생님이 가장 일찍 일어난다. 날이 새고 얼마 있다 잠이 깬 나는, 좁은 침대에 누운 채 아래층에서 들려오는 선생님 기척에 가만히 귀를 기울인다. 머리맡에 둔 손목시계를 들고 어둠 속에서 시간을 본다. 5시 5분이다.
나는 현관 바로 위의 침대가 있는 서고에서 지내고 있다. 새벽녘, 침대 밑 마루에서 오래된 나무 기둥과 벽을 타고 덜컹덜컹 조심스러운 소리가 기어오르듯 희미하게 들려온다. 현관 안쪽에 걸어둔 버팀목을 떼서 벽에 세우는 소리다. 커다란 미닫이를 왼쪽에 있는 두껍닫이에 집어넣은 뒤, 그 앞에 있는 문이 벽에 닿을 때까지 백팔십도 열어젖히고 놋쇠 문고리에 마로 된 고리를 걸어둔다. 그렇게 하면 바람이 불어도 문이 닫히지 않는다.
그러고 나서 안쪽 망사문을 연다. 선생님은 산책을 가신 것 같다. 밤의 숲에서 차가워진 공기가 망사문을 통해 천천히 들어온다. 여름 별장은 다시 조용해진다. - P9

해가 뜨기 얼마 전부터 하늘은 신비한 푸른빛을 띠며, 모든 것을 삼킨 깊은 어둠 가운데에서 순식간에 숲의 윤곽이 떠오른다..
일출 시간을 기다리지 않고, 아침은 싱겁게 밝아온다. 침대에서일어나 가운뎃마당에 면한 작은 유리창 블라인드를 올린다. 안개다. 어느 틈에 어디에서 솟구쳤는지 하얀 덩어리가 계수나무가지와 잎사귀를 천천히 쓰다듬으며 움직인다. 조용했다. 새도포기하고 지저귐을 그만두었나보다. 유리창을 열고 코를 멀리밀듯이 얼굴을 내밀고 안개 냄새를 맡는다. 안개 냄새에 색깔이있다면 그것은 하얀색이 아니라 초록색일 것이다. 옆의 설계실블라인드를 소리나지 않게 올린다. 좌우로 넓게 퍼진 남향창 가득히 안개가 흐르고 있다. 가운뎃마당에 있는 큰 계수나무가 안개 속에 가라앉고, 안개 속에 떠 있다. 선생님은 이런 숲 속을 산책하는 걸까. 길을 잃지는 않으실까.
안개는 아무리 깊어도 ,해가 뜨면 이윽고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다 - P10

7월 말부터 9월 중순까지 기타아오야마 사무소는 반쯤 개점휴업 상태가 되는데 기타아사마에 있는 오래된 별장지, 통칭 아오쿠리 마을에 있는 ‘여름 별장‘으로 사무소 기능이 옮겨가기 때문이다. - P11

그러나 나는 그 시절의선생님 건축을 십 년, 이십 년 뒤에 직접 보고 돌아다니면서 무라이 슌스케라는 건축가가 묵묵히 계속해온 일의 비범함을 피부로 느끼게 되었다. 고도경제성장의 파도에 휩쓸리지 않고, 안
이한 자기과시욕에 구애되지 않고, 실질적이면서도 시대에 좌우되지 않는 아름다움을 지닌, 그러면서도 사용하기 편리한 건물을 무라이 슌스케는 하나하나 만들어내고 있었다. - P16

"주택설계에서는 뭐가 제일 힘들까?"
선생님이 손을 올려놓은 도면을 보면서, 생각하고 생각한 뒤에 대답했다.
"한정된 공간 속에서 덧셈도 뺄셈도 하지 않고 새로운 공간을만들어내야 하는 부분일까요? 주택설계에는 덧셈뺄셈이 많다고생각합니다."
선생님은 잠자코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나를 똑바로 보았다.
"자네는 덧셈뺄셈은 잘하나?"
"잘한다고는 할 수 없지만, 저에게 어울리기는 한 것 같습니다." - P18

정서적이 아니라 이론적으로 납득할 수 있는 구체적인 형태로 전달하려고 했다.
"침실은 너무 넓지 않은 쪽이 마음을 가라앉히고 숙면을 도와.
천장도 높지 않은 편이 좋아. 천장까지의 공간이 너무 넓으면 유령이 떠돌 여지가 생기거든." 우스갯소리를 하듯 말했다. "침대와 벽 사이는 말이야. 한밤에 잠이 깨서 화장실에 갈 때, 한 손을가볍게 내밀면 바로 닿을 만한 거리가 좋아. 캄캄해도 벽을 따라서 문까지 갈 수 있고 말이지. 다이닝 키친의 경우, 요리하는 냄새가 좋은 것은 식사하기 전까지만이고 식사가 끝나면 바로 싫어지지. 주방의 천장높이와 가스풍로, 환기통 위치가 냄새를 컨트롤하는 결정적인 수단이야." 장인이 전달하는 비법 비슷했다. - P20

"겨울 풍경 속을 덜커덩 덜커덩 달려서 저 아래 세계가 점점멀어지는 것은 뭔가 저세상으로 향하는 것 같아 쓸쓸하지. 그런데 선생님은 그렇게 빙글빙글 한가하게 돌아가는 것이 참 좋다.
고 아주 진지하게 말씀하시거든." - P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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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린 인』을 읽었다. 그 책은 정말이지 이 도시에 사는 전문직 여성의 필독서였다. 친구가 조언을 구한다면 우리는 우정을걸고 진솔하고 현명하고 간곡하게 말할 의무가 있었다. 친구야, 지금 네게 필요한 건 린 인이야.
그래서 우리는 읽었다. 240쪽에 달하는 책을 끝까지. 형광펜으로 밑줄을 죽죽 그어가며 읽거나, 랜드로버를 몰고 유료 고속도로를 달리며 오디오북으로 들었다. 우리에겐 무엇을 잘못했고 어떻게 바로잡을 수 있는지 말해줄 사람이 필요했다. 연봉이 충분히 높지 않다거나, 승진이 충분히 빠르지 않다거나, 주변을 충분히 닦달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상기해줄 사람이 필요했다. - P32

우리는 커리어에 대한 환상을 품었고, 여성 네트워크 행사에 참석했으며, 감수할만한 커리어 리스크를 찾아다녔다. 지시 사항을 충실히 따랐고, 타이머를 십팔 개월에 맞춘 뒤 그때쯤이면 적극적으로 ‘린 인하는전 세계 여성들의 무게에 못 이겨 유리 천장이 산산조각나리라 기대했다. IT 5 151그것이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정확히 언제쯤 깨달았을까? 대통령 선거? 아니면 그 이전에? 현상황에서는 그 차이를 분간하기힘들다. 온도계 없이는 미세한 기온 저하를 측정하기 어려운 것처럼. 그러나 샌드버그 말이 맞은 게 하나 있었다. 우리는 린 인을 해야 했다.
그래야만 귓속말을 들을 수 있으니까.

한정적인 자원인 시간을 누가 가장 효율적으로 활용해야겠는가? 우리 중 엄마인 사들이 기력 있는 주장을 내세운다. 애들을 생각해봐! 그럼 내가지 우리는 어쩌란 말인가? 사무실에 앉아 있는 우리 시계는 사.
적 시계가 째깍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시계는 그동안 우리가의 데이트를, 몇 번의 우연한 만남을, 아이의 엄마가 되어주고 1은 누군가를 만날 몇 번의 기회를 놓쳤는지 전부 세고 있다. 여기서 다들 넘어가는 상술이 치고 나온다. 누군가의 아내와 엄마가 되면 시간의 양은 급락할지언정 그 가치는 상승한다.
하지만 이건 고정비 공제를 따질 문제가 아니었다. 어쩌면 우린체크무늬 옷을 입은 귀여운 아기 사진으로 연하장을 만드는 꿈은애초에 포기하고 아예 아이 없는 삶을 선택한 건지도 모른다. 그러나 너무나 자주, 커리어를 위해 포기를 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혹은 커리어만을 위한 선택을 했거나, 자유시간은 모조리 포기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시간의 이러한 복잡성은 대학원에서 가르쳐야 한다. 교수로는 숀다 라임스가 시간이 될지 모르겠다. - P39

하지만 며칠 뒤에 그녀는 딸의 휴대폰 화면에 불쑥 떠오른 문자메시지를 발견했다. 걸레. 나쁜 년. 쌍년. 한 단어 한 단어가 총알처럼 그녀의 가슴에 박혔다. 욕설이나 인기 경쟁 같은 온갖 세속적인것에 대항해 지금껏 성실히 다져온 우리의 면역체계는 누군가가자식을 비난하는 순간 순식간에 무너진다는 사실을 엄마가 되기전까지는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다. - P42

우리는 그저 각자의 세계로 향하는 문을 두드렸을 뿐인데, 서로의 과거가 얽히고설켜 공동의 실타래를 짓더니 그것이 우리 목을옭아매는 올가미가 되는 것까지 보게 되었다. - P51

이 완벽한 표본은 다음과 같은 필수 자질을갖추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음식을 나눠주고 항상 디저트를 주문한다. 우리가추천한 책은 다른 친구한테 물어보지 않고 바로 산다. 가르쳐주지않아도 기저귀 가방을 쌀 줄 안다. 남부에서 자란 신사이지만 동부해안 출신 어머니로부터 차분한 진보적 감성을 물려받았다. 만난지 두 달 반 만에 "사랑해"라고 말해준다. 술을 마셔도 취하지 않는다. 세금 정산을 할 줄 안다. 우리가 벌레를 못 죽이거나 엔진오일을 교체하지 않아도 우리의 페미니즘적 이상에 트집을 잡지 않는다. 신발을 신을 때 굳이 앉지 않는다. 은퇴자금이 충분하다. 호르몬 조절 피임법을 쓰자고 강력히 주장한다. 여자에게 브라질리언 왁싱은 필수라는 관점에 다소 거부감을 느끼지만, 그렇다고어느 편에 서서 확고한 주장을 펼치지는 않는다. 민디 케일링의 유머가 통한다. 장식용 쿠션을 좋아한다. 우리가 돈을 더 많이 벌어도 개의치 않는다. 자기 또래 여자를 선호한다. - P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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