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인생을 잘 살 수밖에 없는 기본기가 있었으면 좋겠다. 그 기본기를 키우기 위해 책을 읽고, 음악을 듣고, 사진을 찍고, 여행을 다니고, 뭔가 끊임없이 하고 있다. 그렇게 비옥하게 가꿔진 토양이 있어야 새로운 아이디어도 내고, 새로운 카피도 쓰고, 무엇보다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고 믿는다."
물리적인 환경뿐만이 아니라 인간관계적 환경에서도 나는 천혜의 환경을 누리고 있다. 남편은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몸도 일으키지 않고, 안경도 끼지 않은 채로 침대 옆에 있는 책부터 펴는 사람이다. 책을 읽다 좋은 부분이 나오면 꼭 내게 읽어준다. 책을 다 읽고난 후에도 그 책을 정리한 글을 써서 내가 읽을 수 있도록 해준다.
남편과 나의 책 취향은 꽤 다른 편인데, 내가 남편의 관심 분야에 무관심한 것과는 달리, 남편은 내 관심 분야에도 관심을 놓치지않고 괜찮은 책이 나왔다는 말을 들으면 꼭 선물로 사서 준다. 간혹내가 남편 분야에 관심을 보이면, 남편은 입문서부터 자신이 좋아하는 책까지 차근차근 선물해준다. 자부한다. 누구나 쉽게 가질 수 없부럽다는 책 친구를 나는 가지고 있다. - P16
많은 작가들도 모두 숨죽여 기다리고 있다. 이미 거쳐 간 책들도 모두 자신의 시간을 숨죽여 다시 기다리고 있다. 그 책의 시간은 언제일까. 알 수 없다. 다만 사람과 책의 관계에도 때와 환경과 감정의 궁합이 맞는 순간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상상하는 시간이 있다. 조금 더 나이가 든 내가 책장 앞에 서서어떤 책을 손 가는 대로 펼친다. 내 글씨를 발견한다. 내가 해둔 체크표도 발견한다. 왜 그곳에 그런 메모를 해놓은 건지, 그 구절의 어떤부분이 좋았길래 체크를 해놓은 건지 쉽사리 기억나지 않는다. 나도기억하지 못하는 나를 거기에서 발견한다. 그때의 내가 궁금해서 다시 그 책을 읽는다. 그리고 완전히 새로운 책을 발견한다. 그리고 새로운 부분에 새로운 감정으로 줄을 긋는다. 그렇게 영원히 새로운책을 발견해나가는 것이다. 어쩌면 이것은 내 유난한 기억력이 준축복일지도 모른다. - P33
"내가 신기한 책 하나 보여줄까?" 그리고 남편은 책 한 권을 꺼냈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책이었다. 아니 수없이 본 책이었다. 우리 집에도 있는 책이었다. 《자본론 이었다. 그런데 책이 이상했다. 책이 아팠다. 두드려 맞은 것 같았다. 오랜 시간에 걸쳐, 갖은 방법을 통해 고문을 받은 사람의 모습을 책으로 재현한다면 그 모습일 것 같았다. 아니, 고문이라는 말은 정확하지 않다. 소중히 읽었다는 걸 딱 봐도 알 수 있었다. 소중히 한 글자한 글자 쓰다듬으며 읽었다는 걸 누가 봐도 알 수 있었다. 얼마나 읽었으면, 얼마나 잘근잘근 씹으며 읽었으면, 얼마나 스스로를 다독이며, 좌절하며, 희망하며, 다시 좌절하며 읽었으면 책이 이럴까. 모든장이 손때가 덧입혀져서 부풀어 있었다. 종이 한 장보다 손때의 두께가 두꺼웠다. - P31
그래서 나는 계속해서 소설을 읽는다. 소설을 읽으며,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들 사이에 일어나는 사건을 통해 막연하게나마 인간을 배운다. 감정을 배운다. 왜 그 사람이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는 것인지, 왜 그런 판단을 내릴 수밖에 없는 것인지, 왜 분노하지않는 것인지, 왜 그렇게 격한 반응을 보이는 것인지, 왜 나와는 다른지, 왜 나와는 다른 선택으로 다른 삶을 살 수밖에 없는지 짚어간다. 현실 속에서 사람들을 만날 때는 희박한 이해의 가능성을 소설을 통해서 약간이나마 늘릴 수 있지 않을까 소망하면서 읽는다. 어쨌거나나는 카피라이터니까. - P48
스스로에게 말해주었다. 내가 이해할 수 없어도, 내가 껴안을 순 없어도, 각자에겐 각자의 삶이 있는 법이다. 소설책을 편다. 거기 다른 사람이 있다. 거기 다른 진실들이 있다. 각자에게 각자의 진실을 돌려주려면 책을 읽을 수밖에 없다. 좁고 좁은 내가 카피라이터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그럴 수밖에 없다. 적어도 나는 그렇다. - P51
봄이 어디 있는지 짚신이 닳도록 돌아다녔건만, 돌아와 보니 봄은 우리 집 매화나무 가지에 걸려 있었다. - 중국의 시 - P77
자신에게 맡겨진 시간 안에서, 일상적인 세계의 일상적인업무에 불후의 생명력을 불어넣을 것 같지 않은 그런 인물에게는 진실이 어울리지 않는다.‘ 마이클 커닝햄 (세월) 비채 - P71
하지만 김화영이 딱 잘라서 말을 했다. 냉정하게도, 잔인하게 "참으로 이곳에는 행복하지 않은 사람들, 아니 ‘지금 행복하지 않은 사람들은 올 것이 아니다. 이곳은 내일의 행복을 준비하는 사람들이 올 곳은 아니다. 지금 여기서 행복한 사람, 가득하게, 에누리 없이 시우며 행복한 사람의 땅"이라고 지중해에 대해 딱 잘라 말을 말했다. - P84
이것이 처음 《행복의 충격을 읽었을 때 내 마음속의 지진이었다. 지금 행복하지 않은 나를 위한 공간은 지중해 어디에도 없다고 선언해버린 것이었다. 《결혼, 여름도, 《안과 겉도, 《이방인》도, 시지프신화에서도 같은 선언이 이어졌다. 중요한 것은 떠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가능한 한 그곳에 살아남아 버티면서 멀고 구석진 고장에서식하는 괴이한 식물들을 가까이에서 관찰 "2 하라고 말하고 있었다. 계속 미래를 바라보고 있는 내게 일침을 놓고 있었다.
광채 없는 삶의 하루하루에 있어서는 시간이 우리를 떠메고 간다. 그러나 언젠가는 우리가 이 시간을 떠메고 가야 할때가 오게 마련이다. ‘내일‘, ‘나중에‘, ‘네가 출세를 하게 되면, 나이가 들면 너도 알게 돼‘ 하며 우리는 미래를 내다보고 살고있다. 이런 모순된 태도는 참 기가 찰 일이다. 미래란 결국 죽음에 이르는 것이니 말이다 (알베르 카뮈,시지프 신화)
2. 알베르 카뮈, 《결혼, 여름, 책세상, 1998 - P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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