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 순간 흔들려도 매일 우아하게 - 모멸에 품위로 응수하는 책읽기
곽아람 지음, 우지현 그림 / 이봄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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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사랑스러워 미도리 하고 나는 고쳐 말했다." 나무라니
"산이 무너져 바다가 메워질 만큼 사랑스러워." 미도리는 얼굴을 들고 나를 보았다. " 자긴 정말 표현이 유니크해요."
"네게서 그런 말을 들으니 흐뭇한데" 하고 나는 웃으며 말했다. 더멋진 말 해줘요."
"네가 너무 좋아, 미도리." "얼마만큼 좋아?"
"봄철의 곰만큼." "봄철의 곰?" 하고 미도리는 또 얼굴을 들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봄철의 곰이라니?"
"봄철의 들판을 네가 혼자 거닐고 있으면 말이지, 저쪽에서 벨벳같이 털결이 곱고 눈이 똘망똘망한 새끼곰이 다가오는 거야. 그리고 네게이러는 거야. ‘안녕하세요, 아가씨. 나와 함께 뒹굴기 안 하겠어요?‘ 하고, 그래서 너와 새끼곰은 부둥켜안고 클로버가 무성한 언덕을 데굴데굴 구르면서 온종일 노는 거야, 그거 참 멋지지?" "정말 멋져."
"그만큼 네가 좋아." - P158

나는 나오코를 사랑해 왔고, 지금도 역시 변함없이 사랑하고있습니다. 하지만 미도리와 나 사이에 존재하는 것은 무엇인가 결정적인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그 힘에 저항하지 못하고 이대로 자꾸자꾸저 끝까지 떠밀려 가버릴 것만 같은 기분입니다. 내가 나오코에 대해느끼는 것은 무섭게 조용하고 부드럽고 맑은 애정이지만, 미도리에 대해서 전혀 다른 종류의 감정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것은 서서 걸어가고,
호흡을 하고, 고동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나를 뒤흔듭니다.
저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몹시 혼란되어 있습니다. - P159

오랫동안 하루키를 좋아하지 않았다. 하루키를 무척 좋아하는 사촌언니가 "하루키를 읽고 있으면 따스한 물이 차 있는 욕조 속에 목까지담그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고 했지만 이해할 수 없었다. 지나치게 도회적이라 거리감이 느껴졌다. 맥주를 마시고, 달리기를 하고, 재즈를 듣는 그런 서구적인 세련됨을 많은 사람들이 좋아했지만 지방 출신으로 그런 문화적 세례를 받아본 적이 없는 나는 오히려 그 점이 불편했다. 마을버스비 300원을 아끼려 걸어다니며, 교내에서 가장 값이싼 학생회관 밥만 먹던 대학 시절, 서울 강남 출신인 친구들이 "주말에부모님과 함께 TGI 프라이데이스에서 티본스테이크를 먹었어"라고말할 때 느꼈던 그런 거리감이랄까. - P160

대학에서 학생들에게 시를 가르쳤던 아버지는 언젠가 이렇게 말해주었다. 시인이란 대개 고향을 떠난 사람이라고, 그리운 마음이 노래가 되는 거라고, 나는 왜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떠난 해』를 비롯한 하루키 작품 속 인물들은 끊임없이 고향의 이상적인 세계를 갈망하는지 알게 되었다. 고향을 그리는 마음이 " 바람의 노.
래"가 되었던 것이다. - P161

"사랑을 더 하고 더 괴로워하겠는가, 아니면 사랑을 덜 하고 덜 괴로위하겠는가? 그게 단 하나의 진짜 질문이다라고 나는, 결국, 생각한다."

하루키를 무척 좋아해 그런 글을 쓰고 싶어서 작가가 되었다는 임경선은, "고통이 동반되지 않는 기쁨에 깨작대느니 고통이 동반되더라도끝내 원하는 걸 가지는 기쁨을 누리고 싶어"라고 말한다. 나는 어떤 쪽이냐 하면, 그와 마찬가지로 사랑을 더 하고 더 괴로워하는 걸 택하겠다. 그 결과로 상처받고 울부짖게 되더라도, 미적거리다가 그 순간을놓쳐버리는 건 너무 아까우니까. 용감하게 와타나베에게 다가가는 미도리처럼, 매 순간 감정에 충실하고 싶다. - P162

힘든 하루를 보내고 퇴근 후 울면서 요가 하고 넷플릭스로 동백꽃필 무렵〉을 연달아 세 편 보며 에너지 충전한 날, <말괄량이 캔디)에대한 동백(공효진)의 말을 듣고 통쾌함을 느꼈다.
"망할 년, 캔디 걔 진짜 웃기는 년 아니냐? 야, 외롭고 슬픈데 왜 안울어. 걔 사이코패스 아니야?" - P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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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 순간 흔들려도 매일 우아하게 - 모멸에 품위로 응수하는 책읽기
곽아람 지음, 우지현 그림 / 이봄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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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조직학자 오타 하지메가 인정욕구 강박의 문제점을 연구한 책 『인정받고 싶은 마음에 어릴 때 공부로 늘 칭찬받다 보니 커서는 지시만 기다리는 사람이 되어버린 사람,
그림을 잘 그려 선생님께 칭찬받다 보니 칭찬을 의식해 개성이 사라져버렸다는 사람 등의 사례가 나온다. 그게 바로 나였다. 그래서 야망이없었다. 기대하면 상처받으니까. 원하는 게 없으면 좌절할 일도 없으니까.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사람은 욕망이 없는 사람이니까. - P6

마음에 어는점을 만들지 말 것. 어떠한 고난이 닥쳐와도 밑바닥까지 추해지지 않을 것. 최대한 우아함과 품위를 유지할 것. 어릴 적 읽은책에 등장하는 여성들에게 나는 이런 걸 배웠다. 양어머니에게 괴롭힘 당하면서도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마음이 비뚤어지지는 않을 거야. 그만한 일로 사람을 원망하여 내 마음을 더럽히고 싶지는 않아‘라고 결심하는 『빙점』의 요코와, 아버지가 파산하고 세상을 떠나 쥐가 우 - P7

대는 다락방으로 쫓겨나 부엌데기로 전락하고서도 ‘하늘이 두쪽나누더기를 걸쳤다고 해도 속마음은 공주처럼 될 수 있어‘라고 마음먹는도 이것 하나만은 바뀌지 않을 거야. 내가 만일 공주라면 너덜너덜한소공녀의 세라가 나의 롤 모델이었다. 사회생활하다 보면 종종 닥치는 모멸의 순간 - 여성이기 때문에, 어리기 때문에, 직급이 낮기 때문.
에, 금력이 없어서… 그럴 때마다 그들처럼 품위 있게 사고하고 그들처럼 우아하게 행동하고 싶었다. 유교 사회에서 대개 남성에게만 부여되던 수신이라는 덕목을 매끄럽게 수행하는 것, 그것이 나의 야20-망‘이라면 야망이겠다. - P8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한 여자아이에게는 책 몇 권이 인상의 선택을 좌우하는 일이 있다. 하지만 그 아이는 그런 것도 알지 못하그저 빨려들 듯이 책을 읽고 있다. 자신을 둘러싼 현실에 자신이 없는 만름 책에 빠져든다. 그 아이 안에는 책의 세계가 여름 하늘의 구름처럼 몇 층으로 겹쳐 솟아나고, 아이 자신이 거의 책이 되어버린다.

(먼 아침의 책들) 스가 아쓰코 지음 송태욱 옮김 - P20

독서는 어떻게 힘이 되는가, 세라에게서 배웠다. 나의 두 번째 책모든 기다림의 순간, 나는 책을 읽는다』에 이런 문장을 쓴 적이 있다.
"외계가 도저히 감내할 수 없는 강도로 압력을 가해올 때, 그 버거운삶의 순간들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면서 나는 책을 읽는다."

오랫동안 내게 독서란 지식을 쌓기 위한 일도, 즐거움을 위한 것도아니었다. 도피였다. 책 속으로 도망치지 않고서는 현실을 감내할 수없기 때문에 은신처를 찾아가서 책을 읽었다. 힘겨운 일이 생기면 고통을 겪고 있는 책 속 누군가를 생각했다, 세라처럼, 친구 어먼가드가형편없는 세라의 다락방에 찾아와 "너 여기서 계속 지낼 수 있겠어?"
묻자 세라는 답한다.


"여기가 아주 다른 곳인 척하면 그럴 수 있을 거 같아. 아니면이야기에 나오는 장소인 척하거나. 이보다 더 끔찍한 곳에서 지낸 사람들도 있어. 디프 성 지하 감옥에 갇혀 지낸 몬테크리스토 백작을 생각해보면 알잖아. 바스티유 감옥에 갇혀 지낸 사람들은 또 어떻고!" - P25

언젠가 세라는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에게는 어쩌다 우연히 생기는 일이 많아. 내게는 좋은 우연이 많이 따랐어. 어쩌다 보니 늘 공부하고 책 읽는 게 좋았고, 배우고 읽은 걸 잘 기억하게 되었지. 또 어쩌다 보니 잘생기고 다정하고 머리 좋고, 내가 좋아하면 무엇이든 다 해줄 수 있는 아버지의 딸로 태어난 거고,
난 본래 착한 아이가 아닐지도 몰라. 갖고 싶은 걸 다 가질 수 있고 모두들 잘해준다면, 누구라도 착해지지 않으려야 않을 수 없는 거 아닐까?"
(소공녀) 중에서 45쪽 펭귄클래식 코리아 - P27

동양의 언어로 다시 풀이하자면, 『소공녀』는 결국 주군 세라가 몰락해 가신들을 이끌고 다락방이라는 험지로 유배 갔다가 자신을 찾아 헤매던 아버지 친구의 조력을 받아 영토와 왕위를 회복하는 이야기다. 소년들은 무협지를 읽으며 제 안의 영웅과 만날 수 있었지만, 소녀들에게 허용되는 영웅 서사란 드물었던 1980년대에 세라를 동경했던어린 나는 ‘아무도 몰라줄 때에도 한결같이 진짜 공주처럼 행동하겠다‘는 그 결기를 배우고 싶었다. 나락으로 떨어졌을 때의 민낯마저 아름다운 사람이 되겠다고, 『소공녀』를 읽으며 결심했다. . - P30

노라 에프론 감독의 영화 〈유브 갓 메일>에서 어린이책 서점을 운영하는 주인공 캐슬린(멕 라이언)은 말한다. "어릴 때 읽은 책은 자아의 일부분이되거든요. 살면서 나중에 읽는 책과는 전혀 다르죠." 그렇게 자아의 일부분이 된 『소공녀』를 한 해를 거의 마무리하는 시점, 고요하고 거룩한성탄 전야에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크리스마스 캐럴을 들으며 다시읽어보았다. 가장 좋아하는 장면을 원서와 대조해가며 읽는데 눈물이툭, 떨어졌다.
다이아몬드 광산 개발에 성공한 아버지 친구를 만나 부를 되찾은세라에게 민친 선생이 "이제 넌 다시 공주가 된 기분이겠구나"라고 빈정대자 세라는 낮은 목소리로 말한다.

"저는 다른 어떤 것이 되지 않으려고 애썼을 뿐이에요. 가장춥고 배고플 때조차도 다른게 되지 않으려 애썼다고요."" - P32

출판사에 전화를 걸어 "이 책 내용 중 사람들이 가장 공감하는 게뭔가요?" 하고 물어봤다. 빨강 머리 앤과 다이애너는 없다‘라는 챕터라는 답이 돌아왔다. ‘모태 친구에 대한 환상‘이라는 부가 설명이 붙은이 챕터에서 저자는 말한다.

오래 만나왔다고 해서, 많은 것을 공유해왔다고 해서 모두 친구인 건 아니다. 진짜 관계인 것도 아니다. (…) 빨강 머리 앤과 다이애너와 같은 운명의 친구, 영원히 함께하는 단짝이란 존재가 현실에 항상 존재하는 건 아니다. 친구 또한 내가 선택하고 결정하는 존재일 뿐이다.

• 『이제껏 너를 친구라고 생각했는데, 성유미 지음, 인플루엔셜, 2019, 133~134쪽. - P100

"Kindred Spirits are not so scarce as I used to think. It‘ssplendid to find out that there are so many of them in the world."
Kindred Spirits, 동류, 선생님과 나는 동류였던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서로를 알아본다. 앤은 말한다. "동류란 내가 생각해왔던 것만큼 드물지 않아요. 세상에 그런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를 찾아내는 건 멋진 일이에요." 그러니까 선생님을 뵙고 알게 된 건정말 멋진 일…. 슬프고 허망하던 마음이 그나마 조금 정리되었다.
"신은 하늘에 계시고, 모든 것이 평안하도다." - P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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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랑한 은둔자 (리커버)
캐럴라인 냅 지음, 김명남 옮김 / 바다출판사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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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결혼했고, 6월에 죽었다.) 나는 그 글들이 필요하다. 냅이 3, 40대에쓴 글에서 내가 내 3, 40대의 주제들을 발견하고 변화의 단초와 공감의 위안을 얻었던 것처럼, 냅이 5, 60대에 쓴 글이 있었다면 나는 그글에 내 5, 60대의 삶을 포개어 또 무언가를 얻었을 것이다. 하지만그는 없다. 나는 이미 여러 번 읽었던 이 글들을 하릴없이 다시 뒤적일 뿐이다. 그러면서 늘 새삼스럽게 다시 웃는다. - P9

내가 옮긴이의 후기치고 지나치게 사적이고 남부끄러운 이야기를 쓴 것도 그런 느낌 때문일 것이다. 또 냅을 읽은 경험이 나와 비슷한 독자들이 많다는 사실을 익히 들어 알기 때문이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이 긴 글은 다음의 한 문장으로 줄여도 괜찮을 듯싶다. 자,
여기 책으로 저를 (아주 조금이지만) 바꾼 작가를 소개합니다, 그립고기쁜 마음으로, - P9

언제였는지 기억도 잘 안 난다. 친구는 중얼거렸다. "늘 혼자 있다.
니. 얼마나 즐거울까."

글쎄,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내가 누리는 이런 수준의고독이 즐거운 것은 사실이다. 사치와 안도감이 있다는 것도, 엄청난 자유가 있다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나는 친구가 잠시 벗어난시간과 혼자 있는 시간을, 쉴 시간과 빈 시간을, 고독과 고립을 헷갈리고 있다는 것도 안다. 마치 내가 일하지 않는 동안은 만면에미소를 띠고 집 안을 어슬렁거리며, 빵을 굽고, 끝도 없이 거품 목욕을 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친구는 이 시간에서 끝없는 평온과 고요만을 보았다. 나로 말하면, 이 시간에서 그보다 좀 더 걱정스러운 것, 그보다 분명 더 어려운 것을 본다. 내가 이렇게 많은 시간을혼자 보내는 것은 그 시간을 늘 혹은 틀림없이 즐기기 때문이 아니다. 내게 그런 시간이 필요한 것 같기 때문이다.
고립은 고립되고 싶은 충동은 두려움과 자기 보호에 관련된 일이다. 고립은 고치를 만드는 것, 매혹적으로 편한 나머지 벗어나기가 어려워지는 장소를 만드는 것이다. - P17

고립은 또한 음흉하다. 우울증과 똑같은 방식으로, 그것은 잡초처럼 슬금슬금 자라나서 당신을 붙들고는 다시는 놓아주지 않는 어떤 마음 상태다. 당신은 한동안 혼자 지내며, 그저 고독할 뿐인데… 그러다 어느새 고립된다. 당신은 만족하고 있는데.......
그러다 어느새 외롭다. 당신은 스스로 잘 통제하고 있다고 믿는데…… 그러다 어느새 스스로 어쩔 수 없는 상태에 갇힌다. 고독과고립의 경계선은 무척 가늘고 모호하며, 우리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것이기에 제대로 알아보기 힘들다. - P18

혼자 있는다는 것, 그 모든 다양한 형태는 혼자 살거나, 싱글이거나, 배우자나 가족이나 친구들과 떨어져 지내는 시간을 갖거나 연습이 필요한 기술이다. 고독은 어려운 일이다. 자신을 돌볼의욕이 있어야 하고, 자신을 달래고 즐겁게 하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사교적인 생활을 가꾸는 것도 역시 어려운 일이다. 위험을 감수해야 하고, 기꺼이 취약해질 줄 알아야 한다. 캐럴린 하일브런이그 쌍둥이 기술을 터득하는 데는 60년이 걸렸다. 내 친구 그레이스는 40대 중반인 지금 그 목표에 다가가고 있다. 20년 동안 혼자 살아온 그는 이제 프라이버시와 교유의 균형을 예전보다 더 자주 달성할 줄 안다. 나로 말하면, 이제 겨우 시작했을 뿐이다. - P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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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 충격 - 지중해, 내 푸른 영혼
김화영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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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언제나 다시 시작하는 바다!" 언제나 다시 시작하는 젊음의목소리가 이 책 속에서 출렁이길 바란다. 열흘 뒤면 나는 다시 프로방스로 떠난다. 그곳에서는 아직도, 행복은 습관이 아니라 충격이다. 행복은이 땅 위에 태어난 우리의 하나뿐인 의무다. - P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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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72
마쓰이에 마사시 지음, 김춘미 옮김 / 비채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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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키니는 너무 커져서 금방 싱거워진다. 옥수수 수확은 아직 멀었지만, 익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우리만이 아니다. 곰이나 너구리가 숲 속 어딘가에서 달콤하게 익어가는 기척을 맡으려 하..
고 있다. 그들의 후각은 무척 멀리까지 뻗는다. - P155

밭일을 하는 동안은 거의 말을 하지 않는다. 눈앞에 있는 것을보고 그저 손만 움직인다. 등에 태양을 느끼면서 숨을 쉬고 숨을토하는 것을 내 귀가 듣고 있다. 일군 밭과 수확물에서 흙내가물씬 풍긴다. 다 파낸 것 같은데도 유키코가 흙에 손을 집어넣으면 남아 있던 것이 두 개, 세 개 굴러나온다. - P160

둑 주변이 깨끗해졌다. 왜 사람은 잡초만 깎아도 이렇게 상쾌해지는 걸까. 울퉁불퉁한 땅보다 펀펀하게 고른 편이 아름답게 느껴진다. 콘크리트 마감도 보기에 나쁘지 않다. 평평한 면을 인간이 좋아하게 된 것은 도대체 언제부터일까? 인간이 처음 본 평평한 것. 바람 없는 날의 호수, 파도가 쓸고 간 모래사장, 얼어붙은 물웅덩이. 내 청바지와 티셔츠에는 주름이 가고, 풀이랑 잎사귀의 초록색 파편이 달라붙어 있다. 예초기 엔진을 끄고 헬멧을벗는다. 숲의 소리가 귀에 돌아온다. - P161

침대 옆에 있는 작은 책상에서 스톡홀름 시립도서관이 표지인 큰 판형의 책을 열어본다. 매끌매끌한 종이에 활자의 울퉁불퉁함이 느껴지는 그리운 촉감과 햇볕에 그을린 종이 냄새, 스웨덴어로 된 텍스트, 모노크롬 사진, 평면도와 입면도, 도서관 주위의 지형도도 게재되어 있다. 평면도에는 원형의 대열람실 주위를 ㄷ자형 건물이 둘러싸고 있다.
도서관은 다소 높은 언덕에 서 있다. 정면으로 가는 진입로는완만한 오르막길이다. 엔트런스 홀에 들어서면 그곳은 천장이높고 까만 벽에 둘러싸인 어두컴컴한 공간이다. 얕은 계단을 올라가면 원형의 대열람실이 나타난다. 어두컴컴한 계단을 지나면 일전一轉해서 천장에서 자연광이 쏟아지는 하얀 벽의 공간이머리 위로 가득 펼쳐진다. 그 아래에 나타난 삼층 원형 개가식책꽂이에는 책이 가득 차 있고, 플로어에 서 있는 사람을 감싸듯이 내려다보고 있다. 다양한 색깔의 책 표지가 하나의 커다란태피스트리 여러 가지 색실로 그림을 짜넣은 양탄자처럼 보이기도 한다. 원형서가의 모습, 대열람실에 들어간 순간 나이트 경기가 열리는 야구장에 발을 들여놓은 것처럼 느껴질지도 모른다. 해방감과 동시에 그와 모순되는 밀실감이 일체가 된 감각 - P166

사람은 죽은 뒤에 숲으로 돌아간다는 태고로부터의 생사관이 스웨덴 사람들 의식에 깊이 침투되어 있었다. 그 이미지를 눈에 보이는 풍경으로 형상화할 수만 있다면 화장에 대한 심리적 저항도 희석되지 않을까? ‘숲의 묘지‘라는 프로젝트 명이 처음부터 준비된 데에는 그와 같은 배경도 있었다.
그러나 ‘숲의 묘지‘를 완성하는 데에는 시간이 걸렸다.
경합에서 일등이 된 후부터 그 일이 필생의 일이 될 예감이아스플룬드에게 있었다 하더라도, 거기에 불길한 것은 하나도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숲의 묘지‘ 프로젝트에 착수하고 오 년뒤 서른넷이 됐을 때, 아스플룬드는 장남을 병으로 잃게 된다.
죽음은 어느 틈엔지 가까이에 모습을 드러내고, 묵묵히 서 있었다. 아스플룬드는 장남의 죽음을 전후해서 설계에 들어간 ‘숲의..
예배당‘ 의 문 스케치에 ‘오늘은 당신, 내일은 나라는 명판板을.
그려넣었다. - P170

선생님은 내 의문에 미리 대답하듯이 말했다. "가구는 좀더뒤에 생각하자는 이구치 군 생각도 이해하지만, 건축이라는 것은 토털 계획이 중요하지. 세부적인 것은 나중에 해도 되는 것이 결코 아니야. 물론 이구치 군도 그런 거야 알고 말한 거겠지만 말이야. 세부와 전체는 동시에 성립되어가는 거야. 수정란이세포분열을 반복해서 사람 모습이 될 때까지의 과정을 본 일이있나?" - P173

선생님은 고개를 끄덕였다. "손가락 같은 것은 놀랄 만큼 빠른단계에 완성돼. 태아는 그 손가락으로 뺨을 긁기도 하고 열었다.
닫았다. 태어나기 몇 달 전부터 손가락을 움직여. 건축에서 세부라는 것은 태아의 손가락과 같아. 주종관계에서의 종이 아니야. 손가락은 태아가 세계에 접촉하는 첨단이지. 손가락으로 세계를 알고, 손가락이 세계를 만들어. 의자는 손가락과 같은 것이야. 의자를 디자인하다 보면 공간 전체가 보이기도 하지."
무의식의 영역을 빼놓고 사람에게 태아시절의 기억은 없다.
그렇지만 이 손가락이 예전에 그렇게 세계를 탐색했던 적이 있었던 것이다. 생각해서 손을 움직일 뿐만 아니라 손을 움직이는것이 생각으로 연결된다. 선생님의 건축 작법은 그 양쪽으로 성립되어 있다. 나는 내 손을 펼쳤다가 쥐었다. - P173

"나눗셈의 나머지 같은 것이 없으면 건축은 재미가 없지. 사람을 매료시키거나 기억에 남는 것은 본래적이지 않은 부분일 경우가 많거든. 그 나눗셈의 나머지는 계산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야. 완성되고 나서 한참 지나야 알 수 있지." - P180

선생님은 한참 생각에 잠겼다가 말했다. "혼자서 있을 수 있는 자유는 정말 중요하지. 아이들에게도 똑같아. 책을 읽고 있는동안은 평소에 속한 사회나 가족과 떨어져서 책의 세계에 들어가지. 그러니까 책을 읽는 것은 고독하면서 고독하지 않은 거야..

아이가 그것을 스스로 발견한다면 살아가는 데 하나의 의지처가 되겠지. 독서라는 것은, 아니 도서관이라는 것은 교회와 비슷한 곳이 아닐까? 혼자 가서 그대로 받아들여지는 장소라고 생각한다면 말이야."
어딘가에서 또 쇠딱따구리가 울었다. 끼이 하는 작은, 그러나분명히 귀에 들어오는 소리. 도서관이 조용한 것은 사람들이 약..
속을 지키기 때문이 아니고, 사람이 고독하게 있을 수 있는 장소이기 때문이라면, 선생님은 그 공간을 어떤 형태로 만들려는 것일까. - P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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