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인트 (반양장) - 제12회 창비청소년문학상 수상작 창비청소년문학 89
이희영 지음 / 창비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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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째서 박이 센터를 찾아오는 프리 포스터들에게 그토록 엄한 잣대를 들이댔는지, 비로소 알 것 같았다. 두 번 다시 자신과 같은아이를 만들고 싶지 않아서였을 거다. 부모에게 상처받고 학대받은 기억은 평생을 따라다닐 테니까. 그것은 어쩌면 NC 출신이라는 꼬리표보다 더욱 감당하기 힘든 것일지도 모른다.
박은 강한 사람이었다. 이토록 올곧은 어른이 된 것만 봐도 알수 있었다. 그런 것이 쉬운 일이 아니란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마음이 강철처럼 단단하지 않으면 어려울 것이다. 그러니, 우리의센터장은 분명 밝은 얼굴로 돌아올 것이다.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가 어디인지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이니까. 세상 누구보다 강한 사람이니까 말이다.
나는 볼펜으로 한 줄 한 줄 반성문을 써 내려 갔다. 아키, 노아의얼굴을 떠올리면서. 손으로 글씨를 쓰는 건 오랜만이었다.
말 못 한 이야기들이 모래처럼 쏟아졌다. - P143

"용서하라는 거 아니야."
용서? 용서를 할 수 있을까? 아니, 해야만 하는 걸까? 아버지라는 이유로, 늙고 병들었다는 핑계로, 임종을 앞두고 있다는 것을빌미로…… 그토록 학대했던 아버지를 용서할 수 있을까? 대체왜, 누구를 위해서?
"그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야. 알잖아, 선배."
최의 목소리에 물기가 묻어 있었다.
"선배를 위해서야." - P140

"나를 통해서 대리 만족을 하고 싶었을 뿐이지."
그러고서 하나의 얼굴에 숨길 수 없이 차오른 것은 놀랍게도 연민이었다. 나는 대꾸 없이 하나와 나란히 보폭을 맞췄다. 차가운겨울바람이 얼굴을 스쳤다. 나는 느낄 수 있었다. 하나가 엄마를 원망하는 것 이상으로 엄마의 삶을 아프게 여긴다는 사실을,

자신이 갖지 못한 것, 이루지 못한 꿈을 자식을 통해 이루려는사람들이 있다는 걸 알고 있다. 그러나 그런 것은 어디까지나 그들의 꿈이고 목표다. 아무리 하나의 어머니가 최고의 환경과 최고의교육을 동경했다고 해도 그건 어디까지나 그 어머니의 꿈에 지나않았다. 하나는 어머니와 전혀 다른 인격체였고, 전혀 다른 꿈- 가진 한 명의 사람이었다. 생각에 잠겨 있던 하나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 P158

어쩌면 지금도 많은 아이들이, 자신의 꿈이 아닌 부모 꿈의 대리인으로 살아가는지도 몰랐다. 아니, 자신이 대리인이라는 것조차 모르고 있을수도.....

문득 일전에 하나가 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결국 내가 나를 이룬다고 믿는 것들은 사실 내가 모르는 사이에 만들어진 것들이잖아. …… 그럼 기억이 형성되기 전의 나는 어떻게 키워졌을까?‘

온전한 자기 자신을 찾는다는 건, 그게 누구든, 오랜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내가 나를 이루는 요소라고 믿는 것들이 정작 외부에서 온 것일 수도 있으니까. 나 역시 다르지 않았다. 내가 나를 이룬다고 믿는 많은 것들은 어쩌면 센터라는 특별한 시스템 속에서 형성된 것인지도 몰랐다. 낯선 사람과 친구가 되기까지 적잖은 시간이 걸리듯,내가 나를 알고 친해지기까지, 그렇게 스스로를 이해하기까지는 제법 오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할것이다. - P159

"엄마 역시 나로부터 독립이 필요했다는 걸 말이야."
독립이란 성인이 된 자녀가 부모를 떠나 자기 힘으로 살아가는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하나의 말처럼, 어쩌면 부모 역시 자녀로부터 독립할 필요가 있는 건지도몰랐다. 자녀가 오롯이 자신의모습으로 살아가는 걸 부모에 대한 배신이 아닌 기쁨으로 여기는것, 자녀로부터의 진정한 부모 독립 말이다.
다시 걸음을 옮겼다. 하나는 나와 거리를 유지하면서 나란히 걸었다. 가족이란 그저 먼발치에서 바라보는 사람들인지도 몰랐다.
‘먼발치‘라는 말의 뜻은 시야에는 들어오지만 서로 대화하기는 어 - P160

려울 정도로 떨어진 거리,라고 한다. 그게 부모와 자식 간의 마음속 거리가 아닐까. 서로를 바라보지만 대화는 할 수 없는 거리 말 이다. 하나의 말을 듣고 보니 나는 그녀의 어머니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때문에 안타까웠다. 딸이 외교관이 되어 세계 곳 곳에서 활약하는 여성이 되기를 바랐을 것이다. 그러나 외교관이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딸의 행복 아니었을까. 다소 똑바르지 못한 자세로 지내도, 외국어를 좀 못하더라도, 하나 자신이 행복하다.
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믿었어야 하지 않을까.
"과학 시간에 마찰에 대해 배운 적이 있어요. 마찰은 서로 접촉하는 물질들 사이에 작용하는 힘인데, 언제나 운동 방향과 반대 방향으로만 생겨난대요."
"미안, 나 그쪽은 약해."
하나가 항복하듯 두 손을 들었다.
"사람의 마음과 마음 사이에도 분명 마찰이 있을 거예요." - P161

휴가는 온전히 그 자신을 위한 시간이었을 것이다. 아픈 과거를겪었지만 끝내 스스로를 놓아 버리지 않았고, 끔찍한 기억이 스스로를 갉아먹도록 내버려 두지도 않았다. 그 아픔을 딛고 자신과 같은 아이들을 사랑할 수 있는 힘을 키웠고, 그 모습을 마침내 당당히 보여 주었다. 당신은 어리고 약한 나에게 잔인했지만 나는 약하고 병든 당신을 짓밟지 않겠다. 당신의 임종을 지키는 것은 내가당신의 아들이어서가 아니다. 당신과 내가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에게 확실하게 보여 주려는 것이다. - P185

"NC 출신에 대한 차별을 없앨 수 있는 건, 오직 NC 출신들밖에 없어요."
시간이 지날수록 NC 출신들은 늘어 가는데 사회에서 목소리를내는 NC 출신은 드물었다. 신분이 바뀌었으니 나설 필요가 없을것이다. 이를 비난할 수도 없다. 잘 닦인 고속 도로를 놔두고 좁고험한 길을 택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하지만 찾는 사람이 늘면언젠가는 좁고 험한 길도 넓고 평평해질 것이다. 시작은 돌멩이 하나를 치우는 일일 것이다. 벌써 누군가는 돌멩이를 멀리 풀숲으로 던지고 있는지도 몰랐다.
뒤에 오는 사람이 걸려 넘어지지 않도록 - P195

내 유년은 회색이었다. 흰색과 검은색 중에서 검은색이 더 많이적인 잿빛 회색, 나의 아이에게는 이런 색을 물려주고 싶지 않아서노력한다. 하지만 마음처럼 쉽지 않다. 사랑한다, 그저 사랑한다,
꾸준히 말할 수밖에. 나는 나 자신에게도 종종 "괜찮아." 라고 말해준다. 실수하고 실패하고 틀리고 더디 가도, 고개를 끄덕인다. 누군가 내게 왜 청소년소설을 쓰느냐고 묻는다면 바로 이런 이유를들고 싶다. 유년 시절의 나에게 해 주고 싶은 말이 있어서라고. 늦지 않았어, 지금이라도 하면 돼. 괜찮아, 잘될 거야.
소설 속에 나오는 것처럼 내 안에도 어른이 되지 못한 아이가 있다. 그 아이와 놀아 주는 일이 나에겐 글쓰기다. 무엇을 얻고 싶은 욕심은 없고 단지 과정을 오롯이 즐길수 있는 것이 기뻐서 쓴다. - P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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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해석 - 당신이 모르는 사람을 만났을 때
말콤 글래드웰 지음, 유강은 옮김, 김경일 감수 / 김영사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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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우리는 낯선 이를 해독하는 우리의 능력에 한계가 있다는것은 현대사회를 만들어낸 속성이다. 타인을 신뢰하는 우리의 본성이 모독을 당하는 사태는 비극적이다. 하지만 그 대안, 즉 약탈과 기만에 맞서는 방어 수단으로 신뢰를 포기하는 것은 더 나쁘다.
이 범죄자가 되지는 않는다. 다른 사람에 관해 최선의 가정을 하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 P3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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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본 백석 시집
백석 지음, 고형진 엮음 / 문학동네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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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출출이:뱁새
마가리:오막살이의 평안 방언
고조곤히: 고요히의 평북방언 - P95

삼천포三千浦-
남행시초 4

졸레졸레 도야지새끼들이 간다
귀밑이 재릿재릿하니 볕이 담복 따사로운 거리다.

잿더미에 까치 오르고 아이 오르고 아지랑이 오르고.

해바라기하기 좋을 변곡간 마당에
볏짚같이 누우란 사람들이 둘러서서
어늬 눈 오신 날 눈을 츠고 생긴 듯한 말다툼 소리도 누우라니

소는 기르매 지고 조은다.

아 모도들 따사로이 가난하니 - P80

탕약

눈이 오는데
토방에서는 질화로 우에 곱돌탕관에 약이 끊는다.
삼에 숙변에 목단에 백복령에 산약에 택사의 몸을 보한다는 육미약탕이다.
약탕관에서는 김이 오르며 달큼한 구수한 향기로운 내음새가 나고
약이 끓는 소리는 삐삐 즐거웁기도 하다.

그리고 다 달인 약을 하이얀 약사발에 밭어놓은 것은
아득하니 깜하야 만년年 넷적이 들은 듯한데,
나는 두 손으로 고이 약그릇을 들고 이 약을 내인 넷사람들을 생각하노라면 내 마음은 끝없이 고요하고 또 맑어진다. - P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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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히 부르는 이름
임경선 지음 / 한겨레출판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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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도 한때는 이별이 구원할 길 없는 결말이라고생각했어. 하지만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내가 알게된 많은 것들은 항상 ‘이별‘이 알려주었다고 생각해, 자신의 의지로 버릴 때도 있지만 어쩔 수 없이 버리고 가야 할때도 있고, 버릴 생각이 전혀 없었는데 정신을 차려보니어버린 것들도 있지. 어쨌든 이제 그것들이 내 곁에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비로소 그 무게나 선명함, 그리고 소중함을 보다 강렬하게 느낄 수 있게 되었어. 살다 보면 알게 돼.
지금 내가 가진 모든 것은 바로 그 잃어버린 것들 덕분에 얻은 것이란 걸.


세남녀 수진,혁범 ,한솔의 사랑이야기이다.
내용은 어찌보면 진부해 보인다 .
엇갈린 세남녀 ,수진은 혁범을 사랑하고 ,한솔은 수진을 사랑하고 그럼 혁범은 누굴사랑할까?

아니 ,그는 한번의 결혼 실패로 인해 모든 것에 움츠려 있는 안타까운 존재이다.
이야기의 대부분은 수진이 혁범의 우유부단하고 애매한 연애표현과 결정으로 고통받는 것으로 보인다 . 그로 인해 혁범에게 받은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한솔에게 받는 일회성 사랑으로 치유하려다,한솔의 무한긍정적 사랑에 조금씩 녹아들어가는 것을 보여준다 .

순수하고 열정적인 사랑을 하는 한솔이 가장 행복하고 이별의 고통을 감당할 인물처럼 보였고 사실은 가장 아프고 슬픈 사람은 혁범이지 않을까 하면서 보게 되었다 .


하지만 너무너무 좋은데, 그 너무너무 좋다는 게 얼마나 좋은 건지도 이제는 잘 모르겠어요.
한솔이 수진에게 쓴 편지처럼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을 스스럼 없이 표현할 수 있었던 것은 대부분 첫사랑이었다 .
한솔이 그랬던 것처럼 ..

하지만 혁범이나 수진은 사랑도 일도 사람들에게도 그동안 받은 상처때문에 어느 한순간 진심을 표현하기가 힘들어지는 세대가 되어버렸다.
서로 사랑하면서 서로에게 가장 진실된 말을 하기 어려워지는 오랜연인들의 습관처럼 말이다 .

세대간의 다른 사랑의 방식 ,그리고 인간 각자의 감성과 상처에 따라 사랑의 방식이 다를 수 있다는 것 .
사랑은 틀린방식이란 없고 각자에게 맞는 방식이라는 것이 있을 수 있다는 것 .
그래서 아마 그 방식을 좀처럼 찾기 힘들기 때문에 “짝을 찾는다 ,평생의 반려자”라는 말이 아직도 통용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오랜만에 읽은 달달한 사랑소설, 설탕이 잔뜩 묻어 단맛만 가득하게 구나 하고 깨물었는데, 깨묻는 순간 사탕의 분자들 각각에서 슬픔,기쁨 ,치유 그리고 인간의 감정에 대한 여러가지 맛들이 알갱이가 되어 입안에 퍼지는 느낌이다 .

조금더 천천히 음미하면서 즐길걸 하는 안타까움이 번진다 . 하지만 읽다 보면 빨리 한번에 깨뜨려먹고 싶은 감정이 치솟는 사랑이야기였다.
맛있는 것은 늘 입에 넣는 순간 다짐을 까먹게 한다는 것을 , 임경선 작가의 작품은 늘 그러하다 .

📖📖📖📖📖.

사람이 섬세한 것은 원래 성격이 그래서가 아니라 그 사람을 사랑하기 때문에 섬세해지는 것뿐이라는 사실을 수진은 이제야 깨달았다.


그러고 보면 그동안 다른 기억나는 일들도 없었던 것 같아요. 오직 당신만이 있었어요. 요즘 제 인생의 전부예요. 함께 지낸 시간만이 제가 살아 있는 사람처럼 느껴지게 해요.
지금 창밖에 비가 내려요. 비가 오니 더 보고 싶어요.

#가만히부르는이름 #이별에서배우는것#사랑의방식이다를뿐 #행복도불행도습관이다 #책덕후의일상 #북스타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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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히 부르는 이름
임경선 지음 / 한겨레출판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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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들에게 갈등의 이유를 설명하기 쉬운 것은 차라리 편하다. 누가 바람을 피웠다거나 폭력을 휘둘렀다거나. 하지만 사사로운 위화감을 남들은 이해해주지 못한다. 그만큼혼자 더 괴롭고 외롭다. 그렇게 계속 안쪽 서랍에 깊숙이밀어 넣어두게 된다. 더 이상 자리가 남아 있지 않아 결국터져 나올 때까지.
한편으로는 행복을 느낄 줄 아는 것도 습관이고, 불행을 느끼는 것도 습관이겠지만, - P132

"엄마도 한때는 이별이 구원할 길 없는 결말이라고만생각했어. 하지만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내가 알게된 많은 것들은 항상 ‘이별‘이 알려주었다고 생각해, 자신 )의 의지로 버릴 때도 있지만 어쩔 수 없이 버리고 가야 할때도 있고, 버릴 생각이 전혀 없었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잃어버린 것들도 있지. 어쨌든 이제 그것들이 내 곁에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비로소 그 무게나 선명함, 그리고 소중함 을 보다 강렬하게 느낄 수 있게 되었어. 살다 보면 알게 돼,
지금 내가 가진 모든 것은 바로 그 잃어버린 것들 덕분에얻은 것이란 걸."
무심코 ‘엄마의 마음‘에 귀 기울이고 있던 수진은 속으로 울컥했다. 살아 있는 사람들의 초상화를 볼 수 있었던서른 살의 첫 오후였다. - P136

피부를 맞닿는 것, 상대의 온기를 몸으로 느끼는 것, 그것 외에는 사람은 진정으로 위로받을 수 없다고 한솔은 예전부터 생각해왔다. 그에 곁들인 대화, 시선, 배려, 냄새, 주고 싶은 마음과 빼앗고 싶은 마음. 상냥한 말 백 번을 건넨다 해도 사람은 말만으로는 진심으로 위로받지 못한다고.

박물관 이름처럼 작품의 주인공은 모두 사람‘이었다.
사람의 얼굴은 봐도 봐도 질리지가 않았다. 작품 속 사람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바라보면서 수진은 사람들 안에 이토록 다양하게 표현하고 싶은 감정들이 있다는 걸 확인하곤매번 놀랐다. 대체 저 사람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싶을 때도 많았다. 화난 사람, 슬픈 사람, 사랑에 빠진 사람,
군림하려는 사람, 실망한 사람, 인간의 대단함과 취약함, 그들이 놓여 있을 어떤 상황.
달고 쓴 인생사의 한 순간을 포착하고 기록한 그 작품들은 수진의 마음을 강하게 뒤흔들었다. 구체적인 포즈를취하지 않아도 표정과 시선만으로도 인물들의 속마음이 느껴졌다. 사람의 마음이란 얼마나 복잡하고도 단순한지.

두어 시간 후 조명을 다시 밝게 올리자 시트와 이불과수건은 검붉은 얼룩으로 엉망진창이 되어 있었다. 한솔의허벅지 안쪽에도 더러 핏자국들이 묻어 있었다. 그러나 그것들을 확인하면서도 한솔은 표정 하나 바꾸지 않았다. 아니, 그는 두 사람이 함께 무아지경의 만신창이가 될 수 있었음에 무척 행복해하듯 뒷정리를 도맡아 하는 내내 엷은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 표정을 보며 수진은 울컥했다. 사람이 섬세한 것은 원래 성격이 그래서가 아니라 그 사람을 사랑하기 때문에 섬세해지는 것뿐이라는 사실을 수진은 이제야 깨달았다.

수진 님께,
그렇게 많은 일들이 지난 한 달 사이에 다 벌어졌다니 믿기지가 않아요. 마치 제 삶에 다른 일들은 하나도 없었던 것처럼요.
그러고 보면 그동안 다른 기억나는 일들도 없었던 것 같아요. 오직 당신만이 있었어요. 요즘 제 인생의 전부예요. 함께 지낸 시간만이 제가 살아 있는 사람처럼 느껴지게 해요.
지금 창밖에 비가 내려요. 비가 오니 더 보고 싶어요.

"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게 좋아. 건축가는 이야기를 듣는 직업이거든. 이야기가 충분히 쌓이면 거기에 의미를 부여해 구체적인 형태로 보여주는 거지. 주택은 가장개인적인 건축이라 참 정직하기도 하고."
그는 그 작업을 진심으로 좋아하는 것처럼 보였다. - P72

하지만 너무너무 좋은데, 그 너무너무 좋다는 게 얼마나 좋은 건지도 이제는 잘 모르겠어요.

"엄마도 한때는 이별이 구원할 길 없는 결말이라고생각했어. 하지만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내가 알기된 많은 것들은 항상 ‘이별‘이 알려주었다고 생각해, 자신의 의지로 버릴 때도 있지만 어쩔 수 없이 버리고 가야 할때도 있고, 버릴 생각이 전혀 없었는데 정신을 차려보니어버린 것들도 있지. 어쨌든 이제 그것들이 내 곁에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비로소 그 무게나 선명함, 그리고 소중함을 보다 강렬하게 느낄 수 있게 되었어. 살다 보면 알게 돼.
지금 내가 가진 모든 것은 바로 그 잃어버린 것들 덕분에얻은 것이란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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