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지내요
시그리드 누네즈 지음, 정소영 옮김 / 엘리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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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을 평가할 때는 그들이 겪고 있는 고난을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는디트리히 본회퍼의 말을 잊지 않으려 애쓰고 있다. 이제 이 소설을 통해알게 된 시몬 베유의 말도 함께 기억할 것이다.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은"당신의 고통은 무엇인가요?(Quel est ton tourment?)"라고 묻는 일이라는 것. 이 작품은 저 물음의 소설적 실천이다. 말기 암 환자인 친구가 스스로 삶을 끝내는 일의 곁을 지키는 중인 서술자는 지금 세계의 존재자들이 자신의 고통과 ‘어떻게 지내는지‘를 묻기 시작한다. 지인들, 작품 속캐릭터, 동물, 심지어 지구 그 자체에게까지.

그렇게 채집한 이야기들 - 웰다잉‘에서 ‘기후위기에 이르는 을 분방한 구조와 리드미컬한 어조로 들려준다. 통찰과 공감이 어우러진 그의 이야기를 딴짓을 해가며 듣는 일은 불가능했기 때문에 나는 근래 드문 집중력을 발휘해 이 소설을 두 번 연달아 읽었고 그러고도 성에 차지않아 이 작가가 쓴 수전 손택 회상기까지 내처 읽었다. 뉴욕 지식인 사회한복판에서 성장한 작가다운 날카로운 지성이 내가 동경하는 미덕인 ‘다.
정한 예리함‘ 혹은 관대한 명석함‘에까지 도달해 있으니 이제 시그리드누네즈가 쓴 모든 글이 나에게 중요해졌다.
신형철(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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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터
유즈키 아사코 지음, 권남희 옮김 / 이봄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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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이 마나코가 악인이란 것은 틀림없고, 구제불능의 인격체일지도 모르지만, 이것만은 말할 수 있다. 돌아갈 곳이 없는 여자.
리카는 들이켜듯 소리 내어 면을 먹었다.
섹스가 끝난 뒤 훌쩍 밖으로 나와서 맛보는 라면, 그것은 상상했던 관능의 연장이 아니었다. 오로지 혼자서만 얻을 수 있는 자유의 맛이었다. 방에 남겨두고 온 마코토를 생각하고, 그가 자신에게 남긴 체취와 손가락 자국을 음미하면서 부지런히 면을 입으로 날랐다.
욕망을 끝없이 추구할 수 있는 이유는 누구에게도 얽매이지 않아서다. 고향이라는 장소를 버리고, 제대로 된 직업도 친구도 없는 그녀가 이 도시에 가진 인식을 비로소 깨달았다. 도쿄에서 태어나서 자란 자신은 이 지역의 관습이나 가족이나 역사에서 좋든싫든 벗어날 수 없다. 그러나 가지이에게 이곳은 언제까지나 나들이 장소이고, 화려한 무대이고, 멋대로 돌아다니다 창피함은 버리고 가는 이국이다. 여행중‘이라는 표현은 주제 파악도 못하고 오드리 헵번에 빙의해서 했던 소리만은 아닐지도 모른다. 그녀는 결혼 상대를 찾고 있었지만, 누구에게도 소속될 생각이 없었다. 그건 확실하다. 그렇지 않다면 이런 시간에 남자를 남겨놓고 나와서혼자 라면을 먹고 싶어질 리 없다.
1 ㅇ ㄱ하이 아 - P189

맛있는 것 먹으러 다니기 좋아하고, 요리 좋아하는 풍만한 체형. 그것만 들으면 대부분 남자는 ‘가정적‘이고 점잖은 여자라고,
멋대로 부풀려 상상한다. 자신들을 능가하는 감춰진 내면은 없겠지, 하고 방심한다. 그러나 정말로 그럴까.

리카는 어렴풋이 깨닫기 시작했다. 식은 원래 개인적이고 자기 본위의 욕망이다. 미식가란 기본적으로는 구도자라고 생각한다. 우아한 말로 아무리 포장해도, 도전과 발견을 되풀이하면서그들은 자신의 욕망과 날마다 정면으로 맞서고 있다. 직접 요리를만들게 되면 점점 바깥 세계를 차단하고, 정신에 성채를 쌓게 된다. 불꽃과 칼을 사용하여 몸소 식재료에 도전하고, 제압하고, 마음대로 만든다. 가지이의 블로그를 다시 읽을 때마다 새로운 사실이 떠오른다. 지나친 고지식함. 먹고 싶은 것만 먹는다. 맛있다고생각하는 것만 먹는다. 욕망에 항상 충실하려는 일종의 고지식함이다.


세상의 엄마들이 매일 메뉴를 고민하고, 요리하느라 고생하는것은 자신이 먹고 싶어서라기보다 가족을 위해서일 것이다. 가지이는 어느 순간부터 자신이 먹고 싶은 것을 먹고 싶은 타이밍에자신을 위해 만들었다. 남자들의 컨디션이나 취향 따윈 상관없었다. 그래서 그녀의 요리는 악마적으로 맛있다. 계속하더라도 힘들지 않을 만큼, 요리라는 행위 자체를 즐겼다. - P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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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터
유즈키 아사코 지음, 권남희 옮김 / 이봄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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팩에서 꺼낸 분홍색 명란젓이 요염하게 빛났다. 순간, 가지이마나코의 조그맣게 오므린 입이 생각났다. 껍질도 벗기지 않고 포크로 푹푹 찌르고 뭉개서 면에 거칠게 뿌렸다. 칼피스 버터를 칼로 큼직하게 잘라서 그 위에 올렸다. 리카는 연노란색 버터가 자글자글 퍼져서 진한 황금빛이 되어, 반짝거리는 명란젓과 섞이는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유지방의 고소한 향이 바다 내음과 함께 모락모락 올라와서 한껏 냄새를 맡았다. 손으로 찢은 차조기잎을 수북이 담아서 상자 식탁으로 날랐다. 명란젓의 어벙해 보이는 분홍빛이 버터의 걸쭉함과 섞이니 태평스러워 보이기까지 했다. 마치 윤기가 흐르는 피부색 같은 파스타를 포크로 둘둘 말아입으로 가져갔다. - P48

직전까지 차게 해둔 덕인지 버터크림에는 단단함이 남아 있었다. 혀의 열에 녹은 달콤한 버터가 촤악 퍼져서 맛을 느끼게 하는온몸의 세포를 들뜨게 하는 것 같다. 보들보들하고 새콤달콤한 쇼트 케이크로는 이제 만족하지 못할 것 같은, 진하고 묵직한 우유맛과 탄탄한 케이크 부분. 그렇다, 훌륭한 맛만큼 열량도 가격도높다. 구하려면 몇 개의 산을 넘어야 한다. 눈을 감고 혀에 기억을새겼다. 소설가 무코다 구니코의 에세이에 이런 묘사가 있었다.
"요리를 좋아하는 그녀는 외식에서 맛있는 것을 만날 때마다 집중해서 그 맛을 혼에 새겼다." 우와, 진지하시네, 료스케 씨가 놀리는소리가 아득히 먼 곳에서 들려오는 느낌이었다. - P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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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겠습니다. 모르겠어요."
"지금은 혼란스러워서 그럴 겁니다. 서두를 것 없으니까 천천히떠올려주시면 됩니다."
"저기, 교수님에게도 죄를 묻게 될까요? 너무 친절하신 분으로이번에도 나쁜 짓은 전혀."
마유코는 ‘교수‘를 전적으로 신뢰하는 듯했다. 자신이 추궁당할때보다도 명백하게 동요하고 있다.
"이건 좋다 나쁘다의 문제가 아니야."
부스지마는 아주 냉철한 말투로 받아쳤다. 돌변한 태도에 마유코와 이누카이는 압도된다.
"나는 그런 식으로 자기 손에는 피 한 방울 안 묻히고 나쁜 짓 하는 인간을 제일 싫어해서요. 왜냐하면 내가 그런 타입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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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의 서
페르난두 페소아 지음, 배수아 옮김 / 봄날의책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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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문학작품은 어쩔 수 없이 불완전하다는 것을, 그리고 우리의 미학적 관조중에서도 우리가 글로 표현하는 것이 가장 불확실한 관조임을 우리는 이미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지상의 만물은 모두 불완전하다. 지금, 더 이상 아름다울 수 없을정도로 아름다운 저 석양은 아직 단 한번도 없었다. 우리를 지금보다 더 부드러잠에 빠지게 만드는 산들바람은 아직 한번도 불어오지 않았다. 그리하여변함없는 시선으로 산과 석상들을 응시하며, 하루하루를 책과 함께 주물을 우리의 본질로 내면화하겠다는 그 생각으로 모든 것을 못해서 우리는 탄생하자마자 낯설어질 묘사와 분석을,
낯설게 변하듯이 그렇게 변해버릴 묘사와 - P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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