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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을 만들다 - 특별한 기회에 쓴 글들
움베르토 에코 지음, 김희정 옮김 / 열린책들 / 2014년 9월
평점 :
움베르토 에코의 이번 책에 등장하는
많은 인용이나 사례들은 자국의 것들이 많다,
그럼에도 읽기 불편하다거나
중간에서 책읽기를 포기하게 만들지 않도록 하는 건
진정한 글쓰기의 힘과 거기엔 번역의 힘도 더불어 보여진다.
다음 몇몇 문장들을 장황하게 늘어놓을텐데
이들 사이에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 상상해 보라.
개가 없는 자는 고양이를 데리고 사냥해야 한다,
잠자는 이는 물고기를 낚지 못한다,
배가 익으면 스스로 떨어진다,
못은 못을 없앤다,
옛길을 떠나 새길을 가는 자는 목적지를 잃게 된다,
꿈꾸는 자는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짖는 개는 물지 않기에,
뜨거운 물에 덴 사람은 찬물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등등.
다 쓰지 않고 이정도에서 질문을 하겠다.
이것들에서 어떤 연관성이 보이는가?
찾았다면 당신이 움베르토 에코다.
여기서 답을 발표하자면 위에 등장한 문장들은
속담을 이어가며 한편의 소설로 엮은
움베르토 에코의 책 속 한 칼럼속에 등장했던
많은 속담들 중 매우 일부들이다.
그의 기발한 상상력과 이를 글로 옮겨내는 재주는
작은 범위에서 한국 작가들과는 매우 다른거 같다.
이는 물론 한국작가들을 낮춰보는데서 말했음은 결코 아니다.
이질적일 수 있는 이탈리아 작가의 실험적인 글에
순수히 끌려갈 수 있었던 건 번역의 힘이 매우 컸겠지만,
글 내용의 가치가 있었기에 가능했으리란 생각이 동시에 들기에
한국작가가 똑같은 글을 썼더라도 이 움베르토 에코의
이런 글솜씨가 나에게는 높아 보일거 같다.
다른 문화권의 작가가 쓴 글에 대해 느끼는데 많은 어려움이 없다는 건
공통점을 느끼게 해주는 것들이 많이 있다는 거 아니겠는가.
이는 여타의 작가들이 쉽게 복제할 수 없는 지식과 글솜씨 같다.
책의 제목 '적을 만들다'는 이 책에 실린 열몇개의 칼럼 중
이 책을 가장 잘 팔리게 만들어 줄 하나의 컬럼제목에서 따온
책전체를 하나의 제목으로 대표하는 용도가 아닌
이 책 판매를 위한 얼굴마담용 제목이다.
이 또한 작가 본인이 책의 서두에 뻔뻔스럽지만
밉지 않게 밝혀두고 있다, 이는 어쩌면 또다른 자신감으로 보여졌다.
이런 솔직함을 비춰도 스스로 평가절하되지 않는다는 확신.
굉장히 광범위한 주제를 다루고 있다.
역자의 말대로라면 전작의 그의 작품들을 떠올리게 하는 것들도 있다고 하는데
난 그 전작들을 거의 읽어보지 못했기에 이 책 자체로만 느낌을 받고 기록한다.
읽어둘 만한 지적 향연이랄까, 공감 못하겠는 주장마저도
유려하게 자신의 색깔대로 풀어내는 움베르토 에코의 힘이 느껴진다.
적을 만들다란 제목하나로 이 책을 고른 사람들에겐 그 나름대로 건질게 있을 것이요,
그냥 작가의 또다른 책이라서 읽는 사람들에게도 건질게 있을 책이다.
나는 이도저도 아니었음에도 이 책이 가치있게 느껴졌던 한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