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희극에서 정치생활의 정경에 포함되어 있는 이 소설은 당시 역사에 등장했던 많은 정치적 인물들이 등장한다. 실재 사건·인물이 창조된 인물과 각색된 사건과 직조되어 있다. 그는 프랑스의 1789년 혁명으로부터 왕정복고 시대를 재창조함으로 대치시키고 고발한다. 고리오 영감과 마찬가지로 이 작품에서도 인물의 외형, 성격, 사회적 지위, 삶 등에 대한 상세한 묘사가 전반부의 많은 양을 차지한다.

 

만들어진 인물들 역시 실존 인물들의 캐릭터를 반영한다. 그 대표적인 예가 푸셰와 말랭이다. 말랭은 푸셰의 그림자다. 말랭은 1789년 이래 열두 번째로 섬기게 된 정부 하에서도 여전히 살아남아 드 공드르빌 백작으로 신임을 받고 있다. 그의 인생 역전은 푸셰를 닮았다. 조제프 푸셰 역시 혁명의 출발선에서는 미미한 존재였지만 혁명정부와 제정, 왕정복고 시대를 거치며 정치적 입장을 계속 바꿔가면서 살아남은 인물이다. 그 시대의 가장 권세 있는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이자 모든 시대를 통해 가장 특색 있는 인물 중 한 사람인 조제프 푸셰는 동시대나 후세의 사람들에게 평가를 제대로 받지 못했다고 츠바이크는 말한다. 그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은밀히 배후에서 조종하며 상황파악이 빠르고 언제든지 승자 편으로 갈아타는 인물이다.

 

수도원의 위선 속에서 자라난 창백한 얼굴의 이 사내는 자신이 속했던 산악당의 비밀과 마침내 그가 끼어드는데 성공한 왕당파의 비밀을 모두 그러쥔 채 인간과 사물과 정치판의 이해관계를 천천히 그리고 조용히 연구해 나갔다. 그는 보나파르트의 비밀을 꿰뚫어 보고, 그에게 유용한 충고와 소중한 정보를 제공했다. 자신의 기량과 유용성을 증명해 보인 데 만족한 푸셰는 자신의 전모를 드러내는 것은 삼가면서 만사를 굽어보는 위치에 머무르고자 했다.(98p)”

 

이 소설의 배후에 푸셰가 있고 사건에 얽혀있는 발자크에 의해 창조된 인물이 말랭이다. 말랭은 푸셰처럼 수많은 얼굴과 그 각각의 얼굴 밑에 헤아릴 수 없는 깊이를 갖고 있는 인물들 가운데 하나(48p)”였다.

 

발자크가 또 한사람의 푸셰로서 말랭을 창조한 것은 츠바이크가 말했듯, 모든 저술가들이 푸셰를 저평가할 때 그만은 이 특이한 인물을 높이 보고 연구했기 때문일 것이다.

 

여백작 로랑스 생시뉴와 그녀와 친척인 시뫼즈 후작의 쌍둥이 아들들은 자코뱅파에 의해 가족을 잃고 저택을 잃은 귀족들이다. 나폴레옹 살해 모의에 가담하고, 적극적으로 왕정복고에 참여하는 왕당파 로랑스는 심각한 상황에서 유딧의 면모가 드러나는 상속녀다. 국외로 도피 중이던 시뫼즈형제들은 그녀와 뜻을 함께 한다. 몰래 숨어들어와 나폴레옹을 죽이는데 참여하려고 몰래 국내로 숨어들어와 위기를 만난다. 시뫼즈의 소유지 공드르빌의 관리인이던 미쉬는 혁명의 피바람이 트루아에 불 때 자코뱅 당원 행세를 했다. 나폴레옹의 시대에도 여전히 그 땅의 관리인이 되면서 사람들의 의심과 비난을 산다. 하지만 로랑스와 시뫼즈 형제가 위기에 빠진 것을 보고 자신의 본심을 드러내며 옛 주인의 자녀들을 돕는다.

 

로랑스 생시뉴와 미쉬 중 누가 주인공일까? 이 소설에서 역시 주인공을 한사람으로 좁혀가는데 어려움을 겪는다. 소설을 이끌어가는 인물들이 사건의 대칭점 혹은 여러 지점에서 긴장과 위기와 전환의 국면을 이끌어 간다.

 

미쉬는 초반부부터 그에 대한 인물 설명에서 그의 죽음을 예고하는 복선을 짙게 깔고 등장한다.

앞날을 예견하게 해 주는 관상이 있다. 만약 단두대에서 죽는 사람들의 얼굴을 정확히 그리는 것이 가능하다면, 처형당하는 모든 사람들의 얼굴에, 심지어 무고하게 죽는 사람들의 얼굴에도 이상한 표지가 있다는 것을 라바터와 갈의 과학은 틀림없이 증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 운명은 격렬한 죽음을 맞을 사람들의 얼굴에 그 낙인을 찍어 놓는다!(13p)”

발자크는 왜 이렇게까지 선명하게 그의 최후를 예언하고 있는 것일까를 생각하게 된다. 복선이란 말이 맞지 않을 정도로 그의 운명은 정해져 있고 실제로 그렇게 그는 죽음을 당한다.

 

미쉬는 실제로 이들 귀족들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거는 것처럼 보인다. 자신을 관리인으로 거둬준 옛 주인에 대한 충성심일까? 그보다는 공드르빌 땅에 대한 원시적 욕망 때문이란 생각이 든다. 비록 관리인이었지만 공드르빌은 자신이 뿌리내린 곳이고 삶의 터전이었으므로 이 곳을 로랑스나 시뫼즈로부터 빼앗아 소유한 말랭, 그리고 그를 내려보낸 정부는 원수였다. 그는 혁명, 왕당파, 공화파와 같은 정치사상과는 관계없는 사람이다.

 

공드르빌의 소유주가 마리옹이라고 알려졌지만 실소유주는 국가참사회원 말랭이었다. 발자크는 그 매각 과정을 상세하게 기술한다. 그 흐름을 읽으면 누구나 눈치 챌 수 있는 상황임에도 그것을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가 눈에 띈다.

 

시대는 제국의 여명기였다. 오늘날 프랑스 혁명사를 읽는 사람들은 대중의 정치적 사고(思考)가 그 시대의 아주 근접한 사건들 사이에서 얼마나 엄청난 간극을 보였는지 모를 것이다. 격렬한 소요 후에 각자가 느끼는 평화와 안정에 대한 전반적인 필요성이 더없이 심각한 이전 사건들을 완전히 망각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역사는 강렬한 새로운 이해관계에 의해 부단히 성숙하여, 신속하게 늙어 갔다. 그리하여 미쉬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아주 단순해진 이 사건의 과거를 추적하지 않았다.(24~25p)”

 

역사는 부단히 성숙하여 신속하게 늙어 갔다는 말은 맹목적으로 끓어올랐다가 피곤함 속에 빠르게 식어버리는 군중들의 심리를 소름끼치게 전달한다.

 

로랑스와 시뫼즈 형제에 대한 원한을 갖고 있던 경찰 코랑탱은 덫을 놓고 상원의원 말랭 납치범의 누명을 씌운다. 한 개인의 원한 그 너머 배후에는 말랭과 푸셰, 나폴레옹과 왕정복고를 모의하던 인물들의 암투가 자리한다. 한 개인이 생과 사를 결정하는 사건을 당한 경우, 그것이 국가의 정치적 음모나 격랑에 휩쓸린 것일 때, 그 사람의 무력함과 답답함은 절망적이다.

 

납치 혐의로 기소된 재판에서 당시 프랑스의 사법제도를 자세히 보게 된다. 이런 지점이 발자크의 소설의 뛰어남이기도 하고 장벽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사법 제도는 급박한 변화만큼이나 계속 수정이 가해지고 있었고 그 아래서 재판을 받는 사람들은 아무래도 공정한 재판을 기대하기 어렵다. 특별히 미쉬의 재판을 보며, 보게 되는 부조리는 오늘날도 역시 존재하는 것들이다. 군중이 선입견에 사로잡혀 있었고, 공개 재판으로 인해 배심원과 재판장이 군중의 분위기에 영향을 받는 불평등한 재판이다.

그가 했든 그의 장인이 했든 간에, 공포 정치 동안 현 내에서 처형된 모든 사람의 목을 자른 인물로 통하는 미쉬야말로 더 없이 어이없는 설화의 대상이 되었다.(244p)”

 

사회가 재판을 창안한 이후로, 사법 당국이 범죄에 맞서 누리는 권한과 동등한 권한을 사회가 무고한 피고인들에게 부여하는 방법을 찾아낸 적은 결코 없습니다. 재판은 쌍방향이 동등한 것이 아닙니다. (252p)”

 

재판 풍경은 앵무새 죽이기, 나는 고발한다를 오버랩시킨다.

 

재판 방청을 대중에 허용하는 것은 공개성을 내포한다는 사실 그리고 법정 심리의 공개는 과도한 고통을 부과하기 때문에 만약 입법자가 그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면 그런 고통을 부과하지 않았으리라는 사실을 프랑스가 인식하지 못하는 한, 대중의 연설은 언제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대체로 풍습이 법률보다 더 잔인하다. 풍습이란 사람들의 본성인 것이다. 그러나 법은 한 나라의 이성이다. 이성에 기반하지 않는 경우가 많은 풍습은 법을 능가한다.(265p)”

 

납치혐의는 반역죄의 혐의로 확대된다. 실제로 이들이 받는 선고는 사형과 징역 24년이다. 네 사람을 구하기 위해 한 사람 미쉬가 단두대로 향하는 장면은 미쉬의 죽음을 예고했던 처음부분을 소환한다. 그의 죽음 예고는 희생양으로서 죽게 될 운명을 가리키는 것이다. 귀족과 평민의 계급간 불평등을 보여주는 것으로 읽히기도 하지만, 나는 미쉬의 생애를 관통하는 혼란한 역사 가운데 희생당한 민중의 모습을 대표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세월이 흐른 후 그녀가 그렇게 원했던 왕정복고의 시대를 맞이한 로랑스 백작은 열정을 잃은 존재(312p)”였다고 서술한다. 미쉬가 죽고 3명의 청년이 전쟁터에서 전사하고 아드리엥만이 부상을 입고 돌아왔다. 이것이 자신이 그토록 불태웠던 증오의 결과라는 자책감 때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그녀가 열정을 잃은 시점이 어디였을까를 생각했다. 당시 재판이 끝나고 그녀는 미쉬와 청년들의 구명을 위해 예나전투의 전쟁터를 찾아간다. 그녀는 로랑스의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압도당한다.

 

성경 속 단어와 이미지 말고는 묘사할 수 없을 군사적 장관 가운데서, 그 엄청난 덩어리에 생명을 불어넣고 있는 사람이 로랑스의 상상력 속에 엄청난 거인의 규모로 부각되었다.(303p)”

 

그가 그렇게 증오했던 나폴레옹이 이 엄청난 전쟁을 지휘하고 있는 거인으로 다가온다. 그녀는 미쉬와 청년들의 구명을 위해 탄원한다. 그리고 그 앞에 무릎을 꿇는 순간 그녀를 불태우던 증오와 사상은 무의미한 것이 되었다. 이 때가 그녀가 열정을 잃어버린 시점이다.

 

개인의 정치적 입장과 선택이 평범한 일상에서는 그리 영향을 주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푸셰와 같은 인물들이 정치하고, 사람들이 무관심하다면 그때 누리는 평화는 평화가 아닐 것이다. 개인은 정치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한나 아렌트는 드레퓌스 사건을 바라보며 군중과 민중을 나누었다. 그녀는 군중을 민중의 희화(戱畫)로 보지 않고 군중을 민중과 동일시하는 것은 근본적 오류(전체주의의 기원)”라고 한다. 군중은 일차적으로 각 사회계급의 찌꺼기로 형성된다는 것이다. 민중의 올바른 변화를 위하여 궐기할 때 군중은 언제나 <강력한 사람><위대한 지도자>가 필요하다고 함성을 지른다.

 

이 소설은 많은 지점에서 많은 것들을 숙고하게 한다. 프랑스의 혁명으로부터 공화정과 제정과 왕정을 반복하고 급진적인 산악당 혁명가들이 자신들이 돌린 수레바퀴를 멈추지 못하고 쓰러지는 역사를 살펴보게 했다. 그 역사의 부침 속에서 살아남은 푸셰와 같은 인물이 있는가 하면 소설 속 미쉬와 같은 민중이 있음을 보게 된다. 재판 과정에서 이리저리 휩쓸리는 군중의 모습도 본다. 남는 질문은 …… 나는 군중인가, 민중인가, 지식인인가?


 

어느 정치적 인간의 초상은 슈테판 츠바이크가 쓴 '조제프 푸셰' 평전이다. 이 소설에 직접 등장하기도 하고, 말랭이라는 분신을 만들어 낸 푸셰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 책이다. 역시 츠바이크의 평전은 탁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노명식의 프랑스 혁명에서 빠리 꼼뮨까지는 프랑스의 혁명사를 참고하기 위해 항상 들춰보는 책이다두 책 모두 개정판이 나와 있다어느 정치적 인간의 초상조제프 푸셰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출판되었다. 갖고 있던 책에 밑줄이랑 표시들을 해놔서 다시 신간을 살까 갈등하는 중이다. 함께 읽을 계획 중인 책이 프랑스 대혁명의 철학이다. 발자크 전작읽기가 끝날 때까지 읽을 수 있으면 다행이라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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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4-03-25 12: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페넬로페님하고 그레이스님은 서로 독서 친구라는게 느껴집니다~!! 한권의 책을 읽기 위해서 저렇게 많은 참고독서까지 하시다니~!!

전 ‘푸셰‘가 누구인지도 처음 알았습니다...

그레이스님은 지식인이십니다~!!

그레이스 2024-03-25 12:45   좋아요 1 | URL
^^
이런 친구를 찬쉐의 책에서는 글벗이라고 번역했더라구요^^
예 ~
동아리를 오래 함께 하다보면 방향도 비슷해지고 참고하는 책들도 같아지는 듯요!
너무 감사한 동행이십니다!
지식인! 감사합니다. 그러나, 부족한 점이 많아요. 저 역시 군중과 민중 사이를 왔다갔다 하는 중인듯요.

<조제프 푸셰> 강추합니다.
 
격정세계
찬쉐 지음, 강영희 옮김 / 은행나무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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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에서 독서와 책을 무림과 무공으로 바꾸면 무협지가 되지 않을까? 독서가들이 유명한 북클럽에서 조우하고, 서로가 고수임을 알아본다. 그들은 이미 독서계에서 소문난 사람들이다. 이들은 독서를 통해 삶의 결계(結界)를 깨고 성장한다. 주변 사람들도 독서를 시작하고, 어느 정도 수준에 이르면 이 독서회에 들어가기를 희망한다. 이들이 보여주는 변화는 마치 도량에만 들어가면 날로 성장하는 무술인이 생각난다.

 

많이 등장하는 단어가 결계(結界). 정확한 의미를 찾아봤다. 불교용어로, 불도를 수행하는 데 장애를 없애기 위하여 비구의 의식주(衣食住)를 제한하는 일이다. 무협지나 게임에서 사용되는 '결계'는 공격에 대한 일종의 방어막을 의미한다고 한다. 무협지와 게임에 문외한인 내가 이 단어를 보고 그것을 연상했으니, 그 분야에서 빈번하게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사람마다 기질, 환경, 경험에 따라 '결계'들이 있다. 이 '결계'를 풀지 못하면 독서도 일도 때론 사랑도 잘 해내지 못하는 영역이 될 수 있다. 작가가 사용하는 '결계'의 의미다.

 

샤오쌍은 비둘기 북클럽에 참석하고 회원들에게 환대를 받는다. 독서계에서 샤오쌍의 명성을 들어 알고 있던 회원들은 그녀의 말에 깊은 감화를 받는다. 샤오쌍을 특별한 소설의 세계로 이끌어준 아저씨가 없었다면 지금의 독서의 경지에 이르지 못했을 것이다. 우연히 만난 동창 헤이스는 그녀를 유명한 북클럽에 초대한다. 헤이스는 페이, 리하이와 함께 그 북클럽을 만든 창단 멤버이다.

 

북클럽이 열리는 장소를 찾아 걷는 고서점거리는 해리 포터의 마법 상점 골목을 연상하게 한다.

두 사람이 유유자적 이 골목 저 골목을 빙빙 돌 때 날이 어두워지고 가로등이 켜졌다.…… 고서가 꽂힌 서가들 사이에 좁은 통로가 있고, 두 사람이 그 통로를 지나자마자 널찍한 다실이 보였다. …… 북클럽 장소로 가는 길에 샤오쌍은 원래의 길을 찾지 못하고 이런저런 장애물에 부딪혔다. ……안으로 들어섰을 때 예의 그 모습이 나타났다. 탁자 위쪽에 작은 전등이 매달려 있고 탁자 위에 찻주전자와 찻잔이 놓여 있었다.(34p, 42~43p)”

 

읽고 있던 XXXX의 골목들이 나타나고, 샤오쌍은 모이는 장소가 바뀌는 북클럽을 찾아 좁은 골목 모퉁이들을 돌고 돈다. 그러다가 마침내는 찾는다. 그런 그녀에게 자주 걸으면 익숙해질 거야라고 헤이스가 한 말의 내막은 그녀를 블랙홀처럼 빨아들이고 삶을 사유하게 한다. 사유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힘든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 닿고, 주변 사람들의 삶을 표면적으로만 알고 있다는 깨달음에 이른다. 책읽기란 이런 것 아닐까? 책의 내용과 일상이 교차하는 것! 그녀가 마주하는 것은 한 권의 소설이 아니라 사건들이며 그 사건들이 개인적 삶에 계속해서 끼어드는 것이다.

 

……앉아서 XXXX를 다시 펼쳤다. 책을 읽는데 바깥에서 번개가 번쩍번쩍, 천둥이 우르릉 쾅쾅 하늘을 갈랐다. ……이런 독서 분위기는 샤오쌍이 열광하는 것으로, 마음속에서 영감이 번뜩였다. ……빗소리 속에서 사유가 끊임없이 파닥거렸다. 도시를 보았고 통로를 보았으며 군중 속 거대한 동굴을 보았다. 마지막으로 엘리베이터를 타고 45층 옥상 테라스로 올라갔다. 위쪽 창공을 보면서 속으로 쉼 없이 외쳤다. ‘진짜 높아. , 진짜 높다!’(40~41p)”

 

다의적 표현과 은유로 가득 차 있다. 동시에 그 은유는 직설과 구분이 되지 않는다. 환상적이고 초현실적 분위기가 일렁인다. XXXX는 뒷부분에서 지나가듯 한 번 언급되는 파우스트가 아닐까 추측한다.

 

주인공들이 읽고 토론하는 열정과 고양된 감정들은 마치 성적 흥분과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실제로 이 소설에는 과하다 싶을 정도로 수위가 높은 성적묘사들이 격정적 독서와 교차되고 있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샤오쌍, 헤이스, 한마, 페이, 이 아저씨, 샤오마, 차오쯔와 리하이 모두 사랑 앞에서 머뭇거리게 하는 '결계'를 갖고 있다. 이들은 독서를 통해 그것을 뛰어넘는다. 특별히 샤오쌍과 페이는 한마 안에 있는 작가로서의 재능을 발견하고 격려해준다. 그녀는 자신의 결계를 뚫고 그 에너지로 글을 쓴다. 아마도 한마는 작가 자신이 아닐까 한다. 그들의 영향을 받은 가족들이 책을 읽고, 읽기 시작하면 너무 쉽게 삶이 달라지는 모습은 그야말로 판타지다.

 

작가 찬쉐에 대한 격찬을 여러 번 읽었고, 언젠가는 읽어보리라 하고 있던 터였다. 새 책 출간 소식에 주문하고 보니, 680페이지에 달하는 작가의 제일 두꺼운 소설이었다. 첫 페이지부터 독서가들의 정서가 나를 끌고 들어갔다. 그러나 책 두께는 무시할 수 없었다. 바삐 읽어야하는 다른 책들 사이에서 틈틈이 읽었다. 도대체 왜 이런 내용을 이렇게까지 수위를 높여서 쓰는지 의아한 부분들을 겨우 넘기고 완주했다. 이 작가에게 붙는 "중국의 카프카, 노벨문학상 후보"라는 수식어에 아직 공감하지 못한다. 아무래도 첫 작품을 잘못 선택했나 싶기도 하다. 그래서 책상 가까이에 오향거리를 두었다.

 

이 소설에서 북클럽 회원들의 책을 읽는 분위기는 나를 묘하게 흥분시킨다. 이런 쾌락에 가까운 나의 독서 경험들을 떠올리게 한다. 몸이 전율하고 진동하는 경험이다. 내가 '책 읽다가 지진 난 것처럼 바닥이 울렁이고 몸이 흔들리는 체험을 해본 적 있냐'고 하면, 지루한 얼굴로 앉아있던 중학생 아이들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본다. 황당하기도, 궁금하기도 해서인 듯하다. 샤오쌍이 말하는 것처럼 갑작스럽게 어떤 경지로 들어가는 독서 경험이라고 할 수 있다. 책을 읽다가 순간 어떤 진실을 맞닥뜨리거나 영감에 휩싸이는 순간이다.

 

비둘기 북클럽의 역동성을 보면서 자연스럽게 내가 함께 하고 있는 동아리를 떠올린다. 7년이란 세월동안 함께 한 사람들, 여러 가지 이유로 떠난 사람들, 그리고 새롭게 만나 지금까지 함께 하고 있는 사람들! 그렇게 역동적이진 않지만, 나 역시 이 모임을 통해 삶의 작은 변화를 만들고 있음을 느낀다. 가끔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의문을 갖게 되는 순간도 있다. 모여서 생각을 나누다보면 그 만남만으로도 생성된 의미가 있음을 깨닫는다. 문뜩 이유가 없으면 어때?’라는 생각으로 돌아와 또 다음 책을 펼치기도 한다.

 

우리는 왜 이 소설의 북클럽 회원들만큼 역동적 변화를 경험하지 못하는 걸까? 이 소설은 판타지다. 책 몇 권을 읽고 그렇게 쉽게 변한다면 세상에 이렇게 많은 책이 쏟아져 나올 필요가 없다. 그럼에도 책의 내용과 일상이 교차하고 한 권의 사건들이 삶에 계속해서 끼어들어 반영하고 변화하는 것이 진정한 독서라는 말에 동의한다. 그 과정을 지속한다면, 더디지만 변화는 계속될 것이다. 죽을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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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ient-guest 2024-03-13 08: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시죠? 다른 분 서재에서 타고 넘어와서 간만에 인사드려요. 우연히 왔지만 잘 왔다는 생각이 드는 후기이자 책 소개입니다. 저도 얼른 구해서 읽어보고 싶네요. 이번 달엔 책을 더 주문하지 않을 것 같지만 세금납부가 끝나는 4/15이후 잔고에 따라 주문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레이스 2024-03-13 08:16   좋아요 1 | URL
^^
예~ 안녕하세요?
세금납부...잔고... 넘 재밌어요.
제 딸 세무사 달력 보면서, 여기는 1년이 이렇게 흘러가는구나 했는데 ㅋㅋ

읽고 좋으셨으면 합니다.
감사해요

페넬로페 2024-03-13 09: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무림의 고수인 듯한 독서가들의 활약이 궁금한데요. 결계의 자세로 책을 읽어야 하는데 집중력의 부족으로 벌써 하산하는 제가 보이네요 ㅠㅠ

그레이스 2024-03-13 09:46   좋아요 1 | URL
ㅎㅎ
책 읽다 졸고 있었습니다.
아직 안되요!ㅠㅠ

잠자냥 2024-03-13 09: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공감합니다. 저도 신간이라 일단 5별주긴 했지만.... 4점 조금 넘는 별점이라고나 할까..... 판타지라는 말에도 공감해요. ˝도대체 왜 이런 내용을 이렇게까지 수위를 높여서 쓰는지 의아한 부분들을 겨우 넘기고 완주˝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 구절도 공감입니다. ㅋㅋㅋㅋㅋ 이렇게까지 길게 쓸 일인가 싶었습니다. 다 사랑에 빠지고 섹...하고 난리도 아님. 휴.

그레이스 2024-03-13 09:48   좋아요 1 | URL
ㅎㅎ
난감했어요
저도 잠자냥님처럼 그 부분이 상징하는게 무엇일까를 생각했어요.ㅋㅋ

그레이스 2024-03-13 09:59   좋아요 0 | URL
댓글 보다가 제가 비표준어를 썼다는 깨달음! 수정했습니다. 감사!
의식하지 않으면 오랫동안 노출되었던 용어를 쓰게되네요.

stella.K 2024-03-13 10: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읽어보고 싶네요. 찬쉐를 아직 읽어보지 않았다면 이책부터 읽어보라는데요? 600페이지 좀 부담스럽긴 하지만 언제고 한번 도전해 보겠슴다. ㅋ

그레이스 2024-03-13 10:38   좋아요 1 | URL
작가의 이름 ‘잔설‘이 넘 맘에 들어서 관심을 두고 있었죠! 어제 중국 여성분과 대화 중 이 작가를 잘 모르기에 소개해줬더니, 넘 좋아하더라구요. ‘찬쉐‘의 원어민 발음도 들어봤습니다. 노벨문학상 기대 작가란 말에 기분 좋아하더라구요.
시작은 조금 더 얇은 책도 좋을것 같아요.

자성지 2024-03-13 13: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처음 만나는 중국 작가인데 도서관에 있는지 확인하여 읽든지 한 권을 사서 읽든지 해야겠네요. 결계라는 단어가 갖는 의미를 새기며 독서에 대한 의지를 다집니다.

그레이스 2024-03-13 15:59   좋아요 0 | URL
예~
독서의 의지는 활활 타오르게 될겁니다.
ㅎㅎ

독서괭 2024-03-13 14: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침에 이 글 읽으면서 오 재밌겠는데?? 했다가 나중에 힘들게 완독하셨다는 거 보고 음.. 했네요 ㅎㅎ 그래도 매력적일 것 같긴 합니다. 책으로 사람이 바뀐다는 판타지, 실현되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레이스 2024-03-13 16:02   좋아요 1 | URL
판타지라도 품고 있으면 더뎌도 변화는 오겠죠^^
전체 분위기가 뭔지 모르겠지만 약간 들떠 있어요
그래서 격정세계인듯요,,
굳이 성묘사 없어도 될듯!

새파랑 2024-03-14 15: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미 그레이스님은 독서의 격정세계에 살고 계신거 아닌가요? ㅋ

북클럽을 7년동안 하시다니 대단하십니다. 전 낯을 가려서 북클럽은 못할거 같습니다...

찬쉐 한권 정도는 읽어봐야 겠습니다~!!

그레이스 2024-03-14 15:30   좋아요 1 | URL
동아리 회원들을 너무 잘 만나서...저는 그 모임 끝나고 오면 약간 각성되요.
동아리는 책하고 친하면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던데요?!

구름모모 2024-03-15 23: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읽어봐야겠어요.

그레이스 2024-03-16 08:52   좋아요 0 | URL
예~
즐독하시길

Falstaff 2024-04-19 07: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윽, 왜 이 리뷰를 읽지 못했을까요? 저도 이 책 읽고 독후감 썼는데, 다른 분들 생각은 어땠을까 싶어서 봤더니 그레이스 님의 리뷰가 있잖아요, ㅋㅋㅋ 제 잡글은 5월 두번째 주에...

그레이스 2024-04-19 08:23   좋아요 1 | URL
ㅎㅎ
올리시면 읽어볼께요
바빠서 저도 북플에 매일 들어오진 못해서 놓치는게 많아요;;
 
패터슨 민음사 세계시인선 리뉴얼판 54
윌리엄 칼로스 윌리엄스 지음, 정은귀 옮김 / 민음사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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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된 시는 비옷을 입고 샤워하는 느낌이랄까요.

Poetry in translation is like taking a shower wearing a raincoat.”

영화 패터슨마지막 부분에서 일본인이 한 말이다. 서툰 발음으로 말을 건네며 어색한 대화를 이어가던 그 시인은 아포리즘 같은 대사를 남기고 떠난다.

패터슨은 시인 윌리엄 칼로스 윌리엄스가 살던 도시이자 그의 시집 이름이기도 하고, 이 영화의 주인공 이름이기도 하다. 패터슨은 버스운전기사다. 매일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서 출근하고, 같은 시간에 승하차하는 사람들을 태운다. 퇴근해서 강아지를 산책시키고 바에 들러 맥주 한 잔 하고 돌아온다. 그의 단조로운 일상을 깨뜨리는 이벤트는 아내의 넘치는 예술적 성향으로부터 온다.

그를 진정 숨 쉬도록 해주는 일은 시를 쓰는 것이다. 잠깐의 휴식시간이나 잠자기 전 버스 주차장 건물 뒤에서, 패터슨의 폭포를 바라보며, 작은 골방에서 노트를 펴고 시를 쓴다. 귀에 들리는 사람들의 대화, 눈에 띄는 모든 사물과 풍경이 다 시가 된다. 떠오른 시상을 적고, 길을 걸으며 생각하고, 다시 적는다.

이렇게 매일 쓴 시들이 담겨있는 비밀 노트가 애완견에 의해 산산조각이 난다. 상심한 그를 위로하는 아내에게 단지 물위에 적은 단어들일 뿐이라고 말하는 그에게서 더욱 깊은 상실감을 본다. 아마도 그동안 시를 쓰는 것에 대한 회의감마저 든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는 낙심한 마음으로 집을 나와 폭포를 바라보며 그레이트 폴 공원 벤치에 앉아있고, 일본인이 다가와 말을 건넨다. 두 사람의 대화는 흡사 한편의 시(). 한 연이 끝나고 다시 연을 시작할 때 여백을 두듯 그들의 대화는 그렇게 이어진다. “아하!”라는 감탄사와 함께.

윌리엄 칼로스 윌리엄스의 도시를 보러 왔다는 그 일본인은 당신도 이곳 패터슨의 시인입니까?”라고 그에게 묻는다. 그는 버스 드라이버라고 대답한다. 일본인은 전 시로 숨을 쉽니다.I breathe poetry.”라고 말하며 자신이 시인임을 밝힌다. 영어로 번역된 시는 없다고 말하며, “번역된 시는 마치 비옷을 입고 샤워하는 것과 같다는 말에 두 사람은 공감하며 웃는다. 일본인은 떠나면서 빈 공책을 선물한다.

때론 텅 빈 페이지가 가장 많은 가능성을 선사하죠. Sometimes empty page presents more possibilities”

이 영화에서 가장 유명한 대사일 듯하다.

그런데 나는 왜 아하Aha!”에 꽂히는지! 세상을 시의 창으로 보고 있는 두 사람의 공감을 이 두 음절에 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일본인이 떠나고 홀로 남은 그에게 시상이 찾아오고 집으로 향하는 그는 마음속으로 시를 쓰고 있다. 그 역시 시로 숨을 쉬고 있었다. 그리고 다시 일상은 시작된다.

영화를 마치 한 편의 시()처럼 읽었다. 많지 않은 대사들이 다 시()로 건너온다. 그리고 당연히 윌리엄 칼로스 윌리엄스의 시집 패터슨을 샀다. 그의 소개를 보니 서사시라는 말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 그래서 영화에 단테 알리기에리의 초상화가! 핑크색 작은 꽃이 붙여져 있는 단테의 유명한 초상화는 그가 런치박스를 여는 장면에서 잠깐 카메라 앵글 안에 잡혔었다. 순간이지만 이 장면은 정지 화면이 되어 뇌리에 새겨졌고, 마음속에 많은 의미들을 생성했다.

그를 이미지즘 시인으로 소개하고 있다. 시를 따라 읽다보면 시인의 눈을 통해 들어온 풍경과 사물들이 그대로 그려진다. 때로는 그의 심상에서 일어나는 생각들이 이 이미지들과 섞여 들어가 다시 새로운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반가운 것은 브뤼겔(Pieter Bruegel the Elder 1525 ~ 1569)의 그림을 그려낸 시들이다.

그 중 이카루스의 추락과 함께 하는 풍경은 신화 그림을 공부할 때 찾았던 그림과 시였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진리를 절감했다.

LANDSCPE WITH THE FALL OF ICARUS

 

According to Brueghel

when Icarus fell

It was spring

 

()

 

the edge of the sea

concerned

with itself

 

sweating in the sun

that melted

the wings’ wax

 

unsignificantly

off the coast

there was

 

a splash quite unnoticed

this was

Icarus drowning

마지막 두 연은 그림에서 보여 주고자 하는 핵심이다. “앞바다에선/ 사소하게 / 일이 하나 있었으니(6)”아무도 몰랐던 어떤 풍덩/ 이것은 / 익사하는 이카로스였다(7)”이다. 바쁘게 밭 갈고 행사 준비에 바쁜 사람들의 들썩거림 한 편으로 바다로 추락한 이카로스의 모습은 찾기조차 힘들다.(다리만 물밖으로 나와 있다)  ‘이카로스의 추락이라는 신화를 풀어낸 브뤼겔의 그림, 그것을 오마주한 윌리엄스의 시는 우리 시대에도 던지는 메시지가 있다. 일상 속에서 타인의 비극에 눈을 돌리는 것, 알아채는 것, 그 슬픔에 머무는 시간을 내어주는 것이 어려운 나를 돌아보게 된다.

 

윌리엄 칼로스 윌리엄스의 시를 영시와 번역시로 실어놓은 이 시집을 읽어가면서 처음 떠올린 것은 비옷이다. “Poetry in translation is like taking a shower wearing a raincoat.” 정말 적절한 비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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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4-02-28 16: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비옷 입고 샤워하는 느낌˝ 기막힌 표현입니다.

그레이스 2024-02-28 17:24   좋아요 0 | URL
그렇죠?!
이런 표현들이 영화 곳곳에 숨어 있어요^^

새파랑 2024-02-29 10: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번역시에 대한 가장 완벽한 표현인거 같아요 ㅋ 그래서 번역시를 읽으면 공감하기 쉽지 않았나 봅니다. 확실히 외국시는 원서로 읽는게 더 느낌이 사는거 같아요~!!

그레이스 2024-02-29 10:27   좋아요 1 | URL
요즘은 영시 정도는 번역시랑 함께 볼수 있도록 편집되어 나와서 좋아요.
이 책도 그렇게 나와서 영시도 감상할 수 있었어요^^

레삭매냐 2024-02-29 15:1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 영화 <패터슨> 봐야 하는데...
만날 미루고만 있네요.

아마 잔잔바리 영화로 추정하는데,
일상의 탈출구가 시짓기라...
크하 정말 멋지네요.

그레이스 2024-02-29 15:23   좋아요 2 | URL
넷***에서 봤습니다.^^
잔잔한 영화 맞아요.
책 읽는 느낌?!
그 유명한 폭포 배경도 멋있고, 그 공원에 알렉산더 해밀턴 동상이 있다고 해서 그 알렉산더 해밀턴 평전 읽고 있는 남편에게 권했었는데...
자기 스타일 아니라고 하더군요^^

얄라알라 2024-03-10 12:02   좋아요 2 | URL
ㅋㅋㅋ내가 좋아하는 매냐님의 언어유희 또 나왔어요

˝잔잔바리 영화 ^^˝ ㅎㅎ 매냐님, 최고!^^

얄라알라 2024-03-10 12: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 런치 박스 안, 꽃과 단테의 초상화라니!!

‘비옷 입고 샤워‘....최고의 비유입니다!

근데요 그레이스님 ! 저는 스타워즈 시리즈를 좋아하다 보니 남주가 카리스마 넘치는 다크사이드의 대표주자로 보이고 이런 서정적인 작품의 캐릭터로 상상이 잘 안되어요^^ 광선검 휘두르던 이미지가 하도 강력해서. 이럴 땐 직접 보는 게 최고겠어요 ㅎ

그레이스 2024-03-10 14:33   좋아요 1 | URL
단테사진 옆에 아내 사진이 옆에 있어서... 아! 그럼 아내가 베아트리체?
하고 웃었습니다.
이미지가 넘 달라서...!
그 배우였군요?!
 


- (), 마차(馬車), 청춘의 마지막 눈물에 관하여.

부성애의 화신(化身)을 담은 허름한 관(), 귀족 문장(紋章)으로 장식한 텅빈 마차 두 대의 행렬, 라스티냐크의 오열. 내게 새겨진 이 소설의 이미지다.

 

고리오 영감은 프랑스 혁명과 공포정치 시대에도 사업에 성공한 수완 좋은 사람이었다. 귀족들과 결혼한 두 딸들에게 재산을 다 쏟아주고, 가난하고 병들어 하숙집의 허름한 방에서 죽는다. 딸들은 자신의 욕망에만 몰두해 있다. 아버지의 모든 재산을 마지막까지 다 털어가고, 장례식에 빈마차를 보낸다. 아버지의 관을 딸들이 따라가는 것처럼 보이도록. 그들의 배은망덕은 레몬을 꽉 짠 다음에 레몬 껍질을 길 모퉁이에 던져 버린 것(민음사 p.108)”과 같다. 이 소설에서 고리오 영감은 딸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하는 부성애(父性愛)의 화신이다. 그가 주인공일까?

 

라스티냐크는 시골에서 올라와 공부하는 법학생이다. 그는 파리의 삶을 통해 자신과 가족들의 가난에 대해 깨닫는다. 성공한 삶을 위해서는 공부해서 법관이 되는 것보다 더 빠른 길이 있음을 보고 알게 된다. 다른 남성들이 하듯, 여성 후견인을 통한 신분 상승을 꿈꾼다.

 

그는 보케르 부인의 하숙에 살고 있다. 이 하숙이 위치한 뇌브생트주느비에브가의 모습은 에밀 졸라의 목로주점과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을 떠올리게 한다. 가난이 배어있는 곳이다. 그들이 사는 방에서는 언어 속에는 명칭이 없는 냄새가 난다. 그것은 고리타분한 냄새, 곰팡이 냄새, 기름 썩는 냄새(을유출판사 p.7~8)이다. 작가는 시각 청각 촉각 등 감각을 사용하여 이 거리의 가난을 표현하고 있다.

 

이 하숙은 자본주의의 계급구조를 그리고 있다. 2층이 하숙비가 가장 비싸고 위로 올라가면서 허름해지고 하숙비도 싸진다. 2층에는 쿠튀르 부인 빅토린 타유페르, 3층에는 푸아레 노인과 보트랭, 4층에는 미쇼노, 고리오 영감, 으젠 드 라스티냐크, 그리고 다락방에는 이 하숙집에서 일하고 있는 크리스토프와 실비의 방이다. 그들이 이 하숙집에 들어오기 전 어떤 삶을 살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2층에서 3층으로 계급이 하락하고 누추해지는 고리오 영감을 향한 사람들의 시선과 말들은 곱지 않다.

 

고리오 영감의 사랑은 읽는 사람의 마음이 불편할 정도로 딸들에게 맹목적이다. 보트랭은 라스티냐크에게 살인방조를 해서라도 출세하도록 해주겠다고 하며 접근한다. 사회의 부패를 이용하여 이득을 취하는 데 능란한 사람이다. 그의 정체가 탈옥수임이 밝혀진 후, 그의 유혹에 흔들렸던 라스티냐크는 자신이 굴러 떨어질 뻔한 심연을 보았다고 생각한다. 라스티냐크를 중심으로 고리오 영감과 보트랭이라는 인물을 배치한 것은 라스티냐크의 욕망과 그가 욕망하는 파리 사교계 사람들의 삶을 부각시키는 효과를 가져 온다. 라스티냐크가 주인공이다.

 

라스티냐크는 죽어가는 고리오 영감을 곁에서 돌보고, 장례를 치러준다. 허름한 관에 싣고, 초라한 장례미사를 드리고, 묘지로 향하는 길, 그의 슬픔이 서서히 빌드업 되어 간다. 그 슬픔은 묘지 일꾼들이 요구한 20수를, 그 적은 돈조차 없어서, 하숙에서 일하는 크리스토프에게 빌려야만 하는 상황에 이르러 폭발한다

 

두 명의 무덤 파는 인부가 관을 덮으려고 몇 삽의 흙을 퍼서 관 위에 던진 다음에, 그들은 다시 몸을 일으켰고, 그들 중 하나가 라스티냐크에게 말을 걸면서 팁을 요구했다. 외젠은 주머니를 뒤져 보았으나 한 푼도 없어서, 크리스토프에게 20수를 빌릴 수밖에 없었다. 그 자체로서는 대수롭지 않은 이 일이 라스티냐크에게 끔찍스러운 슬픔의 발작을 일으켰다. (을유출판사 p.242)”


그 슬픔의 정체가 드러난 것이다.

 

라스티냐크가 무덤에서 언덕으로 올라가 파리 시내를 바라보며 이젠 우리 둘의 대결이다라고 한 말은 청춘의 마지막 눈물을 묻고”, 성공을 위해 살아가겠다는 결심으로 보인다. 그가 발판으로 삼으려 했던 뒤싱겐 부인의 집으로 향하는 것을 보면 더욱 그런 추측을 하게 한다.

 

사교계에 목을 매고, 신분 상승을 위해 부유하고 나이 많은 기혼 여성이나 남성을 후원자로 삼는 것이 공공연했던 시대였다. 고리오 영감의 딸들의 부덕(不德)은 이야깃거리에 불과한 시대였을지도 모르겠다. 시대의 미덕은 변한다. 그럼에도 마지막까지 지켜야 할 존재 윤리는 있다. 그것은 무엇일까 생각하다가, 나는 우리 사회에 로쟈나 외젠과 같은 청년들이 많아질까? 하고 걱정한다. 왜 항상 생각의 끄트머리는 같은 지점을 맴도는지.


 

- <인간 희극>에 관하여.

오노레 드 발자크(1799~1850)은 자신이 쓴 작품 전체에 <인간희극>이라는 이름을 붙였다에밀 졸라의 루공-마카르 전집을 떠올리게 한다. 인간 희극 La comédie Humaine이라는 제목은 단테의 신곡La Divine Comedie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고리오 영감에서도 하숙집이 있는 거리 묘사 중,

마치 여행자가 지하 묘지를 구경하러 내려갈 때, 계단을 하나하나 내려감에 따라, 햇빛은 점차로 줄어들고 안내자의 노래 소리는 굴속 밑으로 빨려 드는 것과도 같다. (고리오 영감을유출판사p.5)”

라고 한 글은 그 자체로 신곡이다.

 

발자크는 이 <인간희극>을 통해 인간유형을 연구하고 그들 또는 환경 사이의 상호작용을 연구하기로 했다. 그래서 그의 작품에는 여러 작품에 재등장하는 인물들이 많다. 발자크가 인물들의 반복 등장이라는 방법을 처음 조직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고리오 영감부터다.그 책의 초판에서는 23명에 불과했던 재등장하는 인물들의 수가 그 후에 고쳐 쓴 판들에 오면 50명으로 불어난다.

 

방대한 구성, 소개된 환경과 계층의 다양성, 재등장하는 인물들의 수() 등으로 볼 때 고리오 영감은 발자크의 작가적 생애에 있어서 결정적인 한 단계를 이루는 것이었다. 이제부터 그의 작품은 상호간의 대립, 구별, 닮은 등의 관계에 의하여 만들어지는 자연발생적인 변신작용에서 생겨나게 된다고 말할 수 있다.(프랑스 현대 소설사김화영 p.100)”

 

그는 인간 희극[풍속연구 Etude de moeurs], [철학적 연구 Etudes philosophiques], [분석적 연구 Etudes analytiques]로 나누고, [풍속 연구]<사생활의 장면><파리 생활의 장면><정치 생활의 장면><전원 생활의 장면><군대 생활의 장면>이 있다. 고리오 영감은 처음에 <파리 생활의 장면> 속에 포함되어 있었으나, 그는 후에 <사생활의 장면>에 포함시켰다.

이런 방대한 건축물은 미완상태로 남고 말았다.

 

- 번역에 관하여.

민음사 고리오 영감을 읽으면서 흐름이 자꾸 끊어지는 내용 때문에 도무지 집중할 수 없었다. 급기야 발자크의 필력을 의심하기에 이르렀다. 발자크 평전에서 읽은 그의 초기 글쓰기에 대한 이야기를 읽은 터여서 더 그랬다. 가난한 그는 한동안 돈을 벌기 위해 하룻밤에도 완성할 수 있는, 통속적인 내용의 짜깁기 글을 썼다고 한다. 나중에 작품 활동을 할 때 이것은 그의 문체에 치명적인 영향을 주었고, 상당부분 피해를 입었다고 한다. 혹시나 그래서 내가 고리오 영감에 집중하지 못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민음사 책을 다 읽고 을유 출판사에서 나온 책을 읽으면서 내 의심이 잘못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술술 읽히는 통에, 시간이 없는데도, 민음사의 같은 부분을 비교 해가며 읽었다. 예를 들자면 마지막 부분의 경우를 비교하고 싶다.

 

혼자 남은 라스티냐크는 묘지 꼭대기를 향해 몇 걸음 옮겼다. 그리고 그는 센 강의 두 기슭을 따라서 꾸불꾸불 누워 있는, 등불들이 빛나기 시작하는 파리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두 눈은 방돔 광장의 기둥과 불치병자 병원의 둥근 지붕 사이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그가 들어가고 싶었던 아름다운 사교계가 있었다. (민음사 p.396)”

 

홀로 남은 라스티냐크는 묘지의 꼭대기 쪽을 향해 몇 걸음 걸어가, 센 강 양안을 따라 구불구불 뻗어 있는, 불빛이 반짝이기 시작하는 파리 시내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두 눈은 방돔 광장의 기둥과 앵발리드의 둥근 지붕 사이, 그가 뚫고 들어가기를 원했던 아름다운 사교계가 거주하는 그곳에 거의 탐욕스럽게 고정되었다. (을유출판사 p.242)“

 

민음사 번역은 어색하게 읽혀지기도 하고, 특별히 앵발리드를 불치병자 병원이라고 번역함으로 번역자가 생각하는 상징적 의미를 독자에게 강요하고 있다. 앵발리드는 군인들을 위한 병원이기도 하지만 프랑스 혁명 때 시민들이 바스티유를 공격하기 위해 무기를 탈취한 곳이기도 하다. “앵발리드의 의미 해석은 독자에게 맡겨야 하지 않았을까?

 

을유출판사의 판본에 관한 붙임을 보면 고리오 영감은 단행본으로 출판되기 네 차례에 걸쳐 연재 되었었고, 발자크는 단행본 초판본에 여러 번 수정을 가했다고 한다. 교열과 수정을 거치고 또한 여러 출판사를 거치면서 여러 개의 판본이 존재하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네 번으로 연재되었을 때 붙여졌던 제목들도 나중에 가면 사라졌다고 한다. 하지만 민음사 고리오 영감』은 여전히 4부분으로 나뉘어져 소제목들이 붙여져 있다. 판본을 비교하면, 민음사는 La Comédie Humaine(Ed. du seuil, 1965), 을유 출판사는서지 정리 방식으로 상세하게 Honere de Balzac: Le Pere Goriot, in La Comédie Humaine, tome , Bibliotheque de la Pleiade, Gallimard, Paris, 1979.로  적고 있다.

 

이런 거 하지 않으려고 했는데……내가 뭐라고…….’ 이 글을 마무리하면서도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 그러나 번역의 차이를 알고 나서, 먼저 읽은 책의 답답함을 경험했던 터라, 고리오 영감을 읽을 서재 분들이 발자크에 실망하지 않길 바라며 쓰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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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4-02-19 07:0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인용하신 부분은 우리말 문장의 격이 다르네요. 고맙습니다.

그레이스 2024-02-19 07:04   좋아요 2 | URL
그렇죠? 감사합니다!^^

미미 2024-02-19 11: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민음사 번역 읽고나서 을유의 것을 읽으니 더 조화롭게 다가와 살짝 심쿵하기까지 했습니다.
발자크가 커피를 엄청나게 마셔서 나중에 죽을때도 그 영향이 컸다고 하던데 초기부터 생계를 위한 워커홀릭이 된 탓이었을까요? 잘 읽었습니다^^

그레이스 2024-04-16 22:05   좋아요 2 | URL
미미님도 그러셨군요.
끝까지 자신은 소설가가 아니라고 하면서, 성공을 위해 글을 쓴 그의 정체성과 천재성이 안쓰럽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더 읽어가면서 그에 대한 감상이 달라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하면서....^^

새파랑 2024-02-21 09: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발자크의 대표작이 <고리오 영감> 인가 봅니다 ㅋ <목로주점> 느낌이 나긴 나네요 ~!! 요즘 북플 대세는 발자크 인가 봅니다~!!
자식 키워봤자 소용없군요... 민음사 번역이 좀 별로였나 봅니다~!! 전 을유로 가지고 있긴 한데 ㅋ

그레이스 2024-02-21 09:31   좋아요 1 | URL
자식 키워봤자...ㅋㅋ
마지막 작품 <사촌퐁스>도 좋다고 하던데, 어쨌든 <인간희극> 방대한 구상 중심에 있는 작품이라고는 합니다.

단발머리 2024-02-24 10:2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몇년 전인지는 모르지만 꽤 오래전에 공지영 작가가 손에 꼽는 작품으로 이 <고리오 영감>을 말했습니다. 귀가 얇은 저는 당장 달려가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왔는데, 저는 어렵더라구요. 당최 책장이 안 넘어가서.... 앞쪽 조금 읽고 말았거든요.
그레이스님 리뷰 읽고 나니 포기하지 말고 다시 한 번 도전해야겠다, 그런 건전한 생각이 듭니다.
잘 읽고 갑니다. 좋은 주말 되세요!

그레이스 2024-02-24 13:46   좋아요 2 | URL
을유로 추천합니다.^^
아직 여행 중이신지 아님 돌아오신건지요...?!
단발머리님도 좋은 주말되세요~♡

얄라알라 2024-02-26 23: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그레이스님의 리뷰는 퇴고에 퇴고에 ...정갈하게 가라앉은 말들을 건져낸 듯 합니다.

번역에 따라 그렇게 느낌이 달라지는 거네요.
뭐든 참 어렵습니다.
이렇게 문장문장 찾고 느끼며 읽어주시는 독자분들이 계시는 한 발자크는 영원히

그레이스 2024-02-26 23:09   좋아요 1 | URL
과찬의 말씀을!
잘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올해 9월까지는 발자크를 읽으려고 합니다.
번역가들도 참 어렵겠다는 생각을 하긴 했어요.~
네 영원히~~!
 
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입니다 - 경이로운 세계 속으로 숨어버린 한 남자의 이야기
패트릭 브링리 지음, 김희정.조현주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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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제목을 원제 All the Beauty in the World: 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and Me를 그대로 직역하는 것이 어땠을까? 나에게는 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입니다라는 제목이 문턱으로 작용했었다. 뭔가 상투적으로 느껴졌다. 이 책을 홍보하는 글들이 이상하게 나를 더 멀어지게 했다. 미술관보다 그의 상실과 회복에 관한 이야기만 하다 끝나는 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뉴요커에 다니던 한 남자가 형의 죽음 이후로 미술관 경비원이 되었다는 이야기는 그렇게 특별해 보이지 않고 신파적으로 다가왔다. 내가 무정한 걸까? 이 책을 추천하는 사람들도 나랑 책 읽는 결이 맞지 않다는 느낌도 들었다. 내가 오만한 걸까?

 

어쨌든,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이라는 단어가 나의 마음을 끌었고, 딸이 가보고 싶다고 했던 기억 때문에 책을 펼쳤다. 읽어가면서 나의 의심은 무고(無辜)임이 밝혀졌다. ‘메트라는 매력적인 공간과 그곳을 채우고 있는 전시품들에 관한 지식과 감상에 푹 빠져 버렸다. 상실이라는 인생의 어두운 사건, 전직 뉴요커의 미술관 경비원으로의 이직은 중요한 사실이 아니었다. 그를 이 미술관으로 이끈 것은 오랜 관심과 취향과 습관 그리고 미술관이란 공간의 특별함 때문이다. 그의 감상에는 침범할 수 없는 고독과 아름다운 추억이 담겨 있다.

 

그가 걸어가는 미술관의 복도와 전시실을 눈에 보듯 그리면서 따라가고 그의 시선이 멈춘 전시실들의 작품들에 내 시선도 멈췄다. 그들이 내뿜는 냄새, 반사하는 빛, 아우라를 함께 느끼는 듯 했다. 미술관을 오픈하기 전 홀로 있는 전시관의 정적과 고독, 그 공간을 채웠다 비우는 사람들의 소음이 감동스럽다.

 

그는 그곳을 메트라 부른다아마 다른 직원들도 뉴욕 시민들도 그렇게 부를 것이라고 짐작된다. 예쁘고 다정하다. 미술관이 시민들에게 그렇지 않을까? 입장료는 기부금 형식으로 내고 싶은 만큼 낸다.  큐레이션 부서는 17개나 된다. 소장 유물은 2백만 개가 넘는다. ‘메트에는 2천명 이상의 직원들이 있다. 문턱이 낮은 미술관인데, 시설과 작품들의 수준은 높다.

 

매년 거의 7백만 명(세계 3)의 방문객들을 맞이한다. 그들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은 오랜 시간 이 곳을 찾는 사람들의 관람 유형과 사랑에 빠진 유형을 분류한다. 나의 흥미를 끄는 유형의 방문객들은 미술관과 사랑에 빠진 사람들이다. 어렸을 때는 기부금을 조금밖에 낼 수 없었지만 회원권을 사서 따라오는 혜택을 누리는 사람들이다. 아무 때나 가볼 수 있는 특별한 장소, 사랑에 빠지는 미술관이 내게도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술관마다 열리는 기획전 소식을 받고 얼리버드 티켓을 예매하고 날짜를 정해서 관람하는 것이 내가 미술을 사랑하는 방법이다. 항상 거기 있는 작품과 공간을 사랑해서 찾아가는 곳은 없다.

 

작품과 관람객들을 보는 작가의 감상들은 나에게 깊은 영감을 남겼다. 그가 떠올리는 추억들은 때론 브뤼헐의 <곡물 수확>과 같은 작품을 연상시킨다. 행복하고 찬란한 슬픔으로 가득한 눈부신 장면들이다. 때론 그의 시야에 들어온 관람객들의 모습들 중 내가 하던 실수를 마주하게 될 때, 웃음이 난다.

 

그들이 이토록 느리게 이동하는 이유가 짐작이 간다. 이 미술관이 얼마나 큰지 전혀 모르는 것이다.(4장)”

 

가끔 관람객들은 제복을 입은 그에게 궁금한 것을 질문을 한다. 그들에게 미술사, 미술기법, 도상을 설명하고 있는 그는 지식과 감수성을 겸비하고 쉬운 언어를 장착한 누구보다도 뛰어난 도슨트다. 관람객들과 책을 읽고 있는 나를 화가의 시대와 작업실로 인도한다.

 

그는 두 개의 전시를 서로 연결시키는 대담한 견해를 밝힌다. <미켈란젤로><지스 벤드 퀼트 작품전>이다. 거친 노동의 휴식시간에 완성한 퀼트 한 조각과 그것들을 이어 붙여 작품-아이들이 덮는 이불-을 만들었던 여성들의 인터뷰와 미켈란젤로의 소묘와 그의 일기를 병치한다. 여성들의 퀼트 한 조각을 미켈란젤로의 한 소묘 혹은 시스티나성당 천장화의 한 컷과 유비한다. “대부분의 퀼트 작품은 블록 아홉 개로 이루어져 있는데 하루에 블록 하나쯤 완성하면 만족했다. 루시 T.버전의 조르나타였다.(12)”라고. 조르나타! 하루의 일과라는 뜻이다. 미켈란젤로가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 했던 고뇌의 소묘 또는 천장화의 한 컷을 가리킨다.

 

가장 위대한 예술 작품은 자신의 상황에 갇힌 사람들이 아름답고, 유용하고, 진실된 무언가를 창조하기 위해 조각조각 노력을 이어 붙여 만들어가는 것이라는 교훈까지 말이다.(12)”

 

메트는 새로운 경비를 고용할 때면 면접광고를 내고 이 일에 적합한 사람들을 뽑는다. 외국 출생인 사람이 거의 절반에 달하고, 모든 축에서 다양하다. 이 일을 하게 된 동기와 과정 그리고 동력도 다 다르다. “벵골만에서 구축함을 지휘했던 사람, 택시를 몰던 사람. 민간 항공사 파일럿으로 일한 사람, 목조 가옥을 짓던 사람, 농사를 짓던 사람, 유치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던 사람, 순찰을 돌던 경찰, 그런 경찰들의 활동을 신문에 보도하던 기자, 백화점 마네킹의 얼굴을 그리던 사람들이다. “예술을 좋아하던 사람도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도 있다.(8장)” 그들은 어두운 푸른색 근무복 아래 비밀스런 자아를 숨겨 두고 있다.

 

폐관을 알리며 나가달라고 하는 경비원을 두고 자기 어린 아들에게 작은 사람들한테는 작은 힘이 어울리지인생이 그래하고 말하는 젊은 남자 때문에 나는 분노보다는 절망을 느꼈다. ‘어딜 가나 이런 사람들이 있지라고 하기엔 메트라는 장소가 너무 특별하기에, 이렇게 아름다운 곳에도 이런 사람들이 있다는 것에 절망감을 느낀다.

 

5년 동안 이 전시실 저 전시실 부서가 맡겨지는 대로 옮겨 다닌 그는 몇 가지 습관이 생겼다. 친한 친구들이 생기고, 좋아하는 전시실과 별로 선호하지 않는 전시실을 구별하게 됐다. 그는 이제 그의 아침을 채우곤 하던 정적은 느끼질 못한다. 그 정적이 절실하지 않음을 느낀다.

 

그는 '메트'에서 10년을 일했는데 어떤 작품을 제일 좋아하는지 모르는 채 떠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20여 년 전, 그와 형제들을 데리고 가서 각자 제일 마음에 드는 작품 하나씩을 고르기 전에는 전시실을 떠나지 못하게 했던 어머니에게서 배운 것이다. '메트'를 떠나며 자신이 이 미술관에서 가장 좋아하는 작품을 선정한다. 여러 후보 작품을 써나다가 그가 제일 필요로 하는 그림은 15세기 이탈리아 수사 프라 안젤리코의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라는 결론을 내린다. 미술관의 정돈됨과 정적, 전시된 작품들로 부터도 그랬겠지만, 이 작품으로부터 상실과 고통에 대한 치유를 경험한 것으로 보인다. 그만의 에피파니다.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 프라 안젤리코, 1420~1423경, 이탈리아, 메트로폴리탄미술관 43.98.5


너무도 고통스럽지만 이 그림이 톰을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 좋다. 예수의 몸은 태풍에 요동치는 배의 돛대에 못 박힌 것처럼 보인다. 그를 중심으로 나머지 세상이 흔들리며 돌아가고 있는 듯하다. 우아하면서도 부서진 몸은 뻔한 사실을 다시 상기시킨다. 우리가 다시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는 것, 고통의 속의 용기는 아름답다는 것, 상실은 사랑과 탄식을 자극한다는 사실 말이다. 그림의 이런 부분은 성스러운 기능을 수행해서 우리가 이미 밀접하게 알고 있으면서도 불가해한 것에 가닿게 해준다.(13장)”

 

삶은 작가의 10년처럼 신비로움과 숭고함으로 숨막히는 정적 속으로 들어가 침잠하는 때도 있고 복잡한 세상 속에 섞여 무리를 이루는 때도 있다.

작가는 메트의 유니폼을 벗고 세상으로 나아가며 말한다.

우리는 삶을 살아가야 하고, 삶은 우리를 내버려두지 않는다.”

 

다 읽고 난 후에도, 이 책에서 언급한 작품들의 리스트와 취득 번호를 올려준 친절함 덕에 메트로폴리탄 홈페이지(metmuseum.org)search창에 입력해서 작품 감상을 했다.

혹시 나중에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관람을 하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다시 읽어 볼 것이다.

책을 닫으면서 원서를 주문하기로 마음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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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괭 2024-02-08 08: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정말 번역서 제목이 별로네요. 저는 전에 이 책 제목 보고 다양한 직업을 보여주는 시리즈 중 하나인가 했는데;; 제목 바꿔라 ㅠㅠ

그레이스 2024-02-08 09:23   좋아요 2 | URL
ㅎㅎ
전에 아버지의 해방일지도 영업부에서 제안한 제목이었다고 들었습니다.
두 책 다 베스트셀러!
제 생각이 편협한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했습니다.

페넬로페 2024-02-08 11:3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영업 전략일 수 있지만 제목으로 다양한 독자를 끌어들이는 것도 나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물론 책의 내용이 좋아야 하겠지만요. 가야 할 곳이 또 하나 생겼네요. 언젠가는 고고~~

그레이스 2024-02-08 11:49   좋아요 2 | URL
예~
언젠가는 고고!

페크pek0501 2024-02-13 17:0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실제로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관람의 기회를 갖는 것도 좋지만,
원서를 주문하신 것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레이스 2024-02-13 17:51   좋아요 1 | URL
페이퍼백이 3월21일 나온대요^^;;
예약 장바구니에 있습니다^^

단발머리 2024-02-24 10: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밀리의 서재 이용 중인데 거기에서도 이 책 많이 광고하더라구요. 제가 베셀에 약한데 ㅋㅋㅋㅋㅋ 미술은 워낙 문외한이라 그냥 받아만 두고 시작은 안 했는데, 우아.... 너무 기대됩니다. 얼른 읽어봐야겠어요.
원서 구입도, 메트 홈페이지 검색도, 실제 관람도 모두 다 제가 따라하고 싶은 항목입니다!!!

그레이스 2024-02-24 13:43   좋아요 0 | URL
^^
저도 제 딸아이 전자책으로 읽었어요.
이 글 올릴때 습관대로 종이책으로 올렸는데, 나중에 알고 고치려고 하니까 수정은 안되더라구요.
전자책으로 읽어도 전혀 무리가 없어요.
딸 아이가 메트에 가고 싶다고 하네요.^^ 저도....!^^

고양이라디오 2024-03-13 17: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런닝하면서 전자책 음성지원으로 들었는데 느낌이 안 오더라고요ㅎ 그림과 함께 감상해야 되는 책 같습니다. 다음에 종이책으로 재도전해봐야겠네요^^

그레이스 2024-03-13 17:24   좋아요 0 | URL
음성으로는 느낌이 안 올듯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