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담 보바리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00
귀스타브 플로베르 지음, 김남주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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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스타브 플로베르의『마담 보바리(문학동네/김남주 옮김)』는 친구이자 시인인 ‘루이 부이예에게’라는 짧은 헌사를 남기는데 그에 앞서 마리앙투안쥘 세나르에게 표하는 감사를 따로 덧붙힌다. 출간에 앞서 문학잡지에 연재 당시 종교 모독과 풍기문란을 야기할 가능성으로 결국 기소되었지만 세나르의 변론으로 무죄판결을 받았기에 1857년 『마담 보바리』의 초판에 세나르에 대한 글이 담긴다. 영어권 작가 125명에게 가장 좋아하는 최고의 문학작품 10권을 물은 결과 1위 안나 카레니나에 이어 2위에 올랐으며 1857년 보들레르의 <악의 꽃>과 함께 '현대(modern)'를 연 소설로(영어권작가들이 뽑은 최고의 문학작품) 역자 해설의 시작 역시 찬탄을 불러일으킨다. ‘소설이라는 문학 장르가 자리잡은 이후 가장 많이 읽히고 가장 높은 평가를 받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소설, 단 하나의 단어도 다른 단어로 대체할 수 없다는 일물일어설을 낳은 절대 작품.’(p.501) 여기서 끝이 아니고 계속 이어진다. 운명의 소설, 실패의 소설, 기다림의 소설, 환멸의 소설이라는 별칭(방미경, 2003)을 가졌으며 출간 이후 ‘무려 백육십여 년 동안 전 세계에서 줄곧 현역으로 읽히고 있는 이 소설’(p.502)의 힘은 말 그대로 ’힘을 다해‘ 이해해야 할 것 같다.

『마담 보바리』는 총 3부로 소설의 도입부라 할 수 있는 1부는 샤를 보바리가 전학해 온 학창시절과 가정의 분위기, 공의가 되고 아내가 죽은 후 환자의 딸이었던 에마를 만나 결혼하고 사 년간 머물며 자리가 잡히기 시작한 토트를 에마의 성화로 떠나게 되기까지다. 샤를에게는 내키지 않았던 이사의 직접적 원인은 보비에사르에 있는 당데르빌리에 후작 집에 초대받았던 데 있다. 사랑에 관한 책들에 빠져 보냈던 열 다섯 살, 책 속 인물과 그들의 삶을 지금 자신의 현실과 비교했을 때의 괴리에 “맙소사! 내가 도대체 왜 결혼을 했을까?”(p.70)라며 ‘만일’을 곱씹고 보태던 시기에 이루어진 초대는 그녀에게 잊을 수 없는 사건이 되고 그날의 인상은 촘촘히 각인된다.

보바리 부부의 새로운 거주지는 용빌라베다. ‘노르망디, 피카드리, 일드프랑스 세 지역이 맞닿아 있는 이곳은 풍경에 별 특징이 없듯 사람들의 말투에서도 두드러진 억양을 찾아볼 수 없는, 이른바 잡탕 지역이다.’(p.106) 그 중에서도 눈에 띄는 곳은 오메 씨의 약국으로 약제사 오메는 마지막까지 샤를과는 정 반대의 인생곡선을 그린다. 에마에게 공증인 사무소의 서기 레옹 뒤퓌는 남편 샤를과 달리 대화가 통하고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이다. 레옹과 함께 있던 에마는 우연히 눈길이 닿은 남편이 ‘짜증’스럽다. ‘그녀의 눈에 프록코트로 감싼 그 등이 진부하기 짝이 없는 그의 성격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듯 보였다.’(p.148) 법률 공부를 위해 레옹은 파리로 떠나고 ‘보비에사르성에서 돌아온 후 얼마간 머릿속에서 카드리유가 맴돌았던 것처럼 그녀는 침울한 애수, 어딘가 마비된 듯한 절망에 휩싸였다. 레옹의 모습이 실제보다 더 크고 더 멋있고 더 감미롭고 더 모호하게 눈앞에 떠올랐다.’(p.178) 에마는 상념에 빠져든다.

약제사 오메의 예상대로 올해의 농업박람회는 용빌에서 개최되었다. 로돌프 불랑제의 눈에 ‘그 여자가 예뻐 보였’(p.187)고 그는 그녀를 유혹할 계획과 ‘나중에 떼어낼’ 생각을 동시에 챙기지만 그의 구애에 에마는 소녀 시절 꿈꾸었던 책 속 여주인공들의 삶이 자신에게 비로소 실현되었다고 여긴다. ‘이제 그녀 자신이 명실상부하게 그런 상상의 일부가 되었고, 그토록 부러워했던 사랑에 빠진 여자 역할과 자신을 동일시할 수 있게 됨으로써 젊은 시절의 오랜 몽상을 실현한 셈이었다.’(p.232) 에마는 샤를의 외반족 수술 실패 이후 남편에 대한 혐오를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중략) 그라는 인간 전체, 요컨대 그의 존재 자체가 그녀에게 짜증을 불러일으켰다.’’그러자 샤를이 곧 죽을 사람, 그녀의 눈앞에서 임종의 고통을 당하는 사람인 양 그렇게 그녀의 삶으로부터 떨어져나간, 영영 없어져버린, 존재한다고 볼 수 없는 허상으로 여겨졌다.‘(p.264) 에마는 자신에게 허락된 가정이라는 테두리에 분노를 터뜨린다. 하지만 에마의 집착이 커질수록 로돌프는 발을 뺀다. 분노와 상실로 인한 신경증의 발작 이후 샤를의 정성으로 겨우 회복된 에마는 레옹과의 우연한 만남으로 새로운 정열에 자신을 맡긴다. 이미 상인 뢰뢰는 그녀의 틈과 약점을 간파하고 있다. ‘아! 걸려들었군.’(p.270) 뢰뢰의 사악한 덫은 에마를 죽음으로 몰고 일 년 후 샤를에게, 그리고 어린 베르트만 남을 때까지 일가 내의 죽음은 계속된다.

『마담 보바리』는 ‘눈앞의 현실이 아니라 꿈꾸는 환상을 살고자 하고 스스로를 있는 그대로의 자신과 다르게 생각하는 보바리슴’(p.504)이라는 용어를 만들어냈다. 실화를 바탕으로 했으며 생생하게 펼쳐지는 사건과 인물들에게 때론 감정을 이입하게, 때론 묻게 됨에도 줄거리 자체는 단순하게 요약이 가능하다. 과연 작가는 인물들의 서사에 집중했을까 생각할 때 존 업다이크의 “『마담 보바리』는 한 시대를 나타내는 기차역이다. 고풍스러운데다 꽃까지 만발해 있지만 강철로 만들어져 단단하기 그지없다.”는 평은 해답을 간직한다. 꽃과 강철이라는 극단의 상징처럼 작가는 세차게 몰아치는 감정에 속수무책으로 자신을 내맡겼던 아름다움을 가차없는 비극으로 완결함으로 독자로 하여금 잠시 넋을 잃게 한다. 그리고 에마같은, 샤를같은 나아가 오메나 로돌프, 뢰뢰같은 자들의 존재를 헤아려보게 된다. 의외로 그들은 특별하지 않기에, 다분히 보편적이기에 더 씁쓸하다.

논픽션의 대가 존 맥피 역시 플로베르의 글쓰기에 대해 언급한다.“나는 사전에서 모르는 단어보다 아는 단어를 찾는 데 월등히 많은 시간을-적어도 99대 1의 비율로-쏟는다.(중략) 나는 이를 ‘일물일어를 찾는 탐색’이라고 부른다. 귀스타브 플로베르가 날이면 날마다 자기 집 안뜰을 걸어다니며 가장 적확한 단어 하나를 찾아 머릿속을 뒤졌다는 이야기를 8학년 때 바살러뮤 선생님한테 들었기 때문이다. 누가 이 이야기를 잊을 수 있겠는가? 플로베르는 영웅과도 같았다.”(p.265/네 번째 원고/존 맥피/글항아리) 역자는 ‘스스로를 극한까지 몰아가는 철두철미한 글쓰기’(p.502)라고 말한다. 겉과 속을 모두 그려내는 문학에서의 그림(p.505), 진짜 교향곡으로 보일 것이라며 수정을 거듭했다는 장면들(p.515)까지 아마도 완독 횟수가 늘어갈수록 작품은 달리 보일 것이다. 하지만 농업 박람회의 시상식 장면에서 호명되는 수상자와 로돌프의 구애가 교차하는 서술기법은 생동감이 넘치고 입체적이며 독특했다. 재독을 하지 않더라도, 예민하지 못한 감각을 지닌 필자조차도 그 장면은 인상 깊으니 말이다. 이런 문장은 어떤가. ‘하지만 아무리 충만한 마음이라도 때로는 고작 공허한 비유로나 표현될 뿐이다. 어느 누구도 자신의 욕망이나 관념, 고통의 정도를 결코 적확하게 표현할 수 없을뿐더러 사람의 말이란 금간 냄비와도 같아서 별을 감동시키고자 하지만 곰을 춤추게 하는 가락을 내는 데 그치고 말기 때문이다.’(p.273) 대안은 이런 문장을 암기하는 것일까.

시점의 자유로운 이동 역시 내내 반복되면서 독자의 감상을 풍성하게 한다. 인물의 단정적인 목소리가 아니라 대변하는 무언가를 통해 좀 더 잘 이해하게, 실제적으로 느끼도록 돕는다. ‘층층기법’에 대한 역자의 설명은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을 상기하게 했으며 작가의 치밀한 시도들이 다시 읽어야 할 충분한 이유를 만든다. 에마의 고단한 삶은 무엇에 기인하는가, 에마와 샤를은 함께 할 수 없는 사람들이었을까, 에마의 중독과도 같은 맹목적 선택과 행동은 비단 그녀만의 한계일까 생각하게 된다. “내게 아름답게 보이는 것, 내가 쓰고 싶은 것은 아무것에도 떠받쳐지지 않은 채 공중에 떠 있는 지구처럼 외부적으로 전혀 묶인 데 없이 문체의 내적인 힘으로 저 혼자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한 권의 책입니다. 가능하다면 주제랄 것이 거의 없는, 아니 적어도 주제가 거의 눈에 띄지 않는 책 말입니다. 가장 아름다운 작품은 그 재료가 거의 눈에 띄지 않는 책입니다. 표현이 생각한 바에 가까워질수록, 언어가 사고와 하나가 되어 사라져버릴수록 작품은 더 아름다워집니다.”(p.516) 플로베르의 문학이『마담 보바리』전후로 완전히 달라졌다(김계선,2017)고 하듯 이를 분명하게 성취한 작품이었고 문학사 전체에 미치는 영향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것 같다. 역자 해설의 ‘플로베르 론’을 읽고 난 독자는 아마도 당장 다시 읽고 싶어질지도 모른다. 도스토옙스키 탄생 200주년임은 알았지만 플로베르 탄생 200주년은 후에 알게 되었다. 지금,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00번으로『마담 보바리』를 만날 수 있어 다행이다.

책 속에서>

하지만 그녀는 마음속 깊이 어떤 사건을 기다리고 있었다. 조난당한 뱃사람처럼, 삶의 고독 위로 절망적인 눈길을 던지면서 저멀리 수평선의 안개 속에서 하얀 돛을 단 배가 다가오지 않는지 살폈다. 그 우연이 어떤 것일지, 어떤 바람이 그 배를 그녀 자신에게까지 밀어붙일지, 그 배가 그녀를 어느 기슭으로 데려갈지, 조각배일지 삼중 갑판이 딸린 선박일지, 뱃전까지 기쁨이 가득차 있을지 고뇌가 가득차 있을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매일 아침 잠에서 깨면 그녀는 바로 그날 그 일이 일어나기를 바랐고 들리는 모든 소리에 귀를 기울였으며 소스라쳐 자리에서 일어났다가 그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에 놀라곤 했다. 그리고 해가 질 무렵에는 언제나 더욱더 서글퍼져서는 어서 빨리 다음날이 왔으면 하고 바랐다.(p.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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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량한 차별주의자
김지혜 지음 / 창비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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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량한 차별주의자(창비/2019)』는 차별의 사각지대에 놓인 이들을 직접 찾아가는 현장활동가이자, 국내의 열악한 혐오·차별 문제의 이론적 토대를 구축하는 데 전념해온 연구자(출판사 소개 인용) 김지혜 교수의 첫 책이다. 프롤로그에서 저자는 제목이기도 한 ‘선량한 차별주의자’를 ‘스스로 선량한 시민일 뿐 차별을 하지 않는다고 믿는’(p.11) 사람들 이라고 정리한다. 저자는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차별을 인식하지 못하는 이 기묘한 현상’과 더불어 ‘차별을 당하는 사람은 있는데 차별을 한다는 사람은 잘 보이지 않’(p.7)고 ‘모욕을 한 사람은 없고 모욕을 당한 사람만 있’(p.9)는 불일치 또는 모순에 초점을 맞춘다. 문헌을 찾고 사례를 모으고 목소리를 듣고 질문한다. 그 질문이 독자에게 닿고 새로운 시각을 알아차리게 되는 과정이『선량한 차별주의자』를 읽는 내내 반복된다.

책은 총 3부 10장으로 선량한 차별주의자의 탄생, 차별은 어떻게 지워지는가, 차별에 대응하는 우리들의 자세까지 차별의 기원, 과정, 기대와 전망의 형식을 취한다. 저자는 사회에 이슈를 던졌던 비극적 사건들을 비롯해 반목하고 갈등하게 했던 일들을 다양한 사례로 내어놓고 분석하고 정의 내리고 설명한다. ‘소수자 때문에 다수자가 차별받는다는 –다수자 차별론-은 어떻게 가능할까?’(p.22) 저자는 명목상의 차별시정정책인 토크니즘이 평등이 달성되었다는 착시를 일으킨다고 말한다. ‘많은 사람들이 부지불식간에 기울어진 공정성을 추구한다.’(p.37)는 말에 반대하기는 어렵다. ‘평등을 이루려는 시도들’이 어떤 이들에게는 역차별로 보이고 충돌은 여전한데 뚜렷한 해법은 요원한 현실을 지적한다. 호모 카테고리쿠스, 범주화하려는 인간의 경향과 스테레오타입 또는 고정관념을 의미하는 단순화된 정보의 집합체를 설명한다. 또한 단순화 과정에서 생기는 오류인 일부 특징에 대한 과잉 일반화, 즉 편견(p.45)과 부정적 고정관념인 ‘낙인’까지 저자는 기존의 연구자료와 데이터를 소개하면서 독자의 이해를 환기한다. 1부의 결말을 마음아픈 ‘인형 실험’과 세기의 판결을 통해 ‘그래서 의심이 필요하다.’, ‘모든 일이 그러하듯 평등도 저절로 오지 않는다.’(p.79)고 맺는다.

2부, ‘차별은 어떻게 지워지는가’의 첫 장은 ‘웃자고 한 말에 죽자고 덤비는 이유’로 시작한다. 금기의 빗장이 약자를 향해 풀렸을 때 잔혹한 놀이가 시작된다(p.89)는 점, 그 잔혹성은 발신자와 수신자 사이의 엄청난 간극에서 온다는 사실(p.90), 비하성 표현의 문제가 단어 교체로 해결될 수 없는 이유, ‘둘 다 잘못’이라는 양비론이 해답을 가져올 수 없는 이유, 능력주의 관점의 오류와 한계 등 귀 기울일 때 독자는 스쳐지나갔던 순간들을 선명히 떠올리게 된다. 3부, ‘차별에 대응하는 자세’에서 저자는 “결국 ‘다르다’는 말은 ‘서로 다르다’는 상대적인 의미가 아니라 절대적으로 고정된 특정 집단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차이’가 낙인과 억압의 기제로 생성되는 것이다.”(p.184)고 지적한다. ‘다름은 틀림이 아니다’라는 구호 역시 이 ‘다름’이 주류 집단의 기준에서 ‘일탈’된 무언가를 지칭하고 있다면 그 자체로 ‘틀림’을 전제하는 형용모순(p.184)이라고 밝힌다. 나아가 내가 모르고 한 차별에 대해 ‘그럴 의도가 아니었다’는 방어보다는 ‘미처 생각지 못했다’는 성찰의 계기로 삼자고 제안하고 있다.(p.189)

에필로그에서 저자는 “소속되기 위해 ‘완벽한’사람이 되려 노력하거나 그런 사람인 척 가장하는 대신, 모두가 있는 그대로 어울리는 사람으로 환영받는 세상을 상상하자고 이야기하고 싶었다.”(p.209)고 밝힌다.『선량한 차별주의자』에 마음을 열고, 때로 추임새를 넣으며, 때론 안타까움을 느끼며 읽어낸 독자라면 저자의 제안에 충분히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부록으로 장 별로 구분된 각주와 참고문헌의 분량을 보면서 저자의 진심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책에 담긴 사례와 예시, 이론과 문헌 등이 어떻게 독자에게 닿게 되었는지 감사한 마음도 들었다. 물론 다 읽은 후 ‘그래서 결론은? 성찰의 계기가 되자는 것이 다인가?’ 아쉬울 수도 있다. 하지만 사회학자의 문제 제기는 훌륭했고 이제 정치와 경제에서 구체적인 해결책들이 변화에 속도를 더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우리는 생각을 멈추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익숙한 틀과 관점을 지속하는 것 또한 거두어야 할테다. 다시 생각하고 취하고 변화해갈 그 끝에 더 나은 삶과 희망이 가능하리라는 믿음을 가지려 한다. 여전히 ‘차별’은 예민한 키워드이고 뜨거운 감자다. 김지혜의『선량한 차별주의자』는 이해하기 쉽고 친절한 안내서로 일독을 권한다.

책 속에서>

모두에게 표현의 자유가 있다고 말하지만, 실제로 다수자와 소수자의 자유는 같지 않다. 존 스튜어트 밀이『자유론』에서 지적하듯, 다수자는 소수자의 의견을 거침없이 공격할 수 있다. 반면 소수자는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표현을 순화하고, 상대방에게 불필요한 자극을 주지 않도록 극도로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도록 요구된다. 다수자는 소수자의 이야기를 듣지 않으면서 잘 말하라고 요구한다. 그렇게 사실상 침묵을 강요한다.(p.1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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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도날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14
서머싯 몸 지음, 안진환 옮김 / 민음사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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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머싯 몸의『면도날(민음사/안진환 옮김)』은 『인간의 굴레에서(1915)』,『달과 6펜스(1919)』와 함께 그의 3대 장편소설 중 하나로 1944년 출간한 그의 마지막 장편이기도 하다. 그는 91세까지 사는 동안 장편소설 20편, 희곡 25편, 여행기와 평론집 11편, 단편소설 100편을 완성해 “정력의 작가”라는 별명을 얻었으며(출판사 인용) 데뷔작의 성공은 전공했던 의학이 아닌 자신이 원했던 문학을 선택하고 몰입할 수 있는 기반이 된다.『면도날』은 동시대를 살았던 시어도어 드라이저로부터 ‘숭고한 작품, 가장 순수한 사고가 만들어 낸 보물‘이라는 찬사를 받았으며 당대는 물론 현재까지 ’대중의 열광적인 사랑‘을 받고 있는 작가의 만년작이다.

“면도칼의 날카로운 칼날을 넘어서기는 어렵나니, 그러므로 현자가 이르노니, 구원으로 가는 길 역시 어려우니라.-카타 우파니샤드” 제사(題詞)는 한 템포 머무르게 하는 책의 제목『면도날』이 ‘면도칼’ 자체의 날카로움에서 나아가 칼날의 위험까지 다뤄지겠다 예상케 한다. 소설은 1차 세계대전 직후와 1929년의 대공황을 거쳐 1930년대까지를 시간적 배경으로 여러 인물들의 갈등과 선택, 관계와 살아내기를 흥미진진하게 그린다. “지금껏 이렇게 염려스러운 마음으로 소설을 시작해 본 적이 없다.”(p.9) 첫 문장에서 독자는 화자의 목소리에 집중하게 되고 문장이 더해질수록 그 강도 역시 커진다. 작가 자신이 본인의 이름으로 등장해 말을 건네기 때문이다. 작가의 이야기를 육성으로 들으며 그의 해석도 엿볼 수 있다는 이중, 삼중의 즐거움을 마다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소설의 화자는 ‘사람을 만날 때 사회적 신분 말고는 아무것도 관심이 없’(19)는, 가까워질 지언정 우정으로 발전하지는 않을 엘리엇 템플턴을 먼저 소개한다. 엘리엇을 수식하는 많은 말들, 친절하고 잘 베풀고 유쾌한 독설가이며, 신자로서 세속인으로서 모두 성공적인··· 등등 중에서도 ‘성공적인’은 두드러진다. 속물근성을 배제할 수 없으나 성공적인, 파티장인이기도하면서 성공적인, 하느님과의 선약 때문에 파티 초대에 응할 수 없다는 답신을 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또 편지로 이어서 자기 의사를 확실히 하고 마는 그가 원하는 삶을 ‘성공적으로’ 살아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무슨 말씀입니까? 나는 평생토록 사교계에 몸담고 살았습니다. 세상을 떠난다고 예의까지 잊어선 안 되지요.”(p.396)

엘리엇으로부터 시작된 관계의 그물망 속 주요 인물들은 자기만의 생기와 서사를 독자에게 드러낸다. 여동생이 살고 있는 시카고에서 화자와 재회한 엘리엇은 조카 이사벨과 그의 약혼자 래리를 소개한다. 종전 후 돌아왔지만 조종사로 있던 항공대에서 가장 친한 친구가 자신의 목숨을 구하려다 죽음을 맞은 사건은 래리를 결코 이전의 그로 돌아가지 못하게 한다. 이사벨에게 관계의 유예를 구하고 아무도 모르는 파리로 가서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치열하게 답을 구한 후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하지만 이 약속은 지켜지지 않는다.『면도날』은 청년 래리가 삶과 죽음, 진리는 무엇인지 정신과 육체로 깨달아 알고자 하는 구도의 여정을 보여준다. “(중략)이미 해 보고 싶은 만큼 했잖아. 이제 함께 미국으로 돌아가자.” “안 돼, 그럴 수 없어, 이사벨. 그건 내게 죽음과도 같아. 내 영혼에 대한 배신이야.”(p.126) 거칠 것 없이 자유로운 행보가 가능한 이유는 래리의 마음 자체가 그 무엇에도 묶이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래리에게 이사벨의 현실적인 논리와 상식이 접점을 취하기는 불가능해보인다.

래리와 이사벨만을 두고 봤을 때 래리는『달과 6펜스』의 달을, 이사벨은 6펜스를 다시 한 번 재현한다. 래리의 행보는 스트릭랜드와 닮아 있다. 스트릭랜드가 자신이 그려내야 할 그림 이외에 다른 것은 아무래도 좋았듯 래리 역시 진리를 찾아가는 길에 주저라고는 없다. 흔들림 없는 평안을 유지할 수 있는 이유일 것이다. 헤세의 인물들, 골드문트나 크눌프가 연상되기도 한다. 작품 속 인물들은 모두 나름의 선택을 하고 댓가를 지불한다. “세련된 세계의 한가운데 있는 기분은 정말 황홀했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삶이었다.”(p.102) 래리의 누추한 공간을 회상하며 몸서리치던 이사벨은 아마도 다른 세계에 속하고 강화되어간다.

“래리가 ‘정말’ 너를 사랑했을까?”(p.278) 화자는 어려움에 처하거나 고통스러운 청춘들에게 좋은 청자이자 상담자, 지지자가 되어 주지만 때론 날카롭게 각성을 요구한다. 열정은 무언가를 파괴하지 않으면 소멸해 버린다는 화자의 ‘열정론’은 그들의 관계를 정직하게 바라보도록 한다. 이사벨에게 소피의 죽음을 전하는 장면에서도 마찬가지다. 소설은 시종일관 재미와 가독성을 놓치지 않는다. 눈앞에 그려질 듯한 구체적인 묘사는 오감을 즐겁게 하고 반짝이는 물질의 세계, 미국과 유럽의 30년대 거리와 골목을 누비게 할 뿐 아니라 먼 동굴과 산에 오르게 한다. 풍성한 대화문은 때론 긴장하게도 숨은 의미를 숙고하게도 만들고 인물들과 독자의 심정적 거리는 더 좁혀진다. 화자가 작가이기에, 그리고 또 하나의 ‘구도의 서’이니 만큼 중요한 작품, 예술품들의 인용도 시선을 붙잡고, 비참하고 고통스런 순간들, 비극으로 마감하는 인생, 퇴장하는 캐릭터 역시 자기만의 인장을 또렷이 남긴다.

하지만 p.421부터 이어지는, ‘하느님이 왜?’ 논조로 시작되는 래리의 진리 탐구사는 다소 장황해 보이기도 했다. 결국 지금껏 무엇에도 굴함 없이 산뜻함을 유지했던 래리는 결론 마저 깔끔히 내리고 경쾌하게 발을 뗀다.『면도날』은 중요한 질문을 던지고 독자에게도 답을 요청하는 작품이다. 영상으로 봐도 흥미로울 것 같고 몸이 인기 작가일 수 밖에 없겠다 싶은 문장의 유려함과 여유로운 유머도 만끽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앞서 읽은『달과 6펜스』, 『인생의 베일』에 비해 아쉽다는 생각은 지울 수 없다. 아마도 래리의 미소, 밝고 침착한 분위기를 스트릭랜드나 월터가 겪어낸 고뇌의 묵직함 곁에 놓고 부지불식간에 견주기 때문인듯하다. ‘그 세계’에 입성하기 위한 초대장, 어떤 세계를 선택할 것인지, 어쩌면 선택은 불가능한 것 아닌지 생각해본다.


책 속에서>

난 단지 자기 확신이 얼마나 강력한 열정이 될 수 있는지 알려 주고 싶었을 뿐이야. 정욕도, 굶주림도 그 옆에서는 아주 하찮은 것이 되어 버리지. 자기 확신에 사로잡히면 그것으로 자신의 성격을 완전히 단정 짓게 되고, 그로 인해 스스로를 파멸로 몰고 갈 수도 있어. 그 확신의 대상은 중요하지 않아.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일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것일 수도 있지. 어쨌든 그것은 그 어떤 술보다도 중독성이 강하고, 그 어떤 사랑보다도 사람을 지치게 만들고, 또 그 어떤 악덕보다도 강력하고 매혹적이다.(p.348)









난 단지 자기 확신이 얼마나 강력한 열정이 될 수 있는지 알려 주고 싶었을 뿐이야. 정욕도, 굶주림도 그 옆에서는 아주 하찮은 것이 되어 버리지. 자기 확신에 사로잡히면 그것으로 자신의 성격을 완전히 단정 짓게 되고, 그로 인해 스스로를 파멸로 몰고 갈 수도 있어. 그 확신의 대상은 중요하지 않아.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일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것일 수도 있지. 어쨌든 그것은 그 어떤 술보다도 중독성이 강하고, 그 어떤 사랑보다도 사람을 지치게 만들고, 또 그 어떤 악덕보다도 강력하고 매혹적이다.(p.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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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은 밤
최은영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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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은 밤(문학동네.2021)』은 2013년 등단한 최은영의 첫 장편소설로 얼마 전 2021서점의 날 ‘서점인이 뽑은 올해의 책’ 소설 부문에 이름을 올렸다. 책을 내면서 작가는 ‘지난 이 년이 성인이 된 이후 보낸 가장 어려운 시간이었다. 그 시간의 절반 동안은 글을 쓰지 못했고 나머지 시간 동안 『밝은 밤』을 썼다.’고 ‘작가의 말’에서 밝힌다. ‘이 소설을 쓰는 일’이 ‘다시 내 몸을 얻고, 내 마음을 얻어 한 사람이 되어가는 과정’이었다는 고백은 희령으로 내려와 천천히 회복되던 주인공 지연의 날들을 상상하게 했다. 책장을 넘길수록 희령이라는 지명은 어느덧 넉넉한 품을 지닌 치유와 수용의 땅으로 공간을 내어준다.

지연은 10살 때 처음 갔던 희령을 ‘여름 냄새’와 ‘할머니’로 기억하고 있다. “다시 희령에 내려가던 날, 서른두 살의 나는 자동차 뒷좌석에 살림살이를 가득 싣고 고속도로를 달렸다.”(p.10) 천문대 연구원 합격 소식을 듣고 두 번째 희령으로 향하던 시기, 지연은 이혼 후 한 달이 지났지만 여전히 ‘잠을 이어 자지 못하던 때’였다. 나아져야 한다는 의지도 결심도 분명했지만 자신할 수 없음을 알고 있던 어느 날, 20여년 만에 우연히 할머니와 재회하고 이 만남은 과거의 시간과 인물들을 불러내고 현재에 숨을 불어넣는 중요한 순간이 된다.

할머니는 삼천이라고 불렸던 자신의 엄마 이야기를 한다. 백정의 딸이었고 아픈 홀어머니와 둘이 지냈고 호기심과 장난기 가득한 눈을 가진 삼천이는 일본군에게 끌려갈 것이 자명하던 때 증조부와 함께 개성으로 향한다. 반대하는 부모를 저버린 그의 선택이 신앙과 결단, 끌림으로 인한 자유의지였음에도 삼천이와 남편의 관계가 돌연 변하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남편은 나의 고통에 관심이 없어. 그녀는 생각했다. 일말의 관심조차 없어. 그런데 왜 그랬을까. 왜 내가 군인들에게 잡혀가는 것을 바라보고만 있을 수 없다고 말했던 걸까. 그것이 그녀 평생의 의문이었다.”(p.60) 허영심과 충동은 억울함과 울화, 죄책감과 노여움으로 바뀐 채 부정적 감정들은 오롯이 딸에게까지 전이된다. 딸, 바로 지연의 할머니는 다시 자신의 어머니 삼천이처럼 아픈 만남과 결혼과 상실에 노출된다.

할머니가 보여준 한 장의 사진 속에서 삼천이, 즉 지연의 증조할머니는 새비 아주머니와 함께다. 새비 아저씨와 새비 아주머니는 친구 같으면서도 서로를 귀하게 여겼던 부부였고 새비 아저씨는 특히 ‘해 같은 사람’(p.111)으로 아이의 눈에 비쳤던, 할머니의 아버지와는 꽤 다른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도 원폭증의 피해자로 무참히 떠나고 할머니는 “그래도 네가 내 이야기를 들어주니까, 새비 아저씨는 그만큼 더 사는 거잖아.”(p.81)라고 위안한다. 지연으로써는 동의하기 어려운 말이다. 소설은 부당하게 아내와 가족에게 상처를 주고, 반복은 일상이 되어 감각을 마비시키는 사람들, 지연의 전 남편처럼 ‘시간은 흘러가는 강물이 아니라 얼어붙은 강물이라는 말을 즐겨’(p.173)하며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는 등 궤변과 합리화로 일관하는 상황, 사과하지 않는 자들의 면면을 비춘다. “눈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세상에는 진심으로 사과받지 못한 사람들의 나라가 있을 것이다.”(p.252)

하나의 상처는 연쇄반응처럼 두 번째, 세 번째 소통의 기회를 차단한다.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스스로를 속였다는 것을, 마음속 경고를 무시했다는 것을, 대가를 지불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전한다. “그냥 피하면 돼. 그게 지혜로운 거야.”(p.278)라고. 그럼에도 소설은 보석 같은 삶의 선물을 잊지 않는다. 너랑 있는 이 시간이 아깝다는 삼천의 말에 새비 아주머니는 답한다. “아깝다고 생각하면 마음 아프게 되지 않갔어. 기냥 충분하다구, 충분하다구 생각하구 살면 안 되갔어? 기냥 너랑 내가 서로 동무가 된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해주면 안 되갔어?- 난 삼천이 너레 아깝다 아쉽다 생각하며 마음 아프기를 바라디않아.”(p.258) 모든 아픔을 상쇄시킬만한 진심은 서로에게 버팀목으로 단단히 선다. 나아가 다른 농담(濃淡)을 지닌 변주가 영옥과 희자와 명숙 할머니, 미선과 명희, 지연과 지우에게서 모습을 드러낸다.

소설은 할머니의 이야기를 통해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며 희령에 내려와 있는 지연부터 증조모까지 4대에 걸친 인물을 소환한다. 타임머신을 탄듯한 시간 여행이 무척이나 자연스럽고 생생해서 한껏 침잠해 그들의 동선을 따르게 된다. 할머니는 이야기 속에서 난산 끝에 태어난 아기의 모습으로 돌아가 다시 성장하고 아프고 기쁜 순간들을 독자와 공유한다. 보호받고 사랑받지 못했던 유년은 학교에서조차 표적이 된 채 스스로 ‘생존 방법’을 터득케한다. 이는 그대로 체화되어 자신을 성찰할 여유, 내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선택할 여지를 빼앗는다. 외부에서 들리던 ‘나를 몰아세우던 목소리’는 이제 나의 내면에서 들려오고 화해하는 법을 알지 못한 채 내 속의 어른 아이는 자라지 못한다.

우리는 본 마음과는 다른 말을 하곤 한다. 의도할 때도 있고, 멈추지 못할 때, 무의식적으로 내뱉을 때 그 말이 입 밖으로 나오는 순간을 슬로 비디오로 감지한다. 때론 그 순간이 후회와 자책, 두려움이나 새로운 매듭, 힘으로 풀기 어려울 것 같은 굵은 매듭으로 고정된다. 그리고 말의 작동을 숨죽여 확인한다. 어떤 파장을 일으키고 어떻게 실현되는지. 소설은 심리의 예민한 움직임과 떨림을 세심히 전달함으로 객관화하게끔 돕는다. 여러 장면에서 갈등과 대립의 굴레가 반복되지만 후반으로 가면서 보이는 관계의 회복 가능성은 마음을 쓸어내리게 한다. 작가는 소중해서, 또는 버리지 못해서 간직했던 색바랜 편지와 오래된 사진을 꺼내오게 하고 심호흡을 하며 펴보도록 이끈다. 편지와 사진이라는, 존재하면서도 존재하지 않는, 시간을 빗긴 이중의 구조물은 작품의 틀을 견고히 하고 독자 자신의 서랍 또한 열어보게 만든다.

엄혹한 시대, 여성이 감당해야 했던 수많은 가시철조망들을 보며 지금은 달라졌다 안도하기에 지연의 독백은 귓전을 울린다. “나는 누구에게 거짓말을 했나. 나에게, 내 인생에게.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알고 싶지 않아서, 느끼고 싶지 않아서. 어둠은 거기에 있었다.”(p.299) 긴 호흡으로 인생의 굴곡을 감당한 여러 인물들을 조망하는 시간이 파노라마처럼 흐른다. 상처 따위 아랑곳 없이 “그래, 그게 우리 엄마야.”(p.116), ‘기게 새비야.(p.287)라며 전폭적인 신뢰와 지지를 보여주는 장면은 감동적이고 그 뜨거움이야말로 고통 앞에 허허 웃으며 기꺼이 살아나가게 하는 근원이 된다. 시원의 파도가 치는 해빙의 땅 희령에서 온전히 치유받고 출발하는 마음을 엿본다. 잊어서는 안 될 것만 같은 문장들이 빼곡한 작품, ‘관계’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고 결국 새로 고침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더 이상 어둡지만은 않은 “밝은 밤”이다.

마음이라는 것이 꺼내볼 수 있는 몸속 장기라면, 가끔 가슴에 손을 넣어 꺼내서 따뜻한 물로 씻어주고 싶었다. 깨끗하게 씻어서 수건으로 물기를 닦고 해가 잘 들고 바람이 잘 통하는 곳에 널어놓고 싶었다. 그러는 동안 나는 마음이 없는 사람으로 살고, 마음이 햇볕에 잘 마르면 부드럽고 좋은 향기가 나ᅟᅳᆫ 마음을 다시 가슴에 넣고 새롭게 시작할 수 있겠지. 가끔은 그런 상상을 하곤 했다.(p.14)

하지만 할머니는 그날 그 자리에서 불안을 느꼈다. 경계하지 않을 때, 긴장하지 않을 때, 아무 일도 없으리라고 생각할 때, 비관적인 생각에서 자유로울 때, 어떤 순간을 즐길 때 다시 어려운 일이 닥치리라는 불안이었다. 당장이라도 무슨 일이 터질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전전긍긍할 때는별다른 일이 없다가도 조금이라도 안심하면 뒤통수를 치는 것이 삶이라고 할머니는 생각했다. 불행은 그런 환경을 좋아하는 것 같았다. 겨우 한숨 돌렸을 때, 이제는 좀 살아볼 만한가보다 생각할 때.(p.199)

나는 머릿속에 동그라미 하나를 그리고 그 안에 평범이라는 단어를 적었다. 다른 사람들과 다르지 않은 삶, 두드러지지 않은 삶, 눈에 띄지 않는 삶, 그래서 어떤 이야깃거리도 되지 않고, 평가나 단죄를 받지 않고 따돌림을 당하지 않아도 되는 삶. 그 동그라미가 아무리 좁고 괴롭더라도 그곳에서 벗어나서는 안 된다는 것이 엄마의 믿음이었는지도 모르겠다고, 나는 잠든 엄마의 숨소리를 들으며 생각했다.(p.271)

내레 몰랐다고 생각했더래? 우리 새비, 사람들이 자기 걱정하고 동정하는 거 죽는 것만큼 싫어하는 간나야. 기게 새비야. 새비가 지 마음대로, 지 살고 싶은 대로 나머지를 산다는데 내레 뭐라고······아무렇지 않은 척 대하는 게 새비가 바라는 기라면 내레 아무리 힘들어도 그럴 수 있었다.(p.287)

나는 그와의 결혼으로 내가 지닌 문제와 내가 가진 가능성으로부터 동시에 도망치고자 했다. 나의 원가족으로부터, 해결하기 어려워보이는 상처로부터, 상처받을 가능성으로부터. 그리고 무엇보다도 진정한 사랑으로부터 멀어지고 싶었다. 사람을 진심으로 깊이 사랑하고 가슴이 찢기는 고통을 경험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 감정적인 가능성으로부터 차단된 채로 미지근한 관계 속에서 안전하게 살아가고 싶었다.(p.2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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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자에게
김금희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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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자에게(문학동네/2020)』는 2009년 등단해 단편소설부터 중편, 장편 그리고 산문집까지 꾸준히 발표하고 있는 김금희 작가의 두 번째 장편이다. 작가 인터뷰에서 “작가님은 집필 머신인가요?”라는 질문을 받을 정도로 왕성히 활동하고 있는 김금희의 최신작이기에 동시대를 살고 있는 독자에게 전하는 음성이 더 반가울 수 밖에 없다. 김금희는 이 작품으로 올해 1월 동인문학상 심사위원회에서 지난해 하반기(8~10월) 출간작 20여편 중 2021년 본심의 첫번째 후보 작가 네 명에 포함되었다.(조선일보기사20210108) 소설은 작가가 2018년 제주의 한 섬에서 머물렀던 기억과 한 의료원에서 일어난 산재사건 및 그 소송을 모티프로 했음을 밝힌다.(p.240)

이영초롱은 가죽 도매상을 했던 부모의 부도로 보건소 의사인 고모가 있는 섬으로 전학을 가게 된다. 제주에서 다시 배를 타고 들어가야 하는 고고리섬, ‘이삭’이라는 뜻의 제주어이며 봄의 청보리밭이 유명한 섬에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지내게 된 열 세살 영초롱은 떨어져 지내게 된 동생 영웅을 위로한 후 생각한다. “이제 나는 슬픔에 대해 완전히 아는 사람이 되었으니까. 슬픔은 차갑고 마음을 얼얼하게 하는, 아이스크림 같은 것이었다. 그러니 지금 그만한 선택이 없었다.”(p.17) 아이스크림을 사러 가는 길에 만난 아이의 이름은 고복자다. 섬에서 태어나고 자란 복자와 지낸 2년동안 섬의 풍광과 섬 사람들의 말, 그들의 삶을 보게 된다.

회상과 현실이 교차하며 동창이었던 고오세를 비롯해 과거의 인물들이 등장한다. ‘잘 못 알려준 주소’처럼 대수롭지 않아 기억조차 흐릿했던 일이 온전한 배경을 드러내면서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를 대면시킨다. 이는 과거 함께 지냈던 고모의 타자기를 두드리던 밤들과 남자 아이를 동반하고 친척들의 눈총을 받는 현재를 연결시킨다. ‘복자를 통해서만 섬의 대부분의 것들을 받아들’(p.80)였던 영초롱은 배관일을 하던 임공을 이선 고모집에서 본 적 없다 해주기로 한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그 날 이후, 약속을 저버린 채 자신의 생각과 판단, 선택과 행동을 고수했던 날 이후 용서와 화해 없이 떠남으로 유년의 아픈 기억이 된다. 고모의 전동타자기로 쓴 복자의 편지들, 복자에게.로 시작하는 편지들은 부쳐지지 않고 모두 폐기된다.

“하지만 타인의 삶 속으로 들어가야 하는 자가 필연적으로 짊어진게 되는 무게와 끊임없이 유동하는 내면의 갈등과 번민은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익숙해지지 않았다.”(p.110) 부치지 못했던 편지의 대상인 복자와의 재회가 두 친구의 새로운 현재로 펼쳐진다. 다른 아픔을 간직한 피해자 복자와 그녀를 돕겠다는 판사로서 서로를 지켜보고 마음을 들여다 볼 때 영초롱은 조금씩 깨닫는다. 자신이 복자를 ‘원고와 피고 같은 프레임 속에서 각자의 역할을 해야 하는 이들을 일면적으로 읽듯 복자를 읽으려고 했’(p.135)음을, 이는 숙부들이 고모에게 으레 갖다 붙이는 말처럼 ‘삶을 한정’(p.148)시키는 것과도 어쩌면 유사하다는 것을.

『복자에게』는 앙골아주(안 가르쳐줘) 이영초롱이 이해하고 화해하고 수용하는 과정을 그리는 성장의 이야기다. 또한 관계와 연대의 이야기다. 이국적 정취와 아픔을 두루 간직한 제주와 고고리섬이라는 공간적 배경은 글로써 그곳의 풍광과 바람까지 독자에게 보내준다. 영초롱을 통해 판사라는 직업의 세계를 잠시 엿볼 수 있었던 점도 즐거웠다. “선배들을 무릎 꺽이게 하는 일이 대단한 신념이 아니라 겨울이면 불려가서 해야 하는 수백 포기의 김장이나, 일거리를 싸들고 가서라도 그 자리에 반드시 있어야 하는 갖가지 집안 행사라는 현실”(p.175)에 물질하는 해녀들의 숨길이 겹치기도 했다.

경쾌하고 위트 넘치는 김금희 표 문장을 읽는 즐거움도 빼놓을 수 없다. 동시에, 표면에 머무르지 않고 깊이 통찰하는 문장들, 단언하는 글로 포착해내서 익숙하지만 무형이었던 것에 형태를 부여함으로 사전처럼 의지하게 만드는 문장들은 별에 별을 그리게 했다. 프랑스에서 볼테르의『관용론』을 읽는 영초롱도 상징적이고 특히 마지막 펜데믹의 현재는 박수 받아 마땅한 생존자인 모두를 향한 응원이자 격려같다.『복자에게』는 장면 사이사이 틈이 넓어 독자의 얼굴을 슬쩍 끼워넣고 자신을 반추하게 만든다. 성장과 희망의 여정에 동참하고 싶은 모두에게 권한다.

나는 제주, 하면 일하는 여자들의 세상으로 읽힌다. 울고 설운 일이 있는 여자들이 뚜벅뚜벅 걸어들어가는 무한대의 바다가 있는 세상. 그렇게 매번 세상의 시원을 만졌다가 고개를 들고 물밖으로 나와 깊은 숨을 쉬는 사람들이다. 그러니 다 잘되지 않겠니?(p.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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