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전달자 블루픽션 (비룡소 청소년 문학선) 20
로이스 로리 지음, 장은수 옮김 / 비룡소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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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소설보다 더한 현실을 견디는 챌린지와 같은 요즘이다. 폭우에 떨었고, 지나고 나니 햇볕이 사정 봐주지 않는다. 폭염과 어려운 여건에 떠나는 세계스카우트잼버리 소식이나 불특정 다수를 향한 위협도 두려움을 안긴다. 일정 시기로 특정됐던 진로 고민도 과거의 이야기다. 몇 번이고 다시, 무한 다시, 길을 찾는 여정이다. 그와 다르게 주어진 규칙만 어기지 않으면 문제해결을 보장하고 나아가 문제 자체를 원천 봉쇄하는 사회라면 어떨까. 로이스 로리의 『기억 전달자(The Giver, 장은수 옮김, 비룡소, 2007, 1993, 310쪽 분량)』는 설계된 이상향의 위험을 비판하는 디스토피아 소설로 작가의 SF 4부작 중 첫 번째 작품이다. 영문학을 전공한 작가는 자전적 이야기인 <그 여름의 끝>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으며 <별을 헤아리며>로 첫 뉴베리 상(1989년)을 수상했다. 이후 <기억 전달자>로 두 번째 뉴베리 상과 보스톤 글로브 혼 북 아너 상을 받는다. <기억 전달자>, <파랑 채집가>, <메신저>, <태양의 아들>이 청소년 SF소설 4부작을 이룬다. 『기억 전달자』는 2014년 필립 노이스 감독이 영화화(《더 기버: 기억전달자》)했다. 두 번째 펴는 책은 수년 전 연필 밑줄이 먼저 인사를 건넨다.

주인공 소년 조너스는 미래 사회의 어느 마을에 살고 있다. 조너스는 걱정을 안고 참석한 열두 살 직위받기 기념식에서 직위를 받지 못한다. 대신 다음 번 기억 보유자로 선택된다. 기억 보유자를 위한 새로운 규칙들은 지금까지 지켜온 항목들과 전혀 달랐다. 기억 전달자는 과거의 많은 세대를 뛰어넘어 그 기억을 현재로 끌어당기고 선출된 새 기억보유자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기억은 통제 이전, 즉 “늘 같음 상태” 이전의 세상을 알려준다. 위원회가 “늘 같음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차이를 없애고 통제할 대상을 정할 때 포기해야 할 목록은 저절로 늘어났다. 눈이나 썰매, 햇볕과 색깔을 이미 알지 못하는 세계다. 날씨와 인구, 본능과 감정을 비롯해 배우자와 직위 선택도 통제 대상이다. 사람들이 자기 직위를 스스로 선택한다면, 하고 조너스가 가정하자 기억전달자는 끔찍한 일이 벌어질 것이라고 답한다. 기억 전달자는 불편함은 회피하고 단지 필요한 조언을 구하는 원로들을 대신해 혼자 고통을 감당한다. 기억 보유자가 존경받는 이유이기도 한 조건에서 조너스는 부조리함을 발견한다. 조작된 사회에서 드러나지 않게 이루어지는 비인간적 행위들도 알게 되자 조너스는 다른 선택을 한다.

소설은 조너스가 기억보유자로 선택받기 전에 당연시했던 삶과 이후 새롭게 통찰하게 된 세상을 대조적으로 보여준다. 인구 증가는 기아문제를 낳고 전쟁의 원인이 되어 설계된 사회를 선택하게 했다. <멋진 신세계>에서 9년 전쟁 후 “세계를 통제하느냐 아니면 파괴하느냐 양자택일”에서 “안정”을 선택한 것과 유사하다. 이와 같은 사회에서 우선하는 가치는 안전과 효율이지만 이면에는 극단적 행위를 감추고 있다. 담당자는 사회의 구성원이라기보다는 부속품에 가까워져서 마치 컨베이어 벨트의 일부처럼 임무 해제에 임한다. 소설은 “늘 같음 상태”를 유지하기 위한 제한과 감시를 구체적으로 묘사함으로 생생함을 더한다. 정해놓은 기준을 수정하기 어려운 시스템, 변화를 원하지 않는 원로들, 기억은 지혜를 주지만 지혜보다는 조절 가능성을 염두에 두는 위원회 등 소설은 다양한 문제의식을 보여준다. 또한 책이 금지된 사회에서 마을을 원활하게 돌아가게 하는 중요한 조건, 가장 중요한 근간이 언어의 정확성이라는 아이러니는 가장 인상 깊었다. <멋진 신세계>에서는 책들에 대한 탄압과 함께 셰익스피어를 감췄다. 독자는 조너스의 선택이 이끄는 결말에 안도하지만 동시에 다음 장면을 원한다. 시리즈의 두 번째 작품이 필요하다. 색깔과 음악, 기억이나 고독, 사랑 등 추상어가 연이어 등장함에도 마치 영상처럼 독자를 이끌어가기에 한 호흡으로 집중할 수 있다. 또 다른 선택지로 P. 크레이그 러셀이 작업한 그래픽 노블을 소장하지 않을 수 없겠다. 토론을 위한 재독인데 더 소중한 작품이 되었다. 사물 너머 보고 듣기, 한계를 넘기 위한 패달 밟기는 멈추지 않아야 할 것이다. 청소년은 물론 연령에 관계없이 선택해야 할 책이다.

책 속에서>

“모든 게 바뀔 거야, 가브리엘. 모든 게 달라질 거야.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는 나도 몰라. 하지만 모든 게 달라질 수 있는 어떤 방법이 있는 게 틀림없어. 색깔들도 있게 될 거야.”(p.219)

늘 하던 대로 언어의 정확성에 대해 생각하던 조너스는 이 행복감이 자기가 느껴 본 적이 있는 것들과는 차원이 다른, 전혀 새로운 깊이의 느낌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쨌든 이 느낌은 매일 저녁, 모든 기초 가정에서, 모든 마을 사람들이 한없는 토론을 거쳐서 분석해 내는 느낌들과는 전혀 같지 않았다.(p.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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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킬 박사와 하이드씨 일러스트와 함께 읽는 세계명작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지음, 강미경 옮김, 마우로 카시올리 그림 / 문학동네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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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영제국이라 불렸던 빅토리아 시대의 영국은 번영과 부를 누리며 최고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하지만 해가 지지 않는 나라의 야망은 식민지에 다른 얼굴을 보였고, 산업화로 인한 발전 이면에는 빈부 격차가 더해갔다. 모순과 불안이 커질 때 마치 안개에 에워싸인 형국으로 길을 찾기는 어려웠다. 유사한 갈등과 이중성은 한 인간 내면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의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마우로 카시올리 그림, 강미경 옮김, 문학동네, 2009, 1886, 148쪽 분량)』는 인간의 본성인 선과 악을 두 개의 인격으로 분리해 고찰한 보고서를 연상케 한다.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Dr Jekyll and Mr Hyde)』의 원제는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의 이상한 사건>(Strange Case of Dr Jekyll and Mr Hyde)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축약한 제목으로 더 알려져 있다. 소설은 여러 출판사에서 다양한 판본으로 나와 있으며 극적인 서사를 중심으로 축약한 아동용 도서부터 완역까지 선택의 폭이 넓고 제목 역시 다르다.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프랭크 와일드혼이 작곡한 뮤지컬 <지킬 앤 하이드(Jekyll and Hyde)>는 국내에서 더 환영받는 작품으로 자리매김했다. 그러나 지킬과 하이드를 제외한 서사와 인물에서 거의 공통점을 찾기 어려운 새로운 작품이다. 루이스 스티븐슨은 영국의 소설가이자 시인으로 어려서부터 병약했으나 모험과 여행을 좋아했다. 그는 가족과 함께 결핵 치료를 위해 갔던 스위스 다보스에서 《보물섬》 집필에 몰두하고 1883년에 출간되자마자 명성을 얻는다. 《물방앗간의 윌》, 《마카임》 등의 소품, 소설 《납치》,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 그리고 《팔레사의 해변》 《썰물》과 같은 여행기를 발표했다.

어터슨 변호사는 먼 친척 리처드 엔필드와 산책 중 기이한 사연을 듣는다. 엔필드는 캄캄한 겨울밤 한 남자가 자신과 마주친 소녀를 폭행했던 순간을 잊지 못한다. 그는 하이드라는 자가 내뿜었던 기형의 느낌, 특이하고 생생하지만 설명할 수 없다는 점도 이상히 여긴다. 어터슨은 지킬 박사의 유언장에 적힌 이름, 베일에 싸인 지킬의 후원자이며 절친한 의사인 레니언 박사조차 알지 못하는 하이드를 찾아내기로 한다. “그자가 숨는 자라면 나는 찾는 자가 될 테다.”(p.26)라고 말하며.

어터슨은 하이드로부터 친구인 지킬 박사를 보호하기 위해 단서를 모으고 조언을 구하고 연이은 사건에 주목한다. 지킬 박사도 본래의 자신으로 돌아온 듯 친구를 맞고 선행을 베풀며 그들을 안심시킨다. 그러나 지킬은 다시 자기만의 방으로 들어가겠다 선언하고 절친했던 래니언 박사도 돌연 죽음을 맞는다. 사건의 전모는 박사의 방에서 발견한 두 통의 편지, 래니언과 지킬이 남긴 편지로 확인하게 된다.

“헨리 지킬의 최후 진술”은 인간 내면에 존재하는 이중성을 인정하고 과학의 힘을 빌어 둘을 분리하려 시도했던 여정과 심정을 고백한다. 말끔하게 드러난 모습이 감춘 위선과 자기 안의 젊잖지 못한 본능, 둘의 모순에 시달리던 중 발견한 탈출구는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이 된다. 지킬의 자백은 통렬한 회고록이자 솔직한 심리묘사로 주인공의 갈등을 지금 우리에게 묻는 질문으로 바꾸어 놓는다. 화자인 어터슨의 시선으로 지킬과 하이드를 쫒을 때 독자는 빠르고 흡인력 있는 전개에 긴장을 놓지 못한다.

여러 선택지 중에서 일러스트와 함께 읽는 세계문학으로 묶인 문학동네의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는 단연 눈길을 끈다. 아르헨티나 삽화가 마우로 카시올리는 그림을 배경이 아닌 전면에 부각시킨다. 하이드 씨의 외모 묘사는 악의 전형화라는 점에서 중요한데 문장의 나열을 한 장의 그림으로 시각화한다. 또한 이 소설의 매력이라면 아름다운 묘사를 빼놓을 수 없다. 특히 “안개”의 다양한 함의는 근사하다. 바람과 안개, 빛과 안개, 불안을 증폭시키기도 흉함을 가려주기도 하는 안개의 여러 변용, 포도주에서 안개까지 이어지는 서술은 몇 번이고 다시 읽고 싶어진다. 시도가 정도를 넘을 때 실험약은 마취제가 된다. 한 세기가 지난 소설은 여전히 안개 걷히지 않은 시간, 불안한 오늘, 내면의 투쟁을 비춘다.

이때가 오전 아홉시경으로 계절 들어 첫 안개가 자욱이 끼어 있었다. 초콜릿빛 안개가 하늘에 낮게 드리운 가운데 바람이 이 수증기의 장막을 사방에서 쉴 새 없이 공격하며 흩뜨리고 있었다. 마차가 이 거리 저 거리를 기어가듯 느릿느릿 지날 때마다 어터슨은 어스름한 빛이 시시각각 농담을 달리하며 기기묘묘하게 바뀌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이쪽은 땅거미가 내려앉기 시작한 저녁 무렵처럼 어둑어둑했고, 또 저쪽은 마치 큰 화재라도 난 듯 짙은 갈색 빛으로 타올랐다. 그런가 하면 잠시 안개가 걷히면서 한 줄기 가느다란 햇살이 소용돌이치는 구름 사이로 삐죽 얼굴을 내민 곳도 있었다. 이처럼 시시각각 달라지는 희미한 빛 아래서 진창길과 단정치 못한 행색의 행인들, 그리고 한 번도 꺼진 적이 없거나 아니면 어둠의 이 음험한 재침략에 맞서 다시 켠 듯한 가로등을 비롯해 소호 지구가 그 음울한 모습을 드러냈다. 변호사는 마치 악몽에 나오는 도시의 한 구역을 보는 듯했다.(p.4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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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34
밀란 쿤데라 지음, 이재룡 옮김 / 민음사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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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작 읽기를 가늠해 보며 책을 읽던 중에 밀란 쿤데라 부고 소식이 들렸다. 바로 전까지 생존 작가였는데 다음 페이지를 넘길 차례에 작가는 더 이상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무게의 경중을 재기 이전에 먹먹하고, 지금까지 지체했던 게 아쉽다.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재룡 옮김/민음사/2009/1984/496쪽 분량)』은 계속해서 질문하는 작품이다. 인물의 입장을 빌어, 또 자신의 목소리로 물을 때 감추어 둔 정답은 없다. 조금 더 옳은 방향으로 향하도록 의지를 내게끔 독자를 안내하고 단련시킨다. 밀란 쿤데라(1929~2023)는 체코슬로바키아 출생으로 1968년 프라하의 봄에 참여 후 개혁이 좌절당하는 과정에서 해직과 저서 압수 등 입지가 좁아진다. 1975년에 대학의 교환교수 초청을 수용한 쿤데라는 프랑스로 망명해 <웃음과 망각의 책>을 쓰고 5년 후에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출간한다. 체코어로 쓰고 바로 프랑스어로 번역된 이 작품은 《타임》지에 의해 1980년대의 '소설 베스트10'에 선정되고 ‘20세기의 걸작’으로 평가받는다. 작가는 『생은 다른 곳에』, 『불멸』, 『이별』, 『느림』, 『정체성』, 『향수』 등의 작품을 출간하며 다수의 문학상을 받고 매해 노벨문학상 후보로 이름을 올렸으나 2023년 7월 생을 마감했다.

소설은 토마시, 테레자, 사비나, 프란츠 네 명의 인물을 중심으로, 여기에 테레자와 토마시의 개 카레닌까지 더해 사랑의 여러 빛깔을 보여준다. 사랑의 추구는 어떻게 살 것인가로 연결되기에 하루를 살아내는 태도와 일상의 선택들로 이야기는 채워진다. 개인의 사적인 영역은 개인의 문제도 아니고 사적 취향이 보장받지도 못한다. 성숙한 인격체인 인물들은 성숙 이전에 속했던 육신의 부모와 환경에 여전히 지배받는다. 원가족의 그림자는 새로 이룬 가정에도 어느새 그늘을 드리운다. 인격적 독립은 연령의 문제가 아니다. 테레자는 이미 여덟 살 때부터 사랑했던 남자의 손(p.97),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입장권인 토마시의 손을 놓지 못한다. 그녀의 어머니는 부조리한 만남의 열매인 테레자로부터 자기 파괴적 마라톤을 시작했다. 이런 어머니로부터 최대한 멀어지기 원했으나 어머니가 보여주는 일련의 행동은 “바로 테레자 자신”(p.83)임을 발견한다. 저메이카 킨케이드의 <루시>에서도 보였던 고통스러운, 한편으로는 보편적인 관계다. 테레자는 어린 시절부터 가족과 함께 했던 집을 사생활의 완전한 청산인 “집단수용소”(p.222)라 이름 붙였다. 역사는 훗날 그 비극을 실제 재현한다.

프란츠는 어머니로부터 “고통”이라는 감정을 배웠다. 아버지에게 버림받은 비극을 아들에게 감추었던 어머니를 프란츠는 현실과 회상을 불문하고 사랑했다. 프란츠에게 모든 덕목 중 으뜸은 “정조”(p.155)가 된다. 프란츠의 단정한 결혼생활은 어머니의 연장선에 있을 마리클로드에서 시작되어 ‘그녀는 어머니가 아니었다, 전혀.’로 요약할 수 있겠다. 그 사이에 사비나라는 사랑은 모범 인간 프란츠에게 또 하나의 세계로 들어서는 문이 되고 저절로 종교가 된다. 작가는 프란츠와 사비나 사이의 몰이해와 차이 일부를 정리한다. 사비나는 배신한다. 그러므로 그녀는 존재한다. 그녀는 왜 배신하는 인간이 되었을까. 두 아버지 덕분이었다. 청교도적이던 아버지. 즉, 줄로 재고 염려하고 강제하고 억압하던 아버지와 사랑과 피카소를 금지하던 가혹하고 완고한 ”공산주의“(p.156)라는 아버지. 아버지의 죽음은 회한을 부르고 자기 자신의 배신을 배신코자 하나 화해는 이미 불가능하다. 프란츠는 진리 속에서 살기 위해 사랑을 선언하지만 이 결심은 사비나를 떠나게 만든다. 묘지 산책이 습관이던 사비나는 죽음의 여러 모양 앞에서 자신의 죽음을 예비하고자 거듭 떠난다. 서쪽으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세상에 던져진 존재인 인간이 치르는 여러 형태의 전쟁을 기록한다. 이 전쟁은 개인사에서부터 사회 구성원으로 맺는 관계들, 남녀간의 사랑, 이익집단의 다양한 행태, 전쟁과 전쟁 후유증, 기록으로서의 역사, 기록되지 못한 역사, 역사의 반복을 비롯한 다양한 층위를 비춘다. 단독자인 자기 자신에게서 오롯이 시작하고 마무리되는 일은 찾아보기 어렵다. 아버지의 아버지로, 어머니의 어머니로 거슬러 올라가고, 자녀와의 관계도 소원함이나 의지와 별개로 생성, 변화한다. 우연과 필연을 넘나들면서, 선택은 계획에 어긋나면서, 강함은 약함을 증명하면서 생의 수레바퀴가 움직인다. 강함의 대변자는 어느 순간 연약한 얼굴을 노출한다. 자랑이었던 힘의 근원은 필요한 순간에 방패가 되지 못한다. 죽음은 일순간 느닷없이 다가오고 죽은자는 말이 없다. 남은자는 편의대로 죽음을 해석하고 비석의 문구도 그들 차지다.

소설은 니체의 영원회귀 사상을 여러 각도에서 탐색한다. 니체는 영원회귀의 사상을 가장 무거운 짐이라고 보았고 묵직함과 가벼움의 문제는 기원전 파르메니데스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세상이 반대되는 것의 쌍으로 양분되어 있다는 파르메니데스를 숙고할 때 “모든 모순 중에서 무거운 것-가벼운 것의 모순이 가장 신비롭고 가장 미묘”(p.13)하기에 화두로 삼는 여정이 이 소설이다. 작가는 고정된 시점 대신 순차적으로 화자를 등장시키고 시간 역시 순행과 역행을 교차한다. 등장인물의 목소리는 어느 순간 작가의 목소리로 자리를 바꾼다. 자신이 창조한 캐릭터를 친절하게 분석해 “어떤 시선을 받으며 살고 싶어 하는지에 따라”(p.439) 네 범주로 가를 때 온전히 수긍하며 독자는 자신이 어느 편에 나란히 설 건지 가늠하게 된다. 후반부 키치 이론에서는 작가의 주도하는 목소리를 경청할 수 있다. 또한 꿈으로 드러나는 상징들, 음악, 미술, 고전, 철학 등을 아우르며 상기시키는 장면, 아름다움, 선의, 욕망과 사랑, 절개선, 화폭을 찢는 칼로써의 질문 등 기존 의미에 더한 재해석을 보여준다. 무엇보다 “친구들 중 반은 이민을 갔고, 남었던 반은 죽었다. 그것은 어느 역사가도 기록하지 않을 사실이다. 소련 침공 이후의 세월은 매장의 시기였다.”(p.368)와 같이 1963년 민주화 시기였던 프라하의 봄과 소련 침공 이후 개혁이 중단된 체코 현실, 지식인들의 형편을 기록한다.

작품의 차례가 데칼코마니처럼 대칭으로 펼쳐진다는 점에 시선이 머문다. 3부, <이해받지 못한 말들>을 중심으로 2부와 4부는 <영혼과 육체>, 1부와 5부는 <가벼움과 무거움>이다. 6부 <대장정>을 거치면 대미인 7부 <카레닌의 미소>다. 작가는 왜 카레닌을 다시 불러냈을까. “그들이 지나온 십 년의 삶을 몸으로 구현하는 절름발이 개.”(p.476) 카레닌은 인간이 벌이는 경중의 시합, 이론의 첨예함, 근거의 축적, 빛나지만 위태로운 업적을 벗어나는 세계에서 숨쉰다. 테레자는 카레닌의 사랑이 어떠했는지, 어떻게 달랐는지, 더 나았는지, 이해관계가 없는 사랑의 실현을 생각하고 토마스는 그런 그녀를 사랑한다. 말의 목을 끌어안은 니체를 사랑하듯이. 독자는 순항보다는 역경이었던 사랑의 행로를 마무리하며 과연 토마시는 가벼움이었을지, 테레자는 무거움이었을지, 단언하지 못한다. 시작은 니체였다. 슬픔은 형식이었고, 행복이 내용이었다는 말과 함께 피아노와 바이올린 소리로 맺는 이 작품은 독자의 감각과 심정을 계속 붙든다. 쿤데라가 직접 그린 일러스트를 바탕으로 한 특별판 표지는 카레닌이다. 단지 카레닌을 보기 위해, 라는 이유만으로 한 권을 더 갖출만하다. 현란하지만 현학적이지 않으며 오히려 단순하게 종말로 착지한다. 그래서 시 같기도 음악 같기도, 생의 요약본 또는 해설, 압축한 상징 또는 만연체 해석으로도 치우침을 경계하며 매번 다르게 읽힐 작품이다.

책 속에서>

영원한 회귀란 신비로운 사상이고, 니체는 이것으로 많은 철학자를 곤경에 빠뜨렸다. 우리가 이미 겪었던 일이 어느 날 그대로 반복될 것이고 이 반복 또한 무한히 반복된다고 생각하면! 이 우스꽝스러운 신화가 뜻하는 것이 무엇일까?(p.9)

처음과 끝에서 열차 아래로 몸을 던지는 사람은 바로 안나다. 처음과 끝에 동일한 테마가 등장하는 이러한 대칭 구성은 대단히 ‘소설적’으로 보일 수도 있다. 물론 나도 인정한다. 하지만 한 가지 조건이 있다. 당신이 생각하는 소설적이라는 말이 ‘꾸며 낸’, ‘인공적인’, ‘삶과는 유사성이 없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조건에서다. 왜냐하면 인간의 삶이란 이런 식으로 구성되기 때문이다. 인간의 삶은 마치 악보처럼 구성된다. 미적 감각에 의해 인도된 인간은 우연한 사건(베토벤의 음악, 역에서의 죽음)을 인생의 악보에 각인될 하나의 테마로 변형한다. 그리고 작곡가가 소나타의 테마를 다루듯 그것을 반복하고, 변화시키고, 발전시킬 것이다. 그러나 역과 죽음의 테마, 사랑의 탄생과 결부되어 잊을 수 없는 이 테마가 그 음울한 아름다움으로 절망의 순간에 그녀를 사로잡았던 것이다.

인간은 가장 깊은 절망의 순간에서조차 무심결에 아름다움의 법칙에 따라 자신의 삶을 작곡한다. 따라서 소설이 신비로운 우연의 만남에 매료된다고 해서 비난할 수 없는 반면, 인간이 이러한 우연을 보지 못하고 그의 삶에서 미적 차원을 배제한다면 비난받아 마땅하다.(p.92~93)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니체가 바로 그런 니체이며, 마찬가지로 내가 사랑하는 테레자는 죽을병에 걸린 개의 머리를 무릎에 얹고 쓰다듬는 테레자다. 나는 나란히 선 두 사람의 모습을 본다. 이들 두 사람은 인류, ‘자연의 주인이자 소유자’가 행진을 계속하는 길로부터 벗어나 있다.(p.4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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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실격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03
다자이 오사무 지음, 김춘미 옮김 / 민음사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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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유명한 작품을 늦게 읽었다. 4년 전 처음 읽었을 때의 인상은 무척이나 생생하고 사실적이라 오히려 불편하다였다. 아프고 불편한 느낌. 객관적 대상으로 힘써 거리두기하며 읽은 듯하다. 재독하면서 비로소 그때보다는 훨씬 요조에게 감정이입할 수 있었다. 작가의 문장이 레고 쌓기 같아서 작은 브릭을 정교하게 누적할 때 인물은 입체적으로 살아난다. 그렇게 요조의 고민과 간절함, 두려움과 열망은 위치를 잡아간다. 떨면서 맞춰갔으나 잘못되었다고 알아차리는 순간에 돌이키고 싶다고 주춤하지만 주인공은 그 방법을 알 수 없다. 블록을 해체해 어느 열부터 재조립하면 환영받을 수 있을지, 차라리 강건하고 무감각한 보편 타당인으로 다시 태어나야 하는지 모두 가능성의 영역 밖이다. 캐릭터가 형체를 드러낼수록 무균실에 있을 영혼이 어떻게 세상을 감당하겠는가 하는 슬픔은 독자의 몫이 된다.

『인간 실격(김춘미 옮김, 민음사, 2004, 1948, 191쪽 분량)』은 다자이 오사무(본명 쓰시마 슈지)의 후기 작품이며 완결된 작품으로는 마지막 소설이다. 자전적 경험과 허구가 공존하는 『인간 실격』은 "작가가 처음으로 '타를 위해서'라는 자세에서 벗어나 자기 자신의 예술적 자서전을 시도한"(p.184) 작품이다. 가네기 시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난 다자이 오사무는 자신의 집안이 고리대금업으로 부자가 된 신흥 졸부라는 사실에 평생 부끄러움을 느꼈다. 또한 혜택 받은 자로서 못 가진 자에 대한 “죄의식 내지는 부채의식”(p.167)을 떨치지 못했다. 이런 죄의식은 천성적으로 섬세한 감수성과 만나 작가가 남다른 여정을 걷게 만든다. <다자이 오사무론>을 쓴 오쿠노 다케오는 『인간 실격』 서문을 읽고 "이 작가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깊은 고뇌에 찬 인생을 경험한, 통상적인 인생과는 완전히 다른 심각한 정신 생활을 영위한 인간임"(p.185)을 느꼈으며 그 확신으로 평론을 썼다고 밝힌다. 소설은 작가의 분신과도 같은 요조의 삶을 있는 그대로 해부한다.

소설은 ‘나’라는 화자가 전하는 서문과 후기, 주인공인 요조가 쓴 세 편의 수기로 구성된다. “나는 그 사나이의 사진을 석 장 본 적이 있다.”(p.9)는 첫 문장을 시작으로 유년의 요조, 고등학생에서 대학시절의 모습과 나이를 짐작하기 어려운 어느 시점의 사진에 대한 감상을 전한다. 미남이라는 말도 하지만 세 번 반복되는 “섬뜩하다”는 표현이 눈에 띤다. 섬뜩하고 기묘한 얼굴, 그러나 어쨌든 대단한 미남이라 볼 만한 얼굴이라니 <악령>의 주인공 스타브로긴의 아름답고 가면같은 얼굴이 겹쳐 보인다. 그러나 스타브로긴은 타인을 억압할 만큼 강하게 의지를 관철해갔지만 요조는 매사에 억압당할 만큼 여렸고 타인의 의중을 가늠하느라 진이 빠져갔다. 요조를 찍은 세 장의 사진은 어쩔 줄 모르며 타인을 살피던 영혼을 거쳐 영혼 탈락의 막다름을 담는다. 소설은 그 과정의 기록이다.

요조는 인간의 삶이라는 것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고 고백한다. 그의 믿음은 얼마 가지 않아서 깨어진다. 기차와 지하철, 배고픔의 정체가 그의 생각과 달랐을 때, 자신이 가진 행복이라는 개념과 다른 사람들의 개념이 다를지도 모른다는 자각은 불안을 가져온다. 참을 수 없는 불안에서 벗어나는 방법이 없을까, 그는 “익살”에서 구원을 찾으며 인간에 대한 최후의 구애라고 명명한다. 그의 익살은 필사적이 된다. 그는 비합법, 음지의 사람, 범인 의식(p.51)이 오히려 편하고 어느 날 무언가가 “되어 있”(p.55)다는 사실을 뒤늦게 발견한다. 그는 물에 떠내려가듯이, 거침없이 편하게 전진하는 사람들의 파도에 떠내려간다. 넙치가 쓰는 술책에, “이 세상 사람들의 불가사의한 허영과 체면 차리기”(p.78)에 절망한다. 그냥 이렇게 말해줬다면 됐던 건데 라고 혼자 고통받는다. 호리키의 냉랭하고 교활한 이기주의에 아연실색한다. 그는 “무구한 신뢰심은 죄인가?”(p.119)라고 묻는데 이어 “무저항은 죄입니까?”(p.131)라고 신에게 묻는다. 그가 인간의 세계에서 느끼는 단 한가지 진리는 “모든 것은 지나간다는 것” 뿐이다. 그가 인간세계와 연결되는 가느다란 실에 의지해 다다른 종점이다.

소설은 140페이지 남짓의 길지 않은 분량으로 한 인간의 마음의 행적을 정교하고 사실적으로 보여준다. 서술과 독백, 대화의 구성이나 줄 바꿈과 여백까지 요조의 감정으로 이끌어간다. 무대를 감상하는 기분도 든다. 한 인물의 무언극에서 그를 탈출시켜주고 싶을 수도 있다. 문장에서 다음 문장으로 연결할 때의 밀도는 주인공의 심리를 고스란히 새긴다. 독자는 한 순간 그가 된다. 요조는 과민하다. 그럴 수 있다. 요조는 박동과 박동 사이에도 그칠 줄 모르고 맥이 뛰는 민감한 심장을 가졌다. 누구의 잘못일지 정확히 지목할 수 없지만, 수기를 건네주던 마담처럼 아버지를 가리킬 수도 있겠지만 애초에 몸 둘 바 모르던 마음이었다. 마음이 몸 둘 바를 모르니 맥박 위에 맥박, 호흡 위에 호흡이 포개지거나 불시에 템포를 놓친다. 포즈.

태연할 수가 없어서 침착을 연기하게 되었다. 그러기 쉽다.(안 그랬다면 좋았겠지만.) 요조는 가엾다. 그런데 우리를 닮았다. 요조는 우습다. 역시 우리를 닮았다. 요조의 가면, 우리도 몇 개 가지고 있다. 요조, 피해! 그는 듣지 못하고, 요조, 저쪽으로! 그는 반대편으로 달린다. 합격은 경계선이 요동한다. 실격은 범람한다. 정밀한 합격의 바늘귀로 들어갈 만한 빼어나고 슬기로운 이력을 성공적으로 쌓고 있는 사람이라도 요조를 모른 척 할 수 없을 것이다. 호리키는 모른척했지만. 그들은 모두 모른 척 했지만, 지금 다시 책을 펴는 독자는 몇 번이라도 모른 척 할 수 없을 것이다. 인생 합격 고군분투기, 그러나 실패했다. 동시에 소망한다. 세상에 있는 또 다른 요조들이 모쪼록 평안하기를.

책 속에서>

어차피 들킬 게 뻔한데도 솔직하게 말하기가 무서워서 반드시 거기에 뭔가 꼬리를 다는 것이 저의 서글픈 버릇의 하나인데, 그것은 세상 사람들이 ‘거짓말쟁이’라고 부르며 멸시하는 성격과 비슷하지만 저는 무슨 득이라도 보려고 그런 꼬리를 단 적은 없습니다. 그저 흥이 깨지면서 분위기가 일변하는 것이 질식할 만큼 끔찍해서, 나중에 저한테 불이익이 되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예의 ‘필사적인 서비스’, 그것이 비록 잘못되고 시원찮고 우스꽝스러운 것이라 할지라도 그 서비스 정신에서 저도 모르게 한마디 덧붙이게 되는 경우가 많았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습성 또한 세상의 소위 ‘정직한 사람들’에게 이용당하게 되었던 것입니다.(p.82)

“아니, 이젠 필요 없어.”

정말 신기한 일이었습니다. 누가 무언가를 주었을 때 그것을 거절한 것은 제 생애에서 그때 단 한번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제 불행은 거절할 능력이 없는 자의 불행이었습니다. 권하는데 거절하면 상대방 마음에도 제 마음에도 영원히 치유할 길 없는 생생한 금이 갈 것 같은 공포에 위협당하고 있었던 것입니다.(p.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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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자도사 사회
송병기 지음 / 어크로스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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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가정이 90대인 모친과 80대 후반인 부모님을 매일 왕래하며 돌보고 있다. 그들이 겪는 어려움을 곁에서 보며 드는 생각은 남의 일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피할 수 없는, 곧 다가올 일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지, 얼마나 잘 대비하고 있는지, 최적의 매뉴얼은 있는지, 후회 없이 해낼 수 있을지, 질문은 계속되지만 정답은 없다. “대비”하지 못했다는 자책과 두려움이 아직은 전면에 드러나지 않았지만 겪으면서 배우기에는 늦다는 걸 안다. “대비”는 정보와 경제력에, 하나를 꼽자면 개인의 경제력에 더 큰 방점이 찍힌다.

송병기의 『각자도사 사회(어크로스, 2023, 264쪽 분량)』는 노화부터 죽음에 이르는 지난한 과정을 살펴봄으로 “존엄한 죽음”이 어려운 이유를 묻고 나아갈 방향을 모색한다. 저자는 인류학 중에서도 ‘인간의 질병과 돌봄, 의료체계를 각 문화마다 어떤 식으로 해석하고 이해하고 다루는지를 연구하는’(인터뷰 발췌) 의료 인류학자로 생애말기 돌봄을 연구하고 국내외 병원과 요양원 등에서 현장 연구를 수행했다. 각자도생, 즉 스스로 살 길을 찾듯이 죽음도 개별 과업, 개인의 문제라는 제목, “각자도사 사회”가 외롭고 비정한 울림을 준다.

서문에서 저자는 죽음과 삶이 대립되는 개념이 아님에도 현실에서 죽음은 삶을 위협하는 방식으로 나타난다고 말한다. “사람들은 ‘존엄한 죽음’보다 ‘깔끔한 죽음’을 원했다. 깔끔한 죽음을 존엄한 죽음이라고 여겼다.”(p.9) 저자는 현장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관찰하고 충실한 전달자 역할을 한다. 그는 “존엄하게 죽기 위해서는 존엄하게 살 수 있는 사회 안에 있어야 한다.”(p.10)며 관심을 촉구한다. 1부에서는 일곱 개의 주제로 죽음으로 가는 현주소가 어떤지 실상을 보여준다. ‘오디세이아’에 비유할 정도로 생의 말기 돌봄의 흐름은 집을 중심으로 떠났다가 회귀하는 양상이다. 생애 말기 돌봄의 형성 과정이 노동자와 돌봄 수혜자의 삶을 두루 취약하게 만드는 점에서 표면상 드러난 문제 이면에도 눈을 돌려야 한다. “존엄한 돌봄과 임종을 희망하는 사람은 돈이 많거나 운(가족운, 간병인운 등등)이 좋아야 한다.”(p.25)는 지적은 부정하고 싶은 현실이다.

“노인 돌봄”에서는 모든 인간은 의존적인데, 마치 노인만 의존적인 존재인 것처럼 딱지를 붙이는 현실을 짚는다. 노년이 불평등한 삶의 형태로 나타나는 세계에서 노화와 죽음은 공포의 대상이기에 비용을 지불하고 몸을 관리하고 각자 분투한다. 노인 돌봄 논의는 노인을 자유롭고 평등한 동료 시민으로 인정하는 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콧줄” 편에서는 일상적 의료행위로 자리잡은 비위관 삽입이 환자 상태와 삶의 질 향상 대신 수명만 연장하게 되는 경우 무의미한 연명의료가 될 수 있음을 지적한다. 원칙적으로 이를 배제하는 기관이 해답을 제공할까? 하지만 요양보소사의 도움으로 이루어지는 식사 시간은 ‘전쟁’이라고 표현하는 다른 형태의 소외가 자리한다. “말기 의료결정”은 어떻게 죽음을 맞이할 것인가에 대한 응답이 아니라 환자가 언제까지 살 수 있는지에 대한 합의를 도출하는 일로, 즉 죽음은 타이밍의 문제로 바뀐다.

2부에서는 죽음의 여러 얼굴을 살피고 존엄한 죽음에 대해 다시 묻는다. “제사”에서는 세 권의 소설로 상흔과 의식, 관습(p.153)으로 자리매김했던 명암과 시대 흐름에 따른 변화, 새로운 기대까지 여지를 남긴다. 웰빙에서 이제는 “웰다잉”이다. 우리는 웰다잉하기 위해서 젊을때의 시간을 활용하고 정보를 모으고 당연히 재정을 확보하고 건강도, 정신도 관리하는 등 노오력을 요구받는다. 이에 저자는 좋은 죽음은 좋은 사회에 대한 고민과 분리될 수 없으며 오히려 잘 죽는 것만 고민하면 될 만큼 좋은 삶을 살고 있는지 되묻는다. 마지막 장에 이르면 “영화관”을 영화를 보는 공공장소라는 일반적 개념을 넘어 “죽은 존재가 스크린 위에서 탄생하는 곳, 관객이 그 ‘죽음과 탄생’을 마주하는 곳”(p.238) 등으로 새롭게 명명한다.

책은 사회의 변화와 요구에 따라 제정된 법, 이를 근거로 시행되는 제도들이 어떻게 달라져왔고 여전히 불합리하거나 부조리한 걸림돌이 잠재되어 있는지를 살핀다. 다양한 사례를 제공하고 참조하므로 독자는 각각의 처지가 생생하게 와 닿는다. 어렴풋이 흩어지던 정보나 매체에서 접하던 갈등의 이면을 비로소 이해하게 되는 건 저자의 사명감에 가까운 수고 덕분이다. 생의 끝에 이르러 아름다운 인사를 남기고 싶은 인간적 소망이 다양한 입장에 포위당한 채 방치되거나 외면당하거나 여러 이유로 이루어지지 못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그럼에도 무엇이 문제인지 진단하고 생각하고 질문하는 일은 다른 미래를 위한 필요조건이자 기본값이다. 저자의 목소리를 따르면 다른 해결점에 도달하게 될지, 그렇다면 그때는 언제일지, 너무 늦어버리는 건 아닌지 여전히 불안하고 조심스럽다. 저자는 질문 끝에 제안하고 촉구하며 건의하고 추가한다. 적극적 상상을 요청한다.

열 세 꼭지의 암울한 정거장을 지나 마지막 역 “영화관”에 이르면 팍팍함은 뭉근해지고 암전은 공간 밖 빛을 불러들이려 한다. “영화관은 죽음을 통해서 희망을 비추는 장소다.”라는 마지막 문장은 현실 읽기, 눈 부릅뜨고 제대로 보기, 깨어서 성찰하기로부터 희망과 변화에 대한 기대를 품게 한다. 다소 추상적인 결말이 아쉬움으로 남을 수 있겠지만 저자는 현실을 뛰어넘는 가능성의 영역을 낙관한다. 태어난 이상 주사위는 던져졌다. 우리는 노화, 질병, 죽음으로 가는 기차에 올랐다. 또 하나의 주사위가 존엄한 죽음을 허용하기를 운을 비롯한 가능한 자원이 풍족하지는 않더라도 적절하기를 바란다. 인생이라는 달리는 기차에 오른 모두에게 필요하고 유익할 책이다.

책 속에서>

한국에서 ‘복지’라는 단어는 대개 ‘취약계층’을 염두에 둔다. 그 ‘상식’을 곰곰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보건 복지 정책이 겨냥하는 취약계층이란 무엇인가? 반대로, 취약계층을 대상으로 하는 보건복지 정책이란 무엇인가? 취약한 사람들의 계층 이동을 돕는다는 것인가? 혹은 ‘보통’ 사람들이 취약계층으로 이동하는 것을 막는 정책인가? 혹시 계층 간의 분리를 고착시키는 정책은 아닌가?(p.59)

오늘날 웰다잉의 유행은 그만큼 사람들이 잘 죽지 못하고 있다는 말이자, 죽음이 개인의 노력으로 대비해야 하는 일이 됐다는 방증이다. 마치 죽음이라는 불행을 막는 주술이 등장한 것 같다. 우리는 잘 죽는 것만 고민하면 될 정도로 좋은 삶을 살고 있는가? 그렇게 사는 건 불가능한 일이니 잘 죽는거라도 고민하는 것일까? 웰다잉은 우리에게 죽음에 관한 두툼한 언어와 상상력을 촉구한다.(p.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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