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틸라와 해골 네버랜드 Picture Books 세계의 걸작 그림책 302
존 클라센 글.그림, 서남희 옮김 / 시공주니어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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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클라센의 『오틸라와 해골(서남희 옮김, 시공주니어, 2023, The Skull, 112쪽 분량)』 은 도망치는 오틸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아마도 우연한 탈출은 아닌듯하다. 탈출이라는 게 우연히 이루어지기는 어려운 일이고, “모두가 잠든” 깊고 긴 밤이 배경이니 누구라도 깨어있다면 시도조차 어려울 수 있겠고, “마침내” 도망쳤다니 몇 번째 시도일지도 가늠케 할뿐더러 타이틀 표지가 나오기 전에 첫 문장이 먼저 나온 셈이니 얼마나 급박한 상황일지도 충분히 짐작할 일이다. 작가는 그 장면을 간략한 인증처럼 그려 넣었다. 책의 결말부에도 인장 같은 그림의 변주가 반복된다. 단지, 밤은 햇빛 받은 아침으로 바뀌었고, 도망은 산책으로 달라진다.

『오틸라와 해골』은 <유령과 도깨비 이야기(1969)>의 의도치 않은 패러디 그림책이라고 작가는 밝힌다. 자꾸 생각났던 이야기를 찾아보니 기억에서 꽤 빗겨있었고, 작가는 자신이 만들어 낸 원작의 변용을 작품화한다. 새로운 옷을 입는 고전은 언제나 매력적인데 무려 존 클라센의 손을 거쳤으니 정좌하고 펴볼 일이다. 존 클라센은 간결한 표현, 열린 결말, 절제된 색감을 특징으로 하는 캐나다 출신의 그림책 작가로 글 작가인 맥 바넷과 함께 여러 작품을 함께 작업했다. 《샘과 데이브가 땅을 팠어요》, 《늑대와 오리와 생쥐》를 비롯한 공동 작업을 발표하며 칼데콧상, 케이트 그린어웨이상 등을 수상했다.

숲속에서 자란 오틸라는 깊은 밤, 마침내 도망친다. 울타리 밖으로 쌓인 눈 위에 오틸라 발자국이 찍힌다. 이름 부르는 소리를 뒤로하고 멈추지 않고 달리던 아이 앞에 크고 오래된 집이 나타난다. 문을 열어준 이는 해골이다. 잠시 숨어갈 수 있게 해주는 조건은 몸이 없어 굴러다니는 자신을 데리고 다니겠다는 약속이다. 해골은 집을 구경시켜 주는데 벽난로 방에는 해골의 예전 모습 초상화가, 정원이 있는 방에는 배나무가 자란다. 벽에 가면들이 걸려있는 방, 지하 감옥과 탑에도 이른다. 아주 큰 무도장에서 둘은 가면을 쓰고 춤을 춘다. 묵어가기로 한 오틸다에게 해골은 한 가지 비밀을 전한다. 몸통만 있는 뼈다귀가 집에 찾아와서는 해골을 잡으러 쫓아온다고. 많이 느려진 해골은 뼈다귀에게 잡히기 싫다고 말한다. 오틸라는 곰곰이 생각한다.

『오틸라와 해골』은 텍스트와 이미지가 긴밀하게 조응하고 협력하고 상호 보완한다. 글로 한 번 읽고, 그림으로 설명을 듣는 효과를 내면서도 독자를 위한 여백 또한 충분하다. 평면에 얹힌 일러스트는 깊이를 드러내며 공간을 확보하는데 해골이 안내하는 방과 방, 복도와 계단을 따라갈 때 오래 갇혀있던 묵직한 공기와 고성의 서늘한 향, 소리의 울림을 체험하는 듯하다. 오틸라는 어떻게 해골을 도울 수 있었을까? 오틸라는 고통당하는 해골에게 구원자로 다가온다. 오틸라가 먼저 고통당하는 자였고, 연약했지만 무기력하지 않았고, 스스로를 구원하고자 행동했던 경험이 이를 가능케 했다. 소녀는 두려움을 감수하고 탈출하는 자였다. 땅바닥에 넘어지고, “눈과 어둠과 막막한 고요 속에” 엎드려 있다 울음을 터뜨렸을 뿐 아니라 “울음을 다 쏟아 낸” 다음에 “일어나 다시 앞으로 나아갔”던 일련의 고투는 오틸라에게 성장 과정이자 삶을 대하는 태도로 스며들었다.

아마도 그래서일 것이다. 오틸라는 해골에게 자신의 공로를 생색내며 드러내지 않고, 오히려 감추고, 그럼으로써 상대를 배려한다. 왼손이 한 일을 오른 손이 모르게 하라지만, 오른손 뿐 아니라 제 3의 손이 없는 걸 아쉬워할 때도 있는 소생은 부끄럽다. 앞으로 그들이 함께 맞이할 날들은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시간으로 쌓일 것이다. 두려움과 폭력의 굴레를 끊고 자유로운 선택으로 채워질 날들이다. 무엇인들 새롭지 않겠나. 다양한 메타포를 간직한 환상적인 이야기는 독자의 감각을 구체적으로 일깨운다. 우리들의 그날, 그때를 환기시킨다. 긴장과 사랑스러움이 교차하는 그림책이다. 후루룩 읽고, 천천히 읽고, 열 가지 방법으로 다시 읽고, 이야기 나누고 싶은 이 그림책을 추천한다. 역시 존 클라센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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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피아빛 초상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06
이사벨 아옌데 지음, 조영실 옮김 / 민음사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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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벨 아옌데의 『세피아빛 초상(조영실 옮김, 민음사, 2022, 2020, 452쪽 분량)』은 네루다의 시를 제사로 삼는다. “길만이 가족이라네”라는 마지막 연의 여운이 남아 있을 때 페이지를 넘기면 델 바예 일가의 가계도가 나온다. 어느 여정이 되었건 인간은 가족에게로 이끌리고, 가족은 인간에게 갈래길이자 관문 또는 허들을 제공한다. 스포가 될까 싶어 가계도를 스쳐 넘겼지만 얼핏 보아도 가르시아 마르께스의 <백년의 고독>의 부엔디아 집안 가계도와 견주어 간결하다. 저절로 안도가 된다. 『세피아빛 초상(2000)』은 <운명의 딸(1999)>, <영혼의 집(1982)>과 함께 아옌데 소설의 가장 걸작으로 평가받는 삼부작을 완성하는 소설이다. 아우로라의 자전적 기록은 <영혼의 집>의 클라라, <운명의 딸>의 엘리사까지 연결했을 때 4대에 걸친 서사를 완성한다. 이사벨 아옌데는 칠레 출신의 여성 언론인이자 소설가로, 페루 리마에서 태어났다. 현재 미국에서 활동하는 라틴아메리카의 대표적인 여성 작가로 가르시아 마르케스 이후 가장 뛰어난 작가로 인정받으며 마술적 사실주의의 계보도 잇는다.

침대를 주제로 한 글을 써두고 나서 읽기 시작한 작품인데 아니 왜, 여기에 막강한 침대가 등장하는 거다. 책은 “어마어마하게 큰 침대 사건”, 파울리나 델 바예의 침대로 인상적인 서막을 연다. 가난한 칠레 지주 집안 출생인 파울리나는 천부적인 사업 감각으로 손대는 것을 대부분 황금으로 바꾼다. 여성은 남성의 명성에 누가 되지 않아야 했던 시절, 침대는 남편 펠리시아노의 외도를 겨눈 복수전의 상징물이었지만 부부는 “불한당 패거리 같은 공범 관계”(p.25)로 확고하게 결합되어 있다. 파울리나는 조카 세베로 델 바예가 센프란시스코에 찾아 왔을 때 차이나 타운에서 유명한 엘리사 소머스의 찻집으로 데리고 간다. 그곳에서 우연히 본 린 소머스를 다시 만나기까지는 또 몇 년이 흐른다. 칠레 과두계층의 관습대로 결혼이 예정되어있던 사촌은 명석한 니베아 였지만, 이 결혼이 이루어지기까지 세베로는 감정과 육체의 불같은 담금질을 반복하게 된다. 살아있는게 기적인 상태에서도 생은 뜻밖의 선물을 그들에게 내어주고 아이라던가, 또 다른 아이라던가. 축복이라면 축복을 연거푸 허락한다.

엘리사 소머스와 타오 치엔의 사랑은 “얽히고설킨 장애물들에도 불구하고 섬세하게 짜인 달콤한 우정처럼”(p.71) 시작되었고, 굳건한 결속은 예기치 않는 이별이 찾아왔을 때 가장 환하게 빛난다. 타오 치엔은 차이나타운에서 착취당하는 소녀들을 구하려 시도하다 쓰러진다. 딸, 린을 잃었던 그는 손녀인 아우로라의 손을 놓지 않고 사라져간다. 다만, 결코 사라지지 않겠다, 계속해서 지키겠다는 약속을 남긴채다. 엘리사는 자기 내부에 있던 사랑의 능력이 영원히 빠져나가고 다시는 옛날의 자신이 되지 못함을 안다. 그녀는 “리밍, 너와 럭키 삼촌 그리고 럭키 삼촌의 아이들에게 애정을 느낀다.(중략) 그러나 사랑은 오직 타오에게서만 느낄 수 있단다. 그가 없으면 나에게는 더 이상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아. 하루를 살고 나면 그와 만나기 위해 기다릴 날이 또 하루 줄어드는 거야.”(p.426)라고 고백한다. 아우로라에게 고통을 주며 먼 기억으로 묻혀있던 비밀은 무의식의 베일이 걷히며 뒤늦게 돌아오는데, 이는 외할머니 엘리사 소머스의 귀환과 함께 이루어진다.

소설의 화자인 아우로라는 호기심과 의심, 탐색과 발견으로 자신의 성장사 뿐 아니라 가족사, 나아가 칠레 근대사를 기록한다. 아우로라에게는 특별한 조력자가 때에 맞게 등장하고, 인지하지 못하는 순간에도 도움을 감각하는데 이는 어린 시절 그녀에게 세상 전부였던 외할아버지 타오 치엔의 이미지다. 사진이라는 예술세계는 아우로라의 펜이 된다. 시력을 잃어가는 스승에게서 보는 법, 보아야할 것(기록할 대상을 선택하는 문제), 표현하고 담는 마음을 배운다. 사진은 아우로라에게 생의 가치를 실현하는 도구이자 거짓을 깨부수고 살아남을 수단인 부표로 작용한다. 사랑으로 축복받았던 그녀는 거짓 사랑에 유린당하지만 결국은 다시 당당히 사랑 앞에 선다. 이 사랑은 영속하지 않겠는가.

소설은 미국의 샌프란시스코와 칠레의 발파라이소를 배경으로 라틴 아메리카의 근대화 시기를 그려낸다. 작가는 미국에서의 인종간 대립과 멸시, 차이나타운의 성매매 사업과 숨은 폭력, 페루 등 주변국과 벌인 칠레의 오랜 전쟁, 불안정한 정치 판세의 변화, 여성 참정권을 위한 투쟁 등 다양한 갈래의 테마를 델 바예 일가를 중심으로 담는다. 명민한 여성들이 자신의 위치에서 이루어내는 최대치의 도전은 소설의 골격을 형성한다. 다채로운 이야기가 끝나지 않을 듯이 쏟아지는데 무척이나 조화롭고 필연적이라 한 문장, 한 단어도 간과할 수 없는 몰입을 선사한다. 이는 마치 인간 극장의 축소 무대를 보는 듯한데, 막이 오르자 사람들이 등장해 차례로 일생을 풀어놓는다. 커튼 주름의 돌출 부위와 안으로 접힌 곳 마저도 톱니바퀴가 맞물리며 돌아가는데 필요했다는 걸 비로소 납득하게 된다. 한명 한명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도 할 말은 샘솟을지 모른다. “사면받은 권력보다 위험한 것은 없다”고 일깨우는 니베아, 현 정권과 혁명군의 차이를 양쪽 다 “정통성”을 놓고 싸운다는 피네다 양에 비해 “둘다 하나도 다를 게 없는 망나니”(p.229)라 답하는 파울리나는 어떤가. 파울리나 같은 사람은 몇 세대쯤 살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고, 프레더릭 윌리엄스의 사려깊고 세심한 배려, 이를 표현하는 방식은 아우로라를 넘어 읽는 이에게도 위로를 준다.

에필로그는 작품을 완벽하게 정리한다. 아우로라는 취사선택하는 기억의 작동 오류를 대신해 사진과 글을 무기삼아 “내 존재의 덧없는 상황을 이겨 내고 사라져 가는 순간들을 붙들어 과거의 혼돈을 벗겨 내고자 필사적으로 노력한다.”(p.430)고 밝힌다. 책은 기억과 기억을 붙잡는 기록의 의미를 새긴다. 그녀는 “각자 자기 역사를 이야기하기 위한 빛깔을 고른다.”(p.431)며, 세피아빛을 선택한다. 이처럼 결말은 독자에게 바통을 넘기며 당신은 어떤 색을 고를 것인지 묻는다. 작가의 “내가 쓰는 모든 작품은 자전적 요소를 갖고 있다. 왜 나는 어떤 것을 쓰려고 작정했는가. 왜냐하면 그것이 나에게 중요하기 때문이었다. 다시 말해 자기 자신 안에 있는 어떤 진실을 찾아 나서는 것이다.”라는 말은 아우로라의 연장선상에서 읽힌다. 아옌데 소설은 감탄하며 읽었던 메리 카의 『인생은 어떻게 이야기가 되는가』를 다시 꺼내게 한다. 이 특별한 실용서의 근사한 구현이 바로 『세피아빛 초상』임은 반박의 여지가 없다. 숭고한 아우로라의 성장기이자 사랑과 도전, 굴하지 않는 열정으로 점철된 인생에 바치는 찬가를 추천한다. 물론 삼부작은 완독해야 온점이 찍힐 것 같다. 장엄하다. 또한 청량해서 가슴에서 파도가 치는 것만 같다.

책 속에서>

“내가 행복해지고 싶어 한다고 누가 그래, 세베로? 그건 내가 바라는 미래에 제일 어울리지 않는 말이야. 나는 흥미롭고 모험이 넘치는 뭔가 색다르고 열정적인 삶을 원해.”(p.147)

기억은 허구다. 우리는 부끄러운 부분은 잊어버리고 가장 밝은 부분과 가장 어두운 부분만 선택하여 인생이라는 널찍한 융단에 수를 놓는다. 나는 사진과 글을 통해 내 존재의 덧없는 상황을 이겨 내고 사라져 가는 순간들을 붙들어 과거의 혼돈을 벗겨 내고자 필사적으로 노력한다. 매 순간은 순식간에 사라져 금방 과거가 되어 버린다. 현실은 하루살이같이 덧없고 변하는 것이며 순수한 그리움일 따름이다.(p.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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곱세크
오노레 드 발자크 지음, 김인경 옮김 / 꿈꾼문고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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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문학에서 유명한 고리대금업자라면 바로 떠오르는 인물 몇이 있다. 우선 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에서 ‘계약대로’를 외치며 한 파운드 살덩이의 소유권을 주장했던 샤일록이다. 다음으로 찰스 디킨스의 <크리스마스 캐럴> 속 에브니저 스쿠루지다. 그는 다행히도 과거 현재, 미래의 크리스마스 유령을 통해 캐릭터 변화에 성공한다. 다음으로 <곱세크> 속 동명 주인공을 꼽겠다. 오노레 드 발자크의 『곱세크(김인경 옮김, 꿈꾼문고, 2020, 1844, 182쪽 분량)』 는 황금만을 절대 가치기준으로 삼고 일평생 매진했던 인물이다. 소설은 과도한 세부묘사가 비현실적일지언정 분명 존재할법한 하나의 표상을 완성한다.

발자크는 “작가는 시대의 비서”라고 했듯이 20여 년에 걸쳐 집필한 장·단편소설 90여 편을 유기적으로 엮어 총서 <인간희극>을 발표했다. <인간희극>은 크게 ‘풍속 연구’, ‘철학적 연구’, ‘분석적 연구’의 세 계열로 구분되고 90여 편의 소설로 구성되어 약 2000명의 인물이 등장하는 대서사시로 세계 문학의 걸작으로 남았다. 인간과 사회를 관찰하는 사실주의의 방식을 확립한 발자크는 소설의 제재를 넓히고 개념을 확대해 사실주의의 시조가 되었고, 자연주의의 선구자로서 플로베르, 졸라, 도스토옙스키 등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고리오 영감』, 『골짜기의 백합』, 『외제니 그랑데』, 『나귀가죽』 등이 그의 대표작이다.

소설은 소송대리인 데르빌이 드 그랑리외 자작부인의 살롱에서 들려주는 고리대금업자 곱세크에 대한 평이자 물질중심주의 세상에 대한 적나라한 관찰기다. 곱세크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주요 에피소드가 고리오 영감의 딸인 드 레스토 백작부인의 애정사건과 이에 심신이 타격을 받고 마지막으로 지키고자 했던 백작의 재산 문제다. 자작부인은 열 일곱 살인 딸 카미유의 마음이 드 레스토 백작부인의 아들에게 기우는 것을 경계한다. 백작부인은 바람직하지 않은 의미에서 유명하고 또 위험하기 때문이다. 백작부인은 남편이 모든 재산을 차례로 곱세크에게 매각하는 일의 속내를 가늠하며 자녀들을 위해 되돌리겠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

데르빌은 그녀가 죽어가는 남편의 신음을 엿들으면서 민법을 연구한다는 걸 알게 되자 “음모가 정교해지거나, 계획이 형성되거나, 모략이 꾸며지거나 하는 그 동기는 늘 재산”(p.110)임을 재확인한다. 또한 뛰어나다고 알려졌던 사람 안에 깃든, “인간적인 감정을 모두 소거”(p.112)시킨 정신적 괴로움의 파괴력에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그럼에도 데르빌은 젊은 에르네스트 드 레스토 백작이 합법적으로 재산을 보장받게 되었음을 증명함으로 새롭게 시작할 청춘의 앞 길을 터준다.

진정한 주인공인 곱세크 차례다. 곱세크는 데르빌이 성공적인 경력을 쌓는데 일정 부분 역할을 했다. 데르빌은 자기 인생의 소설적이었던 시기, 스물다섯으로 돌아가 곱세크를 불러낸다. 곱세크는 ‘들이마시다’라는 단어를 상기시킨다. 작가가 묘사하는 그의 외모는 내면으로 빚은 물상과 흡사하다. 이름이나 외양이나 심지어 플루트 연주 같은 목소리까지 견고한 틀과도 같다. 모형인간, 어음인간(p.17)이면서 때론 “한 남자가 관여할 만한 확실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 것은 단 하나밖에 없는 물질적인 사물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일세. 그 사물은······ 바로 ‘금’이네.”(p.28)라고 황금론을 편다. 금이 아닌 다른 것에 주의를 빼앗기는 자들은 미친 자들, 병든자들, 바보들, 얼간이들, 멍청이들, 즉 “파리 사람들의 삶”(p.30)이라고 진단한다. 그는 “내 눈은 하느님의 눈과 같아서”(p.46)라는 선언적 문장으로 권력과 쾌락, 인생을 정의 내린다.

그가 막심 드 트라유 백작을 꿰뚫어보듯 하는 말은 이중적이고 이율배반적이다. 모순적인 양면이 한 사람에게 깃들기에 “양성동물”을 닮았다고 표현한다. 하지만 이 이중성을 열거할 때 인간의 보편성이 떠오른다. 곱세크는 악한 같지만 “볼테르의 동상과 흡사”(p.68)하고 볼테르와 비슷한 미소를 띠고, “외견상 고리대금업자”일지언정 그의 안에는 두 종류의 인간, “구두쇠와 철학자, 왜소한 인간과 위대한 인간”(p.94)이 있음을 부인하지 못한다. 소설은 어떤 면에서 불가사의한 인물인 곱세크에 대해 레스토 백작부인 사건 이후 임종까지를 책의 말미 십 여 페이지로 간략하게 요약한다. 요약보다는 “농축”이 맞는 표현이겠다. 멸하려는 자와 살리려는 자, 썩을지라도 그러쥐겠다는 자와 돕고 나누기 원하는 자를 곱세크와 데르빌에게서 찾을 수 있다.

『곱세크』는 19세기 전반 프랑스 사회의 특권층, 귀족계급, 돈과 권력의 얼굴 뿐 아니라 다양한 층위의 사람들을 기록한다. 독자는 첫 문장에서 명시한 시공간적 배경으로 이동하여 하룻밤이라는 소설 속 시간동안 파리의 희로애락을 엿보게 된다. 이야기 속 이야기라는 액자식 구성은 화자의 목소리를 놓치지 않으려 경청하는 인물들처럼 독자의 주의도 사로잡는다. 같은 날, 동일한 장소에서 이야기를 매듭지을 때 까지. 읽는 즐거움은 인물에 이입하고 공감할 때, 반대하거나 거부하는 마음이 일 때 경험하게 된다. 동시에 입장을 정하고 논리를 펴는 문장의 리듬감, 사례와 근거, 비유와 상징을 통해 숙고하게 만드는 문장 자체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곱세크의 마지막 모습은 그로테스크하다. 문학에서 만날 수 있는 수많은 인간의 죽음 중에서 가히 인상적으로 꼽을 수 있겠다.

돈의 지배는 모든 시대의 화두이지만 지금 이 순간이 가장 극적일 것이다. 매일 열여섯 시간씩 글을 썼던 작가 자신에게도 주요 동기였다. 반드시 재물이 아닐지라도 자기 꼬리를 무는 뱀처럼 어리석게 침몰하는 곱세크가 되지 않도록 깨어있어야 할 것이다. 탐심은 연막을 뿌리며 늘 새롭게 유혹한다. 한 번만 더, 아직 부족해라는 내면의 목소리가 겸손에서 비롯하는지 욕망에 근거하는지 살필 일이다. 서평 쓸 시기를 놓쳐 재독한 덕분에 이야기의 유려한 전개에 주목할 수 있었다. 한가지, <곱세크>가 국내 첫 번역 출간되었기에 다른 선택지가 없지만 잘린 책 표지가 개성 있고 아름다울지라도 본문이 훼손될까봐 노심초사다. 그게 중요한 사항인가 싶겠지만 이런 독자도 있다.(와, 모서리 헐었어! 어쩔거냐! 중얼대는) 초독이 좋았다. 역시 발자크! 재독하니 더 좋았다. 그렇고 말고 발자크! 발자크는 전작 읽기로 나아가보자.

책 속에서>

인생이란 돈이 움직이게 하는 하나의 기계가 아니고 뭐란 말인가? 수단들은 언제나 그것의 결과들과 혼동된다는 점을 알아두게. 사실 자네는 결코 감정과 감각, 정신과 물질을 구별할 수는 없을 테니까 말이야. 금은 자네들이 사는 현 사회의 정신이라네.(p.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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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그늘 웅진 모두의 그림책 54
조오 지음 / 웅진주니어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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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오의 『나의 그늘(웅진주니어, 2023)』이 싱그러운 연둣빛 표지로 세상에 나왔다. 연두는 풀색이라 희망적이고, 햇볕이 스민 듯 조금 더 밝은 양지도 자연스럽다. 제목이 나의 세상이나 나의 태양처럼 기운찰 듯도 한데 『나의 그늘』이다. 시멘트 색, 어쩌면 먼지 색 『나의 구석』이 세상에 나온 지 3년여 만에 다시 찾아온 주인공 까마귀가 반갑다. “오”라는 외 글자가 작가의 필명인지 모르겠으나 까마귀는 그의 분신일까 추측해본다. 어쩌면 그보다는 우리 모두의 이명(다른 이름)이다, 에 무게가 실린다. 무엇이 되었건 분위기는 낙관적이다. 면지는 까마귀의 구석집 창을 보여준다.

『나의 구석』에서 애지중지 돌보았던 화분은 잘 자라 장 밖에까지 잎을 뻗는다. 화분을 내와 집 밖에 옮겨 심으니 잠시 누울 그늘이자 잠시 기댈 등받이가 되었다. 지나가던 새들이 쉬는 건 좋지만, 나뭇잎을 따먹는 고양이는 두고 볼 수 없다. 우산을 무기 삼아 고양이에 맞선다. 문제란 원래 예기치 않게 등장하고 연속해서 밀려온다. 이번에는 큰비다. 기지를 발휘해 나무를 붙들었지만 잎은 축 늘어져 버렸고 돌아서는 까마귀 어깨도 축 늘어져 버렸다. 두문불출의 시간, 자포자기의 심정일 때,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새가 있었다. 바로 『나의 구석』 말미에 인사 나눴던 친구다.

나무에 밧줄 지지대를? 친구 새가 했다. 식물 영양제를 꽂아둔 깨알 디테일? 친구 새가 했다. 풀도 심는다, 친구 새가! 그는 까마귀와 다른 새들을 움직이게 만든다. 고양이까지. 바닥의 연두는 영역이 넓어지고 색이 짙어진다. 풀은 무성해지고 나무는 자라고 우정은 깊어지며 휴식은 꿀맛이다. 하지만 문제란 원래 예기치 않게 등장하고 연속해서 밀려온다. 애석하게도, 역대급 스케일로 나타날 때 자비라곤 없다.

흥 많은 까마귀, 뮤직 큐에 몸을 맡기던 까마귀는 다시 한바탕 춤사위를 벌일 수 있을까? 에라 모르겠다 널브러져 있던 까마귀가 다시 기운을 추스르게 될까? 시간이 흘러, 너무 멋진 거 아닌가! 26층 나무집, 아니 현재 156층까지 나온 나무집(대체 어디까지?) 부럽지 않다. 환상적인 결말이 과연 후속작이 나올지를 궁금하게 만든다. 조금도 억지스럽지 않은 전개가 까마귀에게 흠뻑 이입하게 만든다. 까마귀의 희로애락, 아연실색, 쓰라림, 희망, 기대, 비상까지 한 권의 그림책 안에서 독자는 동고동락한다.

아기자기한 그림, 풀 한 포기, 꽃 한 송이까지 작가의 붓질은 허툰 구석이 없다. 그 정성이 독자 마음에 온기를 나른다. 이제 마지막 뒷면지다. 나 왜 철렁하는가! 겨울인가? 회색빛이잖아. 제본선에 있어야 할 나무는? 다음 이야기의 복선일까? 암시일까? 그림책 이론서를 너무 읽었다고 자체 진단하고 침착에 힘쓴다. 작가는 “제 그림도 누군가에게 다행인 것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썼다. 다행은 물론이고 행복이고 행운이다. 이 말로 마치련다. 이 사랑스런 그림책을 피해가지 않는 당신이 바로 승자다!




(출판사 도서 제공-서평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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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구석 웅진 모두의 그림책 29
조오 지음 / 웅진주니어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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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 까마귀를 보니 막내딸이 생각난다. 분초를 아껴야 할 고3이 문 닫고 뚱땅거리고 나면 책상이며 책장, 서랍장 등 가구 위치가 다 바뀌어 있곤 했다. 분위기를 새롭게 하기 위함이라지만 네가 이럴 때니 엄하게 나무랐다. 어디서 그런 힘이 나오는지 넌 힘도 세다! 기운 아껴서 공부해야 하는 것 아닌가? 아이는 드디어 “나의 구석”이 생기자 메트리스와 까마귀의 것과 흡사한 책꽂이와 화이트 러그를 채워 넣었고, 학교에서 밤새워 물레를 차며 도자기 머그잔을 구워 차를 우려 마시고, 책을 사고 책을 읽고 음악을 듣고, 과제를 한다. 창을 크게 열기 위해 열심을 낸다.

나만의 공간, 자기만의 방은 인간이 충족해야 할 기본적인 욕구에 속한다. 매슬로우의 유명한 피라미드 가장 하단에 위치할 것이다. 세상과 나로부터 경계를 풀고 묵고 싶은 만큼 머물 수 있는 곳이 있는가? 그곳이 사방 트인 펜트하우스가 아니어도 좋다. 빛이 덜 드는 반지하 창고라도, 먼지 자욱한 다락방이라도, 나무 책상 하나 밀어 넣은 층계 밑 골방이라도 주인의 마음은 부유할지 모른다. 조오의 『나의 구석(새의 노래, 2020, 64쪽 분량』은 작가의 첫 그림책으로 공간에 대해서 말을 건네지만 내면의 힘을 생각하게 한다.

세로로 긴 판형의 그림책은 표지에서 그늘진 구석을 보여준다. 앞표지의 제목은 볕이 들지만 뒤표지는 침침하고 을씨년스러운 맨 구석이다. 구석만 드러난 타이틀 표지를 지나 첫 페이지에서 주인공은 한 곳을 응시한 채 등장한다. 독자를 등지고 구석을 향한다. 그 시선에 이끌려 독자 역시 같은 곳을 바라본다. 아무것도 없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벽과 벽이 만나는 곳, 하지만 구석의 변신은 지금부터가 시작이다. 힘껏 밀고 온 메트리스가 구석에 자리를 잡으니 제법 안정감이 느껴진다. 하나씩 추가하는 물건은 주인의 취향을 드러낸다.

“뭐가 더 필요할까?”라고 자문하더니 까마귀는 노란 크레용으로 빛 머금은 도형을 그려 넣는다. 화사한 벽화가 완성된다. 그 와중에 화분에 물을 주고 돌보는 일 역시 게을리하지 않는다. 책도 읽고 차도 마시고 춤도(어쩌면 운동) 추는 까마귀의 시간은 공간에 활력을 불어넣는다. 더 이상 구석은 찾아볼 수 없다. 주인의 개성이 돋보이는 아늑하고 멋진 공간, 아지트가 완성된다. 하지만 그는 여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다시 한번 묻는다. “그래도 허전한데······.” 구석 옆에 창이 나니 자연스레 인사를 나누게 된다. 나와 내가 잘 지냈는데 이제는 나와 너도 잘 지낼 차례다. 서로 눈 맞추고 인사 나눈다. 함께 할 우리가 생길 테고, 초대할 벗이 늘어갈 테고, 구석은 사랑방이 될지 모르겠다.

『나의 구석』은 글 없는 그림책에 가까워 이미지가 스토리를 이끈다. 간략한 텍스트는 잠깐씩 시선을 보충한다. 세로로 긴 판형의 제본선을 중심으로 흰 벽이 세워지고 선 두 개가 만나 바닥이 된다. 독자는 까마귀의 구석에 초대받은 즉시 물건이, 색이, 음악과 빛이 보태질 때 일어나는 변화에 몰두한다. 각각의 변화는 대단하지 않지만 사소함이 쌓이자 변화는 성장이었음을 알아차리게 되고 설렘으로 다음 장면을 기대케 한다. 내가 가진 것을 소중히 아끼고 사랑스럽게 공들일 때 돌덩이는 보물이 되고, 빛은 퍼져 온기로 닿는다. 뚜벅뚜벅 나아가는 움직임이 사랑스럽다. 천천히 읽고 거듭 읽어야 할 그림책이다. 혼자 읽고 여럿이 같이 읽어야 할 그림책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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