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비드 댐로쉬의 세계문학 읽기
데이비드 댐로쉬 지음, 김재욱 옮김 / 앨피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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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 책장에 꽂혀 있던 세계명작전집은 꿈과 사랑, 모험과 희망으로 동심을 이끌었다. 온세상이 책꽂이 안으로 사이좋게 모여있는 형국이었고 그 세계는 무한할 것 같았다. 성장하면서 지금까지 보았던 건 빙산의 일각이었음을 깨닫고 축약과 편역을 아닌 완역으로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출발점 회귀현상이 벌어졌다. 선택해야 할 항목도 늘어났다. 이 작품은 누구의 번역으로 읽어야 할지, 어느 출판사가 나을지 정보를 모으고 판단을 내린다. 동시에 늘 아쉽다. 원어로 읽는 사람들은 얼마나 좋을까 마냥 부러워하며 현재 상태 최선과 타협한다. 지금까지 읽고 써온 내 서평의 많은 부분을 세계문학이 차지하므로 스스로를 총망라 서평러, 다나와 서평러가 아니라 편애 서평러라 칭했다. 그렇기에 댐로쉬의 세계문학 읽기는 반드시 읽어야 할 저작으로 대기 도서 리스트 상위에 자리 잡았다.

 

데이비드 댐로쉬의 세계문학 읽기(김재욱 옮김, 앨피, 2022, 2018, 430쪽 분량)는 세계문학 독자를 위한 안내서이자 입문서로 어떻게 읽을 것인가, 선택할 것인가에 대한 방법론을 제시한다. 입문서라기에는 일반 독자에게 난도가 있지만 저자는 복잡해보이고 때로 굴곡진 길을 기꺼이 따르려는 열정 있는 자들을 불러 모은다. 하버드대학교 비교문학 학과장이자 세계문학연구소 소장이기도 한 데이비드 댐로쉬는 전 세계 50여개국에서 세계문학을 주제로 강의하고 있다. 그는 스스로를 한 두 세기, 한 두 지역만의 전문가가 아닌 무려 4000년 지구문학의 종사자임을 자처”(p.15)하며 시공을 넘나든다. 역자는 세계문학 읽기에 전력해온 댐로쉬 작업의 정화가 바로 세계문학 읽기라고 전한다.

 

역자는 서두에 오늘날 세계 문학의 풍경을 조망한다. 그는 세계문학이 일으킨 변화 중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 텍스트 산출량을 어떻게 소화할 것인가의 문제에서 두가지 이론을 대비한다. 프랑코 모렐리의 멀리서 읽기개념은 꼼꼼히 읽기와 대별되고 대략적인 얼개 파악하는 법’, ‘불필요한 부분 넘겨 읽는 법을 비롯한 읽지 않기의 방법론”(p.14)과 닿는다. 이와 같은 경향에 동의하지 않는 댐로쉬는 다양한 작품을 최대한 많이, 미련할 정도로 진득하게 읽어 나가는 경험론적 꼼꼼히 읽기야말로 작품에 대한 더 고차원적인 통찰을 추동하는 최선의 방략”(p.15)이라고 주장한다. 대부분은 공감하겠지만 과연 가능한 일인가는 별개의 문제로 남는다.

 

세계문학용어는 괴테가 비서인 요한 페터 에커만에게 남긴 말 중 처음으로 등장하였다. 저자는 이 책이 세계문학을 이해하고 즐기면서 읽기 위해 개발하고 다듬어야 할 일련의 기술을 중심으로 구성했다고 밝힌다. 1<문학이란 무엇인가>는 문학 개념 자체, 문학의 범주를 살펴보고 독서의 방식편에서 두보의 시와 윌리엄 워즈워스의 소네트를 비교 분석한다. 소설의 사례는 무라사키 시키부의 겐지 이야기를 보여주는데 작품이 쓰여진 서기 1000년경의 시대상, 작품의 내용과 의미, 지금 발생하는 질문과 접근법을 이야기한다. 저자는 읽고 또 읽으면 각 작가가 이룩한 작업의 특수성을 더 깊이 파고드는 것이 우리의 과제이다.”(p.83)라고 쓰는 한편 더 많은”(독서)보다 가장 중요한힌트를 건넨다. “(전략)가장 중요한 첫 단계는 초기의 평평한 그림이 3차원으로 펼쳐지는 발판을 해당 전통에서 확보하는 일이다. 그렇게 되면 거울을 통과해 새로운 문학 세계로 진입할 수 있다.”(p.84).

 

2<시간을 가로질러 읽기>에서는 그 매력을 전임 작가들을 이해하고 그들에게 응답한 작가들의 작품을 통해 세기를 가로지르는 상황, 인물, 주제, 이미지의 전개 과정을 추적할 기회를 얻게 된다는 점”(p.89)으로 본다. 호메로스가 <일리아드><오디세이아>를 글로 썼을까, 다양한 길이의 보관 문구와 고리 구성 등을 활용한 구술기법으로 전해지지 않았을까 추측하며 문자로 쓰인 최초의 시와 <길가메시 서사시>를 추적한다. 또한 시적 서사시가 방대한 산문소설로 대체되는 지점에서 저자는 <율리시스>의 예를 든다. “가장 많이 쓰인현대소설 중 하나는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 조이스는 베르길리우스조차 넌더리를 낼 만한 열의로 여러 편의 원고를 작업했다.”(p.102) 이 책을 읽으면서 필독도서 목록이 늘어가는 속도를 적절히 조절하는 건 쉽지 않다.

 

3<문화를 가로질러 읽기>에서는 외국 작품을 읽을 때 어쩔 수 없이 맞닥뜨리는 한계와 난관을 짚어보고 어떻게 헤치고 나아갈지를 숙고한다. 저자는 희곡과 단편소설의 사례를 드는데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과 인도 시인 칼리다사의 <샤쿤탈라>가 희곡의 예로, 루쉰의 <광인일기>와 클라리시 리스펙토르의 <가족의 유대>를 단편소설의 예로 든다. 저자는 <광인일기>의 서문을 재독하며 화자가 만나고 있는 대상의 실체를 단정하지 않는다면 모든 가능성을 열고 접근할 필요가 있다고 전한다. 또한 더 많은 작품의 예를 들어 그 설명이 지나치게 모호하거나 신뢰할 수 없어 내러티브의 결을 거슬러 읽어 그것을 변별해야 한다”(p.184)고 밝힌다. 역시 독자는 열심을 내야만 한다. 4<번역으로 읽기>에서는 문자주의의 극한인 직역, 자유로운 번역인 모방 번역, 직역과 모방의 중도로서 의역을 살펴본다.

 

5<멋진 신세계>는 낯선 곳으로 던져진 이들, 요셉과 요제프 K(소송)부터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 이븐 바투타의 <여행>, 그리고 <신곡>, <돈키호테>, <서유기>로 독서 여행을 이끈다. 특히 이탈로 칼비노의 <보이지 않는 도시들>각 장이 하나의 상징적인 도시를 그려 내는 보석 같은 산문시라고 근사하게 소개한다. 6<제국을 쓰기>에서는 식민지, 탈식민지 작가 앞에 놓인 언어 선택 문제로 토착어로 작품을 쓸지, 제국어로 쓸지 판단하고 실행에 옮긴이들을 살핀다. 7<세계적 글쓰기>는 제국주의 열강에 의해 빛을 보지 못한 지역에서 태어났던 카프카, 보르헤스, 베케트가 사실주의 규범을 벗어나 신비롭고 상징적인 장소를 작품 배경으로 삼은 점을 지적한다. 국제적 성향의 지역 작가가 선택한 탈지역화된 방식의 글쓰기다.

 

저자는 에필로그에서 세계문학 독자의 로망을 자극한다. “작가가 살았던 곳에서 주의 깊게 시간을 보내는 것은 도스토옙스키의 상트페테르부르크나 무라사키 시키부의 교토를, 비록 그 이후에 숱한 변화가 일어났더라도 더 잘 들여다볼 수 있게 한다.”(p.405)는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문학기행이 기약 없기에 관련 도서로 대리 만족하지만 아쉬움은 커질 뿐이다. 또한 무엇을 읽을지를 선택하는 방식도 제안하는데 내가 사랑하는 작가가 사랑하는 작품”(p.397)을 찾아 나서거나 의미 있는 흐름이나 문학 운동 등을 주제 삼아 읽기도 권한다. 두 가지 모두 끝이 없는 전진이고 애석하게도 인간에게는 한정된 시간만이 허락되었다. 책을 읽는 속도가 사는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는 데서 오는 자괴감, 읽어도 완전무결하게 읽었다고 자신할 수 없는 불안, 불안을 줄이겠다고 기록으로 남기는 자신과의 약속도 완벽은 보장할 수 없고 읽는 시간만 빼앗기는 건 아닐까 이중으로 고심을 부른다. 그래도 읽는 수밖에 없고 읽을 수 있어 감사하다. 그러니 이 책은 얼마나 특별하겠나.

 

본문을 정리해주는 서론, 충실한 각주, 매 장마다 도입과 결론에서 다시 한번 내용을 간추려주는 구성은 만족스러운 부분이다. 다만 학구적이고 때론 현학적인 문체는 심리적 거리를 체감케 해 아쉬웠다. 주요 부분이나마 정리해보겠다고 의욕을 내어 보았지만 가당치 않다. 70여 권에 이르는 책들이 듀엣이나 트리오로 등장할 때 푹 빠져 읽다보면 어느 사이 다른 책들로 자리바꿈하는데 하나같이 명저라 긴장을 늦출 수 없다. 시간과 공간을 넘나드는 속도를 가까스로 따라갈 때 독자는 읽어내지 못한 작품의 경험하지 못한 저작 환경과 작품의 배경에 초점을 맞추고 상상력을 발휘하게 될 것이다. 세계문학을 향한 저자의 열정과 헌신은 매우 인상 깊다. 댐로쉬의 책은 잠시 행복한 순간의 무수한 연결을 경험케 한다. 그리고 나면 무더기 책 목록과 읽으리라, 하리라, 다시 보리라 등 다양한 의지 표현 종결어미를 되뇌게 될 것이다. 이 또한 좋지 아니한가.

 

 


챗 속에서>


제임스 조이스는 아마도 지금껏 쓰인 가장 세졔적인텍스트일 피네건의 경야에서 이상적인 불면증에 시달리는이상적인 독자를 상상한 적이 있다. 그 이상적인 불면증을 꿈꾸는 이상적인 독자가 되길 강요하는 광활한 작품 세계, 이보다 더 정확히 세계문학을 정의하는 말은 없을 것 같다.(p.39)

 

(전략)방금 논의된 가능성은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 제임스 조이스의 젊은 예술가의 초상,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덤불 속같은 동시대 세계 여러 곳에서 쓰인 다양한 모더니즘적 내러티브를 환기한다. 이 작품들의 특징은 그 설명이 지나치게 모호하거나 신뢰할 수 없어 내러티브의 결을 거슬러 읽어 그것을 변별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작가들 중 누구도 언급한 이야기들을 쓸 때 서로의 작품을 알지 못했겠지만, 모두 도스트옙스키의 지하로부터의 수기같은 원형적 모더니즘에 정초하고 있었다. 문화를 가로질러 읽으면서 우리는 분리된 동시에 연결된 루쉰과 그의 위대한 모더니스트 동료들이 시간과 공간의 좌표를 재설정하는 다양한 방식을 사유해 볼 수 있다.(p.1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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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최은영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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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지나온 과거는 어쩔 수 없는 고정이고 불변이라는 의미에서 끝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최은영의 소설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문학동네, 2023, 352쪽 분량)은 끝나도 끝난게 아니라는 걸 알려준다. 온전한 마침을 위한 복기는 그 시간 함께였던 이들을 향하는 깊은 포옹이고 그 포옹 끝에 안기는 건 자기 자신이다. 과거는 털고 묻어야 할 게 아니라 응시하고 언어화하는 작업이 필요하다는 걸 배운다. 고되고 불편한 과정을 작가가 대신해줄 때 어떤 문장에서는 속이 시원하고, 그러다 어느 순간 부끄럽고, 때론 독서실인데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앉아있다. 한뼘 위로받기도, 다행이야 싶은 지점도 만난다.

 

최은영은 2013년 작가세계 신인상을 받으며 작품 활동 시작하였고 작품으로 쇼코의 미소』 『내게 무해한 사람장편소설 밝은 밤등이 있다.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는 등단 10년이 되는 해에 지면에 발표했던 중단편 7편을 묶어낸 소설집이다. 이중 표제작인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2020 젊은작가상을 수상했다. 작가의 말에서 최은영은 자신의 결핍에 대해 이야기한다. 결핍을 적대하지 않고 동행하겠으며 무엇보다 찾아오는 감정을 마다하지 않고 지켜보겠다고 전한다. 이는 살아가는 모두에게 꼭 필요한 태도일 것이다.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는 읽기와 쓰기가 무엇이어야 하는지, “공부하는 사람이 되겠다는 꿈을 이루는 길이 무엇으로 채워지는지, 그 길을 걸어가는 두 여성을 통해 묻는다. 영어 에세이 강사는 희원에게 본인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멘토였고, 잃어버린 멘토가 된다. 희원은 그녀가 남긴 희미한 빛, 차가운 겨울 공기 속에서 내뱉은 흰 숨을 놓치지 않으려 애쓴다. 그 마음을 짐작하게 된다. <>은 화자 자신(해진)을 이인칭 대명사 당신으로 칭하며 대학의 교지 편집부에서 만났던 정윤, 희영과의 시간을 복기한다. 자신을 당신으로 부르는 거리두기는 화자에게 더욱 엄격하겠다는 의지로 다가오고 독자 역시 긴장하여 세 인물의 선택을 읽는다. “당신은 그런 글을 쓰고 싶었다. 한번 읽고 나면 읽기 전의 자신으로는 되돌아갈 수 없는 글을,(후략)”(p.52) 이런 글은 이미 글이 아닐 것이고 글 안에 증명할 수 있는 실천이 녹아난 행위의 결집이지 않을까. 결국 글처럼 삶은 살아진다. 어떻게 쓸 것인가는 어떻게 살 것인가와 다르지 않다.

 

<일 년>은 이야기가 주제다. 이야기 수위 지침이라는게 있으면 어떨까. 적정선을 넘어 실례의 영역으로 무단 침입하는 상황을 그려볼 때 말하는 이에게 더 실례일까, 듣는 이에게 더 실례일까. 가끔 생각해온 이 문제가 여전히 어렵다. 그녀와 다희가 카풀을 하면서 일 년간 보낸 시간, 나눈 이야기를 그리는 <일 년>은 이야기의 대척점에 기계를 놓는다. 감정이 없고 단단한 속성은 오히려 안도감을 준다. 이 작품에서 희미한 빛은 이야기다. “그때, 둘의 이야기들은 서로를 비췄다.”(p.123) 사라지는 것 없이 살아있는, 그 자체로 온점이 찍히는 결말도 담백하고 거리를 두는 시점도 이를 돕는다. 세 번째에 <답신>이 실렸다. 책 말미 해설에서 평론가 양경언은 <답신>언니의 개인사를 넘어서는 사회가 구조적 취약성의 문제를 방기할 때 벌어질 수 있는 비극”(p.335)이라고 본다. 괴로운 이야기인데 현실 밀착형 사건이라 더 괴롭고 무력하게 읽고 있다는게 또 괴롭다. 그러나 간절한 소망을 담아 “‘그래도남기는 이야기로”(p.336) 라는 데에서 중요한 자리를 잡는다.

 

<파종>은 희미할지언정 결코 사라지지 않는 것들을 회복한다. <이모에게>에서 희진은 방화문을 닫듯이 마음을 닫아버리면 나는 언제나 내 마음의 불길로부터 안전했다.”(p.258) 하지만 닫히지 않는 막다른 골목에 이르렀음을 고백한다. 소설은 마음의 안전장치를 사수하는 열 가지, 스무 가지, 백 한 가지 방법 찾기가 인생인가 자문하게 한다. 하지만 결국은 사랑하는 이가 안심하기를, 그의 손을 이끌고 조종실에서 봤던 가장 아름다운 하늘을 모아”(p.264) 이모에게 보여주기 원한다. 이 빛은 희미하지 않다. “저 너머의 눈빛”(p.265)은 꺼지는 법이 없다. <사라지는, 사라지지 않는>은 기남에게, 그리고 독자에게 부끄러워도 돼요.”(p.319)라고 말한다. 소년의 천진한 목소리는 단번에 어떠어떠했던 것이, 하지 못했던 것이 부끄러워 오래 자신을 옥죄었던 결박을 푼다.

 

작가는 스며드는 문장으로 말을 걸어 놓치고 온 것을 살피게 해준다. 외면하고 온 것을 다독이게 만든다. 무시로 겪는 감정을 친절하게 언어화해서 구체적으로 알려줄 때 이것만으로도 힘을 얻는다. <일년>에서 서운함, <답신>에서 수치심을 다시 들여다본다. <사라지는, 사라지지 않는>에서 기만의 이유, 기만이 쓴 가면, 작동과 결과를 본다. 이번에는 밝은 밤이 아니다. 희미하다.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시공간을 밝힐 수 있을까? 우리 안에 흩어져 있는 어떤 때, 어떤 곳까지 파고들어 정확히 조명할 수 있을까. 만일 그럴 수 있다면 어둠에 익숙해진 시각이 통로를 발견하고 탈출의 가능성은 보장받는다. 희미하지만 사그라들지 않고 누군가의 마음에 뿌리 내리는 이야기들은 뿌리에서 잔뿌리로, 다시 솜털로 뻗은 끝에 조용히 단물을 빨아올린다. 버석거리던 갈증은 가라앉는다. 오아시스 곁에 마음 내려놓고 쉴 수 있다면 빛은 희미해도 고맙다. 이 고마운 이야기가 많은 이들에게 닿기를.

 

 

책 속에서>

그녀가 공부하는 사람이 되기로 마음먹었던 순간에 대해 쓴 글을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퇴근해 책상 앞에 앉아 책에 밑줄을 긋고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는 순간에 투명 망토를 두른 것 같았다고 그녀는 썼다. 세상에서 사라지는 기분이었다고. 그녀는 이미 세상에서 사라져버린 사람들과, 그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그려진 세상이 자신이 살고 있는 세상보다도 언제나 더 가깝게 느껴졌다고 썼다. 그럴 때면 벌어진 상처로 빛이 들어오는 기분이었다고, 그 빛으로 보이는 것들이 있다고 했다. ‘더 가보고 싶었다.’ 그녀는 그렇게 썼다. 나는 그녀의 문장에 밑줄을 긋고, 그녀의 언어가 나의 마음을 설명해주는 경험을 했다.(p.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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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앞의 생
에밀 아자르 지음, 용경식 옮김 / 문학동네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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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스토이 단편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는 제목이면서 천사 미하일이 알아내야 할 세 번째 과제였고 답은 사랑이었다. 자기 앞의 생의 모모는 동일해 보이나 어쩌면 한 발 더 나아가 사람은 사랑 없이도 살 수 있나요?”라고 묻는다. 간절함이 스민 질문 끝에 발견한 답은 독자에게 잊지 못할 순간을 안긴다. 에밀 아자르(로맹 가리)자기 앞의 생(용경식 옮김, 문학동네, 2003, 1975, 372쪽 분량)은 열 네 살 소년 모모의 눈으로 바라본 세상과 사람들, 삶과 죽음을 그린 소설이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을 알고 싶어서 계속 질문하고 매일을 응시한 끝에 소년은 발견한 답을 건넨다. 소설은 다음의 제사로 시작한다. <그들은 말했다. “넌 네가 사랑하는 그 사람 때문에 미친 거야.” 나는 대답했다. “미친 사람들만이 생의 맛을 알 수 있어.”-야피, 라우드 알 라야힌->  열악한 조건 가운데에서도 사랑은 생으로 인도하는 가장 강력하고 유일한 길임을 작가는 서두에 드러내고 있다.

 

자기 앞의 생은 로맹 가리가 에밀 아자르라는 필명으로 발표했던 소설로 1975년 공쿠르상을 받았다. 모스크바에서 태어나 14세 때 어머니와 함께 프랑스로 이주한 로맹 가리는 첫 소설 유럽의 교육으로 비평가 상을, 하늘의 뿌리1956년 공쿠르 상을 받았다. 로맹 가리는 탁월한 대작가의 면모를 보였지만 이미 어떤어떤 작가라는 고정관념 속에 위지지어진 기성작가일 뿐“(에밀 아자르의 삶과 죽음/p.318)이라는 회의와 명성, 내 작품의 평가 기준, ’사람들이 만들어놓은 내 얼굴‘, 그리고 책의 본질 사이“(같은 책/p.323)의 모순에 반하여 에밀 아자르를 만들어내고, 이 사실은 작가의 죽음 이후에 유서 격인 <에밀 아자르의 삶과 죽음>으로 세상에 알려진다. 그렇게 로맹 가리는 한 작가가 단 한번 받을 수 있는 콩쿠르상을 두 번 수상했을 뿐 아니라 문학계에 특별한 족적을 남긴다.

 

모모의 기억이 시작되는 첫 번째 순간에 로자 아줌마가 있다. 그녀는 폴란드 태생의 유태인 생존자로 35년간 매춘일을 하였고, 일을 그만둔 후에는 매춘부들이 돌보지 못하는 아이들을 맡아 키운다. 모모의 생애 최초의 큰 슬픔도 로자 아줌마에게서 비롯되었다. 사랑 때문이 아니라 매월 받는 우편환 때문에 나를 돌봐주었을까 하는 의심은 사람은 사랑 없이 살 수 있나 라는 물음으로 이끈다. 아이의 눈에 현자로도 보이는 하밀 할아버지와 다정한 이웃 사람들은 말 뿐만 아니라 삶 자체로 여러 모양 답을 모아준다. 벨빌의 거리, 엘리베이터가 없는 7층 건물에 자신의 처지를 비관보다 낙관 편에서 바라보고 작은 온기라도 흘려보내는 사람들, 유태인과 아랍인, 흑인들이 살고 있다. 프랑스인 구역이 시작되기 이전의 공간이다. 소년의 환경도 안전하지 않지만 그가 기억하는 모든 첫 번째는 공통의 온기, 사소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잊혀지지 않을 빛을 간직한다달걀을 훔친 모모에게 하나를 더 내어준 식료품점 아줌마, 광기는 없다고, 절대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을거라고 말해줬던 의사 카츠 선생님은 모모의 유년을 밝힌다.


돌아보면 나는 아직 어려, 라고 여겼던 적은 없었다. 모모와 마찬가지로 기억에 남아있는 가장 먼 유년조차 심정은 독립적이었으며 의젓했고, 나름대로 판단하고 고민했고, 어린아입네 하는 일 없이 진지했다. 대다수가 그렇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소설이 이를 과장 없이 자연스럽게 포착하고 있는 점이 누군가에게는 유년의 앨범 한 장을 열어보고 잊고 있던 사진을 발견한 듯 할 것이다. 그럼에도 동심은 어쩔 수가 없다. 흑인들이 빵에 어린아이 고기를 끼워먹는다는게 헛소문이지만 그의 미소가 식욕 때문일 거라는 웃지 못할 추정이나, 인간의 세계보다 동물의 세계가 낫다는 로자 아줌마의 말에 밤마다 상상 속 암사자를 불러들이는 장면을 비롯해, 우산으로 만들어낸 좋은 친구, 언제나 함께하던 아르튀르까지 모모의 시선이 보여주는 아이다운 천진함, 한계 없는 상상을 읽을 수 있다. 이는 선입견이라고는 없이 직관하고 진실을 통찰하는 강력한 도구이다. 아이다운 천진함은 현실을 더욱 아프게 지적한다.

 

모모는 서커스 모형 진열장의 기계장치들 중에서 광대들을 좋아한다. 모모가 행운의 여신이 우리를 떠나기 시작”(p.90)했다고 회상한, 로자 아줌마의 건강과 나이가 한계에 도달했음을 알아차리게 된 때에 광대들은 실제가 아니라 모두 기계들이라는 점이 특히 마음에 든다. 그는 고통도 늙음도 불행도 없는, 그래서 가짜인 서커스의 세계야말로 인간 현실과 동떨어진 행복의 세계”(p.110)라고 생각하는데 필름을 되돌리며 작업하는 영화 녹음실에서 본 거꾸로 된 세상이야말로 자기 인생에 가장 멋진 일이라고 여긴다. 어떻게든 시간을 거꾸로 돌려주고 싶은 로자 아줌마 때문이다.

 

소설은 서로 사랑하는 단 둘만이 전부인 세계에서 한 사람의 생이 다해갈 때, 전적인 보호자가 더는 자기 자신조차 보호하지 못하게 되어버린 시간의 무심한 전진 앞에서 소년 모모가 한 순간도 눈감지 않고 맞닥뜨린 용감한 생의 경주를 담는다. 이 경주에서 결코 주류일 수 없었던 가난하고 소외받는 이웃의 연대도 인상 깊다. 소설은 사랑과 연대 외에 시간의 결을 살피는 또 하나의 명작이기도 하다. 모모의 입을 빌어 작가는 시간의 가차없음을 아름답게 쓰고 있다. “시간은 천천히 흘러갔고, 그것은 프랑스의 것이 아니었다. 하밀 할아버지가 종종 말하기를, 시간은 낙타 대상들과 함께 사막에서부터 느리게 오는 것이며, 영원을 운반하고 있기 때문에 바쁠 일이 없다고 했다. 매일 조금씩 시간을 도둑질당하고 있는 노파의 얼굴에서 시간을 발견하는 것보다는 이런 이야기 속에서 시간을 말하는 것이 훨씬 아름다웠다.”(p.178) 모모는 시간을 찾으려면 시간을 도둑맞은 쪽이 아니라 도둑질한 쪽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p.179)라고 말하는데 도둑질한 쪽은 누구일까, 무엇일까? 생이 아닐까.

 

모모는 매일 일어나는 일, 크고 작은 사건, 감정의 일상적인 반복을 스쳐 흘려보내지 않고 인생”, “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바라본다. 하밀 할아버지가 가장 중요한 건 말이라고 했듯이 말의 선택과 사용은 자의로 요청하지 않은 삶에서 유일하게 선택 가능한 항목이다. 한가지 더, 모모가 세상을 떠난 로자 아줌마 곁에 아르튀르와 함께 누워 아주 죽어버리도록 더 아프려고 애”(p.305)를 쓰는, 성인의 눈으로 볼 때 비현실적인 애도의 과정이 마음으로는 일면 공감된다. 사랑하는 이와 헤어지는, 법과 질서가 허용하는 범위가 슬픔을 서둘러 묶어서 보이지 않는 곳에 넣어버리는 일 같다. 모모에게는 그 시간이 마냥 뒤돌아보지 않고 자기 앞에 놓인 생을 향해 걸음을 내디딜 힘이 되었을 수도 있다. 곁에서 더 사랑하고, 사랑을 멈출 수 없었던 방식이었을 테다.

 

모모와 로자 아줌마는 에밀 아자르의 아들 디에고와 아들을 무척 사랑해준 스페인 가정부 할머니가 모델이라고 작가는 밝힌다. 작가는 슬픈 이야기를 슬픔 일색으로 매몰시키지 않는다. 이 슬픔은 피할 방법이 없는 삶의 디폴트 값이기도 하다. 생이 쌓여 만개한 순간은 짧고 생은 처음부터 죽음을 초청했노라며 죽음으로 가는 길을 넓힌다. 사랑하는 이가 자기 앞의 생을 살아내고 마지막 시간을 보내는 날들을 소년은 함께 걷는다. 소년이 살아내는 자기 앞의 생을 담담하게 그려낸 소설은 책 속 세상과 읽는 이의 현재를 분주히 왕래하게 만든다. 삶이 분자라면 그 안에는 무수한 결정적 순간, 그때의 감정, 잃어버린 것들, 잊고 싶은 것들, 울어야만 했던 날, 기쁨이 끊이지 않던 순간, 코미디보다 우스웠던 장면, 실수, 실패 등 작은 원자들로 빼곡할 것이다. 사람의 의지로 그 중 원하는 것만 취할 수 없는 생을 끌어안는 가장 지혜로운 방법을 모모는 알려준다. “사랑해야 한다.” 이 말을 하루에 한 번은 말하겠다고 나와 약속한다. 미국에 정착하여 이제 구순인 아버님 댁에 머물며 읽었다. 사랑해주셔서 깊이 감사드린다.

우리 곁에 더 오래 오래 계시기를.

 

 

책 속에서>

거꾸로 된 세상, 이건 정말 나의 빌어먹을 인생 중에서 내가 본 가장 멋진 일이었다. 나는 튼튼한 다리로 서 있는 생기 있는 로자 아줌마를 떠올렸다. 나는 좀더 시간을 거슬러올라 아줌마를 아름다운 처녀로 만들었다. 그러자 눈물이 났다.(p.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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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 인간의 시계로부터 벗어난 무한한 시공간으로의 여행
카를로 로벨리 지음, 김현주 옮김, 이중원 감수 / 쌤앤파커스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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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 동화를 연상케 하는 시적인 제목 만약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다면은 다양한 주절을 붙여 문장을 완성해 보게 한다. 문학 작품의 주제로 시간은 매력이 넘치기에 그런 책들은 더욱 각별하다. 한동안 여운에 사로잡히는 <트리갭의 샘물>부터 초침 소리가 진동하는 듯한 <타타르인의 사막>, 과학자 류비세프의 도전을 담은 기록물 <시간을 정복한 남자 류비셰프>가 떠오른다. 시간은 거울과 같이 인간을 그 앞에 세우고, 재판관처럼 과오를 드러내는 전천후 저울이자 사라지지 않는 기준이라는 시선은 보편적이다.

 

그에 비해 만약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다면(김보희 옮김, 이중원 감수, 쌤앤파커스,2021, 2014, 220쪽 분량)은 저명한 이론물리학자 카를로 로벨리가 기존의 시공간 개념으로부터 자유로워질 것과 이탈의 가능성을 설명하는 초청의 책이다. 카를로 로벨리는 양자이론과 중력이론을 결합한 루프양자중력이라는 개념으로 블랙홀을 새롭게 규명한 우주론의 대가로, ‘2의 스티븐 호킹이라 평가받는다. 현재 프랑스의 대학에서 이론 물리학센터 교수로 강의 및 연구를 계속하고 있으며 저서로 <모든 순간의 물리학>, <나 없이는 존재하지 않는 세상>,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등이 있다.

 

프롤로그에서 저자는 함께 꿈을 꿀 벗과 새로운 아이디어를 얻기 위해 상상 속 여행과 길 위의 여행”(p.9)을 떠났던, 그리고 진리를 찾기 위한 모험을 위해 홀로 여행했던 청춘의 때를 회상한다. 책은 호기심과 꿈이라는 푯대를 향했던 모험이 멈추지 않고 계속되어 과학의 길을 넓히고 새로운 차원에 접근할 수 있었던 순간들을 복기한다. 20세기 과학적 대혁명은 양자역학과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이론 두 가지 축으로 대변할 수 있으나 이들은 시간과 공간에 대한 개념, 물질과 에너지에 대한 개념에서 각각 서로 모순되는 과거의 개념으로, 둘을 연결하는 것은 양자중력”(p.21)의 핵심문제다.

 

막다른 길이라는 스승들의 만류에 청춘의 즐거운 고집”(p.22)과 어릴 때 읽었던 동화는 그를 나아가게 만든다. 저자는 동료 리 스몰린과 함께 공간을 재정의한다. 공간은 일차원 물체인 루프들로 짜여 있으며, 이 루프들이 세 개의 차원상에서 서로 엮이며 삼차원의 직물을 형성한다는 이해는 공간이란 것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p.60)고 공간 대신 입자들, 장들, 중력자의 루프들과 이들의 상호작용만이 존재하고 있을 뿐이라는 데 이른다.

 

저자는 계속해서 악화되어온 과학의 이미지와 왜곡된 시각을 우려하며 과학적 사고의 힘은 과학적 사고의 특징인 스스로에게 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 능력에서 나오고 이것은 자신이 확언한 내용까지도 의심할 수 있는 능력이며, 자신의 신념은 물론 가장 확실했던 신념까지도 두려워하지 않고 시험대에 올리는 능력”(p.81)이라며 과학의 핵심을 변화라고 꼽는다. <공간의 역사>편에서는 고대 역사까지 거슬러 아리스토텔레스와 데카르트의 공간을 사물간의 관계에서 보는 관점과 뉴턴의 항상 존재하며 하나의 구조를 가진 개체로 보는 시선을 비교하는데 흥미롭다.

 

이보다 더욱 흥미로운 지점은 책의 제목이기도 한 시간 테마다. 우주 속 모든 물체는 각각의 고유한 시간을 가지고 있으므로 시간에는 지역적 조건이 있다, 일기예보와 같다, 분리된 시간과 공간이 아닌 시공간개념을 사용해야 한다 등의 전개는 솔깃하다. 그리고 시간의 부재를 선포한다.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중략) 이 세상을 비시간적인 표현을 통해 이해하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p.144)는데 이는 우리에게 유익이 될까, 만일 사실이라면 유익을 따지는 건 무의미하다. 최신의 전자기기를 들여와 완벽히 다룰 수 있을 때의 기쁨을 상상하며 부지런히 매뉴얼을 익힐 때의 설렘을 연상하며 적극적으로 방법-비 시간적 표현을 통해 세상 이해하는 법-을 요청해야 하는 건 아닐까. 이때 저자의 벗 리 스몰린은 시간을 부활시킨다. 항상 시간이 문제다.

 

저자는 수학자 알랭 콘과 시간은 거시적인 차원에서만 드러나는 창발현상이라는 지점까지 이른다. 창발의 사전적 정의는 하위 계층(구성 요소)에는 없는 특성이나 행동이 상위 계층(전체 구조)에서 자발적으로 돌연히 출현하는 현상이다. 시간은 엔트로피화의 방향에 지나지 않고 엔트로피의 증가가 관찰되는 방향을 시간이라고 부른다. 물체가 낙하하는 방향이 아래, 열이 식는 방향이 시간이라는 결론이다. 이 책은 관심과 사유가 질문이 되고 과학적 성취로 이어지기까지의 과정과 함께 한 과학자의 추구와 지향, 관계를 맺고 세상을 대하는 태도를 보여준다. 그는 홀로 실험실에 또는 자기만의 방에 틀어박혀 숫자와 공식만 파고들지 않는다. 행동하는 지성의 진면목은 적극적으로 의견을 개진하고 경청하고 인정하는 의사소통 방식에서 빛난다.

 

에필로그에서 합리적이고 비판적인 지식의 중요성을 짚으며 같은 토양에서 자란 과학과 민주주의를 연결할 때 이는 더 선명하게 드러난다. 그가 내리는 과학의 정의는 유토피아처럼 근사하고 그가 학교에 바라는 공부의 참모습은 르네상스적 인간이 자랄 토양과도 흡사하다. 책에서 스승과 동료에게 돌리는 헌사와 미래 과학자들을 향한 애정 가득한 격려를 만난다. 끝까지 수학은 나를 눈물 나게 했고 물리는 나의 뇌구조를 평면이 아닐까 좌절케 했다. 그럼에도 시적 제목의 밤하늘 같은 커버를 지닌 친절한 분량의 과학서가 페이지를 뚫고 나오는 저자의 진심을 그대로 전달한다. 한 겹이 아닌, 여러 겹의 감동을 경험케 하는 책이다. 명랑한 위트와 적절한 비유, 간결하고 아름다운 문장까지, 곧 당신도 저자의 또 다른 책을 펴게 될지 모른다.

 

 

 책 속에서>


결과적으로, 공간과 마찬가지로 시간 역시 관계적인 개념이 된다. 시간은 사물들의 다양한 상태 사이의 관계를 나타낼 뿐이다.(p.152)

 

한편 이러한 모험은 합리성에만 기반을 두고 있지는 않다. 물론 과학적 모험을 공식화하기 위해서는 합리성이 반드시 필요하다. 하지만 위대한 과학적 발견들은 직관에서 나온 경우가 많다. 과학은 꿈에서 출발하고, 그 꿈이 지배적인 기존의 꿈들보다 더 효율적이라는 것이 밝혀질 때 이는 비로소 전 인류의 공통의 꿈이 된다.(p.101)

 

나는 당신의 의견에 동의하지는 않지만, 당신이 그 의견을 말할 권리를 위해 싸우겠다.”라는 볼테르의 말은 민주주의의 핵심인 동시에 과학적 방식의 핵심이기도 하다. 결국 정확히 동일한 시대에 동일한 지역에서 함께 태어난 과학과 민주주의는 동일한 정신을 공유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고요한 합리성, 지성, 대화의 정신이다. 이 정신은 우리 문화를 뒷받침하는 한 축을 맡고 있다.(p.207)

 

과학은 과학 그 자체로서 가르쳐야 한다. 과학은 매력 가득한 인류의 모험인 동시에, 대혼란 속에서 새로운 해결책을 끈질기게 탐구할 때 어지러울 정도의 개념적 도약을 거쳐 마침내 퍼즐 조각들이 맞아떨어지는 번득이는 깨달음을 얻게 되는 일련의 과정이다.(p.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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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도를 기다리며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3
사무엘 베케트 지음, 오증자 옮김 / 민음사 / 200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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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뮈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오증자 옮김, 민음사, 2000, 1952, 176쪽 분량)는 우리가 바라고 감당해가는 일생이 어떠한가 묻는 상징과 은유 가득한 희비극이다. 일생은 하루 하루를 잇대어 나갈 때 만들어지고 각각의 날들은 조바심을 일으키다가도 무료하고 적막하게 숨을 짓누른다. 에스트라공에게는 시간과 추억을 공유하는 의미 있는 타자가 있고 일상을 비롯해 속 깊은 감정까지 교환하지만 소통은 충분하지도 적확하지도 못하다. 말은 조리를 잃고 기억은 불확실하며 육신은 쇠약해간다. 만담처럼 주고받는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의 대화가 갈팡질팡 하는 가운데서도 묵직한 의미를 드러낼 때 독자는 그 문장이 함축하는 뜻을 이미 알고 있다. 각본대로 움직이는 인물과 무대는 오늘을 살아가는 독자와 그 삶의 반경으로 대치된다.

 

사무엘 베케트는 영어와 프랑스어, 두 가지 언어로 작품 활동을 한 이유를 모국어보다 습득해서 배운 언어가 스타일 없이 쓸 수 있어 쉽기 때문”(p.159)이라고 밝힌다. 이는 그 누구도 아닌 사람들의이야기이며 언어의 정수에 도달할 수 있는 이야기”(p.160)에 접근하도록 이끈다. 작가는 고도의 의미를 묻는 연출자 알랭 슈나이더에게 "내가 그걸 알았더라면 작품 속에 썼을 것"이라고 답했다고 하니 독자는 자기만의 고도를 헤아려볼 수 있겠다. 개인적인 고도 역시 시와 때에 따라 달라질 것은 자명하다. 베케트는 고도를 기다리며출간 다음 해, 파리 초연 이후 "광대들에 의해 공연된 파스칼의 명상록"(피가로)이란 평가를 받으면서 명성을 얻는다. 고도를 기다리며는 부조리와 실존주의 사상을 빼어나게 표현한 작품으로 평가받았으며 1961년 보르헤스와 공동으로 국제 출판인상을, 1969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다.

 

2막으로 구성된 희곡 고도를 기다리며는 어느 날 저녁, 나무 한 그루가 서 있는 시골길을 배경으로 한다.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는 긴 시간을 함께 해왔지만 언제라도 떠날 것을 염두에 두고 있으며 동시에 결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으리라, 이미 무용하다는 입장이다. 그들이 기다리는 건 고도. 이 기다림은 유일무이한 가치이고 사명이기에 모든 악조건은 진지한 푸념의 대상은 못되고 단지 지루함을 떨치려는 소소한 시도 중 하나가 지껄이기다. 생각하지 않기 위한 방편으로 침묵 대신 지껄임을 택하고 청각에 의지해 모든 소리를 민감하게 모으기도 한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서성이기도 하고, 심각함을 농담으로 희석하고 영 이치에 맞지 않는 행인들에게 주의를 돌리기도 한다. 포조와 럭키의 관계는 터무니없을 만큼 부조리하다.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가 주목하며 비합리의 근거를 넌지시 건네나 포조의 변은 또 다르다. 포조와 럭키의 2막 재등장은 어떤 의미에서 저놈과 내 처지가 바뀌지 말란 법도 없지.”(p.49)라는 1막의 대사를 상기하게 만든다. 게다가 막이 끝날 때마다 등장하는 어린 소년은 고도가 오지 않으리라는 소식만을 전한다.

 

고도를 기다리며라는 제목에 오래 머문다. 뒤에 생략된 말은 무엇일지 가늠하자니 고도를 기다리며 떠나 보낸 삶”, 고도를 기다리며 채워간 인생, 고도를 기다리며 견딘 시간, 고도를 기다리며 받은 고통, 얻은 홧병 아니 우울까지 이르더니 고도라도 기다릴 수 있어 얼마나 다행이었나. 그렇기에 감사한 인간의 조건, 실존에 닿는다. 태어나서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간격을 고도를 기다리면서 메꾼다. 울고 웃고 화내고 애원하며, 이성과 감정을 두서없이 섞어 다져 넣는다. 그러다 보면 난데 없는 걸작도 만들어내고 원하지 않는 엉망도 쌓으며 부지런히 부산물을 분리수거하고 반복적으로 지쳐 떨어지기도 할 것 같다. 구두를 탓하고 외투를 탓하며 체중을 또는 마른 나뭇가지를 탓하며 졸고 바라고 다시 잠들고 깨는 인생을 책은 너무도 잘 보여준다. 또한 기다린다는 행위가 애초에 주체적일 수 있을까? 이에 주목할 때 디노 부차티의 <타타르인의 사막>이 겹친다. 드로고가 요새를 향해 첫 발을 뗀 9월 어느 아침부터 혼자 마지막 숨을 쉴 때까지, 시간의 돌이킬 수 없는 도주와 삶을 바스러뜨리는 시계추를 숨 막히게 형상화한 작품을 불러낸다.

 

고도는 어떤 모습으로 찾아올지, 이미 스쳐갔는데 못 알아본 것은 아닌지, 착한 사람 눈에만 보이는데 여전히 불순물 과도한 선함이기에 눈에 띨 새라 연기처럼 사라져버렸는지 모를 일이다. 고도는 영적 존재일까, 절대자이며 구원자일까, 꿈과 희망, 행운이고 기회일까, 아니면 일상을 혼란시키고 몰입을 흔드는 유혹자일까, 고대하는 변화이고 성장일까, 탈 매너리즘 또는 부단한 깨어있음일까, 역시 모를 일이고 애쓰고 힘써 알기 원하는 날들의 부피 없는 덧댐이 살기일 것이다.

 

<고도를 기다리며>는 주기적으로 읽어야 할 작품이다. 이런 책은 열 살 이후로 5년 또는 10년 주기로 재독하고 감상을 남기면 어땠을까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누군가 이 사실을 알려줬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어쩌면 알려줬는데 이해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열 살 독자는 이 책을 읽다가 잠이 들지 모른다. 스무 살 독자는 모호하게 반짝이는 빛을 발견할까. 밑줄 부분이 포개질 수도 추가될 수도 있겠고, 지워야할 밑줄도 생길까? 읽을 때마다 감상은 겹치는 면적과 어긋나는 면적이 차이를 보이고 그러다 언제쯤엔 슬프고 눈물 쏟을 나이도 있을 테다.

 

읽을 때마다 다르게 읽힐 작품이다. 간결한 대화는 다양한 감정을 불러내고 주의 깊은 사유로 이끌 것이다. 글로 읽어도 소리로 들어도 좋겠지만 지금 공연 중인 국립 극장의 연극으로 만난다면 벅차오를 것 같다. 가장 기대되는 장면은 물론 후렴구처럼 반복되는 갈 순 없어.- ?- 고도를 기다려야지.- 참 그렇지.와 럭키의 쉴 틈 없는 독백 장면이다. 70여 년 전에 쓰여진 글이 페이지에서 튀어나와 노배우들로 분한 현실 매직을 꼭 직관하고 싶다. 고도를 기다리며는 마지막 페이지에 투명한 도돌이표가 찍힌 듯 다시 첫 페이지를 열게 만들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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